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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트 포르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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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베르트 포르스터는 나치당의 고위 간부로, 자유 도시 단치히의 가울라이터(1930-1939)를 역임하며 제2차 세계 대전 중 폴란드인 학살에 깊이 관여했다. 1902년 독일에서 태어나 나치당에 가입, 국회의원을 거쳐 단치히 지역에서 나치 세력을 확장했다. 그는 폴란드 침공 이후 단치히-서프로이센 지역에서 대규모 학살을 자행했으며, 독일화 정책을 통해 폴란드인들을 탄압했다. 전후 체포되어 폴란드 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52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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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트 포르스터 - [인물]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1939년경의 SS-오베르그루펜퓌러 알베르트 포르스터
본명알베르트 마리아 포르스터
로마자 표기Albert Maria Forster
출생1902년 7월 26일
출생지퓌르트, 바이에른 왕국, 독일 제국
사망1952년 2월 28일 (49세)
사망 장소모코투프 교도소, 바르샤바, 폴란드 인민 공화국
사인교수형
경력
자유 도시 단치히 가울라이터1930년 10월 15일
임기 종료1939년 10월 26일
이전아르투어 그라이저
이후직책 폐지
자유 도시 단치히 국가 원수1939년 8월 23일
임기 종료1939년 9월 1일
이전아르투어 그라이저
이후직책 폐지
단치히-서프로이센 대관구 국가지사 겸 가울라이터1939년 10월 26일
임기 종료1945년 3월 27일
임명아돌프 히틀러
이전직책 신설
이후직책 폐지
정치
소속 정당나치당
군사
계급SS-오베르그루펜퓌러 (3성 장군)
개인 정보
배우자게르트루트 데츠 (1934년 5월 결혼)

2. 초기 생애 및 나치당 입당

알베르트 포르스터는 1902년 바이에른 왕국의 퓌르트에서 교도소 부소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퓌르트의 초등학교와 인문계 김나지움(Gymnasium)을 졸업한 후, 은행에서 근무했다.

1923년 11월, 포르스터는 나치당에 입당하여 퓌르트 지역 지부 지도자가 되었고, 돌격대(SA)에도 들어갔다. 1924년 5월, 반유대주의 선동 등 나치 활동으로 인해 은행에서 해고되었다. 뮌헨 폭동 이후 나치당이 불법화되자 대독일 민족 공동체에 참여하여 지역 지도자로 활동했다. 이 시기 율리우스 슈트라이허와 친분을 맺고, 그의 반유대주의 주간지 ''데어 슈튀르머''의 파트타임 기자로도 일했다. 1924년 2월 26일부터 4월 1일까지 뮌헨 법원에서 열린 에리히 루덴도르프, 아돌프 히틀러 등 8명의 쿠데타 가담자들에 대한 반역 재판을 방청했다.

1925년 2월, 아돌프 히틀러와 처음 만났고, 같은 해 4월 5일 나치당에 정식으로 복귀했다. 또한 나치당의 반유대주의 신문 『데어 슈튀르머』의 파트타임 저널리스트가 되었다.

2. 1. 초기 나치당 활동

포르스터는 1925년 2월 27일 히틀러에 의해 나치당이 재창당될 때 뮌헨에 참석했으며, 다시 퓌르트의 ''Ortsgruppenleiter''(지역 그룹 지도자)가 되었다. 1925년 4월 5일 정식으로 당에 재가입했다(당원 번호 1,924). 초기 당원으로서 ''Alter Kämpfer''(초기 투사)로 간주되었으며, 나중에 황금 당 배지를 받게 된다. 그는 곧 이 지역 전역에서 연설을 하는 ''Parteiredner''(당 연설가)가 되었다. 1926년 5월 12일, Schutzstaffel(SS)에 가입하여 1926년 7월 SS 그룹 "뉘른베르크-퓌르트"를 결성하고 이끌었다. 1928년 2월부터 독일 전국 상업 직원 협회(DHV)에서 지불 사무소 관리로 고용되었다. 1928년 독일 연방 선거에서 Reichstag 의석을 얻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그해 퓌르트에서의 지도력도 유지하면서 미들 프랑코니아의 당 ''Bezirksleiter''(지구 지도자)로 승진했으며, 1929년 12월까지 이 직책을 맡았다. 1930년 독일 연방 선거에서 선거구 26 프랑코니아에서 ''Reichstag''에 선출되었고, 나치 ''Reichstag'' 파벌의 노동 및 사무직원 문제 전문가 고문이 되었다. 선출 당시 그는 ''Reichstag''의 최연소 의원이었다.

