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로이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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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로이 1세는 카페 앙주가 출신으로, 1308년에서 1342년까지 헝가리의 왕이었다. 그는 헝가리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며 여러 차례 즉위를 시도했고, 1310년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대관식을 치르면서 공식적으로 헝가리 군주가 되었다. 그는 헝가리 통일 전쟁을 통해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했으며, 내치와 경제 개혁을 통해 헝가리의 재건에 힘썼다. 또한, 외교를 통해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를 다졌으며, 헝가리의 영토 확장을 위해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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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로이 1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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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카롤 1세 |
전체 이름 | (정보 없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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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왕 |
통치 기간 | 1301년 / 1308년 11월 27일 - 1342년 7월 16일 |
대관식 | 1301년 봄, 에스테르곰 1309년 6월 15일, 부다 1310년 8월 27일, 세케슈페헤르바르 |
선임자 | 언드라시 3세 또는 오토 |
후임자 | 러요시 1세 |
배우자 | 갈리치아의 마리아 (논쟁 중) 마리아 비톰스카 베아트릭스 폰 룩셈부르크 엘주비에타 워키에토크브나 |
왕가 | 카페 앙주 가문 |
아버지 | 카를로 마르텔로 단주 |
어머니 | 클레멘시아 폰 합스부르크 |
출생일 | 1288년 |
사망일 | 1342년 7월 16일 |
사망 장소 | 비셰그라드 |
매장 장소 | 세케슈페헤르바르 대성당 |
종교 | 로마 가톨릭교회 |
자녀 | |
자녀 정보 | 카타지나 헝가르스카 공주 러요시 1세 안드레아 이슈트반 |
2. 생애
카페 앙주가 출신의 앙주 마르텔 카로이의 아들이자 나폴리 왕국 군주 카를로 2세의 손자이다. 아버지 사후 교황 보니파시오 8세의 지지를 받아 헝가리 왕위를 주장했으나, 아르파드 왕조 단절 후 언드라시 3세, 바츨라프 3세, 오토 등 여러 경쟁자와의 복잡한 계승 분쟁을 겪었다.
1310년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정식으로 대관식을 치르고 왕위에 올랐으나, 왕국 내 강력한 귀족들의 도전에 직면했다. 즉위 초기는 이들 귀족 세력을 제압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통일 전쟁 과정이었으며, 특히 1312년 로즈고니(Rozgony, 현재 슬로바키아 로자노프체) 전투에서의 승리는 그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통일 이후에는 중앙 집권 강화를 위해 법률 정비, 귀족 권한 제한, 왕실 직속 관리 임명 및 포상 제도 등을 실시했다. 경제적으로는 순도 높은 금화 발행 등을 통해 재정을 안정시키고 인플레이션을 극복하려 노력했다.
대외적으로는 발칸반도에서 약화된 헝가리의 영향력을 회복하려 했으나 왈라키아와의 1330년 포사다 전투(Posada) 패배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반면, 1335년 비셰그라드에서 폴란드, 보헤미아 국왕과 회의를 열어 합스부르크 가에 대항하는 동맹을 구축하는 등 중부 유럽 외교에서는 성과를 거두었다.
아들 러요시 1세가 헝가리 왕국과 나폴리 왕국을 통합 통치하기를 원했으나 교황 등의 반대로 이루지 못했다. 1342년 7월 16일 비셰그라드에서 사망하여 세케슈페헤르바르에 묻혔다.
2. 1. 어린 시절과 즉위 과정 (1288년 ~ 1310년)
카로이 1세는 1288년 카페 앙주가 출신인 앙주 마르텔 카로이(Anjou Martell Károly)와 그의 아내 오스트리아의 클레멘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나폴리 왕국의 군주 카를로 2세와 헝가리의 마리아의 장남이었고, 어머니는 독일의 군주 루돌프 1세의 딸이었다. 카로이의 할머니인 헝가리의 마리아는 헝가리의 이슈트반 5세의 딸이었다.1290년 헝가리의 군주 라슬로 4세가 후계자 없이 암살되자, 그의 누이였던 마리아는 아르파드 왕조의 혈통 단절을 주장하며 헝가리 왕위를 요구했다. 그러나 헝가리 귀족들은 라슬로 4세의 먼 친척인 언드라시 3세를 왕으로 추대했다. 마리아는 1292년 자신의 헝가리 왕위 계승권을 아들 카로이 마르텔에게 넘겨주었다. 카로이 마르텔은 교황 니콜라오 4세의 지지를 받아 명목상 헝가리 왕을 칭했으나, 언드라시 3세가 실질적인 통치자였다. 크로아티아와 슬라보니아의 일부 귀족들은 카로이 마르텔을 지지하는 듯 보였으나, 실제로는 두 경쟁자 사이에서 입장을 자주 바꾸었다.
