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드라시 3세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언드라시 3세는 언드라시 2세의 아들인 유복자 이슈트반과 모로시니 토마시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1290년 라슬로 4세가 사망한 후 헝가리의 왕위에 올랐으나, 왕위 계승에 대한 정통성 논란에 직면했다. 언드라시 3세는 여러 귀족 세력과 대립하며 왕권 강화를 시도했고, 오스트리아의 알브레히트 1세와 동맹을 맺어 반란을 진압했다. 그는 두 번 결혼했으나 후사를 남기지 못했고, 1301년 사망하면서 아르파드 왕조의 대가 끊어졌다. 그의 죽음 이후 헝가리에서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전이 발발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301년 사망 - 카이두 칸
카이두 칸은 오고타이 칸의 손자이자 칭기즈 칸의 증손으로, 오고타이 가문의 부흥을 목표로 쿠빌라이 칸과 대립하며 중앙아시아에서 세력을 확장한 인물이다. - 1301년 사망 - 토곤 (진남왕)
쿠빌라이 칸의 서자이자 원나라 황족인 토곤은 진남왕에 봉해졌으며, 쩐 왕조의 저항으로 베트남 침공에 실패하여 쿠빌라이 칸의 신임을 잃고 양주에 주둔하다 사망했다. - 1265년 출생 - 단테 알리기에리
단테 알리기에리는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어나 《신곡》을 저술하고 이탈리아어 문학 발전에 기여했으며, 정치 활동과 망명 생활을 겪고 기독교 사상과 당대 사회상을 반영한 작품을 통해 세계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 1265년 출생 - 후시미 천황
후시미 천황은 가마쿠라 시대 후기의 제92대 일본 천황으로, 고후카쿠사 천황의 아들이자 고우다 천황의 양자였으며, 양통 립립의 관례를 확립하고 와카와 서예에 능통하여 문화 발전에 기여하며 인세이를 펼쳤다. - 14세기 헝가리 사람 - 카로이 1세
카로이 1세는 카페 앙주 출신으로 1308년부터 1342년까지 헝가리의 왕이었으며, 헝가리 통일 전쟁과 내치 및 경제 개혁을 통해 헝가리의 재건을 이끌었다. - 14세기 헝가리 사람 - 카를로 3세
앙주-시칠리아 가문 출신인 카를로 3세는 조반나 1세 여왕을 살해하고 나폴리 왕위를 찬탈했으며, 헝가리 왕 카로이 2세로 즉위했으나 암살당했다.
언드라시 3세 | |
---|---|
기본 정보 | |
![]() | |
전체 이름 | III. Velencei András (헝가리어) |
다른 이름 | Andrija III. Mlečanin (크로아티아어) |
출생 | 1265년경 |
출생 장소 | 베네치아, 베네치아 공화국 |
사망 | 1301년 1월 14일 |
사망 장소 | 부다, 헝가리 왕국 |
매장 장소 | 부다, 회색 수도원 교회 |
종교 | 로마 가톨릭 |
통치 정보 | |
칭호 | 헝가리 국왕 및 크로아티아 국왕 |
통치 기간 | 1290년 7월 10일 – 1301년 1월 14일 |
대관식 | 1290년 7월 23일, 세케슈페헤르바르 |
이전 통치자 | 러슬로 4세 |
다음 통치자 | 바츨라프 |
가족 관계 | |
왕조 | 아르파드 |
아버지 | 사후 스티븐 |
어머니 | 토마시나 모로시니 |
배우자 | 페네나 쿠야프스카 아그네스 폰 외스터라이히 |
자녀 | 엘리자베트 폰 퇴스 |
2. 생애
언드라시 3세는 언드라시 2세 사후에 태어난 우토쉴뢰트 이슈트반(유복자 이슈트반)과 모로시니 토마시나 사이에서 태어났다.[8] 아버지 이슈트반은 이복 형들과 그 자손들에게 사생아로 의심받기도 했다. 1272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언드라시는 베네치아의 외가 친척들과 함께 교육받았다.
