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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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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야노 사건은 1993년 교토 대학 동남아시아연구센터 소장 야노 도오루 교수의 성희롱 의혹으로 시작되었다. 야노 교수는 여비서 채용 면접을 빌미로 성관계를 요구하고 거부 시 직장을 잃게 하겠다고 협박했으며, 과거 여학생 강간 혐의도 제기되었다. 이 사건으로 야노는 사임했지만, 이후 피해자들의 증언과 대학 측의 대응, 야노의 반박과 소송 제기 등 논란이 이어졌다. 이 사건은 학계의 위계질서를 이용한 권력형 성범죄로 지적되었으며, 한국 대학 내 성폭력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야노는 이후 빈 대학교에서 근무하다 객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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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노 사건
사건 개요
사건 명칭야노 사건 (矢野事件)
발생 시기1999년
관련 인물야노 히로야스 (矢野裕康)
요코야마 노크 (横山ノック)
와타나베 카즈코 (渡辺和子)
사건 내용
개요1999년에 요코야마 노크 당시 오사카부 지사가 여성 운동원에게 강제 추행 혐의로 고소당한 사건이다.
고소인당시 20대 여성 운동원
피고소인요코야마 노크 (오사카부 지사)
혐의 내용강제 추행
재판 결과유죄 판결 (벌금형)
결과요코야마 노크는 지사직을 사임함
사회적 영향
주요 논점권력형 성범죄, 미투 운동의 초기 사례 연구
관련 보도아사히 신문 1999년 12월 25일자 21면 보도 (와타나베 카즈코 씨의 견해)
참고 자료
관련 기사상노 치즈코에게 듣다 "사회학은 쓸모가 있는가" 카테고리가 패러다임을 바꾼다 (2페이지)

2. 사건의 배경

1980년대 후반부터 일본에서는 직장 내 성희롱 문제가 사회적 문제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1989년 후쿠오카 지방법원에서 일본 최초의 성희롱 민사 소송이 제기되었고, 1992년 원고 승소 판결이 나오면서 '세쿠하라'(セクハラ|세쿠하라일본어)라는 용어가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17][18][19]

2. 1. 일본의 초기 성희롱 소송

일본에서 성희롱 사건 재판이 최초로 열려 사회적 문제로 부각된 사건은 1989년 후쿠오카 지방법원에 제소된 직장 내 언어적 성희롱 민사 소송이었다.[17] 후쿠오카현의 한 출판사에 근무하는 여성이 상사와 직장을 상대로 손해 배상 청구를 낸 것이다. '세쿠하라'(セクハラ|세쿠샤루 하라스멘토일본어의 줄임말로, 영어 Sexual Harassment의 일본어 역어)라는 단어가 그해 ‘신조어, 유행어 대상’에서 금상을 수상할 정도로 해당 소송은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18] 3년에 걸친 소송 끝에 1992년 이 재판은 결국 원고 승소로 끝나 회사측이 200만을 위자료로 지급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언어적 성희롱으로 인한 피해를 최초로 인정했으며, 이 소송 이후 일본에서 '성희롱'이라는 용어가 통용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는 일본에서 성희롱은 '단순 괴롭힘'이나 '성적 괴롭힘'이라는 표현으로 일컬어졌다.[19]

3. 야노 도오루 사건의 전개

1993년, 교토 대학 동남아시아 연구센터 소장 야노 도오루 (矢野 暢, 당시 57세) 교수의 성희롱 의혹이 제기되었다. 이는 일본 대학 내에서 최초로 공론화된 성희롱 사건으로, 저명한 학자의 사건이었기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20]

그 해 7월, 교토대에 투서가 접수되었다. 투서에는 야노 교수가 동남아시아 연구센터 여직원의 동생을 여비서 채용 면접을 빌미로 호텔 바로 불러, 언니의 일자리를 볼모로 잠자리와 술 시중을 요구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대학 당국의 조사 결과, "출장지에서 (비서를) 끌어안고 옷을 벗겼다", "작업장으로 쓰고 있는 교토 시내의 호텔에서 관계를 강요했다" 등 전직 비서들의 증언이 잇따랐다.[20]

8월 15일, 야노 교수는 여비서 7명이 최근 석 달 동안 연쇄적으로 사임하거나 해고당한 것에 대한 도의적 책임을 지겠다며 사임 의사를 밝혔다. 당시 야노 교수는 일본의 대표적인 석학이자 동남아시아 연구의 1인자로, 텔레비전과 신문에도 자주 등장하여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20][21]