1295년 아버지 카로이 마르텔이 사망하면서, 7살의 카로이 로베르트는 헝가리 왕위 계승권을 물려받았다. 그는 장자 상속 원칙에 따라 할아버지 카를로 2세의 나폴리 왕국 계승자이기도 했지만, 카를로 2세는 카로이 로베르트의 숙부인 현명왕 로베르를 더 선호했다. 결국 1296년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카를로 2세의 결정을 승인하여 로베르를 나폴리의 후계자로 인정했고, 카로이 로베르트는 나폴리 왕위 계승에서 제외되었다. 단테 알리기에리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로베르가 나폴리 왕위를 얻기 위해 "공격할 계획과 사기"를 꾸몄다고 비판하기도 했다.[1]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대신 카로이 로베르트를 헝가리의 합법적인 왕위 계승자로 지지했다. 카로이 로베르트는 크로아티아 귀족들의 지지를 얻어 1300년 자그레브에서 크로아티아 왕으로 대관식을 올렸고, 같은 해 8월 나폴리를 떠나 달마티아로 이주했다.
1301년 아르파드 왕조의 마지막 군주 언드라시 3세가 사망하자, 카로이 로베르트는 에스테르곰으로 가서 대주교 비치케이 게르게이(Bicskei Gergely)로부터 왕관을 받고 헝가리 군주 즉위를 선언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헝가리 귀족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보헤미아와 폴란드의 왕 바츨라프 2세의 아들인 바츨라프 3세(헝가리어 이름으로는 '벤첼')를 새로운 헝가리 군주로 추대했다.
1303년 5월 31일, 로마 교황청은 카로이 로베르트가 헝가리의 합법적인 군주임을 공식적으로 선언하며 그의 정통성을 강화했다. 1304년에는 브라티슬라바 의회도 카로이 로베르트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한편, 경쟁자였던 바츨라프 3세는 1305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보헤미아와 폴란드 왕위를 계승하게 되자 헝가리 왕위를 포기하고, 하바이에른 공작 오토 3세에게 왕위를 넘겼다.
오토 3세 역시 헝가리 내에서 확고한 지지를 얻지 못하고 물러나자, 카로이 로베르트는 1309년 6월 부더에서 다시 한번 헝가리 군주로 즉위했다. 하지만 이때는 전통적인 성 이슈트반 왕관으로 대관식을 치르지 못했기 때문에, 많은 귀족들이 그의 즉위를 정식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마침내 적대 귀족으로부터 성 이슈트반 왕관을 되찾은 카로이 로베르트는 1310년 8월 27일,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정식 대관식을 거행하며 공식적인 헝가리 군주로 즉위했다. 이로써 오랜 왕위 계승 분쟁 끝에 헝가리의 왕위에 오르게 되었지만, 여전히 많은 귀족들의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2. 2. 헝가리 통일 전쟁 (1310년 ~ 1323년)

1310년 8월 27일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성관(聖冠)으로 세 번째 대관식을 치르면서 카로이 1세는 관습법에 따라 공식적인 헝가리의 군주로 즉위했다.[2] 그러나 그의 통치는 왕국의 대부분 지역에서 명목상에 불과했고, 각 지역은 마테 차크, 라슬로 칸, 쾨세기 가문 등 강력한 과두 영주들에 의해 사실상 독립적으로 통치되고 있었다.[2] 카로이는 즉위 직후부터 자신에게 적대적인 이들 귀족들과의 전쟁, 즉 왕국 통일 전쟁에 나서야 했다.
