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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딩턴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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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딩턴 전투는 878년 5월, 앨프레드 대왕이 구스룸이 이끄는 데인족 바이킹 군대와 맞붙어 승리한 전투이다. 865년 잉글랜드에 상륙한 '대 이교도 군대'는 동앵글리아와 노섬브리아를 정복하고 웨식스를 공격했다. 알프레드는 치펜햄에서 패배한 후 소머셋의 애설니에서 겨울을 보낸 뒤 징집령을 내려 에딩턴에서 데인족과 전투를 벌였다. 앵글로색슨 군대의 승리 이후 구스룸은 기독교로 개종하고 웨드모어 조약이 체결되었으며, 알프레드는 군사 개혁을 통해 바이킹의 위협을 억제했다. 전투 장소는 윌트셔의 에딩턴으로 추정되지만, 과거 다양한 장소가 제시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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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딩턴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정보
분쟁바이킹의 잉글랜드 침략
에탄둔 전투 기념비
브래턴 성 근처에 2000년에 세워진 "에탄둔 전투" 기념비
날짜878년 5월
장소윌트셔의 에딩턴으로 추정
결과웨식스의 결정적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웨식스
교전국 2데인로 바이킹
지휘관
지휘관 1앨프레드 대왕
지휘관 2구스룸
병력 규모
병력 12,000 ~ 6,000명
병력 2약 4,000명
사상자 규모
사상자 1불명
사상자 22,000명 이상

2. 전투 이전의 사건들

8세기 말부터 시작된 바이킹잉글랜드 침략은 점차 격화되어 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앵글로색슨 왕국들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렀다.[4][5] 특히 865년 상륙한 대 이교도 군대는 단순 약탈을 넘어 정복과 정착을 목표로 삼아, 노섬브리아 왕국, 동앵글리아 왕국, 머시아를 차례로 무너뜨렸다.[5][6][7][9]

이러한 상황 속에서 남부의 웨식스 왕국은 앵글로색슨인의 마지막 보루로 남게 되었다. 871년, 형 애설레드 1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앨프레드는 끊임없이 이어진 바이킹과의 전투 속에서 왕국을 지켜내야 했다.[8] 874년 머시아 왕국마저 붕괴하자, 이교도 대군의 일부를 이끈 구스룸은 웨식스 정복에 집중하기 시작했다.[9] 구스룸은 875년부터 웨식스를 여러 차례 공격했으며, 878년 초에는 치펜햄에 있던 앨프레드의 겨울 거처를 기습하여 그를 애설니의 습지대로 피신하게 만드는 등 절체절명의 위기로 몰아넣었다.[9][10][11]

잉글랜드 대부분이 데인족의 지배하에 들어간 상황에서, 앨프레드는 애설니에서 힘을 모아 반격을 준비했다. 878년 봄, 그는 흩어져 있던 웨스트 색슨 군대를 소집하여 에딩턴으로 진군했고, 마침내 구스룸이 이끄는 데인족 군대와 운명을 건 결전을 벌이게 되었다.[12]

2. 1. 바이킹의 초기 잉글랜드 침략

앵글로색슨 잉글랜드에 대한 바이킹의 첫 습격은 786년에서 802년 사이 웨식스 왕국의 포틀랜드 섬에서 발생한 것으로 여겨진다. 세 척의 노르드 배가 도착했고, 그 선원들은 베오트릭 왕의 지방 행정관을 살해했다.[4] 793년에는 나라 반대편인 노섬브리아 왕국린디스판 섬이 습격당했다.[4]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당시의 공포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올해 노섬브리아 땅에 끔찍한 전조가 나타나 사람들을 비참하게 공포에 떨게 했다. 그것은 과도한 회오리바람과 번개였고, 공중에는 불의 용들이 날아다니는 것이 보였다. 이 징조 직후 곧 큰 기근이 따랐고, 얼마 후 같은 해 1월 6일, 이교도들의 파괴는 린디스판에서 약탈과 살육으로 신의 교회를 비참하게 파괴했다." ''(앵글로색슨 연대기, 793년 기록)''

린디스판 약탈 이후 해안을 따라 이어진 바이킹의 습격은 830년대까지는 비교적 산발적이었으나, 이후 더욱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5] 835년, "이교도들"이 시피 섬을 황폐화시켰고,[5] 836년에는 에그버트 왕이 카햄프턴에서 35척 함대의 군대와 전투를 벌였다.[5] 838년에는 콘월의 힝스턴 다운에서 바이킹과 콘월인 연합군과 맞섰다.[5]

