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레아 만테냐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안드레아 만테냐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이자 판화가로, 1431년경 이탈리아 이조라 디 카르투로에서 태어나 1506년 만토바에서 사망했다. 그는 파도바의 화가 프란체스코 스콰르치오네의 제자로, 고대 예술에 대한 열정을 바탕으로 고전 미학과 조각적 환영을 묘사하는 독특한 화풍을 구축했다. 만테냐는 만토바 궁정 화가로 활동하며 곤자가 가문의 초상화와 프레스코화를 제작했고, '카이사르의 개선'과 같은 걸작을 남겼다. 그의 작품은 엄격한 원근법과 조각적인 인물 묘사가 특징이며, 조반니 벨리니, 알브레히트 뒤러 등 많은 예술가에게 영향을 미쳤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430년대 출생 - 안토넬로 다 메시나
안토넬로 다 메시나는 15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로, 플랑드르 회화의 영향을 받아 유화 기법을 발전시키고 이탈리아에 전파하는 데 기여했으며, 이탈리아 회화의 간결함과 플랑드르 회화의 세밀한 묘사가 결합된 독특한 화풍으로 알려져 있다. - 1430년대 출생 - 앙투완 뷔누아
앙투안 뷔누아는 15세기 프랑스 작곡가로 종교 음악과 세속 음악에서 중요한 작품을 남겼으며 프랑스 왕실과 부르고뉴 궁정에서 활동하며 미사곡, 모테트, 샹송 등을 작곡했고 특히 노트르담 미사와 마니피카트로 유명하다. - 파도바도 출신 - 네비오 스칼라
네비오 스칼라는 AC 밀란에서 선수로 활동했으며, 파르마 FC 감독 시절 코파 이탈리아, UEFA 컵 위너스컵, UEFA 슈퍼컵, UEFA 컵 우승을 이끌며 전성기를 만든 이탈리아의 전직 축구 선수이자 감독이다. - 파도바도 출신 - 가브리엘라 도리오
가브리엘라 도리오는 1973년부터 1991년까지 이탈리아 육상 국가대표로 활동하며 올림픽 1500m 금메달, 유럽 실내 육상 선수권 대회 금메달 등을 획득한 육상 선수이다. - 궁정 화가 - 얀 판 에이크
얀 판 에이크는 초기 네덜란드 미술의 대표 화가로서, 정교한 사실주의와 혁신적인 유화 기법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궁정 화가로 활동하며 초상화와 종교화를 통해 이름을 알렸고, 《겐트 제단화》는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 궁정 화가 - 이아생트 리고
이아생트 리고는 1659년 프랑스에서 태어나 루이 14세 시대에 궁정 화가로 활동하며 부르봉 왕가의 초상화를 주로 그렸으며, 대표작으로는 루이 14세의 초상화가 있고 작품은 루브르 박물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안드레아 만테냐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안드레아 만테냐 |
원어 이름 | Andrea Mantegna |
출생일 | 1431년경 |
출생지 | 베네치아 공화국, 이솔라 디 카르투로 (현재 이탈리아) |
사망일 | 1506년 9월 13일 |
사망지 | 만토바 공국, 만토바 (현재 이탈리아) |
배우자 | 니콜로시아 벨리니 |
분야 | 회화 프레스코 |
사조 | 이탈리아 르네상스 |
스승 | 프란체스코 스쿠아르초네 |
대표 작품 | 성 세바스티아노 카메라 데글리 스포시 겟세마네의 기도 |
작품 | |
![]() |
2. 생애
안드레아 만테냐는 1431년 파도바 근교의 이졸라 디 카르투로(현재는 피아초라 술 브렌타에 속함)에서 태어났다. 11살에 프란체스코 스쿠알치오네의 견습생이 되었고, 야코포 벨리니의 딸과 결혼하여 젠틸레 벨리니, 조반니 벨리니 형제의 처남이 되었다.
1450년 로도비코 곤자가 후작의 초청으로 만토바로 이주, 1460년 이후 곤자가 가문의 궁정 화가로 활동했다. 1471년 이후 1480년경에는 에칭 판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만테냐는 원근법을 엄격하게 적용한 화면 구성, 거칠고 단단한 선, 조각 같은 인물 묘사 등 독특한 화풍을 선보였다. 동시대 화가들이 유화를 사용한 반면, 만테냐는 템페라를 주로 사용했다. 브레라 미술관의 『죽은 그리스도』는 단축법을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대표작이다.
만테냐는 1506년 9월 13일 만토바에서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1431년 ~ 1459년)
만테냐는 파도바 근처(당시 베네치아 공화국의 일부) 이탈리아 이조라 디 카르투로(Isola di Carturo)에서 태어났다. 그는 목수 비아지오의 둘째 아들이었다. 11세에 파도바 화가 프란체스코 스콰르치오네의 견습생이 되었다. 스콰르치오네는 원래 직업이 재단사였지만, 고대 예술에 대한 남다른 열정과 연기력을 지니고 있었다.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처럼 스콰르치오네도 고대 로마광이었다. 그는 이탈리아와 그리스를 여행하며 고대 조각상, 부조, 항아리 등을 수집하고 직접 그림을 그렸으며, 수집품을 다른 사람들이 연구할 수 있도록 제공했다. 또한, 의뢰받은 작품을 제작할 때 제자들을 참여시켰다.1440년경 설립된 스콰르치오네의 화실은 이탈리아 전역에서 유명해졌고, 약 137명의 화가와 그림 학생들이 거쳐 갔다. 파도바는 베네토뿐 아니라 파올로 우첼로, 필리포 리피, 도나텔로 등 토스카나 출신 예술가들도 끌어들였다. 만테냐의 초기 경력은 피렌체 작품의 영향을 받았다. 당시 만테냐는 스콰르치오네의 총애를 받는 제자였으며, 스콰르치오네는 그에게 라틴어를 가르치고 로마 조각 파편을 연구하도록 했다. 스승은 강제 원근법을 선호했는데, 이는 만테냐의 후기 혁신 중 일부를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만테냐는 17세에 스콰르치오네의 공방을 떠났으며, 나중에 스콰르치오네가 충분한 대가 없이 자신의 작품을 이용했다고 주장했다.
