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투완 뷔누아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앙투안 뷔누아는 15세기 후반 유럽에서 활동한 프랑스 작곡가로, 동시대에 기욤 뒤파이와 요하네스 오케겜과 함께 가장 유명한 음악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다. 그는 종교 음악과 세속 음악을 모두 작곡했으며, 두 개의 미사곡과 여덟 개의 모테트 등 종교 음악 작품과 샹송을 남겼다. 뷔누아는 샹송 작곡가로 명성이 높았으며, 그의 샹송은 론도 형식을 따르고, 일부는 16세기 미사곡의 정선율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는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플람스어 가사를 사용한 다성 음악을 작곡했으며, 《무장한 사람》의 작곡가로 추정되기도 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430년대 출생 - 안드레아 만테냐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 안드레아 만테냐는 프란체스코 스콰르치오네에게 사사하여 고대 로마 미술에 대한 관심과 원근법 사용을 특징으로 하며, 만토바 궁정 화가로서 곤차가 가문 묘사, 〈카이사르의 개선〉, 〈죽은 그리스도를 애도함〉 등의 작품을 남겨 후대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 1430년대 출생 - 안토넬로 다 메시나
안토넬로 다 메시나는 15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로, 플랑드르 회화의 영향을 받아 유화 기법을 발전시키고 이탈리아에 전파하는 데 기여했으며, 이탈리아 회화의 간결함과 플랑드르 회화의 세밀한 묘사가 결합된 독특한 화풍으로 알려져 있다. - 1492년 사망 - 손니 알리
손니 알리는 송가이 제국의 군주로서 니제르 강 유역을 장악한 후 팀북투와 젠네를 정복하고 군사력을 강화하여 제국을 확장했으며, 전통 신앙과 이슬람교 조화, 법에 의한 국가 통제, 무역 확립 등 내치에도 힘썼다. - 1492년 사망 -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는 15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이자 수학자로, 수학적이고 기하학적인 구성과 심리 표현이 특징이며, 《참십자가의 역사》, 《그리스도의 세례》 등의 작품을 남겼으며, 수학적 이론을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 르네상스 시대의 작곡가 - 카를로 제수알도
카를로 제수알도는 16세기 이탈리아의 귀족이자 작곡가로, 아내 살해 사건으로 유명하며 반음계적 화성과 격정적인 감정 표현이 특징인 마드리갈을 작곡했다. - 르네상스 시대의 작곡가 - 그레고리오 알레그리
그레고리오 알레그리는 17세기 이탈리아 바로크 시대 작곡가이자 시스티나 성당 합창단 알토 가수로, 조반니 베르나르디노 나니노에게 음악 교육을 받고 페르모 대성당에서 생계를 유지하며 종교 음악을 작곡했으며, 특히 미제레레는 시스티나 성당에서 매년 연주되고 모차르트의 필사 일화로 유명하며, 콘체르타토 양식과 팔레스트리나 양식을 융합한 독특한 스타일로 초기 현악 사중주 작곡가로도 평가받는다.
앙투완 뷔누아 | |
---|---|
기본 정보 | |
이름 | 아ントワーヌ 비ュノワ |
원어 이름 | Antoine Busnois |
출생 | 1430년경 |
사망 | 1492년 11월 6일 |
직업 | 작곡가, 작사가 |
경력 | |
활동 기간 | 15세기 |
기타 정보 | |
영향 | 요하네스 오케겜, 기욤 뒤파이 |
2. 생애와 경력
뷔누아의 생애 초기에 대한 세부 사항은 대부분 추측에 불과하며,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는 아마도 파드칼레의 베튄 인근 출신이었을 것이며, 그의 이름이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 뷔느 촌락 출신일 가능성도 있다. 그는 귀족 가문인 뷔느와 관련이 있었을 수도 있는데, 특히 렌의 노트르담 성당의 참사회원인 필리프 드 뷔느가 친척이었을 수도 있다. 그는 분명히 훌륭한 음악 교육을 받았으며, 아마도 프랑스 북부나 중부 어딘가에 있는 교회 합창 학교에서 받았을 것이다. 귀족 출신이라는 점은 그가 프랑스 왕실과 일찍부터 연관된 것을 설명해 줄 수 있는데, 1450년대 초반부터 그에 대한 언급이 나타났으며, 1461년에는 투르에서 사제였다. 그가 완전히 평화로운 사람은 아니었다는 것은 그가 1461년 2월 28일에 투르에서 제출한 면죄 청원에서 알 수 있는데, 그는 "유혈 사태에 이르도록" 사제를 한 번이 아닌 다섯 번이나 집단으로 구타한 적이 있다고 인정했다. 그는 파문 상태에서 서품받은 사제가 아닌데도 미사를 봉헌하는 무모한 짓을 저질렀고, 그 행위로 인해 교황 비오 2세가 그를 사면할 때까지 파문되었다.
