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바 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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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바 하트는 1905년 영국에서 태어나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에서 생존한 인물이다. 1912년 7세의 나이로 부모와 함께 타이타닉호에 탑승했으나, 아버지 벤자민은 사고로 사망했다. 하트는 이후 여러 직업을 거치며 사회 활동을 했고, 타이타닉호 침몰과 관련된 증언과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화이트 스타 라인의 대처를 비판하고, 난파 현장 인양에 반대하며, 1996년 91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타이타닉호 관련 활동을 이어갔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RMS 타이타닉 침몰 사고의 생존자 - 바버라 웨스트
바버라 웨스트는 1912년 타이타닉 호 침몰 사고 당시 10개월 된 아기로, 어머니와 언니와 함께 생존했지만 아버지는 사망했으며, 이후 교사로 활동하다 콘월주 트루로에 정착하여 96세로 생을 마감했다. - RMS 타이타닉 침몰 사고의 생존자 - 바이올렛 제솝
바이올렛 제솝은 20세기 초 RMS 올림픽호, RMS 타이타닉호, HMHS 브리타닉호의 승무원으로, 타이타닉호와 브리타닉호 침몰 사고에서 생존하여 유명한 영국의 객실 승무원이자 간호사이다. - 영국의 자서전 작가 - 엘리자베스 테일러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1932년 런던에서 태어나 아역 배우로 시작하여 영화 《녹원의 천사》로 스타덤에 오른 배우로, 《버터필드 8》과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고 HIV/AIDS 퇴치를 위한 사회 활동을 펼치다가 2011년 사망했다. - 영국의 자서전 작가 - 노먼 화이트사이드
노먼 화이트사이드는 북아일랜드 출신 축구 선수로, 월드컵 최연소 출전 기록,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의 FA컵 우승, 그리고 음주와 부상으로 인한 짧은 선수 생활 후 족병 전문의로 전향한 이력을 가진 인물이다. - 잉글랜드의 회고록 작가 - 스티븐 호킹
스티븐 호킹은 루게릭병을 앓으면서도 특이점 정리, 호킹 복사 등의 획기적인 개념을 제시하고 《시간의 역사》와 같은 대중 과학 서적을 통해 과학 대중화에 기여한 영국의 이론물리학자이자 우주론자이다. - 잉글랜드의 회고록 작가 - 존 클리즈
존 클리즈는 잉글랜드의 배우, 희극인, 작가, 영화 제작자로, 1960년대 코미디 그룹 활동을 시작하여 TV 프로그램과 몬티 파이튼, 시트콤 폴티 타워 등을 통해 인기를 얻었으며, 영화 각본 및 출연, 사회 정치 활동에도 참여하고 있다.
에바 하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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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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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에바 미 Miriam 하트 |
영어 이름 | Eva Miriam Hart |
작위 | MBE |
출생일 | 1905년 1월 31일 |
출생지 | 일포드, 에식스 주, 잉글랜드 |
사망일 | 1996년 2월 14일 |
사망지 | 채드웰 히스, 런던, 잉글랜드 |
2. 생애
에바 하트는 1905년 영국 에식스주 일포드에서 태어나 7살 때인 1912년, 캐나다 위니펙으로 이주하기 위해 부모님과 함께 ''타이타닉''호에 2등실 승객으로 탑승했다.[1] 그녀의 어머니 에스터는 배의 안전에 대해 불안감을 느껴 밤에는 잠을 자지 않고 깨어 있었다.[2][3]
1912년 4월 14일 밤, ''타이타닉''호가 빙산과 충돌하자 에바와 어머니는 아버지 벤자민의 도움으로 14번 구명보트에 탈 수 있었지만, 아버지는 배와 함께 침몰하여 사망했다.[2] 구조된 후 영국으로 돌아온 에바는 오랫동안 악몽에 시달렸으나, 23세 때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싱가포르행 배를 타며 두려움을 극복했다.[2]
