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폰수 1세 (콩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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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폰수 1세는 16세기 초 콩고 왕국을 통치한 인물이다. 그는 콩고 왕국의 기독교화를 추진하고 포르투갈과의 관계를 강화하여 교육 및 기술 발전을 도모했다. 왕위 계승 과정에서 이복 형제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콩고를 기독교 국가로 선포하고 기독교 문화를 융합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노예 무역의 증가로 인해 포르투갈과의 관계가 복잡해졌고, 자유민의 노예화와 같은 문제에 직면했다. 아폰수 1세는 노예 무역을 규제하려 했으나, 콩고 왕국의 권력 약화를 막지 못했다. 그의 치세는 콩고 왕국의 기독교화와 근대화를 이끌었지만, 노예 무역 문제로 인해 콩고 왕국의 쇠퇴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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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폰수 1세 (콩고)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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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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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위 | 마니콩고 |
원래 이름 | Mvemba a Nzinga |
왕조 | 루케니 칸다 |
출생지 | 음반자콩고 |
사망지 | 음반자콩고 |
통치 | |
재위 기간 | 1509년 ~ 1542년 말 또는 1543년 |
전임자 | 주앙 1세 |
후임자 | 페드루 1세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은징가 아 은쿠우 |
어머니 | 은징가 아 은잘라 또는 얄라 |
2. 생애
콩고 왕국의 군주인 아폰수 1세(Mvemba a Nzingakg, 1460년경 ~ 1542/1543년)는 본명이 므벰바 아 징가이며, 아버지 은징가 아 은쿠우와 함께 1491년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아폰수'(Afonsopt)라는 세례명을 받았다.[22] 그는 은순디 주의 통치자로 있다가 1506년 아버지 주앙 1세가 사망하자, 이복 형제인 음판주 아 키티마와의 음반자 콩고 전투에서 승리하고 왕위에 올랐다.[2][3]
아폰수 1세는 재위 기간 동안 포르투갈과의 관계를 기반으로 콩고 왕국의 가톨릭화를 강력하게 추진했다.[8] 그는 교회를 설립하고 교육을 장려했으며, 아들 엔히크를 유럽으로 보내 주교 서품을 받게 하는 등[19][26] 기독교를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포르투갈과의 관계는 점증하는 노예 무역 문제로 인해 복잡한 양상을 띠었다. 초기에는 상아, 구리 등이 주요 교역품이었으나 점차 노예의 비중이 커졌고,[15][8] 특히 상투메 섬의 사탕수수 농장 개발로 노예 수요가 급증하면서 불법적인 노예 거래가 성행했다.[7][9] 아폰수 1세는 귀족을 포함한 콩고 자유민까지 노예로 팔려나가는 상황에 대해 포르투갈 왕에게 항의하고[17] 노예 무역을 규제하려 했으나,[10]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35]
말년에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갈등과 암살 시도를 겪었으며,[19] 1542년 말 또는 1543년 초에 사망했다. 그의 사후 아들 페드루 1세가 잠시 왕위를 이었으나, 곧 손자인 디오구 1세에게 자리를 빼앗겼다.
2. 1. 즉위 전
므벰바 아 징가(Mvemba a Nzingakg)는 1460년경 콩고 왕국의 다섯 번째 마니콩고(Mwene Kongo, 왕)인 은징가 아 은쿠우의 아들로 태어났다.1482년 포르투갈의 항해가 디에고 캉이 콩고 왕국에 도착하면서 콩고와 포르투갈 왕국 간의 교류가 시작되었다. 두 나라의 만남은 우호적이었으며, 초기에는 비교적 대등한 관계가 형성되었다.[25]
1491년, 당시 30대였던 므벰바 아 징가는 왕국의 북동부에 위치한 은순디 주의 통치자였다. 그는 다른 귀족들과 정치적 권력 및 무역 수입을 놓고 경쟁했으며, 차기 왕위 계승의 유력한 후보로 여겨졌다. 같은 해, 포르투갈인들이 처음으로 콩고의 수도 므반자콩고에 도착했다. 므벰바 아 징가는 기독교에 빠르게 관심을 보였고, 아버지 은징가 아 은쿠우가 기독교로 개종하기로 결정하면서 함께 세례를 받고 '아폰수'(Afonsopt)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아버지 은징가 아 은쿠우는 '주앙 1세'라는 세례명으로 개명했다. 주앙 1세의 개종 결정 이후 국내에서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으나, 포르투갈에서 들여온 총포의 도움으로 진압되었다.[22] 하지만 반기독교 및 반포르투갈 정서는 여전히 콩고 내에 남아 있었다.