이후 일본 언론들은 여비서들의 연쇄 사임이 그의 성희롱 때문이며, 야노 교수가 센터 소장 직뿐 아니라 교수 직까지 내려놓은 것은 이에 대한 책임을 진 것이라고 보도했다. 야노 교수는 면접을 명분으로 여비서 후보를 호텔로 불러 "내 비서는 잠자리도 같이할 각오가 돼 있어야 한다"라고 윽박지르고, 요구를 거부하면 센터에 근무하는 언니의 직장을 잃게 하겠다고 위협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또한, 사임한 여비서 중 한 명은 야노 교수로부터 성희롱을 당했다고 대학 사무국에 호소했으며, 교토 변호사회의 조사에 따르면 성희롱 피해를 호소하는 여비서는 모두 4명이었다.[20]

1993년 12월, 한 여성은 교토변호사협회에 익명으로 인권 구제를 신청하며, 학생 시절 야노 교수에게 동남아 이야기를 해주겠다는 제안을 받고 호텔로 갔다가 구타당한 뒤 강간당했다고 주장했다. 이후에도 야노 교수는 "동남아를 연구하는 사람들 사이의 동지적 연대의 증거"라며 수년간 관계를 강요했다고 한다.[21]

야노 교수는 1993년 교토 대학 교수직에서 사임할 즈음 교토의 동복사(東福寺, 토후쿠지)에 머물기 시작했다. 1994년 1월 26일, 교토 대학 관계자들로 구성된 '성학대 의혹사건의 철저규명을 촉구하는 대학교원회' 회원들이 동복사의 후쿠시마 게이도(복도경도) 종정에게 의혹의 전말을 설명했다. 후쿠시마 종정은 야노에게 "1월 중으로 나가달라"고 통보했고, 1월 29일 야노는 절에서 나오게 되었다.[21]

이후에도 야노 교수는 성희롱 의혹을 부인하며 여러 건의 소송을 제기했으나, 법원은 모두 야노 교수의 청구를 기각했다.

3. 1. 피해자들의 증언

1993년 1월, 야노 교수의 여비서로 채용 면접을 보게 된 A는 면접 과정에서 야노 교수로부터 성적인 요구를 받았다.[20] A는 야노에게 "비서로서의 사무 처리 능력이 아니라 채용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으로 교제하기 위해 채용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들었다.[20] A가 "애인이 있어 마음으로 교제할 수 없다"고 거절하자, 야노는 "남자 있는 여동생을 소개한 언니도 언니다. 언니와 소장 비서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다. 나는 소장이니까 그만두게 하는 건 간단하다."라며 위협했다.[20]

이후 A의 언니가 항의하자, 야노는 A에게 사과문을 작성했지만, '성희롱'이라는 단어를 명시하지는 않았다.[20]

야노 교수의 또 다른 여비서 B는 1993년 4월 중순, 출장지인 도쿄의 호텔에서 야노 교수가 껴안고 옷을 벗기려 했지만 거부했다. B는 즉시 귀가했고, 이후 출근하지 않고 4월 30일 자로 퇴직했다. 교토 대학 당국이 전직 비서들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출장지에서 (비서를) 끌어안고 옷을 벗겼다", "작업장으로 쓰고 있는 교토 시내의 호텔에서 관계를 강요했다" 등의 증언이 나왔다.[20] 교토 변호사회의 조사에 따르면 야노에게 성희롱을 당했다고 호소하는 여비서는 모두 4명이었다.[20]

대학원생 갑야 오토코(가명)는 1982년 1월, 대학 3학년 때 시간 강사였던 야노의 특별 강좌에 참석했다. 세 번째 만남에서 야노는 갑야를 호텔 방으로 불러 "오늘은 피곤하니 방에서 이야기를 계속하고 싶다"고 말했다. 갑야는 야노에게 수차례 폭행과 욕설을 당한 뒤 강제로 성관계를 맺었다. 야노는 "성행위는 대등한 인간끼리 하는 것이며, 너와 내가 성적인 관계를 가진 것은 동남아시아 연구를 목표로 하는 자들 간의 동지적 연대의 증거이다"라고 말했다. 갑야는 야노의 권유로 연구실에서 근무하며 지속적으로 성관계를 강요당했고, 결혼 후에도 관계가 이어졌다.

