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숙동맹과 언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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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엄숙 동맹과 언약은 1643년 잉글랜드 내전 중 잉글랜드 의회와 스코틀랜드 간에 체결된 조약이다. 잉글랜드 의회가 스코틀랜드의 군사적 지원을 받는 대가로 스코틀랜드의 장로교 체제를 잉글랜드에 도입하고, 가톨릭과 성공회를 근절하겠다는 내용을 담았다. 이 조약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에서 많은 사람들의 서명을 받았으나, 잉글랜드 내 종교적 갈등 심화와 왕정복고 이후 폐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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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숙동맹과 언약 | |
---|---|
기본 정보 | |
유형 | 맹약 |
체결일 | 1643년 |
위치 |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
목표 | 종교적 통일 정치적 동맹 |
서명 당사자 | 스코틀랜드 교회 잉글랜드 의회 |
관련 인물 | 알렉산더 헨더슨 새뮤얼 러더퍼드 존 밀턴 |
역사적 맥락 | |
배경 | 청교도 혁명 스코틀랜드 국민 언약 |
주요 조항 | 장로교 확립 가톨릭교와 성공회 근절 의회 권한 강화 |
영향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스코틀랜드 교회의 강화 잉글랜드 내전의 지속 |
내용 요약 | |
주요 내용 |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종교 개혁 및 보존 장로교 원칙에 따른 종교 개혁 추진 왕과 의회의 권한 균형 공공의 평화와 안전 추구 |
결과 및 유산 | |
결과 | 찰스 1세 처형 올리버 크롬웰의 집권 왕정복고 이후 폐기 |
유산 | 스코틀랜드 교회의 정체성 확립 장로교 신앙의 확산 종교적 자유와 정치적 권리에 대한 논쟁 지속 |
2. 잉글랜드 내전 발발과 스코틀랜드와의 동맹 (제1차 잉글랜드 내전)
1642년부터 잉글랜드 내전이 발발하자, 왕당파가 우세한 상황이었다. 이에 의회파는 스코틀랜드와의 동맹을 통해 전황을 반전시키고자 했다. 특히 의회파의 실력자였던 존 핌은 스코틀랜드와의 동맹을 적극 추진하였다.[3][4]
찰스 1세가 가톨릭 국가인 아일랜드와 손을 잡고 스코틀랜드를 침공하려 한다는 음모가 발각되면서, 스코틀랜드 내에서는 가톨릭에 대한 공포감이 커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가일 후작 아치볼드 캠벨은 해밀턴 공작제임스 해밀턴의 반대를 물리치고 잉글랜드 의회와 동맹을 추진했다.
헨리 베인을 단장으로 하는 잉글랜드 의회 대표단은 에든버러에서 스코틀랜드 동맹파와 협상을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잉글랜드 측은 군사적 지원을, 스코틀랜드 측은 종교적 계약(잉글랜드가 장로교회를 채택하는 것)을 요구하며 이견을 보였다. 하지만 베인의 중재로 "신의 말씀에 따라"라는 문구를 추가하여 양측 모두에게 유리하게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남기는 방식으로 합의가 이루어졌다.[5]
이러한 과정을 거쳐 "''엄숙 동맹과 언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잉글랜드 의회와 스코틀랜드 의회 간의 동맹을 공식화하는 문서로, 스코틀랜드의 개혁 종교 보존,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에서의 종교 개혁, 교황주의 및 주교제 근절 등을 목표로 했다. 장로교를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잉글랜드 독립파에게도 문을 열어두는 모호한 표현을 포함했다.
엄숙 동맹과 언약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양국 의회의 비준을 거쳐 발효되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서명에 참여했으며, 해밀턴 공작을 비롯한 왕당파는 고립되었다.[6] 잉글랜드 의회에서는 일부 (존 릴번 등) 이견도 있었지만, 장기 의회와 웨스트민스터 회의의 승인을 받았다.
1644년 1월, 스코틀랜드 군대는 잉글랜드 의회의 요청으로 잉글랜드에 진입했다. 양국은 양국 위원회를 설치하여 찰스 1세 국왕과의 평화 협상 또는 전쟁 수행을 위한 공동 노력을 기울였다. 비록 스코틀랜드는 제1차 잉글랜드 내전 이후 위원회에서 철수했지만, 위원회는 런던의 더비 하우스에서 계속 회의를 진행하며 '더비 하우스 위원회'로 알려지게 되었다.[2]
2. 1. 잉글랜드 내전의 배경
1642년부터 시작된 잉글랜드 내전은 왕당파에게 유리하게 진행되었고, 열세에 놓인 의회파는 스코틀랜드와의 제휴를 통해 전황을 바꾸기를 희망했다.[3] 특히 의회파의 실력자였던 존 핌은 스코틀랜드와의 동맹을 적극 추진했다.[4]당시 잉글랜드 의회의 개신교 지도자들은 찰스 1세 국왕과 대립하고 있었다. 의회는 아일랜드 가톨릭 군대가 왕당파 군대에 합류할 것을 우려하여 스코틀랜드의 지원을 요청했다. 장로교 언약도들은 스코틀랜드의 교회 체제를 잉글랜드에서 채택하는 조건으로 지원을 약속했다. 이는 많은 의원들이 장로교도였고, 다른 이들은 내전을 잃는 것보다 스코틀랜드와 동맹하는 것을 선호했기 때문에 잉글랜드 장기 의회의 다수에게 받아들여졌다.