만테냐의 첫 작품은 1448년 산타 소피아 교회를 위한 제단화였으나 현재는 소실되었다. 같은 해, 그는 니콜로 피졸로와 함께 에레미타니 성 아우구스티누스 교회 횡단부의 오베타리 예배당 장식을 맡은 여러 화가 중 한 명으로 초청받았다. 그러나 만테냐를 포함한 스콰르치오네의 제자들이 이미 에레미타니 교회의 산 크리스토포로 예배당에 프레스코화 연작을 시작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오늘날 이 연작은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여러 우연한 일들 이후 만테냐는 대부분의 작업을 혼자 마무리했지만, 오베타리 예배당에서 만테냐와 협력했던 안수이노 다 포를리는 포를리 화파의 스타일을 가져왔다. 스콰르치오네는 성 야고보의 삶을 묘사하는 초기 작품들을 비판하며, 인물들이 마치 돌로 만든 사람들 같으며 돌색으로 그렸어야 했다고 말했다.
이 연작은 1944년 파도바에 대한 연합군 폭격으로 거의 전부 소실되었다. 프레스코화 연작 중 가장 극적인 작품은 '성 야고보의 처형'으로, 개미 시점(worm's-eye view) 원근법을 사용하였다. '성 야고보' 그림보다 원근감이 덜 극적이지만, 산체노 제단화는 성 야고보 연작이 완성된 직후인 1455년경에 제작되었으며, 고전 고대를 기반으로 한 건축 구조를 포함하여 동일한 기법들을 많이 사용한다.
'성 스테파노' 프레스코화의 스케치가 남아 있으며, 이는 해당 프레스코화와 비교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알려진 예비 스케치이다. 이 그림은 나중에 옷을 입은 것으로 그려진 누드 인물이 초기 르네상스 시대 작품 구상에 사용되었다는 증거를 보여준다. 예비 스케치에서는 원근감이 덜 발달되어 있고 더 평균적인 시점에 가깝다. 기념비적인 고전적 모습에도 불구하고, 알려진 로마 건축물의 복제본은 아니다. 만테냐는 그리스에서 유래한 로마인들의 습식 드레이프 패턴을 인물 의복에 채택했지만, 긴장감 넘치는 인물과 상호 작용은 도나텔로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만테냐의 다른 초기 프레스코화로는 파도바 산탄토니오 교회 입구 현관 위의 두 성인(1452년)과 1453년 제작된 산 루카 제단화가 있다. 산 루카와 다른 성인들을 그린 이 작품은 파도바의 유스티나(Justina of Padua) 교회를 위해 제작되었으며, 현재 밀라노 브레라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젊은 예술가 만테냐는 작품 활동을 거듭하면서 야코포 벨리니의 영향을 받았고, 그의 딸 니콜로시아 벨리니를 만났다. 1453년 야코포 벨리니는 니콜로시아 벨리니와 만테냐의 결혼에 동의했다.
2. 2. 만토바 궁정 화가 시절 (1460년 ~ 1506년)
루도비코 3세 곤자가는 만테냐에게 자신의 궁정에서 일할 것을 요청했고, 1460년 만테냐는 궁정 화가로 임명되었다.[5] 그는 처음에는 고이토에 머물렀지만, 1466년 12월부터 가족과 함께 만토바로 이주했다. 그의 계약 조건은 월 75 리라로, 당시로서는 매우 큰 금액이었으며 그의 예술이 얼마나 높이 평가받았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만토바에 거점을 둔 최초의 저명한 화가였다.그의 만토바 걸작은 만토바 공작궁의 신방에 그려졌다. 곤자가 가문 가족의 다양한 초상화와 일부 천사와 다른 인물들이 포함된 프레스코화 연작이다.[5] -- 특히 천장의 원형 천장 장식의 혁신적인 공간 구성은 안토니오 코레조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신방의 장식은 1474년에 완성되었다. 그 후 10년은 만테냐와 만토바에게 행복하지 않은 시기였다. 만테냐는 짜증을 내기 시작했고, 그의 아들 베르나르디노, 마르키스 루도비코, 그의 아내 바르바라, 그의 후계자 페데리코(만테냐를 "카발리에레", "기사"라고 불렀다)가 사망했다. 프란체스코 2세 곤자가가 선출된 후에야 만토바에서 예술적 의뢰가 다시 시작되었다. 그는 산 세바스티아노 교회 지역에 웅장한 집을 짓고 수많은 그림으로 장식했다. 그 집은 오늘날에도 볼 수 있지만, 그림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이 시기에 그는 몇몇 고대 로마 흉상을 수집했는데 (피렌체 지도자가 1483년 만토바를 방문했을 때 로렌초 데 메디치에게 주어졌다), 몇몇 건축 및 장식 조각을 그렸고,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세바스티안 성인''을 완성했다.
1488년 만테냐는 교황 인노첸시오 8세의 부름을 받아 바티칸 시국의 벨베데레 경당에 프레스코화를 그리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세례''를 포함한 이 프레스코화 연작은 교황 비오 6세에 의해 1780년에 파괴되었다. 교황은 만토바 궁정에서 받았던 것보다 만테냐를 덜 관대하게 대했지만, 1500년에 끝난 그들의 관계는 양측 모두에게 불만족스럽지 않았다. 만테냐는 유명한 터키 인질 젬을 만나고 로마의 고대 유적을 주의 깊게 연구했지만, 도시에 대한 그의 인상은 전반적으로 실망스러웠다. 1490년 만토바로 돌아온 그는 고대에 대한 더 문학적이고 비관적인 시각을 다시 받아들이고, 교양 있고 지적인 새로운 마르키사인 이사벨라 데스테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이사벨라는 1493년 그녀의 초상화 시도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녀는 "화가가 너무 형편없이 그려서 우리 자신의 모습과 전혀 닮지 않았다"고 말했다.[9]
그는 1492년경에 완성한 ''카이사르의 개선식'' 9점의 템페라 그림을 계속했다. 이 작품은 만테냐의 최고 걸작으로 여겨지며, 1628년 만토바의 많은 예술 보물들과 함께 잉글랜드의 찰스 1세 왕에게 팔렸다.

