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르다스 (리투아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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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기르다스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대공으로, 게디미나스 대공의 아들 중 한 명이다. 1345년 형제 켕스투티스의 도움을 받아 무능한 야우누티스를 몰아내고 대공이 되었다. 그는 32년 동안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발전과 확장에 헌신했으며, 동슬라브족 영토를 확보하고 모스크바 대공국, 킵차크 칸국 등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를 맺으며 세력을 확장했다. 알기르다스는 이교 신앙을 유지하며 외교적 도구로 활용했고, 1377년 죽을 때까지 이교도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는 비테브스크의 마리아와 트베리의 울리아나와 결혼하여 많은 자녀를 두었으며, 그의 아들 요가일라는 폴란드 왕위에 올라 야기에우워 왕조를 세웠다. 알기르다스는 벨라루스에서도 존경받는 인물로, 기념비와 기념 주화가 발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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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르다스 (리투아니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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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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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위 | 리투아니아 대공 |
통치 기간 | 1345년 – 1377년 |
이전 통치자 | 야누티스 |
다음 통치자 | 요가일라 |
직위1 | 자슬라우예 공작 |
통치 기간1 | 기원전 1320년–1345년경 |
다음 통치자1 | 야누티스 |
직위2 | 비텝스크 공작 |
통치 기간2 | 1318년–1377년 |
이전 통치자2 | 바실코 브리아치슬라비치 |
다음 통치자2 | 트베리의 울리아나 알렉산드로브나 |
출생 추정 | 기원전 1296년 |
사망 시기 | 1377년 5월 말 |
사망 장소 추정 | 마이샤갈라 |
배우자 | 마리아 비텝스카 율리아나 알렉산드로브나 |
자녀 | 드미트리우스 1세 스타르시 폴로츠크의 안드레이 블라디미르 올게르도비치 요가일라 스키르가일라 슈비트리가일라 |
가문 | 게디미나스 왕조 |
아버지 | 게디미나스 |
어머니 | 비다 |
이름 | |
벨라루스어 | Альгерд (Alhierd) |
우크라이나어 | Ольге́рд, О́льґерд (Olherd, Olgerd) |
폴란드어 | Olgierd |
자녀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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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알기르다스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대공 게디미나스의 일곱 아들 중 한 명이었다.[3] 게디미나스는 1341년 사망하기 전 영토를 분할하면서 막내아들 야우누티스에게 수도 빌뉴스를 포함한 주요 영지를 물려주었다. 그러나 알기르다스는 동생 켕스투티스와 협력하여 1345년 야우누티스를 몰아내고 스스로 대공의 자리에 올랐다.[3] 그는 이후 32년간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발전과 영토 확장에 힘썼다.[3]