아폰수는 수도 므반자콩고에서 포르투갈 사제 및 고문들과 함께 10년 동안 신학과 포르투갈 문물을 공부했다. 당시 포르투갈 사제들이 포르투갈 왕에게 보낸 편지에는 아폰수가 매우 열정적이고 학구적인 기독교 신자라고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1495년경, 아버지 주앙 1세는 기독교 신앙을 버리고 포르투갈 사제들을 수도에서 추방했다. 이에 아폰수는 아버지의 결정에 반대하며 사제들을 자신의 통치 구역인 은순디 주의 수도로 맞이했다. 그는 더 나아가 포르투갈인들의 정서에 맞춰 전통 예술품들을 파괴하라고 명령했는데, 이는 많은 콩고인들의 불만을 샀다.
1506년 아버지 주앙 1세가 사망했다.
2. 2. 왕위 계승
1506년, 콩고 왕국의 국왕 주앙 1세 (콩고)가 사망하자 왕위를 둘러싼 경쟁이 벌어졌다. 콩고는 아들이 왕위를 자동으로 물려받는 세습 군주제가 아니라 선거 군주제였으므로, 아폰수는 왕위를 보장받지 못한 상태였다. 아폰수는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왕이 되려 했다. 그의 어머니는 주앙 1세의 죽음을 잠시 비밀에 부쳤고, 그 사이 아폰수는 지지자들을 모으기 위해 수도 음반자 콩고로 돌아와 권력을 잡을 준비를 마쳤다. 국왕의 죽음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을 때, 아폰수는 이미 수도에서 모든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아폰수의 왕위 계승에 가장 강력하게 반대한 인물은 그의 이복 형제인 음판주 아 키티마(또는 음판주 아 은징가)였다. 음판주 아 키티마는 지방에서 군대를 일으켜 아폰수에게 반기를 들고 수도 음반자 콩고로 진격했다. 이어진 음반자 콩고 전투에서 가톨릭교를 따르던 아폰수는 극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당시 기록가 파이바 만소는 이 승리를 기적으로 묘사했는데, 음판주 아 키티마의 군대가 수적으로 훨씬 우세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늘에서 나타난 성 야고보와 다섯 명의 갑옷 입은 기병을 보고 공포에 질려 도망쳤다고 기록했다.[2] 그러나 이 이야기는 아폰수 자신이 남긴 편지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며,[3] 일부에서는 아폰수가 왕실 내의 반(反)가톨릭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쿠데타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해석도 제기된다.[4]
음판주 아 키티마는 전투 중에 사망했는데, 군대가 혼란 속에서 후퇴할 때 죽창 함정에 빠졌거나, 혹은 사로잡힌 뒤 처형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3] 당시 콩고에 있던 선교사들이나 아폰수가 포르투갈 국왕에게 보낸 편지에는 포르투갈인이 전투에 개입했다는 언급은 없다. 아폰수는 전통 신앙을 지지하던 이복 형제에게 거둔 승리를 계기로 기독교를 왕실의 공식 종교로 선포했으며, 음반자 콩고에서의 승리를 가져온 '기적'은 왕국의 문장에 새겨져[5] 적어도 1860년까지 사용되었다.
2. 3. 통치와 콩고의 기독교화
아폰수 1세는 콩고를 가톨릭 국가로 만들고자 포르투갈과의 관계를 강화했다.[8] 포르투갈 선교사들은 아폰수 통치 이전부터 콩고 수도 음반자 콩고에서 교육자이자 외교관으로 활동했으며, 아폰수 즉위 후에는 무역과 종교적 교류가 더욱 증가했다.[15][8] 그는 콩고의 로마 가톨릭 교회를 설립하고 세입으로 재정을 지원했으며, 교육에도 힘썼다. 1516년에는 왕립 학교를 세워 1,000명 이상의 학생이 다녔고, 지방에도 학교를 설립하여 귀족 계급이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되는 데 기여했다. (일반 백성을 위한 학교는 설립되지 않았다.)아폰수는 또한 콩고의 전통 신앙과 기독교를 조화시키려는 신학적 노력을 했고, 이를 위해 신학 서적을 깊이 연구했다. 그는 많은 자녀와 귀족들을 유럽으로 유학 보냈는데, 아들 엔히크 키누 아 므벰바는 1518년 주교로 서품받았다. 엔히크는 바티칸으로부터 우티카 (북아프리카)의 명의 주교직을 받았고, 1520년대 초 콩고로 돌아와 1531년 사망할 때까지 활동했다.[19][26]
아폰수의 노력으로 콩고 귀족들은 포르투갈식 이름, 칭호, 문장, 복장을 받아들였다. 귀족 자제들은 유럽에서 교육받았으며, 귀족들은 상투메의 포르투갈 식민지에 투자하기도 했다.[15] 기독교 축일이 지켜지고 교회가 세워졌으며, 기독교 미술품도 제작되었다.[12] 포르투갈을 모방한 종교 단체들도 설립되어 유럽식 칭호를 사용하고 자체적인 축제를 열었다.[12] 이러한 축제는 이후 미국 올버니의 노예 공동체에서 핑크스터 축제로 이어졌다는 연구도 있다.[13][14][15][16]
1513년, 아폰수는 마누엘 1세의 권유로 교황에게 귀순했다. 마누엘 1세의 조언에 따라 아들 엔히크를 포함한 사절단을 유럽에 파견하여 기독교 교육을 받게 했다. 이 사절단은 상아, 모피, 라피아 직물과 320명의 노예를 데리고 리스본에 도착했으며,[36] 1513년 로마에 도착했다.[36] 1516년에는 20명의 콩고 청년을 추가로 유학 보냈으나 절반이 상투메 섬에서 노예가 되는 비극을 겪었다.[37] 그럼에도 1539년 조카와 손자를 다시 유럽에 보냈다.
