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릭 더글러스흄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앨릭 더글러스흄은 1903년 런던에서 태어나 이튼 칼리지와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크리켓 선수로도 활약했으며, 1924년 영국 지역 군대에서 복무했다. 1931년부터 1945년까지 하원 의원을 지냈고, 네빌 체임벌린 총리, 윈스턴 처칠 내각에서 외무성 정무 차관을 역임했다. 1950년 하원 의원으로 복귀했으나, 이듬해 아버지의 사망으로 귀족 작위를 계승하여 상원으로 이동했다. 이후 스코틀랜드 담당 국무상, 연방 관계 장관, 외무 장관을 역임했다. 1963년 해럴드 맥밀런의 사임으로 총리가 되었으나, 1964년 총선에서 패배했다. 이후 상원 의원으로 활동하다 1995년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잉글랜드의 크리켓 선수 - C.T. 스터드
C.T. 스터드는 영국의 크리켓 선수이자 기독교 선교사로서, 케임브리지 대학교와 잉글랜드 대표팀에서 활약했으며 중국, 미국, 인도, 아프리카 등지에서 선교 활동을 펼치며 복음을 전파하고 콩고 분지 복음화에 기여한 공로로 훈장을 받았다. - 잉글랜드의 크리켓 선수 - 몬터규 톨러
몬터규 톨러는 영국의 스포츠 선수, 변호사, 정치가, 호텔 경영자로서 크리켓 잉글랜드 국가대표로 1900년 파리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하고 헌팅던셔 카운티 의회 의원, 세인트 아이브스 시의원 및 시장을 역임했다. - 영국의 스포츠인 출신 정치인 - 솔 캠벨
솔 캠벨은 잉글랜드의 전 축구 선수이자 감독으로, 토트넘 홋스퍼와 아스널에서 활약하며 프리미어리그 우승과 FA컵 우승을 달성했고 잉글랜드 국가대표로도 활발히 활동했으며 은퇴 후에는 감독과 정치 활동을 하고 있다. - 영국의 스포츠인 출신 정치인 - 필립 노엘베이커
필립 노엘베이커는 영국의 정치인, 외교관, 학자, 운동가, 육상 선수로서, 국제 연맹과 국제 연합에서 군축을 옹호한 공로로 1959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으며 노동당 소속으로 영국 하원 의원과 공군부 장관, 영국 연방 관계부 장관을 역임했다.
앨릭 더글러스흄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존칭 접두사 | 각하 |
이름 | 더 허슬의 홈 경 알렉산더 프레더릭 더글러스홈 남작 |
출생 이름 | 알렉산더 프레더릭 더글러스홈 |
출생일 | 1903년 7월 2일 |
출생지 | 잉글랜드 런던 |
사망일 | 1995년 10월 9일 |
사망지 | 스코틀랜드 베릭셔 주(콜드스트림) |
정당 | 보수당 |
다른 정당 | 연합당 |
배우자 | 엘리자베스 앨링턴 (1936년 10월 3일 결혼, 1990년 9월 3일 사별) |
자녀 | 4명 (데이비드 포함) |
아버지 | 찰스 더글러스홈 |
친척 | 로빈 찰스 더글러스홈 (조카) |
교육 | 이튼 칼리지 크라이스트 처치, 옥스퍼드 |
![]() | |
군 복무 | |
소속 | 영국 육군 |
부대 | 국토 방위군 |
계급 | 소령 |
지휘 | 래너크셔 요먼리 |
크리켓 정보 | |
타격 스타일 | 오른손 타자 |
볼링 스타일 | 오른팔 중간 빠른 속도 |
클럽 1 | 미들섹스 |
년도 1 | 1924–1925 |
클럽 2 | 옥스퍼드 대학교 |
년도 2 | 1926 |
클럽 3 | MCC |
년도 3 | 1926/27 |
칼럼 | 일급 |
경기 수 | 10 |
득점 | 147 |
타율 | 16.33 |
100/50 | 0/0 |
최고 점수 | 37* |
투구 수 | 688 |
위켓 수 | 12 |
볼링 평균 | 30.25 |
5개 위켓 | 0 |
10개 위켓 | 0 |
최고 볼링 | 3/43 |
캐치/스텀핑 | 9/- |
출처 | Cricinfo |
정치 경력 | |
직책 | 영국 총리 |
국왕 | 엘리자베스 2세 |
임기 시작 | 1963년 10월 19일 |
임기 종료 | 1964년 10월 16일 |
이전 총리 | 해럴드 맥밀런 |
다음 총리 | 해럴드 윌슨 |
직책 2 | 야당 대표 |
국왕 2 | 엘리자베스 2세 |
총리 2 | 해럴드 윌슨 |
임기 시작 2 | 1964년 10월 16일 |
임기 종료 2 | 1965년 7월 28일 |
이전 대표 2 | 해럴드 윌슨 |
다음 대표 2 | 에드워드 히스 |
직책 3 | 보수당 대표 |
임기 시작 3 | 1963년 10월 18일 |
임기 종료 3 | 1965년 7월 28일 |
이전 대표 3 | 해럴드 맥밀런 |
다음 대표 3 | 에드워드 히스 |
장관 직책 | |
직책 | 외무 및 영연방부 장관 |
총리 | 에드워드 히스 |
임기 시작 | 1970년 6월 20일 |
임기 종료 | 1974년 3월 4일 |
이전 장관 | 마이클 스튜어트 |
다음 장관 | 제임스 캘러한 |
총리 1 | 해럴드 맥밀런 |
임기 시작 1 | 1960년 7월 27일 |
임기 종료 1 | 1963년 10월 18일 |
이전 장관 1 | 셀윈 로이드 |
다음 장관 1 | 랩 버틀러 |
직책 2 | 추밀원 의장 |
총리 2 | 해럴드 맥밀런 |
임기 시작 2 | 1959년 10월 14일 |
임기 종료 2 | 1960년 7월 27일 |
이전 의장 2 | 헤일셤 자작 |
다음 의장 2 | 헤일셤 자작 |
총리 3 | 해럴드 맥밀런 |
임기 시작 3 | 1957년 3월 29일 |
임기 종료 3 | 1957년 9월 17일 |
이전 의장 3 | 솔즈베리 후작 |
다음 의장 3 | 헤일셤 자작 |
직책 4 | 상원 원내대표 |
총리 4 | 해럴드 맥밀런 |
임기 시작 4 | 1957년 3월 29일 |
임기 종료 4 | 1960년 7월 27일 |
이전 대표 4 | 솔즈베리 후작 |
다음 대표 4 | 헤일셤 자작 |
직책 5 | 영연방 관계 장관 |
임기 시작 5 | 1955년 4월 7일 |
임기 종료 5 | 1960년 7월 27일 |
총리 5 | 앤서니 이든 해럴드 맥밀런 |
이전 장관 5 | 스윈턴 자작 |
다음 장관 5 | 던컨 샌디스 |
직책 6 | 스코틀랜드 담당 국무장관 |
총리 6 | 윈스턴 처칠 |
임기 시작 6 | 1951년 11월 2일 |
임기 종료 6 | 1955년 4월 7일 |
이전 장관 6 | 직책 신설 |
다음 장관 6 | 토머스 갤브레이스 |
직책 7 | 외무부 정무 차관 |
동반 7 | 로바트 경 |
총리 7 | 윈스턴 처칠 |
임기 시작 7 | 1945년 5월 26일 |
임기 종료 7 | 1945년 7월 26일 |
이전 차관 7 | 조지 홀 |
다음 차관 7 | 헥터 맥닐 |
의회 직책 | |
직책 | 상원 의원 |
신분 | 세속 귀족 |
임기 유형 | 종신 귀족 |
임기 시작 | 1974년 12월 24일 |
임기 종료 | 1995년 10월 9일 |
임기 유형 1 | 세습 귀족 |
임기 시작 1 | 1951년 7월 11일 |
임기 종료 1 | 1963년 10월 23일 |
이전 의원 1 | 제13대 홈 백작 |
다음 의원 1 | 제15대 홈 백작 (1996년) |
의회 2 | 영국 |
선거구 의원 2 | 킨로스 및 서부 퍼스셔 |
임기 시작 2 | 1963년 11월 8일 |
임기 종료 2 | 1974년 9월 20일 |
이전 의원 2 | 길모어 레번 |
다음 의원 2 | 니콜라스 페어번 |
선거구 의원 3 | 라나크 |
임기 시작 3 | 1950년 2월 23일 |
임기 종료 3 | 1951년 7월 11일 |
이전 의원 3 | 톰 스틸 |
다음 의원 3 | 패트릭 메이틀랜드 |
임기 시작 4 | 1931년 10월 27일 |
임기 종료 4 | 1945년 6월 15일 |
이전 의원 4 | 토마스 딕슨 |
다음 의원 4 | 톰 스틸 |
2. 초기 생애 및 교육
런던 메이페어에서 1903년 7월 2일, 제13대 홈 백작이 되는 찰스 더글러스-홈과 제4대 더럼 백작의 딸 릴리안 램턴의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1] 그의 동생 중에는 극작가 윌리엄 더글러스흄이 있다.[128] 1918년 할아버지가 사망하고 아버지가 백작위를 계승하면서, 그는 1951년까지 덩글러스 경(Lord Dunglass)이라는 예우칭호를 사용했다.[2]
덩글러스 경은 루드그로브 스쿨(Ludgrove School)을 거쳐 이튼 칼리지에서 교육받았다. 이후 옥스퍼드 대학교 크라이스트 처치에 진학하여 1925년 근대사 전공으로 3등급 학사 학위를 받았다.[3] 학창 시절 뛰어난 운동선수였으며, 특히 크리켓 선수로 활동하여 영국 수상 중 유일하게 퍼스트클래스 크리켓 경력을 가졌다.[7]
1924년에는 영국 지역 군대(Territorial Army)에 입대하여 라나크셔 예오먼리(Lanarkshire Yeomanry) 부대의 소위로 임관했으며, 1928년에는 대위로 진급했다.[8]
2. 1. 출생과 가문

앨릭 더글러스흄은 1903년 7월 2일 런던 메이페어 사우스 스트리트 28번지에서 태어났다.[1][134][135] 그의 아버지는 당시 홈 백작 가문의 법정 추정상속인이었던 덩글러스 경, 찰스 더글러스-홈(1918년 제13대 홈 백작위 계승)이었고, 어머니는 제4대 더럼 백작 프레더릭 램턴의 딸인 릴리안 램턴 여사였다.[1][134][135] 그는 7남매 중 장남이었으며, 보통 "알렉"으로 불렸다.[1] 그의 동생 중에는 극작가 윌리엄 더글러스흄이 있다.[128]
1918년 할아버지인 제12대 홈 백작이 사망하고 아버지가 백작위를 계승하면서, 알렉 더글러스흄은 덩글러스 경(Lord Dunglass)이라는 예우칭호를 사용하게 되었고, 이 칭호는 1951년까지 유지되었다.[2]

젊은 덩글러스 경은 루드그로브 스쿨(Ludgrove School)과 이튼 칼리지에서 교육을 받았다.[134] 이튼 시절 동기였던 작가 시릴 코놀리는 그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비밀스러운 이튼 종교의 신봉자, 우아하고 관대하며 느긋한 소년으로, 아무런 노력 없이도 호의를 받고 모든 영예를 누렸으며, 선생님들에게는 인기가 많고 학생들에게는 존경을 받았다. 그는 스스로 성공의 부작용을 경험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질투심을 유발하지 않았다. 18세기였다면 30세 이전에 수상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삶의 투쟁에는 존경스럽게도 적합하지 않아 보였다."