알기르다스의 성공적인 통치는 그의 뛰어난 정치적 통찰력과 동생 켕스투티스의 헌신적인 협력에 힘입은 바가 컸다.[3] 당시 리투아니아는 북서쪽의 독일 기사단, 남동쪽의 킵차크 칸국(조치 울루스), 서쪽의 폴란드 왕국, 동쪽의 모스크바 대공국 등 적대적인 세력에 둘러싸여 있었으며,[3] 이러한 어려운 환경 속에서 알기르다스와 켕스투티스의 협력은 국가의 생존과 발전에 필수적이었다. 두 형제의 역할 분담은 기록에서도 나타나는데, 알기르다스는 주로 동쪽의 동슬라브족 관련 문제에 집중하여 동슬라브 기록에 자주 등장하는 반면, 켕스투티스는 서쪽 방어를 책임지며 서방 연대기에 주로 기록되었다.[3]
2. 1. 게디미나스 가문의 상속 분쟁
알기르다스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대공 게디미나스의 일곱 아들 중 한 명이었다.[3] 게디미나스는 1341년 사망하기 전 자신의 영지를 분할하면서, 수도 빌뉴스는 막내아들 야우누티스에게 물려주었다. 그러나 야우누티스의 통치 능력은 부족했던 것으로 평가된다.[3]이에 알기르다스는 동생 켕스투티스와 손을 잡고 1345년에 야우누티스를 몰아내고 스스로 대공의 자리에 올랐다.[3] 이후 1377년까지 32년간 이어진 그의 통치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발전과 영토 확장에 크게 기여했으며, 공국을 유럽의 주요 세력 중 하나로 만들고자 노력했다.[3] 일부 리보니아 연대기에서는 알기르다스를 단순히 크냐지(공작)나 대공이 아닌 리투아니아의 왕(rex Letwinorumlat)으로 칭하기도 했다.[4][5]
알기르다스의 성공적인 통치에는 그의 뛰어난 정치적 통찰력과 동생 켕스투티스의 헌신적인 협력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3] 두 형제는 영토를 효과적으로 분담하여 통치했는데, 알기르다스는 주로 동쪽 지역을 담당하며 동슬라브족 관련 기록에 자주 등장하는 반면, 켕스투티스는 서쪽 방어를 맡아 서방 연대기에 주로 기록되었다. 당시 리투아니아는 사방이 적대 세력으로 둘러싸인 어려운 상황이었다. 북서쪽에서는 독일 기사단, 남동쪽에서는 킵차크 칸국(조치 울루스)이 리투아니아 영토를 노리고 있었고, 서쪽의 폴란드 왕국과 동쪽의 모스크바 대공국 역시 리투아니아와 경쟁하며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3]
2. 2. 켕스투티스와의 협력 통치
알기르다스는 게디미나스 대공의 일곱 아들 중 한 명이었다. 게디미나스는 1341년 사망하기 전 자신의 영지를 분할했는데, 막내아들 야우누티스가 수도 빌뉴스를 물려받아 명목상 우위를 점했다.[3] 하지만 알기르다스는 동생 켕스투티스의 도움을 받아 능력이 부족했던 야우누티스를 1345년에 몰아내고 스스로 대공을 선언했다.[3] 그는 이후 1377년까지 32년 동안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발전과 확장에 헌신하며[3] 공국을 유럽의 강국으로 만들고자 노력했다.리투아니아의 통치자가 된 후 알기르다스는 리보니아 연대기에서 ''크냐지(공작)'' 또는 ''대공'' 대신 '리투아니아의 왕'(rex Letwinorum|렉스 레트비노룸la)으로 불리기도 했다.[4][5]
알기르다스의 성공적인 통치는 그의 뛰어난 정치적 통찰력과 동생 켕스투티스의 헌신적인 협력 덕분이었다. 두 형제는 영지를 효과적으로 분할하여 통치했는데, 이는 알기르다스가 주로 동슬라브족 관련 기록에 등장하는 반면, 켕스투티스는 서방 연대기에 주로 언급되는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당시 리투아니아는 사방이 적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북서쪽의 독일 기사단과 남동쪽의 킵차크 칸국(조치 울루스)은 리투아니아 영토를 노리고 있었고, 서쪽의 폴란드 왕국과 동쪽의 모스크바 대공국 역시 리투아니아와 경쟁하며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알기르다스와 켕스투티스의 협력은 리투아니아를 지키고 발전시키는 데 필수적이었다.