포르투갈 왕실이 노예 무역 규제에 소극적이자, 아폰수는 1529년과 1539년 두 차례 바오로 3세에게 직접 사절을 보내 도움을 요청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19] 1535년 교황의 원조 약속 서신도 실질적인 효력을 갖지 못했다.[38] 아폰수 재위 기간 동안 콩고 내 포르투갈 선교 및 교육 활동은 점차 쇠퇴하여, 선교사 수는 10명 미만이었고 모두 왕궁에 머물렀다.[19] 아폰수는 포르투갈인들의 부정적인 영향에 불만을 품고 선교사와 교사를 제외한 모든 유럽인의 추방을 명령하기도 했으나, 결국 철회하고 외국 상인 감찰 위원회를 설치하는 수준에서 타협해야 했다.[19]
2. 4. 노예 무역 문제
아폰수 1세의 통치 초기 포르투갈과의 교역은 주로 상아, 구리, 야자 천 등으로 이루어졌으나, 점차 노예 무역의 비중이 커졌다.[15][8] 특히 상투메 섬에 포르투갈 식민지가 건설되면서 노예 수요가 크게 증가했고, 이는 콩고와의 노예 거래를 더욱 부추겼다.[7][9]아폰수 1세는 포르투갈과의 관계를 통해 여러 이득을 얻었다. 가톨릭 개종 노력에 대한 포르투갈의 지원을 받았고, 무역 증가는 수도 음반자 콩고를 중심으로 경제를 활성화시켰다.[6][7] 콩고는 전쟁 포로를 노예로 삼아 포르투갈에 판매했으며, 아폰수 1세는 1510년대에 포르투갈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받는 대가로 전쟁 포로 노예의 일부를 제공하는 협정을 맺기도 했다.[7][9] 1512년에는 남쪽의 응고 왕국과의 전쟁에서 포획한 노예 410명을 마누엘 1세에게 보냈다고 서신에 기록했다.[7] 포르투갈에 팔리지 않은 노예는 왕실 재산이 되거나 콩고 내부의 노예 시장에서 거래되었다.[7]
노예는 콩고 내에서 점차 통화처럼 사용되었고, 아폰수 1세는 콩고 엘리트 교육이나 화기 구매 등을 위해 포르투갈에 노예를 보냈다. 본래 콩고에는 노예 무역에 대한 전통적인 규제가 존재했다. 콩고 자유민을 노예로 삼거나 판매하는 것, 여성 노예를 수출하는 것은 금지되었고, 콩고인 범죄자를 노예로 삼더라도 국외로 수출할 수는 없었다.[7][9]
그러나 포르투갈의 노예 수요가 늘어나면서 이러한 법규는 점차 무시되기 시작했다. 1520년대 중반에는 일부 콩고 귀족들이 포르투갈 상인과 불법적으로 거래하며 아폰수 1세의 무역 독점권을 침해했다. 이들은 불법 수입품의 대금을 지불하기 위해 자유민 신분의 콩고인을 납치하여 노예로 파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다. 심지어 아폰수 1세의 친족을 포함한 귀족들까지 노예로 팔려나가는 상황이 벌어지자, 그는 1526년 포르투갈 왕에게 강하게 항의하는 서한을 보냈다.[7][9] 이 서한에서 아폰수 1세는 포르투갈 상인들이 귀족과 왕족을 포함한 콩고 자유민을 무분별하게 납치하여 노예로 삼는 행위를 강하게 비판하고, 상품보다는 사제와 교사, 미사용품만 필요하다는 입장을 전달하며 노예 거래 장소가 되기를 원치 않는다고 밝혔다.[17]
아폰수 1세는 불법적인 노예 거래를 막기 위해 노예 무역 규제를 선언하고, 노예로 팔리는 사람들의 신분을 확인하는 위원회를 설치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다.[10] 이러한 조치는 단기적으로 자유민이 노예로 팔려나가는 것을 어느 정도 억제했지만,[7] 장기적으로 노예 무역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는 못했다. 특히 상투메 섬에 거점을 둔 포르투갈 상인들과 일부 연안 지역 영주들은 노예 무역으로 큰 이익을 얻고 있었기 때문에 아폰수 1세의 규제는 큰 효과를 발휘하기 어려웠다.[35] 아메리카 대륙에서 들여온 사탕수수 재배로 노동력이 많이 필요했던 상투메 섬에서는 많은 콩고인들이 불법적으로 납치되어 노예가 되었고, 아폰수 1세가 리스본에 상투메 영주의 만행을 호소했지만 별다른 조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26][30] 포르투갈 왕 마누엘 1세 역시 1512년 콩고와의 무역 독점을 선언하고 감독관 파견을 시도했지만, 실질적인 통제는 이루어지지 않았다.[31][19]
