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의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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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일랜드의 군주는 아일랜드 섬의 역사에서 다양한 시기를 거치며 존재해 왔다. 게일 시대에는 여러 왕국들이 존재했으며, 지고왕이 명목상 섬 전체를 다스렸지만 실질적인 통치력은 미미했다. 1171년 노르만족의 침략 이후 잉글랜드 왕이 아일랜드 영주를 겸하게 되었고, 이후 잉글랜드, 스코틀랜드와의 통합을 거치며 아일랜드 왕국은 잉글랜드 국왕이 겸임하는 형태로 존속했다. 1922년 아일랜드 자유국이 수립되면서 영국 군주가 아일랜드 자유국의 국가원수가 되었으나, 1949년 아일랜드 공화국 선포와 함께 군주제는 폐지되었다. 현재 북아일랜드는 영국의 일부로, 찰스 3세가 국왕이다. 20세기 초 군주제 재건 시도가 있었으나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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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의 군주 | |
---|---|
지도 정보 | |
개요 | |
국가 형태 | 군주제 |
국가 원수 | 군주 |
군주 | 아일랜드 군주 |
마지막 군주 | 에드워드 8세 |
정부 형태 | 아일랜드 왕국 |
역사적 배경 | |
역사 | 아일랜드의 군주는 아일랜드 섬의 다양한 국가와 영토에 걸쳐 수세기에 걸쳐 발전해 옴. 1171년 아일랜드 영주 작위가 생성되었고, 이는 1542년에 아일랜드 왕국으로 바뀌었음. 아일랜드 왕국은 1800년 대영 제국에 합쳐져 1922년 아일랜드 자유국이 창설될 때까지 존속함. 1949년 아일랜드는 공화국으로 선언되었고, 왕의 기능은 아일랜드 대통령에게 이양되었음. |
왕관의 변화 | 아일랜드 왕국은 한때 잉글랜드 왕국과 개인적 연합을 이루었음. 1800년 연합법에 따라 아일랜드 왕국은 대영 제국의 일부가 됨. 1922년 아일랜드 자유국이 설립되었고, 영국의 군주가 국가 원수로 유지되었음. 1949년 아일랜드가 공화국으로 선포되면서 군주제가 완전히 폐지됨. |
통치권 | |
통치자 | 군주 |
왕조 | 스코틀랜드 왕가 (주로) 플랜태저넷 왕가 튜더 왕가 스튜어트 왕가 하노버 왕가 작센코부르크고타 왕가 윈저 왕가 |
역할 및 권한 | |
역할 | 국가 원수 의회의 일원 |
권한 | 국회 소집 및 해산 법률에 대한 왕실 동의 아일랜드 정부의 수장 임명 외국과의 조약 체결 명예 훈장 수여 사법 관행 |
기타 | |
현재 | 군주제가 폐지되었고, 아일랜드 대통령이 국가 원수임. |
관련 법 | 아일랜드 헌법 |
2. 게일 시대의 아일랜드 왕국 ( ~ 1171년)
게일 아일랜드는 여러 개의 주요 왕국과 그 아래 수많은 소왕국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정치 체제를 가지고 있었다. 주요 왕국은 쿠어거(Cuaighe|쿠어거gle 또는 Cóicide|코이커더gle, '5분의 1'이라는 의미)라 불렸으며, 그 수는 시대에 따라 5개에서 9개 사이를 오갔다. 대표적인 쿠어거로는 알레흐, 아르길라, 코나크타, 라긴, 미데, 오스라거, 무운, 투어우완, 울라 등이 있었다. 이들 왕국은 게일 시대 내내 서로 경쟁하며 영토의 크기가 끊임없이 변했고, 때로는 완전히 사라지거나 다른 왕국에 흡수되기도 했다. 각 쿠어거 내부에는 투어허(Tuatha|투어허gle, '민족 국가'라는 의미)라고 불리는 더 작은 소왕국들이 존재했다.