2. 3. 리투아니아 주변의 정세
리투아니아는 알기르다스 통치 시기에 여러 적대 세력에 둘러싸여 있었다. 북서쪽의 독일 기사단과 남동쪽의 킵차크 칸국(조치 울루스)은 리투아니아 영토를 탐냈으며,[3] 서쪽의 폴란드 왕국과 동쪽의 모스크바 대공국은 리투아니아와 경쟁하는 적대적인 관계였다.[3]이러한 상황에서 알기르다스는 동생 켕스투티스와 협력하여 국가를 이끌었다. 알기르다스는 주로 동쪽의 동슬라브족 문제와 모스크바 대공국과의 관계를 다루었고, 켕스투티스는 서쪽의 독일 기사단과 폴란드 왕국에 맞서는 역할을 담당했다.[3] 이러한 역할 분담은 당시 기록에서도 확인되는데, 동슬라브족 관련 기록에는 주로 알기르다스가, 서방 연대기에는 주로 켕스투티스가 등장한다.[3] 두 형제의 효과적인 협력과 역할 분담은 리투아니아가 주변의 위협에 맞서 세력을 확장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3]
3. 리투아니아의 확장
알기르다스는 "전체 루스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에 속해야 한다"는[6] 목표를 가지고 스스로의 입지를 굳혔으며, 동쪽의 모스크바 대공국과 남쪽의 킵차크 칸국(골든 호드)을 상대로 영향력과 영토를 확장하여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경계를 흑해 북부 연안까지 넓혔다. 그의 주요 노력은 과거 키예프 루스에 속했던 슬라브족의 땅을 확보하는 데 집중되었다.[3]
알기르다스는 확장 과정에서 스몰렌스크와 브랸스크 등 서부 루스의 주요 공국들을 점령했으며, 모스크바 대공국과는 경쟁과 충돌을 반복했다.[7] 그의 중요한 군사적 업적 중 하나는 1362년 남부 부그강 유역에서 벌어진 청수 전투에서 타타르족(킵차크 칸국 세력)을 상대로 거둔 결정적인 승리였다. 이 전투의 패배로 킵차크 칸국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고, 남쪽으로 밀려나 크림 반도 지역에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하게 되었다.[3] 이 승리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3. 1. 동슬라브 지역으로의 진출

"전체 루스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에 속해야 한다"는 생각[6]을 가졌던 알기르다스는 스스로의 입지를 굳히고, 모스크바 대공국과 킵차크 칸국(골든 호드 또는 조치 울루스)을 상대로 영향력과 영토를 확장하여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경계를 흑해 북안까지 넓혔다. 그의 주요 노력은 옛 키예프 루스에 속했던 슬라브족의 땅을 확보하는 데 집중되었다.
알기르다스는 아들 안드리우스를 프스코프의 공작으로 선출되도록 지원했으며, 노브고로드 공화국에서는 일부 시민 세력이 모스크바 대공국의 영향력에 맞서기 위해 알기르다스를 지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두 주요 상업 중심지에서의 그의 통치는 불안정한 상태에 머물렀다.[3]
그는 서부 루스의 중요한 공국이었던 스몰렌스크 공국과 브랸스크 공국을 점령했다. 모스크바 대공들과는 대체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 했으며, 이는 두 명의 정교회 신자 러시아 공주와 결혼한 사실에서도 나타난다. 하지만 이러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리투아니아-모스크바 전쟁 (1368-1372)이 발발하여 1368년과 1370년 두 차례에 걸쳐 모스크바를 포위하기도 했다.[7]
알기르다스의 중요한 군사적 업적 중 하나는 1362년 남부 부그강 유역에서 벌어진 청수 전투에서 타타르족(킵차크 칸국 세력)을 상대로 거둔 결정적인 승리였다. 이 전투의 패배로 킵차크 칸국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고, 칸은 본거지를 남쪽의 크림 반도 지역으로 옮겨야만 했다.[3] 이 승리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371년, 알기르다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필로테우스 코키노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을 리투아니아 왕으로 칭했다. 그는 이 편지에서 키예프, 스몰렌스크, 트베리, 소(小) 러시아, 노보실, 니즈니노브고로드 등을 위해 모스크바로부터 독립된 별도의 교구 대주교를 임명해 줄 것을 요구했으며, 자신이 이유 없이 모스크바를 공격했다는 모스크바 측의 주장을 반박했다.[8]
3. 2. 모스크바와의 관계
알기르다스는 "전체 루스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에 속해야 한다"[6]는 목표 아래, 모스크바 대공국과 킵차크 칸국(골든 호드)을 상대로 영향력과 영토를 확장하여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경계를 흑해까지 넓혔다. 그의 주요 노력은 옛 키예프 루스에 속했던 슬라브족 땅을 확보하는 데 집중되었다.[3]
그는 아들 안드리우스를 프스코프의 공작으로 만들었으며, 노브고로드 공화국의 일부 세력은 모스크바 대공국에 맞서 알기르다스를 지지하기도 했으나, 이 두 상업 중심지에 대한 그의 지배력은 불안정했다.[3] 알기르다스는 스몰렌스크와 브랸스크의 중요한 공국들을 점령했다.