그는 투르에 있는 성 마르탱의 대학 성당으로 옮겨 갔고, 1465년에는 부제 사제가 되었다. 요하네스 오케겜이 그 기관의 재무였으며, 두 작곡가는 서로 잘 아는 사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1465년 후반에 부스누아는 푸아티에로 이주했는데, 그곳에서 그는 합창단 소년들의 지도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 지역 전체에서 재능 있는 가수들을 대거 끌어모았고, 이 즈음에는 그의 뛰어난 성악 교사이자 학자, 작곡가로서의 명성이 널리 퍼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갑자기 1466년에 떠났고, 이전 지도자가 그의 옛 직책으로 복귀했다. 그는 이후 부르고뉴로 이주했다.
부스누아는 1467년까지 부르고뉴 궁정에 있었다. 그의 첫 작품은 샤를이 6월 15일에 공작으로 즉위하기 직전에 등장했는데, 그의 모테트 중 하나인 ''In hydraulis''에는 샤를을 백작이라고 부르는 헌사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부르고뉴 공작이 된 후, 그는 격렬하고 때로는 무모한 군사적 모험으로 인해 '용담공 샤를'로 곧 알려지게 되었다(이는 실제로 10년 후 전투에서 그의 죽음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샤를은 전쟁뿐만 아니라 음악도 사랑했으며, 그를 섬기는 동안 작곡한 부스누아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고 보상했다. 부스누아는 1467년에 헤인 반 기제겜, 아드리엔 바생과 함께 샤를의 "가수이자 시종"으로 등재되었다.
부스누아는 샤를을 위해 가수이자 작곡가로 봉사하는 것 외에도, 헤인 반 기제겜과 마찬가지로 공작의 군사 원정에 동행했다. 부스누아는 1475년 독일의 노이스 포위전에 참여했으며, 1477년 샤를이 사망하고 부르고뉴의 확장이 즉시 영원히 끝난 비극적인 낭시 전투에서 살아남았다(혹은 불참했다).
부스누아는 1482년까지 부르고뉴 궁정에 고용되어 있었지만, 그 후 그의 사망 연도까지의 행적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그가 사망한 1492년 당시에는 브뤼헤의 생 소뵈르 교회에 고용되어 있었다.
2. 1. 초기 생애 (1430년경 ~ 1460년)
앙투안 뷔누아의 초기 생애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는 아마도 파드칼레의 베튄 인근, 혹은 그의 이름이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 뷔느 마을 출신으로 추정된다. 뷔느 귀족 가문과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으며, 특히 렌의 노트르담 성당 참사 회원이던 필리프 드 뷔느(Philippe de Busne)와 친척 관계였을 가능성이 제기된다.뷔누아는 프랑스 북부 또는 중부 지역의 교회 합창 학교에서 훌륭한 음악 교육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귀족 출신이라는 점은 그가 프랑스 왕실과 일찍부터 관계를 맺게 된 배경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1450년대 초반부터 그에 대한 언급이 나타났으며, 1461년에는 투르에서 사제였다.