3. 단치히 가울라이터 시절

1930년 10월 15일, 포르스터는 자유 도시 단치히(현재 그단스크, 폴란드)의 나치당 가울라이터가 되었다. 그는 아르투어 그라이저의 뒤를 이어 이 직책을 맡았으며, 이로 인해 둘 사이에는 불화가 시작되었고, 그라이저는 포르스터의 평생의 숙적이 되었다. 많은 주민들은 단치히 출신인 그라이저와 달리 포르스터를 외부인으로 여겨 반감을 가졌다. 포르스터는 곧바로 공격적인 선전 캠페인과 회원 모집을 시작했다. 1930년 11월, 그는 ''단치거 베오바흐터''(단치히 옵저버)를 창간하고 발행인이 되었다. 1930년 12월부터 1932년 12월까지 그는 당원 수를 1,310명에서 9,519명으로 늘렸으며, 단치히 SA 역시 150명에서 1,500명으로 확장되었다.[1]

알베르트 포르스터, 아르투어 그라이저, 에리히 폰 뎀 바흐-첼레프스키, , 빌헬름 코페 (1930년대 후반)

3. 1. 나치 정권 장악 이후

나치의 권력 장악 이후, 포르스터는 1933년 봄 단치히의 나치 점령을 주도하여 단치히 상원에서 나치당의 절대 다수를 확보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1933년 5월 10일 그에게 독일 국가 상업 사용인 협회(DHV)의 지도자 자리를 부여하여 독일 노동 전선 내 모든 성직자 단체들의 수장으로 만들었다. 1933년 9월 15일, 그는 프로이센 국가 위원회에 임명되었고, 1934년 1월에는 단치히의 제36 SS-''Standarte''의 명예 ''Führer''가 되었다. 1935년 1월, 그는 독일-북유럽 문화 및 정치 협력을 강화하는 임무를 맡은 ''Nordische Gesellschaft''(북유럽 협회)의 단치히 지부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1936년 1월 23일, 그는 ''Reichsführer-SS'' 하인리히 힘러의 개인 참모가 되었다.[1]

3. 2. 폴란드 침공과 전쟁 범죄

1939년, 베를린의 명령에 따라 포르스터는 나치 독일의 합병 압력을 높이기 위해 단치히에서 선동을 이끌었고, "폴란드는 단지 꿈일 뿐"이라고 선언했다.[4] 1939년 8월 23일 포르스터는 아르투어 그라이저를 대체하여 단치히의 국가 수반이 되었다. 단치히 문제는 1939년 나치의 폴란드 침공에 사용된 구실 중 하나였다. 포르스터는 유대인들을 "더럽고 미끄러운 종족"이라고 혐오했고, 폴란드인들이 추방된 후 폴란드의 일부를 통제하려는 욕망을 드러냈다.[5]