모스크바 대공들과는 두 명의 정교회 공주와 결혼하는 등 대체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지만[7], 리투아니아-모스크바 전쟁 (1368-1372) 중인 1368년과 1370년에는 모스크바를 포위하기도 했다.[7] 알기르다스의 중요한 업적 중 하나는 1362년 남부 부그강에서 벌어진 청수 전투에서 타타르족(킵차크 칸국)에게 거둔 승리였다. 이 전투의 결과로 킵차크 칸국은 세력이 약화되어 남쪽으로 밀려났고, 칸은 본부를 크림 반도에 두게 되었다.[3]
137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필로테우스 코키노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알기르다스는 자신을 리투아니아 왕이라고 칭하며, 모스크바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별도의 교구 대주교를 키예프, 스몰렌스크, 트베리, 소(小) 러시아, 노보실, 니즈니노브고로드를 위해 요구했다. 또한 이 편지에서 그는 자신이 이유 없이 모스크바를 공격했다는 모스크바 측의 주장을 부인했다.[8]
3. 3. 킵차크 칸국과의 전쟁
알기르다스는 골든 호드를 상대로 영향력과 영토를 확장하여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경계를 흑해까지 넓혔다.[3] 그의 주요 노력 중 하나는 옛 키예프 루스에 속했던 슬라브족 땅을 확보하는 것이었다.알기르다스가 이룬 중요한 업적은 1362년 남부 부그강에서 벌어진 청수 전투에서 타타르족을 상대로 거둔 승리이다.[3] 이 전투의 결과로 킵차크 칸국은 큰 타격을 입고 약화되었으며, 칸은 본부를 더 남쪽인 크림 반도 지역으로 옮기게 되었다.[3]
4. 종교와 죽음
알기르다스의 종교적 신념과 죽음에 대해서는 다양한 기록과 해석이 존재한다. 현대 역사가들은 그가 개종 약속을 외교적 카드로 활용하며 전략적으로 이교 신앙을 유지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9][24] 실제로 동시대 서방 및 비잔틴 측 기록들은 알기르다스가 1377년 사망할 때까지 이교도였음을 시사하고 있다.[10][11][12][25][26][27] 그의 장례 역시 이교 관습에 따라 치러졌는데, 마이시에갈라 인근 숲에서 18마리의 말과 개인 소지품들과 함께 화장되었다고 전해진다.[13][29]
그러나 후대의 일부 연대기에서는 알기르다스가 정교회로 개종했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비호비에츠 연대기나 후스틴스카 연대기는 그가 첫 결혼 전에 개종했다고 기록했으며,[16][17][31][32] 키예프 페체르스크 수도원의 기념 책에는 '데메트리우스'라는 세례명이 등장하기도 한다. 또한 죽기 직전 수도 서원을 하고 '알렉시우스'라는 수도명을 받았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정교회 개종설은 동시대 기록에서 뒷받침되지 않아 많은 현대 학자들은 그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알기르다스의 후손으로는 트루베츠코이, 차르토리츠키, 상구슈코와 같은 귀족 가문들이 있다.