습격은 계속되었고 해가 갈수록 더욱 격렬해졌다.[5] 865년에서 866년 사이에는 색슨족이 대 이교도 군대라고 부른 대규모 군대가 도착하면서 침략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5] 연대기는 군대의 규모를 기록하지 않았지만, 현대 학자들은 500명에서 1,000명 사이로 추정한다.[6] 이 군대는 뼈 없는 이바르, 우바, 할프단 형제가 이끌었다고 전해진다.[6] 이전의 약탈 위주 습격과 달리, 이 군대의 지도자들은 "정복과 거주라는 새로운 단계"를 목표로 삼았다.[7]

870년까지 이들 데인족은 노섬브리아 왕국과 동앵글리아 왕국을 정복했으며, 871년에는 웨식스를 공격했다. 그 해 ''앵글로색슨 연대기''에 기록된 아홉 번의 전투 중 웨스트 색슨족이 승리한 것은 단 한 번뿐이었다. 같은 해, 앨프레드는 머튼 전투 이후 사망한 형 애설레드 왕의 뒤를 이어 웨식스의 왕위에 올랐다.[8]

머시아는 874년에 붕괴되었고, 대 이교도 군대의 결속력도 약화되었다. 할프단은 노섬브리아로 돌아가 픽트족과 스트래스클라이드 왕국의 웨일스인들과 싸우며 북부 왕국을 확보했다.[9] 그의 군대는 그곳에 정착하여 농사를 지으며 살았고, 876년 이후로는 기록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9] 한편, 구스룸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다른 두 왕과 함께 "동앵글리아의 케임브리지로 떠났다."[9] 그는 875년부터 웨식스를 여러 차례 공격했으며, 877년 겨울에는 치펜햄에 있던 앨프레드의 겨울 요새를 기습하여 거의 사로잡을 뻔했다.[9]

878년 초, 데인족은 잉글랜드의 동부와 북동부를 장악했다. 애시다운 전투에서의 패배는 그들의 진격을 잠시 늦추었을 뿐, 막지는 못했다.[10] 앨프레드 대왕은 에딩턴 전투를 앞둔 겨울 동안 서머싯의 애설니 습지에서 피신해 있었는데, 이곳의 자연적인 방어 지형 덕분에 어느 정도 보호받을 수 있었다.[11] 878년 봄, 그는 웨스트 색슨 군대를 다시 소집하여 에딩턴으로 진군했고, 그곳에서 구스룸이 이끄는 데인족 군대와 결정적인 전투를 벌이게 된다.[12]

2. 2. 이교도 대군 (Great Heathen Army)의 등장

앵글로색슨 잉글랜드에 대한 바이킹의 첫 습격 기록은 786년에서 802년 사이 웨식스 왕국의 포틀랜드에서 나타난다. 세 척의 노르드 선박이 도착하여 베오트릭 왕의 지방 행정관을 살해했다. 이후 793년에는 노섬브리아 왕국의 성스러운 섬 린디스판이 바이킹에게 습격당했다.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당시 상황을 "이교도들의 습격으로 린디스판 수도원이 약탈당하고 파괴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린디스판 약탈 이후에도 바이킹의 해안가 습격은 간헐적으로 이어졌으나, 830년대에 들어서면서 더욱 빈번하고 지속적인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835년에는 셰페이 섬이 약탈당했고, 836년에는 웨식스의 에그버트 왕이 카햄프턴에서 35척의 바이킹 함대와 교전했으며, 838년에는 힝스턴 다운에서 바이킹과 코니쉬맨 연합군과 맞서 싸웠다. 이러한 습격은 해가 갈수록 격렬해졌다.

865-866년, 이교도 대군(Mycel Heathen Hæreang, Great Heathen Army영어)이라 불리는 대규모 바이킹 군대가 잉글랜드에 상륙하면서 상황은 극적으로 변화했다. 연대기는 군대의 정확한 규모를 명시하지 않았지만, 현대 연구자들은 대략 500명에서 1,000명 사이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군대는 이전의 약탈 위주 바이킹과 달리, 잉글랜드 정복과 정착을 목표로 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이는 잉글랜드 역사에서 바이킹 침략의 새로운 단계를 여는 사건이었다.

이교도 대군은 빠른 속도로 잉글랜드를 공략했다. 870년까지 북부의 노섬브리아 왕국과 동부의 이스트앵글리아 왕국을 차례로 정복했다. 871년에는 남부의 마지막 보루인 웨식스 왕국을 침공했다. 그 해 앵글로색슨 연대기에 기록된 아홉 차례의 주요 전투 중 웨식스가 승리한 것은 단 한 번뿐이었다. 같은 해, 머턴 전투 이후 애설레드 1세 왕이 사망하자 그의 동생 앨프레드가 왕위를 계승하여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바이킹에 맞섰다.