이튼 졸업 후, 덩글러스는 옥스퍼드 대학교 크라이스트 처치에 진학하여 1925년 근대사 전공으로 3등급 학사 학위를 받았다.[3][134]
덩글러스는 재능 있는 운동선수이기도 했다. 이튼에서 파이브스(Fives) 대표 선수였을 뿐만 아니라,[4] 학교, 클럽, 카운티 수준에서 뛰어난 크리켓 선수였으며, 영국 수상 중 유일하게 퍼스트클래스 크리켓 경력을 가지고 있다.[7] 조지 허스트의 지도를 받았으며,[5] 위즈든 크리켓 연감은 그를 "이튼 XI의 유용한 멤버"로 묘사했다.[7] 그의 동료 선수로는 퍼시 로리와 구비 앨런 등이 있었다.[6] 위즈든은 "1922년 비로 인해 경기가 중단된 이튼-해로우 경기에서 그는 젖은 그라운드에도 불구하고 66점을 득점했고, 중속 아웃스윙 볼링으로 4위켓을 37실점으로 획득했다"고 기록했다.[7]
퍼스트클래스 크리켓에서는 옥스퍼드 대학교 크리켓 클럽, 미들섹스 카운티 크리켓 클럽, 그리고 메릴본 크리켓 클럽(MCC)을 대표했다. 1924년부터 1927년까지 총 10번의 퍼스트클래스 경기에 출전하여 평균 타율 16.33으로 147점을 기록했고, 최고 득점은 37점(낫아웃)이었다. 투수로서는 평균 30.25의 실점으로 12위켓을 잡았고, 최고 기록은 43실점 3위켓이었다. 그의 퍼스트클래스 경기 중 3경기는 1926-27년 MCC의 남아메리카 순회 경기 중 아르헨티나 대표팀과의 국제 경기였다.[7]
덩글러스는 1924년 영국 지역 군대(Territorial Army)에 입대하여 라나크셔 예오먼리(Lanarkshire Yeomanry) 부대의 소위로 임관했으며, 1928년에는 대위로 진급했다.[8]
2. 2. 학창 시절
런던 메이페어 사우스 스트리트 28번지에서 1903년 7월 2일,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12대 홈 백작의 장남인 덩글러스 경(찰스 더글러스홈, 훗날 13대 홈 백작)이었고, 어머니는 4대 더럼 백작의 딸인 리리안 램턴 여사였다. 가족과 친구들은 그를 보통 "알렉"이라고 불렀다.[1] 그의 남동생 중에는 극작가 윌리엄 더글러스홈이 있다.[128]1918년, 할아버지인 12대 홈 백작이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 덩글러스 경이 백작 작위를 물려받았다. 이때부터 알렉 더글러스홈은 1951년 아버지가 사망할 때까지 예우 칭호인 덩글러스 경(Lord Dunglass)으로 불렸다.[2] 그는 루드그로브 스쿨을 거쳐 명문 이튼 칼리지에서 교육받았다. 이튼 시절 동창이었던 작가 시릴 코놀리는 훗날 덩글러스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그는 이튼 특유의 분위기를 체화한 듯한, 우아하고 너그러우며 여유로운 소년이었다. 별다른 노력 없이도 주변의 호의와 온갖 명예를 누렸고, 선생님들에게는 총애를, 동급생들에게는 존경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성공이 가져올 수 있는 부작용을 겪거나 남들의 시기를 사는 법이 없었다. 만약 18세기에 태어났다면 서른 살이 되기 전에 수상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의 치열한 생존 경쟁에는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이튼을 졸업한 뒤에는 옥스퍼드 대학교의 크라이스트 처치에 진학해 근대사를 공부했고, 1925년에 3등급 학사 학위를 받았다.[3]
덩글러스는 학업 외에도 스포츠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이튼 시절에는 파이브스(fives, 영국식 핸드볼) 대표 선수로 활동했으며,[4] 특히 크리켓에서는 학교, 클럽, 카운티 대표 선수로 활약했다. 그는 역대 영국 수상 중 유일하게 퍼스트클래스 크리켓 선수 경력을 가진 인물이기도 하다.[7] 전설적인 크리켓 선수 조지 허스트에게 직접 지도를 받기도 했으며,[5] 유명 크리켓 연감인 《위즈든》(Wisden Cricketers' Almanack)은 그를 "이튼 팀의 쓸모 있는 선수"라고 평가했다.[7] 당시 이튼 팀 동료로는 훗날 유명 크리켓 선수가 되는 퍼시 로리와 구비 앨런 등이 있었다.[6] 《위즈든》은 특히 1922년 이튼과 해로우 스쿨 간의 경기에서 보여준 그의 활약을 언급하며 "비 때문에 경기 진행이 어려웠음에도 젖은 경기장에서 66점을 기록했고, 중간 속도의 아웃스윙 볼링으로 37실점하며 4개의 위켓을 잡아냈다"고 기록했다.[7]
그는 퍼스트클래스 크리켓 선수로서 옥스퍼드 대학교 크리켓 클럽, 미들섹스 카운티 크리켓 클럽, 그리고 메릴본 크리켓 클럽(MCC) 소속으로 뛰었다. 1924년부터 1927년까지 총 10번의 퍼스트클래스 경기에 출전해 평균 16.33의 타율로 총 147점을 기록했으며, 개인 최고 점수는 37점(낫아웃)이었다. 투수로서는 평균 30.25의 실점률로 12개의 위켓을 따냈고, 한 경기 최고 기록은 43실점 3위켓이었다. 그가 출전한 퍼스트클래스 경기 중 세 경기는 1926-27년 MCC가 남아메리카로 순회 경기를 떠났을 때 아르헨티나 국가대표팀을 상대로 치른 국제 경기였다.[7]
스포츠 활동과 더불어 군 복무도 시작했다. 1924년, 그는 영국 예비군인 지역 군대(Territorial Army)의 라나크셔 예오먼리(Lanarkshire Yeomanry) 연대에 소위로 임관했으며, 1928년에는 대위로 진급했다.[8]
2. 3. 스포츠 활동
덩글러스 경(훗날의 앨릭 더글러스흄)은 재능 있는 스포츠맨이었다. 이튼 칼리지 재학 시절에는 파이브스 대표 선수였으며,[4] 학교, 클럽, 카운티 수준에서 뛰어난 크리켓 선수로 활동했다. 그는 영국 수상 중 유일하게 퍼스트클래스 크리켓 경기에 출전한 인물이기도 하다.[7] 조지 허스트에게 지도를 받았으며,[5] 위즈든 크리켓 연감은 그를 "이튼 XI의 유용한 멤버"로 평가했다.[7] 당시 그의 동료 선수로는 퍼시 로리와 구비 앨런 등이 있었다.[6] 위즈든은 "1922년 비로 인해 중단된 이튼-해로우 경기에서 그는 젖은 그라운드에도 불구하고 66점을 득점했고, 중간 속도의 아웃스윙 볼링으로 4위켓을 37실점으로 잡아냈다"고 기록했다.[7]퍼스트클래스 크리켓 선수로서 그는 옥스퍼드 대학교 크리켓 클럽, 미들섹스 카운티 크리켓 클럽, 그리고 메릴본 크리켓 클럽(MCC)을 대표하여 활동했다. 1924년부터 1927년까지 총 10번의 퍼스트클래스 경기에 출전하여, 타자로는 평균 16.33의 타율로 147점을 기록했으며 최고 점수는 37점(낫아웃)이었다. 투수로서는 평균 30.25의 실점률로 12개의 위켓을 잡았고, 개인 최고 기록은 43실점 3위켓이었다. 그가 출전한 퍼스트클래스 경기 중 3경기는 1926년부터 1927년까지 MCC의 남아메리카 순회 경기 중 아르헨티나 대표팀과의 국제 경기였다.[7]
3. 정치 경력
1931년 총선에서 래너크 지역구에 연합당 후보로 출마하여 하원 의원으로 당선되며 정계에 입문했다.[17][134]
초선 의원 시절, 그는 네빌 체임벌린 재무장관의 의회 담당 비서관(PPS)으로 발탁되었고, 1937년 체임벌린이 총리가 된 후에도 계속 그를 보좌했다.[20][134] 이 시기 그는 체임벌린의 유화 정책 추진 과정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았으며, 1938년 뮌헨 협정 체결 당시 체임벌린 총리와 동행하기도 했다.[135]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1940년 5월 체임벌린이 윈스턴 처칠에게 총리직을 넘겨줄 때까지 그의 PPS로 활동했다.[24]
체임벌린 사임 직후 척추 결핵 진단을 받아 약 2년간 정치 활동을 중단하고 투병 생활을 했다.[27][29] 1943년 하원에 복귀한 그는 1945년 처칠이 이끄는 임시 내각에서 영국 외무성 정무차관으로 임명되어 첫 장관직을 경험했으나,[134] 같은 해 7월 총선에서 노동당의 압승으로 낙선했다.[135]
1950년 총선에서 다시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어 복귀했지만,[136] 이듬해인 1951년 7월 부친의 사망으로 휴움 백작(Earl of Home) 작위를 계승하면서 자동으로 상원 의원이 되었다.[136][133][135] 이후 처칠, 앤서니 이든, 해럴드 맥밀런으로 이어지는 보수당 정부에서 스코틀랜드 차관, 영연방 관계 장관, 상원 원내대표, 추밀원 의장, 외무장관 등 주요 요직을 두루 거치며 정치적 입지를 다졌다.[134][135]
1963년 10월, 건강 문제로 갑작스럽게 사임 의사를 밝힌 맥밀런 총리의 후임으로 지명되었다. 당시 R. A. 버틀러, 레지널드 몰딩, 헤일샴 경 등 유력 후보들이 경합하는 상황이었고, 상원의원이었던 홈의 지명은 다소 예상 밖이었으며 당내 일부 반발을 사기도 했다.[83][84] 그는 귀족 작위를 포기하고 하원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된 후 총리직을 수행하게 된다.
3. 1. 정계 입문
존경칭호인 던글러스 경은 상원 의원 자격을 부여하지 않았기에, 그는 하원 의원 선거에 출마할 수 있었다. 그의 가문인 더글러스흄 가문은 정치 활동 이력이 거의 없었는데, 증조부인 홈 백작 11세가 웰링턴 공작의 1828-1830년 정부에서 외무차관으로 잠시 일한 것이 유일한 정치 경력이었다.[9] 던글러스의 아버지는 백작 작위를 계승하기 전 하원 선거에 나섰으나 낙선한 경험이 있었다.[9]던글러스 본인도 이튼이나 옥스퍼드 재학 시절 정치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정치 지망생들이 흔히 가입하는 옥스퍼드 유니언에도 참여하지 않았다.[10] 그러나 가문의 후계자로서 단순히 시골 신사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 "항상 이런 역할에 다소 불만을 느꼈고,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전기 작가 데이비드 더튼은 던글러스가 스코틀랜드 저지대의 실업과 빈곤 문제에 영향을 받아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보았다.[11] 훗날 던글러스는 "공공 봉사의 한 형태라고 느꼈고, 1차 대전으로 한 세대의 정치인이 사라졌기에 리더십을 발휘할 능력이 있는 이들이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정계 입문 이유를 밝혔다.[12] 그의 정치 사상은 노엘 스켈턴의 영향을 받았는데, 스켈턴은 노동자를 위한 주식 옵션과 산업 민주주의에 기반한 "재산 소유 민주주의"를 주장한 스코틀랜드 연합당(당시 스코틀랜드 보수당의 명칭) 당원이었다.[13] 던글러스는 사회주의의 공공 소유 이념에는 동의하지 않았고, 스켈턴의 "모든 사람이 소유하는 것은 아무도 소유하지 않는 것"이라는 견해를 지지했다.
스켈턴의 지원을 받아 던글러스는 1929년 총선에서 코트브리지 지역구의 연합당 후보로 나섰다.[14] 당선 가능성이 낮은 지역구였고, 그는 9,210표를 얻어 16,879표를 획득한 노동당 후보에게 패배했다.[15] 그러나 이 경험은 그가 적대적인 청중을 대하고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법을 배우는 데 도움이 되었다.[16] 1931년 재정 위기 극복을 위한 연립정부가 구성되자, 던글러스는 래너크 지역구의 친 연립정부 연합당 후보로 지명되었다. 자유당이 후보를 내지 않고 그를 지지하면서, 던글러스는 노동당 후보를 누르고 하원 의원에 당선되었다.[17] 그는 1931년 10월부터 1945년 6월까지 이 선거구에서 보수당 소속 하원 의원으로 활동했다.[134]
1937년 스탠리 볼드윈의 뒤를 이어 네빌 체임벌린이 총리가 되자, 던글러스는 그의 의회 담당 비서관(PPS)으로 임명되어 계속 활동했다.[134] 이 역할은 체임벌린의 "눈과 귀"이자[22] "의회 당과의 연락 담당자"로서[23], 다소 냉담하게 평가받던 체임벌린에게 중요한 소통 창구 역할을 했다.[24] 던글러스는 체임벌린을 개인적으로 존경했다고 회고했다.[25]
체임벌린의 보좌관으로서 던글러스는 아돌프 히틀러의 독일에 대한 유화 정책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다. 1938년 9월, 그는 체임벌린과 함께 뮌헨 협정 체결을 위한 회담에 동행했다.[135] 체임벌린은 귀국 후 "명예로운 평화"와 "우리 시대의 평화"를 약속했지만, 이는 1년도 지나지 않아 제2차 세계 대전 발발로 공허한 말이 되었다. 던글러스는 평생 뮌헨 협정이 영국에게 전쟁 준비 시간을 벌어주어 궁극적으로 승리에 기여했다고 주장했다.[24] 1940년 5월 체임벌린이 총리직에서 물러나고 윈스턴 처칠에게 자리를 넘겨준 뒤에도 던글러스는 잠시 그의 PPS로 남았다.[24] 던글러스 자신은 뮌헨 협정 당시 의사 결정권이 없는 PPS였기에, 훗날 R. A. 버틀러 등 다른 유화 정책 지지자들과 달리 비판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26]
체임벌린 사임 직후 던글러스는 군 복무를 자원했으나, 신체검사에서 척추 결핵이 발견되었다.[27] 1940년 9월, 그는 척추뼈를 이식하는 위험한 수술을 받았고,[27] 이후 약 2년간 석고붕대를 한 채 누워 지내는 힘든 투병 생활을 했다.[29] 그는 이 기간 동안 마르크스의 『자본론』, 엥겔스와 레닌의 저작, 정치인들의 전기, 도스토옙스키부터 쾨슬러까지 다양한 소설을 읽었다.[31][30] 그는 수술 후 외과의에게 "정치인에게 척추를 만들어 주셨군요!"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28]
1943년 7월, 던글러스는 하원에 복귀하여 외교 분야에 대한 전문성을 바탕으로 후방 의원으로서 입지를 다졌다. 그는 전후 소비에트 연방의 팽창주의를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주목받았다.[124] 1945년 5월 처칠이 보수당 임시 정부를 구성했을 때, 던글러스는 앤서니 이든 외무장관 아래에서 외무성 정무차관으로 임명되어 첫 장관직을 맡았다.[134] 그러나 1945년 7월 총선에서 보수당이 노동당에 참패하면서 그도 의석을 잃었다.[135]
1950년 2월 총선에서 던글러스는 래너크 지역구 의석을 되찾아 하원에 복귀했다.[136] 하지만 이듬해인 1951년 7월 11일,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휴음 백작(Earl of Home) 작위를 포함한 4개의 작위를 계승하게 되었고, 귀족 신분으로서 상원 의원이 되었다.[136][133][135] 이로써 그의 하원 의원으로서의 정치 경력은 마무리되었다.
