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1세 드 기즈 공작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앙리 1세 드 기즈 공작은 16세기 프랑스의 귀족으로, 기즈 가문의 수장이자 가톨릭 동맹의 지도자였다. 그는 위그노 전쟁 시기 프로테스탄트를 탄압하고, 성 바르텔레미 축일의 학살을 주도했다. 앙리 3세, 나바라 왕 앙리와 왕위를 놓고 다투는 세 앙리의 전쟁을 벌였으나, 1588년 앙리 3세의 명령으로 암살당했다. 그의 생애는 다양한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외 백작 - 장 드 부르고뉴 (1415년)
장 드 부르고뉴는 부르고뉴 가문 출신으로, 네베르 백작 등의 작위를 상속받고 여러 번 결혼했으며, 샤를 용담공과의 갈등 속에서 루이 11세를 지지하며 공익 동맹 전쟁에 참여하고 노르망디 사령관에 임명되는 등 프랑스 왕국에 기여했으나 변절로 인해 부정적 평가도 받는 인물이다. - 외 백작 - 샤를 드 기즈 공작
샤를 드 기즈 공작은 프랑스 귀족이자 가톨릭 동맹의 지도자로, 종교 전쟁 시기 활약하다 앙리 4세를 지지하며 프로방스 총독 등을 역임했으나, 루이 13세 시대에 이탈리아로 망명하여 생을 마감했다. - 주앵빌 공작 - 샤를 드 기즈 공작
샤를 드 기즈 공작은 프랑스 귀족이자 가톨릭 동맹의 지도자로, 종교 전쟁 시기 활약하다 앙리 4세를 지지하며 프로방스 총독 등을 역임했으나, 루이 13세 시대에 이탈리아로 망명하여 생을 마감했다. - 주앵빌 공작 - 프랑수아 드 기즈 공작
프랑수아 드 기즈 공작은 프랑스 귀족이자 군인으로 기즈 가문의 수장이었으며, 종교 전쟁 시기 가톨릭 진영의 지도자로서 활약하며 군사적 성공을 거두었으나 위그노 탄압으로 논란이 되었고, 프랑수아 2세의 외척으로서 권력을 장악했으나 암살당했다. - 기즈 공작 - 샤를 드 기즈 공작
샤를 드 기즈 공작은 프랑스 귀족이자 가톨릭 동맹의 지도자로, 종교 전쟁 시기 활약하다 앙리 4세를 지지하며 프로방스 총독 등을 역임했으나, 루이 13세 시대에 이탈리아로 망명하여 생을 마감했다. - 기즈 공작 - 프랑수아 드 기즈 공작
프랑수아 드 기즈 공작은 프랑스 귀족이자 군인으로 기즈 가문의 수장이었으며, 종교 전쟁 시기 가톨릭 진영의 지도자로서 활약하며 군사적 성공을 거두었으나 위그노 탄압으로 논란이 되었고, 프랑수아 2세의 외척으로서 권력을 장악했으나 암살당했다.
앙리 1세 드 기즈 공작 | |
---|---|
기본 정보 | |
![]() | |
본명 | 앙리 1세 드 로렌 |
다른 이름 | 앙리 드 기즈 |
작위명 | 기즈 공작 |
신상 정보 | |
출생일 | 1550년 12월 31일 |
출생지 | 프랑스 조앙빌 |
사망일 | 1588년 12월 23일 |
사망지 | 프랑스 블로와 성 |
매장지 | 미상 |
가문 | |
가문 | 기즈 가문 |
아버지 | 프랑수아 드 기즈 |
어머니 | 안나 데스테 |
배우자 | 카트린 드 클레브 |
자녀 | 목록 참조 |
작위 정보 | |
작위 | 제3대 기즈 공작 |
재임 기간 | 1563년 - 1588년 |
다른 작위 | 조앙빌 공작 |
직책 | |
직책 | 프랑스 대시종장 |
종교 | |
종교 | 기독교 로마 가톨릭교회 |
서명 | |
![]() | |
자녀 | |
기즈 공작 | 샤를 드 로렌 |
슈브뢰즈 공작부인 | 마리 드 로렌 |
엘뵈프 수녀원장 | 르네 드 로렌 |
생레미 수도원장 | 루이즈 마르그리트 드 로렌 |
추가 정보 | |
참고 문헌 | Carroll, Stuart (2011). Martyrs and Murderers: The Guise Dynasty and the Making of Europe. Oxford University Press. |
2. 생애
기즈 가문은 가톨릭의 중심 세력으로서, 국내의 개혁파(프로테스탄트)를 탄압하고 있었다. 위그노 전쟁이 시작되고, 아버지 프랑수아가 1563년에 기즈 공작 프랑수아 암살 사건된 후, 앙리는 기즈 가문을 계승하여 군인으로 활약했지만, 아버지를 암살한 프로테스탄트 측의 콜리니 제독에 대한 증오심을 키웠다.