874년에는 중부의 머시아 왕국마저 이교도 대군에게 무너졌다. 그러나 머시아의 붕괴와 함께 군대의 결속력도 약화되어 분열되기 시작했다. 지도자 중 한 명인 할프단노섬브리아로 돌아가 픽트인 및 스트라스클라이드인들과 싸우며 북부 왕국의 지배권을 확보하는 데 주력했다. 반면, 또 다른 지도자 구스룸은 두 명의 이름 없는 왕과 함께 이스트앵글리아케임브리지로 이동하여 웨식스 공략을 계속했다. 구스룸은 875년부터 웨식스를 여러 차례 공격했으며, 878년에는 치프넘(Chippenham)의 겨울 요새에서 앨프레드를 기습하여 거의 사로잡을 뻔하기도 했다. 이 무렵 잉글랜드 동부와 북동부는 대부분 데인인(바이킹)에게 점령되었으며, 애시다운 전투에서의 패배가 그들의 진격을 잠시 늦추었을 뿐 막지는 못했다. 앨프레드는 애설니의 서머싯 습지대에서 겨울을 보내며 반격을 준비했고, 이는 에딩턴 전투의 서막이었다.

3. 전투 전 알프레드 대왕의 상황

구스룸과 그의 부하들은 데인족의 일반적인 전략, 즉 요새화된 마을을 점령한 뒤 돈을 받고 왕국을 즉시 떠나겠다는 평화 조약을 기다리는 방식을 사용했다. 875년, 구스룸의 군대는 "웨섹스 군대를 피해 웨어햄으로 들어갔다".[13] 그들은 알프레드에게 인질을 제공하고 나라를 떠나겠다고 맹세했으며, 알프레드는 그 대가로 돈을 지불했다.[14]

그러나 데인족은 약속을 어기고 즉시 알프레드 왕국 깊숙한 곳인 엑서터로 이동했다.[13] 그곳 엑서터에서 877년 가을, 알프레드와 "확고한 평화" 조약을 맺었다.[13] 이 조약에 따라 데인족은 그의 왕국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로 했다.[15] 데인족은 실제로 웨섹스를 떠나 877년 남은 기간(그레고리력)을 머시아 왕국글로스터에서 보냈다.[15] 한편, 알프레드는 크리스마스글로스터에서 약 약 48.28km 떨어진 웨섹스의 치펜햄에서 보냈다.

하지만 데인족은 "주현절 이후 한겨울에"[13] (아마도 878년 1월 6일에서 7일 밤) 치펜햄을 기습 공격했다. 그들은 치펜햄을 점령했고, 알프레드는 "소수의 병력"만 이끌고 황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13] (이 시기에 알프레드가 케이크를 태운 이야기가 속한다.[16])

이 시기 알프레드는 데인족의 움직임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그들을 따라다니는 데 그쳤던 것으로 보인다.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알프레드가 주도권을 잡았다는 인상을 전달하려 시도하지만, 실제로는 "덴마크 승리자들의 움직임을 간결하게 기록하는 무미건조한 연대기로, 동시에 알프레드가 통제하고 있다는 인상을 기만적으로 전달하려 노력"했을 뿐이라는 평가가 있다.[14] 알프레드의 군대가 요새화된 치펜햄조차 방어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당시 웨섹스 군대가 요새의 도움 없이 데인족을 상대로 야전에서 승리할 능력이 부족했음을 시사한다.[14] 875년부터 877년 말까지 알프레드는 침략자들에게 반복적으로 돈을 지불하는 것 외에는 데인족의 위협에 대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다.

4. 에단 전투 (878년 5월)

878년 5월, 알프레드 대왕은 치펜햄에서의 패배 이후 군대를 모아 구스룸이 이끄는 데인족 주력군과 맞서기 위해 ''에던둔''(Eðandun, 현재의 윌트셔주 에딩턴으로 추정)으로 진군했다.[18][19][23] 5월 6일에서 12일 사이[24] 벌어진 격렬한 전투 끝에, 알프레드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도망치는 데인족을 요새까지 추격했다.[18]

웨스트 색슨 군대는 요새를 포위했고, 2주 후 굶주린 데인족은 평화를 간청하며 항복했다.[19] 알프레드는 데인족이 웨식스를 떠나고 그들의 지도자 구스룸세례를 받는다는 조건으로 항복을 받아냈다.[18] 에딩턴에서의 명확한 군사적 승리는 이전 웨어햄이나 엑서터에서의 조약과 달리 데인족이 약속을 지킬 가능성을 높였다.