1278년, 헝가리 귀족 쾨세기 이반의 요청으로 헝가리를 방문하여 슬라보니아 통치권을 요구했으나, 조카 라슬로 4세에 의해 거절당하고 베네치아로 돌아갔다.
1290년 초, 에스테르곰 대주교 로도메르는 파문당한 라슬로 4세를 대신하여 언드라시를 국왕으로 옹립하려 했다. 언드라시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헝가리 귀족 허호트 어르놀드에게 생포되어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1세에게 넘겨져 빈에 갇혔다.
1290년 7월 10일, 라슬로 4세가 쿠만인에게 살해당하자, 언드라시는 7월 23일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로도메르 대주교로부터 왕관을 받고 즉위했다. 같은 해 폴란드 공주 쿠야비의 페넨나와 결혼했다.
독일 왕 루돌프 1세는 헝가리 왕가가 끊겼다고 주장하며 언드라시의 왕위 계승에 의문을 제기했다. 나폴리 왕 카를로 2세의 아내이자 라슬로 4세의 여동생인 마리아도 헝가리 왕위를 주장하며, 자신의 아들 카로이 마르텔, 손자 카로이 로베르트를 왕위 계승자로 내세웠다.
1291년, 언드라시 3세는 너지바러드(현 루마니아 오라데아)와 줄러페헤르바르(현 루마니아 알바이울리아)에서 귀족 회의에 참석했다. 같은 해 8월 26일, 헝가리와 오스트리아는 하인부르크에서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1293년, 언드라시의 어머니 토마시나가 헝가리를 방문하여 반란 귀족들과 협상하여 언드라시의 통치를 받아들이게 했다. 1294년과 1295년, 언드라시와 토마시나는 마르텔 카로이를 지지하던 귀족들을 공격했다.
1296년, 페넨나가 사망하자 언드라시는 오스트리아 알브레히트 1세 공작의 딸 아그네스와 재혼했다. 1297년, 알브레히트 1세의 지원을 받은 언드라시는 차크 마테 영주가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고 쾨세그, 포조니(현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를 탈환했다. 1298년 7월 2일, 괼하임에서 아돌프 폰 나사우와 전투를 벌이던 알브레히트 1세에게 지원군을 보냈다. 같은 해 8월, 페슈트에서 언드라시 3세의 왕권 확립을 위한 의회가 열렸다.
1300년 8월, 교황 보니파시오 8세로부터 에스테르곰 대주교로 임명된 그레고리 비츠케이는 카로이 로베르트를 헝가리 왕위 계승자로 선언했다. 스플리트에 도착한 카로이 로베르트는 크로아티아 지지 세력과 함께 자그레브를 점령했다. 언드라시는 건강 악화로 인해 자그레브 탈환 계획을 포기했고, 1301년 1월 14일 부다 성에서 사망했다. 언드라시의 사망으로 아르파드 왕조는 막을 내렸다.
2. 1. 어린 시절 (1265년경–1278년)
언드라시 3세는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서 태어났다.[3] 아버지 우토쉴뢰트 이슈트반(Utószülött István, 유복자 이슈트반)은 헝가리 국왕 언드라시 2세의 막내 아들이며, 언드라시 2세가 죽은 후에 태어났다. 어머니 모로시니 토마시나는 베네치아 귀족의 딸이었으며,[4] 1272년에 아버지 이슈트반이 사망한 후 언드라시는 친척들과 함께 베네치아에서 교육을 받았다. 아버지 이슈트반은 베아트리체 데스테와 헝가리의 언드라시 2세의 세 번째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언드라시 2세의 두 형인 헝가리의 벨라 4세와 할리치의 콜로만은 베아트리체 데스테가 간통했다고 비난했고 사후 스티븐을 적자로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언드라시의 정확한 출생년도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역사가 티보르 알마시, 귈러 크리스토, 아틸라 졸도스의 주장에 따르면 그는 1265년경에 태어났다.1278년 헝가리 서부를 거점으로 하는 귀족 쾨세기 야노시에 의해 언드라시는 헝가리로 초청받았다. 헝가리에 도착한 언드라시는 슬라보니아의 통치권을 요구했지만, 사촌 라슬로 4세에 의해 언드라시의 요구는 거부되었다. 요구가 기각된 후 언드라시는 베네치아로 귀국했다.
