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누스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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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우누스 원정은 1919년 핀란드가 동카리알라 지역의 아우누스(Aunus)를 점령하기 위해 시도한 군사 작전이다. 핀란드 백위대 사령관 만네르헤임은 동카리알라 해방을 위해 칼집 선언을 했으며, 1918년과 1919년 사이 레폴라와 포라얘르비 지역의 핀란드 합병을 추진했다. 1919년 4월 핀란드군은 로데이노예폴레, 페트로자보츠크, 무르만스크 철도를 목표로 진격했으나, 병력 부족과 카리알라 주민의 미온적인 태도로 인해 실패했다. 1920년 타르투 조약으로 레폴라와 포라얘르비는 소련에 귀속되었고, 이에 반발한 레폴라 경찰서장이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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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누스 원정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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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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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 아우누스 원정 (Aunus expedition) |
현지 명칭 | Aunuksen retkikunta (핀란드어) |
관련 전쟁 | 혈족 전쟁 |
전투 정보 | |
기간 | 1919년 4월 21일 – 1919년 9월 18일 |
장소 | 아우누스 |
결과 | 볼셰비키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핀란드 의용군 |
교전국 2 | 러시아 SFSR |
지휘관 | |
교전국 1 지휘관 | 아르네 시흐보 대령 |
교전국 2 지휘관 | 레프 트로츠키 (국방인민위원) |
병력 규모 | |
교전국 1 병력 | 2,500명 - 2,700명 |
교전국 2 병력 | 약 20,000명 |
사상자 | |
교전국 1 사상자 | 330-400명 사망 |
교전국 2 사상자 | 약 1,000명 사망 |
2. 배경
1918년 핀란드 내전 이후, 핀란드는 동카리알라 지역에 대한 관심을 높였다. 만네르헤임은 칼집 선언을 통해 동카리알라를 러시아로부터 해방시키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페차모와 백카리알라 합병 시도는 실패했지만, 레폴라와 포라얘르비는 핀란드 합병 투표를 통해 핀란드에 합병되었다. 1919년, 만네르헤임은 서방 연합국과 러시아 백군에게 핀란드의 상트페테르부르크 공격 의사를 밝혔고, 군나르 폰 헤르첸을 대장으로 하는 아우누스 원정이 계획되었다.
2. 1. 핀란드의 동카리알라 병합 시도
1918년 2월, 핀란드 백위대 사령관 만네르헤임은 동카리알라를 러시아로부터 해방시키기 전까지 칼을 칼집에 넣지 않겠다는 "칼집 선언"을 발표했다. 동카리알라는 역사적으로 스웨덴령 핀란드나 핀란드 대공국의 일부였던 적이 없었으나, 핀란드 내전이 끝난 뒤 핀란드에 합병시키는 것에 관한 논의가 공론화되었다.1918년 초, 페차모와 백카리알라 합병 시도(백카리알라 원정)는 카리알라 주민들의 소극적인 태도 등으로 실패했다. 이후 영국군이 백카리알라를 점령했다.
1918년 여름, 핀란드 정부는 백카리알라 지역, 특히 레폴라 지역으로부터 핀란드에 합병되고 싶다는 요청을 많이 받았다. 레폴라에서는 핀란드와의 합병 투표가 진행되었고, 핀란드 육군은 1918년 가을 레폴라를 점거했다. 1919년 1월, 소규모 의용병들이 포라얘르비로 원정을 갔지만 볼셰비키군에게 격퇴되었다. 포라얘르비도 1월 7일 투표를 통해 핀란드에 합병되는 것을 결정했다.
1919년 2월, 만네르헤임은 서방 연합국과 러시아 백군에게 핀란드가 충분한 물질적, 정신적 지원을 받는다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볼셰비키들을 공격할 의사가 있음을 분명히 밝혔다. 동시에 아우누스 지역 원정이 계획되었고, 군나르 폰 헤르첸이 원정대장으로 임명되었다. 헤르첸은 카리알라 주민들이 협조한다면 핀란드 의용병 1천 명으로 원정을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만네르헤임은 계획을 승인했지만, 실행에 옮기기 전에 영국의 승인도 받을 것을 요구했다.
2. 2. 동카리알라의 핀란드 합병 요청
1918년 여름, 핀란드 정부는 동카리알라로부터 핀란드에 합병해 달라는 다양한 요청을 받았다. 특히 레폴라 지역에서 그러한 요청이 적극적이어서, 이 지역에서는 핀란드와의 합병 투표까지 진행되었다. 핀란드 육군은 1918년 가을 레폴라를 점거했다. 1919년 1월, 소규모 의용병들이 포라얘르비로 원정을 갔지만 곧 볼셰비키군에게 격퇴되었다. 포라얘르비 또한 1월 7일 투표를 통해 핀란드에 합병되는 것을 결정했다.2. 3. 원정 계획 수립
1919년 2월, 만네르헤임은 서방 연합국과 러시아 백군에게 핀란드가 충분한 지원을 받는다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볼셰비키들을 공격할 의사가 있음을 밝혔다. 동시에 아우누스 지역에 대한 원정이 계획되었고, 군나르 폰 헤르첸 엽병소령이 원정대장으로 임명되었다. 헤르첸 소령은 카리알라 주민들이 협조한다면 핀란드 의용병 1천 명으로 원정을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만네르헤임은 이 계획을 승인했지만, 실행에 옮기기 전에 영국의 승인도 받을 것을 요구했다. 1918년 5월 15일, 올로네츠 남카리알라 정부가 수립될 예정이었다.3. 원정 진행
1919년 4월 21일, 핀란드 원정대가 국경을 넘어 군사 작전을 개시했다. 원정대는 로데이노예폴레, 페트로자보츠크, 무르만스크 철도 점령을 목표로 삼았다. 초기에는 일부 지역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지만, 병력 부족과 볼셰비키의 반격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핀란드군은 카리알라 주민들의 지원을 기대했으나, 참여는 저조했고 사기도 낮았다. 결국 핀란드군은 핀란드 본토로 후퇴해야 했다.