4. 1. 알프레드의 반격 준비



알프레드 대왕은 소규모 병력만으로는 치펜햄을 탈환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전 전투들, 예를 들어 871년 레딩 전투에서 데인족은 요새화된 진지를 방어하는 데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8] 치펜햄에서의 참패 이후, 알프레드는 남쪽으로 후퇴하여 군대를 재정비하고 반격을 준비하기로 결정했다.

치펜햄에서의 패배 이후 알프레드의 행적이 다시 기록된 것은 878년 부활절 무렵으로, 그는 서머싯 습지 깊숙한 곳에 위치한 애설니(Athelney) 섬에 요새를 건설했다.[18][19] 이곳을 거점으로 삼아 저항을 이어가던 알프레드는 부활절 이후 7주째 되는 주, 즉 5월 4일에서 7일 사이에[20] 셀우드 숲 동쪽 경계 근처에 위치한 ''에그버트의 돌''(Ecgbryhtesstan, Egbert's Stone)에서 징집령을 내렸다.[21] 이 소집에 서머싯, 윌트셔, 햄프셔 등 주변 지역에서[18] 아직 데인족에게 굴복하지 않고 도망치지 않은 많은 세인(thegn)들과 그들의 병력이 모여들었다. 알프레드의 귀환 소식은 웨스트 색슨족에게 큰 힘이 되었으며, 많은 이들이 그를 왕으로 여기고 환호했다.

다음 날, 집결한 알프레드의 군대는 북쪽으로 이동하여 워민스터 근처의 ''일리 오크''(Iley Oak)로 추정되는 곳에서 하룻밤을 보냈다.[22] 그리고 그 다음 날에는 다시 북쪽으로 진군하여 에딩턴(Edington) 근처 언덕에 도착했다.[18][19][23] 이곳에서 알프레드는 데인족과의 결전을 준비했다.

4. 2. 전투 경과

치펜햄에서 데인족을 몰아내기 어렵다고 판단한 알프레드 대왕은 남쪽으로 후퇴하여 군대를 재정비했다.[8] 878년 부활절 무렵에는 애설니(Athelney)에 요새를 건설했다.[18][19]

부활절 이후 7주째 되는 주(5월 4일~7일 사이)[20], 알프레드는 ''에크브라이트스탄''(에그버트의 돌)에서 징집을 명령했다.[21] 아직 도망치지 않은 서머싯, 윌트셔, 햄프셔 등 주변 지역의 많은 귀족과 병사들이 그에게로 모여들었다.[18] 다음 날 알프레드의 군대는 일리 오크(Iley Oak)로 이동했고,[22] 그 다음 날에는 ''에던둔''(Eðandun, 현재의 윌트셔주 에딩턴으로 추정)으로 진군했다.[18][19][23]

5월 6일에서 12일 사이의 어느 날,[24] 에던둔에서 알프레드 군대는 데인족 군대와 마주쳤다. 알프레드의 군대는 방패벽을 형성하여 데인족의 전 군대에 맞서 격렬하게 싸웠다. 오랜 전투 끝에 알프레드는 마침내 승리를 거두었고, 엄청난 살육으로 데인족을 격파하며 도망치는 이들을 요새까지 추격했다.[18]

승리 후 데인족이 요새로 피신하자, 웨스트 색슨 군대는 데인족이 약탈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모든 식량을 제거하고 요새를 포위했다.[19] 2주가 지나자 굶주린 데인족은 평화를 간청했다. 그들은 알프레드 대왕에게 인질을 제공하고 즉시 왕국을 떠나겠다는 엄숙한 맹세를 했으며, 그들의 지도자인 구스룸세례를 받겠다고 약속했다.[18] 이 협정은 이전에 웨어햄이나 엑서터에서 맺었던 조약들과는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에딩턴에서의 결정적인 승리로 인해 데인족이 조약 조건을 지킬 가능성이 훨씬 높아졌기 때문이다.