이후 에바는 호주에서 전문 가수로 활동하고, 보수당의 조직 위원, 치안 판사 등 다양한 직업을 가졌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자원봉사 활동에도 참여했다. 그녀는 타이타닉호 생존자로서 참사의 경험을 적극적으로 증언했으며, 특히 구명정이 부족했던 점과[2] 구조 요청에 응답하지 않은 SS ''캘리포니안''호를 강하게 비판했다.[9][10] 또한, 1985년 난파선이 발견된 후 유물 인양 시도에 대해 "묘지를 도굴하는 행위"라며 강력히 반대했다.[11]
1974년 공로를 인정받아 대영 제국 훈장(MBE)을 받았으며,[5] 1994년에는 자서전 ''타이타닉호의 그림자 – 생존자의 이야기''를 출간했다. 여러 타이타닉 역사 협회 행사에 참여하고 추모 정원 헌정식에도 참석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다 1996년 2월 14일, 91세의 나이로 암으로 사망했다.[2]
2. 1. 어린 시절

에바 하트는 1905년 1월 31일 영국 에식스주 일포드 (현재 그레이터 런던의 일부)에서 유대인 아버지와 기독교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1] 그녀의 부모는 벤자민 하트와 그의 아내 에스터(née 블룸필드)였다. 에바는 그들의 외동딸이었다. 에스터는 이전에 결혼하여 첫 결혼에서 9명의 자녀를 두었다. 에바는 런던 기디아 파크에 있는 세인트 메리 수도원(나중에 세인트 메리 해어 파크)에서 교육을 받았다. 1912년 초, 벤자민은 가족이 캐나다 매니토바주 위니펙으로 이민을 가기로 결정했다. 그는 이미 그곳에 살고 있던 그의 형제의 영향과 당시 잉글랜드의 경제 침체가 이민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2. 2. 타이타닉호 탑승과 침몰
에바는 1912년 4월 10일, 7살의 나이에 부모님과 함께 2등실 승객으로 ''타이타닉''에 탑승했다. 원래는 SS ''필라델피아''호를 탈 예정이었으나, 사우스햄튼에서 발생한 석탄 파업으로 인해 많은 승객들과 함께 ''타이타닉''으로 옮겨 타게 되었다. 에바의 어머니는 ''타이타닉''에 대해 불안감을 느꼈으며, 배를 '침몰할 수 없다'고 말하는 오만이 신을 거스르는 것이라 생각하며 재앙을 예감했다고 한다.[2] 이러한 불안감 때문에 그녀는 낮에만 잠을 자고, 밤에는 옷을 모두 입은 채 선실에서 깨어 있었다.[3]1912년 4월 14일 오후 11시 40분, ''타이타닉''호가 빙산과 충돌했을 때 에바는 잠들어 있었다. 깨어 있던 어머니는 "약간의 충돌"을 감지하고 즉시 남편에게 상황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선실로 돌아온 아버지는 충돌 사실을 알리고, 담요로 에바를 감싼 뒤 아내와 딸을 보트 갑판으로 데려갔다. 에바의 아버지는 아내와 딸을 14번 구명보트에 태우며 "착하게 엄마 손을 잡고 있어"라고 말했다.[2] 이것이 에바가 아버지에게 들은 마지막 말이었고, 아버지를 본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는 배와 함께 가라앉아 사망했으며, 시신은 수습되었으나 신원은 확인되지 않았다.
에바와 어머니는 다음 날 아침 구조선 RMS ''카르파티아''에 의해 구조되어 4월 18일 뉴욕시에 도착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처음부터 뉴욕행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곧바로 영국으로 돌아갔다. 이후 에바는 오랫동안 악몽에 시달렸다. 1928년, 23세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에바는 싱가포르로 가는 배표를 끊어 자신의 두려움과 정면으로 마주하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배 안에서 4일 동안 선실에 틀어박혀 지냈고, 마침내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2]
2012년 4월, 사우스햄튼의 ''타이타닉'' 기념관 오디오 가이드에는 에바 하트의 경험담이 담긴 오디오 클립이 포함되었다. 이 가이드는 ''타이타닉''이 처녀 항해를 시작했던 사우스햄튼의 경로를 따라 진행된다. 침몰 당시 7살이었던 그녀는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우리는 보트 열차를 탔습니다. 저는 7살이었고, 배를 본 적이 없었습니다. 아주 커 보였습니다. 모두가 매우 흥분했습니다. 우리는 선실로 내려갔고, 그때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그 배에서는 잠자리에 들지 않겠다고 확고하게 결심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밤에는 앉아 있을 것입니다. 그녀는 밤에는 잠자리에 들지 않기로 결정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아름다운 ''타이타닉''에 대한 한 가지 사실은 일부 사람들이 ''타이타닉''을 '침몰할 수 없다'고 말했지만 이제 ''타이타닉''이 침몰했고 약 700~1,500명의 생존자가 있다는 소식이 전 세계로 퍼졌습니다."