1311년 6월, 마테 차크는 부다를 포위했으나, 라슬로 칸은 국왕 지원을 거부했다.[2] 카로이는 9월에 마테 차크의 영지를 공격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2] 같은 해 우그린 차크가 사망하자 카로이는 그의 영지였던 포제 가운티와 테메슈바르(현재 루마니아 티미쇼아라) 사이의 영토를 확보할 수 있었다.[2] 또한 카샤(현재 슬로바키아 코시체) 시민들이 아마데우스 아바를 암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2] 카로이의 중재에도 불구하고 아바의 아들들은 마테 차크와 동맹을 맺고 카샤를 포위했다.[2]

1312년 6월 15일, 카로이는 로즈고니 전투(현재 슬로바키아 로자노프체)에서 아바 가문과 마테 차크의 연합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했다.[2] 이 전투는 카로이가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전투 후 카로이는 아바우이, 토르나 가운티, 샤로시 가운티 등에서 아바 가문의 주요 요새들(퓨제르, 레게츠, 무카체보(현재 우크라이나 무카체베 등)을 점령했다.[2]
이후 카로이는 마테 차크에 대한 공세를 이어가 1313년 나지솜바트(현재 슬로바키아 트르나바)를, 1315년에는 비셰그라드를 점령했지만, 마테 차크를 완전히 굴복시키지는 못했다.[2] 카로이는 1315년 초, 부다에서 남부의 테메슈바르로 궁정을 옮겼는데, 이는 남부와 동부의 과두 영주들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기 위한 전략적 조치였다.[2] 같은 해 라슬로 칸이 사망했지만 그의 아들들은 여전히 복종하지 않았다.[2]
1316년 카로이는 트란스다누비아와 슬라보니아에서 쾨세기 가문에 대한 군사 작전을 개시했다.[2] 지역 귀족들이 왕군에 합류하면서 쾨세기 가문의 세력은 남부 지역에서 빠르게 약화되었다.[2] 한편 야노스 보르샤 등이 라슬로 칸의 아들들과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6월 말 데브레첸 인근에서 도자 데브레체니가 이끄는 왕군에게 패배했다.[2] 이후 몇 달간 비하르 가운티, 졸노크 가운티 등지의 반란군 요새들이 함락되었다.[2] 같은 해 세르비아의 스테판 드라구틴이 사망하자, 카로이는 그의 아들 블라디슬라프를 지원하며 세르비아 내정에 개입했으나, 세르비아의 스테판 우로시 2세 밀루틴의 반격으로 세레엠세그를 침공당했다.[2] 카로이는 반격하여 사바 강을 건너 마초 요새를 점령했다.[2] 1317년에는 아바 가문의 잔당을 진압하고 웅바르(현재 우크라이나 우주호로드) 등을 점령했으며, 마테 차크로부터 코마롬(현재 슬로바키아 코마르노)을 빼앗았다.[2]
1319년 카로이는 트란실바니아 보이보드로 임명한 도자 데브레체니를 통해 라슬로 칸의 아들들을 격파하고, 알렉산데르 쾨치키를 통해 쾨세기 가문의 요새들을 추가로 점령했다.[2] 여름에는 세르비아를 다시 공격하여 베오그라드를 되찾고 마초 지역의 절반을 회복했다.[2]
1321년 3월 18일 가장 강력한 적수였던 마테 차크가 사망하자, 왕군은 그의 영지를 신속하게 장악했다.[2] 카로이는 직접 트렌친(현재 슬로바키아 트렌친)을 포위하여 8월 8일에 함락시켰다.[2] 약 3개월 후, 새로운 트란실바니아 보이보드 토마스 세체니가 라슬로 칸 아들들의 마지막 요새마저 점령하면서 동부 지역도 평정되었다.[2]
1322년에는 달마티아에서 시베니크와 트로기르가 카로이의 한때 주요 지지자였던 믈라덴 2세 슈비치 오브 브리비르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2] 두 도시는 또한 베네치아 공화국의 종주권을 받아들였지만, 카로이는 베네치아가 그의 신민들 사이의 분쟁에 개입하지 않도록 촉구했다.[2] 많은 크로아티아 영주(파울 2세 슈비치 오브 브리비르 포함) 또한 믈라덴에게 등을 돌렸고, 그들의 연합은 클리스에서 그를 격파했다.[2] 9월에 카로이는 크로아티아로 진군했고, 믈라덴 슈비치에 반대하는 모든 크로아티아 영주들은 크닌에서 그에게 굴복했다.[2] 믈라덴 슈비치도 카로이를 방문했지만, 국왕은 권력 있는 영주를 투옥했다.[2]
이로써 1323년경까지 카로이 1세는 헝가리 전역의 과두 영주 세력을 대부분 제압하고 왕국의 실질적인 통일과 중앙 집권 강화를 이루었다.