3. 2. 의정 활동 초기
귀족 작위인 던글러스 경(Lord Dunglass)은 상원 의원 자격을 부여하지 않았기에, 그는 하원 의원 선거에 출마할 수 있었다. 그의 가문인 더글러스흄 가문은 정치 활동의 역사가 거의 없었다. 증조부인 홈 백작 11세가 웰링턴의 1828-1830년 정부에서 외무부 차관을 지낸 것이 유일한 정치 경력이었다.[9] 던글러스의 아버지 역시 백작 작위를 계승하기 전 하원 선거에 나섰으나 낙선한 경험이 있다.[9]던글러스는 이튼 칼리지나 옥스퍼드 대학교 재학 시절 정치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정치인을 지망하는 학생들이 주로 가입하는 옥스퍼드 유니온에도 참여하지 않았다.[10] 그러나 가문의 상속자로서 단순히 시골 신사로 살아가는 것에 회의감을 느꼈으며, "이런 역할에 다소 불만을 느꼈고,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전기 작가 데이비드 더튼은 던글러스가 스코틀랜드 저지대의 실업과 빈곤 문제에 직면하면서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본다.[11] 훗날 수상이 된 후 그는 "공공 봉사의 한 형태라고 느꼈고, 1차 대전에서 한 세대에 가까운 정치인들이 전사했기 때문에 리더십을 발휘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정계에 입문했다"고 회고했다.[12] 그의 정치 사상은 노엘 스켈턴의 영향을 받았다. 스켈턴은 스코틀랜드 연합당(스코틀랜드 보수당의 당시 명칭) 소속으로, 노동자를 위한 주식 옵션과 산업 민주주의에 기반한 "재산 소유 민주주의"를 주장했다.[13] 던글러스는 사회주의적 공공 소유 개념에 회의적이었고, "모든 사람이 소유하는 것은 아무도 소유하지 않는 것"이라는 스켈턴의 견해에 동의했다.
스켈턴의 지원을 받아 던글러스는 1929년 총선에서 코트브리지 지역구의 연합당 후보로 나섰다.[14] 당선 가능성이 낮은 지역구였고, 그는 노동당 후보에게 9,210표 대 16,879표로 패배했다.[15] 하지만 이 경험은 온화하고 논쟁을 즐기지 않으며 타고난 연설가가 아니었던 던글러스에게 귀중한 자산이 되었다. 그는 적대적인 청중을 대하고 자신의 주장을 전달하는 법을 배웠다.[16] 1931년 재정 위기 극복을 위한 국민 정부가 수립되자, 던글러스는 래너크 지역구의 연립 정부 지지 연합당 후보로 공천되었다. 이 지역구는 특정 정당의 텃밭이 아니었으나, 자유당이 후보를 내지 않고 그를 지지하면서 노동당 후보를 쉽게 이기고 하원에 입성했다.[17]
당시 하원은 연립 정부 지지 의원들이 다수였기에 신입 의원이었던 던글러스는 주목받지 못할 수도 있었다.[17] 그러나 스코틀랜드 사무소 차관으로 임명된 스켈턴이 던글러스에게 무보수 비공식 의회 보좌관직을 제안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공식적인 의회 사적 비서(PPS)는 정부 내부 사정에 밝아지는 대신 발언에 제약을 받았지만, 던글러스는 비공식 보좌관으로서 발언의 자유를 유지하면서 정부 운영을 배울 수 있었다.[17] 그는 1932년 2월 첫 하원 연설에서 신중한 보호 무역주의를 옹호하며, 값싼 수입품에 대한 관세 부과가 생활비를 상승시킨다는 노동당의 비판에 맞서 관세가 "고용을 촉진하고 일자리를 창출하며, 실업 수당 대신 임금을 지급함으로써 국민의 구매력을 높인다"고 주장했다.[18]
4년간 스켈턴의 보좌관으로 일하며 던글러스는 스코틀랜드 농촌 지역의 의료, 토지 정착, 어업, 교육, 산업 등 다양한 문제에 대한 경험을 쌓았다.[19] 1935년에는 노동부 차관 앤서니 뮤어헤드의 공식 PPS로 임명되었고, 1년 후에는 재무장관 네빌 체임벌린의 PPS가 되었다.[20]
당시 체임벌린은 스탠리 볼드윈 총리의 유력한 후계자로 여겨졌고[21], 1937년 볼드윈이 은퇴하자 총리직을 승계했다. 체임벌린은 던글러스를 PPS로 유임시켰다. 이 역할은 "네빌 체임벌린의 오른팔이자 눈과 귀"[22], "의회 당과의 연락 담당자로서 정보를 전달하고 받고, 정부 후방 의석의 분위기를 그의 주인에게 알리는"[23] 중요한 자리였다. 이는 냉담하고 거리감이 있다는 평을 받던 체임벌린에게 특히 중요했다. 던글러스는 체임벌린의 개인적인 매력 부족을 보완하는 역할을 했다.[24] 던글러스는 체임벌린의 강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그를 존경했으며, "나는 그를 좋아했고, 그도 나를 좋아했다고 생각한다"고 회고했다.[25]
체임벌린의 보좌관으로서 던글러스는 총리가 유화 정책을 통해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 독일을 달래려 시도하는 과정을 가까이서 지켜보았다. 1938년 9월, 체임벌린이 뮌헨에서 히틀러와 마지막 회담을 가질 때 던글러스도 동행했다. 뮌헨 협정을 통해 체코슬로바키아를 희생시켜 얻은 짧은 평화를 가지고 런던으로 돌아온 체임벌린은 환호하는 군중 앞에서 "명예로운 평화"를 가져왔으며 "우리 시대의 평화"를 약속한다고 연설했다. 이는 던글러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온 발언이었다. 이 약속은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히틀러의 계속된 침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공허한 말이 되었다. 체임벌린은 1939년 9월 전쟁 발발 이후에도 총리직을 유지했으나, 1940년 5월 하원 표결에서 정부 지지 표가 급감하자 결국 윈스턴 처칠에게 총리직을 넘겨주었다. 던글러스는 "그는 더 이상 보수당의 다수 지지를 얻을 수 없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체임벌린은 처칠의 전시 연립 내각에서 내각 의장직을 맡았고, 던글러스는 계속 그의 PPS로 남았다.[24] 뮌헨 협정 이후 체임벌린의 명성은 회복되지 못했고, R. A. 버틀러와 같은 그의 측근들은 '유화론자'라는 꼬리표 때문에 정치적 어려움을 겪었지만, 던글러스는 상대적으로 비판에서 자유로웠다. 그럼에도 던글러스는 평생 뮌헨 협정이 당시 군사력이 부족했던 영국이 전쟁을 준비할 시간을 벌어주어 궁극적으로 나치 독일 패배에 기여했다고 주장했다.[24] 체임벌린은 총리직 사임 몇 달 후 건강이 악화되어 내각에서 물러났고, 1940년 11월 사망했다.
체임벌린이 총리직에서 물러난 직후, 던글러스는 군 복무를 자원하여 랭커셔 요먼리 연대에 재입대하려 했다.[24] 그러나 신체검사에서 척추 결핵이 발견되었다.[27] 수술을 받지 않으면 몇 달 안에 걷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진단을 받았다.[27] 1940년 9월, 그는 6시간에 걸친 대수술을 받았다. 척추의 병든 뼈를 제거하고 환자의 정강이뼈에서 채취한 건강한 뼈로 대체하는 위험하고 혁신적인 수술이었다.[27] 수술 후 던글러스는 외과의에게 "정치인에게 척추를 만들어 주셨군요!"라고 농담했지만[28], 이후 2년은 석고 붕대를 한 채 대부분 누워서 지내야 하는 힘든 시련이었다. 그는 아내와 가족의 헌신적인 간호 속에서도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느낄 때가 많았다"고 고백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29] 1942년 말 석고 붕대를 제거하고 척추 보조기를 착용했으며, 1943년 초에야 비로소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28] 투병 기간 동안 그는 방대한 독서를 했는데,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30], 엥겔스와 레닌의 저작, 19세기와 20세기 정치인들의 전기, 도스토예프스키부터 쾨슬러까지 다양한 소설을 읽었다.[31]
1943년 7월, 던글러스는 3년 만에 하원에 복귀하여 후방 의원으로서 활동을 재개했다. 특히 외교 분야에 대한 전문성을 키워나갔다.[121] 그는 전후 영국의 탈제국 시대를 예견하고 강력한 유럽 연합의 필요성을 주장했다.[121] 1944년에는 연합군의 승리가 가시화되자 동유럽을 장악하려는 소비에트 연방의 야심에 맞서야 한다고 강력히 연설했다. 스탈린에게 굴복하지 말라고 처칠에게 공개적으로 촉구한 그의 발언은 주목받았으며, 과거 유화 정책에 연관되었던 인물이 소련의 위협 앞에서 강경한 태도를 보이는 모습으로 비춰졌다.[124] 1945년 5월 노동당이 전시 연립 정부에서 탈퇴하자 처칠은 7월 총선을 앞두고 보수당 임시 정부를 구성했다. 이때 던글러스는 앤서니 이든 외무장관 아래에서 외무성 정무차관으로 임명되어 첫 장관직을 맡았다.[15][134] 그러나 1945년 7월 총선에서 보수당이 참패하면서 던글러스 역시 래너크 선거구에서 낙선했다.[135]
1950년 2월 총선에서 던글러스는 래너크 선거구 의석을 되찾아 하원으로 복귀했다.[136] 하지만 이듬해인 1951년 7월 11일,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휴움 백작(Earl of Home) 작위를 비롯한 4개의 귀족 작위를 계승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자동으로 상원 의원이 되었다.[136][133][135]
3. 3. 체임벌린 총리 시절
덩글러스는 1935년 노동부 차관인 앤서니 뮤어헤드의 공식 의회 사적 비서(PPS)로 임명되었고,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당시 재무장관이었던 네빌 체임벌린의 PPS가 되었다.[20]덩글러스가 임명될 무렵, 체임벌린은 총리직 계승자로 널리 여겨졌다.[21] 그리고 1937년, 재임 중이던 스탠리 볼드윈이 은퇴하자 체임벌린이 그 뒤를 이었다. 그는 덩글러스를 자신의 PPS로 유임시켰다. 이 역할은 전기 작가 D. R. 소프에 의해 "오른팔… 네빌 체임벌린의 눈과 귀"[22]로, 그리고 더튼에 의해 "의회 당과의 연락 담당자로서 정보를 전달하고 받고, 정부 후방 의석의 분위기를 그의 주인에게 알렸다."[23]고 묘사되었다. 이는 종종 냉담하고 초연한 인물로 여겨졌던 체임벌린에게 특히 중요했다. 더글러스 허드는 체임벌린이 "유능한 행정을 변덕스러운 동료들에게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드는 개인적인 매력이 부족했는데, 그의 의회 개인 비서가 풍부하게 가지고 있던 재능이었다."[24]고 적었다. 덩글러스는 그의 압도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체임벌린을 존경했다. "나는 그를 좋아했고, 그도 나를 좋아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루가 끝나갈 무렵 수다를 떨러 간다면, 그는 '뭘 원하는 거지?'라고 묻곤 했습니다. 그는 알기 매우 어려운 사람이었습니다."[25]
체임벌린의 보좌관으로서 덩글러스는 총리가 유화 정책을 통해 아돌프 히틀러의 독일을 달래려고 시도하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1938년 9월 뮌헨에서 히틀러와 마지막 회담을 가졌을 때, 덩글러스는 그와 동행했다.[135] 체코슬로바키아를 희생하여 히틀러의 영토 요구를 받아들임으로써 짧은 평화를 얻은 체임벌린은 환호하는 군중의 환영을 받으며 런던으로 돌아왔다. 덩글러스의 촉구를 무시하고 그는 전에 없이 장황한 연설을 하며 "명예로운 평화"를 가져왔다고 주장하고 "우리 시대의 평화"를 약속했다. 이 말들은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히틀러의 지속적인 공격으로 전쟁이 불가피해졌을 때 그를 괴롭혔다. 체임벌린은 1939년 9월 전쟁 발발부터 1940년 5월까지 총리직을 유지했는데, 덩글러스의 말에 따르면, "그는 더 이상 보수당의 다수 지지 얻을 수 없었다." 하원의 투표 후, 정부의 다수당이 200석 이상에서 81석으로 줄어들자 체임벌린은 윈스턴 처칠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그는 새로운 연립 정부에서 비부처 장관직인 내각 의장직을 수락했고, 덩글러스는 그의 PPS로 남았다.[24] 앞서 그는 스코틀랜드 사무소 차관의 장관직 제안을 거절했다. 체임벌린의 명성은 뮌헨 사건 이후 회복되지 못했고, R. A. 버틀러와 같은 그의 지지자들은 후기 경력 내내 "유화론자"라는 꼬리표 때문에 고통을 받았지만, 덩글러스는 대체로 비난을 피했다.[26][135] 그럼에도 불구하고, 덩글러스는 평생 뮌헨 협정이 영국의 생존과 나치 독일의 패배에 필수적이었으며, 영국이 1938년에 대항할 수 없었던 전쟁을 준비할 수 있는 1년의 시간을 벌어주었다고 확고히 주장했다.[24] 그가 총리직을 사임한 지 몇 달 만에 체임벌린의 건강은 악화되기 시작했고, 그는 내각에서 사임했으며, 1940년 11월 짧은 병으로 사망했다.
