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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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우는 고려 공민왕 때 활약한 무신으로, 탐진현 출신이다. 그는 원나라의 장사성 반란 진압에 참여하고, 홍건적의 침입을 막아내는 등 군사적 공을 세웠다. 특히 홍건적 격퇴 과정에서 뛰어난 지략과 용맹함을 보여 상원수와 도원수에 임명되기도 했다. 그러나, 홍건적 격퇴 후 공신 정세운을 김용의 모함에 빠져 살해하게 되었고, 이후 김용의 사주를 받은 자객에게 살해당했다.
탐진현 출신인 안우는 공민왕 대에 무신으로 큰 활약을 펼쳤다.
안우의 집터는 강진읍성 남쪽에 있었다고 신증동국여지승람 전라도 강진현조에 기록되어 있다.[1]
2. 생애
공민왕 8년과 공민왕 10년 두 차례에 걸쳐 홍건적의 침입을 막아내고, 공민왕 11년 개경을 탈환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김용의 모함으로 정세운을 살해한 사건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다.[1]
안우가 죽은 뒤 공민왕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아들을 돌봐주고 휘하 병사들을 위로했다. 개경 백성들은 안우와 이방실 등의 공을 기리며 그들의 아들들에게 음식을 주고 눈물을 흘릴 정도로 그들을 존경했다.[1]
2. 1. 초기 활동
공민왕 원년 10월 12일에 군부판서(軍簿判書)로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5월 19일에는 응양군상호군(鷹揚軍上護軍)으로서, 밀직사(密直使) 이타선첩목아(李也先帖木兒)와 함께 원(元) 황후의 탄일을 축하하는 사신으로 원에 파견되었다.[1] 공민왕 3년 전리판서(典理判書)가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6월 13일에 원의 요청에 따라 염제신, 김용, 정세운, 최영, 이방실 등과 함께 원에서 장사성이 일으킨 농민반란을 진압할 원군의 지휘관으로 발탁되었고, 21일에 다른 지휘관들과 마찬가지로 오성군(鼇城君)에 봉해졌다.[1] 공민왕 5년 5월 7일에 원에서 돌아와 공민왕에게 옷과 술 등의 하사품을 바쳤고, 7월에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11월 3일에는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가 되었다.[1]
공민왕 7년 2월 참지중서정사(叅知中書政事)가 되었고, 얼마 뒤인 5월 14일 왜구가 교동(喬桐)에 쳐들어오고 개경에 계엄령이 내려졌을 때 동강병마사(東江兵馬使)로서 왜적을 방비하는 임무를 맡았으나, 25일 군량 수송 문제를 이유로 서강병마사(西江兵馬使) 이춘부(李春富)와 함께 소환되었다.[1] 6월 16일 안주군민만호부만호(安州軍民萬戶府萬戶)가 되었는데, 재추(宰樞)가 조도문(祖都門) 밖에서 전송하는 연회를 열었을 때 술에 취해 드러누워 한낮이 되도록 일어나지 않아 휘하 사람들이 원망하였다.[1]
공민왕 8년 6월 기철이 제거된 뒤 공을 논할 때 1등이었다.[1] 곧 모거경(毛居敬) 등이 거느린 홍건적이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와 의주, 정주, 인주(麟州) 등지가 함락되었고, 예전 안우의 부관이었던 도지휘사(都指揮使) 김원봉(金元鳳)도 인주에서 죽었다.[1] 11월 30일 서북면원수(西北面元帥)로 임명된 경천흥의 부(副)를 맡아, 인주를 공격해 달아나는 홍건적을 뒤쫓아 30여 명을 죽였다.[1] 12월 철주에서 이방실, 장군 이음, 이인우(李仁祐) 등과 함께 홍건적을 격퇴하는 공을 세웠다.[1] 《고려사》 열전에는 이때 안우가 70여 기(騎)를 거느리고 전장으로 가다가 산에 올라 말을 쉬게 하는데, 적의 수장 모귀양(毛貴揚)의 병사가 들이닥치자 장사들이 모두 놀라 얼굴빛을 잃은 가운데 안우는 태연하게 담소하며 몸을 돌려 손을 씻고 양치질까지 하고서 조용히 말을 타고 군사를 거느려 싸웠고, 전승 소식을 들은 공민왕이 사신을 시켜 금대를 내렸다고 한다.[1] 12월 16일 다시 철주로 쳐들어온 홍건적을 청강에서 또 한 번 맞아 쳐부수지만, 곧 다음 전투에서 패하여 정주(定州)로 물러났고, 얼마 뒤 홍건적에 의해 서경이 함락되었다.[1]