2. 3. 내치 (1323년 ~ 1342년)
카로이는 1323년 자신의 한 헌장에서 왕국을 "완전히 소유"하게 되었다고 선언했다.[1][2] 그 해 상반기에 그는 수도를 테메슈바르(현재 루마니아 티미쇼아라)에서 왕국의 중심부인 비셰그라드로 옮겼다.[3] 같은 해, 오스트리아 공작들은 1322년 루트비히 4세에 대항하여 카로이에게 받은 지원의 대가로 수십 년간 통치해 온 프레스부르크(현재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를 헝가리에 돌려주었다.
카르파티아산맥과 다뉴브강 하류 사이 지역에서는 1320년대 초 바사라브 1세라는 보이보드 아래 통일되었으나, 왕권은 명목상으로만 회복되었다. 바사라브는 1324년 평화 조약에서 카로이의 종주권을 인정했지만, 자신이 점령한 세베린 바나트 지역에 대한 통제권은 포기하지 않았다. 카로이는 크로아티아와 슬라보니아에서도 왕권 회복을 시도했다. 1325년, 그는 슬라보니아의 반이었던 요한 바보니치를 해임하고 미크스 아코스로 교체했다. 미크스 아코스는 왕의 승인 없이 믈라덴 2세 슈비치의 옛 성들을 점령한 지역 영주들을 복종시키려 크로아티아를 침공했으나, 1326년 크로아티아 영주 중 한 명인 이반 1세 넬리파크에게 패배했다. 이로 인해 카로이 통치 기간 동안 크로아티아에서의 왕권은 명목상으로만 유지되었다. 바보니치 가문과 쾨세기 가문은 1327년 반란을 일으켰지만, 미크스 아코스와 알렉산더 쾨치키에게 진압되었다. 반란에 대한 보복으로 슬라보니아와 트란스다누비아 지역에서 최소 8개의 반란 영주 요새가 몰수되었다.
과두 귀족(올리가르히)들에 대한 승리를 통해 카로이는 헝가리 성의 약 60%와 그에 속한 영지를 확보했다. 1323년부터 그는 이전의 토지 분배를 재검토하여 과거 왕실 영지를 되찾기 시작했다. 그의 통치 기간에는 왕실 영지가 불법적으로 취득되었는지 조사하는 특별 위원회가 설치되었다. 카로이는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영지를 영구적으로 하사하는 대신, 관리들이 직책을 맡는 동안에만 해당 직위에서 발생하는 모든 수입을 누릴 수 있는 "직책 봉토"(또는 ''명예'') 제도를 도입했다. 이 제도는 왕권의 우위를 확보하여, 카로이가 1335년 헌장에서 언급했듯이 "완전한 권력"으로 통치할 수 있게 했다. 그는 관습법을 넘어서는 결정을 내리기도 했는데, 예를 들어 딸이 남자 사촌 대신 아버지의 영지를 상속받을 수 있도록 "딸을 아들로 승격"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또한 카로이는 헝가리 교회 행정을 장악하여, 대성당 참사회의 선출권 없이 자신이 원하는 인물을 고위 성직자로 임명했다.

카로이는 왕국 내 기사도 문화 확산을 장려했다. 그는 정기적으로 토너먼트를 개최하고 "왕실 궁정 시동"과 "왕실 궁정 기사"라는 새로운 계급을 만들었다. 1326년에는 세속 기사단인 성 게오르기우스 기사단을 창설했는데, 이는 군주가 직접 세속 기사단을 창설한 최초의 사례 중 하나였다. 그는 자신의 헌장에서 밝혔듯이, 충성스러운 추종자들에게 투구 문장을 수여하여 다른 이들과 구별되도록 한 최초의 헝가리 왕이기도 했다.