4. 1. 종교 정책
현대 역사가들은 게디미나스와 알기르다스가 이교 신앙을 유지한 것이 외교적 도구이자 무기로서 유용했다고 평가한다. 그들은 개종 약속을 권력과 독립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9][24] 헤르만 폰 바르트베르게와 얀 드 우고시는 알기르다스가 1377년 사망할 때까지 이교도였다고 기록했다. 동시대 비잔틴 기록 역시 서방의 자료를 뒷받침한다. 네일로스 총대주교는 알기르다스를 "불을 숭배하는 대공"으로 묘사했고,[10][25] 다른 총대주교 필로테오스는 "불경스러운" 알기르다스를 도운 모든 루스 귀족을 파문했다.[11][26] 그의 이교 신앙은 14세기 비잔틴 역사가 니케포로스 그리고라스의 기록에도 언급되었다.[12][27]알기르다스는 사망 후 마이시에갈라 근처 숲에서 18마리의 말과 많은 소지품과 함께 의식적인 화장으로 불태워졌는데,[13][29] 이는 아마도 쿠카베이티스의 숲 신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14][28] 그의 추정 매장지는 2009년부터 고고학적 조사가 진행 중이다.[15][30]
16세기 비호비에츠 연대기와 17세기 후스틴 연대기에서는 알기르다스가 1318년 마리아 비테프스카와 결혼하기 전에 정교회로 개종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빌뉴스에 여러 정교회 교회가 세워졌지만, 알기르다스의 개종에 관한 후대의 주장은 동시대 자료에서 찾아볼 수 없으며, 대부분의 학자는 이를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본다.[16][17][31][32] 그럼에도 일부 러시아 역사가(바티우시코프 등)는 알기르다스가 정교회 통치자였다고 주장한다. 키예프 페체르스크 수도원의 기념 책에는 1460년대 초반에 그의 후손이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세례명 '드미트리'가 기재되어 있다. 보이체흐 비유키-카야로비치, 마카리오스 1세, 블라디미르 안토노비치에 따르면 알기르다스는 죽기 직전에 수도사의 서약을 했고, '알렉시우스'라는 수도명으로 빌뉴스의 테오토코스 대성당에 매장되었다고 한다.
알기르다스는 빌뉴스의 안토니, 이오안, 에우스타티우스에게 죽음을 명했다고 전해지지만, 그들은 후에 정교회의 순교자로 칭송받았다.
4. 2. 죽음과 장례


현대 역사가들은 게디미나스와 알기르다스가 이교 신앙을 유지한 것이 유용한 외교적 도구이자 무기였다고 평가한다. 그들은 개종 약속을 권력과 독립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활용했다는 것이다.[9][24] 헤르만 폰 바르트베르게와 얀 드 우고시는 알기르다스가 1377년 여름에 죽을 때까지 이교도였다고 기록했다. 동시대 동로마 제국의 기록 역시 서방의 자료를 뒷받침한다. 네일로스 총대주교는 알기르다스를 "불을 숭배하는 대공"으로 묘사했고,[10][25] 필로테오스 총대주교는 "불경스러운" 알기르다스를 도운 모든 루스인 귀족을 파문했다.[11][26] 그의 이교 신앙은 14세기 동로마 역사가 니케포로스 그리고라스의 기록에도 언급된다.[12][27]
알기르다스는 죽은 후 마이시에갈라 근처 숲에서 18마리의 말과 많은 소지품과 함께 의식적인 화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13][29] 장례 장소는 쿠카베이티스의 숲 신사로 추정된다.[14][28] 그의 추정 매장지는 2009년부터 고고학적 조사가 진행 중이다.[15][30] 알기르다스의 후손에는 트루베츠코이, 차르토리츠키, 상구슈코와 같은 귀족 가문이 포함된다.
알기르다스가 정교회로 개종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논란이 많다. 16세기의 비호비에츠 연대기와 17세기의 후스틴 연대기는 그가 1318년 마리아 비테프스카와 결혼하기 전에 정교회로 개종했다고 주장한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빌뉴스에 여러 정교회 교회가 세워진 것은 사실이지만, 알기르다스 본인의 세례에 대한 후대의 주장은 동시대 자료에서 확인되지 않으며, 대부분의 현대 학자들은 이를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본다.[16][17][31][32]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러시아 역사가들은 알기르다스가 정교회 통치자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1460년대에 알기르다스의 후손이 작성한 키예프 동굴 수도원의 기념 책에는 그의 세례명이 '드미트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보이체흐 비유키-카야로비치, 마카리우스 불가코프, 블라디미르 안토노비치 등은 알기르다스가 죽기 며칠 전에 수도사 서약을 했고, '알렉시우스'라는 수도명으로 빌뉴스의 테오토코스 대성당에 묻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한편, 알기르다스는 빌뉴스의 안토니, 이오안, 에우스타티우스의 처형을 명령했다고 전해지는데, 이들은 훗날 정교회의 순교자로 시성되었다.