쇠약해지는 건강에도 불구하고, 만테냐는 계속 그림을 그렸다. 이 시기의 다른 작품으로는 ''동굴의 마돈나'', ''세바스찬 성인'', 그리고 그의 개인적인 장례 예배당을 위해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죽은 그리스도를 애도하는 그림''이 있다. 만테냐의 말년 작품으로는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승리의 마돈나''가 있다. 1495년경 템페라 기법으로 그려진 이 그림은 포르노보 전투를 기념하는 작품으로, 프란체스코 곤자가가 이탈리아 동맹의 승리로 보이게 하려고 열망했던 것을 보여준다. 원래 그림을 소장했던 교회는 만테냐 자신의 디자인으로 지어졌다. 이 그림에서 마돈나는 여러 성인들과 함께 묘사되어 있으며, 대천사 미카엘과 모리스 성인이 무릎을 꿇고 있는 프란체스코 곤자가 위로 펼쳐진 마돈나의 망토를 잡고 있다.
1497년 이후, 만테냐는 이자벨라 데스테의 의뢰를 받아 궁정 시인 파리데 체레사라가 쓴 신화적 주제를 그녀의 개인 아파트(‘’스투디오로’’)인 만토바 공궁에 있는 그림으로 번역했다. 이 그림들은 그 후 몇 년 동안 분산되었다. 그중 하나인 콤누스 신의 전설은 만테냐가 미완성으로 남긴 채, 만토바의 궁정 화가로서 그의 후임인 로렌초 코스타가 완성했다. 이자벨라가 그녀의 스투디오로를 위해 의뢰한 다른 화가들은 페루지노와 코레지오였다.
아내가 사망한 후, 만테냐는 고령에 사생아인 조반니 안드레아의 아버지가 되었고, 여러 가지 비용과 계획을 계속 추진했지만, 그의 아들 프란체스코가 마르케세의 불쾌감을 사서 만토바에서 추방되는 등 심각한 시련을 겪었다.
3. 주요 작품
만테냐의 주요 작품으로는 회화와 판화가 있으며, 회화 작품은 대부분 템페라 기법으로 제작되었다.
- '''회화'''
- 산제노 제단화 (1456–1459): 성모 마리아의 의상 가장자리와 후광에 가짜 아랍어 양식을 사용하고 있으며, 발치에는 동양 카펫이 놓여 있다.
- 죽은 그리스도를 애도함 (1490년경): 원근법을 구사한 엄격한 화면 구성과 거칠고 단단한 선묘, 조각적인 인체 묘사가 특징적이다. 브레라 미술관 소장.
- 승리의 성모 (1495년): 포르노보 전투를 기념하는 작품이다.
- 파르나소스 (화성과 비너스) (1497년)
- 미네르바가 미덕의 정원에서 악덕을 쫓아냄 (1502년경)
- '''판화'''
- 조르조 바사리는 만테냐가 로마에서 산드로 보티첼리의 작품을 모사한 피렌체의 바치오 발디니의 판화에 영향을 받아 판화 제작을 시작했다고 한다.
- 주요 작품: '바다 괴물의 전투', -- (약 1475년), -- (브레라 미술관 소장), '바커널 축제', '헤라클레스와 안타이오스', '바다의 신들',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든 유딧', '십자가에서 내림', '매장', '부활', '슬픔에 잠긴 사람', '동굴 속의 성모',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개선식' 등.
제목 | 제작 연도 | 기법 | 크기 (cm) | 소장처 |
---|---|---|---|---|
광야의 성 예로니모 | 1448–1451 | 목판 템페라 | 48 × 36 | 상파울루 미술관 |
-- | 1451–1453 | 캔버스 템페라 | 40 × 55.6 |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
산 루카 제단화 | 1453 | 패널 | 177 × 230 | 브레라 미술관 |
성 외피미아 | 1454 | 캔버스 템페라 접착제 | 171 × 78 | 카포디몬테 국립박물관 |
성전의 예수 소개 | 1455경 | 목판 템페라 | 68.9 × 86.3 | 슈타틀리헤 무제엔 |
성모와 아기 예수, 성 예로니모와 성 루이 9세 | 1455경 | 패널 템페라 | 자크마르 앙드레 미술관 | |
십자가에 못 박힘 | 1457–1459 | 목재 | 67 × 93 | 루브르 박물관 |
고난받는 구세주로서의 그리스도 | 1495–1500 | 목판 템페라 | 78 × 48 | 덴마크 국립미술관 |
겟세마네 동산의 고뇌 | 1459경 | 목판 템페라 | 63 × 80 | 국립미술관 |
루도비코 트레비잔 추기경 초상화 | 1459–1460 | 목판 템페라 | 44 × 33 | 슈타틀리헤 무제엔 |
두 천사 사이의 성 베르나르디노 시에나 | 1460 (추정) | 캔버스 템페라 | 385 × 220 | 브레라 미술관 |
남성 초상화 | 1460–1470 | 목재 | 24.2 × 19 | 국립미술관 |
성모의 죽음 | 1461경 | 패널 | 54 × 42 | 프라도 미술관 |
프란체스코 곤자가 초상화 | 1461경 | 패널 | 25 × 18 | 카포디몬테 미술관 |
잠자는 아기 예수와 성모 | 1465–1470 | 캔버스 유화 | 43 × 32 | 슈타틀리헤 무제엔 |
성 조지 | 1460경 | 패널 템페라 | 66 × 32 | 아카데미아 미술관 |
산제노 제단화 | 1457–1460 | 패널 | 480 × 450 | 산제노 |
성 세바스찬 | 1457–1459 | 목재 | 68 × 30 | 미술사 박물관[11] |
성 세바스찬 | 패널 | 255 × 140 | 루브르 박물관 | |
동방박사의 경배 | 1462 | 패널 템페라 | 76 × 76.5 | 우피치 미술관 |
승천 | 1462 | 패널 템페라 | 86 × 42.5 | 우피치 미술관 |
할례식 | 1462–1464 | 패널 템페라 | 86 × 42.5 | 우피치 미술관 |
카를로 데 메디치 초상화 | 1459–1466 | 패널 템페라 | 40.6 × 29.5 | 우피치 미술관 |
천사 성모 | 1485경 | 패널 | 88 × 70 | 브레라 미술관 |
카이사르의 개선 행렬 | 1486경 | 햄튼 코트 궁전 | ||
죽은 그리스도를 애도함 | 1490경 | 캔버스 템페라 | 68 × 81 | 브레라 미술관[12] |
동굴의 성모 | 1489–1490 | 우피치 미술관 | ||
성 세바스찬 | 1490 | 패널 | 68 × 30 | 카 도로 |
승리의 성모 | 1495 | 캔버스 템페라 | 285 × 168 | 루브르 박물관 |
인자한 그리스도 | 1500 | 캔버스 템페라 | 54 × 72 | 자크마르 앙드레 미술관 |
성가정 | 1495–1500 | 캔버스 템페라 | 75.5 × 61.5 | 드레스덴 회화관 |
유딧과 홀로페르네스 | 1495 | 목판 템페라 | 국립미술관 | |
트리불치오 성모 | 1497 | 캔버스 템페라 | 287 × 214 | 밀라노 시립 고대 미술관 |
파르나소스 (화성과 비너스) | 1497 | 캔버스 | 160 × 192 | 루브르 박물관 |
미네르바가 미덕의 정원에서 악덕을 쫓아냄 | 1502경 | 캔버스 유화 | 160 × 192 | 루브르 박물관 |
만테냐의 유일하게 알려진 조각 작품은 이르시나 바실리카타 대성당에 있는 ''성 외피미아''이다.