카로이는 왕실 수입 행정을 개편하고 개선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화폐 주조, 독점 사업, 관세 수입을 관리하기 위해 독일, 이탈리아, 헝가리 상인들이 이끄는 5개의 새로운 "상무부"가 설립되었다. 1327년에는 금 채굴에 대한 왕실 독점권을 부분적으로 폐지하고, 새로 발견된 광산에서 채굴된 금으로 얻는 왕실 수입의 3분의 1을 해당 토지 소유주에게 주기로 했다. 이후 몇 년간 크렘니차(현재 슬로바키아), 바이아마레(현재 루마니아), 바이아데아리에슈(현재 루마니아) 등지에서 새로운 금광이 개발되었다. 1330년경 헝가리 광산에서는 약 1400kg의 금을 생산했는데, 이는 당시 세계 전체 생산량의 30% 이상을 차지했다. 알프스산맥 북쪽 지역에서 금화 주조는 카로이의 후원 아래 유럽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그의 플로린 금화는 피렌체의 금화를 모델로 하여 1326년에 처음 발행되었다.

내부 안정과 왕실 수입 증가는 1320년대 헝가리의 국제적 위상을 강화했다. 1327년 2월 13일, 카로이와 보헤미아의 얀 국왕은 트르나바(현재 슬로바키아)에서 프레스부르크를 점령하고 있던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었다. 1328년 여름, 헝가리와 보헤미아 연합군은 오스트리아를 침공하여 라이타강 유역에서 오스트리아 군대를 격파했다. 1328년 9월 21일, 카로이는 오스트리아의 세 공작(미남공 프리드리히, 절름발이 알베르트, 쾌활한 오토)과 평화 조약을 맺고, 그들로부터 프레스부르크와 메지무리예(현재 크로아티아)를 돌려받았다. 이듬해, 세르비아 군대가 베오그라드를 포위했지만 카로이는 이를 성공적으로 방어했다.
장인인 폴란드의 브와디스와프 1세와의 동맹은 1320년대 카로이 외교 정책의 중요한 축이었다. 튜턴 기사단과 보헤미아의 얀 국왕 연합군에게 패배한 브와디스와프 1세는 1329년 말, 아들이자 후계자인 카지미에시 3세를 비셰그라드로 보내 카로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탈리아 연대기 작가에 따르면, 당시 19세였던 카지미에시는 카로이의 궁정에 머무는 동안 왕비 폴란드의 엘주비에타의 시녀였던 클라라 자흐를 유혹했다고 한다. 1330년 4월 17일, 클라라의 아버지인 펠리치안 자흐는 칼을 들고 비셰그라드 왕궁 식당에 난입하여 왕족을 공격했다. 자흐는 카로이와 왕비에게 부상을 입히고 두 아들 러요시 1세와 앙주 공작 안드라시를 해치려 했으나, 왕실 경비병에게 살해당했다. 카로이의 보복은 매우 잔혹했다. 클라라를 제외한 펠리치안 자흐의 자녀들은 고문 끝에 살해되었고, 클라라는 입술과 여덟 손가락이 잘린 채 여러 도시의 거리를 끌려다녔다. 펠리치안의 다른 가까운 친척들(사위와 자매 포함)은 처형되었고, 7촌 이내의 먼 친척들까지 영구적인 농노 신분으로 전락했다.
카로이는 1330년 9월 왈라키아의 바사라브 1세가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지만, 헝가리 군대는 1330년 11월 9일 포사다 전투에서 왈라키아 군대에게 크게 패배했다.
1335년에는 비셰그라드에서 폴란드의 카지미에시 3세 국왕, 보헤미아의 얀 국왕과 함께 2개월에 걸친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는 헝가리와 폴란드가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항하는 동맹 관계를 수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카로이 1세는 1339년 또는 1340년에 쾨세기 가문으로부터 왕국 서부 국경의 마지막 요새들을 넘겨받도록 강요했다. 그는 강력한 지역 영주 돈치가 지배하던 거대한 졸욤주(현재 슬로바키아)를 1340년에 세 개의 작은 주로 분할했다. 이듬해 카로이는 돈치에게 졸욤의 두 요새를 멀리 떨어진 크라스나주(현재 루마니아)의 성 하나와 교환하도록 강요했다. 비슷한 시기에 세르비아의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은 시르미아를 침략하여 베오그라드를 점령했다.