중립을 지키던 스코틀랜드에는 왕당파와 의회파 모두가 접근했지만, 찰스 1세가 가톨릭의 아일랜드와 손을 잡고 스코틀랜드로 침입하려는 음모가 발각되자, 가톨릭에 대한 공포심에서 동맹파는 7월 말에 런던·웨스트민스터의 의회에 사절을 파견하여 동맹 제안을 의회파에 제시했다.[3][4]
스코틀랜드의 동맹 추진 역할은 아가일 후작 아치볼드 캠벨이었으며, 해밀턴 공작제임스 해밀턴이 많은 귀족들의 지지를 얻어 동맹에 반대했지만 부결되었고, 도시 대표와 교회로부터 지지를 받은 아가일 후작은 잉글랜드의 핌과 접촉했다. 이에 핌은 헨리 베인을 단장으로 하는 대표단을 스코틀랜드로 보냈다.[5]
8월에 에든버러에 도착한 대표단은 동맹파와 협의에 들어갔고, 군사 동맹을 요구하는 잉글랜드 측과, 종교적 계약 (잉글랜드가 국교회 대신 스코틀랜드와 같은 장로교회를 채택할 것)을 요구하는 스코틀랜드 사이에 간극이 있었다. 하지만 베인의 재치로 조문에 "신의 말씀에 따라"라는 문구를 추가하는 수정이 더해졌다. 이로써 종교에 관한 조항에서 쌍방에게 유리한 해석이 가능한 여지가 생겼지만, 문제의 임시 봉합에 불과했기에 나중에 충돌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5]
몇 차례의 흥정 끝에 "''엄숙 동맹과 언약''"이라고 불리는 문서가 작성되었다. 이는 스코틀랜드에서 개혁 종교의 보존,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가장 개혁된 교회의 본보기"에 따라 종교 개혁을 수행하고, "교황주의 [및] 주교제의 근절"을 위한 잉글랜드 의회와 스코틀랜드 의회 간의 조약이었다. 이 조약은 장로교를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았고, 특히 의회 군대에서 잉글랜드 의회 측의 또 다른 강력한 파벌인 잉글랜드 독립파에게 문을 열어두는 모호한 표현을 포함했다.
이 조약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및 아일랜드의 많은 사람들에 의해 서명되었고, 잉글랜드 장기 의회에 의해 승인되었으며, 약간의 수정과 함께 웨스트민스터 신학자 회의에 의해 승인되었다. 9월 25일에 잉글랜드 의회 양원이 비준하고, 10월 13일에 스코틀랜드도 비준함으로써 동맹이 발효되었다. 단순한 조약과는 달리 양 국민의 신에 대한 맹세라는 형태를 취했으며, 일반 남성은 서명하고 여성은 구두로 맹세했다. 스코틀랜드에서 거의 대부분이 서명에 응했으며, 해밀턴 공작을 포함한 왕당파는 고립되어 입지를 잃었다.[6]
1644년 2월에는 양국에서 선출된 대표로 구성된 양국 위원회를 설립하여 전쟁을 수행했다. 핌의 사망 이후, 헨리 베인은 올리버 신존과 함께 스코틀랜드와의 우호 유지를 위해 노력했고, 올리버 크롬웰도 양국 위원회에 참여하여 전쟁을 수행했다. 그리고 1월에 스코틀랜드에서 알렉산더 레슬리와 데이비드 레슬리가 이끄는 원군이 파견되었고, 7월의 마스턴 무어 전투에서 승리에 기여하며 내전은 전환점을 맞이했다.[6]
2. 2. 스코틀랜드의 개입
1642년부터 시작된 잉글랜드 내전은 왕당파에게 유리하게 진행되었고, 열세에 놓인 의회파, 특히 실력자였던 존 핌은 스코틀랜드와의 제휴를 통해 전황을 바꾸기를 희망했다.[3] 중립을 지키던 스코틀랜드에는 왕당파와 의회파 모두가 접근했지만, 찰스 1세가 가톨릭의 아일랜드와 손을 잡고 스코틀랜드로 침입하려는 음모가 발각되자, 가톨릭에 대한 공포심에서 동맹파는 7월 말에 런던·웨스트민스터의 의회에 사절을 파견하여 동맹 제안을 의회파에 제시했다.[3][4]당시 잉글랜드 의회의 개신교 지도자들은 찰스 1세 국왕과 대립하고 있었다. 의회는 아일랜드 가톨릭 군대가 왕당파 군대에 합류할 것을 우려하여 스코틀랜드의 지원을 요청했다. 장로교 언약도들은 스코틀랜드의 교회 체제를 잉글랜드에서 채택하는 조건으로 지원을 약속했다. 이는 많은 의원들이 장로교도였고, 다른 이들은 내전을 잃는 것보다 스코틀랜드와 동맹하는 것을 선호했기 때문에 잉글랜드 장기 의회의 다수에게 받아들여졌다.