3. 1. 회화
루도비코 3세 곤차가 만투아 후작은 상당 기간 만테냐에게 자신의 봉사에 들어올 것을 압박했으며, 1460년 만테냐는 궁정 화가로 임명되었다.[5] 그는 처음에는 때때로 고이토에 머물렀지만, 1466년 12월부터 가족과 함께 만투아로 이주했다. 그의 고용 계약은 월 75 리라의 봉급이었는데, 당시로서는 매우 큰 금액이었기에 그의 예술이 얼마나 높이 평가받았는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그는 사실상 만투아에 거점을 둔 최초의 저명한 화가였다.그의 만투아 걸작은 만투아 궁정을 위해, 오늘날 만토바 공작궁의 신방(말 그대로 "결혼 방")으로 알려진 도시 성의 아파트에서 그려졌다. --에는 곤차가 가족의 다양한 초상화와 일부 천사와 다른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천장의 원형 천장 장식의 혁신적인 공간 구성은 안토니오 코레조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5]
신방의 장식은 아마도 1474년에 완성되었다. 그 후 10년은 만테냐와 만투아에게 행복하지 않은 시기였다. 만테냐는 짜증을 내기 시작했고, 그의 아들 베르나르디노가 사망했고, 후작 루도비코, 그의 아내 바르바라, 그리고 그의 후계자 페데리코(그는 만테냐를 "카발리에레", "기사"라고 불렀다)도 사망했다. 프란체스코 2세 곤차가가 선출된 후에야 만투아에서 예술적 의뢰가 다시 시작되었다. 그는 산 세바스티아노 교회 지역에 웅장한 집을 짓고 수많은 그림으로 장식했다. 그 집은 오늘날에도 볼 수 있지만, 그림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이 시기에 그는 몇몇 고대 로마 흉상을 수집하기 시작했는데 (피렌체 지도자가 1483년 만투아를 방문했을 때 로렌초 데 메디치에게 주어졌다), 몇몇 건축 및 장식 조각을 그렸고,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강렬한 ''세바스티안 성인''을 완성했다.
1488년 만테냐는 교황 인노첸시오 8세의 부름을 받아 바티칸의 벨베데레 경당에 프레스코화를 그리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세례''를 포함한 이 프레스코화 연작은 나중에 비오 6세에 의해 1780년에 파괴되었다. 교황은 만투아 궁정에서 받았던 것보다 만테냐를 덜 관대하게 대했지만, 모든 것을 고려해 볼 때 1500년에 끝난 그들의 관계는 양측 모두에게 불만족스럽지 않았다. 만테냐는 유명한 터키 인질 젬을 만나고 로마의 고대 유적을 주의 깊게 연구했지만, 도시에 대한 그의 인상은 전반적으로 실망스러웠다. 1490년 만투아로 돌아온 그는 고대에 대한 더 문학적이고 비관적인 시각을 다시 받아들이고, 교양 있고 지적인 새로운 후작 이사벨라 데스테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이사벨라는 1493년 그녀의 초상화 시도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녀는 "화가가 너무 형편없이 그려서 우리 자신의 모습과 전혀 닮지 않았다"고 말했다.[9]
그는 자신의 도시에서 아마도 로마로 떠나기 전에 시작했고 1492년경에 완성한 ''카이사르의 개선식''의 9점의 템페라 그림을 계속했다. 이 훌륭하게 고안되고 디자인된 구성은 그 주제의 화려함과 그 시대의 거장 중 한 명의 고전적 학문과 열정으로 화려하다. 만테냐의 최고 걸작으로 여겨지는 이 작품들은 1628년 만투아의 많은 예술 보물들과 함께 잉글랜드의 찰스 1세 왕에게 팔렸다.
쇠약해지는 건강에도 불구하고, 만테냐는 계속 그림을 그렸다. 이 시기의 다른 작품으로는 ''동굴의 마돈나'', ''세바스찬 성인'', 그리고 그의 개인적인 장례 예배당을 위해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죽은 그리스도를 애도하는 그림''이 있다. 만테냐의 말년 작품으로는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승리의 마돈나''가 있다. 1495년경 템페라 기법으로 그려진 이 그림은 포르노보 전투를 기념하는 작품으로, 그 결과가 불확실했던 전투를 프란체스코 곤차가가 이탈리아 동맹의 승리로 보이게 하려고 열망했던 것을 보여준다. 원래 그림을 소장했던 교회는 만테냐 자신의 디자인으로 지어졌다. 이 그림에서 마돈나는 여러 성인들과 함께 묘사되어 있으며, 대천사 미카엘과 모리스 성인이 무릎을 꿇고 있는 프란체스코 곤자가 위로 펼쳐진 마돈나의 망토를 잡고 있다. 풍부한 장식과 기타 장신구들이 넘쳐난다. 모든 면에서 그의 최고 수준의 기량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지만, 아름다움과 매력이 그의 엄격한 천재성, 즉 피폐한 열정으로 이어지는 긴장된 에너지에 비해 덜 두드러지는 만테냐 작품 중 가장 아름다운 작품 중 하나로 여겨진다.