3. 4.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1937년 네빌 체임벌린 총리의 의회 담당 비서관(PPS)으로 임명되었다.[20][134] 이 역할은 총리의 "오른팔이자 눈과 귀"로 묘사될 만큼 중요한 자리였으며,[22][23] 더글러스흄은 다소 냉담하고 거리감이 있다는 평가를 받던 체임벌린과 보수당 의원들 사이의 소통을 돕는 역할을 수행했다.[24] 더글러스흄은 체임벌린을 개인적으로 존경했다고 술회했다.[25]체임벌린의 보좌관으로서, 더글러스흄은 총리가 아돌프 히틀러의 독일에 대해 유화 정책을 펼치는 과정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다. 특히 1938년 9월,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를 독일에 할양하기로 결정한 뮌헨 협정 당시 체임벌린 총리와 동행했다.[135] 런던으로 돌아온 체임벌린은 "명예로운 평화"와 "우리 시대를 위한 평화"를 가져왔다고 선언했으나, 이는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제2차 세계 대전 발발로 공허한 약속이 되었다. 더글러스흄은 평생 뮌헨 협정이 당시로서는 불가피했으며, 영국이 전쟁을 준비할 귀중한 1년의 시간을 벌어주어 궁극적으로 나치 독일의 패배에 기여했다고 확고하게 주장했다.[24] 그러나 그가 PPS로서 정책 결정에 직접적인 영향력은 없었기에, 뮌헨 협정에 대한 비판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는 평가도 있다.[26]
1939년 9월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이후에도 체임벌린은 총리직을 유지했지만, 1940년 5월 노르웨이 전역에서의 군사적 실패 이후 영국 하원의 신임을 급격히 잃었다. 결국 정부에 대한 신임 투표에서 여당의 지지표가 크게 줄어들자 체임벌린은 사임했고, 윈스턴 처칠이 후임 총리가 되었다. 체임벌린은 처칠이 구성한 연립 정부에서 내각 의장직을 맡았으며, 더글러스흄은 계속해서 그의 PPS로 활동했다.[24] 이 시기 스코틀랜드 사무소 차관직 제안을 받았으나 거절했다. 체임벌린은 건강 악화로 몇 달 뒤인 1940년 11월 사망했다.
더글러스흄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척추 결핵 진단을 받고 2년간 요양하며 정치 활동을 중단하기도 했다.[135]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1945년 5월, 처칠 내각에서 잠시 영국 외무성 정무차관을 맡았다.[134] 그러나 노동당이 압승한 1945년 영국 총선거에서 라나크 선거구 의석을 잃고 낙선하면서 잠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게 되었다.[135]
3. 5. 전후 의정 활동
제1차 처칠 내각 말기인 1945년 5월부터 7월까지 잠시 영국 외무성 정무차관을 역임했으나,[134] 보수당이 패배한 1945년 7월 총선거에서는 라나크 선거구에서 낙선하였다.[135]1950년 2월 총선거에서 다시 라나크 선거구 의석을 확보하여 하원에 복귀했지만, 이듬해인 1951년 7월 11일 부친이 사망하면서 휴움 백작(Earl of Home) 등 4개의 작위를 계승하게 되어 상원 의원으로 자리를 옮겼다.[136][133][135]
1951년 10월부터 1955년 4월까지 제2차 처칠 내각에서 스코틀랜드 차관을 지냈다. 이후 1955년 4월부터 1960년 7월까지 이든 내각과 맥밀런 내각에서 영연방 관계 장관을 역임했다.[134] 1956년 수에즈 전쟁 시기에는 추밀원 의장과 상원 원내총무를 겸임하기도 했다.[135] 1960년 7월에는 맥밀런 내각의 외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963년 프로퓨모 사건으로 맥밀런 정권의 지지율이 크게 하락했다. 같은 해 10월, 건강 문제로 입원 중이던 맥밀런 총리는 사의를 표명했고, 후임 총리 후보에 대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질문에 당시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정치인이었던 휴움 백작(더글러스흄)을 지명했다. 여왕은 맥밀런의 추천을 받아들여 휴움에게 정부 구성(조각)을 명했다.
3. 6. 스코틀랜드 담당 국무상
1950년 2월 총선거에서 라나크 선거구 의석을 되찾았으나,[135] 이듬해인 1951년 7월 11일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휴움 백작(Earl of Home)을 포함한 4개의 귀족 작위를 계승하고 상원 의원이 되었다.[136][133][135]1951년 10월, 제2차 처칠 내각이 출범하자 스코틀랜드 담당성 차관(Minister of State for Scotlandeng)으로 임명되어[134] 1955년 4월까지 재임했다.[134] 이후 이든 내각에서는 연방 관계 장관Secretary of State for Commonwealth Relationseng으로 자리를 옮겼다.[134]
3. 7. 영연방 관계 장관
1955년 4월부터 1960년 7월까지 이든 내각과 맥밀런 내각에서 연방 관계 장관(Secretary of State for Commonwealth Relations)을 역임했다.[134] 1956년 7월에 시작된 수에즈 위기 중에는 추밀원 의장과 상원 원내대표를 겸임하기도 했다.[135]1957년 1월 이든이 사임하고 해럴드 맥밀런이 총리로 임명된 후에도[50] 홈은 연방 관계부 장관직을 유지했다. 이 시기 그의 업무 대부분은 아프리카 관련 문제에 집중되었는데, 베추아날란드(현 보츠와나)와 중앙아프리카 연방의 미래에 대한 합의 도출이 주요 과제였다. 이 외에도 카슈미르 분쟁, 영국에서 호주로의 지원 이민 문제, 키프로스의 마카리오스 대주교와의 관계 등 다양한 현안을 다루었다.
특히 키프로스 문제는 예상치 못하게 홈의 내각 내 역할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반영국적이고 친그리스적인 급진 운동의 지도자였던 마카리오스 대주교는 세이셸에 유배되어 구금된 상태였다. 매클밀런 총리는 홈을 포함한 대부분의 내각 각료들의 동의를 얻어, 마카리오스 대주교의 구금이 오히려 키프로스에서 영국의 입지를 해친다고 판단하고 그의 석방을 명령했다. 그러나 당시 내각 의장이었던 솔즈베리 경은 이 결정에 강하게 반대하며 1957년 3월 내각에서 사임했다. 매클밀런은 솔즈베리 경의 사임으로 공석이 된 내각 의장직과 상원 원내대표직을 홈에게 맡겼다. 내각 의장직은 주로 명예직이었지만, 상원 원내대표직은 홈이 상원에서 정부의 입법 활동을 책임지게 함으로써 그를 권력의 중심에 더 가까이 다가가게 만들었다.[51] 전기 작가 더글러스 허드는 "영국 정치의 특징적인 미세한 과정을 통해 그는 자신의 특별한 조작 없이도 달마다 정부에서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 되어갔다"고 평가했다.[24]

홈은 동료와 반대파 모두에게 대체로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아이언 매클로드와는 불편한 관계였다. 매클로드는 1959년부터 1961년까지 식민지 장관(Secretary of State for the Colonies)을 지냈으며, 보수당 내 자유주의 진영에 속했다. 그는 홈과 달리 영국의 아프리카 식민지들에 대해 가능한 한 빨리 다수결 원칙에 기반한 통치와 독립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 사람의 영향력은 특히 중앙아프리카 연방(북로디지아, 남로디지아, 니아살란드로 구성) 문제에서 충돌했다.[53]
매클로드는 다수결 통치와 신속한 독립을 추진하려 했으나, 홈은 백인 소수파와 흑인 다수파 양측의 의견과 이해관계를 모두 고려하는 점진적인 독립 방식을 선호했다. 매클로드는 성급한 독립이 신생 독립국들을 "문제, 분쟁, 빈곤, 독재"로 이끌 것이라는 경고에 동의하지 않았으며, "당신은 로마인들이 영국에 머물렀으면 했겠습니까?"라고 반문하기도 했다.[54] 그는 주요 니아살란드 민족 운동가인 해스팅스 반다를 감옥에서 석방하도록 허용하지 않으면 사임하겠다고 위협했는데, 이는 홈을 비롯한 다른 이들이 현명하지 못하며 연방 내 백인 소수파의 영국에 대한 불신을 초래할 수 있다고 생각한 조치였다.[85] 결국 매클로드의 뜻대로 반다는 석방되었지만, 그때 홈은 이미 연방 관계부를 떠난 뒤였다.[55]
1960년 7월, 홈은 맥밀런 내각의 외무장관으로 임명되면서 연방 관계 장관직을 마치게 되었다.
3. 8. 맥밀런 내각과 외무장관 임명
1951년 7월 11일, 아버지의 사망으로 흄 백작위를 계승하며 상원 의원이 되었다.[136][133][135] 같은 해 10월부터 1955년 4월까지는 제2차 처칠 내각에서 스코틀랜드 담당 차관(Minister of State for Scotland)을 지냈다. 이후 1955년 4월부터 1960년 7월까지 이든 내각과 맥밀런 내각에 걸쳐 영연방 관계부 장관을 역임했다.[134] 특히 1956년 수에즈 위기 중에는 영국 추밀원 의장과 상원 원내대표를 겸임하기도 했다.[135] 1960년 7월, 맥밀런 내각의 외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3. 9. 외무장관 재임 시기
1960년 해럴드 맥밀런 총리는 재무장관 더릭 히스코트-어모리의 사임 의사를 수용하고, 후임으로 외무장관 셀윈 로이드를 임명하기로 결정했다.[56][57] 로이드의 후임 외무장관으로는 능력과 경험 면에서 홈이 가장 유력한 후보로 꼽혔다.[24] 그러나 당시에는 외무장관이 하원의원이어야 한다는 인식이 강했고, 1940년 할리팩스 경 이후 귀족이 외무장관을 맡은 사례가 없었다.[58]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여 맥밀런은 상원의원인 홈을 외무장관으로, 하원의원인 에드워드 히스를 왕실 인장 보관관 겸 외무부 차관으로 임명하는 이례적인 결정을 내렸다. 당시 영국은 유럽 경제 공동체(EEC) 가입을 추진하고 있었기에, 히스는 EEC 협상과 하원에서의 외교 문제 발언권을 특별히 부여받았다.
야당인 노동당은 홈의 임명에 반발했다. 당수 휴 게이츠켈은 귀족이 외무장관직을 맡는 것이 "헌법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비판했다.[59] 이에 맥밀런은 출신 배경 때문에 유능한 인물을 기용하지 못해서는 안 된다고 반박했다.[59] 홈과 히스는 서로 다른 배경에도 불구하고 상호 존중하며 협력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홈은 영국의 EEC 가입을 지지하며 협상 실무를 히스에게 맡겼다.[24]

홈은 외무장관으로서 주로 냉전 문제에 집중했으며, 확고한 반공주의 신념을 가졌지만 소련과의 관계에서는 실용적인 접근을 취했다. 1961년 소련이 동독 주민의 서방 탈출을 막기 위해 베를린 장벽을 건설했을 때, 홈은 미국 국무장관 딘 러스크에게 서신을 보내 "동베를린 주민들이 서베를린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결코 ''전쟁의 원인''이 아니었다. 우리는 베를린에 대한 서방의 접근을 우려하고 있으며, 그것을 유지해야 한다."고 전하며 공동 대응을 조율했다.[60] 서독, 영국, 미국 정부는 신속히 공동 입장을 마련했고, 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 설득에도 성공했다. 서방 국가들은 장벽 자체는 인정하되, 소련 역시 서베를린에 대한 서방의 접근권을 방해하지 않도록 하는 선에서 합의가 이루어졌다.[62]
이듬해 발생한 카리브 해 위기는 세계를 핵전쟁 위기로 몰아넣었다. 소련이 쿠바에 핵미사일을 배치하자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는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했다. 이 위기 상황에서 홈은 침착함을 유지하며 맥밀런 총리의 결의를 다지고 케네디 대통령의 강경 대응을 지지하도록 독려했다.[24] 당시 대법관 딜혼 경, 법무장관 존 홉슨 경, 검찰총장 피터 롤린슨 경은 비공개적으로 미국이 쿠바를 봉쇄한 것이 국제법 위반이라는 의견을 홈에게 전달했으나, 그는 케네디에 대한 강력한 지지를 이어갔다.[64] 결국 니키타 흐루쇼프 소련 서기장이 미사일 철수를 결정하면서 위기는 해소되었다. 홈은 이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러시아의 동기에 대해 많은 추측이 있었다. 나에게는 그것들이 매우 명확하다. 그들의 동기는 미국의 의지를 시험하고 특히 미국의 대통령이 어떻게 무력 위협에 반응할지 알아보는 것이었다. 대통령이 미국의 안보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에서 한 순간이라도 실패했다면, 미국의 어떤 동맹국도 다시는 미국의 보호에 대한 신뢰를 갖지 못했을 것이다."[65]
홈의 외무장관 재임 중 가장 중요한 성과는 1963년 부분적 핵실험금지조약 체결이었다. 그는 미국의 러스크, 소련의 안드레이 그로미코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협상을 이끌었다. 그로미코는 홈과의 만남이 점진적으로 상호 이해를 높였으며, 홈이 영국 외교 정책에 날카로움을 더했다고 평가했다. 1963년 8월 5일, 세 외무장관은 모스크바에서 역사적인 조약에 서명했다.[66] 이 조약은 카리브 해 위기 이후 고조된 국제적 긴장을 완화하고 냉전 종식을 향한 중요한 진전으로 평가받았다.[66] 또한, 프로푸모 사건으로 정치적 어려움을 겪던 맥밀런 정부에게도 긍정적인 소식이었다.[67]
3. 10. 맥밀런 총리의 후계자 지명

1963년 10월, 보수당 연례 회의 직전 맥밀런 총리는 전립선 비대증으로 갑자기 병석에 눕게 됐다. 처음에는 병세가 더 심각한 것으로 여겨졌고, 그는 후계자가 정해지는 대로 총리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발표했다. 당시 유력한 후계자로는 세 명의 고위 정치인이 거론됐다: 버틀러(국무차관), 레지널드 몰딩(재무장관), 그리고 헤일샴 경(추밀원 의장 겸 상원 원내대표)이었다. 《타임스》는 이들의 입지를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 버틀러 씨는 의심할 여지 없이 내각 내에서 다수의 지지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주요 주도권을 행사해야 할 것이다. 8월 초 의회가 해산되었을 때 몰딩 씨는 하원 의원들 사이에서 다수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오늘 회의에 처음으로 출석하여 보여준 그의 반응에서 알 수 있듯이, 헤일샴 경은 지역구 협회의 총아로 남아 있다.[68]
같은 기사에서 당시 외무장관이던 홈은 당이 타협해야 할 경우 선택될 수 있는 "네 번째 가상 후보"로 언급됐다.[68]
