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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무 (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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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양무는 전한 초기의 인물로, 낭중기장으로 유방을 따라 하규에서 봉기했다. 도위로서 양가를 공격하고 해하 전투에서 항우를 추격하여 그의 시신 일부를 얻었다. 항우의 시신을 수습한 공로로 다른 네 명과 함께 제후에 봉해졌으며, 오방후에 책봉되었다. 문제 12년에 사망하여 '장'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그의 아들 양거질이 뒤를 이었다.

2. 생애

양무는 기원전 206년, 하규[1]에서 낭중기장(郞中騎將)으로 고제를 따랐으며, 이후 도위로서 양하를 쳤다.[2] 기원전 202년 해하 전투에 낭중으로 참전하여 항우를 추격, 오강에서 항우가 자결한 후 여마동, 양희, 여승 등과 함께 시신 일부를 얻어 공을 인정받았다.[3] 기원전 199년 3월 신묘일에 오방후(吳房侯) 700호에 봉해졌으며,[3] 기원전 168년(문제 12년)에 사망하여 시호를 (莊)이라 하였고, 아들 양거질(楊去疾)이 작위를 계승했다.[3]

2. 1. 초기 활동

기원전 206년, 하규[1]에서 낭중기장(郞中騎將)으로 고제를 따랐다. 이후 도위로서 양하를 쳤다.[2]

2. 2. 해하 전투와 항우의 죽음

기원전 202년, 낭중으로서 해하 전투에 참전하여 진나라 서초패왕 항우를 추격하였다. 오강에서 항우가 자결한 후, 여마동, 양희, 여승 등과 함께 항우의 시신 일부를 얻었다. 항우의 시체를 맞추어본 결과, 다섯 명이 모두 공을 인정받아 제후에 봉해졌다.[3] 기원전 199년 3월 신묘일에 오방후(吳房侯) 700호에 봉해졌다.[3]

2. 3. 오방후 시절

기원전 199년 3월 신묘일에 오방후(吳房侯) 700호에 봉해졌다.[3] 기원전 168년(문제 12년)에 사망하여 시호를 (莊)이라 하였고, 아들 양거질(楊去疾)이 작위를 계승했다. 이 시호는 해하 전투에서 항우의 시체를 얻은 다섯 명이 공통으로 받았다.[3]

3. 출전


  • 사마천: 《사기》 권7 항우본기(項羽本記)·권18 고조공신후자연표(高祖功臣侯者年表)[1]
  • 반고: 《한서》 권16 고혜고후문공신표(高惠高后文功臣表)·권31 진승항적전(陳勝項籍傳) 중 항적[2]

참조

[1] 문서 옛 진나라 내사지의 속현
[2] 문서 사기 고조본기에 따르면, 고제가 양가에서 군사활동을 한 것은 원년 왕흡과 설구에게 왕릉 (전한)|왕릉과 합류해 패에 있는 아버지와 아내를 모셔오게 하니 항우가 양가에서 저지하게 한 것, 그리고 4년에 홍구 협약 후 항우를 뒤쫓다가 양가 남쪽에 머물면서 한신과 팽월의 합류를 기다린 것 두 가지가 있다.
[3] 문서 여남군의 속현이다
[4] 문서 《사기》에서는 21위, 《한서》에서는 22위라 한다
[5] 문서 상제를 피휘해 융려라고도 한다
[6] 문서 《사기》에는 순위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7] 문서 《사기》에서는 '양하제애후'에 이름은 기록이 없고, 《한서》에서는 '양하제후 기석'으로 기록되어 있다
[8] 문서 《사기》에서는 봉읍을 마(磨)라 했으나, 《사기색은》에서는 이를 오류라고 했다
[9] 문서 《사기》에서는 116위, 《한서》에서는 126위라고 한다. 《사기》를 따를 경우, 척새와 순위가 중복된다
[10] 문서 원래는 항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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