1497년 이후, 만테냐는 이자벨라 데스테의 의뢰를 받아 궁정 시인 파리데 체레사라가 쓴 신화적 주제를 그녀의 개인 아파트(‘’스투디오로’’)인 만토바 공궁에 있는 그림으로 번역했다. 이 그림들은 그 후 몇 년 동안 분산되었다. 그중 하나인 콤누스 신의 전설은 만테냐가 미완성으로 남긴 채, 만토바의 궁정 화가로서 그의 후임인 로렌초 코스타가 완성했다. 이자벨라가 그녀의 스투디오로를 위해 의뢰한 다른 화가들은 페루지노와 코레지오였다.
아내가 사망한 후, 만테냐는 고령에 사생아인 조반니 안드레아의 아버지가 되었고, 여러 가지 비용과 계획을 계속 추진했지만, 그의 아들 프란체스코가 후작의 불쾌감을 사서 만토바에서 추방되는 등 심각한 시련을 겪었다. 노령의 거장이자 감정가의 어려운 상황은 소중한 파우스트나의 고대 흉상을 팔아야 하는 어려운 상황을 필요로 했다.

만테냐는 원근법을 구사한 엄격한 화면 구성, 거칠고 단단한 선묘, 조각적인 인체 묘사 등,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들 중에서도 독특한 화풍을 보여준다. 만테냐가 활동한 15세기 후반에는 이미 유화 기법이 보급되어 있었고, 그와 동시대 화가이자 처남인 조반니 벨리니도 유화를 그렸지만, 만테냐는 전통적인 재료인 템페라를 주로 사용했다.
밀라노의 브레라 미술관에 있는 대표작 『죽은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내려진 그리스도가 양발바닥을 관객 쪽으로 향하게 한 채 누워있는 모습을 단축법(원근법을 적용한 묘사법의 일종)을 구사하여 묘사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손발에 남은 못 자국, 변색된 피부까지 가차 없이 묘사한 이 그림에는 만테냐의 사실주의에 대한 집념이 느껴진다.
다음은 만테냐의 주요 작품 목록이다.
제목 | 제작 연도 | 기법 | 크기 (cm) | 소장처 |
---|---|---|---|---|
광야의 성 예로니모 | 1448–1451 | 목판 템페라 | 48 × 36 | 상파울루 미술관, 상파울루 |
-- | 1451–1453 | 목판에서 옮긴 캔버스 템페라 | 40 × 55.6 |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
산 루카 제단화 | 1453 | 패널 | 177 × 230 | 브레라 미술관, 밀라노 |
성 외피미아 | 1454 | 캔버스 템페라 접착제 | 171 × 78 | 카포디몬테 국립박물관, 나폴리 |
성전의 예수 소개 | 1455경 | 목판 템페라 | 68.9 × 86.3 | 슈타틀리헤 무제엔, 베를린 |
성모와 아기 예수, 성 예로니모와 성 루이 9세 | 1455경 | 패널 템페라 | 자크마르-앙드레 미술관, 파리 | |
십자가에 못 박힘 | 1457–1459 | 목재 | 67 × 93 | 루브르 박물관, 파리 |
고난받는 구세주로서의 그리스도 | 1495–1500 | 목판 템페라 | 78 × 48 | 덴마크 국립미술관, 코펜하겐 |
겟세마네 동산의 고뇌 | 1459경 | 목판 템페라 | 63 × 80 | 국립미술관, 런던 |
루도비코 트레비잔 추기경 초상화 | 1459–1460 | 목판 템페라 | 44 × 33 | 슈타틀리헤 무제엔, 베를린 |
두 천사 사이의 성 베르나르디노 시에나 | 1460 (추정) | 캔버스 템페라 | 385 × 220 | 브레라 미술관, 밀라노 |
남성 초상화 | 1460–1470 | 목재 | 24.2 × 19 | 국립미술관, 워싱턴 D.C. |
성모의 죽음 | 1461경 | 패널 | 54 × 42 |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
프란체스코 곤자가 초상화 | 1461경 | 패널 | 25 × 18 | 카포디몬테 미술관, 나폴리 |
잠자는 아기 예수와 성모 | 1465–1470 | 캔버스 유화 | 43 × 32 | 슈타틀리헤 무제엔, 베를린 |
성 조지 | 1460경 | 패널 템페라 | 66 × 32 | 아카데미아 미술관, 베네치아 |
산제노 제단화 | 1457–1460 | 패널 | 480 × 450 | 산제노, 베로나 |
성 세바스찬 | 1457–1459 | 목재 | 68 × 30 | 미술사 박물관, 비엔나[11] |
성 세바스찬 | 패널 | 255 × 140 | 루브르 박물관, 파리 | |
동방박사의 경배 | 1462 | 패널 템페라 | 76 × 76.5 | 우피치 미술관, 피렌체 |
승천 | 1462 | 패널 템페라 | 86 × 42.5 | 우피치 미술관, 피렌체 |
할례식 | 1462–1464 | 패널 템페라 | 86 × 42.5 | 우피치 미술관, 피렌체 |
카를로 데 메디치 초상화 | 1459–1466 | 패널 템페라 | 40.6 × 29.5 | 우피치 미술관, 피렌체 |
천사 성모 | 1485경 | 패널 | 88 × 70 | 브레라 미술관, 밀라노 |
카이사르의 개선 행렬 | 1486경 | 햄튼 코트 궁전 | ||
죽은 그리스도를 애도함 | 1490경 | 캔버스 템페라 | 68 × 81 | 브레라 미술관, 밀라노[12] |
동굴의 성모 | 1489–1490 | 우피치 미술관, 피렌체 | ||
성 세바스찬 | 1490 | 패널 | 68 × 30 | 카 도로, 베네치아 |
승리의 성모 | 1495 | 캔버스 템페라 | 285 × 168 | 루브르 박물관, 파리 |
인자한 그리스도 | 1500 | 캔버스 템페라 | 54 × 72 | 자크마르-앙드레 미술관, 파리 |
성가정 | 1495–1500 | 캔버스 템페라 | 75.5 × 61.5 | 드레스덴 그림 갤러리, 드레스덴 |
유딧과 홀로페르네스 | 1495 | 목판 템페라 | 국립미술관, 워싱턴 | |
트리불치오 성모 | 1497 | 캔버스 템페라 | 287 × 214 | 밀라노 시립 고대 미술관 |
파르나소스 (화성과 비너스) | 1497 | 캔버스 | 160 × 192 | 루브르 박물관, 파리 |
미네르바가 미덕의 정원에서 악덕을 쫓아냄 | 1502경 | 캔버스 유화 | 160 × 192 | 루브르 박물관, 파리 |