2. 2. 투르 시기 (1461년 ~ 1465년)
앙투완 뷔누아는 1450년대 초부터 프랑스 왕실 관련 기록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1461년에는 투르에서 사제로 활동했다. 그는 1461년 2월, 사제를 집단 폭행하고 파문 상태에서 미사를 집전한 죄로 교황 비오 2세에게 사면받았다.이후 뷔누아는 투르의 성 마르탱 대학 성당으로 이동하여 부제(subdeacon)가 되었다. 이 시기 요하네스 오케겜과 친분을 쌓은 것으로 보인다.
2. 3. 푸아티에 시기 (1465년 ~ 1466년)
1465년 후반, 뷔누아는 푸아티에로 이주하여 합창단 소년들의 지도자(magister puerorum)가 되었다. 이 지역에서 재능 있는 가수들을 대거 끌어모았으며, 뛰어난 성악 교사이자 학자, 작곡가로서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1466년,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푸아티에를 떠났다. 이후 부르고뉴로 이주했다.2. 4. 부르고뉴 공국 궁정 (1467년 ~ 1482년)
앙투완 뷔누아는 1467년 부르고뉴 공국 궁정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샤를이 공작으로 즉위하기 직전, 뷔누아는 그를 백작으로 칭송하는 모테트 'In hydraulis'를 작곡했다. 샤를은 즉위 후 격렬한 군사적 모험을 통해 '용담공 샤를'로 알려지게 되었지만, 전쟁뿐만 아니라 음악도 사랑하여 뷔누아의 작품을 높이 평가했다.뷔누아는 1467년에 헤인 반 기제겜, 아드리엔 바생과 함께 용담공 샤를의 "가수이자 시종"으로 임명되었다. 뷔누아는 가수이자 작곡가로 봉사하는 것 외에도, 헤인 반 기제겜처럼 공작의 군사 원정에 동행했다. 1475년 독일의 노이스 포위전에 참여했으며, 1477년 샤를이 사망한 낭시 전투에서는 살아남았다.
뷔누아는 1482년까지 부르고뉴 궁정에 고용되었다.
2. 5. 브뤼헤 시기 (1482년 ~ 1492년)
1482년부터 앙투완 뷔누아가 사망할 때까지의 행적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1492년 사망 당시 뷔누아는 브뤼헤의 생 소뵈르 교회(St. Sauveur)에 고용되어 있었다.3. 음악
뷔누아는 동시대에 엄청난 명성을 누렸으며, 기욤 뒤파이와 요하네스 오케겜 사이에서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음악가였을 것이다. 그는 종교 음악과 세속 음악을 작곡했다. 종교 음악으로는 두 개의 칸투스 피르무스 미사와 여덟 개의 모테트가 남아 있으며, 다른 많은 곡들은 분실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마리아 안티폰 ''Regina coeli''를 여러 번 작곡했다. 양식적으로 그의 음악은 뒤파이와 질 뱅쇼아의 단순함과 호모포니 텍스처, 그리고 곧 널리 퍼질 모방 대위법인 조스캥 데 프레와 니콜라스 곰베르트의 중간 지점으로 볼 수 있다. 그는 모방을 드물지만 능숙하게 사용했고, 부드럽고 부르기 쉬운 선율 라인을 만들었으며, 16세기의 관례를 예견하는 강력한 삼화음 울림을 가지고 있었다.
피에트로 아론에 따르면, 뷔누아는 르네상스 시대에 가장 널리 퍼진 멜로디 중 하나이자 미사 작곡에서 칸투스 피르무스로 가장 많이 사용된 곡인 유명한 곡 ''L'homme armé''의 작곡가였을 수도 있다. 그가 ''L'homme armé''를 기반으로 한 첫 번째 미사를 썼는지 여부에 관계없이, 그의 미사가 훨씬 더 영향력이 컸다. 예를 들어, 오브레흐트의 설정은 뷔누아의 설정과 매우 유사하며, 심지어 뒤파이조차도 그의 곡을 직접 인용했다. 리처드 타루스킨은 뷔누아의 작품 내에서 작곡가의 수비학적 상징성을 연구하고, 뒤파이 등이 이 측면을 모방(또는 경의를 표함)했다는 것을 입증함으로써 뷔누아의 작품이 이후 ''L'homme armé'' 미사의 모델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시도한다. 데이비드 팔로우스는 뷔누아 미사의 복잡성을 통해 그가 실제로 뒤파이의 곡을 차용했을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1] 뷔누아는 양식 비교를 바탕으로 나폴리에서 발견된 동일한 곡을 기반으로 한 일련의 ''6개'' 미사의 작곡가일 수도 있다.
