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 드 기즈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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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샤를 드 기즈 공작은 앙리 1세 드 기즈 공작과 클레브의 카트린의 아들로, 기즈 가문의 일원이다. 1588년 아버지의 암살 이후 기즈 공작 작위를 계승했으나 투옥되었다가 탈출했다. 가톨릭 동맹의 지지를 받았으나 1594년 앙리 4세를 지지하고 프로방스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루이 13세 치하에서는 프랑스 대원수와 레반트 해군 제독을 역임했으며, 리슐리외 추기경의 미움을 사 이탈리아로 망명하여 1640년 사망했다. 1611년 앙리에트 카트린 드 조와유즈와 결혼하여 7명의 자녀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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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귀족이자 군인인 샤를 드 로앙은 수비즈 공작으로서 루이 15세의 측근으로 활동하며 높은 군사 계급에 올랐으나, 7년 전쟁 패배와 세 번의 결혼, 그리고 수비즈 소스의 유래로 알려져 있다. - 외 백작 - 장 드 부르고뉴 (14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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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1세 드 기즈 공작은 프랑스 종교 전쟁 시기 가톨릭 세력의 주요 인물로서 위그노 전쟁 참여, 성 바르텔레미 축일 학살 관여, 세 앙리 전쟁에서 왕위 계승을 노리다 앙리 3세에 의해 암살당했다.
샤를 드 기즈 공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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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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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위 | 기즈 공작 |
재임 시작 | 1588년 12월 23일 |
재임 종료 | 1640년 9월 30일 |
선임자 | 앙리 1세 |
후임자 | 앙리 2세 |
출생일 | 1571년 8월 20일 |
출생지 | 조앙빌 |
사망일 | 1640년 9월 30일 |
사망지 | 쿠나 |
배우자 | 앙리에트 카트린 드 조와이외즈 |
자녀 | 앙리 2세 마리 드 기즈 루이 드 주아이외즈 |
가문 | 기즈 가 |
아버지 | 앙리 1세 |
어머니 | 카트린 드 클레브 |
2. 생애
샤를 드 기즈는 앙리 1세 드 기즈 공작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의 뒤를 이어 기즈 공작이 되었다. 그는 프랑스 종교 전쟁 이후 혼란기에 가톨릭 동맹의 주요 인물로 부상했으나, 이후 앙리 4세와 화해하고 왕권 아래 편입되어 프로방스 총독 등을 역임했다. 루이 13세 치세에는 마리 드 메디치를 지지하며 리슐리외 추기경과 정치적으로 대립하였고, 결국 권력 투쟁에서 밀려나 1631년 이탈리아로 망명하여 1640년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삶은 프랑스 절대 왕정 강화 과정에서 영향력을 잃어가는 대귀족의 모습을 보여준다.
2. 1. 초기 생애 및 가문

샤를 드 기즈는 주앵빌에서 앙리 1세 드 기즈 공작과 클레브의 카트린의 아들로 태어났다. 처음에는 '기즈 기사'로 불렸으며, 증조부인 로렌의 샤를 추기경 사후(1574년) 그의 셰브뢰즈 공작 작위를 물려받았다. 하지만 나중에 이 작위는 동생인 클로드에게 넘겨주었다.
1588년 그의 아버지 앙리 1세 드 기즈 공작이 프랑스 왕 앙리 3세에게 암살당하는 사건(기즈 공작 앙리 1세 암살 사건) 이후, 샤를은 기즈 공작 작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그는 투르에 3년 동안 감금되었다가 1591년에 탈출했다. 가톨릭 동맹 세력은 그를 지도자로 추대하며 왕위에 앉히려는 기대를 걸었으나, 샤를은 1594년에 앙리 4세 국왕을 지지한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이에 앙리 4세는 그에게 4백만 리브르를 지불하고 그를 프로방스 총독으로 임명했다. 또한 그는 아내의 권리로 조와유즈 공작이 되었다. 1596년 2월 17일, 샤를은 가톨릭 동맹으로부터 마르세유를 점령하여 프랑스 왕실에 반환하는 공을 세웠다.
