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트 폰 코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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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우구스트 폰 코체부(August von Kotzebue, 1761-1819)는 독일의 극작가이자 소설가로, 법학을 공부하고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러시아에서 재판관, 귀족, 극장 감독 등을 역임했다. 그는 1790년대에 희극 작품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200편이 넘는 희곡을 썼다. 1819년, 민족주의 성향의 대학생 카를 루트비히 잔트에게 암살당했는데, 이 사건은 카를스바트 결의로 이어져 독일 내 민족주의와 자유주의 운동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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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트 폰 코체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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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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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아우구스트 프리드리히 페르디난트 폰 코체부 |
출생일 | 1761년 5월 3일 |
출생지 | 바이마르, 작센-바이마르 공국, 신성 로마 제국 (현재 튀링겐주, 독일) |
사망일 | 1819년 3월 23일 |
사망지 | 만하임, 바덴 대공국, 독일 연방 (현재 바덴뷔르템베르크주, 독일) |
묘소 | 만하임 |
직업 | 작가 |
언어 | 독일어 |
모교 | 뒤스부르크 대학교 |
국적 | 작센-바이마르 공국 러시아 제국 |
러시아 이름 | |
러시아어 이름 | Евстафий Леонтьевич Коцебу |
로마자 표기 | Yevstafiy Leontyevich Kotsebu |
2. 생애와 작품 세계
아우구스트 폰 코체부는 200편이 넘는 희곡을 쓴 다작 작가로, 독일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5] 그의 성공은 문학적, 시적 재능보다는 상황을 효과적으로 만드는 능력 덕분이었다.[6] 특히 희극에서 두각을 나타냈는데, 대표작으로는 《사냥덫(Der Wildfang, 1798)》, 《소도시의 독일인들(Die deutschen Kleinstädter, 1803)》 등이 있다. 그의 희곡은 생전에 《샤우스필레》(5권, 1797), 《노이에 샤우스필레》(23권, 1798–1820) 등의 모음집으로 출판되었으며, 사후에도 여러 차례 전집 형태로 출간되었다.
코체부는 희곡 외에도 역사물 및 소설을 남겼으나, 대부분 일방적이고 편견적이라는 평가를 받아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1] 1812년 베토벤은 코체부에게 아틸라에 관한 오페라 대본을 쓰도록 제안했지만, 결국 쓰이지 못했다. 하지만 베토벤은 코체부의 두 편의 연극, ''아테네의 폐허''(베토벤의 작품 113)와 ''슈테판 왕''(작품 117)에 부수 음악을 제작했다.
2. 1. 초기 생애
1761년 바이마르에서 태어나 예나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1780년 변호사가 되었다.[1] 1783년 당시 러시아의 레발(Reval, 현 에스토니아 탈린)의 고등법원 재판관으로 임명되었고 러시아 고위 장교의 딸과 결혼하였다.[1] 1785년에는 에스토니아 지방의 귀족으로 봉해지면서 수석 치안판사가 되었다.[1]레발에서 소설 《나의 아버지 이야기 Geschichte meines Vaters (1788)》, 희곡 《아델하이트폰 불핑겐 Adelheid von Wulfingen (1789)》, 《인간증오와 걱정 Menschenhass und Reue (1790)》, 《영국의 인도인들 Die Indianer in England (1790)》로 좋은 평을 받았다.[2] 그는 특히 희극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2. 2. 초기 작품 활동 (러시아 시기)
1783년 당시 러시아의 레발의 고등법원 재판관으로 임명되었고 러시아 고위 장교의 딸과 결혼하였다.[1] 1785년에는 에스토니아 총독부의 귀족으로 봉해지면서 수석 치안판사가 되었다. 레발에서 소설 《나의 아버지 이야기》(Geschichte meines Vaters, 1788) 및 희곡 《아델하이트 폰 불핑겐》(Adelheid von Wulfingen, 1789), 《인간증오와 걱정》(Menschenhass und Reue, 1790), 《영국의 인도인들》(Die Indianer in England, 1790)로 좋은 평을 받았다.[2]그러나 이러한 작품의 좋은 평판은 1790년에 크니게의 이름으로 표지에 등장한 논쟁적인 희극 풍자극 《쇠로 된 이마를 가진 박사 바르트》(Doktor Bahrdt mit der eisernen Stirn)에 의해 거의 파괴되었다.[2] 요한 게오르크 리터 폰 짐머만과 계몽주의의 베를린 파 지도자들 사이의 갈등에 대한 응답으로 쓰여진 이 작품은 짐머만의 각 반대자를 특정한 성적 도착과 연결시켰다. 코체부는 경찰이 이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했을 때에도 자신이 저자임을 부인했다. 이것은 짐머만과 크니게 모두를 소외시켰고, 한때 그의 동맹자였으며, 코체부에게는 결코 떨쳐버릴 수 없는 부정직함과 음란함에 대한 평판을 안겨주었다.[2]
첫째 부인의 사망으로 러시아의 공직을 은퇴하고 잠깐 동안 파리와 만하임에 살다가 1795년 레발 근처의 영지에서 작품활동에 전념하였다.
