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5년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1345년은 을유년으로, 원나라, 고려, 일본 등 여러 국가에서 연호가 사용된 해이다. 주요 사건으로는 조지아의 몽골에 대한 독립 투쟁, 트라페준타 제국의 내분, 몽골 제국의 분열, 킵차크 칸국의 카페 포위, 헝가리의 칸국 원정 등이 있었다. 또한, 중국 원나라는 쇠퇴기에 접어들었고, 유럽에서는 백년 전쟁이 진행되었으며 흑사병의 조짐이 나타났다. 이 해에는 공양왕, 페르난두 1세 등이 태어났고, 마르티노 자카리아, 알렉시오스 아포카우코스 등이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1345년 |
---|
2. 연호 및 기년
간지 | 일본[1] | 중국[2] | 조선[3] | 베트남[4] |
---|---|---|---|---|
을유 | 남조 : 고코쿠(興国일본어) 6년 | 원 : 지정(至正) 5년 | 고려 : 충목왕 원년 | 쩐 왕조 : 티에우퐁(紹豊) 5년 |
황기 | 단기 | 불멸기원 | 이슬람력 | 유대력 |
2005년 | 3678년 | 1887년 - 1888년 | 745년 - 746년 | 5105년 - 5106년 |
3. 주요 사건
1345년에는 그 밖에도 다음과 같은 사건들이 있었다.3. 1. 유럽
3월 24일, 기 드 숄리아크는 하늘에서 물병자리에 있는 토성, 목성, 화성이 합쳐지는 것을 관찰했으며, 같은 날 일식이 일어났다. 이 징조는 많은 사람들에게 불길한 징조로 해석되었고, 숄리아크는 나중에 이것을 흑사병의 원인으로 지목했다.[1][2]
4월에는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의 필리프 6세에게 "도전"을 제안했다.
8월에는 1345년 가스코뉴 원정의 일환으로 베르제라크 전투에서 잉글랜드 군대가 프랑스군에게 승리했다.[6]
10월 21일에는 오베로슈 전투에서 잉글랜드가 프랑스를 격파했다.[8]
11월 8일에는 잉글랜드가 가스코뉴의 라 레올을 점령했다.[9]
12월에는 잉글랜드가 가스코뉴의 아이귀용을 점령했다.
1345년 무렵, 백년 전쟁은 겨우 8년 정도 진행된 상태였다. 잉글랜드는 프랑스 왕위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고, 프랑스는 외국인의 지배를 거부했다. 8월, 잉글랜드의 헨리 그로스몬트는 1345년 가스코뉴 원정을 시작하여 베르제라크에서 대규모 프랑스 군대를 기습하여 결정적으로 격파했다. 이후 10월 21일, 프랑스군은 오베로슈 성을 포위 공격하고 있었는데, 헨리 그로스몬트의 군대가 저녁 식사 중에 기습하여 전쟁의 가장 결정적인 전투 중 하나에서 승리했다. 이로 인해 수년간 이 지역에서 잉글랜드의 지배가 확립되었다. 이전까지는 프랑스가 우세를 보였고, 잉글랜드는 심지어 조약을 제안하기도 했지만, 이 전투와 헨리 그로스몬트가 아제네 (생사르도 전쟁에서 20년 전에 잃었던 지역)와 앙굴렘을 점령하고, 토머스 대그워스 경 휘하의 브르타뉴 군대가 성과를 거두면서, 이 해에 전세가 다소 역전되었다.