스코틀랜드의 동맹 추진 역할은 아가일 후작아치볼드 캠벨이었으며, 앞선 5월 회합에서 해밀턴 공작제임스 해밀턴이 많은 귀족들의 지지를 얻어 동맹에 반대했지만 부결되었고, 도시 대표와 교회로부터 지지를 받은 아가일 후작은 잉글랜드의 핌과 접촉했다. 이에 핌은 헨리 베인을 단장으로 하는 대표단을 스코틀랜드로 보냈다. 8월에 에든버러에 도착한 대표단은 동맹파와 협의에 들어갔다.[5]
몇 차례의 흥정 끝에 "''엄숙 동맹과 언약''"이라고 불리는 문서가 작성되었다. 이는 스코틀랜드에서 개혁 종교의 보존,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가장 개혁된 교회의 본보기"에 따라 종교 개혁을 수행하고, "교황주의 [및] 주교제의 근절"을 위한 잉글랜드 의회와 스코틀랜드 의회 간의 조약이었다. 이 조약은 장로교를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았고, 특히 의회 군대에서 잉글랜드 의회 측의 또 다른 강력한 파벌인 잉글랜드 독립파에게 문을 열어두는 모호한 표현을 포함했다. 이 조약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및 아일랜드의 많은 사람들에 의해 서명되었고, 잉글랜드 장기 의회에 의해 승인되었으며, 약간의 수정과 함께 웨스트민스터 신학자 회의에 의해 승인되었다. 군사 동맹을 요구하는 잉글랜드 측과, 종교적 계약 (잉글랜드가 국교회 대신 스코틀랜드와 같은 장로교회를 채택할 것)을 요구하는 스코틀랜드 사이에 간극이 있었지만, 베인의 재치로 조문에 "신의 말씀에 따라"라는 문구를 추가하는 수정이 더해졌다. 이로써 종교에 관한 조항에서 쌍방에게 유리한 해석이 가능한 여지가 생겼지만, 문제의 임시 봉합에 불과했기에 나중에 충돌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5]
정리된 조항은 잉글랜드 대표단이 가져갔고, 개최 중이던 종교 회의 (웨스트민스터 회의)와 의회에서 검토되어, 9월 25일에 의회 양원이 비준하고, 10월 13일에 스코틀랜드도 비준함으로써 동맹이 발효되었다. 단순한 조약과는 달리 양 국민의 신에 대한 맹세라는 형태를 취했으며, 일반 남성은 서명하고 여성은 구두로 맹세했다. 스코틀랜드에서 거의 대부분이 서명에 응했으며, 해밀턴 공작을 포함한 왕당파는 고립되어 입지를 잃었다. [6]
그러나 잉글랜드 의회 측의 모든 사람이 이 협정에 만족한 것은 아니었고, 존 릴번과 같은 일부는 ''엄숙 동맹과 언약''을 시행하는 법률에 규정된 서약을 하는 대신 의회 군대를 떠나는 것을 선택했다.
이 합의는 언약도들이 제1차 잉글랜드 내전에서 의회 측에서 싸우기 위해 또 다른 군대를 잉글랜드 남부로 보낸다는 것을 의미했다. 1644년 2월에는 양국에서 선출된 대표로 구성된 양 왕국 위원회를 설립하여 헨리 베인, 올리버 신존, 올리버 크롬웰도 참여하여 전쟁을 수행했다. 1월에 스코틀랜드에서 리벤 백작 알렉산더 레슬리와 조카 데이비드 레슬리가 이끄는 원군이 파견되었고, 7월의 마스턴 무어 전투에서 승리에 기여하며 내전은 전환점을 맞이했다. 1644년 1월 스코틀랜드 군대가 잉글랜드 의회의 초청으로 잉글랜드에 진입했을 때, 의회 안전 위원회는 두 왕국을 대표하는 임시 위원회로 대체되었고, 2월 16일 의회 조례에 따라 공식적으로 양국 위원회로 구성되었다. 이 위원회의 목적은 찰스 1세 국왕에게 평화 협상을 하거나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스코틀랜드는 제1차 내전이 끝난 후 위원회에서 철수했지만, 위원회는 계속 회의를 진행했으며 이후 런던의 더비 하우스에서 회의를 열었기 때문에 더비 하우스 위원회로 알려졌다.[2] 12월에 존 핌이 사망했지만, 후임자인 베인은 신존과 함께 스코틀랜드와의 우호 유지를 위해 노력했다.[6]
2. 3. 엄숙 동맹과 언약의 체결
당시 잉글랜드 의회의 개신교 지도자들은 찰스 1세 국왕과 대립하고 있었다. 의회는 아일랜드 가톨릭 군대가 왕당파 군대에 합류할 것을 우려하여 스코틀랜드의 지원을 요청했다. 장로교 언약도들은 스코틀랜드의 교회 체제를 잉글랜드에서 채택하는 조건으로 지원을 약속했다. 이는 많은 의원들이 장로교도였고, 다른 이들은 내전을 잃는 것보다 스코틀랜드와 동맹하는 것을 선호했기 때문에 잉글랜드 장기 의회의 다수에게 받아들여졌다.[3][4]몇 차례의 흥정 끝에 "''엄숙 동맹과 언약''"이라고 불리는 문서가 작성되었다. 이는 스코틀랜드에서 개혁 종교의 보존,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가장 개혁된 교회의 본보기"에 따라 종교 개혁을 수행하고, "교황주의 [및] 주교제의 근절"을 위한 잉글랜드 의회와 스코틀랜드 의회 간의 조약이었다. 이 조약은 장로교를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았고, 특히 의회 군대에서 잉글랜드 의회 측의 또 다른 강력한 파벌인 잉글랜드 독립파에게 문을 열어두는 모호한 표현을 포함했다. 이 조약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및 아일랜드의 많은 사람들에 의해 서명되었고, 잉글랜드 장기 의회에 의해 승인되었으며, 약간의 수정과 함께 웨스트민스터 신학자 회의에 의해 승인되었다.[5]
그러나 잉글랜드 의회 측의 모든 사람이 이 협정에 만족한 것은 아니었고, 존 릴번과 같은 일부는 ''엄숙 동맹과 언약''을 시행하는 법률에 규정된 서약을 하는 대신 의회 군대를 떠나는 것을 선택했다.