2. 3. 빈 극장 시기 및 갈등
1798년 빈 극장의 극작가로 부임했으나 배우들과의 불화로 곧 사임하였다.[1] 결국 고향 바이마르로 돌아갔으나 괴테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낭만주의를 공개적으로 비판하여 자리를 잡지 못했다.[1]2. 4. 러시아 복귀와 시베리아 유배
러시아로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러시아로 향하던 중, 코체부는 별다른 이유 없이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강제 추방당했다.[3] 그러나 파벨 1세의 허영심을 자극하는 희곡을 써서 복직되었고, 리보니아의 영지를 하사받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독일 극장 단장으로 취임했다.[3] 그는 자서전 《내 인생의 가장 이상한 해》(''Das merkwürdigste Jahr meines Lebens'') (1800)에서 이 시기를 기록했다.2. 5. 독일 재복귀와 반(反)나폴레옹 활동
파벨 1세가 죽자 코체부는 다시 바이마르로 돌아왔으나, 독일 문단계에서 자리를 잡지 못했다.[3] 1806년 나폴레옹의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 승리 이후, 다시 러시아로 돌아와 에스토니아의 자기 영지에서 나폴레옹에 반대하는 풍자글을 많이 썼다.[3] 그는 에스토니아 예르레프에 있는 자신의 영지에서 ''디 비네''(Die Biene|디 비네de, 꿀벌)와 ''디 그릴레''(Die Grille|디 그릴레de, 귀뚜라미)에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대한 많은 풍자 기사를 썼다.[3] 1816년까지 러시아 정부의 고문으로 일하였다.[3]2. 6. 러시아 첩자 활동 의혹 및 독일 내 갈등
1817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외무부의 지령을 받고 독일에 돌아온 코체부는 일종의 러시아 첩자 역할을 수행했다는 의혹을 받았다.[3] 그는 바이마르에서 주간신문을 발간하며 자유와 민족주의를 주장하는 독일인들을 신랄하게 비난하는 글을 써서 진보주의자들의 반감을 샀다.[1]그는 역사물 및 소설도 남겼으나, 대부분 일방적이고 편견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1]
2. 7. 작품 세계
코체부는 200편이 넘는 희곡을 쓴 다작 작가로, 독일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5] 그의 성공은 뛰어난 문학적, 시적 재능보다는 효과적인 상황 설정 능력에서 비롯되었다.[6] 특히 희극에서 두각을 보였으며, 대표작으로는 《사냥덫(Der Wildfang, 1798)》, 《소도시의 독일인들(Die deutschen Kleinstädter, 1803)》 등이 있다. 이 작품들은 《인간 혐오와 후회(Menschenhass und Reue, 영국에서는 《낯선 사람》으로 알려짐)》와 같은 멜로드라마가 잊힌 뒤에도 오랫동안 독일 무대에 올려졌다.《인간 혐오와 후회》의 영어 버전인 《낯선 사람》은 1798년 영국 초연 이후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이는 19세기 초 75년간 유럽과 미국 무대를 지배한 멜로드라마 장르 발전의 신호탄으로 평가받는다.[5][6]
코체부의 희곡은 생전에 《샤우스필레》(5권, 1797), 《노이에 샤우스필레》(23권, 1798–1820) 등의 모음집으로 출판되었으며, 사후에도 여러 차례 전집 형태로 출간되었다.
3. 암살 사건
1819년 3월 23일, 독일의 대학생 카를 루트비히 잔트는 만하임에서 코체부를 단도로 살해했다.[4] 코체부는 메테르니히 체제 반동세력의 대표적인 작가로 러시아의 스파이라는 의심을 받았으며, 잔트는 코체부를 "국가의 반역자, 민중의 사기꾼"으로 불렀다.
사건 당일 코체부의 집을 방문한 잔트는 그와 몇 마디 주고받다가 "여기, 조국의 반역자!"라고 외치며 단도로 가슴을 수차례 찔렀다. 잔트는 자해를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체포되었으며, 이후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이 사건은 독일 민족주의자들에게 잔트를 순교자로 만들었으나, 메테르니히 주도하의 보수반동세력은 카를스바트 결의를 통해 억압 정책을 실행하는 계기로 삼았다.