3. 2. 대학 측의 대응

교토 대학은 개선위원회를 설치하여 야노 교수의 성희롱 의혹 사건을 조사했다.[20] 그러나 개선위원회 위원장이었던 타카야 교수는 개인의 양심에 해결을 맡겨야 한다고 생각하여 야노에게 사죄 등의 조건을 실행하게 하고 소장직을 사임하는 것으로 사태를 수습하려 했으며, 이로 인해 야노 교수의 동남아시아연구센터 소장직 사임으로 사건을 무마하려 했다는 비판을 받았다.[20]

피해자들은 익명으로 교토 변호사협회에 인권 구제를 신청했고,[21] 결국 야노 교수는 1993년 12월 31일 자로 교토 대학 교수직을 사임했다.[21]

이무라 히로오 교토 대학 총장은 1994년 9월 15일에 발행된 『교토 대학 홍보』에서 "상대방의 의사에 반하는 성적 언행이 없도록" 주의를 촉구하고, "교토 대학에서는 앞으로 성차별과 관련된 인권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계몽 활동을 계속할 예정입니다. 또한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상담할 수 있는 체제를 마련하는 것도 검토하고 있습니다."라고 밝혔다.[12]

교토 변호사협회는 1998년 3월 31일 자로 야노의 행위를 성희롱으로 인정하고 야노에게 경고장을 보냈으며, 교토 대학과 츠보우치 소장에게 재발 방지 구체적 조치를 요구하는 요망서를 보냈다.[13][14] 교토 대학에서는 대학 차원의 대응이 검토되어 성차별 문제에 관한 상담 접수 창구가 각 부서에 설치되었으며, 1999년 6월 1일, 성희롱 방지 대책 등을 검토하고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해결을 위한 적절한 대응에 대한 조언 등을 제공하는 인권 문제 대책 위원회와, 성차별 문제 상담 접수를 업무의 하나로 하는 카운슬링 센터가 설치되었다.[15]

3. 3. 야노 교수의 반박과 소송

야노 교수는 아사히 신문과 주간 아에라와의 인터뷰에서 성희롱 의혹을 전면 부인했다.[20] 그는 여비서 후보에게 자신의 비서 직이 어려운 자리임을 강조했을 뿐, 잠자리를 강요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강제 성추행 주장에 대해서는 해당 여비서가 이후 다른 사람과 결혼했다는 점을 들어 결백을 호소했다.[20] 그러나 일본 언론들은 야노 교수가 주장하는 '음모설'이 설득력이 없다고 보았다. 야노 교수가 성희롱 사건에 대한 반성문을 대학 측에 제출했고, 강간 혐의가 불거지자 교수 직을 사임하고 절로 들어갔다는 점 등이 그 이유였다.[20]

이후 야노 교수는 1994년 2월 15일 대리인을 통해, 기자회견을 갖고 이달 중으로 문부대신을 상대로 복직 요구 소송을 동경지방법원에 제기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21] 야노 측은 1993년 12월 교토 대학에 제출한 사직서는 당시 의혹 보도가 잇따르던 상황에서 주위의 권유로 "정상적인 판단능력을 잃은 상황에서 쓴 것이므로 무효"라고 주장했다.[21]

야노는 문부대신에 대한 사직 승인 처분 취소 요구 행정 소송,[6] 오노 카즈코에 대한 명예훼손 손해 배상 청구 소송,[8] 이구치 히로시 변호사에 대한 명예훼손 손해 배상 청구 소송,[11] '고노 오토코'에 대한 명예훼손 손해 배상 청구 소송[7] 등 3건의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1997년 모든 판결에서 야노의 청구가 기각되었다.[6][7]

4. 사건의 영향

야노 사건은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대학 내 성희롱 문제를 공론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1993년에 공론화된 이 사건은 일본 내 대학에서 벌어진 최초의 성희롱 사건으로 불리며, 혐의자가 저명한 학자였기 때문에 더욱 큰 파장을 일으켰다.[20]

이 사건으로 교토 대학은 성희롱 방지 대책을 마련하고 상담 창구를 설치하는 등 제도 개선에 나섰다. 1994년 이무라 히로오 교토 대학 총장은 대학 내 성차별 문제에 대한 주의를 촉구하고, 상담 체제 마련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12] 1998년 교토 변호사협회는 야노의 행위를 성희롱으로 인정하고, 교토 대학에 재발 방지 조치를 요구했다.[13][14] 이에 따라 교토 대학은 각 부서에 성차별 문제 상담 창구를 설치하고, 1999년에는 인권 문제 대책 위원회와 카운슬링 센터를 설치했다.[15]

야노 사건을 계기로 1995년부터 '여성학 교육 네트워크'는 간사이 지역을 중심으로 대학 내 성희롱 실태 조사를 실시하기도 했다.