이 합의는 언약도들이 제1차 잉글랜드 내전에서 의회 측에서 싸우기 위해 또 다른 군대를 잉글랜드 남부로 보낸다는 것을 의미했다. 1642년부터 시작된 내전은 왕당파에게 유리하게 진행되었고, 열세에 놓인 의회파는 스코틀랜드와의 제휴를 통해 전황을 바꾸기를 희망했다. 1644년 1월 스코틀랜드 군대가 잉글랜드 의회의 초청으로 잉글랜드에 진입했을 때, 의회 안전 위원회는 두 왕국을 대표하는 임시 위원회로 대체되었고, 2월 16일 의회 조례에 따라 공식적으로 양국 위원회로 구성되었다. 이 위원회의 목적은 찰스 1세 국왕에게 평화 협상을 하거나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스코틀랜드는 제1차 내전이 끝난 후 위원회에서 철수했지만, 위원회는 계속 회의를 진행했으며 이후 런던의 더비 하우스에서 회의를 열었기 때문에 더비 하우스 위원회로 알려졌다.[2]
중립을 지키던 스코틀랜드에는 왕당파와 의회파 모두가 접근했지만, 찰스 1세가 가톨릭의 아일랜드와 손을 잡고 스코틀랜드로 침입하려는 음모가 발각되자, 가톨릭에 대한 공포심에서 동맹파는 7월 말에 런던·웨스트민스터의 의회에 사절을 파견하여 동맹 제안을 의회파에 제시했다.[6]
스코틀랜드의 동맹 추진 역할은 아가일 후작 아치볼드 캠벨이었으며, 앞선 5월 회합에서 해밀턴 공작제임스 해밀턴이 많은 귀족들의 지지를 얻어 동맹에 반대했지만 부결되었고, 도시 대표와 교회로부터 지지를 받은 아가일 후작은 잉글랜드의 실력자였던 존 핌과 접촉했다. 이에 핌은 헨리 베인을 단장으로 하는 대표단을 스코틀랜드로 보냈다. 8월에 에든버러에 도착한 대표단은 동맹파와 협의에 들어갔고, 군사 동맹을 요구하는 잉글랜드 측과, 종교적 계약 (잉글랜드가 국교회 대신 스코틀랜드와 같은 장로교회를 채택할 것)을 요구하는 스코틀랜드 사이에 간극이 있었지만, 베인의 재치로 조문에 "신의 말씀에 따라"라는 문구를 추가하는 수정이 더해졌다. 이로써 종교에 관한 조항에서 쌍방에게 유리한 해석이 가능한 여지가 생겼지만, 문제의 임시 봉합에 불과했기에 나중에 충돌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결국, 정리된 조항은 잉글랜드 대표단이 가져갔고, 개최 중이던 종교 회의 (웨스트민스터 회의)와 의회에서 검토되어, 9월 25일에 의회 양원이 비준하고, 10월 13일에 스코틀랜드도 비준함으로써 동맹이 발효되었다. 단순한 조약과는 달리 양 국민의 신에 대한 맹세라는 형태를 취했으며, 일반 남성은 서명하고 여성은 구두로 맹세했다. 스코틀랜드에서 거의 대부분이 서명에 응했으며, 해밀턴 공작을 포함한 왕당파는 고립되어 입지를 잃었다. 추진자 핌은 12월에 사망했지만, 후임자인 베인은 올리버 신존과 함께 스코틀랜드와의 우호 유지를 위해 노력했고, 1644년 2월에는 양국에서 선출된 대표로 구성된 양 왕국 위원회를 설립하여 자신과 신존, 그리고 올리버 크롬웰도 참여하여 전쟁을 수행했다. 그리고 1월에 스코틀랜드에서 리벤 백작 알렉산더 레슬리와 조카 데이비드 레슬리가 이끄는 원군이 파견되었고, 7월의 마스턴 무어 전투에서 승리에 기여하며 내전은 전환점을 맞이했다.
