아사히 헤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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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사히 헤이고는 1890년에 태어나 1921년 야스다 젠지로를 암살한 일본의 우익 운동가이다. 군 복무 후 만주 등지에서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귀국하여 사회 운동에 참여했지만 실패했고, 빈민 구제를 위한 기부금 모금에 실패하자 야스다 젠지로를 암살했다. 아사히는 젠지로 암살 후 자결했으며, 그의 장례식은 성대하게 치러지고, 언론에서는 그를 영웅시하여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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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히 헤이고 | |
---|---|
기본 정보 | |
![]() | |
씨명 | 아사히 헤이고 |
후리가나 | 아사히 헤이고 |
출생일 | 1890년 7월 26일 |
출생지 | 일본 사가현후지쓰군우레시노무라 |
사망일 | 1921년 9월 28일 (31세) |
사망지 | 일본 가나가와현나카군오이소마치 |
2. 경력
아사히 헤이고는 1890년 사가현 우레시노에서 태어나 1910년 군에 입대하여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는 등 다양한 경력을 거쳤다. 제대 후에는 만주와 한반도를 떠돌며 대륙 낭인 생활을 하기도 했다. 귀국 후에는 사회 운동에 참여하고 여러 단체 설립을 시도했으나 좌절을 겪었다.
아사히 헤이고의 주요 경력은 다음과 같다:
시기 | 내용 |
---|---|
1910년 | 제18사단 제55연대 제6중대에 입대 |
1914년 | 제1차 세계 대전에 위생병으로 산둥반도에 종군, 칭다오 전투 공로로 훈8등 욱일장 수상[2] |
1916년 | 만주로 건너가 마적 활동, 중국 동북부 및 한반도 전전, 다롄에서 회사 근무 중 해고, 봉천 총영사로부터 퇴거 명령[2] |
1919년 | 귀국 후 가업, 주식 중개업 실패, 규슈 청년당 간부 활동, 니치렌종 다이세키사 입산 후 다시 상경[2] |
1920년 | 『충애 신문』 편집, 노동 호텔 건설 기부금 모금, 평민청년당, 신주 의단 (우익 단체) 설립 시도 좌절[2][4] |
1921년 | 빈민 구제 사업 실패, 야스다 젠지로 암살 후 자결[2] |
1921년 9월 28일, 아사히 헤이고는 야스다 재벌 총수 야스다 젠지로를 암살하고 자신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 1. 초기 생애와 군 복무
1890년 7월 26일, 사가현 우레시노 촌에서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2] 나가사키현 사세보시로 이주하여 성장했다. 아버지는 우레시노에서 양초 가게와 기름 가게를 운영하다가 사세보로 이주하여 제차상으로 성공, 시의원까지 지낸 인물이었다.[2]지역 초등학교를 졸업 후 중학교에 진학했으나, 계모와의 불화 등으로 집을 나와 아버지의 돈으로 방탕한 생활을 했다.[2] 1910년 제18사단 제55연대 제6중대에 입대,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에 위생병으로 산둥반도에 참전했다. 칭다오 전투에서의 공로로 훈8등 욱일장을 받았다.[2]
2. 2. 대륙 낭인 생활
군에서 제대하여 귀국한 후, 도쿄에서 생활하다 마적 박익삼과 알게 되어 1916년 만주로 건너갔다. 그러나 현지 마적단과의 연대가 잘 이루어지지 않아 중국 동북부와 한반도를 전전했다.[2] 1916년 가을, 내전량평의 추천으로 조선은행 봉천 지점장을 통해 다롄의 회사에 취직했으나 해고되었다. 다시 조선으로 건너갔다가 만주로 돌아왔지만, 잦은 품행 불량으로 봉천 총영사로부터 퇴거 명령을 받았다.[2]2. 3. 귀국 후 사회 운동과 좌절
1919년(다이쇼 8년), 실의에 빠져 귀국했다.[3] 본가에서 가업을 돕거나 주식 중개업에 종사했지만 실패했다. 규슈 청년당 간사장인 후쿠다 텐포의 일을 도우며 응원 연설이나 잡지 『재계의 일본』 주간을 맡기도 했다.[2] 오오사코 나오미치 전 육군 대장과 토야마 미쓰루의 소개장을 얻어 니치렌종 묘만사의 혼다 닛세이에게 입교를 청했지만 거절당했고, 친구 오쿠노 누키와 함께 시즈오카현 다이세키사에 입산했으나 1920년(다이쇼 9년) 말 다시 상경했다.[2]봉천 시대에 알게 된 정치가 오우치 쵸조를 통해 일본과 조선의 융합을 위한 포교사가 되려 했으나 실패하고, 고이시카와의 류세이엔 클럽에서 발행하는 『충애 신문』 편집을 2개월 정도 도왔다. 도시 노동자를 위한 노동 호텔 건설 기부금을 시부사와 에이이치나 오쿠라 기하치로 등에게서 모금하여 생활했다.[2][4] 평민청년당, 신주 의단(우익 단체) 등의 설립을 계획했지만 좌절되었고, 직업을 전전하며 사회에 대한 불만을 키워갔다.