1345년에는 이 전쟁에 새로운 무기인 대포가 도입되었다. 당시 "리발디스"라고 불렸던 대포는 1345년과 1346년 사이에 크레시 전투를 준비하는 동안 잉글랜드 추밀원 기록에서 처음 언급되었다.[23] 이들은 큰 화살과 단순한 포도탄을 발사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매우 중요했기에 왕실 의상실에서 직접 관리했다.[23]
백년 전쟁의 부수적인 분쟁 중 하나는 브르타뉴 왕위 계승 전쟁이었는데, 이는 브르타뉴 공국의 지배권을 두고 블로아 가문과 몽포르 가문 사이의 분쟁이었다. 프랑스는 블로아를, 잉글랜드는 몽포르를 지원했는데, 이는 두 국가 간의 더 넓은 분쟁의 축소판이 되었다. 블로아 가문은 1344년 초에 캥페르를 포위했고, 1345년까지 이 포위는 계속되었다. 1344년 여름과 가을 동안, 몽포르파는 붕괴되었다. 존 드 몽포르의 가장 충실했던 동맹들조차도 이제 투쟁을 계속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1345년 3월에 존이 마침내 잉글랜드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추종자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는 이제 브르타뉴에서 잉글랜드의 야망을 위한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에드워드 3세는 휴전이 만료되기 1년 전인 1345년 여름에 이를 파기하기로 결정했다. 그의 더 큰 전략의 일환으로, 노샘프턴 백작과 존 드 몽포르의 공동 지휘하에 군대가 브르타뉴로 파견되었다. 6월에 상륙한 지 일주일 만에 잉글랜드군은 노샘프턴의 부관 중 한 명인 토머스 대그워스 경이 브르타뉴 중부를 습격하여 조슬랭 근처 카드레에서 샤를 드 블로아를 격파하면서 첫 승리를 거두었다.
후속 조치는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았다. 몽포르가 캥페르를 탈환하려 할 때까지 추가 작전은 7월까지 지연되었다. 그러나 에드워드의 주 캠페인이 취소되었다는 소식이 프랑스 정부에 전달되었고 그들은 노르망디에서 증원을 보낼 수 있었다. 강화된 군대로 샤를 드 블로아는 포위를 풀었다. 패배한 몽포르는 에네봉으로 도망쳐 병에 걸려 9월 16일에 사망했다. 몽포르파의 후계자는 그의 5살 된 아들 존이었다.
겨울 동안 노샘프턴은 반도의 북쪽 측에 있는 항구를 점령하려는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길고 힘든 겨울 캠페인을 벌였다. 에드워드 3세는 1346년 여름에 이곳에 주력 부대를 상륙시킬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그러나 잉글랜드군은 노력에 비해 매우 적은 성과를 거두었다. 북부 브르타뉴는 조안나 드 뢰의 고향 지역이었고 이곳의 저항은 완강했다. 잉글랜드군에게 유일한 밝은 점은 라 로슈 데리엔 전투의 승리였는데, 이곳에서 작은 마을이 점령되었고 리처드 토테샴 휘하의 수비대가 설치되었다.
1345년 잉글랜드에서는 조앤 공주가 카스티야의 페드로, 카스티야의 알폰소 11세와 마리아 데 포르투갈의 아들과 약혼했다. 하지만 그녀는 결혼하지 못하고 그를 만나기 위해 스페인으로 가는 길에 흑사병으로 사망했다. 한편, 스페인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무슬림 영토를 되찾기 위한 투쟁을 계속했다. 같은 해 알폰소 11세는 레콩키스타의 일환으로 지브롤터를 공격했지만 점령하지 못했다.[24] 1345년에는 무함마드 5세가 지브롤터의 통치자가 되었다.[25] 요크 민스터 대성당은 북유럽에서 가장 큰 고딕 건축 대성당으로, 이 해에 완공되었다. 현재까지 이 지역에서 가장 큰 대성당으로 남아 있다. 잉글랜드는 여전히 프랑스 점령에서 회복 중이었다. 1345년까지 모든 학교 교육은 영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진행되었다.[26]
계승 전쟁과 백년 전쟁 외에도 프랑스는 흥미로운 시기를 겪고 있었다. 수십 년 전, 로마 교황청은 아비뇽으로 옮겨졌고 33년 후에야 로마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아비뇽 유수는 당시 교황 클레멘스 6세가 통치했으며, 그는 교회 자금으로 프랑스의 대 잉글랜드 전쟁을 지원했다. 또한 1345년에는 2세기 가까운 계획과 건설 끝에 파리의 유명한 노트르담 대성당이 완공되었다.[27]
"여름"(날짜 미상)에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이 4세의 아들인 루이 6세가 리투아니아 공주 쿤이군데와 결혼했다.[4]
1345년 1월 1일, 황제 루트비히 4세의 아들 로마의 루트비히 6세는 리투아니아 공주 쿤이군데와 결혼했다. 이 외에도 황제는 에노, 홀란트, 젤란트, 프리슬란트를 아내 홀란트의 마르가레테에게 수여함으로써 팽창 정책을 이어갔다. 이는 워른스 전투에서 빌헬름 4세가 사망한 이후의 조치였다. 마르가레테의 자매들이 소유한 이 지역의 세습적 권리는 무시되었다. 이러한 조치는 그의 팽창 정책을 싫어했던 독일의 세속 군주들과의 갈등을 더욱 심화시켰다. 그의 이 해의 행보는 결국 내전으로 이어졌고, 2년 후 뇌졸중으로 사망하면서 내전은 중단되었다.