"저는 그 배가 침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트는 1993년 인터뷰에서 말했다. "저는 눈을 감지 않았습니다. 전혀 잠을 자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것을 보았고, 그것을 들었고, 아무도 그것을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색깔, 소리,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제가 기억할 수 있는 최악의 것은 비명 소리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죽고, 익사하고, 끝난 후, 세상 전체가 멈춰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아무것도 없었고, 단지 별이 머리 위에 있는 어둡고 끔찍한 침묵만 있었습니다."[2] 하트는 배가 가라앉을 때 배의 악대가 "내 주를 가까이 하려 함"을 연주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회상했다.[4]

하트는 모든 승객에게 충분한 구명정을 제공하지 못한 화이트 스타 라인을 자주 비판했다. "배가 어뢰 공격을 받으면 전쟁입니다. 폭풍 속에서 암초에 부딪히면 자연 재해입니다. 그러나 구명정이 충분하지 않아서 죽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2] 하지만 영국 조사 위원회의 공식 보고서는 당시 승무원들이 주어진 시간 안에 모든 구명정을 제대로 내리지 못했고, 구명정 훈련 부족, 비상 상황 대처 지침 부재 등을 이유로 추가 구명정이 반드시 더 많은 생명을 구했을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시사했다.[6]
하트는 인터뷰에서 배가 두 동강 났다고 꾸준히 주장했는데,[7][8] 이는 1985년 로버트 발라드가 난파 현장을 발견하면서 사실로 확인되었다. 그녀는 또한 SS ''캘리포니안''호 논란에 대해서도 단호한 입장을 보였다. ''캘리포니안''호는 ''타이타닉''호에서 불과 몇 마일 떨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난 신호 로켓과 구조 요청에 응답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았다.[9] 하트는 그 배가 기존에 알려진 약 30.58km가 아닌, ''타이타닉''호로부터 약 16.09km 미만의 거리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저는 [''캘리포니안''호]를 보았습니다. 정말 가까이 있었어요... 저는 19마일 떨어진 배를 보지 못했습니다. 저는 너무 가까이 있는 배를 보았고, 당시에는 9마일도 안 된다고 했는데, 지금은 19마일이라고 하려 합니다... 저는 그걸 봤어요, 그냥 '수평선 위의 불빛'이 아니었고, 배라는 것을 알 수 있었어요. 그리고 우리 로켓이 발사되는 것을 보았는데, 그 배가 봤어야 했어요. 음, 이번 조사에서는 그들이 그걸 봤지만 위험의 징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대서양 한가운데 밤에 로켓이 터지면 문제가 생길 거라고 생각했을 텐데요."[10]
1987년 난파 현장에서 유물 인양 작업이 시작되자, 하트는 ''타이타닉''호가 마땅히 묘지로 존중받아야 한다고 즉각적으로 비판했다. 그녀는 인양자들의 "무감각과 탐욕"을 비난하며 그들을 "행운 사냥꾼, 독수리, 해적, 도굴꾼"이라고 불렀다.[11] ''타이타닉: 완전한 이야기'' 다큐멘터리에서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들이 결코 그 일부분을 끌어올리려고 시도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저는 그들이 이곳이 1,500명의 사람들이 죽지 말았어야 할 무덤이라는 것을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저는 그들이 내려가서 무덤을 파헤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며, 저는 그것에 매우 반대합니다."