알프레드의 승리 요인으로는 몇 가지를 들 수 있다. 우선 양측 군대의 규모 차이가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데번의 샤이어 병력이 킨위트 전투에서 우바가 이끄는 군대를 격파한 사례에서 보듯, 한 샤이어의 병력만으로도 강력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19] 또한 875년 이후 구스룸은 뼈 없는 이바르나 우바와 같은 다른 데인족 지도자들의 지원을 잃은 상태였다. 많은 데인족 병력이 엑서터 조약 이후 동앵글리아 왕국과 머시아 왕국에 정착했고, 876년에서 877년 사이에는 스완지 앞바다에서 배 120척이 난파되어 병력 손실도 컸다.[20] 이러한 내부 분열 가능성과 병력 손실은 데인족의 재정비를 어렵게 만들었으며, 이는 웨식스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5. 전투 결과

에딩턴 전투의 결과, 바이킹 군대의 지도자 구스룸은 항복했고, 전투 3주 후 서머싯주 얼러에서 알프레드를 대부로 하여 세례를 받았다.[25][48] 이때 구스룸은 애설스탠이라는 세례명을 얻었다.[49] 이는 알프레드가 구스룸을 기독교 규범 안으로 끌어들여 향후 조약을 준수하도록 하려는 의도였을 수 있다.

이후 웨드모어 조약이 체결되었고, 구스룸과 그의 군대는 웨식스를 떠나 879년 머시아 왕국의 사이렌세스터를 거쳐 880년 이스트앵글리아에 정착했다.[50][51] 구스룸은 890년 사망할 때까지 이스트앵글리아의 왕으로 통치했으며, 때때로 알프레드와의 평화 조약을 깨기도 했지만[53] 큰 위협으로 간주되지는 않았다.[49][54]

886년에는 알프레드와 구스룸 조약을 통해 알프레드의 웨식스와 구스룸의 이스트앵글리아(훗날 데인로의 일부) 사이의 경계가 확정되었고, 두 지역 간의 법적, 사회적 관계가 규정되었다.[55][56] 이는 잉글랜드 내 앵글로색슨족과 데인인 사이의 공존을 위한 틀을 마련하려는 시도였다. 구스룸은 기독교 개종 이후 세례명인 애설스탠 이름으로 동전을 주조하기도 했다.[56]

한편, 에딩턴 전투 이후 알프레드는 군사 제도를 개혁하고 버러(Burh)라는 요새화된 도시망을 구축하여 웨식스의 방어력을 크게 강화했다.[49] 이러한 노력 덕분에 바이킹의 침입은 점차 격퇴되었고, 896년경에는 많은 바이킹들이 잉글랜드에서의 활동을 포기하고 이스트앵글리아나 노섬브리아 등으로 이동했다.[57] 알프레드의 군사 개혁과 부르갈 히데이지(Burghal Hidage) 시스템은 그의 후계자들이 데인족에게 빼앗겼던 잉글랜드 북부 영토를 되찾고 잉글랜드를 재통일하는 기반을 마련했다.[57][58]

5. 1. 웨드모어 조약과 구스룸의 개종

878년 당시 잉글랜드의 세력 분포


에딩턴 전투 3주 후, 구스룸은 서머싯주 얼러에서 알프레드를 대부로 하여 세례를 받았다.[25][48] 이는 알프레드가 구스룸을 기독교 윤리 강령에 묶어, 데인인들이 합의된 조약을 준수하도록 하기 위한 시도였을 가능성이 있다. 개종한 구스룸은 애설스탠이라는 세례명을 받았다.[49]

웨드모어 조약에 따라 개종한 구스룸은 웨식스를 떠나 이스트앵글리아로 돌아가야 했다. 이에 따라 879년, 바이킹 군대는 치펜햄을 떠나 머시아 왕국의 사이렌세스터로 이동하여 1년 동안 그곳에 머물렀다.[50] 이듬해인 880년, 군대는 이스트앵글리아로 가서 정착했다.[51]

886년 알프레드와 구스룸 조약은 두 왕국의 경계를 확정했는데, 머시아 왕국은 분할되어 일부는 알프레드의 웨식스에, 다른 일부는 구스룸의 이스트앵글리아에 속하게 되었다.[55] 이 협정은 또한 덴마크 이스트앵글리아와 웨식스의 사회 계급을 동등하게 정의하여, 두 민족 간의 갈등을 최소화하고 상업을 규제하는 틀을 마련하고자 했다.[56] 구스룸이 기독교로의 개종을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였는지는 불분명하지만, 그는 세례명인 애설스탠이라는 이름으로 알프레드의 모델을 따라 동전을 주조한 최초의 잉글랜드 내 덴마크 통치자였다. 9세기 말까지 모든 앵글로-덴마크 통치자들도 동전을 주조했으며, 10세기까지 앵글로색슨 왕권 모델은 앵글로-덴마크 지도자들에 의해 보편적으로 채택된 것으로 보인다.[56]

5. 2. 알프레드와 구스룸 조약 (886년)