1290년 초, 쾨세기 야노시와 에스테르곰 대주교 Lodomer|로도메르영어는 언드라시를 헝가리로 초청하여, 파문을 선고받은 라슬로 4세를 대신하여 그를 국왕으로 옹립하려 시도했다. 언드라시는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헝가리 귀족 하호트 아르놀드에게 붙잡혀, 오스트리아 공작알브레히트에게 넘겨졌다.
2. 2. 왕위 주장 (1278년–1290년)
1278년 쾨세기 이반(Kőszegi Iván)의 요청으로 헝가리를 방문했다. 언드라시는 헝가리 정부에 슬라보니아 통치권을 요구했지만, 조카인 라슬로 4세 국왕에 의해 거절당했다. 요구가 기각되자 언드라시는 베네치아로 귀국했다.[8]1290년 초, 에스테르곰 대주교 로도메르(Lodomér)는 파문당한 라슬로 4세를 대신하여 언드라시를 국왕으로 옹립하려 했다. 언드라시는 대주교의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헝가리 귀족 허호트 어르놀드(Hahót Arnold)에게 생포되어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1세에게 넘겨져 빈으로 이송되었다.[8]

언드라시는 1278년 쾨세기 이반의 초청으로 처음 헝가리에 왔는데, 쾨세기는 언드라시를 러슬로 4세에 대항하여 이용하려 했다. 언드라시는 왕족 중 왕위를 이을 유일한 남성이었으며, "슬라보니아, 달마티아 및 크로아티아 공작" 칭호를 사용하며 발라톤 호까지 진군했다. 그러나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가을에 베네치아로 돌아갔다.
1290년 초, 언드라시는 다시 헝가리로 돌아왔다. 에스테르곰 대주교인 로도머가 쾨세기 이반의 도움을 받아 파문된 러슬로 4세를 폐위시키려 언드라시를 헝가리에 오도록 촉구했다. 그러나 언드라시가 성공하기 전에 쾨세기의 적이었던 아르노트 3세 하호트가 그를 슈트리고바 요새로 초대하여 체포했다. 하호트는 언드라시를 오스트리아 공작인 독일의 알베르트 1세가 감금하고 있던 비엔나로 보냈다.
2. 3. 즉위 (1290년–1293년)
1290년 7월 10일 라슬로 4세가 쿠만족에게 암살당했을 때, 라슬로는 아들이 없었다.[3][5] 라슬로의 죽음을 알게 된 언드라시는 빈에서 도망쳐 에스테르곰으로 향했고, 1290년 7월 23일 그곳에서 로도메르로부터 성 이슈트반의 왕관을 받았다. 대관식 후 헝가리 내의 성직자와 귀족들은 오부다에 모여 의회(parlamentum)를 열었고, 의회에서 결정된 사항은 "1290년 법령"으로 발포되었다.[3] 즉위 후 언드라시는 폴란드의 이노브로츠와프 공작 제모미슬의 딸 페넨나 쿠야프스카와 결혼했다.언드라시의 아버지 이슈트반은 사생아로 여겨졌기 때문에, 곧 언드라시의 통치 정통성에 의문이 제기되었고, 여러 헝가리 왕위 요구자들이 나타났다. 폴란드에서 라슬로 4세의 동생인 슬라보니아 공작 언드라시를 자칭하는 인물이 나타나 왕위를 요구했지만, 이 가짜 슬라보니아 공작 언드라시의 군대는 언드라시 3세의 지지자들에 의해 격파되었다.