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폰소 1세 데스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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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폰소 1세 데스테는 에르콜레 1세 데스테의 아들로, 1505년 아버지의 사망 이후 페라라 공작이 되었다. 그는 형제들과의 암살 음모를 겪었으며, 이탈리아 전쟁에서 유연한 외교술과 강력한 군사력을 통해 페라라의 입지를 지켰다. 캉브레 동맹에 참여하고 교황과의 갈등 속에서도 프랑스와의 동맹을 유지했으며, 교황에게 파문당하고 영지를 몰수당하기도 했다. 군사적 업적을 통해 영토를 확장하고, 특히 '줄리아'라는 대포를 제작하여 군사력을 강화했다. 예술 후원에도 힘써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을 후원했으며, 티치아노, 조반니 벨리니 등 유명 예술가들의 작품을 수집했다. 그는 세 번 결혼했으며, 루크레치아 보르자와의 사이에서 에르콜레 2세를 낳았다. 알폰소 2세 대에 데스테 가문의 적통이 끊어지면서, 사생아인 체사레 데스테가 계승했으나 교황령에 페라라 공국을 빼앗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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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폰소 1세 데스테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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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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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페라라 공작 |
통치 기간 | 1505년 1월 25일 – 1534년 10월 31일 |
이전 통치자 | 에르콜레 1세 데스테 |
다음 통치자 | 에르콜레 2세 데스테 |
배우자 | 안나 스포르차 (1491년 결혼, 1497년 사망) |
자녀 | 에르콜레 2세 데스테 |
가문 | 에스테 가 |
아버지 | 에르콜레 1세 데스테 |
어머니 | 나폴리의 엘레오노라 |
출생일 | 1476년 7월 21일 |
출생지 | 수비아코, 교황령 |
사망일 | 1534년 10월 31일 |
사망지 | 페라라, 페라라 공국 |
2. 생애
알폰소 1세는 에르콜레 1세 데스테와 나폴리의 레오노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1505년 아버지 에르콜레 1세가 사망하자 페라라 공작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캉브레 동맹 전쟁 시기 알폰소는 프랑스의 루이 12세와 동맹을 맺고 베네치아 공화국에 대항하는 캉브레 동맹에 가담했다. 1510년 교황 율리오 2세가 베네치아와 동맹을 맺고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자, 알폰소는 프랑스 편에 서서 교황과 대립하였다. 율리오 2세는 알폰소가 루크레치아 보르자와 결혼하여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사위가 된 점[10], 코마치오 염전 문제로 교황령의 소금 독점 면허와 갈등을 빚은 점[11], 폴레시네 지역 지배권을 두고 베네치아를 공격한 점 등을 이유로 알폰소를 파문하고 페라라를 교황령에 편입시켰다.
1526년에서 1527년 사이에는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가 교황 클레멘스 7세에 대항한 원정에 참여했으며, 1530년 교황은 알폰소에게 모데나와 레조 에밀리아의 소유권을 다시 인정하였다.
2. 1. 초기 생애와 가문
에르콜레 1세 데스테와 나폴리의 레오노라의 아들이다.1505년 알폰소가 공작 작위를 물려받기 직전, 그의 동생 페란테 데스테와 배다른 형제 줄리오 데스테가 그와 그의 또 다른 남동생 이폴리토 데스테에 반대하는 음모를 꾸몄다.[3] 1506년 9월, 대역죄 혐의로 두 사람은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나중에 교수형으로 감형되었다가 최종적으로 종신형으로 변경되었다. 이들은 토레 델 레오니의 두 독방에 각각 격리 수용되었다. 페란테는 34년 후 독방에서 사망했고, 줄리오는 53년 동안 유폐 생활을 한 후 1559년 사면받아 풀려났다. 석방 후, 줄리오는 페라라 거리에서 시대에 뒤떨어진 옷차림으로 인해 시민들에게 조롱받았다고 한다.
2. 2. 공작 즉위와 암살 음모
에르콜레 1세 데스테와 나폴리의 레오노라의 아들인 알폰소는 1505년 1월에 아버지 에르콜레가 사망하자 공작이 되었다. 통치 첫 해에 그는 동생 페란테 데스테와 이복 형제 줄리오 데스테가 자신과 다른 형제인 이폴리토 데스테를 상대로 꾸민 음모를 밝혀냈다.[3] 1506년 9월에 대역죄와 반역죄 재판이 열렸고, 예상대로 사형이 선고되었지만, 페란테와 줄리오가 교수대에 오르려는 순간 공작이 형량을 종신형으로 감형했다는 소식을 들었다.그들은 토레 데이 레오니의 두 감방으로 끌려갔다. 페란테는 34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다가 감방에서 죽었고, 줄리오는 53년 동안 갇혀 있다가 1559년에 사면을 받았다. 줄리오는 석방 후 페라라 거리에서 유행에 뒤떨어진 옷차림으로 조롱을 받으며 1561년에 사망했다.
