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순핑크 크릭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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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애순핑크 크릭 전투는 1777년 1월 2일, 미국 독립 전쟁 중 뉴저지주 트렌턴에서 조지 워싱턴이 이끄는 대륙군과 찰스 콘월리스가 지휘하는 영국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워싱턴은 트렌턴 전투 승리 후, 영국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애순핑크 크릭 남쪽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영국군의 공격을 지연시키는 과정에서 애순핑크 크릭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으며, 대륙군은 야음을 틈타 프린스턴으로 이동했다. 이 전투는 대륙군의 프린스턴 전투 승리의 발판이 되었으며, 영국군에게 뉴욕으로 철수하도록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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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순핑크 크릭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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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전투명 | 애순핑크 크릭 전투 |
![]() | |
일부 | 뉴욕-뉴저지 전역 |
날짜 | 1777년 1월 2일 |
장소 | 뉴저지주트렌턴 |
결과 | 전략적 미국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미국 |
지휘관 및 지도자 | |
지휘관 1 | 조지 워싱턴 |
지휘관 2 | 찰스 콘월리스 |
병력 규모 | |
병력 1 | 6,000명 대포 40문 |
병력 2 | 5,000명 대포 28문 |
사상자 및 피해 | |
사상자 1 | 7–100명 사망 또는 부상 |
사상자 2 | 55–365명 사망, 부상 또는 포로 |
2. 배경
1776년 12월 25일, 조지 워싱턴이 이끄는 대륙군은 델라웨어 강을 건너 트렌턴 전투에서 헤센 용병 부대를 기습하여 승리했다.[6] 이후 워싱턴은 펜실베이니아로 철수했다가[7] 12월 30일 다시 트렌턴으로 돌아와 애순핑크 크릭 남쪽에 방어선을 구축했다.[8]
2. 1. 워싱턴의 제안
1776년 12월 30일, 조지 워싱턴은 트렌턴 전투에서 승리한 후 다시 트렌턴으로 돌아와 어려운 문제에 직면했다. 대부분 병사의 복무 기간이 12월 31일에 만료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군대가 해체될 위기에 놓인 것이다.[9] 워싱턴은 병사들에게 10USD의 보상금을 지급하며 한 달 더 복무해 줄 것을 간곡히 요청했다.[10] 그는 또한 지원병을 모집했지만, 처음에는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11]워싱턴은 말 위에서 병사들에게 다시 한번 호소했다. "나의 용감한 동지들이여, 여러분은 내가 요청한 모든 것을 해냈고, 합리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것 이상을 해냈습니다. 그러나 조국이 위태롭고, 여러분의 아내, 집, 그리고 여러분이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이 위태롭습니다. 여러분은 피로와 고난으로 지쳐버렸지만, 우리는 여러분을 아낄 방법을 모릅니다. 만약 여러분이 한 달만 더 머무는 데 동의한다면, 여러분은 아마 다른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할 수 없을 조국과 자유의 대의에 그만한 봉사를 하게 될 것입니다."[11]