카로이는 말년에 건강이 좋지 않았다. 그는 1342년 7월 16일 비셰그라드에서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먼저 부다로 옮겨져 영혼을 위한 미사가 거행되었고, 이후 세케슈페헤르바르로 옮겨져 사망 한 달 후 세케슈페헤르바르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그의 장례식에는 매형인 폴란드의 카지미에시 3세와 모라비아 변경백 카를(훗날 신성 로마 황제 카를 4세)이 참석했는데, 이는 당시 카로이의 국제적 위상을 보여주는 지표였다.
2. 4. 외교 및 대외 관계


카로이 1세는 국내 권력 기반을 다진 후, 1320년대부터 헝가리의 국제적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 적극적인 외교 정책을 펼쳤다. 그의 외교는 주변국과의 동맹 구축, 영토 확장 시도, 기존 영토에 대한 통제력 강화 등 다방면으로 전개되었다.
발칸 반도 정책 및 왈라키아와의 갈등카로이 1세는 발칸반도에서 헝가리의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으나 어려움을 겪었다. 아르파드 왕조 시기 확보했던 남부 지역(소왈라키아, 불가리아, 세르비아, 보스니아 북부 등)은 점차 반독립적인 상태가 되어 헝가리의 종주권에 반발했다. 특히 이 지역은 동방 정교회 신자가 많았는데, 가톨릭으로의 개종 시도는 반감을 더욱 증폭시켰다.
카르파티아 산맥과 하부 다뉴브 강 사이 지역에서는 1320년대 초 바사라브 1세가 세력을 통합했다. 그는 1324년 평화 조약에서 카로이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듯했으나, 세베린 반(Banate of Severin) 점령지에 대한 통제권을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카로이 1세는 1330년 9월, 바사라브 1세를 제압하기 위해 왈라키아 원정에 나섰다. 세베린 요새를 점령하고 바사라브의 거점인 쿠르테아 데 아르제슈로 진격했지만, 왈라키아 군의 초토화 전술과 험준한 지형으로 인해 퇴각해야 했다. 1330년 11월 9일, 퇴각하던 헝가리 군대는 남부 카르파티아 산맥의 좁은 길목에서 왈라키아 군의 매복 공격을 받아 포사다 전투에서 참패했다. 카로이 1세는 자신의 기사 데시데리우스 헤데르바리와 옷을 바꿔 입고 간신히 탈출했으나, 이 패배로 왈라키아는 사실상 독립하게 되었다. 카로이는 이후 왈라키아에 대한 새로운 침략을 시도하지 않았다.
크로아티아, 슬라보니아, 세르비아와의 관계크로아티아와 슬라보니아에서도 왕권 회복을 시도했다. 1325년 슬라보니아 반인 요한 바보니치를 해임하고 미크스 아코스를 임명하여 지역 영주들을 복종시키려 했으나, 1326년 크로아티아 영주 이반 1세 넬리파크에게 패배했다. 이로 인해 카로이 통치 기간 동안 크로아티아에서의 왕권은 명목상으로만 유지되었다. 바보니치 가문과 쾨세기 가문이 1327년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다.
세르비아와는 충돌과 안정을 반복했다. 1329년 세르비아 군대가 베오그라드를 포위했을 때 이를 구원했으며, 1334년에는 이전 세르비아의 습격에 대한 보복으로 세르비아를 침공하여 갈람보크(현재 세르비아의 골루바츠) 요새를 점령했다.
오스트리아와의 관계오스트리아 공작들과는 복잡한 관계를 맺었다. 1322년 루이 4세에 맞서 오스트리아 공작들을 지원한 대가로 프레스부르크(현재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를 돌려받았다. 1327년 2월에는 보헤미아의 얀 국왕과 나지솜바트(현재 슬로바키아 트르나바)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었다. 1328년 여름, 헝가리와 보헤미아 연합군은 오스트리아를 침공하여 라이타 강 전투에서 승리했고, 같은 해 9월 평화 조약을 통해 오스트리아로부터 프레스부르크와 무라쾨즈(현재 크로아티아 메지무리예)를 공식적으로 확보했다. 이후 1331년 다시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기도 했으나, 1336년에는 바보니치 가문, 쾨세기 가문과 연대한 오스트리아 공작들과 다시 적대 관계가 되었다. 카로이는 보헤미아, 폴란드와 연합하여 오스트리아를 압박했고, 1337년 평화 조약을 통해 양측이 상대방의 반역자를 비호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중부 유럽 외교: 폴란드, 보헤미아와의 동맹중부 유럽에서는 폴란드, 보헤미아와의 동맹을 중시했다. 장인인 폴란드의 브와디스와프 1세와의 동맹은 그의 외교 정책의 핵심 요소였다. 튜튼 기사단과 보헤미아의 공격을 받은 폴란드를 지원했으며, 브와디스와프 1세의 아들 카지미에시 3세가 도움을 요청하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332년에는 보헤미아의 요한과 평화 조약을 맺고 보헤미아와 폴란드 사이의 휴전을 중재했다.