이탈리아 전쟁에서 알폰소는 유연성과 경계심, 그리고 페라라의 독보적인 요새를 통해 경쟁 세력 사이에서 위태로운 입지를 지켰다. 그는 베네치아 공화국에 대항하여 캉브레 동맹에 참여했으며, 교황 율리우스 2세가 베네치아와 평화 조약을 맺은 후에도 프랑스의 루이 12세의 동맹으로 남았다.
1510년 율리오 2세는 그를 파문하고 그의 봉토를 몰수하여 페라라를 교황령에 추가했다. 그러자 알폰소는 베네치아와 교황군에 맞서 싸워 폴레셀라 전투에서 승리하고 볼로냐를 점령했으며, 라벤나 전투 (1512년)에서 프랑스의 승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러한 성공은 그의 공장에서 생산된 페라라의 포병에 기반을 두었는데, 이는 당시 최고 수준이었다.[4][5]
2. 3. 캉브레 동맹 전쟁과 교황과의 갈등
캉브레 동맹 전쟁 시기 알폰소는 베네치아 공화국에 대항하는 캉브레 동맹에 가담하여 프랑스의 루이 12세와 동맹을 유지했다. 1510년 교황 율리오 2세가 베네치아와 동맹을 맺고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자 프랑스 편에 서서 교황과 대립하였다. 율리오 2세는 알폰소가 루크레치아 보르자와 결혼하여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사위가 된 점[10], 코마치오 염전으로 인해 교황령 소금 독점 면허와 갈등을 빚은 점[11], 폴레시네 지역 지배를 위해 베네치아를 공격한 점 등을 이유로 그를 파문하고 페라라를 교황령에 편입시켰다.[12]1511년 5월, 볼로냐 시민들이 율리오 2세에 반대하는 봉기를 일으키자, 알폰소는 이를 지원하여 미켈란젤로가 제작한 교황의 청동 조각상을 파괴하고, 그 파편으로 '라 줄리아'라는 대포를 주조하여 카스텔로 성벽에 설치했다.[13][14] 알폰소는 폴레셀라 전투에서 승리하고 볼로냐를 점령했으며, 라벤나 전투 (1512년)에서 프랑스군 승리에 기여하는 등 교황군과 베네치아군에 대항하여 큰 활약을 펼쳤다. 이러한 그의 군사적 성공에는 당시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던 페라라의 포병 기술이 큰 역할을 했다.[4][5]
1526년에서 1527년에는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가 교황 클레멘스 7세에 대항한 원정에 참여하였으며, 1530년 교황은 알폰소에게 모데나와 레조 에밀리아의 소유권을 다시 인정하였다.
2. 4. 볼로냐 반란과 '줄리아' 대포
1511년 5월, 교황 율리오 2세의 통치에 반대하는 볼로냐 시민들은 봉기를 일으켰다.[12] 1506년에 교황이 직접 군대를 지휘하여 볼로냐를 정복하고[12] 통치가문인 벤티볼리오 가문의 조반니 2세를 파문하였는데, 이후에 새로 부임한 교황 대표들이 그동안 악정을 일삼았기 때문이다. 시민들은 산 페트로니아 성당 정문 위에 위치한 4.2미터의 거대한 교황 동상(미켈란젤로의 작품)을 쓰러뜨려 산산조각으로 때려 부수었다. 이 동상은 1506년에 볼로냐 정복을 기념하여 율리오 2세가 제작을 의뢰했던 것이었다.[13] 부서진 조각들을 알폰소 데스테가 고철로 매입하였고, 대포 제작의 일인자이기도 했던 그는 깨진 동상 조각들을 녹여서 튼튼한 박격포를 만들었다. 그는 이 박격포에 '줄리아'라는 여자 이름을 붙였다.[14]2. 5. 군사적 업적
알폰소 1세 데스테는 이탈리아 전쟁에서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발휘하여 페라라 공국을 지켜냈다. 그는 캉브레 동맹 전쟁 (1508~16) 당시 캉브레 동맹에 가담하여 베네치아 공화국에 맞섰으며, 교황 율리오 2세가 베네치아와 동맹을 맺고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자 프랑스 편에 서서 싸웠다.[10]1510년, 교황 율리오 2세는 알폰소 1세를 파문하고 페라라를 교황령에 편입시키려 했으나,[11] 알폰소 1세는 이에 굴하지 않고 폴레셀라 전투에서 승리하고 볼로냐를 점령하는 등 군사적 역량을 과시했다. 특히 1511년 볼로냐 시민들이 교황에 반대하여 봉기했을 때, 시민들이 파괴한 율리오 2세의 동상 조각을 녹여 '라 줄리아'라는 대포를 만들어[14] 1512년 라벤나 전투에서 프랑스군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4][5]
1526~1527년에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편에 서서 교황 클레멘스 7세에 대항하였고, 1530년 교황은 알폰소 1세의 모데나와 레지오 공작령 소유권을 인정하였다.