4. 1. 구조적 문제와 비판

이 사건은 저명한 교수였던 야노가 학계에서의 위계질서를 이용하여 여비서와 학생들을 성적으로 착취한 사건으로, 권력형 성범죄의 전형적인 사례로 지적된다.[20] 특히, 야노 교수가 동남아시아 연구 분야에서 권위 있는 학자였기 때문에, 피해자들이 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는 점이 문제로 지적되었다.[20]

교토 대학 동남아시아연구센터 소장이었던 야노 교수는 학내외에서 높은 지명도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의 연구실은 센터 내에서도 가장 권위 있고 규모가 컸다.[20] 피해자들은 야노 교수의 학문에 심취하여 그의 연구실에서 비서 겸 연구조수로 일하면서, 야노 교수로부터 연구자로 키워주겠다는 언질을 받기도 했다.[20] 그러나 야노 교수는 이러한 지위와 피해자들의 기대를 이용하여 성추행을 일삼았고, 피해자들은 학계에서 불이익을 받을 것을 우려하여 저항하기 어려웠다.[20]

이와 유사한 성희롱 사건들이 속출하자, 1996년에 나고야 대학후쿠오카 대학에서는 대학원생과 교수들이 지역 네트워크를 결성하여 캠퍼스 성희롱에 반대하는 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23]

4. 2. 한국에 미친 영향

야노 도오루 사건은 대한민국에도 보도되면서, 대학 내 성폭력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1990년대 중후반 대한민국 대학가에서 총여학생회 등을 중심으로 성폭력 문제 해결을 위한 움직임이 활발해지는 데 영향을 미쳤다.[20]

5. 사건 이후

야노 도오루는 판결이 나오기 전 해인 1996년으로 건너가 빈 대학교의 객원 교수로 근무하였으나, 1999년 12월 14일에 빈에서 사망했다.[16][1]

야노의 조카인 크림시츄의 아리타 테페이는 "친척에 있는 대학 교수의 아저씨를 본받으라고 계속 들었지만, 그 사람은 성희롱으로 고소당했다."라고 소재로 삼고 있다.[1]

참조

[1] 웹사이트 上野千鶴子に聞く「社会学は役に立つか」 カテゴリーがパラダイムを変える (2ページ目) https://president.jp[...] PRESIDENT Online 2019-06-03
[2] 뉴스 横山・大阪府知事わいせつ訴訟の意味 渡辺和子氏 1999-12-25
[3] 뉴스 矢野元京大教授のセクハラ疑惑(上) 密室の出来事 1994-02-09
[4] 뉴스 京大・東南アジア研の矢野所長が辞任 女性秘書8人相次ぎ辞職 職員から質問状 1993-08-15
[5] 뉴스 矢野元京大教授のセクハラ疑惑(中) 本社に釈明の手紙 1994-02-10
[6] 뉴스 矢野暢・元京大教授の請求棄却判決 辞職取り消し訴訟 1996-08-20
[7] 뉴스 京大元教授の損害賠償請求また棄却 セクハラ訴訟 1997-09-20
[8] 뉴스 矢野・元京大教授のセクハラ認定 名誉棄損の訴え認めず 1997-03-28
[9] 웹사이트 人事院規則10―10(セクシュアル・ハラスメントの防止等)の運用について https://www.jinji.go[...] 人事院 2020-04-01
[10] 判례 https://www.courts.g[...]
[11] 뉴스 「性関係強要は真実」 矢野・元京大教授の訴えを棄却 1997-07-10
[12] 뉴스 「セクハラに注意」 矢野氏の問題で井村京大学長が呼びかけ 1994-10-01
[13] 뉴스 矢野暢・元京大教授のセクハラ認定 京都弁護士会が警告書 1998-04-03
[14] 뉴스 京都弁護士会 京大の対応、厳しく批判 矢野セクハラ事件 調査・救済を求める 大学・センターに要望書 矢野氏個人には警告書 https://hdl.handle.n[...] 1998-05-16
[15] 웹사이트 京都大学自己点検・評価報告書 II 2000 https://www.kyoto-u.[...] 京都大学 2000
[16] 뉴스 矢野暢氏が死去 東南アジア研究の先駆者 1999-12-16
[17] 저널 일본의 고용평등정책과정 : 여성대표성, 가치ᆞ신념, 제도적 구조를 중심으로 http://www.midwest.e[...] 한국정치학회
[18] 뉴스 ‘파와하라’ 악질기업 개망신 준다 http://www.japanoll.[...] 2018-09-26
[19] 뉴스 "[인터뷰] ① 무타 카즈에 교수 \"잠자는 숲속의 공주, 동의 없는 키스는 성폭력\"" https://www.ajunews.[...] 2018-06-02
[20] 뉴스 일본에도 '성희롱' 주의보 http://www.sisajourn[...] 1995-08-24
[21] 뉴스 이 재벌총수 일 저명교수의 인생역정 : 야노 도루 성 스캔들로 "명예 추락" 교수직 이어 거처서도 쫓겨나, "사표쓸때 제정신 아니었다" 무효소 준비 https://m.chosun.com[...] 2020-07-10
[22] 문서 야노 사건
[23] 보고서 대학 캠퍼스의 권력형 성희롱·성폭력, 무엇이 문제인가 https://web.archive.[...] 2015-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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