아폰수 1세 자신도 노예 무역에 관여했고 원칙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귀족을 포함한 자유민이 불법적으로 납치되어 노예로 팔리는 행위에는 강한 불쾌감을 드러냈다.[19] 그는 노예 무역에 대한 왕실의 통제력을 강화하려 했으나, 포르투갈이 루안다에 독자적인 무역 거점을 마련하고, 응고 왕국과 같은 경쟁 세력을 지원하면서 콩고의 영향력은 도전을 받았다.[7][15] 결국 노예는 콩고의 주요 수출품이자 국제 교역의 수단이 되었지만, 동시에 불법적인 노예 거래는 콩고 사회에 큰 혼란을 야기하고 왕권을 약화시키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7]
2. 5. 말년
아폰수 1세(Afonso I)의 말년에는 그의 자녀와 손자들이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1540년 부활절에는 포르투갈 거주민을 포함한 음모자들이 교회에 있던 아폰수 1세를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하는 사건이 발생했다.[19]아폰수 1세는 1542년 말이나 1543년 초에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 페드루 1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페드루 1세의 통치는 오래가지 못했다. 아폰수 1세에게 적대적이었던 포르투갈인들은 페드루 1세의 반대 세력을 지지했고, 결국 1545년 아폰수 1세의 손자인 디오구 1세가 왕위를 빼앗았다. 페드루 1세는 교회로 피신해야만 했다. 비록 페드루 1세는 축출되었지만, 아폰수 1세의 다른 후손들, 특히 그의 세 딸을 통해 이어진 후손들은 이후 콩고 왕국의 여러 왕들을 배출하며 왕가의 혈통을 이어갔다.
3. 평가 및 영향
아폰수 1세는 콩고 역사상 변혁적이면서도 혼란스러운 시기를 다스린 통치자로, 그의 치세는 역사 연구의 중요한 대상이 되어왔다. 그의 시대에 대해 알려진 정보 대부분은 그가 마누엘 1세와 주앙 3세에게 보낸 여러 통의 긴 포르투갈어 편지에서 비롯된다. 이 편지들에는 국가 행정에 대한 상세한 내용과 포르투갈 관리들의 행동에 대한 불만이 담겨 있어, 일부 연구자들은 이를 근거로 아폰수의 치세가 포르투갈의 이익에 의해 제약받았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작가 아담 호흐쉴트는 1998년 저서 ''레오폴드 왕의 유령''에서 아폰수 1세를 '선택적 근대화가'로 평가했다. 이는 아폰수가 유럽의 과학 기술과 기독교 교회는 받아들였지만, 포르투갈의 법전을 도입하거나 탐광자들에게 토지를 판매하는 것은 거부했기 때문이다.[17] 실제로 아폰수는 1516년 포르투갈의 새 법전인 Ordenações Manuelinas|오르데나삷 마누엘리나스por를 읽고 포르투갈 사절 데 카스트로에게 "카스트로, 발을 땅에 딛는 것에 대한 처벌은 무엇인가?"라고 물으며 법의 일부 내용을 조롱하고 적용을 거부한 일화가 있다. 동시대 기록에는 토지 매매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으며, 실제로 콩고에서는 누구에게도 토지가 판매된 적이 없다.
아폰수가 기독교로 개종하고 이를 장려한 정확한 동기는 명확하지 않다. "학자들은 콩고 기독교 신앙의 진정성과 새로운 신앙 채택이 어느 정도 정치적, 경제적 현실에 의해 동기 부여되었는지에 대해 계속해서 논쟁하고 있다."[18] 그의 동기가 순전히 영적인 것만은 아니었을 수 있지만, 콩고의 기독교화는 이후 역사 내내 지속된 유럽 국가들과의 광범위한 관계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기독교 왕국으로서 콩고의 정체성을 지지하고 정당화하는 기반이 되었다.[18]
4. 대중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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