뷔누아의 다성 샹송 (프랑스 세속 가요)이 그의 명성을 주로 나타내는 작품이다. 대부분은 론도이고, 일부는 베르제레트이다. 그들 중 많은 곡들이 대중적인 노래가 되었고, 일부는 현재는 분실된 다른 대중적인 노래를 기반으로 했을 것이다. 그는 아마도 자신의 샹송의 거의 모든 가사를 직접 썼을 것이다. 그의 곡 중 일부는 그의 사후 한 세대 이상 지난 미사를 위한 칸투스 피르무스로 재활용되었다. 예를 들어 ''Fortuna desperata'' (이는 오브레흐트와 조스캥 모두가 사용했다)가 있지만, 이 귀속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특이한 샹송으로는 대구법 대화(샹송 문헌에서는 유일함)일 뿐만 아니라 번역에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지 않은 옛 프랑스 제목을 가진 ''Terrible dame''이 있다.
뷔누아의 세속 가요 대부분은 프랑스어 가사로 작곡되었지만, 적어도 두 곡은 이탈리아어 가사를 사용하고 한 곡은 플람스어를 사용한다. 대부분은 3성부로 되어 있지만, 4성부도 몇 곡 있다.
3. 1. 개요
3. 2. 종교 음악
뷔누아의 현존하는 종교 음악 작품으로는 2개의 고정 선율 미사곡과 8개의 모테트가 있지만, 대부분의 작품은 분실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모 마리아의 안티포나인 레지나 첼리(Regina coeli)를 여러 곡 작곡했다.뷔누아의 작품 양식은 뒤파이와 뱅쇼아의 단순한 호모포니 양식과 조스캥, 곰베르 등의 통모방 양식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다. 뷔누아는 모방 기법을 능숙하게 사용했지만, 절제된 사용을 보여준다. 부드럽고 노래하기 쉬운 선율선을 추구했으며, 16세기 음악의 특징인 3화음의 울림을 중시하는 경향을 보인다.
3. 2. 1. 미사
- 미사곡:
- * 무장한 사람 미사(L'homme armé)
- * 오 십자가 나무 미사(O crux lignum)
- * 파트렘 빌라예(Patrem Vilayge)
뷔누아는 동시대 사람들로부터 무한한 칭찬을 받았다. 뒤파이와 오케겜 사이 세대에서 아마 유럽 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작곡가 중 한 명이었을 것이다.
작품은 종교곡과 세속곡이 있다. 그 중 종교 음악은 두 개의 고정 선율 미사곡과 8개의 모테트가 현존한다(아마 대부분의 작품이 분실되었을 것이다). 성모 마리아의 안티포나 《레지나 첼리(Regina coeli)》가 여러 곡 있다. 양식적으로 말하면, 뷔누아 작품은 뒤파이와 뱅쇼아 등의 단순하고 호모포니적인 텍스처와 조스캥과 곰베르의 통모방 양식의 중간점에 위치하는 것처럼 들린다. 뷔누아는 모방을 능숙하게, 하지만 특별한 경우에만 사용하며, 매끄럽고 노래하기 쉬운 선율선을 만들어내고 있다. 강렬한 3화음의 감각은 다가오는 16세기의 관습을 예견하고 있다.