3. 2. 아시아
조지아는 1259년 다비드 나린 왕의 지도 아래 몽골에 대항한 첫 번째 봉기가 시작된 이후 일 칸국으로부터 독립을 위해 투쟁해 왔으며, 그는 실제로 거의 30년 동안 전쟁을 벌였다. 마침내, 조지 5세 (1314–1346)는 일 칸국의 쇠퇴를 이용하여 몽골에 대한 조공을 중단하고, 조지아의 1220년 이전 국경을 회복했으며, 트라페준타 제국을 조지아의 영향권으로 되돌리는 데 성공했다. 1345년, 조지아는 독립의 황금기를 맞이하고 있었지만, 1년 후에 지도자가 사망할 예정이었다.
트라페준타는 알렉시우스 2세 (1297–1330)의 오랜 통치 기간 동안 가장 큰 부와 영향력을 누렸다.[10] 알렉시우스 2세의 통치가 끝날 때부터 알렉시우스 3세의 즉위 초기까지 이어진 일련의 황제 폐위와 암살이 벌어지는 시기였으며, 이는 1355년에 마침내 종식되었다. 제국은 내부 결속력, 상업적 우위 또는 영토를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다. 1345년의 통치자 미하일 메가스 콤네노스는 아들 요한 3세가 폐위된 후 1344년 트라페준타의 황제로 즉위했다. 그는 대공과 그의 각료들에게 제국 내 거의 모든 권력을 부여하고, 모든 공식적인 행동에서 그들의 조언을 구하겠다고 약속하는 문서에 서명해야 했다. 그러나 이 헌법적 실험은 트라페준타 시민들의 반대에 직면하여 오래가지 못했고, 시민들은 과두 정치에 반대하여 봉기했다. 미하일은 기회를 이용하여 권력을 되찾았고, 1345년 대공을 체포하여 투옥했다. 그는 또한 아들 요한을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아드리아노폴리스로 보냈는데, 그곳에서 그가 반란의 중심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감금되었다.[11]
몽골 제국은 13세기 말부터 분열되기 시작했다. 쿠빌라이 칸이 1294년에 사망한 후, 이미 네 개의 칸국으로 분열되었다: 원나라, 일 칸국, 킵차크 칸국, 차카타이 칸국.
일 칸국은 1335년 아부 사이드가 후계자 없이 사망한 이후 급격히 쇠퇴하고 있었다. 그 이후 초반 왕조와 잘라일 왕조를 포함한 다양한 파벌들이 일 칸의 왕위를 놓고 경쟁했다. 하산 쿠착이라는 초반 왕조의 왕자는 1343년 말에 암살당했다. 아부 사이드의 누이인 사티 베그의 아들 수르간은 고(故) 통치자의 형제 말리크 아슈라프와 그의 삼촌 야기 바스티와 함께 초반 왕조의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게 되었다. 그가 말리크 아슈라프에게 패배하자 어머니와 의붓아버지에게로 도망쳤다. 그 셋은 동맹을 맺었지만, 하산 부주르그 (잘라이르 왕조)가 약속했던 지원을 철회하기로 결정하면서 계획은 무산되었고, 그들은 디야르바크르로 도망쳤다. 수르간은 1345년에 다시 말리크 아슈라프에게 패배했고 아나톨리아로 도망쳤다. 그해의 주화가 헤스네 케이파에서 사티 베그의 이름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그녀의 마지막 흔적이다. 수르간은 아나톨리아에서 바그다드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결국 하산 부주르그에 의해 처형되었다. 사티 베그도 같은 운명을 겪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이는 알려져 있지 않다.