폴란드 침공 직후인 1939년 9월 8일, 포르스터는 단치히-서프로이센 군관구의 민정청장으로 임명되었고, 이 지역은 1939년 10월 8일 독일 제국에 합병되었다. 1939년 10월 21일, 군정이 종료되자 포르스터는 신설된 단치히-서프로이센 국가대관구의 ''가울라이터''(대관구 지도자) 겸 ''Reichsstatthalter''(국가 총독)로 임명되어 관할 구역 내 최고 당 및 정부 관직을 통제하게 되었다. 또한, 그는 신설된 ''Wehrkreis''(군관구) XX (신설 ''국가대관구''로 구성)의 국방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포르스터와 아르투어 그라이저에게 "독일화"를 지시하며, 그 방법에 대해서는 "아무 질문도 없을 것"이라고 약속했다.[6] 포르스터는 10년 안에 이 지역을 완전히 독일화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고,[7] 이 지역의 멸절 정책에 직접적인 책임을 졌다.[8]

포르스터는 단치히-서프로이센에서 비독일인 멸절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었다. 그는 "우리는 요람에서부터 이 민족을 멸절시켜야 한다"[9][10][11]고 말하며 폴란드인에 대한 집단 학살의 필요성을 개인적으로 믿었고, 폴란드인과 유대인은 인간이 아니라고 선언했다.[12][13]

포메라니아에는 약 70개의 수용소가 설치되어 폴란드인들은 살해, 고문, 여성과 소녀의 경우 강간을 당한 후 처형되었다.[14][15] 1939년 9월 10일부터 15일 사이에 포르스터는 지역 최고 나치 관리들과 회의를 열어 모든 "위험한" 폴란드인, 유대인, 폴란드 성직자를 즉시 제거하라고 명령했다.[16] 포르스터는 직접 처형을 명령하기도 했으며,[17] 1939년 10월 19일에는 그루지아츠 시의 나치 관리들에게 "충분한 폴란드인의 피를 흘리지 않았다"며 질책했다.[18]

크리스토퍼 브라우닝은 이를 "살인과 추방의 광란"이라고 묘사했는데, 정확한 희생자 수는 추정하기 어렵다. 포르스터는 1940년 2월까지 87,000명이 이 지역에서 "대피"했다고 보고했다.[19]

3. 2. 1. 피아슈니차 집단 학살

피아슈니차에서의 집단 학살


포르스터는 1939년 겨울부터 1940년까지 약 12,000명에서 16,000명에 달하는 폴란드인, 유대인, 체코인, 카슈브인, 심지어 독일인까지 학살한 피아슈니차 집단 학살의 책임자 중 한 명이었다.[20]

포르스터는 이러한 폭력을 직접 조장했다. 그는 바일헤로보의 프루신스키 호텔에서 "우리는 요람에 있는 폴란드인부터 시작하여 이가 득실거리는 폴란드인들을 제거해야 한다. 나는 당신의 손에 폴란드인의 운명을 맡긴다. 당신은 그들을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라고 연설하여, 민족 독일인들을 선동해 폴란드인들을 공격하게 했다. 호텔 앞에 모인 군중들은 "폴란드 개들을 죽여라!"와 "폴란드인에게 죽음을!"이라고 외쳤다.[20] 자엘프슈츠(Selbstschutz)는 나중에 피아슈니차 학살에 참여했다.[20] 1946년, 폴란드 국가 재판소는 포르스터를 피아슈니차 학살의 책임자로 판결했다.

3. 2. 2. 유대인 학살

포르스터는 유대인을 인간이 아닌 '해충'으로 여겨 근절해야 한다고 공공연히 주장했다.[21] 그는 유대인에 대한 어떠한 자비도 비난받아야 하며, 그들을 파괴하는 모든 수단이 정당하다고 믿었다.[21]

1939년 11월, 포르스터의 통치 하에 단치히-서프로이센 지역은 "유덴프라이(Judenfrei)", 즉 '유대인이 없는 곳'으로 선언되었다.[22] 이는 포르스터가 주도한 유대인 탄압 및 학살 정책의 결과였다. 유대인들은 지역에서 살해되거나 총독부로 추방되었다.[22] 나치 독일이 포메라니아를 병합하여 단치히-서프로이센에 편입된 폴란드 지역에서는 최대 3만 명의 유대인이 전쟁 중에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23]