루이 13세 통치 기간에는 프랑스 대원수와 레반트 해군 제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루이 13세의 어머니인 마리 드 메디치와 리슐리외 추기경 사이의 정치적 대립에서 마리 드 메디치 편에 섰기 때문에 리슐리외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결국 1631년 마리 드 메디치가 실각하자 이탈리아로 망명했다. 그의 아내와 어린 자녀들도 피렌체로 와서 합류했고, 가족은 메디치 가문의 보호 아래 망명 생활을 했다. 망명 기간 동안 그의 아들 프랑수아와 샤를 루이는 이탈리아에서 사망했다. 샤를 공작 자신도 1640년 이탈리아 쿠나(Cuna, 시에나 근처)에서 사망했다. 그의 장남 프랑수아가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기 때문에, 차남 앙리 2세가 기즈 공작위를 계승했다. 그의 미망인과 자녀들(그중 마리, '기즈 양'])은 1643년 프랑스로 돌아가는 것이 허용되었다.
2. 2. 기즈 공작 계승과 가톨릭 동맹
1588년 아버지 앙리 1세 드 기즈 공작이 앙리 3세 왕에게 암살당하자, 샤를은 기즈 공작 작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그는 투르에 3년 동안 감금되었다가 1591년에 탈출했다. 가톨릭 동맹 세력은 샤를에게 큰 기대를 걸고 그를 프랑스 왕위에 앉히려 했으나, 그는 1594년 앙리 4세 국왕을 지지한다고 선언하며 화해했다. 이에 앙리 4세는 샤를에게 4백만 리브르를 지불하고 그를 프로방스 총독으로 임명했다. 1596년 2월 17일, 샤를은 가톨릭 동맹으로부터 마르세유를 점령하여 프랑스 왕실에 반환했다.2. 3. 앙리 4세와의 화해 및 프로방스 총독 임명
1588년 아버지 앙리 1세 드 기즈 공작이 앙리 3세에게 암살당한 후, 샤를은 기즈 공작 작위를 계승했지만 투르 성에 3년 동안 갇혔다. 1591년 탈출에 성공한 그는 가톨릭 동맹의 새로운 지도자로 추대되었고, 동맹은 그를 왕위에 앉히려 했다.그러나 샤를은 1594년 앙리 4세를 프랑스의 정당한 왕으로 인정하고 지지를 선언하며 화해했다. 이에 앙리 4세는 샤를에게 보상으로 4백만 리브르를 지불하고 (다른 자료에서는 1백만 리브르로 프로방스 지사직을 매입했다고도 한다) 그를 프로방스 총독으로 임명했다. 또한 샤를은 레반트 해군 제독에도 임명되었으며, 아내의 권리를 통해 조와유즈 공작 작위도 얻었다.
1596년 2월 17일, 샤를은 가톨릭 동맹이 장악하고 있던 마르세유를 점령하여 이를 앙리 4세에게 반환함으로써 왕권 강화에 기여했다.
2. 4. 루이 13세 치하의 활동
루이 13세 통치 기간 동안, 샤를은 프랑스 대원수와 레반트 해군 제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루이 13세의 모후인 마리 드 메디치 편에 서면서 리슐리외 추기경과 대립하게 되었다. 결국 1631년 마리 드 메디치가 실각하자, 리슐리외의 미움을 산 샤를은 이탈리아로 망명길에 올랐다. 그의 아내와 어린 자녀들도 피렌체로 와서 합류했고, 가족은 메디치 가문의 보호 아래 망명 생활을 이어갔다. 망명 기간 동안 그의 아들 프랑수아와 샤를 루이는 이탈리아에서 사망했다. 샤를 공작 자신은 1640년 시에나 근처 쿠나(Cuna)에서 사망했다. 장남 프랑수아가 부친보다 먼저 사망했기 때문에, 공작위는 차남 앙리 2세가 계승했다. 샤를의 미망인과 남은 자녀들(그중 마리, '기즈 양')은 1643년 프랑스로 돌아가는 것이 허용되었다.