2. 3. 타이타닉호 침몰 이후
하트는 생존 이후 모든 승객에게 충분한 구명정을 제공하지 못한 화이트 스타 라인을 자주 비판했다. 그녀는 "배가 어뢰 공격을 받으면 전쟁입니다. 폭풍 속에서 암초에 부딪히면 자연 재해입니다. 그러나 구명정이 충분하지 않아서 죽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라고 지적했다.[2] 하지만 영국 조사 위원회의 공식 보고서는 추가 구명정이 반드시 상황을 바꾸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시사하기도 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승무원은 제한된 시간 안에 모든 구명정을 제대로 내리지 못했고, 구명정 훈련도 없었으며, 비상 상황 발생 시 대처 방법에 대한 사전 정보도 승무원에게 제공되지 않았다.[6]
하트는 인터뷰에서 배가 두 동강 났다고 꾸준히 주장했는데,[7][8] 이는 1985년 로버트 발라드가 난파 현장을 발견하면서 사실로 확인되었다. 그녀는 또한 SS ''캘리포니안''호에 대한 논란에 대해서도 단호한 입장을 보였다. ''캘리포니안''호는 ''타이타닉''호에서 불과 몇 마일 떨어진 곳에 있었지만, 조난 신호 로켓과 구조 요청에 응답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았다.[9] 하트는 ''캘리포니안''호가 기존에 알려진 약 30.58km가 아닌, ''타이타닉''호에서 약 16.09km 미만 거리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저는 [''캘리포니안''호]를 보았습니다. 정말 가까이 있었어요... 저는 19마일 떨어진 배를 보지 못했습니다. 저는 너무 가까이 있는 배를 보았고, 당시에는 9마일도 안 된다고 했는데, 지금은 19마일이라고 하려 합니다... 저는 그걸 봤어요, 그냥 '수평선 위의 불빛'이 아니었고, 배라는 것을 알 수 있었어요. 그리고 우리 로켓이 발사되는 것을 보았는데, 그 배가 봤어야 했어요. 음, 이번 조사에서는 그들이 그걸 봤지만 위험의 징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대서양 한가운데 밤에 로켓이 터지면 문제가 생길 거라고 생각했을 텐데요.[10]
1987년 난파 현장에서 인양 작업이 시작되자, 하트는 ''타이타닉''호가 희생자들의 묘지이며 존중받아야 한다고 즉각적으로 비판했다. 그녀는 인양자들을 "무감각과 탐욕"에 빠진 "행운 사냥꾼, 독수리, 해적, 도굴꾼"이라고 칭하며 강하게 비난했다.[11] ''타이타닉: 완전한 이야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들이 결코 그 일부분을 끌어올리려고 시도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저는 그들이 이곳이 1,500명의 사람들이 죽지 말았어야 할 무덤이라는 것을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저는 그들이 내려가서 무덤을 파헤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며, 저는 그것에 매우 반대합니다.
에바 하트는 80대가 되어서도 타이타닉호 관련 활동을 활발하게 이어갔다. 1982년에는 미국으로 돌아가 타이타닉 역사 협회 컨벤션에 참가하여 침몰 70주년을 기념했다. 이후 1987년, 1988년, 1992년에도 컨벤션에 참여했다. 1994년에는 자서전 ''타이타닉호의 그림자 – 생존자의 이야기''를 출간하여 배에서의 경험과 침몰 이후 삶에 미친 영향에 대해 상세히 기록했다. 1995년 4월 15일, 참사 83주년이 되던 날에는 같은 2등실 타이타닉호 생존자였던 에디스 브라운과 함께 런던 국립 해양 박물관 부지에 마련된 추모 정원의 현판을 헌정했다.
2. 4. 사회 활동과 명예
하트는 생애 동안 여러 직업을 가졌다. 그녀는 호주에서 전문 가수로 활동했으며, 보수당의 조직 위원이었고, 치안 판사이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자원 봉사자로서, 하트는 군인들을 위한 오락 행사를 조직하고 블리츠 이후 사람들에게 비상 물품을 배포했다. 그녀는 1996년 사망할 때까지 소롭티미스트 인터내셔널 이스트 런던 지부의 회원이었으며, 1970년부터 1971년까지 클럽 회장을 역임했고 34년 동안 회원으로 활동했다.1974년 신년 서훈에서, 하트는 "런던에서의 정치 및 공공 서비스"에 기여한 공로로 대영 제국 훈장 회원(MBE)으로 임명되었다.[5] 이는 켄트 공작에 의해 3일 근무제 기간 동안 수여되었다.
2. 5. 말년과 죽음
에바 하트는 80대까지도 타이타닉호 관련 활동을 활발하게 이어갔다. 1982년에는 미국으로 돌아가 타이타닉 역사 협회 컨벤션에 참가하여 침몰 70주년을 기념했다. 그녀는 1987년, 1988년, 1992년에 세 차례 더 컨벤션에 참여했다. 1994년에는 자서전 ''타이타닉호의 그림자 – 생존자의 이야기''를 저술하여 배에서의 경험과 침몰의 지속적인 영향에 대해 묘사했다. 1995년 4월 15일, 참사 83주년이 되던 날, 그녀는 같은 2등실 타이타닉호 생존자 에디스 브라운과 함께 런던 국립 해양 박물관 부지에 추모 정원 현판을 헌정했다.에바 하트는 1996년 2월 14일 91번째 생일을 맞은 지 2주 만에 런던의 호스피스에서 암으로 사망했다. 그녀의 사망으로 8명의 생존자가 남았다.[2] 그녀를 기리기 위해 그녀가 살았던 Chadwell Heath의 Wetherspoons 펍이 일본 로드에 위치해 있으며, 'The Eva Hart'로 명명되었다.[13]
3. 유산과 영향
에바 하트는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의 생존자로서, 오랜 기간 동안 사고에 대한 증언과 경험을 공유하며 대중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녀의 이야기는 단순한 생존 기록을 넘어, 재난의 비극과 인간의 회복력에 대한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러한 활동은 그녀를 대중문화 속에서 중요한 인물로 만들었으며, 다양한 방식으로 그녀의 삶과 경험이 기록되고 기억되고 있다. 또한, 그녀가 오랫동안 거주했던 지역에서는 그녀를 기리는 움직임도 있었다.