공민왕 9년 1월 27일 안주군민만호부도만호(安州軍民萬戶府都萬戶)가 되었다.[1] 2월 2일 함종으로 진군하여 홍건적과 전투를 치렀는데, 처음에는 불리하였으나 홍건적과 항거하면서 동북면천호(東北面千戶) 정신규(丁臣桂)가 병사 1천을 이끌고 도착하고, 의주로 향했던 홍건적 일부도 중랑장 류당(柳塘) · 낭장(郞將) 김경(金景)과 천호(千戶) 장륜(張倫)에 의해 격퇴되고 정주성(靜州城)에서 섬멸되었다.[1] 함종에서 안우 등의 고려군은 홍건적의 목책을 포위 공격하여 적 2만 급을 죽이고, 가짜 원수(僞元帥) 침자(沈刺) · 황지선(黃志善)을 사로잡았다.[1] 16일에는 이방실 등과 함께 홍건적을 옛 선주(宣州)까지 내쫓는데 성공했다.[1] 살아서 압록강을 건너 달아난 홍건적은 3백 명 남짓이었다.[1] 3월 25일 안우는 적의 장수를 생포한 공로로 추충절의정란공신(推忠節義定亂功臣) 호와 중서평장정사(中書平章政事) 직책을 받았다.[1] 8월 참지정사(叅知政事)가 되었다.[1]
공민왕 10년 홍건적이 다시 20만에 달하는 무리를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왔다.[1] 안우는 상원수(上元帥)가 되었고, 이방실 등과 함께 휘하 병사를 거느리고 개주, 연주(延州), 박주(博州) 등의 주에서 홍건적을 공격하여 이겼다.[1] 안우 휘하 조천주(趙天柱) · 정리(鄭履) · 장신보(張臣補) · 이원규(李元桂) · 홍선(洪瑄) · 정세(鄭詵) 등이 거느리는 보기(步騎) 4백이 박주에서 백여 급을 베는 등 승리를 거두고, 군을 지휘해 안주에 이르렀으며 이 사실을 공민왕에게 고했다.[1] 공민왕은 그 공로로 안우를 도원수(都元帥)로 삼고, 관문 바깥의 일은 안우가 통제하도록 했다.[1]
2. 2. 장사성 반란 진압
공민왕 3년(1354년), 원나라에서 장사성이 일으킨 농민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고려군 지휘관으로 발탁되었다.[1] 염제신, 김용, 정세운, 최영, 이방실 등과 함께 원나라에 파견되어 반란 진압에 참여했다.[1]
공민왕 9년(1360년) 1월 27일, 안주군민만호부도만호(安州軍民萬戶府都萬戶)가 되었다.[1] 2월 2일, 함종에서 홍건적과 전투를 벌여 초기에는 불리했으나, 정신규가 이끄는 병력과 류당, 김경, 장륜 등이 이끄는 병력이 합류하면서 홍건적 2만 명을 죽이고 가짜 원수(僞元帥) 침자(沈刺)와 황지선(黃志善)을 생포하는 등 크게 격파했다.[1] 2월 16일에는 이방실 등과 함께 홍건적을 옛 선주(宣州)까지 몰아냈으며, 살아남아 압록강을 건너 도망친 홍건적은 3백 명 남짓이었다.[1]
공민왕 10년(1361년), 홍건적이 다시 2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자, 상원수(上元帥)가 되어 이방실 등과 함께 개주, 연주, 박주 등지에서 홍건적을 격파했다.[1] 안우는 휘하 병력을 이끌고 안주에 이르러 이 사실을 공민왕에게 보고했고, 공민왕은 그 공로로 안우를 도원수(都元帥)로 삼고 관문 바깥의 일을 통제하도록 했다.[1]
2. 3. 홍건적 격퇴
공민왕 8년(1359년) 홍건적이 압록강을 건너 고려를 침공하여 의주, 정주, 인주 등지를 함락시켰다. 이에 안우는 서북면원수(西北面元帥) 경천흥의 부장(副將)으로서 홍건적을 격퇴하는 임무를 맡았다.[1]
12월, 안우는 철주에서 이방실, 이음, 이인우 등과 함께 홍건적을 물리치는 큰 공을 세웠다. 《고려사》 열전에는 안우가 70여 기(騎)를 이끌고 산에서 휴식하던 중 홍건적 수장 모귀양(毛貴揚)의 기습을 받았으나, 침착하게 대응하여 승리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소식을 들은 공민왕은 안우에게 금대를 하사했다.[1]
이후 안우는 청강에서 홍건적을 다시 격파했으나, 곧 이어진 전투에서 패하여 정주(定州)로 후퇴했고, 얼마 뒤 서경이 함락되었다.[1]
공민왕 9년(1360년) 1월 27일, 안우는 안주군민만호부도만호(安州軍民萬戶府都萬戶)가 되었다. 2월 2일, 함종에서 홍건적과 전투를 벌여 초기에는 불리했으나, 동북면천호(東北面千戶) 정신규(丁臣桂)의 지원군과 의주 방면에서 홍건적을 격퇴한 류당(柳塘) 등의 도움으로 승리했다. 고려군은 홍건적의 목책을 포위 공격하여 2만 명을 죽이고, 가짜 원수(僞元帥) 침자(沈刺) 등을 사로잡았다. 16일에는 이방실 등과 함께 홍건적을 옛 선주(宣州)까지 몰아냈다. 압록강을 건너 도망친 홍건적은 3백 명 남짓이었다.[1]