2. 4. 주요 내용
잉글랜드 의회의 개신교 지도자들은 찰스 1세 국왕과 대립하고 있었다. 의회는 아일랜드 가톨릭 군대가 왕당파 군대에 합류할 것을 우려하여 스코틀랜드의 지원을 요청했다. 장로교 언약도들은 스코틀랜드의 교회 체제를 잉글랜드에서 채택하는 조건으로 지원을 약속했다. 이는 많은 의원들이 장로교도였고, 다른 이들은 내전을 잃는 것보다 스코틀랜드와 동맹하는 것을 선호했기 때문에 잉글랜드 장기 의회의 다수에게 받아들여졌다.[2]몇 차례의 흥정 끝에 "''엄숙 동맹과 언약''"이라고 불리는 문서가 작성되었다. 이는 스코틀랜드에서 개혁 종교의 보존,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가장 개혁된 교회의 본보기"에 따라 종교 개혁을 수행하고, "교황주의 [및] 주교제의 근절"을 위한 잉글랜드 의회와 스코틀랜드 의회 간의 조약이었다. 이 조약은 장로교를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았고, 특히 의회 군대에서 잉글랜드 의회 측의 또 다른 강력한 파벌인 잉글랜드 독립파에게 문을 열어두는 모호한 표현을 포함했다. 이 조약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및 아일랜드의 많은 사람들에 의해 서명되었고, 잉글랜드 장기 의회에 의해 승인되었으며, 약간의 수정과 함께 웨스트민스터 신학자 회의에 의해 승인되었다.[2]
그러나 잉글랜드 의회 측의 모든 사람이 이 협정에 만족한 것은 아니었고, 존 릴번과 같은 일부는 ''엄숙 동맹과 언약''을 시행하는 법률에 규정된 서약을 하는 대신 의회 군대를 떠나는 것을 선택했다.
이 합의는 언약도들이 제1차 잉글랜드 내전에서 의회 측에서 싸우기 위해 또 다른 군대를 잉글랜드 남부로 보낸다는 것을 의미했다. 1644년 1월 스코틀랜드 군대가 잉글랜드 의회의 초청으로 잉글랜드에 진입했을 때, 의회 안전 위원회는 두 왕국을 대표하는 임시 위원회로 대체되었고, 2월 16일 의회 조례에 따라 공식적으로 양국 위원회로 구성되었다. 이 위원회의 목적은 찰스 1세 국왕에게 평화 협상을 하거나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스코틀랜드는 제1차 내전이 끝난 후 위원회에서 철수했지만, 위원회는 계속 회의를 진행했으며 이후 런던의 더비 하우스에서 회의를 열었기 때문에 더비 하우스 위원회로 알려졌다.[2]
조약 내용은 전문과 6개 조항, 결어로 구성된다. 이 중 제1조는 잉글랜드 측에서 수정되었다.[7]
1. 공동의 적에 대항하여, 스코틀랜드 교회가 교리, 예배, 교회 훈련, 교회 통치에 있어서 개혁 종교임을 유지할 것. 하나님의 말씀과 가장 잘 개혁된 여러 교회의 예에 따라, 교리, 예배, 교회 훈련, 교회 통치에 있어서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왕국의 종교가 개혁될 것.
2. 로마 가톨릭교, 주교제, 미신, 이단, 모독의 폐지.
3. 여러 의회의 특권을 유지하고, 종교와 왕국의 보전에 있어서 국왕의 인신과 권위를 유지.
4. 계약 위반자에게 정의가 실현되도록 노력한다.
5. 1641년의 런던 조약(리폰 조약)의 준수.
6. 계약의 서명자는 상호 지원하며,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평생 동안 계약을 준수한다.
또한, 군사면에서는 잉글랜드가 매달 30000GBP를 지불하고, 그 대가로 스코틀랜드는 병력 21,000명을 의회에 제공하기로 약속했다.