1345년, 킵차크 칸국은 카페에 대한 두 번째 포위 공격을 시도했다. (이전 시도는 카페가 흑해를 건너 물자를 조달할 수 있었기에 실패했다.) 1345년 포위 공격은 이듬해 몽골군이 흑사병에 걸려 퇴각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따라서 이 포위 공격은 흑사병이 유럽으로 전파되는 주요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헝가리 왕국은 킵차크 칸국의 세력이 커지는 위협을 인지하고, 1345년 타타르족과 칸국에 대한 원정을 시작하여, 몇 년 후 몰다비아가 되는 지역에서 군사 행동을 개시했다. 트란실바니아의 보이보드 언드라시 라크피와 그의 세케이인 전사들은 이 원정에서 승리하여, 칸의 매제인 현지 타타르 지도자 아틀라미쉬의 목을 베었고, 타타르족은 해안 지역으로 도망쳤다.[12]
아미르 카자간(1358년 사망)은 카라우스 부족의 지도자였으며(늦어도 1345년부터 1358년까지) 차카타이 울루스의 강력한 실질적 지배자였다(1346년~1358년). 1345년에 그는 카잔 칸에게 반란을 일으켰지만 실패했다. 이듬해 그는 다시 시도하여 칸을 죽이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차카타이 칸들의 실질적인 권력은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칸국은 결국 카자간의 권위를 존중하는 느슨한 부족 연합으로 전락했지만, 그는 주로 울루스의 남부 지역 부족들의 충성을 받았다. 그는 칸의 지위를 주장하지 않고 대신 아미르라는 자신의 칭호에 만족했으며, 그가 직접 선택한 꼭두각시들에게 칸의 지위를 부여했다. 첫 번째는 다니슈멘지(1346~1348)였고, 그 다음은 바얀 쿨리(1348~1358)였다.[13]
1345년 무렵, 중국의 원나라는 쇠퇴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가뭄, 홍수, 기근에 시달리는 백성들은 정부의 무능한 정책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황하는 1345년 지난에서 범람했다. 이 강은 1335년과 1344년에도 범람한 적이 있었다.[14] 또한, 왕조 통치자들 간에도 갈등이 있었다. 주원장은 1345년에 약 16세였다. 그의 부모와 형제들은 1344년에 역병이나 기근(또는 둘 다)으로 사망했고,[15] 그는 불교 사찰에 들어갔다. 1345년에 그는 사찰을 나와 반군에 합류했다.[16][17] 그는 원나라를 무너뜨리고 1368년에 명나라의 첫 번째 황제가 될 때까지 일련의 반란을 이끌었다.
1345년, 무함마드 빈 투글루크는 델리 술탄으로 통치하고 있었고, 다울라타바드 지역에서는 무슬림 군 지휘관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술탄국의 동쪽 경계인 벵골에서는 일리아스라는 장군이 동벵골을 점령하여 재통일을 이끌었다. 그는 가우르에 수도를 세웠다. 남인도에서는 하리하라 1세가 1336년에 비자야나가라 제국을 건국했다. 호이살라의 비라 발라라 3세는 1343년 마두라이 술탄과의 전투에서 사망한 후, 호이살라 제국은 성장하는 비자야나가라 제국에 병합되었다. 제국 건국 이후 처음 20년 동안 하리하라 1세는 퉁가바드라강 남쪽 대부분 지역을 장악하여 "푸르바파스치마 사문드라디샤바라"(동부 및 서부 대양의 지배자)라는 칭호를 얻었다. 자프나 왕국은 인도의 남쪽 끝과 스리랑카 일부를 포함했는데, 비자야나가라, 그리고 스리랑카 남부의 더 작은 코테 왕국과 끊임없이 갈등을 겪었다.
1336년부터 1392년까지 두 궁정에서 일본의 왕위를 주장했다. 이는 난보쿠초 시대 또는 남북조 시대로 알려졌다. 북조에서는 고무라카미 천황이 왕위를 주장했고, 남조에서는 고묘 천황이 왕위를 주장했다.