2. 6. 코니아크 동맹 전쟁과 교황과의 화해
1510년 교황 율리오 2세는 알폰소를 파문하고 그의 통치권을 박탈한다고 선언했으며, 이에 따라 페라라는 교황령에 편입되었다. 이는 알폰소가 교황령과 베네치아가 동맹을 맺고 프랑스와 다툴 때 프랑스 편에 가담했기 때문이었다. 이 파문을 통해 교황은 페라라 침공의 명분을 얻었다.[10] 알폰소와 교황 율리오 2세의 갈등은 코마치오 염전과 소금 독점 면허 문제,[11] 폴레신 지역 지배권 다툼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1511년 5월, 볼로냐 시민들은 교황 율리오 2세의 통치에 반대하는 봉기를 일으켰다. 1506년 교황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볼로냐를 정복한 후[12] 벤티볼리오 가문의 조반니 2세를 파문하고 임명한 교황 대표들의 악정이 원인이었다. 시민들은 산 페트로니아 성당 정문 위에 있던 미켈란젤로가 제작한 4.2미터 크기의 교황 동상을 파괴했다.[13] 알폰소 데스테는 이 동상의 조각들을 고철로 매입하여 '줄리아'라는 이름의 박격포를 만들었다.[14]
알폰소는 폴레셀라 전투(1509)에서 볼로냐를 획득하고, 라벤나 전투(1512년 4월)에서 프랑스군 승리에 기여하는 등 베네치아군과 교황군에 맞서 싸웠다. 이러한 군사적 성공에는 'La Giulia'라는 대포를 비롯한 페라라제 병기들의 역할이 컸다.
1526년에서 1527년에는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가 교황 클레멘스 7세에 대항한 원정에 참여했다. 1530년, 교황은 알폰소의 모데나와 레조 공작령 소유권을 다시 인정했다.
2. 7. 결혼과 자녀
알폰소 1세는 1491년 1월에 밀라노 공작 루도비코 스포르차의 조카인 안나 마리아 스포르차와 결혼했다. 같은 결혼식에서 루도비코는 알폰소의 여동생 베아트리체 데스테와 결혼했는데, 이 이중 결혼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계획했다.[3]정치적으로 이 결혼은 두 가문 간의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 계획되었다. 1497년 11월 30일 안나 스포르차의 죽음은 그 유대의 종말을 알렸는데, 베아트리체 데스테가 같은 해 1월에 사망했기 때문이다.[3]
1501년, 알폰소는 알렉산데르 6세의 딸 루크레치아 보르자와 재혼했다. 루크레치아에게는 세 번째 결혼이었다.[3]
루크레치아 보르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녀는 다음과 같다:
출생년도 | 자녀 이름 |
---|---|
1502 | 사산된 딸[3] |
1505 | 알레산드로 데스테[3] |
1508 | 페라라 공작 에르콜레 2세 데스테[3] |
1509 | 이폴리토 2세 데스테 (밀라노 대주교, 추기경)[3] |
1514 | 알레산드로 데스테[3] |
1515 | 레오노라 데스테 (수녀, 작곡가)[3] |
1516 | 프란체스코 데스테 (마살롬바르다 후작)[3] |
1519 | 이사벨라 마리아 데스테 (출생 및 사망)[3] |
1519년 6월 24일 루크레치아의 죽음 이후, 그는 라우라 디안티와 결혼하여 두 명의 사생아 아들, 알폰소와 알폰시노 데스테를 두었다 (나중에 적자로 인정됨).[3]
2. 8. 예술 후원

알폰소 1세는 형 이폴리토 1세 추기경과 마찬가지로, 당대 최고의 예술 후원자 중 한 명이었다. 노년의 조반니 벨리니는 그를 위해 1514년에 벨리니의 마지막 완성작인 ''신들의 향연''을 그렸다. 그는 벨리니의 제자인 티치아노에게 일련의 그림을 의뢰했다. 1529년, 알폰소는 금박을 입힌 천장 아래 흰색 대리석으로 마감된 벽에 예술 작품을 더 잘 전시하기 위해, 그의 시대에 가장 훌륭한 갤러리인 ''스튜디오'' 또는 ''camerino d'alabastro''(작은 옥수 방)을 만들었는데, 일반적으로 "Camerino"라고 알려져 있다.[7] 대리석의 창백함은 이 방의 이름을 ''설화 석고''의 방으로 이끌었다. 마리오 에퀴콜라가 1511년 10월 9일에 작성한 문서에는 "여섯 개의 우화(fabule) 또는 역사(istorie)가 배치될 페라라의 방 그림 계획이 기록되어 있다. 나는 이미 그것들을 찾았고, 글로 작성하여 제시했다."라는 내용이 있다. 1514년 11월 14일자 알폰소의 편지에는 방을 위해 완성된 첫 번째 그림인 조반니 벨리니에게 지불을 승인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티치아노는 알폰소의 초상화 두 점을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첫 번째는 널리 호평을 받았으며, 미켈란젤로가 특별히 언급했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가 외교 선물로 강요했다. 알폰소는 티치아노에게 자유로운 복제품을 그리게 했고, 이후 티치아노는 자신의 모델에 맞게 이를 수정했다.[8] 그 후 20년 동안 티치아노는 ''[http://www.abcgallery.com/T/titian/titian17.html 비너스 숭배]''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http://www.abcgallery.com/T/titian/titian19.html 안드리안의 주신제]'' (프라도, 마드리드), 그리고 ''바쿠스와 아리아드네'' (내셔널 갤러리, 런던)를 추가로 그렸다. 도소 도시는 또 다른 대형 주신제를 제작했으며, 아이네이스의 장면을 묘사한 코니스를 위한 천장 장식과 채색된 프리즈도 기여했는데, 이는 영웅들을 동시대 의상으로 묘사하여 즉시성을 얻었다. 알라바스터 방의 모든 주신제는 사랑을 다루었으며, 일부는 결혼을 언급했다. 에스테 가문이 1598년 페라라에 대한 통제력을 잃은 후, 알라바스터 방의 그림과 조각품은 흩어졌다.