《타임스》를 비롯한 여러 언론은 헤일샴이나 홈이 총리가 되려면 귀족 작위를 포기해야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68] 이는 1963년 귀족 작위법 통과로 처음 가능해진 일이었다. 상원 의원이 총리를 맡은 마지막 사례는 1902년 솔즈베리 후작이었고, 1923년 조지 5세는 볼드윈과 커존 경 사이에서 후계자를 정할 때 "현시대의 요구 사항"을 고려하여 하원 의원을 총리로 임명해야 한다고 결정했다.[71] 1940년 체임벌린 사임 당시 유력 후보였던 핼리팩스 경 역시 자신이 상원 의원이라는 점 때문에 스스로 총리직을 포기했다. 따라서 1963년에는 총리가 하원 의원이어야 한다는 원칙이 확고하게 자리 잡은 상태였다.[128] 10월 10일, 헤일샴은 자신의 남작 작위를 포기할 의사가 있다고 공식 발표했다.[72]
후계자 선정 과정은 이전처럼 "관례적인 절차"에 따라 진행됐으나, 당 대회 기간과 겹쳐 비밀 유지가 어려웠고 후보들은 공개적으로 지지 확보 경쟁을 벌였다. 버틀러는 맥밀런을 대신해 기조연설을 맡았지만, 평범한 연설로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다.[128] 헤일샴은 지나치게 과장되고 일부에게는 저속하게 비친 선거 운동 방식으로 오히려 지지자들을 잃었다.[73] 몰딩 역시 인상적인 연설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울턴 경과 셀윈 로이드 같은 당의 원로들은 홈에게 출마를 권유했다.[74]
처음에는 출마 의사가 없음을 밝혔던 홈은 입장을 바꿔 출마를 결정했고, 이는 최소 두 명의 내각 동료를 실망시켰다.[128] 맥밀런은 홈이 가장 적합한 후계자라고 판단하고 그에게 강력한 비공식적 지원을 보냈다. 그는 자신이 회복하면 홈 내각에서 일할 의향이 있다고 알렸다.[75] 맥밀런은 원래 헤일샴을 지지했으나, 미국 케네디 행정부가 헤일샴을 불안하게 여긴다는 정보와[76] 헤일샴이 우익 성향으로 비쳐 온건파 유권자를 잃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마음을 바꾼 것으로 알려졌다.[77] 반면 버틀러는 당내 자유주의 진영으로 분류되어 그가 당수가 될 경우 당이 분열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77] 대법관 딜혼 경이 내각 각료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비공식 여론 조사에서는 홈 10표, 몰딩 4표, 버틀러 3표, 헤일샴 2표로 나타났다고 맥밀런에게 보고됐으나, 이 조사의 신뢰성에 대해서는 이후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다.[78]
총리 임명은 여전히 왕실 특권이었고, 군주가 퇴임하는 총리의 조언을 따라야 할 헌법적 의무는 없었다. 그럼에도 맥밀런은 여왕에게 홈이 적합한 인물이라고 조언했다.[79] 이러한 막후 과정은 당 지도부와 왕실 비서실 외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10월 18일 《타임스》는 "여왕, 오늘 버틀러 씨를 불러들일 수도 있다"는 헤드라인을 1면에 실었고,[80] 《데일리 텔레그래프》와 《파이낸셜 타임스》 역시 버틀러의 임명을 예측했다.[81] 그러나 여왕은 같은 날 홈을 불렀다. 여왕은 당내 분열 상황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즉시 총리로 임명하지 않고, 정부를 구성할 수 있는지 먼저 확인하도록 요청했다.[82]
홈의 지명에 반발한 내각 동료 에녹 파월과 이언 맥리오드는 버틀러와 다른 후보들에게 홈 내각 참여를 거부하도록 설득하는 마지막 시도를 했다.[83] 하지만 버틀러는 내각에 참여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판단하고[24] 외무장관직을 수락했다.[84] 다른 후보들도 버틀러를 따랐고, 결국 파월과 맥리오드만이 홈 정부 참여를 거부했다.[84] 10월 19일, 홈은 버킹엄 궁전으로 가 총리로서 여왕의 손에 키스하는 임명 절차를 밟았다.[86]
언론은 홈의 총리 임명에 대해 당혹감을 넘어 매우 비판적인 반응을 보였다. 노동당 성향의 《데일리 미러》는 1면에 다음과 같이 혹평했다.
: 착한 사람이고 예의 바른 귀족이다. 그러나 칼리굴라가 그의 말을 집정관으로 임명한 것은 맥밀런 씨의 병상의 가벼운 행동과 비교하면 신중한 정치 행위였다. ... 알렉(똑똑한 알렉이 아니라 그냥 알렉)은 자신보다 훨씬 더 위대한 체격, 지능, 개성과 잠재력을 가진 최소한 네 명의 구성원이 포함된 내각을 가지고 체스를 두고 있다. 버틀러는 배신당했고, 몰딩은 모욕당했고, 맥리오드는 무시당했고, 히스는 경멸당했고, 헤일샴은 병원에 있는 광대에 의해 웃음거리가 되었다.[87]
전통적으로 보수당을 지지해 온 《타임스》조차 버틀러를 지지하며 당이 그의 재능을 외면한 것을 "낭비"라고 비판했다. 이 신문은 홈을 "뛰어나게 성공적인 외무장관"으로 평가하면서도, 국내 문제에 대한 이해 부족, 현대화 감각 부재, 그리고 1년 안에 치러질 총선에서 "보수당을 격렬하고 아마도 더러운 선거 운동을 통해 이끌어갈" 능력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89] 자유주의 성향의 《가디언》은 홈이 "내각과 국가에 힘과 목적을 부여할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평했고,[90] 《옵저버》는 "지난 2주간의 사건에서 가장 강력하고 해로운 인상은 보수당이 차선책에 만족해야 했던 것"이라며 그의 침착함이 오히려 약점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91]
1964년 1월, 《더 스펙테이터》 편집장이 된 이언 맥리오드는 랜돌프 처칠의 책 서평을 빌려, 자신이 경험한 후계자 선정 과정의 내막을 폭로했다. 그는 홈과 맥밀런을 포함한 이튼 학교 출신 다섯 명의 보수당 고위 인사들이 주도한 선정 과정을 "마법의 서클(magic circle)"의 음모로 묘사하며 비판했다.[92] 이 기사는 큰 파장을 일으켰고, 당시 상황에 대해 "깊이 모욕을 당했다... 그리고 알렉 더글러스-홈이 보수당 당수가 되었을 때보다 더 모욕당한 적은 없었다"고 술회한 앤서니 하워드와 같은 인물들에게 영향을 주었다.[93]
4. 총리 재임 (1963-1964)
1963년 10월, 해럴드 맥밀런 총리가 갑작스럽게 병으로 사임 의사를 밝히면서 보수당은 후계자 선정 문제에 직면했다.[68] 라브 버틀러, 레지널드 몰딩, 헤일샴 경 등이 유력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여러 논의와 막후 조정을 거쳐 예상 밖으로 당시 외무장관이었던 앨릭 더글러스흄이 맥밀런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다.[78][79] 이는 당내 일부의 반발과 언론의 비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83][87]
당시 귀족 신분이었던 홈은 총리직을 수행하기 위해 1963년 귀족법에 따라 상속받았던 작위를 포기하고, 보궐선거를 통해 하원 의원이 되었다. 1963년 10월 19일, 홈은 정식으로 총리에 임명되어 내각을 구성했으나,[86] 그의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여러 도전에 직면했다. 이언 매클라우드와 같은 일부 중진 의원들이 내각 참여를 거부하는 등 당내 통합에 어려움을 겪었고, 하원 임기 만료가 1년 앞으로 다가와 총선을 치러야 하는 부담도 안고 있었다.
홈은 외교 분야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경제 문제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경험과 지식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이는 경제 정책에 능통한 노동당 당수 해럴드 윌슨과의 경쟁에서 약점으로 작용했다. 윌슨은 10년 넘게 이어진 보수당 정권을 "낭비된 13년"으로 규정하며 공세를 펼쳤고, 프로퓨모 사건 스캔들이나 유럽 경제 공동체(EEC) 가입 실패 등의 여파도 홈 정부에 부담을 주었다.
결국 1964년 10월 실시된 1964년 영국 총선에서 보수당은 노동당에 패배하여 정권을 내주게 되었다. 홈 내각은 출범 1년 만에 막을 내렸으나, 당초 예상되었던 큰 격차의 패배는 면하고 비교적 선전했다는 평가도 받았다. 이 선거 결과로 출범한 윌슨의 노동당 정부 역시 과반수 의석에서 근소한 차이를 보여 불안정한 출발을 하게 되었다.
4. 1. 총리 취임과 내각 구성
1963년 10월, 보수당 연례 회의 직전 해럴드 맥밀런 총리가 전립선 질환으로 병석에 눕게 되었다.[68] 처음에는 예상보다 심각한 상태로 여겨졌고, 맥밀런은 후임자가 정해지는 대로 총리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발표했다. 당시 유력한 후계자로는 R. A. 버틀러(국무차관), 레지널드 몰딩(재무장관), 그리고 퀸틴 호그(추밀원 의장 겸 상원 원내대표, 헤일샴 경) 세 명이 거론되었다.[68] 타임스는 버틀러가 내각에서, 몰딩이 하원에서, 헤일샴 경이 지역구 협회에서 각각 지지를 받고 있다고 분석했다.[68] 같은 기사에서 홈은 당이 타협할 필요가 있을 경우의 "네 번째 가상 후보"로 언급되었다.[68]헤일샴이나 홈이 총리가 되려면 귀족 작위를 포기해야 했는데, 이는 1963년 귀족법으로 인해 처음으로 가능해진 일이었다.[68][69][70] 1902년 솔즈베리 후작 이후 상원의원이 총리가 된 사례는 없었으며, 1923년 조지 5세가 총리는 하원 의원이어야 한다고 결정한 이래[71], 상원 의원이 총리가 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다.[128] 1940년에도 핼리팩스 경은 자신이 상원의원이라는 이유로 총리직을 고사한 바 있다. 10월 10일, 헤일샴 경은 자신의 남작 작위를 포기할 의사를 밝혔다.[72]
후계자 선정 과정인 이른바 "관례적인 절차"는 당 대회 기간과 겹쳐 비밀 유지가 어려웠고, 후보들은 공개적으로 자신들의 입지를 다졌다. 버틀러는 맥밀런을 대신해 기조연설을 했으나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고, 헤일샴 경은 다소 과장되고 저속하다는 평가를 받은 행보로 지지자들을 잃었으며,[73] 몰딩 역시 회의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울턴 경과 셀윈 로이드와 같은 보수당 원로들은 홈에게 출마를 권유했다.[74]
처음에는 경선 불참 의사를 밝혔던 홈은[128] 맥밀런의 강력한 비공개 지지를 받으며 유력 후보로 부상했다. 맥밀런은 홈이 자신의 뒤를 잇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했으며, 심지어 홈 내각에서 일할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75] 맥밀런은 당초 헤일샴을 지지했으나, 미국 케네디 행정부가 헤일샴을 불안하게 여긴다는 정보[76]와 헤일샴의 우파 성향이 중도 유권자에게 미칠 영향에 대한 우려[77] 등으로 인해 마음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반면 버틀러는 당내 자유주의 진영으로 여겨져 그가 당수가 될 경우 당이 분열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다.[77] 대법관 딜혼 경이 실시한 내각 각료 대상 여론조사 결과(결과의 신뢰성에 대한 논란은 있다), 1순위와 2순위를 고려했을 때 홈이 10표, 몰딩이 4표, 버틀러가 3표, 헤일샴이 2표를 얻은 것으로 맥밀런에게 보고되었다.[78]
총리 임명은 여전히 왕실 특권의 일부였으며, 군주는 퇴임하는 총리와 협의할 의무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밀런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게 홈이 적절한 선택이라는 의견을 전달했다.[79] 당시 언론은 버틀러의 임명을 유력하게 보도했다. 10월 18일 타임스는 "여왕, 오늘 버틀러 씨를 불러들일 수도 있다"는 헤드라인을 실었고,[80] 데일리 텔레그래프와 파이낸셜 타임스도 비슷한 예측을 내놓았다.[81] 그러나 같은 날 여왕은 홈을 버킹엄 궁전으로 불렀다. 여왕은 집권당 내의 분열을 인식하고 그를 즉시 총리로 임명하지 않고, 정부를 구성할 수 있는지 먼저 확인하도록 요청했다.[82]
홈의 내각 동료인 에녹 파월과 이언 매클라우드는 그의 총리직 승계에 반대하여 버틀러와 다른 후보들이 홈 내각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설득하려 마지막 시도를 했다.[83] 그러나 버틀러는 내각에 복무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믿고[24] 이 제안을 거부했으며, 외무장관직을 수락했다.[84] 다른 후보들도 버틀러의 선례를 따랐고, 결국 파월과 매클라우드만이 홈 정부에서 직책을 거부했다.[84] 10월 19일, 홈은 총리로서 임명을 수락하기 위해 버킹엄 궁전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86]
언론은 홈의 총리 임명에 대해 당혹감을 넘어 대체로 매우 비판적이었다. 노동당 지지 성향의 데일리 미러는 1면에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87]
착한 사람이고 예의 바른 귀족이다. 그러나 칼리굴라가 그의 말을 집정관으로 임명한 것은 맥밀런 씨의 병상의 가벼운 행동과 비교하면 신중한 정치 행위였다. ... 알렉(똑똑한 알렉이 아니라 그냥 알렉)은 자신보다 훨씬 더 위대한 체격, 지능, 개성과 잠재력을 가진 최소한 네 명의 구성원이 포함된 내각을 가지고 체스를 두고 있다. 버틀러는 배신당했고, 몰딩은 모욕당했고, 맥리오드는 무시당했고, 히스는 경멸당했고, 헤일샴은 병원에 있는 광대에 의해 웃음거리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보수당 지지 성향인 타임스는 버틀러를 지지했으며,[88] 당이 그의 재능을 무시한 것을 "낭비"라고 불렀다. 이 신문은 홈을 "뛰어나게 성공적인 외무장관"이라고 칭찬했지만, 그의 국내 문제에 대한 이해 부족과 1년 안에 치러질 총선에서 보수당을 이끌 적합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89] 정치적으로 자유주의적인 가디언은 홈이 "내각과 국가에 힘과 목적을 부여할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평했고,[90] 옵저버는 "보수당이 차선책에 만족해야 했던 것"이 가장 해로운 인상이라고 지적하며 그의 리더십에 대한 우려를 표했다.[91]
훗날 이언 매클라우드는 더 스펙테이터 편집장 시절, 랜돌프 처칠의 책 리뷰를 빌어 이 지도자 선출 과정을 이튼 칼리지 출신 다섯 명의 보수당 거물들이 꾸민 "마법의 서클(Magic Circle)"의 결과라고 비판했다.[92]
총리직 수락 후, 홈은 1963년 귀족법에 따라 상속받았던 귀족 작위를 포기하고, 스코틀랜드의 킨로스 및 웨스트퍼스셔 선거구 보궐선거(Kinross and West Perthshire by-election, 1963)에 출마하여 당선됨으로써 영국 하원 의원 자격을 얻었다.