각 쿠어거의 왕은 리(Rí|리gle)라고 불렸고, 이들 왕 위에 아일랜드섬 전체의 명목상 지배자인 지고왕 아르드리(Ard Rí|아르드리gle)가 존재했다. 하지만 아르드리의 역할은 대체로 형식적인 것에 그쳤으며, 게일 시대 아일랜드는 단일국가로서 통치된 적이 거의 없었다.
오늘날 아일랜드의 4개 주요 지방인 코노트, 얼스터, 렌스터, 먼스터의 이름은 고대 왕국인 코나크타, 울라, 라긴, 무운에서 유래했다.
2. 1. 주요 지방 왕국 (쿠어거)
게일 아일랜드는 최소 5개에서 최대 9개의 주요 왕국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이 왕국들을 쿠어거(Cuaighegle 또는 Cóicidegle, '5분의 1'이라는 의미)라고 불렀다. 각 쿠어거는 내부적으로 수많은 소왕국들로 나뉘었는데, 이 소왕국들을 투어허(Tuathagle, '민족 국가'라는 의미)라고 했다. 주요 쿠어거로는 알레흐, 아르길라, 코나크타, 라긴, 미데, 오스라거, 무운, 투어우완, 울라 등이 있었다.이들 쿠어거는 게일 아일랜드 시대가 끝날 때까지 서로 경쟁하며 영토의 크기가 계속 변했고, 때로는 완전히 사라지거나 다른 쿠어거에 흡수되기도 했으며, 새로운 왕국으로 분리되기도 했다. 각 쿠어거의 왕은 리(Rígle)라고 불렸고, 이들 왕 위에 아일랜드섬 전체의 명목상 지배자인 지고왕 아르드리(Ard Rígle)가 존재했다. 하지만 지고왕의 역할은 대체로 형식적인 것에 그쳤으며, 게일 시대 아일랜드는 단일국가로서 통치된 적이 거의 없었다.
쿠어거 중 코나크타, 울라, 라긴, 무운의 이름은 오늘날 아일랜드의 4개 주요 지방인 코노트, 얼스터, 렌스터, 먼스터의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 주요 아일랜드 왕국과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왕국 | 설명 및 특징 | 존속 기간 (추정) |
---|---|---|
알레흐 (Ailech) | 북부 지역. 12세기에 티르 오간과 티르 코날로 분리됨. | 5세기 ~ 1185년 |
아르길라 (Airgíalla) | ? ~ 1590년 | |
코나크타 (Connacht) | 서부 지역. 샤논 강 서쪽 지역(투어우완 제외)을 지배. | 406년 ~ 1474년 |
라긴 (Leinster) | 동부 지역. 1632년 왕가가 단절됨. | 634년 ~ 1603년/1632년 (사실상) |
미데 (Mide) | 중부 지역. 11세기에 코나크타에 흡수됨. | 8세기 ~ 12세기 |
오스라거 (Osraige) | 남동부 지역. 6세기에서 9세기 사이에 라긴 서부와 먼스터 동부 지역이 독립 국가로 존재했음. | 12세기까지 |
무운 (Munster) | 남서부 지역. 선사 시대 말기부터 존재한 여러 왕국들을 통칭. | 4세기 ~ 1138년/1194년 (왕위 계승자) |
토몬드 (Thomond) | 무운에서 분리된 왕국. | 1118년 ~ 1543년 |
울라 (Ulster) | 북동부 지역. 반강 동쪽 지역을 지배. | 5세기 ~ 12세기 |
2. 2. 아르드리 (지고왕)
게일 아일랜드는 최소 5개에서 최대 9개의 주요 왕국, 즉 쿠어거(Cuaighega)로 구성되었으며, 각 쿠어거는 다시 여러 개의 작은 소왕국인 투어허(Tuathaga)로 나뉘었다. 주요 쿠어거로는 아일레흐, 아르길라, 코나크타, 라긴, 미데, 오스라거, 무운, 투어우완 등이 있었다. 이들 왕국은 게일 시대 내내 서로 경쟁하며 영토를 확장하거나 축소했고, 때로는 완전히 사라지거나 다른 왕국에 흡수되기도 했다. 각 쿠어거의 왕은 리(Ríga)라 불렸고, 이들 위에 명목상 아일랜드 섬 전체의 지배자인 아르드리(지고왕, Ard Ríga)가 존재했다. 그러나 아르드리의 역할은 대체로 형식적이었으며, 게일 아일랜드는 단일국가로 통치된 적이 없었다.오늘날 아일랜드의 4개 주인 코노트, 얼스터, 렌스터, 먼스터는 각각 고대 왕국 코나크타, 울라, 라긴, 무운에서 유래했다. 주요 아일랜드 왕국과 그 왕들의 대략적인 존속 기간은 다음과 같다.