1939년 9월 10일부터 15일 사이에 포르스터는 지역의 최고 나치 관리들과 회의를 열어 모든 "위험한" 폴란드인, 모든 유대인, 모든 폴란드 성직자를 즉시 제거하라고 명령했다.[16]

3. 2. 3. 독일화 정책

나치 정책과 포르스터가 시행한 테러는 폴란드인들에게 몰살 또는 독일화라는 두 가지 선택지 밖에 제시하지 않았다.[24] 포르스터는 그가 책임진 지역의 인구에 대한 집단 학살과 강제적인 문화 동화 정책을 추구했다.[24] 전쟁 초기, 포르스터는 1940년 2월까지 자신의 가우에서 콩그레스 폴란드 출신의 모든 폴란드인과 모든 유대인을 민족 청소할 계획이었지만, 농업 노동자 문제와 독일 정착민의 부적절한 특성으로 인해 그의 정책을 수정해야 했다.[25][26]

포르스터는 "독일 혈통"을 주장하는 모든 폴란드인을 독일인으로 기꺼이 받아들였다.[24] 실제로 폴란드인이 독일 조상을 가졌는지 여부를 결정하는 방법은 나치 당원들을 보내 지역 폴란드인들을 인터뷰하는 것이었다. 독일 조상이 있다고 진술한 모든 폴란드인의 답변은 문서 없이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졌다.[27] 독일화를 거부하는 것은 총독부로의 추방 또는 강제 수용소 수감으로 처벌받았다.[28] 어떤 경우에는 포르스터가 정한 할당량을 충족시키기 위해 전체 정착촌이 독일인 거주지로 분류되기도 했다.[29] 식량 생산과 같은 실제적인 문제들이 포르스터의 추방 대상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30]

1939년 알베르트 포르스터 연설


포르스터는 아르투어 그라이저와 대립했는데, 그는 '독일 민족 강화 국가판무관'인 하인리히 힘러에게 포르스터의 동화 정책이 나치 인종 이론에 위배된다고 불만을 제기했다. 힘러가 이 문제에 대해 포르스터에게 접근했을 때, 포르스터는 히틀러가 각 가울라이터에게 자신이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지역을 운영하도록 허용한다는 것을 알고 단순히 그를 무시했다. 그라이저와 힘러 모두 히틀러에게 포르스터가 수천 명의 폴란드인들을 독일인으로 분류하도록 허용하고 있다고 불만을 제기했지만, 히틀러는 그들에게 이 문제를 다시 떠넘기며 포르스터와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라고 말했다. 이것은 어려운 과제였다. 힘러가 포르스터에게 자신의 방식을 설득하려는 시도는 분노와 경멸을 불러일으켰다. 리하르트 힐데브란트와의 논의에서 포르스터는 "내가 힘러처럼 생겼다면 인종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텐데"라고 비웃었다.[31]

이러한 정책의 결과로 포르스터의 가우에 있는 폴란드계 인구의 3분의 2가 ''도이체 폴크스리스트(Deutsche Volksliste)''에 따라 독일인으로 분류되었다.[29]

3. 3. 친위대(SS)와의 갈등

포르스터는 아르투어 그라이저와 대립했는데, 그라이저는 '독일 민족 강화 국가판무관'인 하인리히 힘러에게 포르스터의 동화 정책이 나치 인종 이론에 위배된다고 불만을 제기했다.[31] 힘러가 이 문제에 대해 포르스터에게 접근했을 때, 포르스터는 아돌프 히틀러가 각 가울라이터에게 자신이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지역을 운영하도록 허용한다는 것을 알고 그를 무시했다. 그라이저와 힘러는 히틀러에게 포르스터가 수천 명의 폴란드인들을 독일인으로 분류하도록 허용하고 있다고 불만을 제기했지만, 히틀러는 그들에게 이 문제를 다시 떠넘기며 포르스터와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라고 말했다.[31] 힘러가 포르스터에게 자신의 방식을 설득하려는 시도는 분노와 경멸을 불러일으켰다. 리하르트 힐데브란트와의 논의에서 포르스터는 "내가 힘러처럼 생겼다면 인종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텐데"라고 비웃었다.[31]

