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토니아 망명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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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스토니아 망명 정부는 소련의 에스토니아 점령 이후, 국가의 연속성을 유지하기 위해 설립된 정부이다. 1940년 소련의 에스토니아 침공으로 정부가 붕괴된 후, 마지막 헌법 총리였던 위리 울로츠를 중심으로 망명 정부가 수립되었다. 1944년 독일 점령기에는 에스토니아 국가위원회가 결성되어 저항 운동을 이끌었다. 1953년 아우구스트 레이가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공식적인 망명 정부를 선포했고, 1992년 에스토니아 독립 회복과 함께 마지막 총리 하인리히 마르크가 신임장을 레나르트 메리 대통령에게 넘기면서 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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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토니아 망명정부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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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공용어 | 에스토니아어 |
수도 | 탈린 |
망명 정부 소재지 | 스톡홀름 오슬로 뉴욕 시 |
역사 | |
시작 사건 | 에스토니아 공화국 국가 위원회가 공화국의 최고 권력 기관임을 선포 |
시작 날짜 | 1944년 8월 1일 |
종료 사건 | 레나르트 메리가 에스토니아 대통령으로 취임 |
종료 날짜 | 1992년 10월 6일 |
주요 사건 | 소비에트 연방 국가 평의회의 에스토니아 독립 승인 |
주요 사건 날짜 | 1991년 9월 6일 |
존속 기간 | 1944년 - 1992년 |
정치 | |
정치 체제 | 망명 정부 |
수상 직무 대행/총리 대행 | 아우구스트 레이 (1945–1963) 엔노 펜노 (1990–1992) |
기타 | |
상태 | 망명 정부 |
2. 역사적 배경
1940년 소련군은 에스토니아를 침공하여 점령했다. 대통령 콘스탄틴 패츠는 체포되어 소련으로 추방되었고, 이후 많은 정부 구성원들이 추방되거나 처형되었다.[2]
같은 해 7월, "인민 ''리이고구''"를 선출하기 위한 조작된 선거가 실시되었다. 이 선거는 에스토니아 헌법에 위배되는 불법적인 선거였다.[2] "인민 리이고구"는 에스토니아를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선언하고 소련 가입을 청원했다.
패츠는 사임을 강요받았고, 요하네스 바레스가 대통령 권한대행 총리가 되어 에스토니아의 소련 편입을 주도했다. 그러나 당시 헌법상 총리였던 위리 울로츠는 바레스의 임명이 불법이며 자신이 합법적인 국가 원수 대행이라고 주장했다.
1942년 6월, 에스토니아 정치 지도자들은 비밀 회동을 통해 지하 정부 구성과 공화국 연속성 유지 방안을 논의했다.[3] 1944년 4월, 에스토니아 공화국 선거 위원회는 바레스의 총리 임명이 불법이며, 울로트스가 대통령 직무를 대행하는 총리가 되었다고 결정했다.[4]
2. 1. 소련의 에스토니아 점령 (1940)
소련군은 1940년 6월 16~17일 에스토니아를 침공하여 점령했다. 소련 당국은 대통령 콘스탄틴 패츠를 체포하여 소련으로 추방했고, 그는 1956년 감옥에서 사망했다.[2] 현 정부 및 전 정부 구성원 다수가 추방되거나 처형되었는데, 여기에는 8명의 전직 국가 원수와 38명의 장관이 포함되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지하로 숨어들었다.1940년 7월 14~15일에 "인민 ''리이고구''"를 위해 조작 선거가 치러졌으며, 유권자들은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하는 단일 후보 명부에 투표했다. 이 선거는 현재 에스토니아 헌법에 따라 상원에서 승인되지 않은 선거법에 근거하여 치러졌기 때문에 불법적이고 위헌적인 것으로 간주된다.[2] 상원은 점령 직후 해산되었고 다시 소집되지 않았다. "인민 리이고구"는 7월 21일에 회의를 열어 에스토니아를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선언하고 소련 가입을 청원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패츠는 7월 21일 또는 7월 22일(출처에 따라 다름)에 사임을 강요받았다. 에스토니아 헌법 제46조에 따라, 6월에 임명된 공산주의가 지배하는 괴뢰 정부의 총리였던 요하네스 바레스는 "대통령 권한대행 총리"라는 직함으로 대통령 권한을 승계하여 에스토니아가 8월 9일에 공식적으로 소련에 편입될 때까지 소련의 최종 인수를 주도했다.