- 알레흐 국왕 (5세기 ~ 1185년) - 12세기 티르 오간과 티르 코날로 분리됨
- 아르길라 국왕 (? ~ 1590년)
- 코나크타 국왕 (406년 ~ 1474년) - 투어우완을 제외한 샤논 강 서쪽 지역 지배
- 라긴 국왕 (634년 ~ 1603년/1632년)
- 미데 국왕 (8세기 ~ 12세기) - 11세기 코나크타에 흡수됨
- 오스라거 국왕 (6세기 ~ 12세기) - 라긴 서부와 먼스터 동부 지역
- 무운 국왕 (4세기 ~ 1138년/1194년) - 남서부 여러 왕국 총칭
- 투어우완 국왕 (1118년 ~ 1543년)
- 울라 국왕 (5세기 ~ 12세기) - 반강 동쪽 지역 지배
역사가 메어 허버트는 8세기 후반부터 이미 주요 왕들이 작은 정치 단위를 희생시키며 권력을 강화하고 있었다고 지적한다. 862년 말 세크날 막 말러 루어나드가 '아일랜드 전체의 왕'(ri hErenn uilega)이라는 칭호를 사용한 것에 대해 허버트는 "9세기에 '아일랜드의 왕'(ri Erennga) 칭호 사용은 국가적 왕권과 영토 기반의 아일랜드 왕국을 정의하는 첫 단계였지만, 이러한 변화는 11세기 우이 네일(Uí Néill) 왕조의 영향력이 약화된 후에야 본격화되었다"고 분석했다. 이는 왕권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형성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 세크날 막 말러 루어나드 이후의 아르드리들의 권력은 개인적인 성격이 강했으며, 그들이 사망하면 쉽게 흔들렸다. 846년부터 1022년까지, 그리고 1042년부터 1166년까지 여러 왕들이 아일랜드 전체에 대한 지배력을 확립하려 시도했으나 성공 정도는 다양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아르드리들은 다음과 같다. (신화적 인물을 포함한 전체 목록은 아르드리 목록 참조)
이름 | 재위 기간 |
---|---|
말 세크날 막 말러 루어나드 | 846년–860년 |
아드 핀들라흐 | 861년–876년 |
플란 신나 | 877년–914년 |
니얼 글룬두브 | 915년–917년 |
돈카드 돈 | 918년–942년 |
콩갈라크 크노그바 | 943년–954년 |
돔날 우어 넬 | 955년–978년 |
말 세크날 막 돔날 | 979년–1002년; 1014년–1022년 |
브리안 보루마 | 1002년–1014년 |
돈카드 막 브리안 | 1064년 사망 |
디어르마트 막 말 너 므보 | 1072년 사망 |
테르델바크 우어 브리안 | 1086년 사망 |
미르케르타크 우어 브리안 | 1119년 사망 |
돔날 우어 로클란 | 1121년 사망 |
티르델바크 우어 콘코바르 | 약 1119년–1156년 |
미르케르타크 막 로클란 | 약 1156년–1166년 |
루어드리 우어 콘코바르 | 1166년–1198년 |
브리안 우어 넬이 1258년-1260년 사이 아일랜드 지고왕위를 주장함.