이러한 정책의 결과로 포르스터의 가우에 있는 폴란드계 인구의 3분의 2가 ''도이체 폴크스리스트(Deutsche Volksliste)''에 따라 독일인으로 분류되었다.[29]

포르스터의 SS와의 갈등은 독일계에게도 직접적이고 해로운 결과를 가져왔다. 전쟁 동안 수십만 명의 독일계가 나치-소련 협정에 따라 소련에서 폴란드로 이동하여 나치 점령 폴란드의 식민지 개척자로 사용되었다. 그라이저가 자신의 Reichsgau에 그들을 수용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는 동안, 포르스터는 그들을 적대적으로 바라보며 자신의 지역에는 젊은 농부가 필요하지만 난민들은 나이가 많고 도시화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처음에 그들 중 누구도 자신의 제국 대관구로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했다. 발트 3국에서 온 수천 명의 독일계를 태운 배가 단치히에 도착했을 때, 그는 처음에 힘러가 그들이 단치히-서프로이센에 정착하지 않고 즉시 다른 곳으로 이동하겠다고 약속하지 않는 한 입국을 거부했다. 힘러는 그 약속을 할 수 없었다. 필사적인 힘러와의 긴 전화 상담 후에야 포르스터는 승객들이 하선하도록 허용했는데, 비록 대부분은 궁극적으로 그 지역을 떠나지 않았지만, 그들이 제국 대관구에 임시로 거주한다는 조건이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는 물러서야 했고, 1944년 6월까지 53,258명의 식민지 개척자가 단치히-서프로이센에 정착했는데, 이는 바르테가우에 정착한 421,780명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숫자였다. 포르스터의 독일화 정책은 그라이저의 대규모 추방보다 자유 토지와 주택을 덜 남겼지만, 포르스터가 독일계 난민을 SS의 보호 대상자로 인식한 것이 그의 태도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4. 전후 재판 및 처형

전쟁이 끝난 후 포르스터는 독일의 영국 점령 구역으로 피신했다. 영국은 그를 폴란드 인민 공화국에 넘겼다.

1948년, 포르스터는 폴란드 법원에서 전쟁 범죄와 반인륜적 범죄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최고 국가 재판소).[1] 그는 구금되었고 형 집행은 연기되었다. 1952년 2월 21일, 폴란드 대통령 아우구스트 잘레스키는 사면을 거부했고, 포르스터는 그단스크에서 바르샤바의 모코투프 감옥으로 이송되어 1952년 2월 28일에 교수형에 처해졌다.[1] 1949년 이후 소식을 듣지 못했던 그의 아내는 1954년에 그의 사망 소식을 통보받았다.[1]

5. 추가 정보

(섹션 제목과 문서 제목은 출력하지 않습니다.)

5. 1. 결혼

1934년 5월, 포르스터는 게르트루트 데에츠와 결혼했다. 결혼식은 베를린 총리실에서 아돌프 히틀러루돌프 헤스가 증인 겸 하객으로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2]