3. 2. 판화
만테냐는 판화가로서도 뛰어났지만, 그에 대한 기록은 다소 불분명하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그가 단 한 번을 제외하고는 자신의 판화에 서명이나 연대를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1472년 작품 하나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조르조 바사리는 만테냐가 로마에서 산드로 보티첼리의 작품을 모사한 피렌체의 바치오 발디니의 판화에 영향을 받아 판화 제작을 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 이는 매우 가능성이 낮다고 여겨진다. 만테냐가 제작한 수많은 정교한 판화들을 그의 생애 마지막 16~17년으로 한정짓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기간은 그 많은 작품들을 제작하기에는 너무 짧다. 게다가 초기 판화들은 그의 초기 화풍을 반영하고 있다. 만테냐는 파도바에 있을 당시 저명한 금세공인 니콜로(Niccolò)의 지도 아래 판화 제작을 시작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와 그의 작업실에서는 일반적으로 약 30점의 판화를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크기가 크고 인물이 많으며 매우 정교하게 제작되었다. 하지만 현재 그는 7점 또는 전혀 판화를 제작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작업실의 다른 예술가로 여러 점의 판화를 제작한 조반니 안토니오 다 브레시아(Giovanni Antonio da Brescia, 혹은 조안 안드레아(Zoan Andrea)로 알려짐)가 있다.주요 작품으로는 '바다 괴물의 전투', --(약 1475년), '죽은 그리스도를 애도하는 모습'(브레라 미술관 소장), '바커널 축제', '헤라클레스와 안타이오스', '바다의 신들',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든 유딧', '십자가에서 내림', '매장', '부활', '슬픔에 잠긴 사람', '동굴 속의 성모', 그리고 그의 회화 작품을 바탕으로 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개선식'의 여러 장면 등이 있다. 그의 판화 중 일부는 구리보다 연한 금속으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와 그의 추종자들의 기법은 디자인의 강하게 표현된 형태와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데 사용된 평행 해칭(parallel hatching)으로 특징지어진다. 평행선이 가까울수록 그림자가 더 어둡게 표현되었다. 이 판화들은 종종 두 가지 상태 혹은 판본으로 발견된다. 첫 번째 판본은 롤러 또는 수작업으로 찍어낸 것으로 색조가 약하다. 두 번째 판본은 인쇄기로 찍어낸 것으로 잉크가 더 진하다.
만테냐와 그의 작업실은 이른바 만테냐 타로 카드를 제작하지 않은 것으로 현재 여겨진다.
4. 예술적 특징 및 영향
만테냐는 파도바 근처 베네치아 공화국 이솔라 디 카르투로(Isola di Carturo)에서 태어났다. 그는 목수 비아지오의 둘째 아들이었다. 11세에 파도바 화가 프란체스코 스콰르치오네의 견습생이 되었다. 원래 직업이 재단사였던 스콰르치오네는 고대 예술에 대한 열정과 연기력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탈리아와 그리스에서 여행하며 고대 조각상, 부조, 항아리 등을 수집하고 직접 그림을 그렸으며, 수집품을 다른 사람들이 연구할 수 있도록 제공했다. 그는 의뢰받은 작품들을 제작했고, 제자들도 함께 참여했다.[4]
1440년경 설립된 스콰르치오네의 화실에는 약 137명의 화가와 그림 학생들이 있었다. 파도바는 베네토뿐 아니라 토스카나 출신의 예술가들(예: 파올로 우첼로, 필리포 리피, 도나텔로)도 끌어들였다. 만테냐의 초기 경력은 피렌체 작품의 영향을 받았다. 당시 만테냐는 스콰르치오네의 총애를 받는 제자로, 스콰르치오네는 그에게 라틴어를 가르치고 로마 조각의 파편을 연구하도록 지시했다. 스승은 또한 강제 원근법을 선호했는데, 이는 만테냐의 후기 혁신의 일부를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만테냐는 17세에 스콰르치오네의 공방을 떠났고, 나중에 스콰르치오네가 충분한 대가 없이 자신의 작품을 이용했다고 주장했다.
만테냐의 첫 작품(현재 소실됨)은 1448년 산타 소피아 교회를 위한 제단화였다. 같은 해 그는 니콜로 피졸로와 함께 에레미타니 성 아우구스티누스 교회 횡단부의 오베타리 예배당 장식을 맡았다. 그러나 만테냐를 포함한 스콰르치오네의 제자들이 이미 에레미타니 교회의 산 크리스토포로 예배당에 있는 프레스코화 시리즈를 시작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오늘날 이 시리즈는 걸작으로 여겨진다. 만테냐는 대부분의 작업을 혼자 마무리했지만, 오베타리 예배당에서 만테냐와 협력했던 안수이노 다 포를리는 포를리 화파의 스타일을 가져왔다. 스콰르치오네는 이 시리즈의 초기 작품들(성 야고보의 삶을 묘사하는 작품들)을 비판했고, 인물들이 마치 돌로 만든 사람들 같으며 돌색으로 그렸어야 했다고 말했다.[4]
이 시리즈는 1944년 파도바에 대한 연합군 폭격으로 거의 소실되었다. 프레스코화 연작 중 가장 극적인 작품은 '성 야고보의 처형'으로, 개미 시점 원근법을 사용하였다. '성 야고보' 그림보다 원근감이 덜 극적이지만, '산체노 제단화'는 성 야고보 연작이 완성된 직후인 1455년경에 제작되었으며, 고전 고대를 기반으로 한 건축 구조를 포함하여 동일한 기법들을 많이 사용한다.