1572년 8월, 프로테스탄트인 나바라 왕 앙리 (후의 앙리 4세)의 결혼식 참석을 위해 파리에 다수의 프로테스탄트파 귀족이 모였다. 기즈 공작 앙리 1세의 군대는 콜리니 제독을 비롯한 프로테스탄트파 귀족을 습격하여 학살했다(성 바르텔레미 축일의 학살). 지시를 내린 것은 샤를 9세의 섭정카트린 드 메디시스라고도 한다. 이때 나바라 왕은 궁정에 감금되어 가톨릭으로의 개종을 강요받았다.
그 후 종교 전쟁이 재개되자 앙리는 돌만의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고, 이후에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르 발라프레(le balafré, "흉터가 있는"의 의미)라고 불리게 되었다. 카리스마적이고 화려한 세간의 평가를 얻어 앙리는 위그노의 적대자로서 프랑스의 호전적인 가톨릭교도들 사이에서 영웅적인 지위를 확립했다.
잠시 동안 기즈 공작과 카트린을 중심으로 정치가 전개되었지만, 나바라 왕은 궁정을 탈출하여 프로테스탄트로 재개종했다. 1576년, 앙리 3세가 프로테스탄트와 맺은 뵈리외의 화의는 프로테스탄트에 유리했기 때문에 가톨릭 사이에서 불만이 높아졌다. 같은 해에 가톨릭 동맹이 결성되었고, 기즈 공작은 그 중심이 되었다.
1585년 이후 앙리 3세, 가톨릭 동맹의 기즈 공작 앙리 1세, 프로테스탄트파의 나바라 왕 앙리가 왕위를 놓고 다투는 상황 ( "세 앙리의 전쟁"이라고 불림)이 되었다. 정통 왕위 계승자는 나바라 왕이었지만, 프로테스탄트였기 때문에 가톨릭 동맹은 반발했고, 기즈 공작도 왕위를 엿보고 있었다.
1588년 5월, 기즈 공작이 파리에 들어가자 앙리 3세는 파리를 탈출했다. 앙리 3세와 나바라 왕은 가톨릭 동맹에 대항하기 위해 제휴했다. 그 후 기즈 공작과 앙리 3세는 화해했지만 대립은 수습되지 않았고, 12월 23일, 앙리 3세는 근위병에게 명령하여 먼저 기즈 공작을, 다음 날에는 동생 로렌 추기경을 기즈 공작 앙리 1세 암살 사건했다. 기즈 공작위는 부인 카트린 드 클레브 (부르봉 왕가의 혈통을 잇는 나바라 왕 앙리의 사촌이었다)와의 아들 샤를이 계승했고, 가톨릭 동맹의 지도자 지위는 동생 마이엔 공작 샤를이 맡았다.