1963년 10월 20일에 발표된 홈 내각의 초기 구성원은 다음과 같다.[131]
직책 | 이름 |
---|---|
수상 겸 재무부 제1차관 | 앨릭 더글러스흄 (10월 23일부터) |
외무장관 | 라브 버틀러 |
추밀원 의장 겸 과학부 장관 | 퀸틴 호그 |
대법관 | 딜혼 경 |
재무장관 | 레지널드 몰딩[132] |
내무장관 | 헨리 브룩 |
식민장관 겸 영연방 관계 장관 | 던컨 샌디스 |
산업, 무역 및 지역 개발 장관 겸 무역위원회 의장 | 에드워드 히스 |
국방장관 | 피터 소니크로프트 |
옥새상서 | 셀윈 로이드 |
랭커스터 공국상 | 블레이컨햄 경 |
농업, 어업 및 식품 장관 | 크리스토퍼 소옴즈 |
교통장관 | 어니스트 마플스 |
재무부 차관 겸 지급총괄관 | 존 보이드-카펜터 |
스코틀랜드 장관 | 마이클 노블 |
교육과학부 장관 | 에드워드 보일 경 |
노동장관 | 조셉 고드버 |
주택 및 지방 정부 장관 겸 웨일스 담당 장관 | 키스 조셉 경 |
에너지부 장관 | 프레드릭 에롤 |
보건장관 | 앤서니 바버 |
공공건축 및 공사부 장관 | 제프리 리폰 |
무임소 장관 | 빌 디즈 |
무임소 장관 겸 상원 원내대표 | 캐링턴 경 |
- '''1964년 4월 변경 사항''': 퀸틴 호그가 교육과학부 장관이 됨. 에드워드 보일 경이 내각에서 물러남. 국방장관직 명칭이 국방장관으로 변경되었고, 소니크로프트가 계속해서 그 직책을 유지함.
그러나 홈 내각은 출범 초기부터 불안정한 기반 위에 있었다. 하원 임기 만료가 1년 앞으로 다가와 총선을 치러야 했으나 보수당의 대패가 예상되었고, 이언 매클라우드 등 일부 보수당 의원들이 내각 참여를 거부하는 등 당내 통합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홈은 외교 경험은 풍부했지만 경제 지식이 부족하여 경제 문제에 정통한 노동당 당수 해럴드 윌슨에 비해 뒤처진다는 평가를 받았다. 윌슨은 1951년 이후 계속된 보수당 정권을 "낭비된 13년"이라고 비판하며 인기를 얻고 있었다. 프로퓨모 사건과 유럽 경제 공동체(EEC) 가입 협상 실패 등도 여전히 부담으로 작용했다.
4. 2. 짧았던 재임 기간
1963년 10월, 보수당 연례 회의 직전 해럴드 맥밀런 총리는 전립선 비대로 병석에 눕게 되었다. 처음 예상보다 상태가 심각하다고 판단한 맥밀런은 후임자가 정해지는 대로 총리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발표했다.[68] 세 명의 유력한 후계자 후보가 거론되었는데, 랩 버틀러(국무차관), 레지널드 모들링(재무장관), 그리고 헤일샴 경(추밀원 의장 겸 상원 원내대표)이었다. 《타임스》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 버틀러 씨는 의심할 여지 없이 내각 내에서 다수의 지지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주요 주도권을 행사해야 할 것이다. 8월 초 의회가 해산되었을 때 몰딩 씨는 하원 의원들 사이에서 다수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오늘 회의에 처음으로 출석하여 보여준 그의 반응에서 알 수 있듯이, 헤일샴 경은 지역구 협회의 총아로 남아 있다.[68]
같은 기사에서 홈은 필요하다면 당이 타협할 수 있는 "네 번째 가상 후보"로 언급되었다.[68]
《타임스》를 비롯한 여러 언론은 헤일샴이나 홈이 총리가 되려면 귀족 작위를 포기해야 할 것이라고 예측했다.[68] 이는 1963년 귀족법 제정으로 처음 가능해진 일이었다. 상원 의원이 총리를 맡은 마지막 사례는 1902년 솔즈베리 후작이었고, 1923년 조지 5세는 스탠리 볼드윈과 커존 경 사이에서 고민하다 "현시대의 요구 사항"을 고려하여 하원 의원을 총리로 임명해야 한다고 결정했다.[71] 1940년에도 유력 후보였던 핼리팩스 경은 자신이 상원 의원이기에 총리직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스스로 물러났다. 따라서 1963년에는 총리가 하원 의원이어야 한다는 것이 관례로 굳어진 상태였다.[128] 10월 10일, 헤일샴은 자신의 남작 작위를 포기할 의사가 있다고 발표했다.[72]
후계자 선정 과정은 당 대회 기간과 겹쳐 이례적으로 공개적으로 진행되었다. 잠재적 후보들은 자신의 입지를 다지려 애썼다. 버틀러는 맥밀런을 대신해 기조연설을 맡았지만, 평범한 연설로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헤일샴은 다소 과장되고 저속하다는 비판을 받은 선거 운동 방식으로 지지자들을 잃었다.[73] 모들링 역시 인상적인 연설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울턴 경과 셀윈 로이드 같은 보수당 원로들은 홈에게 출마를 권유했다.[74]
처음에는 경선 불참 의사를 밝혔던 홈은 마음을 바꿔 출마를 결심했고, 이는 최소 두 명의 내각 동료를 실망시켰다.[128] 맥밀런은 홈이 가장 적합한 후계자라고 판단하고 그를 적극 지원했으며, 자신이 회복되면 홈 내각에서 일할 의향이 있다고 알렸다.[75] 맥밀런은 당초 헤일샴을 지지했으나, 미국 케네디 행정부가 헤일샴을 불안하게 여긴다는 정보와[76] 헤일샴이 우익 성향으로 비쳐 중도층 유권자를 잃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77] 마음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반면 버틀러는 당내 자유주의 진영으로 분류되어 그가 당수가 될 경우 당이 분열될 위험이 있다고 여겨졌다.[77] 대법관 딜혼 경이 실시한 내각 여론 조사 결과(1순위와 2순위 합산), 홈 10표, 모들링 4표, 버틀러 3표, 헤일샴 2표로 나타났다고 맥밀런에게 보고되었다.[78]
총리 임명은 여전히 군주의 왕실 특권이었기에,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퇴임하는 총리의 조언을 들을 의무는 없었다. 그럼에도 맥밀런은 여왕에게 홈이 적합한 인물이라고 조언했다.[79] 이러한 막후 상황은 당 지도부와 왕실 외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10월 18일 《타임스》는 "여왕, 오늘 버틀러 씨를 불러들일 수도 있다"는 헤드라인을 내걸었고,[80] 《데일리 텔레그래프》와 《파이낸셜 타임스》도 버틀러의 임명을 예측했다.[81] 그러나 여왕은 같은 날 홈을 불렀다. 여왕은 당내 분열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즉시 총리로 임명하지 않고, 정부를 구성할 수 있는지 먼저 타진하도록 요청했다.[82]
홈의 내각 동료였던 에noch 파월과 이언 맥리오드는 그의 총리 지명에 반발하며 버틀러 등 다른 후보들에게 홈 내각 참여 거부를 설득하려 마지막 시도를 했다.[83] 하지만 버틀러는 내각에 참여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하여[24] 이들의 제안을 거절하고 외무장관직을 수락했다.[84] 다른 후보들도 버틀러를 따랐고, 결국 파월과 맥리오드만이 홈 정부 참여를 거부했다.[84] 10월 19일, 홈은 버킹엄 궁전으로 가 정식으로 총리에 임명되었다.[86]
언론은 홈의 임명에 당혹감을 표하며 대체로 매우 비판적인 반응을 보였다. 노동당 성향의 《데일리 미러》는 1면에서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 착한 사람이고 예의 바른 귀족이다. 그러나 칼리굴라가 그의 말을 집정관으로 임명한 것은 맥밀런 씨의 병상에서의 가벼운 행동과 비교하면 신중한 정치 행위였다. ... 알렉(똑똑한 알렉이 아니라 그냥 알렉)은 자신보다 훨씬 더 위대한 체격, 지능, 개성과 잠재력을 가진 최소한 네 명의 구성원이 포함된 내각을 가지고 체스를 두고 있다. 버틀러는 배신당했고, 몰딩은 모욕당했고, 맥리오드는 무시당했고, 히스는 경멸당했고, 헤일샴은 병원에 있는 광대에 의해 웃음거리가 되었다.[87]
보수당 성향의 《타임스》조차 버틀러를 지지하며 당이 그의 재능을 외면한 것을 "낭비"라고 비판했다. 홈에 대해서는 "뛰어나게 성공적인 외무장관"이라고 평가하면서도 국내 문제에 대한 이해 부족, 현대화 감각 부재, 그리고 1년 안에 치러질 총선에서 "보수당을 격렬하고 아마도 더러운 선거 운동을 통해 이끌어갈" 능력에 의문을 제기했다.[89] 자유주의 성향의 《가디언》은 홈이 "내각과 국가에 힘과 목적을 부여할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평했고,[90] 《옵저버》는 "지난 2주간의 사건에서 가장 강력하고 해로운 인상은 보수당이 차선책에 만족해야 했던 것이다"라고 지적했다.[91]
1964년 1월, 홈 내각 참여를 거부했던 맥리오드는 《더 스펙테이터》 편집장 자격으로 랜돌프 처칠의 책 서평을 빌려 후계자 선정 과정에 대한 자신의 폭로성 주장을 펼쳤다. 그는 홈과 맥밀런을 포함한 이튼 학교 출신 5명의 보수당 거물들이 주도한 "탐색" 과정을 "마법의 서클"이 꾸민 음모라고 비판했다.[92] 이 글은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귀족원 의원은 총리가 될 수 없다는 불문율에 따라, 홈은 1963년 7월 제정된 1963년 귀족법을 이용해 자신의 작위를 반납했다. 그리고 즉시 킨로스 및 웨스트 퍼스셔 선거구의 보궐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됨으로써 하원 의원 자격을 얻었다.
그러나 홈 내각은 출범 초기부터 불안정했다. 하원 임기 만료가 다가와 1년 안에 총선을 치러야 했지만, 보수당의 참패가 예상되었다. 또한 이언 맥리오드 등 일부 의원들이 내각 참여를 거부하는 등 당내 통합도 이루지 못했다.
홈은 외교 분야에서는 경험이 풍부했지만 경제 지식은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이 점은 경제에 밝은 노동당 당수 해럴드 윌슨과 대비되었다. 윌슨은 1951년 이후 계속된 보수당 정권을 "낭비된 13년"이라고 비판하며 인기를 얻었다. 프로퓨모 사건과 유럽 경제 공동체(EEC) 가입 협상 실패 등 이전 정부의 실책도 부담으로 작용했다.
결국 1964년 10월 총선에서는 홈의 약점인 경제 문제가 주요 쟁점으로 부상했다. 보수당은 304석을 얻는 데 그쳤고, 노동당은 317석, 자유당은 9석을 획득했다. 이로써 홈 정권은 출범 1년도 채 되지 않아 막을 내렸다. 다만, 당초 예상되었던 대패에 비해서는 보수당이 선전한 편이었고, 새로 출범한 윌슨 내각 역시 과반수 의석에서 겨우 4석을 넘는 불안정한 상태로 시작하게 되었다.