886년에 알프레드와 구스룸의 조약은 두 왕국의 경계를 정의했다. 머시아 왕국은 분할되어 일부는 알프레드의 웨식스에, 다른 일부는 구스룸의 이스트앵글리아에 속하게 되었다.[55] 이 협정은 또한 덴마크 이스트앵글리아의 사회 계급과 웨식스의 해당 계급을 동등하게 정의했다. 이 조약은 두 민족 간의 갈등을 최소화하고 상업을 규제하는 틀을 제공하고자 했다.[56] 구스룸이 기독교로의 개종을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는 애설스탠(Athelstaneng)이라는 세례명으로 알프레드 모델을 기반으로 동전을 최초로 주조한 잉글랜드 왕국덴마크 통치자였다. 9세기 말까지 모든 앵글로-덴마크 통치자들도 동전을 주조했다. 10세기까지 앵글로색슨 왕권 모델은 앵글로-덴마크 지도자들에 의해 보편적으로 채택된 것으로 보인다.[56]

5. 3. 알프레드의 군사 개혁과 잉글랜드의 재통일



에딩턴 전투에서 바이킹 지도자 구스룸이 패배한 후, 알프레드 대왕은 웨식스의 군사 제도를 개혁하여 바이킹의 성공적인 약탈을 점점 더 어렵게 만들었다.[57] 알프레드는 군대를 재정비하고 버러(Burh)라고 알려진 요새화된 도시 체계를 구축하여 바이킹의 위협에 효과적으로 대응했다.[49]

이러한 군사적 개혁의 결과, 바이킹의 위협은 알프레드 치세 동안 상당히 억제되었다. 896년까지 바이킹들은 이스트앵글리아나 노섬브리아로 향하는 것을 포기하기 시작했다.[57]

알프레드가 다진 군사 개혁의 기반과 그의 아들 에드워드 대왕이 도입한 부르갈 히데이지(Burghal Hidage) 시스템은 이후 알프레드의 후계자들이 데인로, 즉 데인족(바이킹)이 점령했던 잉글랜드 북부의 영토를 되찾는 데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57][58] 이는 훗날 잉글랜드가 재통일되는 과정에 기여했다.

6. 전투 장소 논쟁

에딩턴 전투의 정확한 위치는 오랫동안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다.[28] 전투 장소를 기록한 주요 초기 자료는 아서가 쓴 ''알프레드 대왕의 생애''와 ''앵글로색슨 연대기''이다. 아서의 기록에는 전투 장소가 Ethandunang으로, 연대기에는 Eðandunang으로 표기되어 있다. 연대기는 알프레드 대왕 통치 시기에 편집되어 동시대 기록으로 여겨진다.[25] 반면 아서의 ''생애''는 원본이 소실되었고 후대의 사본을 통해 전해 내려오기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위조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26][27]

오늘날 대부분의 역사가는 전투 장소를 윌트셔 주 웨스트버리 근처의 에딩턴으로 보고 있지만,[28] 이에 대한 명확한 증거는 부족하여 여러 대안적인 장소가 제시되기도 했다.[29][33] 전투 장소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와 근거는 하위 문단에서 더 자세히 다룬다.

6. 1. 윌트셔 주 에딩턴 설

오늘날 대부분의 역사가들이 받아들이는 전투의 위치는 윌트셔 주 웨스트버리 근처의 에딩턴이다.[28] 에딩턴 전투의 위치에 대한 주요 자료는 장소를 "''Ethandun''"으로 명명한 아서의 ''알프레드 대왕의 생애''와 ''앵글로색슨 연대기''인데, 연대기에서는 ''Eðandun''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 연대기는 알프레드 대왕의 통치 기간에 편집되었으므로 동시대의 기록으로 간주된다.[25] 아서의 ''생애''는 원래 893년에 쓰여진 것으로 여겨지지만, 동시대의 원고는 남아 있지 않다.[26] 약 1000년에 쓰여진 ''생애''의 한 버전인 ''코튼 오토(Cotton Otho) A. xii'' 텍스트는 1731년 애시번 하우스 화재로 파괴될 때까지 보존되었다. 파괴되기 전 이 버전은 필사되고 주석이 달렸으며, 현대 번역은 이 필사본을 기반으로 한다.[26] 일부 학자들은 아서의 알프레드 대왕 생애가 위조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27]