'성 스테파노' 프레스코화의 스케치가 남아 있으며, 해당 프레스코화와 비교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알려진 예비 스케치이다. 이 그림은 나중에 옷을 입은 것으로 그려진 누드 인물이 초기 르네상스 시대 작품 구상에 사용되었다는 증거를 보여준다. 예비 스케치에서는 원근감이 덜 발달되어 있고 더 평균적인 시점에 가깝다. 기념비의 고전적인 모습에도 불구하고 알려진 로마 건축물의 복제본이 아니다. 만테냐는 그리스에서 유래한 로마인들의 습식 드레이프 패턴을 인물의 의복에 채택했지만, 긴장감 넘치는 인물과 상호 작용은 도나텔로에서 유래한다.
만테냐의 다른 초기 프레스코화로는 파도바 산탄토니오 교회 입구 현관 위의 두 성인(1452년)과 1453년 제작된 산 루카 제단화가 있으며, 산 루카와 다른 성인들을 그린 이 작품은 파도바의 유스티나 교회를 위해 제작되었으며 현재 밀라노 브레라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만테냐는 조반니 벨리니와 젠틸레 벨리니의 아버지인 야코포 벨리니의 영향을 받았고, 그의 딸 니콜로시아를 만났다. 1453년 야코포 벨리니는 니콜로시아와 만테냐의 결혼에 동의했다.[4]
만테냐는 그의 인체 형태가 너무 조각상 같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예술은 누드 형태의 고대 고전 미학과 조각적 환영의 묘사 사이의 차이를 보여준다. 이 비판은 조르조 바사리의 『미술가, 조각가, 건축가들의 일생』에서 묘사된 만테냐의 스승 프란체스코 스콰르치오네에게서 비롯된다. 바사리에 따르면 스콰르치오네가 고대 로마 예술을 사랑했던 것이 만테냐에게 영향을 미쳤다. 만테냐는 스콰르치오네의 작업실에서 이 조각들의 복제 주형을 연구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또한 도나텔로의 작품과 해부학을 포착하기 위해 그 자신이 조각한 모델의 영향을 받았다.[5] 후에 그는 1488년부터 1490년까지 로마에 머물면서 조각 걸작들을 연구했다.[6]
안드레아는 옛 스승의 가르침의 영향을 받았지만, 후기 작품들(성 크리스토퍼 전설)은 조각적인 스타일과 더 큰 자연주의와 생동감을 결합한다. 그는 대리석 연구와 고대의 엄격함 속에서 훈련받았기 때문에 고대 예술이 더 절충적이라는 이유로 자연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했다. 화가는 윤곽에 정확성을 발휘하여 인물을 우선시했다. 만테냐의 작품은 엄격함으로 기울어져 우아한 감각적 표현보다는 엄격한 전체성을 보여준다. 그의 드레이프는 꽉 조이고 촘촘하게 접혀 있으며 (종이와 접착제로 고정된 직물로 덮인 모델에서 연구되었다고 한다) 그의 인물들은 날씬하고, 근육질이며, 뼈가 돋보인다. 행동은 충동적이지만 에너지는 억제되어 있다. 자갈이 흩어져 거친 황갈색 풍경은 그의 스타일의 운동적인 고고함을 보여준다.[4]
만테냐는 파도바에서 채택했던 방식을 바꾸지 않았지만, 처음에는 중립적이고 결정적이지 않았던 그의 채색은 강해지고 성숙해졌다. 그의 작품 전체에는 색조의 미세함보다는 색상의 균형이 더 중요하다. 그의 목표 중 하나는 원근법을 통해 이루어진 시각적 환영이었는데, 비록 항상 수학적으로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당시에는 놀라운 효과를 거두었다.
성공했음에도 만테냐는 어린 나이에 고향 파도바를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프란체스코 스콰르치오네와의 적대감이 원인으로 제기되었다. 그는 생애의 나머지 기간을 베로나, 만토바, 로마에서 보냈다. 그가 베네치아와 피렌체에도 머물렀다는 것은 확인되지 않았다.[4] 1457년에서 1459년 사이 베로나에서 그는 산 제노 마조레 교회를 위해 산 제로 제단화를 그렸는데, 마돈나와 천사들, 양쪽에 네 명의 성인을 묘사하고 있다. ''산 제노 제단화'' 중앙 패널, 산 제노, 베로나. 베로나에서 최초의 르네상스 예술의 좋은 예시였을 것이며, 베로나 화가 지롤라모 다이 리브리의 유사한 그림에 영감을 주었다.[8]
만투아의 마르키스 루도비코 3세 곤자가는 만테냐에게 자신의 봉사에 들어올 것을 압박했으며, 1460년 만테냐는 궁정 화가로 임명되었다.[5] 그는 처음에는 고이토에 머물렀지만, 1466년 12월부터 가족과 함께 만투아로 이주했다. 그의 고용 계약은 월 75 리라의 봉급이었는데, 당시로서는 매우 큰 금액이었다. 그는 만투아에 거점을 둔 최초의 저명한 화가였다.[4]
그의 만투아 걸작은 만투아 궁정을 위해, 오늘날 만투아 공작궁의 신방("결혼 방")으로 알려진 도시 성의 아파트에서 그려졌다. 프레스코화로 된 일련의 완전한 구성에는 곤자가 가문 가족의 다양한 초상화와 천사,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다.[4] 천장의 원형 천장 장식의 혁신적인 공간 구성은 안토니오 코레조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5]
신방의 장식은 1474년에 완성되었다. 그 후 10년은 만테냐와 만투아에게 행복하지 않은 시기였다. 만테냐는 짜증을 내기 시작했고, 그의 아들 베르나르디노, 마르키스 루도비코, 그의 아내 바르바라, 그의 후계자 페데리코(만테냐를 "기사"라고 불렀다)도 사망했다. 프란체스코 2세 곤자가가 선출된 후에야 만투아에서 예술적 의뢰가 다시 시작되었다. 그는 산 세바스티아노 교회 지역에 집을 짓고 그림으로 장식했다. 그 집은 오늘날에도 볼 수 있지만, 그림은 남아 있지 않다. 이 시기에 그는 로마 흉상을 수집했는데 (로렌초 데 메디치에게 주어졌다), 건축 및 장식 조각을 그렸고,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세바스티안 성인''을 완성했다.