1345년, 수코타이는 새로운 시암 왕조로 넘어갔다.[18] 같은 해, 불교 저서인 『트라이푸미카타』가 시암 국왕에 의해 저술되었다.[19] 수코타이 황제 또한 유사한 불교 저서인 『트리 픔 프라 루앙』을 저술했다. 두 작품 모두 오늘날까지 존재하는 동남아시아의 우주론적 사상을 묘사하고 있다. 이 책들은 삶이 세 개의 세계로 나뉘어 31개의 존재 수준으로 구분된다고 말한다.[20] 앙코르는 쇠퇴기에 접어들어 수코타이 및 시암과의 소규모 충돌에 많은 자원을 할애해야 했고, 이는 참파가 대월을 공격할 수 있도록 했으며, 롭부리가 부상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이 모든 일들이 바로 이 해에 일어났다.[21] 또한 서쪽에는 몬 제국에 불교 식민지가 존재했는데, 이곳은 서쪽의 이슬람 델리 술탄국과 북쪽의 몽골계 중국에 맞서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인도네시아 군도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 마자파힛 제국은 트르부와나 위자야퉁가데위 여제가 통치했다. 트르부와나 여제의 통치 기간 동안 마자파힛 왕국은 더욱 커져 이 지역에서 유명해졌다. 가자 마다는 당시 여제와 함께 마자파힛의 '마하파티'(수상)로 통치했다. 그들의 통치 기간인 1345년에 유명한 무슬림 여행가 이븐 바투타가 인도네시아 군도의 사우드라를 방문했다. 바투타가 사우드라 방문에 대해 보고한 바에 따르면, 그 지역의 통치자는 무슬림이었으며, 사람들은 모스크에서 무슬림으로 예배하고 코란을 낭송했다. 이 시점까지 많은 이슬람 상인과 여행자들이 이미 인도양을 둘러싼 주요 도시와 해안을 따라 흩어져 있었다.[22]
3. 3. 발칸 반도
비잔틴 내전이 계속되는 가운데, 세르 정복 이후 마케도니아로 세력을 확장하려 한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은 자신을 "세르비아인과 로마인의 차르"로 선포했다. 연말까지 그의 세르비아 제국은 테살로니키를 제외한 모든 마케도니아와 두러스를 제외한 알바니아 전역을 포함했는데, 두러스는 앙주가 점령했다.[33] 이 해에 라틴 문자로 쓰인 최초의 세르비아어 텍스트가 기록되었으며, 세르비아는 그 후 수년 동안 발칸 반도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으로 인정받았다.
비잔틴 내전은 또한 로도페에서 불가리아의 강도 몸칠이 이끄는 준독립 공국이 등장하는 것을 허용했다. 몸칠은 요안니스 6세 칸타쿠제노스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섭정으로 충성심을 바꿨다. 7월 7일, 칸타쿠제노스의 주요 동맹국인 투르크의 아이딘 토후의 우무르 베그 군대는 페리테오리온에서 몸칠의 군대와 만나 패배시켰고, 몸칠 자신도 전투에서 사망했다.[34][35]
5월에는 우무르 베그가 이끄는 투르크족이 소아시아에서 발칸 반도로 항해하여 불가리아 영토를 습격했다.[3]
1345년에 그리스 섬 키오스가 제노바의 주스티니아니에게 넘어갔다. 제노바인들은 같은 해에 이스트라의 드비그라드 도시를 약탈했다. 아퀼레이아의 총대주교들은 오랫동안 이스트라 서부 해안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해 온 베네치아인들과 격렬하게 싸웠는데, 이 대결 중에 그 도시가 함락되었다.
3. 4. 아나톨리아 반도
1344년, 키프로스의 위그 4세는 베네치아 공화국 및 구호기사단과 동맹을 맺어 스미르나에서 튀르크 함대를 불태우고 도시를 점령했다.[39] 1345년 동맹군은 임브로스에서 육상과 해상에서 튀르크군을 격파했지만, 위그 4세는 이러한 노력에서 자신의 왕국에 큰 이점을 찾지 못하고 동맹에서 탈퇴했다.[39] 한편, 우무르 베그는 아이디노글루 베일릭을 이즈미르를 기지로 하는 강력한 해군 세력으로 변모시켜 특히 에게해에 있는 베네치아 영토에 위협을 가했다.[39] 베네치아는 구호기사단을 주축으로 여러 유럽 세력을 연합한 동맹(''산타 우니오'')을 조직하여 이즈미르와 튀르크 국가가 통제하는 서부 아나톨리아 반도 해안에 5차례 연속 공격을 감행했다.[39] 그 사이 튀르크인들은 에게해 섬을 목표로 해상 습격을 조직했다.[39]