3. 잉글랜드 내전의 전개와 엄숙 동맹과 언약의 영향
1645년 네이즈비 전투에서 크롬웰이 이끄는 철기대 중심의 뉴 모델 군이 왕당파에게 승리하면서 장로교회의 통일은 무산되었다. 내전 종결 후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는 동맹에서 대립 관계로 바뀌었고, 해밀턴 공작은 와이트 섬으로 도주한 찰스 1세와 1647년 화해 계약을 체결하며 2차 내전을 일으켰다. 그러나 1648년 프레스턴 전투에서 해밀턴 공작이 대패하고 처형되자, 아가일 후작이 재기하여 크롬웰과 화해하며 양국 제휴를 불안정하게나마 부활시켰다. 같은 해 1월 잉글랜드는 양국 위원회를 폐지하고, 엄숙 동맹과 언약 관련 책무를 파기했다.[9]
1649년 독립파가 찰스 1세를 처형하고 잉글랜드 공화국을 수립하자 스코틀랜드는 다시 잉글랜드와 대립했으며, 아가일 후작 등 언약파는 찰스 2세를 옹립하며 3차 내전을 일으켰다. 스코틀랜드는 엄숙 동맹과 언약 및 국민 언약 준수를 찰스 2세에게 약속받아 장로교회 확립을 꾀했으나, 크롬웰의 뉴 모델 군에게 패배(1650년 던바 전투, 1651년 우스터 전투)하고 찰스 2세가 망명하면서 스코틀랜드는 독립을 잃고 잉글랜드에 통합되었다.[10]
3. 1. 스코틀랜드 군의 참전과 전황의 변화
잉글랜드 의회의 개신교 지도자들은 찰스 1세 국왕과 대립하며, 아일랜드 가톨릭 군대가 왕당파 군대에 합류할 것을 우려하여 스코틀랜드에 지원을 요청했다. 장로교 언약도들은 스코틀랜드 교회 체제를 잉글랜드에 채택하는 조건으로 지원을 약속했고, 이는 잉글랜드 장기 의회의 다수에게 받아들여졌다. 많은 의원들이 장로교도였고, 다른 이들은 내전을 잃는 것보다 스코틀랜드와 동맹하는 것을 선호했기 때문이다.몇 차례의 흥정 끝에 "''엄숙 동맹과 언약''"이 작성되었다. 이는 스코틀랜드에서 개혁 종교의 보존,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가장 개혁된 교회의 본보기"에 따라 종교 개혁을 수행하고, "교황주의 [및] 주교제의 근절"을 위한 잉글랜드 의회와 스코틀랜드 의회 간의 조약이었다. 이 조약은 장로교를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았고, 잉글랜드 의회 측의 또 다른 강력한 파벌인 잉글랜드 독립파에게 문을 열어두는 모호한 표현을 포함했다. 조약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및 아일랜드의 많은 사람들에 의해 서명되었고, 잉글랜드 장기 의회와 웨스트민스터 신학자 회의에 의해 승인되었다.
그러나 존 릴번과 같은 일부는 ''엄숙 동맹과 언약''을 시행하는 법률에 규정된 서약을 하는 대신 의회 군대를 떠나는 것을 선택했다.
이 합의로 언약도들은 제1차 잉글랜드 내전에서 의회 측에서 싸우기 위해 또 다른 군대를 잉글랜드 남부로 보냈다. 1644년 1월 스코틀랜드 군대가 잉글랜드 의회의 초청으로 잉글랜드에 진입했을 때, 의회 안전 위원회는 두 왕국을 대표하는 임시 위원회로 대체되었고, 2월 16일 의회 조례에 따라 공식적으로 양국 위원회로 구성되었다. 이 위원회의 목적은 찰스 1세 국왕에게 평화 협상을 하거나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스코틀랜드는 제1차 내전이 끝난 후 위원회에서 철수했지만, 위원회는 계속 회의를 진행했으며 이후 런던의 더비 하우스에서 회의를 열었기 때문에 더비 하우스 위원회로 알려졌다.[2]
엄숙 동맹과 언약 체결 이후, 스코틀랜드는 조항 수정 문제로 독립파가 배제되지 않자 경계심을 갖기 시작했다. 웨스트민스터로 파견된 스코틀랜드 대표 또한 독립파의 활동에 불안과 두려움을 느꼈다. 1644년 8월, 몬트로즈 후작제임스 그레이엄이 스코틀랜드에서 왕당파 결집을 시도하여 거병하면서, 본토의 언약파는 몬트로즈 후작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며 스코틀랜드 대표의 권위는 실추되었다.[8]
1645년 네이즈비 전투에서 철기대를 중심으로 한 독립파 주도의 뉴 모델 군이 왕당파에게 승리하면서 장로교회의 통일이 무산되었다.
3. 2. 잉글랜드 내 종교적 갈등의 심화
잉글랜드 의회의 개신교 지도자들은 찰스 1세 국왕과 대립하고 있었다. 의회는 아일랜드 가톨릭 군대가 왕당파 군대에 합류할 것을 우려하여 스코틀랜드의 지원을 요청했다. 장로교 언약도들은 스코틀랜드의 교회 체제를 잉글랜드에서 채택하는 조건으로 지원을 약속했다. 이는 많은 의원들이 장로교도였고, 다른 이들은 내전을 잃는 것보다 스코틀랜드와 동맹하는 것을 선호했기 때문에 잉글랜드 장기 의회의 다수에게 받아들여졌다.몇 차례의 흥정 끝에 "''엄숙 동맹과 언약''"이라고 불리는 문서가 작성되었다. 이는 스코틀랜드에서 개혁 종교의 보존,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가장 개혁된 교회의 본보기"에 따라 종교 개혁을 수행하고, "교황주의 [및] 주교제의 근절"을 위한 잉글랜드 의회와 스코틀랜드 의회 간의 조약이었다. 이 조약은 장로교를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았고, 특히 의회 군대에서 잉글랜드 의회 측의 또 다른 강력한 파벌인 잉글랜드 독립파에게 문을 열어두는 모호한 표현을 포함했다. 이 조약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및 아일랜드의 많은 사람들에 의해 서명되었고, 잉글랜드 장기 의회에 의해 승인되었으며, 약간의 수정과 함께 웨스트민스터 신학자 회의에 의해 승인되었다.
