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코프 후터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야코프 후터는 16세기 재세례파 지도자이다. 그는 티롤에서 태어나 모자 제조 기술을 배우며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재세례파에 개종했다. 박해를 피해 모라비아로 이주하여 공동체를 이끌었지만, 1535년 티롤로 돌아간 후 체포되어 고문에도 신념을 굽히지 않고 1536년 인스브루크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현재 인스브루크에는 그를 기리는 현판이 있으며, 그의 삶과 신앙은 한국 개신교, 특히 재세례파 계열 교단에서 재조명되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재세례파 신학자 - 메노 시몬스
메노 시몬스는 16세기 네덜란드의 재세례파 지도자이자 신학자로, 가톨릭 사제에서 재세례파로 전향하여 평화주의적 신앙을 설파하며 메노파 교회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재세례파 신학자 - 한스 뎅크
한스 뎅크는 16세기 독일의 신학자이자 번역가로, 재세례파 운동에 참여하여 급진적인 종교개혁 사상을 펼치고 내면의 하나님의 말씀을 중시하는 신비주의적 경향을 보였다. - 16세기 오스트리아 사람 - 막시밀리안 1세 (신성 로마 황제)
막시밀리안 1세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대공으로서, 부르고뉴 공국과의 결혼을 통해 세력을 확장하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향력을 넓혔으며, 르네상스 시대의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 16세기 오스트리아 사람 - 튀코 브라헤
튀코 브라헤는 덴마크의 귀족이자 천문학자로, 정밀한 천체 관측과 1572년 초신성 및 1577년 혜성 관측을 통해 코페르니쿠스 혁명에 기여했으며, 그의 관측 자료는 케플러의 행성 운동 법칙 발견에 토대가 되었다.
야코프 후터 |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야코프 후터 |
로마자 표기 | Jakob Hutter |
출생 | 1500년대 후반 |
출생지 | 오스트리아 티롤주 산크트 로렌첸 |
사망 | 1536년 2월 25일 |
사망지 | 인스브루크, 오스트리아 |
국적 | 합스부르크 제국 |
직업 | 모자 제조업자, 후터파의 지도자 |
종교 | 재세례파 |
업적 | |
주요 업적 | 후터파 공동체 설립 및 지도 |
2. 생애
야코프 후터는 티롤 백국(현재 이탈리아 남티롤) 푸스터 계곡 근처 생로렌첸의 작은 마을 무스에서 태어났다. 인근 프라그스에서 모자 제조를 배우고 떠돌이 장인이 되었으며, 이후 카린티아 공국의 슈피탈 안 데어 드라우에 정착했다.[1]
Jakob Hutter|야코프 후터de의 삶과 신앙은 한국의 개신교, 특히 재세례파의 신앙을 계승하는 교단들을 중심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그의 저항 정신과 공동체적 삶은 현시대 한국 교회가 직면한 여러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1] 다만, 일부 보수적인 개신교계에서는 재세례파의 신학적 입장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1]
[1]
서적
The Chronicle of the Hutterian Brethren
www.plough.com
Plough Publishing House
1987
클라겐푸르트에서 처음 재세례파를 만나 개종했고, 푸스터 계곡 지역에서 설교하며 여러 소규모 회중을 형성했다. 1529년 초, 티롤 합스부르크 당국이 이를 알고 재세례파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1527년, 합스부르크 대공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1세는 이단 종파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후터 등은 모라바 변경백국을 조사하여 후스토페체의 상황이 더 관대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티롤 재세례파는 이주하기로 결정했다. 소규모 그룹이 모라비아로 이동하는 동안 후터는 티롤에 남아 목회 활동을 했으며, 심한 고문에도 그의 행방을 밝히지 않은 동료들 덕분에 체포를 피했다.[1]
1533년, 티롤에서 재세례파 박해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후터는 모라비아에 도착했다. 팔라티네이트 (지역), 슈바벤, 실레지아 등지에서도 많은 재세례파가 모라비아로 이주했다. 후터는 이들을 통합하여 모라비아에서 재세례파가 번성하도록 이끌었다. 그의 지도 아래 여러 회중은 비폭력, 세례 신자 신념과 더불어 초기 기독교의 재산 공동 소유 관행을 채택했다.[1]
1535년, 모라비아 ''란트탁'' 의회는 모든 재세례파를 추방했고, 이들은 주변 국가로 흩어졌다. 후터는 티롤로 돌아갔으나, 1535년 11월 30일 클라우젠, 남티롤에서 아내와 함께 체포되어 브론졸로 요새로 끌려갔다. 12월 9일, 인스브루크로 이송되어 심문을 받고 철회를 강요받았으나, 심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다른 재세례파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결국 화형을 선고받고 1536년 2월 25일 인스브루크 골데네스 다흐 앞에서 처형되었다.[1] ''후터파 연대기''에 따르면 티롤에서 총 360명의 재세례파가 처형되었다.
후터의 말은 심한 박해 속에서 쓰여진 8통의 편지에 기록되어 있다.[1]
3. 기념
인스브루크에서 후터는 황금 지붕에 있는 현판으로 기억되고 있다.
2006년부터 2007년까지 개신교와 가톨릭 교회, 평화 운동 팍스 크리스티(Pax Christi) 및 티롤 복음주의 교회 협회의 대표로 구성된 실무 그룹이 후터파와의 화해를 위해 노력했다. 2007년 2월 25일, 이 그룹은 후터파를 대표하기 위해 초청된 세 쌍의 부부와 함께 황금 지붕에서 기념식을 열고 인스브루크 구시청에서 공동 기도회를 열었다.[2]
4. 한국에서의 재조명
참조
[2]
웹사이트
VERSÖHNUNGSZEICHEN mit den HUTTERERN
http://w3.khg-heim.u[...]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