3. 1. 핀란드군의 초기 공세
1919년 4월 21일, 핀란드 원정대가 국경을 넘어 로데이노예폴레, 페트로자보츠크, 무르만스크 철도 점령을 목표로 진격했다. 원정대는 총 1,000명의 병력을 3개 그룹으로 나누어 진격했다. 남부 병력은 3일 만에 로데이노예폴레에 도달했으나 볼셰비키 군에 밀려 툴로스 강 너머로 후퇴했다. 북부 병력은 프래새를 함락시켰다. 병력 부족으로 2,000명의 의용병이 추가 모집되었고, 만네르헤임은 아르네 시흐보를 후발 원정대장으로 임명했다.파보 탈벨라 소령의 병력이 6월 20일 페트로자보츠크를 공격했지만, 도시 코앞에서 러시아 적군 및 핀란드 적위대에게 패배했다. 무르만스크 철도를 따라 이동하던 영국군이 근처에 있었지만, 핀란드군을 지원하지 않았다.
핀란드군은 카리알라 주민들이 원정대에 의용병으로 합류하기를 기대했으나, 모인 의용병은 적었고 사기도 낮았다.
3. 2. 병력 부족과 증원
1919년 4월 21일, 핀란드 원정대가 국경을 넘어 로데이노예폴레, 페트로자보츠크, 무르만스크 철도를 목표로 진격했다. 원정대는 3개 병력으로 나뉘어 총 1천 명으로 구성되었다. 남부 병력은 3일 만에 로데이노예폴레에 닿았지만 볼셰비키군의 저항에 밀려 툴로스 강 너머로 후퇴했고, 북부 병력은 프래새를 함락시켰다. 이 시점에서 원정 목표를 달성하기에는 병력이 부족하다는 것이 명백해졌다.이에 따라 2000명의 의용병이 추가로 모집되었고, 만네르헤임은 아르네 시흐보를 후발 원정대장으로 임명했다. 1919년 4월 23일 올로네츠 점령 이후, 남카렐리야의 올로네츠 정부는 올로네츠 임시 관리 정부로 개칭되었다.
3. 3. 페트로자보츠크 공격 실패
1919년 6월 20일, 탈벨라 소령의 병력이 페트로자보츠크를 공격했으나 도시 바로 코앞에서 러시아 적군 및 핀란드 적위대에게 패배했다. 근처에 무르만스크 철도를 따라 움직이던 영국군이 있었지만 핀란드군을 돕지 않았다.3. 4. 카리알라 주민의 비협조
핀란드군은 카렐리아 주민들이 원정대에 의용병으로 합류할 것을 기대했지만, 모인 의용병은 너무 적었고 그나마도 사기가 너무 낮았다.3. 5. 볼셰비키의 반격
이제 볼셰비키에게 승기가 넘어갔다. 1919년 6월 26일, 상트페테르부르크 적군 장교학교의 핀란드인 600명 이상이 라도가호를 건너 핀란드 국경 너머 비텔레에 상륙했다. 이로 인해 남부 병력은 극심한 피해를 입고 핀란드 본토로 후퇴해야 했으며, 탈벨라의 병력 역시 핀란드 본토로 후퇴했다.4. 결과
1918년 레폴라 교회가 핀란드 합류를 선언한 데 이어, 1919년 6월 6일 포라얘르비 교회도 핀란드에 합류하기를 원한다고 선언했다. 이에 핀란드군이 이 지역들을 점령하기 위해 이동했다. 그러나 타르투 조약으로 인해 이 지역들은 소련 측에 남게 되었다.
4. 1. 제한적 성과
이 원정으로 레폴라와 포라얘르비 두 곳이 핀란드에 합병되기로 한 것 뿐이었다. 이윽고 핀란드 육군 정규군이 두 마을에 진주했다. 1920년 타르투 조약으로 핀란드와 소련은 상호 국경을 확정했는데, 이때 레폴라와 포라얘르비는 소련 쪽에 넘겨졌고 진주해 있던 핀란드군은 1921년 2월 14일 물러갔다. 레폴라 경찰서장 보비 시벤(Bobi Sivén)은 이 결정에 항의하며 권총자살했다.4. 2. 타르투 조약과 영토 문제
타르투 조약으로 핀란드와 소련은 국경을 확정했으나, 레폴라와 포라얘르비는 소련에 귀속되었다. 핀란드군은 1921년 2월 14일에 철수했다. 레폴라 경찰서장 보비 시벤(Bobi Sivén)은 이 결정에 항의하여 권총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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