도소 도시가 알폰소의 ''camerino d'alabastro''를 위해 그린 ''리비아 해안의 아이네아스와 아카테스''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워싱턴).
알폰소는 아리오스토 시인을 추기경 데스테로부터 물려받았다. 유럽의 음악 중심지 중 하나로 페라라를 만든 아버지 에르콜레 1세의 선례를 따라, 알폰소는 당대 가장 유명한 음악가들을 궁정으로 데려와 작곡가, 기악 연주자, 가수로 일하게 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페라라에서 활동한 북유럽 출신 음악가로는 앙투안 브뤼멜과 아드리안 빌라르트가 있는데, 후자는 베네치아 악파의 창시자가 되었으며, 이는 알폰소의 후원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2. 9. 사망과 유산
알폰소 1세는 1534년에 사망했다. 그는 뛰어난 군사적 능력과 외교술로 페라라 공국을 지켜냈으며, 예술과 과학을 후원하여 페라라를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그의 사후, 적자(嫡子) 후계자가 없어 페라라 공국은 교황령으로 넘어가게 되었지만, 방계(傍系) 가문을 통해 모데나와 레조에서 데스테 가문은 계속 이어졌다.[9]알폰소 1세의 유산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 군사적 업적: 캉브레 동맹 전쟁과 이탈리아 전쟁에서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발휘하여 페라라 공국을 지켜냈다. 특히, 라벤나 전투에서 프랑스군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4][5]
- 외교적 수완: 베네치아 공화국, 프랑스, 교황령, 신성 로마 제국 등 강대국들 사이에서 능숙한 외교를 펼쳐 페라라의 독립을 유지했다.
- 문화 발전: 예술과 과학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여 페라라를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티치아노와 같은 유명 예술가들을 후원했으며, 페라라의 포병 기술은 당대 최고 수준이었다.[4][5]
- 가문의 위기: 적자 후계자를 남기지 못해 페라라 공국은 교황령에 귀속되었지만, 방계 가문을 통해 데스테 가문은 모데나와 레조에서 명맥을 이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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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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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treccani[...]
2023-06-26
[2]
웹사이트
DIANTI, Laura Dizionario Biografico degli Italiani - Volume 39 (1991)
https://www.treccani[...]
2023-06-26
[3]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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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britan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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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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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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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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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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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Reconstructing the Duke's private gallery
http://www.webexhibi[...]
[8]
간행물
The Portrait of Alfonso d'Este by Titian
1927-04
[9]
웹사이트
Browning's Portrait of a Renaissance Man: Alphonso II D' este, Duke of Ferrara, in "My Last Duchess" (1842)
https://web.archive.[...]
2005-07-06
[10]
문서
교황 율리오 2세는 추기경 시절부터 214대 교황이였던 알렉산데르 6세와 앙숙 관계었다. 알렉산데르 6세 사후에 교황이 된 율리오 2세는 적폐청산 작업을 진행하며 알렉산데르 6세의 출신 가문인 보르자 가문과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11]
서적
교황연대기
바다출판
[12]
서적
옥스퍼드 교황사전
분도출판사
2014-01
[13]
서적
옥스포드 교황사전 교황 율리오 2세
[14]
문서
교황명인 율리오와 비슷한 여성형 이름을 붙여 교황을 모욕하기 위해 붙인 이름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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