2. 1. 위그노 전쟁과 가톨릭 동맹
기즈 가문은 가톨릭의 중심 세력으로서, 국내의 개혁파(프로테스탄트)를 탄압하고 있었다. 위그노 전쟁이 시작되고, 아버지 프랑수아가 1563년에 기즈 공작 프랑수아 암살 사건된 후, 앙리는 기즈 가문을 계승하여 군인으로 활약했지만, 아버지를 암살한 프로테스탄트 측의 콜리니 제독에 대한 증오심을 키웠다.1572년 8월, 프로테스탄트인 나바라 왕 앙리 (후의 앙리 4세)의 결혼식 참석을 위해 파리에 다수의 프로테스탄트파 귀족이 모였다. 기즈 공작 앙리 1세의 군대는 콜리니 제독을 비롯한 프로테스탄트파 귀족을 습격하여 학살했다(성 바르텔레미 축일의 학살). 지시를 내린 것은 샤를 9세의 섭정카트린 드 메디시스라고도 한다. 이때 나바라 왕은 궁정에 감금되어 가톨릭으로의 개종을 강요받았다.
그 후 종교 전쟁이 재개되자 앙리는 돌만의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고, 이후에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르 발라프레(le balafré, "흉터가 있는"의 의미)라고 불리게 되었다. 카리스마적이고 화려한 세간의 평가를 얻어 앙리는 위그노의 적대자로서 프랑스의 호전적인 가톨릭교도들 사이에서 영웅적인 지위를 확립했다.
잠시 동안 기즈 공작과 카트린을 중심으로 정치가 전개되었지만, 나바라 왕은 궁정을 탈출하여 프로테스탄트로 재개종했다. 1576년, 앙리 3세가 프로테스탄트와 맺은 뵈리외의 화의는 프로테스탄트에 유리했기 때문에 가톨릭 사이에서 불만이 높아졌다. 같은 해에 가톨릭 동맹이 결성되었고, 기즈 공작은 그 중심이 되었다.
1585년 이후 앙리 3세, 가톨릭 동맹의 기즈 공작 앙리 1세, 프로테스탄트파의 나바라 왕 앙리가 왕위를 놓고 다투는 상황 ( "세 앙리의 전쟁"이라고 불림)이 되었다. 정통 왕위 계승자는 나바라 왕이었지만, 프로테스탄트였기 때문에 가톨릭 동맹은 반발했고, 기즈 공작도 왕위를 엿보고 있었다.
1588년 5월, 기즈 공작이 파리에 들어가자 앙리 3세는 파리를 탈출했다. 앙리 3세와 나바라 왕은 가톨릭 동맹에 대항하기 위해 제휴했다. 그 후 기즈 공작과 앙리 3세는 화해했지만 대립은 수습되지 않았고, 12월 23일, 앙리 3세는 근위병에게 명령하여 먼저 기즈 공작을, 다음 날에는 동생 로렌 추기경을 기즈 공작 앙리 1세 암살 사건했다. 기즈 공작위는 부인 카트린 드 클레브 (부르봉 왕가의 혈통을 잇는 나바라 왕 앙리의 사촌이었다)와의 아들 샤를이 계승했고, 가톨릭 동맹의 지도자 지위는 동생 마이엔 공작 샤를이 맡았다.
2. 2. 세 앙리 전쟁과 암살
기즈 가문은 가톨릭의 중심 세력으로서 국내 프로테스탄트를 탄압하고 있었다. 위그노 전쟁이 시작되고, 1563년 아버지 프랑수아가 암살된 후, 앙리는 기즈 가문을 계승하여 군인으로 활약했지만, 아버지를 암살한 프로테스탄트 측의 콜리니 제독에 대한 증오심을 키웠다.1572년 8월, 프로테스탄트인 나바라 왕 앙리 (후의 앙리 4세)의 결혼식 참석을 위해 파리에 다수의 프로테스탄트파 귀족이 모였다. 기즈 공작 앙리 1세의 군대는 콜리니 제독을 비롯한 프로테스탄트파 귀족을 습격하여 학살했다(성 바르텔레미 축일의 학살). 지시를 내린 것은 샤를 9세의 섭정 카트린 드 메디시스라고도 한다. 이때 나바라 왕은 궁정에 감금되어 가톨릭으로의 개종을 강요받았다.