3. 1. 대중문화
하트가 타이타닉호와 맺은 관계와 이후 수년간의 적극적인 활동은 그녀를 여러 미디어에서 유명하게 만들었는데, 여기에는 논픽션 서적, 박물관, 전시회 등이 포함된다.- 1995년의 ''타이타니카''를 비롯한 여러 타이타닉 다큐멘터리 영화에 하트와의 인터뷰가 실렸다.[14]
- 1994년 채드웰 출판사에서 출판한 ''타이타닉의 그림자''(Shadow of the Titaniceng)는 로널드 C. 데니 교수가 그녀와 협력하여 쓴 하트의 전기이다. 초판 이후 사소한 변경을 거쳐 여러 차례 재출판되었다.[15]
- ''에바와 어린 키티의 타이타닉''(Eva and Little Kitty on the Titaniceng)은 2012년 시드셀 미디어에서 출판한 어린이 책으로, 하트의 재난 당시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제작되었다.[16]
- 제임스 카메론의 1997년 영화 ''타이타닉''에는 아버지가 딸에게 "엄마 손을 잡고 착한 아이가 되렴"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하트의 아버지 벤자민이 재난의 밤에 그녀를 구명보트에 태울 때 비슷한 말을 했던 것을 인용한 것이다. 그녀와의 인터뷰는 1997년 영화에 대한 비하인드 다큐멘터리에도 포함되었다.[17]
3. 2. 추모
에바 하트는 1996년 2월 14일, 91번째 생일을 맞은 지 2주 만에 런던의 호스피스에서 암으로 사망했다.[2] 그녀의 사망으로 타이타닉 생존자는 8명이 남게 되었다. 그녀를 기리기 위해 그녀가 살았던 Chadwell Heath의 일본 로드(Japan Road)에 위치한 Wetherspoons 펍이 'The Eva Hart'라는 이름으로 명명되었다.[13]참조
[1]
웹사이트
Titanic: Interview with Eva Hart on the 75th Anniversary of the Sinking
https://altnersandi.[...]
[2]
뉴스
Eva Hart, 91, a Last Survivor With Memory of Titanic, Dies
https://query.nytime[...]
New York Times
1996-02-16
[3]
웹사이트
Biography
http://www.encyclope[...]
[4]
Youtube
Eva Hart Speaks About Her Memories of The Titanic
https://www.youtube.[...]
[5]
간행물
1973-12-28
[6]
웹사이트
British Wreck Commissioner's Inquiry Report - Account of the Saving and Rescue of Those Who Survived - Boats
https://www.titanici[...]
2021-10-13
[7]
방송
The Way It Was | Eva Hart
http://www.bbc.co.uk[...]
1987-04-11
[8]
라디오
Today | Eva Hart, Titanic Survivor
http://www.bbc.co.uk[...]
1983-12-22
[9]
서적
The Titanic Lost... And Found
Random House
[10]
Youtube
The Way It Was
https://www.youtube.[...]
BBC
1987
[11]
웹사이트
Titanic in the Courts
http://www.archaeolo[...]
[12]
웹사이트
That Fateful Night
http://www.euronet.n[...]
[13]
웹사이트
The Eva Hart
https://www.jdwether[...]
[14]
영화
Titanica (1995)
https://www.imdb.com[...]
[15]
서적
Shadow of the Titanic
https://www.amazon.c[...]
[16]
서적
Eva and Little Kitty on the Titanic
https://www.amazon.c[...]
[17]
문서
Titanic – a screenplay by James Cameron
http://www.imsdb.com[...]
IMS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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