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의 로마 왕루돌프 1세와 로마 교황 등은 라슬로 4세의 죽음으로 아르파드 왕조가 단절되었다고 보았다.[5][6] 루돌프 1세는 헝가리가 신성 로마 제국에 속한다고 생각하여, 아들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를 헝가리 왕으로 즉위시키겠다고 선언했다.[7] 1291년 4월에는 앙주 왕가 출신 나폴리 왕카를로 2세에게 시집간 라슬로 4세의 누나 마리아가 헝가리 왕위를 주장했다. 마리아의 아들 카를로 마르텔로, 그녀의 손자 카로이 로베르트 (카로베르트, 후의 카로이 1세) 또한 헝가리 왕위를 계속해서 요구했다. 로마 교황 측은 카로이 로베르트를 헝가리 왕위 계승자로 지지했다.[5][6]
1291년 초 언드라시는 왕국 동부를 방문하여, 나지바라드(오라데아)와 줄라페헤르바르(알바율리아)에서 현지 귀족들이 개최한 의회에 참석했다. 그 후 언드라시는 잘츠부르크 대주교 콘라트와 동맹하여 오스트리아로 진군하여 승리했다.[7] 1291년 8월 26일 하인부르크에서 헝가리와 오스트리아는 평화를 체결했고, 알브레히트는 헝가리 왕위 요구를 포기했으며, 언드라시는 양국 국경에 위치한 쾨세기 가문이 영유하는 여러 성채를 해체할 것을 약속했다. 이 때문에 쾨세기 미클로시는 나폴리의 마리아를 지지하는 바보니치 가문, 프란코판 가문과 동맹하여 언드라시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언드라시는 반란을 진압하려 했지만 미클로시에게 붙잡혀 몸값을 지불해야 했다.
1293년 언드라시는 어머니 토마시나를 헝가리로 불렀다. 토마시나는 반란을 일으킨 귀족들과 협상하여 그들이 언드라시의 통치를 받아들이게 했다.
2. 4. 반란과 왕권 강화 노력 (1293년–1298년)
1293년 언드라시 3세는 어머니 토마시나를 헝가리로 불렀다. 토마시나는 반란을 일으킨 귀족들과 협상하여 그들이 언드라시 3세의 통치를 받아들이게 하는 데 성공했다. 언드라시 3세는 그녀를 크로아티아, 달마티아, 슬라보니아를 관리하도록 임명했다.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바보니치, 슈비치, 그리고 달마티아의 도시들은 언드라시 3세의 통치를 인정했다. 언드라시 3세는 헝가리 북부를 방문하여 2월에 과거의 토지 증여를 재검토하도록 명령했다. 부다로 돌아온 후, 그는 다시 아마데우스 아바를 팰러틴으로 임명했다. 8월에 언드라시 3세는 그의 사촌 콘스탄스 모로시니와 스테판 드라구틴의 아들인 시르미아의 블라디슬라프의 결혼을 주선했는데, 블라디슬라프는 이전에 헝가리에 대한 샤를 마르텔의 주장을 인정했었다.
1294년 5월 23일 롤랜드 보르사는 바라드 주교 베네딕트의 피니시 요새를 포위하여 점령했다. 언드라시 3세는 대규모 회의를 열고 보르사를 불법화했다. 역사가 아틸라 졸도스에 따르면, 그는 이 자리에서 니콜라스 쾨세기를 팰러틴으로 임명했다. 언드라시 3세는 보르사의 리바다 요새를 포위했고, 요새는 10월에 함락되기 전까지 3개월 동안 포위되었다. 언드라시 3세는 롤랜드 보르사를 라슬로 3세 칸으로 트란실바니아의 보이보데로 교체했지만, 전자는 티사 동쪽의 모든 영지를 보존했다.