1335년에는 비셰그라드에서 폴란드의 카지미에시 3세 국왕, 보헤미아의 얀 국왕과 함께 2개월에 걸친 회의를 열었다. 이 비셰그라드 회의는 헝가리, 폴란드, 보헤미아 세 나라가 합스부르크 가에 대항하는 동맹 관계를 수립하고, 빈을 우회하는 새로운 상업로를 설정하는 등 중요한 합의를 이끌어냈다. 또한 폴란드와 보헤미아 간의 영토 분쟁(슐레지엔 문제)을 중재하여 트렌친 조약의 내용을 재확인했다. 카지미에시 3세는 보헤미아의 요한에게 40만 그로셴을 지불하기로 약속했으나, 이 중 일부(12만 그로셴)는 카로이가 대신 지불했다.
1338년에는 보헤미아의 카를 모라바 변경백과 만나, 카지미에시 3세 사후 자신의 아들 러요시가 폴란드 왕위를 계승하는 것에 대한 지지를 확보했다. 1339년 7월, 카지미에시 3세는 비셰그라드를 방문하여 자신의 후계자로 여동생인 폴란드의 엘리자베스와 그녀의 아들들(즉, 카로이의 아들들)을 공식 지명했다. 카로이는 이에 대한 대가로 폴란드가 잃어버린 영토 회복을 돕고 폴란드 내정에 외국인을 등용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나폴리 왕국과의 관계나폴리 왕국과의 관계에도 공을 들였다. 카로이 1세는 자신의 아들 러요시가 헝가리와 나폴리 왕국을 하나의 국가로 통합하기를 원했다. 1333년 나폴리를 방문하여 숙부인 로베르 국왕과 협상하여, 자신의 둘째 아들 앤드루를 로베르의 손녀이자 후계자인 조안나와 약혼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헝가리와 나폴리의 통합 계획은 교황과 베네치아 공화국의 견제로 인해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오스만 제국의 부상카로이 1세의 통치 말기에는 오스만 제국이 소아시아를 넘어 유럽 남동부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지만, 당시 발칸반도의 국가들은 내부 문제와 상호 견제로 인해 이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3. 가족
카로이 1세의 아버지는 살레르노의 카를 마르텔이며, 어머니는 합스부르크의 클레멘티아이다. 친할아버지는 나폴리의 카를 2세, 친할머니는 헝가리 출신 마리아이다. 외할아버지는 독일의 루돌프 1세, 외할머니는 호엔베르크의 게르트루드이다.
카로이 1세는 세 번 결혼했다. 첫 번째 부인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갈린다. 1308년경 작성된 《익명 작가의 동유럽 묘사》와 카로이 본인이 1326년 헌장에서 언급한 내용을 근거로, 역사가 귈러 크리스토는 카로이가 1305년 말이나 1306년 초에 갈리치아의 레오 2세의 딸 마리아와 결혼했다고 주장한다. 반면 폴란드 학자 스타니스와프 스로카는 레오 1세(1292년생 추정)가 카로이의 장인이 될 수 없다는 점 등을 들어 이 주장을 반박하고, 이전 학설대로 비톰의 마리아가 첫 부인이라고 본다. 비톰의 마리아는 실롱스크 피아스트 왕조 출신으로, 비톰의 카시미르 공작의 딸이다. 《조명 연대기》 역시 카로이의 첫 부인을 "폴란드 민족 출신"이자 "카시미르 공작의 딸"인 마리아로 기록하고 있다. 결혼 시기에 대해서도 스로카는 1306년을, 크리스토는 1311년 전반기를 주장한다. 첫 부인의 사망 시기는 《조명 연대기》에는 1317년 12월 15일로 기록되어 있으나, 1318년 7월 12일자 왕실 헌장에는 여전히 그녀가 살아있는 것으로 언급되어 있어 정확한 시점은 불분명하다.
