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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해즐릿 헌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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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드워드 해즐릿 헌터는 1843년 아일랜드에서 태어나, 1860년대에 일본 요코하마에 정착한 사업가이다. 1873년 고베에 헌터 상회를 설립하고, 1881년 오사카에 오사카 철공소를 세워 조선업을 시작했다. 헌터는 쌀 수출, 벽돌, 비료 등 다양한 사업을 확장하여 '헌터 재벌'을 형성했으며, 고베시 발전에 기여했다. 1909년 욱일장을 수여받았으며, 1917년 사망 후 고베 시립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헌터의 저택은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고, 2020년에는 그의 초상 사진이 발견되었다.

2. 이력


  • 1867년 - 요코하마에 일본 방문.
  • 1873년 - 고베에 헌터 상회(E.H. Hunter & Co.)를 설립.
  • 1881년 - 오사카 安治川|아지강일본어 연안에 오사카 철공소(Osaka Iron Works)를 설립.

3. 생애

에드워드 해즐릿 헌터는 1843년 2월 3일, 아일랜드 북부 얼스터의 런던데리에서 태어났다.[2] 20세 무렵 아시아를 목표로 호주, 홍콩, 상하이를 거쳐 1867년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하여 무역업에 종사했다.[2] 이후 오사카로 이주하여 일본인 여성 히라노 아이코와 결혼하고 가정을 꾸렸으며, 슬하에 여러 자녀를 두었다.[2]

1873년 고베에 E. H. 헌터 상회(E. H. Hunter & Co.)를 설립하며 본격적인 사업 활동을 시작했고, 1877년 세이난 전쟁 당시 군수 물자를 취급하며 사업 기반을 다졌다. 1881년에는 오사카 아지가와강변에 오사카 철공소를 설립하여 조선업에 진출했는데, 이 철공소는 훗날 히타치 조선으로 발전하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헌터는 철공, 조선업 외에도 벽돌, 비료, 담배, 정미, 손해보험 등 다양한 사업을 확장하여 '헌터 재벌'이라 불릴 정도의 기업 집단을 형성했으며, 일본 최초로 노동자를 위한 상해보험 제도를 도입하기도 했다. 또한 1882년부터 헌터 상회를 통해 을 수출했는데, 연간 수출량이 1만ton에 달하기도 했다.

그는 사업 경영 외에도 고베시 발전에 기여하고 에도 막부 말기에 체결된 불평등 조약 개정을 위해 노력하는 등 공공 활동에도 참여했다. 일본 근대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09년 일본 정부로부터 외국인으로서는 이례적으로 훈5등쌍광욱일장을 받았다. 1917년 6월 2일 고베에서 74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3. 1. 일본 정착과 가족

에드워드 해즐릿 헌터는 조앤 헌터의 일곱째 아들로 1843년 2월 3일, 아일랜드 북부 얼스터의 런던데리에서 태어났다.[2] 20세 무렵 아시아를 목표로 범선을 타고 호주, 홍콩, 상하이를 거쳐 1867년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하여 무역 사업에 종사했다.[2] 이후 오사카로 이주했으며, 외국인 거류지에 출입하던 중 오사카 가와구치 거류지 근처에 살던 약종상 히라노 츠네스케의 딸 아이코와 결혼했다.[2]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은 출생 직후 사망했다.[2] 1871년(메이지 4년)에 태어난 아들 리처드를 적자로 삼았으며, 호적에는 어머니의 성을 따라 히라노 류타로(平野 柳太郎)로 이름을 올렸다가 후에 헌터 류타로로 개명했다.[2] 이어서 장녀 후지코가 태어났다.[2] 1884년(메이지 17년) 2월 29일에는 아들 한스 헌터가 태어났으며, 그 역시 후에 헌터 한사부로로 개명하고 사업가로 활동했다.[2] 그 아래로 에드워드 헌터(에이토쿠)가 태어났다.[2] 자녀들은 모두 처음에는 일본 국적이었다.[2]

3. 2. E. H. 헌터 상회 설립과 사업 확장

1867년 요코하마에 도착한 헌터는 1873년 고베에 E. H. 헌터 상회(E. H. Hunter & Co.)를 설립했으며, 1874년에는 외국인 거류지에 정식으로 상회를 열었다. 1877년 발발한 세이난 전쟁 당시 사이고 다카모리 군에 군수 물자를 공급하면서 사업의 기초를 다졌다.

1881년에는 오사카의 아지가와강변에 아들 히라노 류타로의 명의로 오사카 철공소(Osaka Iron Works)를 설립했다. 이 철공소는 선박의 건조 및 수리뿐만 아니라 육상용 기관 설비, 교량 건설까지 사업 영역을 넓혔다. 1907년 전후에는 미쓰비시 조선, 가와사키 조선에 이어 일본 3대 조선소로 성장했으며, 훗날 히타치 조선으로 발전하는 기반이 되었다. 오사카 철공소는 1908년 일본 최초의 국산 트롤 어선을 건조했으며, 이후 일본 내 트롤 어선 대부분을 생산하게 되었다. 이러한 트롤 어업 방식의 실용화를 위해 나가사키현 고토 열도 해역에서 노력한 인물 중에는 토머스 블레이크 글러버의 아들 구라바 도미사부로도 있었다.

헌터는 철공 및 조선업 외에도 벽돌, 비료, 담배, 정미, 손해보험 등 다양한 분야로 사업을 확장하여 '헌터 재벌'이라고 불릴 정도의 기업 집단을 형성했다. 또한, 조선소 노동자들을 위해 일본 최초로 상해보험 제도를 도입하기도 했다. 1882년부터는 헌터 상회를 통해 (정미) 수출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는데, 연간 수출량이 1만ton에 달했으며, 이 쌀이 런던 곡물 시장의 표준미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3. 3. 고베 발전에 기여와 말년

E. H. 헌터는 여러 기간산업을 경영하면서 고베시 발전을 위한 공공 사업에도 기여했다. 에도 막부 말기에 체결된 불평등 조약 개정을 위해 영국 본국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등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일본 근대화에 오랫동안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09년(메이지 42년)에는 외국인으로서는 파격적으로 훈5등쌍광욱일장을 받았다. 말년에는 고베시 기타노초 3쵸메 언덕에 있는 헌터 저택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1917년(다이쇼 6년) 6월 2일 심장마비로 7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묘소는 고베 시립 외국인 묘지에 있다.

4. 유산

헌터가 살았던 집은 고베시 주오구 기타노정에 있었으며, 이 지역에는 그의 이름을 딴 '헌터자카'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그의 주요 유산으로는 왕자동물원으로 이전되어 보존 중인 구 헌터 저택과 2020년에 발견된 초상 사진 등이 있다.

4. 1. 구 헌터 저택

헌터의 저택은 원래 고베시 주오구 기타노정에 있었으며, 이 저택의 이름에서 유래한 '헌터자카'라는 지명이 현재까지 남아있다. 건물 자체는 고베시 나다구에 위치한 왕자동물원으로 이전되었으며, 이전 후 '구 헌터 저택'이라는 이름으로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또한, 기념 우표의 도안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4. 2. 초상 사진 발견

2020년, E. H. 헌터 상회 도쿄 출장소 앞에서 촬영된 초상 사진이 일본인 사진사 연구가인 하마하타 후토시에 의해 발견되었다[1].

참조

[1] 뉴스 毎日新聞 2021-02-01
[2] 웹사이트 Hitachi shipping tycoon was cityman https://www.londonde[...] LONDONDERRY SENTINEL 2018-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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