3월 25일, 안우는 홍건적 장수를 생포한 공로로 추충절의정란공신(推忠節義定亂功臣) 호와 중서평장정사(中書平章政事) 직책을 받았다.[1]
공민왕 10년(1361년), 홍건적이 다시 2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자 안우는 상원수(上元帥)가 되어 이방실 등과 함께 개주, 연주, 박주 등지에서 승리했다. 공민왕은 그 공로로 안우를 도원수(都元帥)로 삼고, 관문 밖의 일을 통제하도록 했다. 그러나 홍건적의 반격으로 절령책(岊嶺柵)이 격파되면서 안우 등은 단기로 도망쳐야 했다. 공민왕은 남쪽으로 피난(몽진)을 결심했고, 안우 등은 왕에게 남쪽으로 갈 것을 권하며 자신들이 남아 적을 막겠다고 했다.[1]
공민왕이 남쪽으로 떠난 후, 홍건적은 개경을 함락시켰다. 이듬해인 공민왕 11년(1362년) 1월 17일, 안우는 이방실, 최영 등과 함께 20만 병사를 이끌고 개경 동쪽 교외의 천수사 앞에 진을 쳤다. 1월 18일, 총병관(摠兵官) 정세운의 지휘 아래 개경 탈환에 성공했다.[1]
2. 4. 정세운 살해와 죽음
안우는 공민왕 10년(1361년) 홍건적이 20만 대군으로 다시 침입했을 때 상원수가 되어 여러 전투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홍건적의 반격으로 절령책이 격파되고 안우 등은 도망쳐야 했다. 공민왕은 남쪽으로 피난(몽진)을 결정했고, 안우 등은 개경에 남아 적을 막겠다고 했다. 이듬해인 1362년 1월 17일, 안우는 이방실, 황상, 한방신, 이여경, 김득배, 안우경, 이귀수, 최영 등과 함께 20만 병력을 이끌고 개경 동쪽 교외의 천수사 앞에 진을 쳤다. 총병관이 된 정세운의 지휘 아래 1월 18일 개경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1]
김용은 평소 정세운이 왕의 총애를 받는 것과 안우, 김득배, 이방실 등이 큰 공을 세운 것을 시기하여 가짜 문서를 만들어 안우 등에게 정세운을 죽이도록 꼬드겼다. 안우와 이방실은 김득배를 설득해 1월 22일 정세운을 술자리로 유인하여 살해했다. 다음날 정세운의 승전보가 도착하자 공민왕은 기뻐하며 사신을 보냈지만, 복주수 박지영이 이방실이 정세운을 죽였고 안우 등도 해를 입었다고 보고하자 왕은 분노했다. 그러나 판사 김현과 상장군 홍사우가 여러 장수들이 쓴 정세운 비방 글을 바치자 왕은 기뻐하며 김진을 다시 보내 개선을 독촉했다.[1]
안우가 함창현에 이르렀을 때 시중 류탁이 술을 올리며 안우에게 서서 마실 것을 청했으나 안우는 듣지 않았다. 2월 29일, 안우가 개선하여 궁으로 들어가 왕을 알현하려 할 때, 김용의 지시를 받은 목인길이 안우를 중문으로 끌어내어 문지기가 그의 머리를 때려 죽였다. 안우는 "조금만 기다려라. 주상의 앞에 가서 주머니 속의 이 글을 보인 뒤에 죽음을 받겠다"고 외쳤지만 왕은 듣지 못했다. 안우가 말한 주머니 속 글은 정세운을 죽이라는 왕명을 위조한 김용의 문서였다. 안우가 죽던 당시 왕은 "너희가 멋대로 정세운을 죽여서 몸과 머리를 떼어 놓았지만 지금 너희를 죽이지 않는 것은 큰 공이 있어서다"라는 전지를 내리고 있었다. 위조된 전지를 전했던 김림도 김용에게 살해되고, 이방실과 김득배 역시 김용이 보낸 자객들에게 살해되었다.[1]
《고려사》에는 왕이 안우가 죽고 그의 어린 아들이 벌거벗고 길에 돌아다닌다는 소식에 슬퍼하며 궁중으로 불러 돌아갈 곳을 묻고 보냈으며, 안우의 휘하 사졸들이 놀라 흩어지자 왕이 불러 술과 음식을 주며 위로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열 살 남짓이던 안우의 아들이 이방실의 아들과 함께 저자에서 놀고 있으면 개경 사람들은 "지금 우리가 편안히 자고 먹고 하는 것은 세 원수(元帥)님의 공이다"라며 음식을 주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1]
3. 거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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