카로이의 두 번째 부인은 룩셈부르크의 베아트리체로,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7세의 딸이자 보헤미아의 요한 왕의 여동생이었다. 두 사람은 1319년 2월 말 이전에 결혼했으나, 베아트리체는 같은 해 11월 초에 아이를 낳다가 사망했다. 아이 역시 함께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세 번째 부인은 엘리자베스로, 폴란드 왕 브와디스와프 1세의 딸이다. 1306년경 태어난 그녀는 1320년 7월 6일에 카로이와 결혼했다.
카로이와 세 번째 부인 엘리자베스 사이에서는 다섯 아들이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 카로이 (1321년 출생, 같은 해 또는 1323년 6월 사망)
- 라슬로 (1324년 출생, 1329년 사망) - 보헤미아의 안나와 약혼했었음.
- 러요시 1세 (1326년 출생, 1382년 사망) - 헝가리 및 폴란드 국왕.
- 안드라스 (1327년 출생, 1345년 사망) - 칼라브리아 공작.
- 이슈트반 (1332년 출생, 1354년 사망) - 슬라보니아 공작.
카로이에게 딸이 있었는지 여부는 명확하지 않으나, 두 명의 딸이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역사가 즈수자 테케는 이들이 첫 부인 비톰의 마리아 소생이라고 주장하지만, 동시대 기록에는 마리아가 자녀 없이 사망했다고 나온다. 귈러 크리스토는 《조명 연대기》 삽화를 근거로 엘리자베스가 딸 둘을 포함해 다섯 자녀를 낳았다고 주장한다. 장녀로 추정되는 카타르지나는 1320년대 초에 태어나 스비드니차의 하인리히 2세 공작과 결혼했고, 그들의 딸 안나는 부모 사후 헝가리 왕궁에서 자랐다. 이는 카로이와 엘리자베스가 안나의 조부모였음을 시사한다. 역사가 카지미에시 야신스키는 트로파우의 볼레슬라프 2세와 결혼한 엘리자베스 역시 카로이의 딸이라고 주장하는데, 만약 사실이라면 그녀는 1330년경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카로이에게는 사생아 아들 콜로만도 있었다. 1317년 초에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거르케 차크의 딸이었다. 콜로만은 1336년에 죄르 주교로 선출되었다.
4. 평가
카로이는 종종 자신의 주요 목표가 왕국의 "고대 좋은 조건의 회복"이라고 선언했다. 그의 문장에는 아버지 가문의 문양과 함께 헝가리의 첫 번째 왕가와의 연결성을 나타내는 "아르파드 줄무늬"가 결합되어 있었다.
카로이 1세는 재위 기간 동안 분열되었던 헝가리를 재통일하고 행정 및 재정 개혁을 도입하는 등 국가 안정에 기여했다. 학자 브라이언 카틀리지는 그가 아들인 러요시 1세에게 "탄탄한 재무 상태와 효과적인 조세 제도"를 물려주었다고 평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 러요시 1세의 업적이 워낙 뛰어나 카로이 1세의 명성은 상대적으로 가려진 측면이 있다.
카로이 1세의 통치에 대한 유일한 동시대 기록은 그에게 적대적인 프란체스코회 수도사에 의해 작성되었다. 이 기록은 카로이 1세가 국가를 재통일한 긍정적인 업적보다는 통치 기간 중 발생한 부정적인 사건들을 더 상세히 다루었다. 특히 펠리치안 자흐가 왕족 암살을 시도한 사건 이후 국왕이 보인 이례적인 잔혹함은 그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프란체스코회 수도사는 카로이 1세가 왈라키아의 바사라브에게 패배한 것을 이러한 잔혹함에 대한 신의 징벌로 해석하기도 했다.
참조
[1]
서적
The Divine Comedy
[2]
서적
The Hungarian Illuminated Chronicle
[3]
서적
The Hungarian Illuminated Chroni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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