1166년 미르케르타크 막 로클란이 사망하자, 코나크타의 왕 루어드리 우어 콘코바르는 별다른 저항 없이 더블린으로 가서 아일랜드의 왕으로 즉위했다. 그는 아일랜드 역사상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실질적인 단일 국왕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인물이었으며, 동시에 마지막 게일족 아르드리였다. 그의 통치 시기인 1169년부터 1171년 사이에 일어난 노르만족의 침략은 고대 아일랜드 왕권을 무너뜨리고 영국 국왕이 아일랜드 정치에 직접 개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루어드리는 즉위 후 라긴을 정복하여 왕 디어마이트 막 무르카다를 추방하고, 다른 주요 왕과 영주들로부터 복종의 증표와 인질을 받았다. 그는 고대 왕의 특권인 오에나흐 타일테안(Óenach Tailteannga) 축제를 열고 자선 활동을 펼쳤으나, 그의 정치적 중심지는 여전히 고향인 코노트 중부(현재의 골웨이주)에 머물렀다. 당시 아일랜드의 실질적 수도였던 더블린은 루어드리에게 항복한 아스칼 막 라그나일이 다스리고 있었다.
1169년 5월, 추방되었던 막 무르카다가 앵글로-노르만족 용병들과 함께 돌아오면서 루어드리의 입지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연이은 패배와 잘못된 판단으로 그는 라긴의 많은 지역을 잃었고, 내부 반란에 직면했다. 1171년 잉글랜드의 헨리 2세가 아일랜드에 상륙하자 루어드리의 왕권은 더욱 위태로워졌다.
처음에는 헨리 2세와의 직접적인 대면을 피했지만, 많은 하위 왕과 영주들은 헨리 2세가 노르만 귀족들의 세력 확장을 억제해주기를 기대하며 그를 환영했다. 더블린 대주교 로르칸 우아 투아탈(Laurence O'Toole)의 중재로 루어드리와 헨리 2세는 1175년 윈저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에서 루어드리는 헨리 2세를 자신의 주군으로 인정하는 대신, 라긴, 미데, 워터퍼드시를 제외한 아일랜드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보장받았다.
그러나 헨리 2세는 조약 내용을 아일랜드의 노르만 귀족들에게 강제할 의지나 능력이 부족했고, 노르만족의 영토 확장은 계속되었다. 1177년에는 루어드리의 아들 무이르케르타흐가 이끄는 앵글로-노르만족 군대가 코노트 중심부까지 침입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비록 이들을 격퇴하고 아들의 눈을 멀게 하는 처벌을 내렸지만, 이후 6년간 루어드리의 통치력은 내부 분열과 외부 공격으로 인해 급격히 약화되었다. 결국 그는 1183년에 퇴위했다.
루어드리는 1185년과 1189년에 잠시 권력을 되찾으려 했으나 실패하고 정치적으로 소외되었다. 그는 자신의 영지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1198년 콩 수도원에서 사망했으며, 유해는 클론맥노이스에 안장되었다. 이후 1258년부터 1260년까지 브리안 우어 네일이 잠시 왕위를 주장한 것을 제외하고는, 더 이상 어떤 게일족 국왕도 아일랜드 전체의 왕 또는 아르드리로 인정받지 못했다.
3. 아일랜드 영주 (1171년 ~ 1542년)
에드워드 1세 1254년–1307년 아버지 헨리 3세로부터 영주 지위 계승. 에드워드 2세 1307년–1327년 에드워드 브루스가 1315년-1318년 사이 아일랜드 지고왕위를 주장함. 에드워드 3세 1327년–1377년 리처드 2세 1377년–1399년 로버트 드 베레가 1386년 아일랜드 공작에 봉해졌으나 1388년 작위 박탈. 헨리 4세 1399년–1413년 헨리 5세 1413년–1422년 헨리 6세 1422년–1461년, 1470년–1471년 장미 전쟁 시기 왕위 변동. 에드워드 4세 1461년–1470년, 1471년–1483년 장미 전쟁 시기 왕위 변동. 에드워드 5세 1483년 리처드 3세 1483년–1485년 헨리 7세 1485년–1509년 램버트 심넬이 "에드워드 6세"를 참칭하고 1487년 더블린에서 대관식 거행 후 스토크 벌판 전투에서 패배.
퍼킨 워베크가 "리처드 4세"를 참칭하고 1495년 아일랜드 일부 세력의 지지를 얻음.헨리 8세 1509년–1542년 1542년 아일랜드 국왕으로 즉위하며 영주 칭호 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