윌트셔 주 에딩턴 설은 수세기 동안 많은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28] 1904년 W. H. 스티븐슨(William Henry Stevenson)은 가능한 장소들을 분석하며 "지금까지, [앵글로색슨 연대기에 이름이 있는] 이 ''Eðandun''과 에딩턴의 동일성을 증명할 만한 것은 없다"고 말했지만, 이어서 "그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이유는 거의 없다"고 덧붙였다.[29][33]

앵글로색슨 연대기의 ''Eðandun''과 아서의 ''생애''의 ''Ethandun''이 윌트셔 주의 에딩턴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여러 고대 원고에서 찾을 수 있다.[30][31] 윌트셔 주의 에딩턴은 알프레드의 가족 영지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30] 그는 유언으로 ''Eðandun''이라는 영지를 아내에게 남겼다.[32] 한 헌장에는 왕의 회의가 ''Eðandun''에서 열렸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후대의 필사자는 동일한 문서에 ''Eðandune''이라고 주석을 달았다.[33][34] 968년의 또 다른 헌장은 에드거 왕이 ''Edyndon''의 토지를 롬지 수도원에 기증했다고 보고한다.[35]
1086년의 둠즈데이 북에서 발췌한 것으로, 에딩턴이 오른쪽에 Edendone으로 표시되어 있다
1086년의 둠즈데이 북(Domesday Book)에는 에드워드 참회왕(Edward the Confessor) 시대(1066년 이전)와 1086년에 롬지 수도원(Romsey Abbey)이 윌트셔 주의 ''Edendone''에서 토지를 소유하고 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 ''Edendone''은 오늘날의 에딩턴, 윌트셔(Edington, Wiltshire)로 알려져 있다.[36]

윌트셔 주의 에딩턴 외에도 다른 위치들이 초기부터 제안되어 왔다. 튜더 왕조(Tudor)의 역사가 폴리도어 베르길(Polydore Vergil)은 전투 장소에 대한 고대 텍스트를 잘못 읽은 것으로 보이며, 에딩턴 대신 ''Abyndoniam''(애빙던, 옥스퍼드셔(Abingdon))을 전투 장소로 지목했다.[37][38] 19세기에 중세 역사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지면서 알프레드 대왕은 주요 영웅으로 여겨졌다.[39] 대부분의 초기 역사가들은 전투 장소를 에딩턴 지역으로 지정했지만, 이 주제에 대한 상당한 관심은 많은 골동품 애호가들이 알프레드 관련 유적을 발굴하고 전투 위치에 대한 대안을 제안하도록 부추겼다.[40][41] 대안적 장소에 대한 주장은 주로 이름의 유사성에 근거했지만, 19세기에 알프레드와 관련된 모든 것에 대한 큰 관심으로 인해 알프레드와 관련된 어떤 장소든 많은 관광객을 확보할 수 있었고, 이것 역시 연관성을 찾으려는 동기가 되었다.[41][42]

전투 장소에 대한 몇 가지 대안 제안, 저자별
저자연도Ethandun의 위치
다니엘 리슨스(Daniel Lysons)1806에딩턴, 버크셔(Eddington, Berkshire)[43]
J. 휘태커1809슬로터포드(Slaughterford, Wiltshire)[44]
J. M. 모팻1834슬픈 데인, 민친햄턴(Minchinhampton, Gloucestershire)[45]
J. 턴햄1857웨스트 야튼(West Yatton, Wiltshire)[44]
조지 율리우스 풀렛 스크로프(G. Poulett Scrope)1858"에튼 다운", 웨스트 야튼(Yatton, Wiltshire)[44]
W. H. P. 그레스웰1910에딩턴, 서머싯(Edington, Somerset)[46]
올바니 메이저1913에딩턴, 서머싯(Edington, Somerset)[47]


6. 2. 기타 장소 설

윌트셔주의 에딩턴 외에도 다른 장소들이 초기부터 제안되어 왔다. 튜더 왕조 시대의 역사가 폴리도어 베르길(Polydore Vergil)은 전투 장소에 대한 고대 문헌을 잘못 해석하여, 에딩턴 대신 ''Abyndoniam''(애빙던)을 전투 장소로 지목했다.[37][38]

19세기에 들어 중세 역사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지면서, 알프레드 대왕은 주요 영웅으로 부각되었다.[39] 대부분의 초기 역사가들은 전투 장소를 윌트셔 에딩턴 지역으로 보았지만, 알프레드 대왕에 대한 높은 관심은 많은 골동품 애호가들이 알프레드 관련 유적을 찾고 전투 위치에 대한 대안적인 주장을 내놓도록 부추겼다.[40][41] 이러한 대안적 장소에 대한 주장은 주로 지명의 유사성에 근거했지만, 당시 알프레드 대왕과 관련된 장소라면 많은 관광객을 유치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점도 새로운 장소를 찾으려는 동기가 되었다.[41][42]