4. 3. 정교회 개종 논란
알기르다스의 종교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현대 역사가들은 게디미나스와 알기르다스가 이교 신앙을 유지하는 것을 외교적 도구이자 무기로 활용했다고 본다. 즉, 개종 약속을 권력과 독립을 지키는 수단으로 사용했다는 것이다.[9][24]
동시대의 여러 기록은 알기르다스가 이교도였음을 시사한다. 헤르만 폰 바르트베르게와 얀 드 우고시는 그가 1377년 사망할 때까지 이교 신앙을 유지했다고 기록했다. 비잔틴의 기록 역시 이를 뒷받침하는데, 니일로스 총대주교는 알기르다스를 "불을 숭배하는 왕자"[10][25]로 묘사했으며, 필로테오스 총대주교는 "불신자" 알기르다스를 도운 모든 루테니아 귀족을 파문했다.[11][26] 14세기 비잔틴 역사가 니케포루스 그리고라스 또한 그의 이교 신앙을 언급했다.[12][27] 알기르다스의 장례 방식 역시 이교 관행을 따랐는데, 그는 사망 후 마이시에갈라 근처 숲(쿠카베이티스 숲 신사로 추정[14][28])에서 18마리의 말과 많은 소지품과 함께 화장되었다.[13][29] 이 추정 매장지는 2009년부터 고고학적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다.[15][30]
반면, 후대의 기록에서는 알기르다스가 정교회로 개종했다는 주장이 나타난다. 16세기 비호비에츠 연대기와 17세기 후스틴스카 연대기는 그가 1318년 비테브스크의 마리아와 결혼하기 전에 정교회로 개종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그의 통치 기간 중 빌뉴스에 여러 정교회 교회가 세워졌지만, 그의 세례를 증명하는 동시대 자료는 없어 현대의 많은 학자는 이 개종설을 신뢰하지 않는다.[16][17][31][32] 그럼에도 일부 러시아 역사가(바티우시코프 등)는 알기르다스가 정교회 통치자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한 1460년대 알기르다스의 후손이 작성한 키예프 페체르스크 수도원의 기념 책에는 그의 세례명이 '데메트리우스'로 기록되어 있다. 보이치에흐 비유크 코야로비치, 마카리우스 1세, 볼로디미르 안토노비치 등은 알기르다스가 죽기 직전 '알렉시우스'라는 수도명으로 수도 서원을 했고, 빌뉴스의 테오토코스 대성당에 묻혔다는 설을 제기하기도 했다.
한편, 알기르다스는 빌뉴스 안토니, 존, 유스타티우스의 처형을 명령했다고 전해지는데, 이들은 후에 정교회에서 순교자로 시성되었다. 이는 그의 종교적 입장에 대한 복잡한 면모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알기르다스의 후손으로는 트루베츠코이, 차르토리츠키, 상구슈코 등의 귀족 가문이 있다.
5. 후계 구도
알기르다스는 그의 후계자들이 모스크바와 폴란드 사이에서 겪었던 것과 달리, 양측 사이에서 독자적인 노선을 유지하려 했다. 그는 리투아니아어와 루스어를 사용했으며, 가톨릭교회의 영향력 확대보다는 리투아니아의 전통적인 이교 신앙과 정교회에 더 무게를 두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그의 아들인 야기에워는 아버지와 다른 길을 선택했다. 야기에워는 폴란드 왕위에 오르면서 가톨릭으로 개종하였고, 이를 통해 이후 약 200년간 리투아니아와 폴란드를 지배하게 되는 야기에워 왕조의 기초를 마련했다.
5. 1. 첫 번째 부인: 비테브스크의 마리아
- 폴로츠크의 안드레이 (1325년 – 1399년 8월 12일 보르스클라 강 전투에서 사망): 폴로츠크 공작 (1342–1387), 프스코프 통치자 (1342–1348)
- 드미트리 1세 스타르시 (1327년 – 1399년 8월 12일 보르스클라 강 전투에서 사망): 브랝스크 공작 (1356–1379 및 1388–1399)
- 콘스탄틴 (1390년 10월 30일 이전 사망): 초르토리이스크 공작. 일부 기록에 따르면 카리요타스의 아들일 가능성도 제기된다.[18]
- 볼로디미르 올게르도비치 (1398년 10월 이후 사망): 키예프 대공 (1362–1394), 카필, 슬루츠크 공작. 올레르코비치 가문과 벨스키 가문의 조상이다.