1월 17일 튀르크군은 스미르나를 공격했고 오스만 제국은 소아시아 서부의 카라시를 병합했다.[43] 이후 교황 클레멘스 6세는 레반트에 대한 추가 공격을 촉구했다.[44]
3. 5. 아프리카
교황 클레멘스 6세는 1345년에 "아프리카 왕국의 획득은 우리와 우리의 왕권에 속하며, 다른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45] 같은 해에 이탈리아와 이집트의 맘루크 술탄국 사이에 무역이 시작되어, 향신료의 아드리아 해로의 안정적인 무역이 시작되었다.[46]
4. 탄생
- 3월 9일 - 공양왕 (고려의 마지막 왕)
- 1월 8일 - 카디 부르한 알딘, 시인, 카디, 시바스의 통치자 (1398년 사망)
- 3월 25일 - 랭커스터의 블랑슈, 랭커스터 공작 존 1세의 아내 (1369년 사망)
- 10월 31일 - 포르투갈의 페르난두 1세 국왕 (1383년 사망)
- 12월 7일 - 타도 민비아, 아바 왕국의 창건자 (1367년 사망)
- 나폴리의 카를 3세 국왕 (1386년 사망)
- 엘리너 말트래버스, 영국의 귀족 여성 (1405년 사망)
- 요한 볼플린 (1393년 사망)
- 보스니아의 헬레나 여왕 (1399년 사망)
- 구조 타다모토, 남북조 시대, 무로마치 시대의 공경 (1398년 사망)
- 다이가쿠 슈스이, 남북조 시대, 무로마치 시대의 임제종 승려 (1423년 사망)
- 니치조, 남북조 시대, 무로마치 시대의 법화종 진문류 승려 (1425년 사망)
- 무잉, 명의 군인 (1392년 사망)
- 유카이, 남북조 시대, 무로마치 시대의 진언종 승려 (1416년 사망)
5. 사망
- 1월 17일
- 마르티노 자카리아 : 전 키오스 영주 (튀르크인에 의해 스미르나에서 사망)
- 앙리 아스티 : 명목상의 콘스탄티노폴리스 라틴 총대주교 (튀르크인에 의해 스미르나에서 사망)
- 3월 13일 (고코쿠 6년/고에이 4년 음력 2월 9일) - 오타 도키쓰라 : 가마쿠라 시대, 남북조 시대의 관료 (* 1269년)
- 4월 14일 - 리처드 엉거빌 (리처드 드 버리라고도 함): 잉글랜드 작가이자 주교 (1287년 출생)
- 6월 8일 (고코쿠 6년/고에이 4년 음력 5월 8일) - 닛손 : 가마쿠라 시대, 남북조 시대의 닛켄종 승려 (* 1265년)
- 6월 11일 - 알렉시오스 아포카우코스 : 비잔틴 제국의 수석 장관 (정치범에 의해 린치)
- 6월 25일 - 헨리크 2세 : 시비도니차 공작 (* 1316년?)
- 7월 2일 (고코쿠 6년/고에이 4년 음력 6월 3일) - 지운 묘이 : 가마쿠라 시대, 남북조 시대의 임제종 승려 (* 1274년)
- 7월 7일 - 몸칠 : 로도페 산맥의 반독립적인 강도 통치자 (전투 중 사망)
- 7월 24일 - 야코프 판 아르테벨데 : 플랑드르 정치가 (1290년 출생) (폭도에 의해 살해)
- 7월 28일 - 마요르카의 산시아 : 나폴리 여왕 섭정 (c. 1285년 출생)
- 8월 22일 이후 - 엘주비에타 쿠야프스카 : 보스니아반스테판 2세 코트로마니치의 부인 (* 1315년/1320년)
- 9월 9일 (고코쿠 6년/고에이 4년 음력 8월 12일) - 가쿠카이 엔세이 : 가마쿠라 막부 9대 집권 호조 사다토키의 측실 (* 생년 미상)
- 9월 18일 - 칼라브리아 공작 앤드루 (1327년 출생)
- 9월 19일 - 안드레아 둥게리아 : 칼라브리아 공작, 나폴리 여왕 조반나 1세의 첫 번째 남편 (* 1327년)
- 9월 22일 - 랭커스터 백작 헨리 3세 : 잉글랜드 정치인 (1281년 출생)
- 9월 26일
- 에노 백작 윌리엄 2세 (바른스 전투에서 사망)
- 기욤 2세 : 에노 백작, 홀란트 백작, 젤란트 백작 (* 1307년)
- 11월 13일
- 페냐피엘의 콘스탄스 : 포르투갈의 페드루 1세의 왕비 (1323년 출생)
- 콘스탄사 마누엘 데 카스티야 : 포르투갈 왕 페드루 1세의 두 번째 왕비 (* 생년 미상)
- ''날짜 미상''
- 아에드 막 타르델바흐 오 콘코바르 : 코넛 왕
- 요안니스 바타치스 : 비잔틴 제국 장군 (살해)
- 요안니스 아포카우코스 : 테살로니카 총독 (처형)
- 야코프 판 아르테벨데 : 플랑드르의 정치가 (* 1290년?)