뷔누아는 프랑스어 세속 가곡인 샹송도 작곡했다. 지금도 작곡가로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것은 주로 이 분야이다. 대부분의 곡이 론도 시형을 따르고 있지만, 그 중에는 베르제레트 형식의 것도 있다. 많은 샹송이 인기를 끌었지만, 아마 현재는 사라져 버린 인기 가곡을 "원작"으로 하는 샹송도 있었던 것 같다. 아마도 자작 가곡의 대부분에 직접 가사를 썼을 것이다. 가곡의 선율 중 많은 것은, 예를 들어 (야코프 오브레흐트나 조스캥의 예에 있는) 《통제 불능한 운명의 여신이여(Fortuna desperata)》처럼 뷔누아의 사후부터 1세대 이상을 거쳐서도 미사곡 작곡의 고정 선율로 이용되었다.
16세기 이탈리아 음악 이론가 피에트로 아론에 따르면, 유명한 플랑드르 민요 《무장한 사람(L'homme armé)》의 창작자가 뷔누아일지도 모른다고 한다. 참고로 이 선율은 르네상스 시대에 가장 널리 유행하여, 종종 미사곡 작곡의 고정 선율로 이용되었다.
3. 2. 2. 모테트와 마니피카트
- 아드 코에남 아니 프로비디 (Ad coenam agni providi);
- 알렐루야, 베르붐 카로 파크툼 에스트 (Alleluia, verbum caro factum est);
- 아니마 메아 리퀘팍타 에스트 / 스티르프스 예세 (Anima mea liquefacta est / Stirps Jesse);
- 안토니 우스케 리미나 (Anthoni usque limina);
- 아스페르제스 메 (Asperges me, 분실);
- 콘디토르 알메 시데룸(Conditor alme siderum);
- 가우데 첼레스티스 도미나 (Gaude coelestis domina);
- 인 히드라울리스 (In hydraulis);
- 기욤 뒤페이의 죽음에 대한 애가 (1474년경 작곡, 분실);
- 마니피카트 젝트 티니 (Magnificat sexti toni);
- 노엘, 노엘 (Noel, noel);
- 레지나 첼리 (1) (Regina caeli (I));
- 레지나 첼리 (2) (Regina caeli (II));
- 빅티메 파스칼리 라우데스 (Victimae paschali laudes).
뷔누아는 뒤파이와 오케겜 사이 세대에서 유럽 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작곡가 중 한 명이었다.
뷔누아의 작품은 종교 음악과 세속곡이 있으며, 종교 음악은 두 개의 고정 선율 미사곡과 8개의 모테트가 현존한다(대부분의 작품이 분실되었을것이다). 성모 마리아의 안티포나 《레지나 첼리(Regina coeli)》가 여러 곡 있다. 뷔누아 작품은 뒤파이와 뱅쇼아 등의 단순하고 호모포니적인 텍스처와 조스캥과 곰베르의 통모방 양식의 중간점에 위치한다. 뷔누아는 모방을 능숙하게, 하지만 특별한 경우에만 사용하며, 매끄럽고 노래하기 쉬운 선율선을 만들어내고 있다. 강렬한 3화음의 감각은 다가오는 16세기의 관습을 예견하고 있다.
뷔누아는 프랑스어 세속 가곡인 샹송도 작곡했다. 대부분의 곡이 론도 시형을 따르고 있지만, 베르제레트 형식의 것도 있다. 많은 샹송이 인기를 끌었지만, 아마 현재는 사라져 버린 인기 가곡을 "원작"으로 하는 샹송도 있었던 것 같다. 뷔누아는 가곡의 선율 중 많은 것은, 예를 들어 (야코프 오브레흐트나 조스캥의 예에 있는) 《통제 불능한 운명의 여신이여(Fortuna desperata)》처럼 뷔누아의 사후부터 1세대 이상을 거쳐서도 미사곡 작곡의 고정 선율로 이용되었다.
16세기 이탈리아 음악 이론가 피에트로 아론에 따르면, 유명한 플랑드르 민요 《무장한 사람(L'homme armé)》의 창작자가 뷔누아일지도 모른다고 한다. 이 선율은 르네상스 시대에 가장 널리 유행하여, 종종 미사곡 작곡의 고정 선율로 이용되었다.