참조

[1] 문서 The Nazis: A warning from history: The Wild East.
[2] 웹사이트 A Psychological Analysis of Adolph Hitler: His Life and Legend http://www.iiit.ac.i[...] Office of Strategic Services 1943
[3] 간행물 Yad Washem Studies on the European Jewish Catastrophe and Resistance - Issue 5 - Page 162 1963
[4] 잡지 LIFE Magazine 1939-08-21
[5] 서적 Blitzkrieg w Polsce, wrzesien 1939
[6] 서적 The Nazis: A Warning From History New York: New Press 1997
[7] 서적 Albert Forster. Gdański namiestnik Hitlera. Gdańsk: Wydawnictwo Oskar 2002
[8] 서적 Zagłada Żydów w obozie koncentracyjnym Stutthof Muzeum Stutthof w Sztutowie 2001
[9] 서적 Bylem numerem: swiadectwa z Auschwitz Wydawn. Sióstr Loretanek 2003-01-01
[10] 서적 Piasnica, miejsce martyrologii i pamieci: z badan nad zbrodniami hilerowskimi na Pomorzu 1989
[11] 서적 Albert Forster: gdanski namiestnik Hitlera : zbrodnie hitlerowskie w Gdansku i Prusach Zachodnich POLNORD - Gdansk 2002
[12] 서적 Zaglada Zydów w obozie koncentracyjnym Stutthof Muzeum Stutthof w Sztutowie. 2001
[13] 서적 Albert Forster: gdanski namiestnik Hitlera 2002
[14] 서적 Byl rok 1939. Operacja niemieckiej policji bezpieczenstwa w Polsce. Intelligenzaktion. Warszawa: Instytut Pamieci Narodowej 2009
[15] 서적 Eksterminacja inteligencji polskiej na Pomorzu Gdanskim
[16] 서적 Albert Forster. Gdanski namiestnik Hitlera. Gdansk: Wydawnictwo Oskar 2002
[17] 서적 Albert Forster. Gdanski namiestnik Hitlera. Gdansk: Wydawnictwo Oskar 2002
[18] 서적 Eksterminacja inteligencji polskiej na Pomorzu Gdanskim
[19] 서적
[20] 웹사이트 Biblioteka Publiczna Gminy Wejherowo im. Aleksandra Labudy w Bolszewie http://www.bpgw.org.[...] 2010-06-30
[21] 서적 Zagłada Żydów na polskich terenach wcielonych do Rzeszy Instytut Pamięci Narodowej 2008
[22] 서적 Albert Forster. Gdański namiestnik Hitlera. Gdańsk: Wydawnictwo Oskar 2002
[23] 서적 Zagłada Żydów na polskich terenach wcielonych do Rzeszy
[24] 서적 The Nazis: A Warning From History New York: New Press 1997
[25] 문서 Wladze i spoleczenstwo niemieckie na Pomorzu Wschodnim i Kujawach w latach okupacji niemieckiej (1939-1945): materialy XIV sesji popularnonaukowej w Toruniu w dniu 13 listopada 2004 roku Katarzyna Minczykowska, Jan Sziling Fundacja "Archiwum i Muzeum Pomorskie Armii Krajowej oraz Wojskowej Sluzby Polek" 2005
[26] 문서 The Eagle Unbowed: Poland and the Poles in the Second World War
[27] 서적 The Nazis: A Warning From History New York: New Press 1997
[28] 뉴스 Pobór Polaków z Pomorza do Wehrmachtu. Biuletyn IPN nr 8 – 9 (67 – 68) 2006-08
[29] 서적 Hitler's Empire: How the Nazis Ruled Europe Penguin Press 2008
[30] 서적 The Eagle Unbowed: Poland and the Poles in the Second World War Harvard University Press 2012
[31] 서적 Himmler's Auxiliaries: The Volksdeutsche Mittelstelle and the German National Minorities of Europe, 1933-1945 The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32] 서적 Hitler's Empire: How the Nazis Ruled Europe Penguin Press 2008
[33] 뉴스 Nie zamierzam podejmować żadnej polemiki – wywiad z prof. Witoldem Kuleszą. Biuletyn IPN nr 12-1 (35-36) 2003-12
[34] 뉴스 Wypędzenia z Pomorza. Biuletyn IPN 2004-05
[35] 서적 Second World War Weidenfeld and Nicolson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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