2. 5. 망명과 죽음
루이 13세의 모후 마리 드 메디치 편에 섰다가 리슐리외 추기경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1631년 마리 드 메디시스가 실각하자, 샤를은 이탈리아로 망명길에 올랐다. 그의 아내와 어린 자녀들도 피렌체로 와서 합류했으며, 그곳에서 가족은 메디치 가문의 보호를 받았다. 망명 생활 중 아들 프랑수아와 샤를 루이가 이탈리아에서 사망했다. 샤를 공작 자신은 1640년 시에나에서 사망했다. 그의 장남 프랑수아가 부친보다 먼저 피렌체에서 사망했기 때문에, 공작위는 차남 앙리 2세가 계승했다. 샤를의 미망인과 남은 자녀들(그중 마리, '기즈 양')은 1643년 프랑스로 돌아가는 것이 허용되었다.3. 가족 관계
1611년 1월 6일 그는 조와유즈의 앙리에트 카트린 (1585년 1월 8일 – 1656년 2월 25일)과 결혼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자녀들이 있었다.
이름 | 생몰년 | 주요 정보 |
---|---|---|
프랑수아 | 1612년 4월 3일 – 1639년 12월 7일 | 주앙빌 공. 가족 망명 중 피렌체에서 사망하여 산 로렌초 성당에 묻혔다가 주앙빌에 재안장됨. "당대 가장 유능한 공작"으로 평가받음. |
쌍둥이 아들 | 1613년 3월 4일 – 1613년 3월 19일 | 매우 허약하여 같은 날 사망. |
앙리 2세 드 기즈 공작 | 1614년 – 1664년 | 랭스 대주교, 기즈 공. |
마리 드 기즈 공작 부인 | 1615년 – 1688년 | 기즈 여공. |
소녀 (주앙빌 양) | 1617년 3월 4일 – 1618년 1월 18일 | 건강하게 태어났으나 겨울에 감기로 사망. |
샤를 루이 | 1618년 7월 15일 – 1637년 3월 15일 | 조와유즈 공작. 피렌체에서 사망하여 산 로렌초 성당에 묻혔다가 주앙빌에 재안장됨. |
프랑수아즈 레네 | 1621년 1월 10일 – 1682년 12월 4일 | 몽마르트르 수녀원장. |
루이 드 조와유즈 공작 | 1622년 – 1654년 | 앙굴렘 공작. 기즈 공 루이 조제프의 아버지. |
로제 | 1624년 3월 21일 – 1653년 9월 9일 | 주앙빌 기사 또는 기즈 기사로 불림. 몰타 기사단 기사. 캉브레에서 열병으로 사망. |
4. 가계도
다음은 아넨타펠 번호 체계에 따른 샤를 드 기즈 공작의 조상 목록이다. 아넨타펠에서 1번은 해당 인물 자신을 나타내며, 숫자 ''n''에 대해 2''n''은 ''n''의 아버지를, 2''n'' + 1은 ''n''의 어머니를 나타낸다.
# '''샤를 드 로렌'''
# 앙리 1세 드 기즈 공작
# 클레브의 카트린
# 프랑수아 드 기즈 공작
# 안나 데스테
# 네베르 공작 프랑수아 1세
# 부르봉의 마르그리트
# 클로드 드 기즈 공작
# 부르봉의 안투아네트
# 에르콜레 2세 데스테, 페라라 공작
# 프랑스의 르네
# 네베르 백작 샤를 2세
# 레텔 백작 부인 마리
# 방돔 공작 샤를
# 알랑송의 프랑수아즈
# 로렌 공작 르네 2세
# 겔데른의 필리파
# 방돔 백작 프랑수아
# 룩셈부르크의 마리
# 알폰소 1세 데스테, 페라라 공작
# 루크레치아 보르자
# 프랑스의 루이 12세
# 브르타뉴 공작 부인 안
# 네베르 백작 엥겔베르
# 부르봉의 샤를로트
# 오르발 남작 장 달브레
# 레텔 백작 부인 샤를로트
# 방돔 백작 프랑수아 (= 18)
# 룩셈부르크의 마리 (= 19)
# 알랑송 공작 르네
# 로렌의 마르그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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