전투 장소에 대한 몇 가지 대안 제안, 저자별
저자연도Ethandun의 위치
다니엘 리슨스(Daniel Lysons)1806에딩턴[43]
J. 휘태커1809슬로터포드[44]
J. M. 모팻1834슬픈 데인, 민친햄턴[45]
J. 턴햄1857웨스트 야튼[44]
조지 율리우스 풀렛 스크로프(G. Poulett Scrope)1858"에튼 다운", 웨스트 야튼[44]
W. H. P. 그레스웰1910에딩턴[46]
올바니 메이저1913에딩턴[47]


참조

[1] 문서
[2] 웹사이트 Alfred the Great and The Battle of Edington https://stmuhistorym[...] 2020-11-07
[3] 웹사이트 Viking Tide: Alfred the Great during the Danish Invasions https://warfarehisto[...] 2015-11-15
[4] 서적 Illustrated History of Vikings
[5] 서적 Illustrated History of Vikings
[6] 서적 A History of the Vikings
[7] 서적 A History of the Vikings
[8] 서적 The Anglo-Saxon Chronicle
[9] 서적 A History of the Vikings
[10] 서적 In Search of the Dark Ages
[11] 서적 In Search of the Dark Ages
[12] 서적 In Search of the Dark Ages
[13] 서적 The Anglo-Saxon Chronicle
[14] 서적 King Alfred the Great
[15] 서적 King Alfred the Great
[16] 서적 Why Alfred burnt the cakes
[17] 서적 Why Alfred Burnt the Cakes
[18] 서적 The Anglo Saxon Chronicle
[19] 서적 The Medieval Life of Alfred
[20] 서적 King Alfred the Great
[21] 서적 Flesh and Bones of Frome Selwood and Wessex Hobnob Press 2017
[22] 서적 Flesh and Bones of Frome Selwood and Wessex Hobnob Press 2017
[23] 서적 A History of the County of Wiltshire, Volume 8 https://www.british-[...] University of London 1965
[24] 서적 King Alfred the Great
[25] 웹사이트 Manuscript A: The Parker Chronicle http://asc.jebbo.co.[...]
[26] 서적 Asser's Life of King Alfred
[27] 서적 Historical Writing
[28] 서적 Alfred's Wars
[29] 웹사이트 Asser's life of King Alfred https://archive.org/[...] 2013-02-13
[30] 서적 Alfred the Great
[31] 웹사이트 Asser's Life of King Alfred: Asserius De Rebus Gestis Ælfredi https://archive.org/[...] 2013-02-13
[32] 웹사이트 Electronic Sawyer http://www.esawyer.o[...]
[33] 간행물 The battle of Ethandun https://archive.org/[...] 2014-01-29
[34] 웹사이트 Electronic Sawyer http://www.esawyer.o[...]
[35] 웹사이트 Electronic Sawyer http://www.esawyer.o[...]
[36] 웹사이트 Edington - Domesday Book https://web.archive.[...] 2012-03-04
[37] 서적 Anglica Historia http://www.philologi[...] 1555
[38] 서적 Alfred's Wars
[39] 서적 England's Darling
[40] 서적 Alfred's Wars
[41] 서적 England's Darling
[42] 서적 Alfred's Wars
[43] 서적 Magna Britannia https://books.google[...] 2012-03-04
[44] 서적 The Life of St Neot https://books.google[...] 2012-03-05
[45] 서적 Battle of Ethandun https://books.google[...] 2012-03-04
[46] 서적 Battle of Edington https://archive.org/[...] 2012-12-19
[47] 서적 Early wars of Wessex https://archive.org/[...]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13
[48] 서적 Life
[49] 서적 Kings and Kingdoms
[50] 서적 Life
[51] 서적 Life
[52] 서적 Life
[53] 서적 Life
[54] 문서 ASC 890 http://www.gutenberg[...]
[55] 문서 The treaty of Alfred and Guthrum https://archive.org/[...] 2014-01-28
[56] 서적 Alfred the Great: War, Kingship and Culture in Anglo-Saxon England
[57] 서적 Why Alfred Burnt the Cakes
[58] 문서 ASC 896, ASC 897 http://www.gutenberg[...]
[59] 웹인용 Alfred the Great and The Battle of Edington https://stmuhistorym[...] 2020-11-07
[60] 웹인용 Viking Tide: Alfred the Great during the Danish Invasions https://warfarehisto[...] 2021-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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