처음에는 아무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지만, 한 병사가 용기를 내어 나섰고, 곧이어 대부분의 병사가 그 뒤를 따랐다. 이로써 대륙군은 붕괴 위기를 넘기고 전투를 계속할 수 있게 되었다.[12]
2. 2. 전투 준비
1777년 1월 1일, 대륙회의는 트렌턴으로 군자금을 보내 병사들에게 약속한 보상금을 지급했다.[45] 또한 조지 워싱턴에게 일련의 결의를 보냈는데, 그 중 하나는 그에게 군사 독재자에 준하는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었다.[46] 워싱턴은 트렌턴에 머물며 전투를 벌이기로 결심하고, 크로스윅스에 있던 존 캐드월래더 장군에게 1,800명의 민병대를 이끌고 트렌턴에서 합류할 것을 명령했다.[46] 12월 31일, 워싱턴은 찰스 콘월리스 장군이 이끄는 8,000명의 영국군이 대륙군을 공격하기 위해 트렌턴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47]2. 3. 영국군의 움직임

찰스 콘월리스는 영국으로 돌아갈 예정이었으나 휴가가 취소되었다.[16] 그는 프린스턴으로 가서 제임스 그랜트 장군을 따라잡았다. 그랜트는 프린스턴을 지원하기 위해 1,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동 중이었다. 콘월리스는 그랜트와 카를 폰 도놉의 설득으로 연합군과 함께 트렌턴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16]
1777년 1월 1일, 콘월리스와 그의 군대는 프린스턴에 도착했다.[17] 1월 2일, 콘월리스는 찰스 마우드 휘하에 병력 일부를 남겨두고 5,500명의 병력과 함께 약 17.70km 떨어진 트렌턴으로 향했다. 콘월리스의 군대는 28문의 대포를 가지고 3개 열로 행진했다.[17] 콘월리스가 메이든헤드(현재 로렌스빌)에 도착했을 때, 그는 알렉산더 레슬리 대령에게 1,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다음 날 아침까지 그곳에 머물도록 명령했다.[17]
3. 전투
1776년 12월 25일, 조지 워싱턴이 이끄는 대륙군은 델라웨어 강을 건너 트렌턴에 주둔하던 독일 용병 부대를 공격하여 승리했다.[37] 이후 워싱턴은 펜실베이니아주로 돌아갔다가, 12월 30일에 다시 트렌턴으로 이동하여 애순핑크 크릭 남쪽에 병력을 배치했다.[38][39]
3. 1. 대륙군의 지연 전술
- - 장군은 자신의 군대 앞에 헤센 예거와 영국 경보병으로 구성된 산병선을 배치했다.[18] 이틀 전, 조지 워싱턴은 마티아스 알렉시스 로슈 드 페르모이의 지휘하에 트렌턴과 프린스턴 사이 중간 지점에 외부 방어선을 배치하여 영국군의 진격을 지연시켰다.[19] 영국군이 접근하자 페르모이는 술에 취해 트렌턴으로 돌아갔고, 에드워드 핸드 대령이 그의 지휘권을 넘겨받았다.[18]
영국군이 사정거리에 들어오자 미국 저격수들이 사격을 시작했다.[20] 미국 저격수들은 숲, 협곡, 심지어 도로 굽이에도 숨어 있었고, 영국군이 전투 대형을 갖출 때마다 저격수들은 후퇴하여 엄폐물에서 사격했다. 핸드는 파이브 마일 런을 따라 배치된 미국군 진지를 포기해야 했고, 샤바쿵 크릭 남쪽 둑의 울창한 숲 지역에 새로운 진지를 구축했다.[20] 핸드는 나무 속에 병사들을 배치하여 영국군이 개울 다리를 건너는 동안 보이지 않도록 잘 보호했다. 저격수들은 그들에게 근거리에서 사격했다. 격렬한 사격으로 영국군은 마치 전체 미국군과 맞닥뜨린 듯 혼란에 빠졌고, 전투 대형을 갖추고 대포를 가져왔다.[20] 영국군은 30분 동안 숲에서 미국군을 찾았지만, 핸드는 이미 새로운 진지로 후퇴했다.[20]
오후 3시쯤, 영국군은 미국군이 또 다른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는 트렌턴에서 약 0.8km 떨어진 스톡턴 할로우로 알려진 협곡에 도착했다.[20] 워싱턴은 해가 질 때까지 영국군을 막아 아순핑크 크릭 남쪽에서 공격하는 것을 막고 싶었다. 포병대가 배치되자 영국군은 핸드의 새로운 진지를 공격했고, 그는 천천히 트렌턴으로 후퇴했다.[20] 핸드는 그의 부대가 길을 따라 집 뒤에서 사격하도록 했다.[21] 핸드의 부대가 개울에 도착했을 때, 헤센군은 총검을 장착하고 돌격하여 미국군에게 혼란을 야기했다. 워싱턴은 이 혼란을 보고 다리를 건너는 군중 속으로 말을 타고 나아가 핸드의 후위대가 미국 포병의 엄호 아래 후퇴하여 재집결하라고 외쳤다.[22]