크로아티아 영주 브리비르의 폴 1세 슈비치는 1295년 초에 다시 언드라시 3세에게 등을 돌리고 샤를 마르텔 진영에 합류했지만, 샤를은 8월에 사망했다. 두 달 안에 바보니치도 언드라시 3세에 반란을 일으켰다. 이듬해 초, 최근 과부가 된 언드라시 3세는 빈을 방문하여 알베르트 공작의 딸 아그네스와 결혼을 주선했다. 쾨세기들은 곧 공개적인 반란을 일으켰다. 언드라시 3세는 반군에게 선전포고를 했고, 로도메르 대주교는 그들을 파문했다. 언드라시 3세와 알베르트는 10월에 쾨세그에 있는 쾨세기들의 주요 요새를 공동으로 점령했지만, 그들을 제압할 수 없었다. 언드라시 3세의 어머니는 연말에 사망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녀의 활동에 대한 언급이 동시대 문서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언드라시 3세가 1296년에 팰러틴으로 임명한 마테 3세 차크는 1297년 말에 언드라시 3세에게 등을 돌렸다. 언드라시 3세의 확고한 지지자였던 로도메르 대주교는 같은 시기에 사망했다. 1298년 2월 초, 언드라시 3세는 빈에서 오스트리아의 알베르트를 방문하여 그를 독일 국왕 나사우의 아돌프에 대항하여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언드라시 3세는 지원군을 보냈고, 오스트리아의 알베르트는 7월 2일 굘하임 전투에서 아돌프 국왕을 격파했다.
2. 5. 말년 (1298년–1301년)
1298년 여름, 언드라시 3세는 페슈트에서 성직자, 귀족, 작센족, 세케이족, 쿠만족의 회의를 소집했다. 이 회의에서 통과된 법령 전문에는 "국왕의 나태함"이 언급되었다.[3] 이 법령은 언드라시 3세가 허가 없이 건설된 요새를 파괴하도록 허용했으며, 무력으로 토지를 점유한 자들을 처벌하도록 명령했지만, 언드라시 3세가 법령을 적용하지 않으면 파문하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3] 이 자리에서 그는 삼촌인 알베르티노 모로시니를 슬라보니아 공작으로 임명했다. 회의가 끝난 후 언드라시 3세는 아마데우스 아바, 스테판 아코시, 도미니크 라토트, 데메트리우스 발라사, 폴 세체 등 다섯 명의 유력 귀족과 공식 동맹을 맺었고, 그들은 교황과 주교에 대항하여 그를 지지할 의사가 있다고 밝혔다.1298년,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에스테르곰 대주교로 게르게이 비치케이를 임명했는데, 그는 앙주 가문의 왕위 요구자를 지지했다. 같은 해, 대귀족의 억제와 성직자 및 중소 귀족의 보호를 목적으로 다시 의회가 개최되었다. 이때 공포된 "1298년 법령"에서는 왕의 측근으로 주교와 중소 귀족 중에서 각각 2명을 선출하도록 규정했다.[3] 또한, 대귀족이 선출한 현(縣) 지사의 권한을 빼앗고, 중소 귀족 중에서 선출된 지방 판사에게 현의 행정을 위임했다.[5] 1298년 의회를 통해 국왕, 성직자, 중소 귀족이 연합하여 대귀족에 대항하는 구도가 형성되었다.[3] 의회를 중심으로 하는 군주제를 구축하려는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헝가리 내 중소 귀족의 입지는 향상되었다.[5]
에스테르곰의 대주교 겸 사도 행정관인 그레고리 비츠케이는 1299년에 열린 새로운 회의에 성직자들이 참여하는 것을 금지했다. 성직자들은 대주교의 명령을 무시했고 언드라시 3세는 그에게서 에스테르곰 주를 박탈했다.