4. 3. 1964년 총선 패배
험 내각은 발족 초기부터 불안정한 기반 위에 서 있었다. 하원 임기 만료가 다가와 1년 안에 총선을 치러야 했지만, 당시 여론은 보수당의 대패를 예상하고 있었다. 또한 이언 매클라우드 등 일부 보수당 의원들이 험 내각 참여를 거부하면서 당내 통합에도 어려움을 겪었다.험은 외교 분야에서는 경험이 풍부했지만, 경제 문제에 대한 이해는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는 경제 정책에 정통한 노동당 당수 해롤드 윌슨과 비교되면서 약점으로 부각되었다. 윌슨은 1951년 이후 지속된 보수당 정권을 "낭비된 13년"이라고 비판하며 국민적 지지를 넓혀갔다. 이전 정부에서 발생한 프로퓨모 사건 스캔들이나 유럽 경제 공동체(EEC) 가입 협상 실패 등도 여전히 보수당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결국 1964년 10월에 실시된 총선에서는 험이 상대적으로 취약했던 경제 문제가 주요 쟁점으로 떠올랐다. 선거 결과, 보수당은 304석을 얻는 데 그쳤고, 노동당이 317석, 자유당이 9석을 획득했다. 이로써 험 내각은 출범 1년도 채 되지 않아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당초 예상되었던 대패와 비교하면 보수당은 비교적 선전한 것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윌슨이 이끄는 노동당 정부는 과반수에 겨우 4석을 넘는 불안정한 상태로 출범하게 되었다.
5. 총리 퇴임 이후 (1964-1995)
1964년 영국 총선에서 패배한 후 야당 대표가 되었으나, 1965년 당 대표 선출 방식이 변경된 후 에드워드 히스에게 대표직을 넘겨주었다.[24] 이후 1970년 히스 내각에서 외무·영연방 장관으로 임명되어 다시 정부에 참여했으며,[133] 1974년까지 직책을 수행했다.
1974년 총선 이후 정계를 은퇴하고 그해 12월 종신귀족 작위를 받아 상원으로 복귀하여 '''Baron Home of the Hirsel|히르셀의 홈 남작eng'''이 되었다.[125][133] 그는 1995년 사망할 때까지 상원의원으로 활동하며 정치 원로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134]
5. 1. 야당 대표 및 그림자 내각
1964년 총선 패배 후 야당 대표가 된 더글러스흄은 매클로드와 에녹 파월을 설득하여 보수당 전면 벤치(front bench)에 복귀시켰다.[24] 총선 이후 몇 주 안에 버틀러는 정계에서 은퇴하여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 학장직과 종신 귀족 작위를 수락했다.[133] 1965년 1월, 더글러스흄은 그림자 내각의 주요 직책을 배분하여 모들링에게 외교 문제를, 히스에게 재무 및 경제 문제 대변인직을 맡겼다.[24]그러나 당내에서는 변화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특히 오랫동안 상원의원이었던 더글러스흄이 하원 정치에 익숙하지 않다는 점이 총선 패배의 원인 중 하나로 지적되었고, 보수당 내 젊은 의원들을 중심으로 당수 선출 방식에 대한 문제 제기가 이루어졌다. 1965년 초에는 PEST(경제 및 사회 보수주의 압력 단체)라는 새로운 그룹이 은밀하게 지도자 교체를 요구하기도 했다.[24] 더글러스흄은 히스가 PEST에 기부금을 냈다는 사실을 몰랐거나, 무시하기로 선택했다. 그는 히스를 자신의 후계자로 선호하며, 자신이 당 대표직에서 물러날 때가 왔다고 결정했다.[24]

더글러스흄 자신도 1963년 자신의 임명 과정에서 불거졌던 '관례적인 협의 절차'에 대한 논란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당이 보다 민주적이고 투명한 방식으로 지도자를 선출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는 보수당 하원의원들의 비밀 투표를 통해 당 대표를 선출하는 새로운 절차를 마련했다.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투표는 후방 벤치 보수당 의원들의 모임인 1922 위원회가 주관하도록 했다.[24]
1965년 7월 22일, 더글러스흄은 보수당 대표직 사임을 공식 발표했다. 이어진 1965년 보수당 당대표 선거에는 히스, 모들링, 파월 세 명의 후보가 출마했다. 선거 결과, 히스가 (더글러스흄의 표를 포함하여) 150표를 얻어 모들링(133표)과 파월(15표)을 누르고 새로운 당 대표로 선출되었다.[24]
더글러스흄은 히스의 그림자 내각에서 외교 포트폴리오를 수락했다.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그의 정계 은퇴를 앞둔 잠시 동안의 역할일 것이라고 예상했다.[24] 당시 영국 외교는 로디지아(옛 남부 로디지아) 문제로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었다. 1965년 11월, 로디지아의 백인 소수 정부는 흑인 다수 통치로의 즉각적인 이양을 거부하며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포했다. 더글러스흄은 이 반란 정부에 대해 확고한 반대 입장을 취했으며, 인종적인 이유로 반란군에 동정적인 보수당 내 우익 세력의 입장을 무시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토니 벤과 같은 일부 노동당 의원들로부터도 지지를 받았다.[24]
1966년, 더글러스흄은 헤리엇-왓 대학교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116] 같은 해 치러진 총선에서 윌슨이 이끄는 노동당은 96석이라는 강력한 실질적 다수를 얻으며 다시 승리했다. 로이드를 포함한 히스 팀의 일부 고령 구성원들은 전면 벤치에서 물러나 차세대 구성원들에게 자리를 만들어주었다.[24] 히스는 모들링을 외교 포트폴리오로 옮겼고, 더글러스흄은 로이드의 뒤를 이어 연방 관계 대변인 직책을 맡았다.[24]
1970년 총선이 다가오면서, 히스가 윌슨에 대해 무능력한 것으로 널리 여겨졌고, 당 내에서는 그가 패배하고 파월이 그를 당 대표로 대체하려 할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다. 모들링과 수석 채찍 윌리엄 화이트로는 히스가 사임해야 한다면 더글러스흄이 파월을 막을 가장 안전한 후보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24] 더글러스흄은 노동당이 1970년 총선에서 승리하고 히스가 사임해야 할 수도 있다는 그들의 견해에 동의했지만, 그는 스스로를 헌신하지 않았다. 히스를 제외한 거의 모든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보수당은 31석의 과반수를 얻고 총선에서 승리했다.[24]
5. 2. 히스 내각의 외무·영연방 장관

1970년 6월 에드워드 히스 내각이 출범하자, 더글러스흄은 외무·영연방 장관으로 임명되어 1974년 3월까지 재직했다.[133] 이전 세기에는 전직 총리가 후임자의 내각에서 일하는 것이 드물지 않았으며, 지난 50년간 아서 벨푸어, 스탠리 볼드윈, 램지 맥도널드, 네빌 체임벌린 등이 그러한 사례였다. 더글러스흄은 2023년까지 장관직에 임명된 가장 최근의 전직 총리였다. 1894년-1895년 총리였던 로즈베리 경은 1916년 벨푸어가 애스퀴스 내각에 임명된 것을 두고 전직 총리가 내각에 있는 것은 "덧없고 위험한 사치"라고 비판했다.[117] 그러나 전기 작가 소프(Thorpe)는 히스의 더글러스흄 임명은 "사치가 아니라 그의 행정부를 뒷받침하는 필수적인 요소"였다고 평가했다.[117]
더글러스흄이 맡은 외무 및 영연방부(FCO)는 1966년 식민지청과 영연방 관계청이 영연방청으로 통합되고,[117] 1968년 다시 외무부와 합병되어 신설된 부서였다.[118] 히스 총리는 더글러스흄을 이 부서의 책임자로 임명하면서, 유럽 경제 공동체(EEC) 가입 협상은 앤서니 바버 랭커스터 공작령 대장에게 주로 맡겼다.[119] 그러나 선거 몇 주 후인 1970년 7월 20일, 이언 매클라우드 재무장관이 갑자기 사망하자 바버가 재무부로 이동하게 되었다.[120] 더글러스흄은 매클로드와 좋은 관계는 아니었지만 그의 위상을 인정했으며, 그의 죽음을 개인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큰 손실로 여겼다. 일부 해설가들은 매클로드의 사망과 상대적으로 비중이 낮은 바버로의 교체가 히스 정부의 경제적 성공 가능성을 약화시켰다고 주장하기도 한다.[120] 바버의 후임으로는 제프리 리펀이 임명되어 히스의 지휘 아래 EEC 가입을 위한 실무 협상을 담당했다.
더글러스흄은 주로 동서 관계와 영연방 문제에 집중했다. 그는 영국의 EEC 가입이라는 히스의 정책에 동의했으며, 보수당 내 우익의 회의적인 시각을 가진 이들에게 가입의 필요성을 설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더글러스 허드는 더글러스흄의 성격과 배경이 유럽 통합에 대한 히스의 열정적인 헌신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가 영국의 가입을 굳건히 지지한 것은 현대 세계에서 영국의 위치, 특히 프랑스, 독일 및 미국과의 관계에 대한 명확한 평가에 근거했기 때문에 더욱 중요했다고 평가했다. 이를 통해 보수당 우익에 필요한 확신을 제공했다는 것이다.[24] 결과적으로 영국은 프랑스와의 협상을 거쳐 1973년 1월 EEC 가입을 성공적으로 이루었다.[123]

동서 관계에서 더글러스흄은 히스와 마찬가지로 소련에 대해 강한 불신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당시 미국과 소련 간에 진행되던 데탕트(긴장 완화)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122] 또한 서독의 빌리 브란트 정권이 추진하던 동방정책(Ostpolitik)에도 우려를 표명했다.[122] 그는 소련을 견제하는 정책을 지속했으며, 1971년 9월에는 영국 내 KGB의 노골적인 활동 문제와 관련하여 안드레이 그로미코 소련 외무장관과의 협상에서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하자, 스파이 혐의로 소련 외교관 105명을 추방하는 단호한 조치를 취했다.[122] 이 사건으로 인해 소련은 영국 정부의 유럽 데탕트 접근 방식이 지나치게 신중하고 회의적이라고 비판했지만,[122] 그로미코는 현실적인 판단하에 더글러스흄과의 실무 관계를 유지하며 중동 및 군축 문제 등을 논의했다.[121] 전반적으로 더글러스흄의 외교 정책은 널리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122]
로디지아 문제에서는 상대적으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는 로디지아의 반란 지도자인 이언 스미스를 설득하여 아프리카 다수 통치로의 이행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23] 더글러스흄은 이 제안의 수용 가능성을 로디지아 다수 여론에 비추어 조사하기 위해 영국의 고위 판사인 피어스 경을 위원장으로 하는 독립 위원회를 설립했다. 로디지아 전역에서 광범위한 현장 조사를 실시한 후, 위원회는 "우리 증거에 만족하며, 이 제안은 유럽인 대다수에게 수용 가능하다. 우리는 아프리카인 대다수가 이 제안을 거부했다는 사실에도 만족한다. 우리의 의견으로는 로디지아 국민 전체가 독립의 기반으로서 이 제안을 수용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보고했다.[124] 더글러스흄에게는 실망스러운 결과였으며, 로디지아 문제는 해결되지 못했고 그가 장관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오랫동안 반란 정권 상태로 남게 되었다.[123]
5. 3. 로디지아 문제
에드워드 히스 내각에서 외무·영연방장관으로 임명된 더글러스흄은 로디지아의 미래에 대한 협상을 시도했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는 로디지아의 반란 지도자였던 이언 스미스를 설득하여 아프리카 다수당 통치로의 점진적 이행을 담은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23]이후 더글러스흄은 영국의 고위 판사인 피어스 경을 위원장으로 하는 독립 위원회를 설립하여, 해당 제안이 로디지아의 다수 여론에 의해 수용될 수 있는지 여부를 조사하도록 했다. 위원회는 로디지아 전역에서 광범위한 현장 조사를 실시했다. 조사 결과, 위원회는 "우리 증거에 만족하며, 이 제안은 유럽인 대다수에게 수용 가능하다. 우리는 아프리카인 대다수가 이 제안을 거부했다는 사실에도 만족한다. 우리의 의견으로는 로디지아 국민 전체가 독립의 기반으로서 이 제안을 수용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보고했다.[124]
결국 아프리카 다수의 반대로 인해 제안은 거부되었고, 로디지아 문제는 해결되지 못한 채 더글러스흄에게 실망스러운 결과로 남았다. 로디지아는 그가 장관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오랫동안 국제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반란 정권 상태를 유지했다.
5. 4. 은퇴와 사망

1974년 2월 영국 총선에서 에드워드 히스 정부는 근소한 차이로 패배했다. 당시 70세였던 더글러스흄은 그해 10월, 소수 노동당 정부가 과반 의석 확보를 위해 실시한 두 번째 총선(1974년 10월 영국 총선)에 출마하지 않고 정계를 은퇴했다. 그는 1974년 말 종신귀족 작위를 받아 상원으로 복귀하여 '''히르셀의 홈 남작'''(Baron Home of the Hirsel영어)으로 불리게 되었다.[125][133] 이후 전임 총리에게는 종신 귀족 작위를 수여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해럴드 맥밀런은 1984년까지 하원 의석을 유지하여 제외됨).