그러나 잉글랜드 의회 측의 모든 사람이 이 협정에 만족한 것은 아니었고, 존 릴번과 같은 일부는 ''엄숙 동맹과 언약''을 시행하는 법률에 규정된 서약을 하는 대신 의회 군대를 떠나는 것을 선택했다.
이 합의는 언약도들이 제1차 잉글랜드 내전에서 의회 측에서 싸우기 위해 또 다른 군대를 잉글랜드 남부로 보낸다는 것을 의미했다. 1644년 1월 스코틀랜드 군대가 잉글랜드 의회의 초청으로 잉글랜드에 진입했을 때, 의회 안전 위원회는 두 왕국을 대표하는 임시 위원회로 대체되었고, 2월 16일 의회 조례에 따라 공식적으로 양국 위원회로 구성되었다. 이 위원회의 목적은 찰스 1세 국왕에게 평화 협상을 하거나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스코틀랜드는 제1차 내전이 끝난 후 위원회에서 철수했지만, 위원회는 계속 회의를 진행했으며 이후 런던의 더비 하우스에서 회의를 열었기 때문에 더비 하우스 위원회로 알려졌다.[2]
3. 3. 양국 위원회
1644년 1월 스코틀랜드 군대가 잉글랜드 의회의 초청으로 잉글랜드에 진입했을 때, 의회 안전 위원회는 두 왕국을 대표하는 임시 위원회로 대체되었고, 2월 16일 의회 조례에 따라 공식적으로 양국 위원회로 구성되었다.[2] 이 위원회의 목적은 찰스 1세에게 평화 협상을 하거나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었다.[2] 스코틀랜드는 제1차 잉글랜드 내전이 끝난 후 위원회에서 철수했지만, 위원회는 계속 회의를 진행했으며 이후 런던의 더비 하우스에서 회의를 열었기 때문에 더비 하우스 위원회로 알려졌다.[2] 1648년 1월 잉글랜드는 양국 위원회를 폐지했다.[9]4. 찰스 1세의 인게이지먼트와 제2차 잉글랜드 내전
찰스 1세는 제1차 잉글랜드 내전에서 패배한 후, 언약도와 엄숙동맹을 맺었다. 이 협약을 통해 찰스 1세는 잉글랜드에 3년 동안 장로교를 강요하는 대가로, 언약도들이 잉글랜드 독립파에 맞서 제2차 잉글랜드 내전에서 그를 지지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1648년 프레스턴 전투에서 왕당파와 언약도들은 패배했고, 찰스 1세는 1649년 1월 처형되었다.[8]
1645년, 철기대를 중심으로 한 독립파 주도의 뉴 모델 군이 네이즈비 전투에서 왕당파에게 승리하면서 장로교회의 통일은 무산되었다. 내전 종결 후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는 동맹 관계에서 대립 관계로 바뀌었고, 재기를 노리던 해밀턴 공작은 언약파의 불만 세력과 귀족들을 규합하여, 와이트 섬으로 도주한 찰스 1세와 1647년 12월 화해 계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1648년 8월 프레스턴 전투에서 해밀턴 공작이 이끄는 스코틀랜드 군이 대패하고 처형되자, 아가일 후작이 재기하여 해밀턴 파를 추방하고 크롬웰과 화해하여 불안정하나마 양국의 제휴를 부활시켰다. 같은 해 1월 잉글랜드는 양 왕국 위원회를 폐지하고, 엄숙 동맹과 언약에서 비롯된 책무 또한 파기되었다.[9]
4. 1. 찰스 1세의 인게이지먼트
왕당파가 제1차 내전에서 패배한 후, 찰스 1세는 다수의 언약도와 엄숙동맹을 맺었다. 이는 찰스 1세가 잉글랜드에 3년 동안 장로교를 강요하는 대가로, 언약도들이 상호 적대 세력인 잉글랜드 독립파에 맞서 제2차 잉글랜드 내전에서 그를 지지하기로 합의한 것이었다. 1648년 왕당파와 언약도들은 프레스턴 전투에서 패배했고, 찰스 1세는 1649년 1월 처형되었다.4. 2. 제2차 잉글랜드 내전 발발
찰스 1세는 제1차 잉글랜드 내전에서 패배한 후, 언약도와 "엄숙동맹"을 맺었다. 이 협약을 통해 찰스 1세는 잉글랜드에 3년 동안 장로교를 강요하는 대가로 언약도들이 잉글랜드 독립파에 맞서 제2차 잉글랜드 내전에서 그를 지지하기로 합의했다.[8]1645년, 철기대를 중심으로 한 독립파 주도의 뉴 모델 군이 네이즈비 전투에서 왕당파에게 승리하면서 장로교회의 통일은 무산되었다. 내전 종결 후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는 동맹 관계에서 대립 관계로 바뀌었고, 재기를 노리던 해밀턴 공작은 언약파의 불만 세력과 귀족들을 규합하여, 와이트 섬으로 도주한 찰스 1세와 1647년 12월 화해 계약을 체결하며 Second English Civil War|제2차 잉글랜드 내전영어을 발발시켰다. 그러나 1648년 8월 프레스턴 전투에서 해밀턴 공작이 이끄는 스코틀랜드 군이 잉글랜드로 침입했다가 대패하고 처형되자, 아가일 후작이 재기하여 해밀턴 파를 추방하고 크롬웰과 화해하여 불안정하나마 양국의 제휴를 부활시켰다. 같은 해 1월 잉글랜드는 양 왕국 위원회를 폐지하고, 엄숙 동맹과 언약에서 비롯된 책무 또한 파기되었다.[9]
5. 찰스 2세와 제3차 잉글랜드 내전
1649년 찰스 1세가 처형되고 잉글랜드 공화국이 수립되자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와 다시 대립했다. 아가일 후작 등 언약파는 왕당파에 가담하여 찰스 2세를 옹립했다. 이 과정에서 엄숙 동맹과 언약이 다시 거론되었고, 스코틀랜드는 찰스 2세에게 엄숙 동맹과 언약 및 국민 언약 준수를 약속받아 장로교회 확립을 꾀했다. 그러나 크롬웰이 이끄는 뉴 모델 군에 패배하고 찰스 2세가 망명하면서, 스코틀랜드는 독립을 잃고 잉글랜드에 통합되었다.[10]
5. 1. 찰스 2세의 즉위와 브레다 조약