그 후 종교 전쟁이 재개되자 앙리는 돌만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고, 이후에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르 발라프레(le balafré, "흉터가 있는"의 의미)라고 불리게 되었다. 카리스마적이고 화려한 세간의 평가를 얻어 앙리는 위그노의 적대자로서 프랑스의 호전적인 가톨릭교도들 사이에서 영웅적인 지위를 확립했다.
잠시 동안 기즈 공작과 카트린을 중심으로 정치가 전개되었지만, 나바라 왕은 궁정을 탈출하여 프로테스탄트로 재개종했다. 1576년, 앙리 3세가 프로테스탄트와 맺은 뵈리외의 화의는 프로테스탄트에 유리했기 때문에 가톨릭 사이에서 불만이 높아졌다. 같은 해에 가톨릭 동맹이 결성되었고, 기즈 공작은 그 중심이 되었다.
1585년 이후 앙리 3세, 가톨릭 동맹의 기즈 공작 앙리 1세, 프로테스탄트파의 나바라 왕 앙리가 왕위를 놓고 다투는 상황 ("세 앙리의 전쟁"이라고 불림)이 되었다. 정통 왕위 계승자는 나바라 왕이었지만, 프로테스탄트였기 때문에 가톨릭 동맹은 반발했고, 기즈 공작도 왕위를 엿보고 있었다.
1588년 5월, 기즈 공작이 파리에 들어가자 앙리 3세는 파리를 탈출했다. 앙리 3세와 나바라 왕은 가톨릭 동맹에 대항하기 위해 제휴했다. 그 후 기즈 공작과 앙리 3세는 화해했지만 대립은 수습되지 않았고, 12월 23일, 앙리 3세는 근위병에게 명령하여 먼저 기즈 공작을, 다음 날에는 동생 로렌 추기경을 암살했다. 기즈 공작위는 부인 카트린 드 클레브 (부르봉 왕가의 혈통을 잇는 나바라 왕 앙리의 사촌이었다)와의 아들 샤를이 계승했고, 가톨릭 동맹의 지도자 지위는 동생 마이엔 공작 샤를이 맡았다.
3. 자녀
카트린 드 클레브와 1570년 10월 4일 파리에서 결혼하여 다음과 같은 자녀를 두었다.
- 샤를 1세 (1571년 - 1640년) - 기즈 공작
- 앙리 (1572년 6월 30일 - 1574년 8월 3일)
- 카트린 (1573년 11월 3일) - 요절
- 루이 (1575년 - 1621년) - 기즈 추기경, 랭스 대주교
- 샤를 (1576년 1월 1일) - 요절
- 마리 (1577년 6월 1일 - 1582년)
- 클로드 (1578년 - 1657년) - 슈브뢰즈 공작, 마리 드 로앙과 결혼
- 카트린 (1579년 5월 29일) - 요절
- 크리스틴 (1580년 1월 21일) - 요절
- 프랑수아 (1581년 5월 14일 - 1582년 9월 29일)
- 르네 (1585년 - 1626년 6월 13일) - 생 피에르 여자 수도원장
- 잔 (1586년 7월 31일 - 1638년 10월 8일) - 주알 여자 수도원장
- 루이즈 마르그리트 (1588년 - 1631년 4월 30일) - 1605년 7월 24일 콩티 공작 프랑수아 드 콩티와 결혼
- 프랑수아 알렉상드르 (1589년 2월 7일 - 1614년 6월 1일) - 몰타 기사단 기사
4. 문화적 묘사
기즈 공작 앙리 1세의 생애와 암살 사건은 문학, 회화, 연극, 영화 등 다양한 예술 작품의 소재로 사용되었다. 폴 들라로슈의 1834년 그림 '1588년 블로와 성에서의 기즈 공작 암살'과 카미유 생상스가 1908년 무성 영화를 위해 작곡한 '기즈 공작의 암살'은 세계 최초의 영화 음악으로 알려져 있다. 라파예트 부인의 '몽팡시에 공작 부인'과 알렉상드르 뒤마 페르의 여왕 마고에도 등장한다.
5. 한국과의 관계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