은퇴 후 홈은 1977년부터 1989년까지 순회 크리켓팀인 이 징가리의 총재를 맡았다. 또한 세 권의 책을 출판했는데, 자서전인 The Way The Wind Blows영어(바람이 부는 방식, 1976), Border Reflections영어(국경의 반성, 1979), 그리고 손자와의 서신을 묶은 Letters to a Grandson영어(손자에게 보내는 편지, 1983)이다.[24] 1980년대에는 가족과 함께 스코틀랜드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으며, 낚시와 사냥을 즐겼다. 더글러스 허드는 홈이 정치를 완전히 포기한 특정 순간은 없었지만, 점차 정치적 개입이 줄어들었다고 평가했다.[24] 그의 상원 마지막 연설은 1989년에 있었으며, 영국에 거주하는 전범 기소에 대한 허드의 제안에 반대하여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는 정의가 실현되지 않을 수 있다. 오래전 일에 대한 기억에 의존하는 것은 위험하다. 이 문제를 다시 제기하기에는 너무 늦었다."라고 주장했다.[126]
1990년, 54년간 함께한 아내가 사망한 후 그의 공적인 활동은 더욱 줄어들었다.[24] 홈은 1995년 10월 9일 스코틀랜드 베릭셔(Berwickshire) 콜드스트림(Coldstream)에서 사망했다.[134]
6. 유산 및 평가
홈의 총리 재임 기간은 짧았고 급진적인 혁신으로 두드러지지는 않았다. 더글러스 허드는 "그는 매컬런의 비상한 상상력을 가질 수 없었다"고 평가했지만, 효과적인 실용적인 정치가였다고 덧붙였다.[24] 그는 영연방 관계청과 외무부에서 영국이 제국적 위상에서 유럽의 파트너로 전환하는 과정을 관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963년 해럴드 맥밀런은 여왕에게 후계자 선정에 도움을 주기 위해 작성한 메모에서 홈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홈 경은 분명 최고의 구(舊) 지배 계급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는 권력을 위해 책략을 꾸미고자 하는 야망이 있는 사람이 아니지만, 영광이 그에게 찾아왔을 때 저항할 만큼 어리석지도 않다... 그는 대단한 예의범절과, 비록 압력에 굴복하더라도, 원칙에 대한 근본적인 엄격함이라는 기묘한 혼합으로 그런 인상을 준다. 그가 케네디 대통령, 러스크 장관, 그로미코 장관과 같은 사람들에게 매우 인기가 있다는 것은 흥미롭다. 이것은 그가 속한 계급이 최고일 때 가지는 바로 그 특징인데, 그들은 자신에 대해서가 아니라 논의 중인 문제에 대해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때 홈의 비서였고 훗날 외무·영연방 장관이 된 더글러스 허드는 다음과 같은 개인적인 소회를 남겼다: "정치에서 내가 알았던 세 명의 가장 예의 바른 사람들은 홈 경, 요르단 후세인 국왕, 그리고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었다. 세 사람 모두 태생적으로 편안함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들은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감정에 더 신경 쓸 시간이 있었다."[24]
보수당 내 일부에서는 버틀러가 총리였다면 1964년 선거에서 윌슨(및 자유당 지도자 조 그림몬드)을 상대로 승리했을 것이라고 보았지만, ''타임스''는 "1963년 10월 홈이 사기가 꺾이고 여론 조사에서 지지율이 최악이었던 정부를 인수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1년 후 노동당이 단 4석의 전체 과반수로 총선에서 승리했다. [홈]이 그렇게 짧은 시간에 그렇게 많은 지지를 회복한 것은 그 자체로 업적이었다."라고 지적했다. 홈의 경력을 되돌아보면서, ''타임스''는 그의 명성이 짧은 총리직보다는 두 차례의 외무장관 재임에 달려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그 직책에... 소련에 대한 단호한 발언, 소련에 대한 단호함, 그리고 아프리카와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단호함(때로는 동정심의 부족으로 해석됨)을 가져왔다. 그러나 그는 또 다른 것을 가져왔다. 국제적인 존경이라는 특별한 수준의 것."[128]
뮌헨 협정 당시 네빌 체임벌린 총리의 의원 개인 비서(PPS)로서 동행했지만, 버틀러와 같은 다른 유화 정책 지지자들과 달리 홈은 이 문제로 인해 정치적 경력에 큰 오점을 남기지는 않았다.[26][135] 그럼에도 불구하고, 홈은 평생 동안 뮌헨 협정이 영국이 전쟁을 준비할 시간을 벌어주어 궁극적으로 나치 독일의 패배에 필수적이었다고 확고하게 주장했다.[24]
7. 서훈
1962년 시슬 훈장 기사단(KT)의 기사로 임명되었다.[134]
1951년 7월 11일, 아버지의 사망으로 다음과 같은 세습 작위를 계승하였다.[134]
작위명 (영어 원문) | 작위 종류 | 근거 |
---|---|---|
제14대 홈 백작 (14th Earl of Home) | 스코틀랜드의 귀족 | 1605년 3월 4일 특허장 |
제19대 홈 경 (19th Lord Home) | 스코틀랜드의 귀족 | 1473년 8월 2일 특허장 |
제14대 덩글라스 경 (14th Lord Dunglass) | 스코틀랜드의 귀족 | 1605년 3월 4일 특허장 |
라나크 주 더글러스의 제4대 더글러스 남작 (4th Baron Douglas, of Douglas in the County of Lanark) | 영국의 귀족 | 1875년 6월 11일 특허장 |
1963년 10월 23일, 1963년 귀족법에 따라 상기 세습 귀족 작위를 모두 일대에 한하여 반납하였다.[134]
1974년 12월 19일, 다음과 같은 일대귀족 작위를 받았다.[134]
- '''베릭 주 콜드스트림의 허셀 홈 남작''' (Baron Home of the Hirsel, of Coldstream in the County of Berwick)
: 특허장에 따른 영국 일대 귀족 작위
참조
[1]
서적
(서적 제목 미상)
1997
[2]
뉴스
Death of Lord Home
The Times
1918-05-01
[3]
서적
(서적 제목 미상)
[4]
뉴스
Public Schools Fives
The Times
1921-11-24
[5]
서적
(서적 제목 미상)
1997
[6]
뉴스
Eton v. I Zingari
The Times
1921-07-04
[7]
웹사이트
Sir Alec Douglas-Home
http://www.espncrici[...]
2012-04-13
[8]
서적
(서적 제목 미상)
1997
[9]
서적
(서적 제목 미상)
[10]
서적
(서적 제목 미상)
[11]
서적
(서적 제목 미상)
[12]
서적
(서적 제목 미상)
2001
[13]
서적
(서적 제목 미상)
[14]
서적
(서적 제목 미상)
1997
[15]
서적
(서적 제목 미상)
1997
[16]
서적
(서적 제목 미상)
1997
[17]
서적
(서적 제목 미상)
[18]
서적
(서적 제목 미상)
1997
[19]
서적
(서적 제목 미상)
1997
[20]
서적
(서적 제목 미상)
1997
[21]
서적
(서적 제목 미상)
[22]
서적
(서적 제목 미상)
1997
[23]
서적
(서적 제목 미상)
[24]
웹사이트
Home, Alexander Frederick Douglas-, fourteenth earl of Home and Baron Home of the Hirsel (1903–1995)
http://www.oxforddnb[...]
Oxford University Press
2012-04-14
[25]
서적
(서적 제목 미상)
[26]
간행물
Foreign and Comparative Government
1965-03
[27]
서적
(서적 제목 미상)
1997
[28]
서적
(서적 제목 미상)
[29]
서적
(서적 제목 미상)
1976
[30]
서적
(서적 제목 미상)
1997
[31]
서적
(서적 제목 미상)
1997
[32]
서적
(서적 제목 미상)
1997
[33]
뉴스
Results of the General Election
The Manchester Guardian
1950-02-25
[34]
서적
(서적 제목 미상)
2010
[35]
서적
(서적 제목 미상)
1997
[36]
서적
null
[37]
서적
null
[38]
웹사이트
Queen and Privy Council
http://www.royal.gov[...]
2012-04-18
[39]
서적
null
[40]
서적
null
[41]
뉴스
House of Commons
The Times
1953-04-02
[42]
서적
null
[43]
서적
null
[44]
서적
null
[45]
서적
null
[46]
서적
null
[47]
서적
null
[48]
서적
null
[49]
서적
null
[50]
서적
null
[51]
서적
null
[52]
서적
null
[53]
서적
null
[54]
뉴스
Iain Macleod
The Economist
1976-10-23
[55]
서적
null
[56]
웹사이트
Amory, Derick Heathcoat, first Viscount Amory (1899–1981)
http://www.oxforddnb[...]
Oxford University Press
2012-04-28
[57]
서적
null
[58]
서적
null
[59]
서적
null
[60]
서적
null
[61]
서적
null
[62]
서적
null
[63]
웹사이트
International Lawyers and Other Apologists: The Case of the Cuban Missile Crisis
http://www.jstor.org[...]
1979
[64]
서적
null
[65]
서적
null
[66]
뉴스
Three Ministers Sign Test Ban Treaty in Moscow
The Times
1963-08-06
[67]
서적
null
[68]
뉴스
Conservatives Look for New Leader
The Times
1963-10-10
[69]
뉴스
Fight that Changed the Law
The Times
1963-08-21
[70]
서적
null
[71]
서적
(책 제목은 제공되지 않음)
[72]
뉴스
Mr. Macmillan Decides to Resign Soon – Lord Hailsham to Renounce his Title
1963-10-11
[73]
뉴스
The very image of a laird
1976-10-15
[74]
서적
(책 제목은 제공되지 않음)
[75]
뉴스
Home in the lead – Macmillan would serve under him
1963-10-13
[76]
서적
(책 제목은 제공되지 않음)
[77]
서적
(책 제목은 제공되지 않음)
[78]
서적
(책 제목은 제공되지 않음)
[79]
서적
(책 제목은 제공되지 않음)
[80]
뉴스
The Queen May Send for Mr. Butler Today
1963-10-18
[81]
뉴스
Could they have stopped him?
1963-10-20
[82]
뉴스
Lord Home Faces Crisis Forming Government
1963-10-19
[83]
서적
(책 제목은 제공되지 않음)
[84]
서적
(책 제목은 제공되지 않음)
[85]
웹사이트
Macleod, Iain Norman (1913–1970)
http://www.oxforddnb[...]
Oxford University Press
2012-04-21
[86]
서적
(책 제목은 제공되지 않음)
[87]
뉴스
Brand X is the Boss
1963-10-19
[88]
뉴스
The Successor
1963-10-11
[89]
뉴스
Summons to Duty
1963-10-19
[90]
뉴스
The man, his team, and their tasks
1963-10-19
[91]
뉴스
Eccentric Choice
1963-10-20
[92]
뉴스
The Spectator book review that brought down Macmillan's government
http://www.spectator[...]
2014-06-30
[93]
뉴스
The Indestructible Journos
http://www.independe[...]
2014-07-01
[94]
뉴스
Stumbling into Number 10
1995-10-10
[95]
서적
(책 제목은 제공되지 않음)
[96]
간행물
Dissolution Arrangements
http://www.Parliamen[...]
House of Commons
2012-04-14
[97]
웹사이트
Federal Election Trivia
http://www.parl.gc.c[...]
Parliament of Canada
2012-04-20
[98]
뉴스
'Tide Turning' with Kinross Win
1963-11-09
[99]
뉴스
Fighting Reply from Prime Minister
1964-01-21
[100]
뉴스
The New Prime Minister
1963-10-23
[101]
뉴스
Auberon Waugh
https://www.telegrap[...]
2017-12-25
[102]
뉴스
Carried the hopes of the world
1963-11-23
[103]
뉴스
Year of Disillusion and Change
1963-12-31
[104]
웹사이트
Sir Alec Douglas-Home
http://www.number10.[...]
British Prime Minister's Office
[105]
서적
Home, Alec Douglas-Home, Lord
http://www.oxfordref[...]
Oxford University Press
2008
[106]
뉴스
Resale Prices Bill as one move to sharpen competition
1964-03-11
[107]
뉴스
A cosy book cartel is remaindered
1995-09-27
[108]
뉴스
Resale Act Soon Operative
1965-01-16
[109]
뉴스
How Alec Douglas-Home foiled student kidnappers with beer
https://www.telegrap[...]
2018-04-02
[110]
뉴스
Afternoon Play
http://docs.newsbank[...]
2009-07-11
[111]
뉴스
Percentage drop in the Conservative poll was biggest for any party since 1945
1964-10-17
[112]
뉴스
End of Amateurs in Cricket
1963-02-01
[113]
뉴스
Cricket – Test Match Selectors Appointed
1950-03-15
[114]
뉴스
Hutton Captains England – Break with Tradition
1952-05-26
[115]
뉴스
Books: The warrior from Yorkshire
http://docs.newsbank[...]
2003-03-01
[116]
간행물
Honorary Degrees Working Group
http://www1.hw.ac.uk[...]
Heriot-Watt University
2016-04-11
[117]
뉴스
An Honourable Record
1966-07-30
[118]
뉴스
Ministers in merger dilemma
1968-10-17
[119]
뉴스
The new Cabinet
1970-06-22
[120]
혼합
[121]
뉴스
Gromyko threat of reprisals on diplomats fails to sway Sir Alec
1971-09-28
[122]
뉴스
Thaw in Anglo-Soviet Relations
1973-12-04
[123]
뉴스
Commons triumph for Sir Alec but Labour promise Rhodesia battle
1971-11-26
[124]
뉴스
Decision genuine expression of African opinion
1972-05-24
[125]
법률문서
1974-12-24
[126]
뉴스
Hitler must not have posthumous victory, peers told
http://docs.newsbank[...]
2021-11-08
[127]
뉴스
Marriages – Lord Dunglass, M.P. and Miss E. H. Alington
1936-10-05
[128]
뉴스
Lord Home of the Hirsel – Obituary
http://docs.newsbank[...]
1995-10-10
[129]
서적
[130]
웹사이트
Sir Alec Douglas-Home Memorial
http://billscottscul[...]
Bill Scott Estate
2018-02-05
[131]
뉴스
Mr. Butler Appointed Foreign Secretary
1963-10-21
[132]
서적
The Chancellors: A History of the Chancellors of the Exchequer, 1945–90
1997
[133]
웹사이트
Sir Alec Douglas-Home
https://api.parliame[...]
2014-05-27
[134]
웹사이트
Alexander Frederick Douglas-Home, Baron Home of the Hirsel
http://thepeerage.co[...]
2014-05-28
[135]
웹사이트
Past Prime Ministers – Sir Alec Douglas-Home
http://www.number10.[...]
2014-05-27
[136]
일반텍스트
[137]
서적
エリザベス女王 史上最長・最強のイギリス君主
中央公論新社
2020-02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