3. 2. 애순핑크 크릭에서의 전투
영국군이 대륙군의 방어선에 공격을 준비하면서, 양측 간에 포격과 총격이 오갔다.[21][68] 영국군은 다리를 건너 밀집 대형으로 진격했고, 대륙군은 일제 사격으로 맞섰다. 영국군은 잠시 물러섰지만, 곧바로 다시 공격을 시도했다.[21][69] 그러나 대륙군의 포격에 의해 격퇴되었다. 영국군은 마지막으로 다시 공격했지만, 이번에는 대륙군이 산탄을 발사하여 영국군의 전열을 무너뜨렸다.[21][70] 한 병사는 "다리는 전사하거나 부상당한 병사들과 붉은색 군복으로 인해 피처럼 붉게 보였다"라고 말했다.[21][71]4. 대륙군의 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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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 콘월리스의 결정
콘월리스는 본대와 함께 트렌턴에 도착하여 공격을 계속할지 결정하기 위해 군사 회의를 소집했다.[23] 콘월리스의 병참 장교인 윌리엄 어스킨은 즉시 공격할 것을 촉구하며 "워싱턴이 내가 생각하는 장군이라면, 그의 군대는 아침에 그곳에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23]그러나 제임스 그랜트는 이에 동의하지 않고, 미국인들이 후퇴할 방법이 없으며, 영국군은 지쳐 있으니 휴식을 취한 후 아침에 공격하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했다.[23] 콘월리스는 아침까지 기다리고 싶지 않았지만, 어둠 속에서 부대를 공격에 투입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판단했다. 그는 "늙은 여우를 이제 안전하게 잡았어. 내일 아침에 가서 잡으면 돼."라고 말하고,[23] 그날 밤 트렌턴 북쪽 언덕으로 군대를 이동시켰다.[23]
4. 2. 워싱턴의 결정
헨리 녹스의 지휘 아래 미국 포병대는 밤 동안 가끔 트렌턴에 포탄을 발사하여 영국군을 긴장시켰다.[23] 워싱턴은 콘월리스와 마찬가지로 군사 회의를 소집했다. 그는 프린스턴으로 이어지는 잘 알려지지 않은 퀘이커 길을 이용하기로 했고, 군사 회의는 프린스턴의 영국 수비대를 공격하는 데 동의했다.[24] 1월 3일 오전 2시, 군대는 프린스턴으로 향했다. 워싱턴은 영국군을 속이기 위해 500명의 병력과 대포 2문을 남겨두고, 밤새도록 횃불을 피우고 삽과 곡괭이로 참호를 파는 소리를 내게 했다.[24] 아침까지 이 병력들도 철수했고, 영국군이 공격하러 왔을 때는 모든 미국군이 사라진 뒤였다.[25]5. 전투의 결과 및 영향
애순핑크 크릭 전투 결과, 양측 모두 피해를 입었지만, 여러 자료에 따르면 영국군이 대륙군보다 더 큰 피해를 본 것으로 나타난다.
밤 동안, 헨리 녹스가 이끄는 미국 포병대는 트렌턴에 포격을 가해 영국군을 긴장시켰다. 조지 워싱턴은 퀘이커 길을 통해 프린스턴의 영국 수비대를 기습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1777년 1월 3일 새벽에 공격을 감행했다. 이 전투에서 영국군은 크게 패배했고, 많은 병사들이 포로로 잡혔다.
열흘 사이에 세 번이나 패배한 영국군 윌리엄 하우 장군은 뉴욕으로 군대를 철수시켰다. 워싱턴은 모리스타운에 겨울 주둔지를 마련했다.
이 전투는 1789년 조지 워싱턴의 대통령 취임식 때 애순핑크 크릭 위의 다리에 개선문을 세워 기념되었다.
1792년, 미국 화가 존 트럼불은 전투 이후 애순핑크 크릭 다리 남쪽에 서 있는 워싱턴을 묘사한 전신 초상화 ''트렌턴의 조지 워싱턴 장군''을 그렸다.[30]
5. 1. 양측의 피해
스톡턴 할로우: 전사 6명, 부상 10명, 탈영 1명[5]스톡턴 할로우: 전사 최소 10명, 부상 20명, 포로 25명[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