- 표도르 (테오도르; 1399년 사망): 릴스크 공작 (1370–1399), 라트니 공작 (1387–1394), 브랝스크 공작 (1393)
- 표도라: 카라체프의 스비아토슬라프와 결혼했다.
- 아그리피나 (세례명 마리아; 1393년 사망): 수즈달의 보리스와 결혼했다.
5. 2. 두 번째 부인: 트베리의 울리아나
이름 (세례명) | 생몰년 | 주요 직책 및 정보 |
---|---|---|
요가일라 (브와디스와프) | c. 1351년 – 1434년 6월 1일 | 리투아니아 대공 (1377–1381, 1382–1392), 폴란드 국왕 (1386–1434) |
스키르가일라 (이반) | c. 1354년 – 1397년 1월 11일 (키예프에서 사망) | 트라카이 공작 (1382–1395), 키예프 (1395–1397), 리투아니아 섭정 |
카리부타스 (드미트리) | 1350년 이후 – 1404년 이후 | 노브호로드-시베르스키 공작 (1386–1392/93) |
렝베니스 (시몬) | 1431년 6월 19일 이후 사망 | 므스티슬라블 공작, 노브고로드 공화국 섭정 |
카리가일라 (카지미에시) | 1350년 이후 – 1390년 | 므스티슬라블 공작 |
비간타스 (알렉산데르) | 1350년 이후 – 1392년 6월 28일 | 케르나베 공작 |
스비트리가일라 (볼레스와프) | c. 1370년 – 1452년 2월 10일 (루츠크에서 사망) | 리투아니아 대공 (1430–1432), 볼히니아 공작 (1437–1452) |
케나 (조안) | c. 1350년 – 1368년 4월 27일 | 카지미르 4세, 포메라니아 공작의 아내 |
헬렌 | 1350년 이후 – 1438년 9월 15일 | 블라디미르 더 볼드의 아내 |
마리아 | 1350년 이후 출생 | 바이다일라와 고로데츠의 다비드의 아내 |
빌헤이다 (캐서린) | 1350년 이후 – 1422년 4월 4일 이후 | 요한 2세, 메클렌부르크-슈타르가르트 공작의 아내 |
알렉산드라 | 1350년 이후 – 1434년 6월 19일 | 시에모비트 4세, 마조비아 공작의 아내 |
야드비가 | 1350년 이후 – 1407년 이후 | 얀 3세 오브 오시비엥침의 아내 |
6. 평가
알기르다스는 모스크바 대공국과 폴란드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외교 정책을 펼쳤다. 그는 리투아니아어와 루테니아어를 포함한 여러 언어를 구사했으며, 로마 가톨릭교를 적극적으로 장려하기보다는 다수의 이교도 및 정교회 신자들을 포용하는 종교 정책을 유지했다. 그의 아들 요가일라는 폴란드 왕위에 오르면서 로마 가톨릭교로 개종했고, 이후 약 200년 동안 리투아니아와 폴란드를 통치한 야기에우워 왕조의 기초를 마련했다.[3]
알기르다스(Альгерд|알히예르트be)는 벨라루스에서도 중요한 역사적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벨라루스 영토 통합에 기여했으며, 성공적인 군사 지도자이자 중세 벨라루스의 주요 통치자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19][20] 2014년에는 비쳅스크 시 설립 1040주년을 기념하여 알기르다스를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졌다. 그는 리투아니아 대공이 되기 전 20년 이상 비쳅스크 공작으로 재임한 바 있다.[21] 또한, 2022년 12월 벨라루스 공화국 국립 은행은 알기르다스의 초상화가 담긴 청색 강 전투 기념 주화를 발행하기도 했다.[2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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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racyja.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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У Віцебску ўсталявалі помнік князю Альгерду. Фотарэпарта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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Нацыянальны банк выпусціў у абарачэнне памятныя манеты "Бітва на Сініх Вода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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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e of Empires 2: Definitive Edition adds new civilisations – the Poles and the Bohemi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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