슈비치, 쾨세기, 차크를 포함한 강력한 영주들은 나폴리의 카를로 2세에게 그의 손자인 12세의 카롤 로베르트를 헝가리로 보내 왕이 되도록 촉구했다. 어린 카롤 로베르트는 1300년 8월 스플리트에 상륙했다. 대부분의 크로아티아 및 슬라보니아 영주들과 트로기르를 제외한 모든 달마티아 도시들은 그가 자그레브로 진군하기 전에 그를 왕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쾨세기스와 마테우스 차크는 곧 언드라시 3세와 화해하여 카롤의 성공을 막았다. 언드라시 3세는 교황 보니파시오 8세가 카롤 로베르트의 모험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교황청에 사절을 보내 알렸다.
1300년 8월, 나폴리의 카롤 로베르트가 스플리트에 상륙하여 크로아티아 지지자들의 지원을 받아 자그레브를 점령했다.
한동안 건강이 좋지 않았던 언드라시 3세는 그의 적을 체포할 계획이었지만, 1301년 1월 14일 부다 성에서 사망했다. 역사가 아틸라 졸도스와 귤라 크리스토의 주장에 따르면, 언드라시 3세가 독살되었다는 당시의 소문은 증명할 수 없다.
언드라시 3세는 부다의 프란체스코회 교회에 묻혔다. 수년 후 팔라틴 스테판 아코시는 언드라시 3세를 "성 이슈트반 왕" 가문의 나무의 "마지막 황금 가지"라고 불렀는데, 언드라시 3세의 죽음으로 헝가리의 첫 번째 왕조인 아르파드 왕가가 종말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언드라시 3세의 죽음 이후 왕위를 차지하려는 다양한 경쟁자, 즉 카롤 로베르트, 보헤미아의 벤체슬라우스, 바이에른의 오토 사이의 내전이 벌어졌고 7년 동안 지속되었다. 내전은 카롤 로베르트의 승리로 끝났지만, 그는 1320년대 초까지 쾨세기스, 아바스, 마테우스 차크 및 기타 강력한 영주들과의 싸움을 계속해야 했다.
3. 가족
언드라시 3세는 언드라시 2세 사후에 태어난 아들 우토쉴뢰트 이슈트반(Utószülött István, 유복자 이슈트반)과 모로시니 토마시나 사이에서 태어났다.[8] 우토쉴뢰트 이슈트반은 이복 형 벨러 4세 등에게 사생아로 의심받기도 했다. 아버지 사후, 언드라시 3세는 베네치아의 외가 모로시니가 친척들과 함께 교육받았다.
언드라시 3세는 1290년 쿠야비의 페넨나와 결혼했다. 페넨나는 1291년 또는 1292년에 딸 엘리자베스를 낳았다.[8] 엘리자베스는 1298년 보헤미아의 벤체슬라우스 2세의 후계자 벤체슬라우스와 약혼했지만, 1305년 파혼했다. 그녀는 도미니코회 수녀가 되어 1338년 5월 5일 사망했다. 그녀는 현재 복녀 토스의 엘리자베스로 존경받고 있다.
1296년 아내 페넨나가 사망하자, 언드라시 3세는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1세의 딸 아그네스와 재혼했지만, 자녀는 없었다. 아그네스는 1280년에 태어났다. 그녀는 남편보다 오래 살았지만 재혼하지 않았고, 1364년 쾨니히스펠덴 수도원의 가난한 클라라회에서 사망했다.
언드라시 3세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부모 | 배우자 | 자녀 |
---|---|---|
참조
[1]
백과사전
Andrew III
http://www.britannic[...]
Encyclopædia Britannica
2009-04-24
[2]
웹사이트
http://www.proberten[...]
[3]
서적
ハンガリー王国の再編
[4]
서적
ドナウ・ヨーロッパ史
山川出版社
1999-03
[5]
서적
ハンガリー史 1
[6]
서적
ドナウ・ヨーロッパの形成
山川出版社
1999-03
[7]
서적
オーストリア史
彩流社
2000-05
[8]
문서
베네치아의 귀족 출신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