그러나 소련 점령 당시 마지막 헌법 총리였던 위리 울로츠는 바레스의 총리 임명이 불법이라고 주장했으며, 따라서 그는 패츠가 제거된 상태에서 합법적인 국가 원수 대행이었다. 울로츠는 독일 점령 초기에 해당하는 1941년 7월에 새로운 에스토니아 정부를 임명하려 했지만, 독일 당국은 에스토니아를 주권 국가로 인정하는 것을 거부했다.
2. 2. 에스토니아 헌법과 정통성 문제
소련군이 1940년 에스토니아를 점령하고 콘스탄틴 패츠 대통령을 체포하여 추방한 후, 1940년 7월 14~15일에 조작된 선거가 실시되었다.[2] 이 선거는 에스토니아 헌법에 따라 상원의 승인을 받지 않은 선거법에 근거하여 치러졌기 때문에 불법이며 위헌적인 것으로 간주된다.[2] 상원은 점령 직후 해산되어 다시 소집되지 않았다.요하네스 바레스는 패츠에 의해 총리로 임명되었으나, 이는 불법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위리 울로츠는 패츠가 제거된 상태에서 합법적인 국가 원수 대행이라고 주장했다.
1942년 6월, 소련의 탄압에서 살아남은 에스토니아 정치 지도자들은 비밀 회동을 갖고 지하 에스토니아 정부 구성과 공화국 연속성 유지 방안을 논의했다.[3] 1943년 1월 6일, 스톡홀름에 있는 에스토니아 외교 대표부 회의에서 위리 울로트스가 헌법에 따라 총리 책임을 계속 수행해야 한다고 결정되었다.[3]
1944년 4월 20일, 에스토니아 공화국 선거 위원회는 비밀 회의를 열고 바레스의 총리 임명이 불법이며, 울로트스가 1940년 6월 21일부터 대통령 직무를 대행하는 총리가 되었다고 결정했다.[4] 울로트스는 오토 티에프를 부총리로 임명했고, 이후 티에프는 임시 총리로 지명되어 에스토니아 정부를 복원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3. 에스토니아 국가위원회 (1944)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의 에스토니아 점령 기간 동안, 에스토니아 정부와 반독일 저항 운동에 참여한 인사들은 에스토니아 공화국 국가위원회를 1944년 3월 23일에 구성했다. 이 위원회는 카렐 리이다크가 이끌었으며, 1944년 8월 1일에는 에스토니아 공화국의 최고 권력임을 선포했다.[3] 8월 15일 또는 16일부터는 오토 티에프가 위원회를 이끌었다.
3. 1. 독일 점령기의 저항 운동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의 에스토니아 점령 기간 동안, 에스토니아 공화국 국가위원회는 에스토니아 정부와 반독일 저항 운동에 참여한 개인들로 구성되었다. 이 위원회는 1944년 3월 23일부터 카렐 리이다크가 이끌었으며, 8월 15일 또는 16일부터는 오토 티에프가 이끌었다. 위원회는 1944년 8월 1일 에스토니아 공화국의 최고 권력임을 선포했다.3. 2. 독립 재건 시도와 실패
1942년 6월, 소련의 탄압에서 살아남은 에스토니아의 정치 지도자들은 에스토니아에서 점령 세력의 눈을 피해 회동을 갖고, 지하 에스토니아 정부의 구성과 공화국의 연속성을 유지하기 위한 방안을 논의했다.[3] 1943년 1월 6일, 스톡홀름에 있는 에스토니아 외교 대표부에서 회의가 열렸다. 에스토니아 공화국의 법적 연속성을 유지하기 위해, 헌법에 따라 마지막으로 적법하게 재임한 위리 울로트스가 총리로서의 책임을 계속 수행해야 한다고 결정되었다.[3]1944년 4월 20일, 에스토니아 공화국 선거 위원회 (''Vabariigi Presidendi Asetäitja Valimiskogu'', 대통령 권한 대행을 선출하기 위해 헌법에 명시된 기관)가 탈린에서 비밀 회의를 열었다. 참석자는 다음과 같다.
- 위리 울로트스, 소련 점령 이전 에스토니아의 마지막 총리.
- 요한 홀베르크, 국군 총사령관 대리.
- 오토 푸크, 하원 의장.
- 알프레드 마우러, 국민 평의회 부의장.
- 미켈 클라센, 에스토니아 대법원 판사.
위원회는 바레스가 햍스에 의해 총리로 임명된 것이 불법이며, 울로트스가 1940년 6월 21일부터 대통령의 직무를 대행하는 총리가 되었다고 결정했다.[4] 1944년 6월 21일, 울로트스는 오토 티에프를 부총리로 임명했다. 1944년 9월 18일, 암으로 고통받던 울로트스는 오토 티에프를 임시 총리로 지명하고 11명의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정부를 임명했다. 1944년 9월 20일, 울로트스는 건강이 악화된 상태에서 스웨덴으로 떠났다. 티에프는 헌법에 따라 직무를 수행하고, 독일군이 떠난 틈을 타 적법한 에스토니아 정부가 복원되었음을 선언했다.