3. 1. 암살 배경
1819년 3월 23일, 독일의 대학생 카를 루트비히 잔트(Karl Ludwig Sand, 1795-1820)가 만하임에서 코체부를 단도로 살해했다.[4]당시 코체부는 메테르니히 체제 반동세력의 대표적인 작가로 러시아의 스파이라는 의심을 받았다. 민족과 민주주의에 심취했던 당시 젊은 대학생들 사이에서 수많은 학생회(Burschenschaft)가 조직되었는데 잔트도 그 일원이었다. 잔트는 그의 일기에서 코체부를 살해할 의도를 드러내었고 "국가의 반역자, 민중의 사기꾼"으로 부르며 학생회의 적으로 간주하였다. 사건 당일 코체부의 집을 방문한 잔트는 그와 몇 마디 주고받다가 "여기, 조국의 반역자!"라고 외치며 단도로 가슴을 수차례 찔러 살해하였다. 그 후 잔트는 자해를 하며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병원에 실려갔으며 체포되었고 만하임 법정은 사형을 언도하고 1820년 5월 5일 잔트를 처형하였다.
코체부 암살사건은 잔트를 독일 민족주의자들의 순교자로 만들었으나 메테르니히 주도하의 보수반동세력은 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나온 카를스바트 결의(1819)에서 민족, 민주주의자들의 추방, 언론, 출판의 검열 제도, 학생회와 체육협회의 금지 같은 억압 정책을 실행하는 계기가 되었다.
3. 2. 암살 실행 및 잔트의 최후
1819년 3월 23일, 독일의 대학생 카를 루트비히 잔트가 만하임에서 코체부를 단도로 살해했다.[4] 당시 코체부는 메테르니히 체제 반동세력의 대표적인 작가로 러시아의 스파이라는 의심을 받았다. 민족과 민주주의에 심취했던 당시 젊은 대학생들 사이에서는 학생회(Burschenschaft)가 많이 조직되었는데, 잔트도 그 일원이었다. 잔트는 그의 일기에서 코체부를 살해할 의도를 드러냈고, 코체부를 "국가의 반역자, 민중의 사기꾼"으로 부르며 학생회의 적으로 간주하였다. 사건 당일 코체부의 집을 방문한 잔트는 그와 몇 마디 주고받다가 "여기, 조국의 반역자!"라고 외치며 단도로 가슴을 수차례 찔러 살해하였다.그 후 잔트는 자해를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병원에 실려갔으며 체포되었다. 만하임 법정은 잔트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1820년 5월 5일 잔트는 처형되었다.
3. 3. 암살 사건의 영향: 카를스바트 결의
카를 루트비히 잔트가 아우구스트 폰 코체부를 암살한 사건은 독일 민족주의자들에게 잔트를 순교자로 만들었다. 그러나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가 주도하는 보수 반동 세력은 이를 빌미로 카를스바트 결의(1819)를 통해 억압적인 정책을 시행했다. 이 결의에는 민족주의자와 민주주의자 추방, 언론과 출판에 대한 검열, 학생회(Burschenschaft)와 체육협회 금지 등의 내용이 포함되었다.[4] 이는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을 저해하는 보수 세력의 탄압과 유사한 측면을 보인다.4. 유산
코체부는 18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그중에는 탐험가 오토 폰 코체부도 있었다. 에스토니아 탈린의 코체부 거리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베토벤은 코체부의 희곡 《아테네의 폐허》(베토벤의 작품 113)와 《슈테판 왕》(작품 117)에 부수 음악을 작곡했다.[5][6] 제인 오스틴의 소설 《맨스필드 파크》에는 코체부의 희곡을 각색한 버전이 등장한다.
참조
[1]
서적
Die deutsche Literatur zwischen Französischer Revolution und Restauration/ Teil 1 Geschichte der deutschen Literatur von den Anfängen bis zur Gegenwart
Beck
2000
[2]
서적
German Nationalism and Indian Political Thought: The Influence of Ancient Indian Philosophy on the German Romantics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20-01-22
[3]
논문
What Killed August von Kotzebue? The Temptations of Virtue and the Political Theology German Nationalism, 1789–1819
2000-12
[4]
서적
Celebrated Crimes
Wildside Classics
[5]
서적
English Melodrama
Herbert James
1965
[6]
서적
Melodrama Unveiled: American Theater and Culture, 1800-1850
https://archive.org/[...]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68
[7]
간행물
"It is about Lovers' Vows": Kotzebue, Inchbald, and the Players of Mansfield Park
https://jasna.org/pe[...]
2021-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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