참조
[1]
서적
[2]
서적
The Black Death
Manchester University Press
[3]
간행물
Historiarum...
[4]
서적
Germans and Poles in the Middle Ages: The Perception of the 'Other' and the Presence of Mutual Ethnic Stereotypes in Medieval Narrative Sources
Brill
[5]
간행물
Byzantina historia
[6]
서적
The Hundred Years War: Trial by Battle
Faber & Faber
[7]
서적
The Literature of Friesland
Van Gorcum & Comp
[8]
서적
The Hundred Years War: Trial by Battle
Faber & Faber
[9]
서적
The Hundred Years War: Trial by Battle
Faber & Faber
[10]
서적
Trebizond: The Last Greek Empire
A. M. Hakkert
[11]
서적
Trebizond: The Last Greek Empire
A. M. Hakkert
[12]
서적
Cumans and Tatars
Cambridge University Press
[13]
서적
The Rise and Rule of Tamerlan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4]
웹사이트
Mongol Yuan Dynasty -- Political, Social, Cultural, Historical Analysis Of China
http://www.imperialc[...]
[15]
서적
China: A Macro History
M. E. Sharpe, Inc
[16]
서적
A Short History of China
F.P. Harper
[17]
서적
Historical Tales, the Romance of Reality: Japan and China
R.H. Whitten Company
[18]
서적
Footprint Laos Handbook
Footprint Handbooks
[19]
서적
Indian Buddhism: a Survey with Bibliographical Notes
Motilal Banarsidass Pub
[20]
서적
Phādāēng Nāng Ai
Bucknell University Press
[21]
서적
Strange Parallels
Cambridge University Press
[22]
서적
Islam- the Straight Path
Motilal Banarsidass Pub
[23]
서적
Crécy 1346: Triumph of the longbow
Osprey Publishing
[24]
서적
Reconquest and Crusade in Medieval Spain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25]
서적
Discovering Islam
New York: Routledge
[26]
서적
English Fiction from the Fifth to the Twentieth Century
Kessinger Publishing, LLC
[27]
서적
France: a Primary Source Cultural Guide
PowerPlus Books
[28]
간행물
"In Atti della Società ligure di storia patria"
[29]
간행물
«Studi Piemontesi»
[30]
뉴스
The lost wheel map of Ambrogio Lorenzetti
https://www.jstor.or[...]
1996-06
[31]
서적
Lithuania Ascending: A Pagan Empire Within East-Central Europe, 1295-1345
Cambridge University Press
[32]
서적
The History of Lithuania Before 1795
Lithuanian Institute of History
[33]
서적
The Late Medieval Balkans: A Critical Survey from the Late Twelfth Century to the Ottoman Conquest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34]
서적
The Late Medieval Balkans: A Critical Survey from the Late Twelfth Century to the Ottoman Conquest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35]
간행물
L'emirat d'Aydin...
[36]
서적
The Last Centuries of Byzantium, 1261–1453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37]
서적
The Late Medieval Balkans: A Critical Survey from the Late Twelfth Century to the Ottoman Conquest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38]
간행물
Patrologia Graecae
Migne
[39]
웹사이트
Venice and the Turcoman Begliks of Menteşe and Aydın, Section V of "Ottoman-Venetian diplomatics, the Ahd-Names"
https://web.archive.[...]
Leiden University
1998
[40]
서적
The Oxford History of Byzantium
Oxford UP
[41]
서적
The Oxford History of Byzantium
Oxford UP
[42]
서적
The Oxford History of Byzantium
Oxford UP
[43]
서적
Reconquest and Crusade in Medieval Spain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44]
서적
The Papacy and the Levant, 1204-1571
American Philosophical Society
[45]
서적
Reconquest and Crusade in Medieval Spain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46]
서적
Pacific Century
Westview Press
[47]
간행물
Burhãn al-Dīn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