1488년 만테냐는 교황 인노첸시오 8세의 부름을 받아 바티칸 시국의 벨베데레 경당에 프레스코화를 그리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세례''를 포함한 이 프레스코화 연작은 교황 비오 6세에 의해 1780년에 파괴되었다. 교황은 만투아 궁정에서 받았던 것보다 만테냐를 덜 관대하게 대했지만, 1500년에 끝난 그들의 관계는 양측 모두에게 불만족스럽지 않았다.[4] 만테냐는 터키 인질 젬을 만나고 로마의 고대 유적을 연구했지만, 도시에 대한 그의 인상은 실망스러웠다. 1490년 만투아로 돌아온 그는 고대에 대한 문학적이고 비관적인 시각을 다시 받아들이고, 이사벨라 데스테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이사벨라는 1493년 그녀의 초상화 시도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녀는 "화가가 너무 형편없이 그려서 우리 자신의 모습과 전혀 닮지 않았다"고 말했다.[9]
그는 자신의 도시에서 로마로 떠나기 전에 시작했고 1492년경에 완성한 ''카이사르의 개선식''의 9점의 템페라 그림을 계속했다. 이 구성은 그 주제의 화려함과 고전적 학문과 열정으로 화려하다. 만테냐의 최고 걸작으로 여겨지는 이 작품들은 1628년 만투아의 많은 예술 보물들과 함께 잉글랜드의 찰스 1세에게 팔렸다.[4]
조르조 바사리는 만테냐를 칭찬했지만, 그의 소송적인 성격도 지적했다. 그는 파두아에서 동료 학생들과 친분이 있었고, 다리오 다 트레비지와 마르코 조포와는 우정을 유지했다. 만테냐는 생활이 사치스러워져 재정적 어려움에 처했고, 마르케세의 주의를 끌어 자신의 지불 청구를 압박해야 했다.[4]
고전적 취향에서 만테냐는 당대의 모든 경쟁자들을 압도했다. 15세기에 속하지만, 그의 양식과 경향은 이탈리아 미술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조반니 벨리니는 초기 작품에서 그의 매형 안드레아의 영향을 받았다.[4] 알브레히트 뒤러는 이탈리아 방문 두 차례 동안 그의 화풍의 영향을 받아 그의 판화 여러 점을 복제했다.[10]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만테냐로부터 화환과 과일로 장식하는 기법을 계승했다.
만테냐의 주요 유산은 프레스코화와 ''성모와 성인들'' 그림에서 공간 환영 기법을 도입한 것이다. 그의 천장 장식 전통은 3세기 동안 이어졌다. 방의 방의 희미한 돔에서 시작하여 코레조는 스승이자 동료의 원근법 구성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건축하여 파르마 대성당의 돔과 같은 걸작을 만들어냈다.
5. 평가
조르조 바사리는 만테냐를 칭찬했지만, 그의 소송을 좋아하는 성격도 지적했다. 그는 파두아에서 동료 학생들과 친분이 있었고, 그중 다리오 다 트레비지와 마르코 조포와는 꾸준한 우정을 유지했다. 만테냐는 생활이 매우 사치스러워져 때때로 재정적 어려움에 처했고, 마르케세의 주의를 끌어 자신의 정당한 지불 청구를 압박해야 했다.[10]
고전적 취향 측면에서 만테냐는 당대의 모든 경쟁자들을 압도했다. 15세기에 속하지만, 그의 양식과 경향은 이탈리아 미술 전반에 걸쳐 시대의 스타일과 트렌드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조반니 벨리니는 초기 작품에서 그의 매형 안드레아의 영향을 분명히 받았다.[10] 알브레히트 뒤러는 이탈리아 방문 두 차례 동안 그의 화풍의 영향을 받아 그의 판화 여러 점을 복제했다.[10]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만테냐로부터 화환과 과일로 장식하는 기법을 계승했다.
만테냐의 주요 유산은 프레스코화와 ''성모와 성인들'' 그림 모두에서 공간 환영 기법을 도입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의 천장 장식 전통은 거의 3세기 동안 이어졌다. 방의 방의 희미한 돔에서 시작하여 코레조는 그의 스승이자 동료의 원근법 구성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건축하여 결국 파르마 대성당의 돔과 같은 걸작을 만들어냈다.
참조
[1]
서적
The Renaissance in Italy: Architecture • Sculpture • Frescoes
The Viking Press
[2]
웹사이트
Mantegna, Andrea
https://web.archive.[...]
Oxford University Press
[3]
웹사이트
Mantegna
2019-06-01
[4]
서적
Lives of The Most Eminent Painters Sculptors & Architects
https://www.gutenber[...]
Macmillan and Co. Ltd. and The Medici Society Ltd
[5]
웹사이트
Andrea Mantegna
https://www.nga.gov/[...]
[6]
웹사이트
Bacchanal with a Wine Vat
https://www.metmuseu[...]
2021-01-02
[7]
웹사이트
christ-as-the-suffering-redeemer
https://web.archive.[...]
[8]
웹사이트
Madonna and Child with Saints
http://www.metmuseum[...]
2012
[9]
서적
Isbella d'Este: Selected Letters
Iter Press
[10]
간행물
Remaking Dürer: Investigating the Master Engravings by Masterful Engraving
https://web.archive.[...]
2012-11-12
[11]
웹사이트
St. Sebastian by Mantegna (at Kunsthistorisches Museum)
https://web.archive.[...]
[12]
웹사이트
The Lamentation over the Dead Christ by Andrea Mantegna
https://web.archive.[...]
[13]
서적
西洋美術史入門 実践編
筑摩書房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