3. 3. 세속 음악
뷔누아의 샹송은 그의 명성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대부분 론도 형식이며 일부는 베르주레트 형식이다. 상당수의 샹송이 당대에 큰 인기를 얻었으며, 일부는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 대중 가요를 바탕으로 작곡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부분 자신의 샹송 가사를 직접 쓴 것으로 보인다.그의 샹송 중 일부는 사후에도 미사곡의 정선율로 재활용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포르투나 데스페라타》는 야코프 오브레흐트나 조스캥 데 프레의 미사곡에 사용되었다. 'Terrible dame'과 같이 대구법적 대화 형식의 독특한 샹송도 작곡했다.
대부분의 세속 가요는 프랑스어 가사로 작곡되었지만, 이탈리아어 가사(2곡)와 플람스어 가사(1곡)를 사용한 작품도 있다. 주로 3성부로 작곡되었지만, 4성부 작품도 일부 존재한다.
In myne zynn프랑스어은 플람스어 가사로 된 샹송이다. Con tutta gentileçait, Corps digne / Dieu quel mariageit는 이탈리아어 가사로 된 샹송이다.
3. 3. 1. 대표적인 샹송
# moy# Advegne que advenir pourra
# Amours nous traicte / Je m'en vois
# A qui vens tu tes coquilles
# Au gré de mes iculx
# A une dame
# Au povre par necessité
# A vous, sans autre
# Bel acueil
# Bone chére
# Ce n’est pas moy
# C'est bien maleur
# C'est vous en qui
# Con tutta gentileça
# Corps digne / Dieu quel
# Cy dit benedicite
# En soustenant
# En tous les lieux
# En voyant sa dame
# Esaint-il merci
# Faictes de moy
# Faulx mesdisans
# 포르투나 데스페라타?
# (O) Fortune, trop tu es dure
# Ha que ville
# In myne zynn
# Ja que lui ne
# J'ay mayns de bien
# J'ay pris amours tout au rebours
# Je m'esbaïs de vous
# Je ne demande aultre degré
# Je ne demande lialté
# Je ne puis vivre ainsi
# Joye me fuit
# Laissez dangier
# L'autrier la pieça / En l'ombre du buissonet / Trop suis jonette
# L'autrier que passa
# Le corps s'en va
# Le monde a tel
# Ma damoiselle
# Maintes femmes
# Ma plus qu'assez
# Ma tres souveraine princesse
# M'a vostre cueur
# Mon mignault / Gracieuse, playsant
# Mon seul et sangle souvenir
# On a grant mal / On est bien malade
# Pour entretenir mes amours
# Pucellotte
# Quant j'ay au cueur
# Quant vous me ferez
# Quelque povre homme
# Quelque povre homme
# Resjois toy terre de France / Rex pacificus
# Seule a par moy
# Soudainementmon cueur
# Terrible dame
# Une filleresse / S'il y a compagnion / Vostre amour
# Ung grand povtre homme
# Ung plus que tous
# Vostre beauté / Vous marchez
# Vostre gracieuse acointance
3. 4. 추정 작품
3. 4. 1. 미사
- 미사 라르당 데지르/L'Ardent desir프랑스어;
- 미사 롬 아르메 (I);
- 미사 롬 아르메 (II);
- 미사 롬 아르메 (III);
- 미사 롬 아르메 (IV);
- 미사 롬 아르메 (V);
- 미사 롬 아르메 (VI) (이 6개의 미사는 나폴리에서 발견되었으며, 양식적 유사성을 근거로 뷔누아에게 귀속됨);
- 미사 시네 노미네/sine nominela;
- 미사 쾅 스 방드라/Quant ce viendra프랑스어.
3. 4. 2. 마니피카트와 모테트
- 팔음계 마니피캇(Magnificat octavi toni);
- 제2선법 마니피캇(Magnificat secundi toni);
- 이해할 수 없는 것들(Incomprehensibilia) / 사물의 질서 너머(Preter rerum ordinem).
4. 평가 및 영향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