교회당이 실패로 인해 신뢰를 잃은 인게이저스로부터 권력을 빼앗은 후, 새로운 스코틀랜드 언약도 정부는 망명 중이던 찰스 2세를 설득하여 브레다 조약의 ''엄숙 동맹과 언약'' 조항에 동의하게 했다.[1] 그러나 1651년 우스터 전투에서 왕당파와 스코틀랜드 군대가 패배하면서 국경 양쪽에서 장로교도들의 권력이 무너지면서 ''엄숙 동맹과 언약''의 효력은 끝났다.[1]5. 2. 제3차 잉글랜드 내전과 스코틀랜드의 패배
교회당이 실패로 인해 신뢰를 잃은 인게이저스로부터 권력을 빼앗은 후, 새로운 스코틀랜드 언약도 정부는 망명 중이던 찰스 2세를 설득하여 브레다 조약의 ''엄숙 동맹과 언약'' 조항에 동의하게 했다. 그러나 1651년 우스터 전투에서 왕당파와 스코틀랜드 군대가 패배하면서 국경 양쪽에서 장로교도들의 권력이 무너지면서 ''엄숙 동맹과 언약''의 효력은 끝났다.[8]1649년 찰스 1세를 처형하고 잉글랜드 공화국을 수립한 독립파에 대항하여, 스코틀랜드는 아가일 후작 등 언약파가 왕당파에 가담하여 찰스 2세를 옹립하며 Third English Civil War영어이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엄숙 동맹과 언약이 다시 거론되었고, 스코틀랜드는 엄숙 동맹과 언약 및 국민 언약의 준수를 찰스 2세에게 약속받아 장로교회 확립을 꾀했으나, 크롬웰이 이끄는 뉴 모델 군에게 패배(1650년 던바 전투, 1651년 우스터 전투)하고, 찰스 2세가 망명하면서 스코틀랜드 역시 독립을 잃었다. 결국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에 통합되었다.[10]
6. 왕정복고와 엄숙 동맹과 언약의 폐기
왕정복고 이후 잉글랜드 의회는 1661년 반역법을 통과시켰는데, 이 법은 "엄숙 동맹과 언약"을 불법으로 규정했다. 공직에 있는 모든 사람은 이를 포기해야 했으며, 사형 집행인에 의해 불태워져야 했다.[1]
6. 1. 잉글랜드 왕정복고
왕정복고 이후 잉글랜드 의회는 1661년 반역법을 통과시켰는데, 이 법은 "엄숙 동맹과 언약"이 불법이며, 공직에 있는 모든 사람이 이를 포기해야 하며, 사형 집행인에 의해 불태워져야 한다고 선언했다.[1]6. 2. 엄숙 동맹과 언약의 폐기
왕정복고 이후 잉글랜드 의회는 1661년 반역법을 통과시켰는데, 이 법은 "엄숙 동맹과 언약"이 불법이며, 공직에 있는 모든 사람이 이를 포기해야 하며, 사형 집행인에 의해 불태워져야 한다고 선언했다.참조
[1]
백과사전
Solemn League and Covena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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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19
[2]
웹사이트
Committee of Both Kingdoms ("Derby House Committee"): 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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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tional Archi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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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松村、P69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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浜林、P137 - P138、今井、P203、田村、P202、ウェッジウッド、P239 - P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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浜林、P138 - P140、田村、P202 - P203、ウェッジウッド、P240 - P241、P249 - P250、P256 - P257
[6]
문서
浜林、P140 - P141、今井、P203 - P204、田村、P204、P207、ウェッジウッド、P258、P276 - P282、P288 - P291、P298 - P30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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田村、P204 - P205
[8]
문서
田村、P206 - P208、ウェッジウッド、P284 - P285、P288、P302 - P303、P373 - P37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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浜林、P181 - P183、田村、P208 - P2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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浜林、P201 - P204、田村、P212 - 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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