2. 4. 야스다 젠지로 암살
1921년(다이쇼 10년), 아사히 헤이고는 빈민 구제 사업을 결심하고 시부사와 에이이치에게 기부금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이에 할복을 시도하여 100엔의 기부금을 얻었으나, 이 사업은 좌절되었다.[2][4]같은 해, 전년 3월 전후 공황으로 주식에서 큰 손실을 본 아사히는 야스다 재벌 총수 야스다 젠지로가 주식 독점으로 2,000만 엔의 이익을 얻었다는 소문을 듣고 암살을 계획했다.[2]
1921년 9월 28일 오전 9시 20분경, 아사히는 가나가와현 나카군 오이소정에 있는 야스다 젠지로의 별저 수락암(寿楽庵)에서 젠지로를 칼로 찔러 살해했다. 직후, 면도칼로 자신의 인후부를 베어 자결했다. 향년 31세, 평생 독신이었다.[5]
아사히는 범행 직전 "악덕 거상 야스다 젠지로는 거대한 부를 쌓았지만 그 부호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 (중략) ...천벌을 가하여 세상의 경계로 삼는다"라는 내용의 유서를 남겼다.[6]
아사히의 장례식은 전국의 노동조합과 지원자들이 참여하여 성대하게 치러졌다. 당시 언론은 아사히를 영웅시했으며,[6] 이 사건은 37일 후 하라 타카시 암살 사건을 유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7]
3. 암살 배경 및 사회적 영향
아사히 헤이고가 야스다 젠지로를 암살한 사건은 당시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언론은 아사히를 영웅시하며 대서특필했고, 그의 장례식에는 수많은 노동자와 지원자들이 몰려들었다.[6] 이 사건은 37일 후 발생한 하라 다카시 암살 사건의 원인 중 하나로 여겨지기도 한다.[7]
야스다 젠지로는 도쿄 대학의 야스다 강당과 히비야 공회당 등에 많은 기부를 했지만, "명성을 얻기 위해 기부하는 것이 아니라, 음덕이어야 한다"며 익명으로 기부했기 때문에 생전에는 이러한 기부 행위가 알려지지 않았다. 이는 아사히의 암살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야스다 강당은 사후에 젠지로를 기리기 위해 일반적으로 야스다 강당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3. 1. 암살 배경
1890년 7월 26일 사가현에서 태어난 아사히 헤이고는 부유한 가정에서 성장했지만, 계모와의 불화로 집을 나와 방탕한 생활을 했다.[2] 1910년 군에 입대하여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 산둥반도에서 위생병으로 복무하며 훈장을 받기도 했다.[2]전역 후 도쿄에서 생활하며 만주로 건너가 대륙 낭인 생활을 했으나, 여러 문제로 1919년 귀국했다.[3] 이후 가업을 돕거나 주식 중개업을 했지만 실패하고, 규슈 청년당 간부의 일을 돕거나 대일본구세단 창설자인 오오사코 나오미치 등의 소개로 종교 활동을 하기도 했다.[2] 그러나 이마저도 여의치 않자 노동 호텔 건설을 위한 기부금을 모으는 등 사회 운동에 관심을 가졌지만, 이 역시 좌절되었다.[2][4]
1921년 당시 전후 공황으로 주식 투자에 실패한 아사히는 야스다 재벌 총수 야스다 젠지로가 주식을 독점하여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는 소문을 듣고 분노했다. 그는 빈민 구제 사업을 명목으로 젠지로에게 기부금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할복을 시도하며 100엔을 얻어내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사업은 실패로 돌아갔고, 아사히는 사회에 대한 불만을 키워갔다.
결국 아사히는 1921년 9월 28일 젠지로의 별장에서 그를 단도로 살해하고 자신도 면도칼로 자살했다. 그의 참간장에는 젠지로의 탐욕과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않음을 비난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당시 언론은 아사히를 영웅시했고,[6] 그의 장례식은 노동조합과 지원자들에 의해 성대하게 치러졌다.
3. 2. 사회적 영향
아사히 헤이고의 야스다 젠지로 암살 사건은 당시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언론은 아사히를 영웅시하며 대서특필했고, 그의 장례식에는 수많은 노동자와 지원자들이 몰려들어 성대하게 치러졌다.[6] 일각에서는 이 사건이 37일 후 발생한 하라 다카시 암살 사건을 유발했다고 보기도 한다.[7]아사히에게 암살된 야스다 젠지로는 도쿄 대학의 야스다 강당과 히비야 공회당 등 많은 기부를 했지만, "명성을 얻기 위해 기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음덕이어야 한다"고 익명으로 기부했기 때문에 생전에는 이러한 기부 행위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이는 아사히의 암살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야스다 강당은 사후에 젠지로를 기리기 위해 일반적으로 야스다 강당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4. 인물됨
유도 초단 실력이었다. 장사였지만, 부드럽고 아름다운 용모를 지녔다고 전해진다.[9] 지인이었던 오오우치 쵸조는 아사히에 대해 "매우 정직하고 열정적인 사람"이었지만 술에 취하면 문제를 일으켜 "폐(가 되는 인물)였다"고 평가했다.[10]
5. 등장 작품
- 영화 《일본 암살 비록》 - 배우: 스가와라 분타
- 영화 《계엄령》 - 배우: 츠지 만초
- 만화 《테러의 계보》
참조
[1]
Kotobank
2022-10-01
[2]
서적
兇漢朝日平吾の素性
https://dl.ndl.go.jp[...]
時事出版社
[3]
서적
コンサイス日本人名辞典 第5版
株式会社三省堂
[4]
서적
大宰相・原敬
https://books.google[...]
PHP研究所
[5]
문서
[6]
문서
[7]
문서
[8]
웹사이트
中島岳志×鈴木邦男~新右翼×リベラル保守~ 思想をめぐる対論:貧困問題から憲法まで(その2)貧困問題と暴力
https://www.magazine[...]
[9]
서적
『黄金王の死』
https://dl.ndl.go.jp[...]
[10]
서적
『黄金王の死』
https://dl.ndl.go.jp[...]
[11]
서적
伊藤痴遊全集 続 第9巻
平凡社
[12]
서적
兇漢朝日平吾の素性
http://dl.ndl.go.jp/[...]
時事出版社
[13]
서적
大宰相・原敬
https://books.google[...]
PHP研究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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