이 정부의 대부분의 구성원은 9월 21일에 탈린을 떠났고, 티에프는 9월 22일에 떠났다. 왕립 국제 문제 연구소의 보고에 따르면, 9월 21일 에스토니아 국민 정부가 선포되었고, 에스토니아군은 툼페아의 정부 건물을 점령하고 독일군에게 철수를 명령했다.[5] 픽 헤르만 깃발 탑에는 독일 국기가 에스토니아 삼색기로 교체되었다. 그러나 티에프의 정부는 요한 피트카가 이끄는 에스토니아 군대가 독일군과 소련군과 충돌하면서 통제력을 유지하지 못했다. 9월 22일, 소련군은 탈린을 장악하고 에스토니아 국기를 내렸다.
티에프 정부는 탈린에서 탈출했다. 마지막 회의는 9월 22일 푀가리 마을에서 열렸다. 그러나 발트해를 건너 탈출하기 위해 대기하던 배의 엔진에 문제가 생겨 제때 도착하지 못했다. 티에프를 포함한 대부분의 정부 관계자와 공무원들은 진격해 오는 소련군에 의해 체포, 투옥, 추방 또는 처형되었다. 티에프는 시베리아에서 10년을 생존했고 1976년 에스토니아로 돌아와 사망했다. 카렐 리이다크 농업부 장관만이 1945년 1월 16일 은신 중에 사망했다.
4. 망명 정부의 활동 (1953-1992)
1953년 1월 12일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공식적인 에스토니아 망명 정부가 선언된 이후,[7] 알프레드 마우러를 중심으로 한 다른 정치 세력과의 경쟁 속에서도 아우구스트 레이 정부가 유일한 정통성을 가진 세력으로 남았다. 1963년 레이 사후에도 정부 수반 대행 직위는 계속 승계되었으며, 1992년까지 총 5개의 망명 정부가 구성되어 활동했다.
망명 정부는 에스토니아 국가의 연속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미국의 Stimson 독트린에 따라 발트 3국에 대한 소련의 점령은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뉴욕 총영사관을 중심으로 한 외교 활동과 아일랜드에서의 법적 투쟁[9] 등을 통해 에스토니아의 주권을 지키고자 했다.
1992년 10월 8일, 대통령 직무를 수행한 마지막 총리 하인리히 마르크는 새로 취임한 대통령 레나르트 메리에게 신임장을 넘겨주며 망명 정부의 역할을 종료했다. 메리 대통령은 에스토니아 망명 정부가 국가의 법적 연속성을 지켜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했다.
4. 1. 망명 정부 수립
아우구스트 레이는 1945년 1월 9일 위리 울루오츠가 사망한 후, 생존자 중 최고위급으로서 국가 원수 대행 역할을 맡았다. 레이는 스웨덴에 있던 티프 정부의 생존자들의 지원을 받았다. 레이는 소련의 합병 전 모스크바에 있던 마지막 에스토니아 외교관이었으며, 1940년 6월 리가를 거쳐 스톡홀름을 통해 모스크바에서 탈출했다.[6]레이는 1953년 1월 12일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공식적인 에스토니아 망명 정부를 선언했다.[7] 오슬로가 선택된 이유는 노르웨이는 그러한 정치 활동에 대한 금지가 없었지만, 스웨덴은 금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스토니아의 다른 정치인들은 대표 기구를 통해 대통령을 선출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 그룹은 1940년 이전 에스토니아 국가 평의회의 부의장이었던 알프레드 마우러가 이끌었다. 마우러는 1953년 3월 3일 독일 아우구스트도르프에서 망명 중인 공화국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선출되었다. 마우러의 계보는 망명 공동체에서 더 많은 지지를 받았지만, 그는 새로운 정부를 임명하지 않았고 (티프 정부가 여전히 재임 중이며 새로운 정부가 필요하지 않다고 언급) 이 계보는 1954년 9월 20일 마우러의 사망으로 소멸되었다. 이로 인해 레이 정부만이 유일한 정통성 경쟁자가 되었다.
정부 수반 대행의 직위는 1963년 레이 사망 이후 승계에 의해 계속 이어졌다. 1953년부터 1992년까지 5개의 망명 정부가 구성되었다.
4. 2. 망명 정부의 내분
울루오츠가 1945년 1월 9일에 사망한 후, 정부 내 생존자 중 최고위급이었던 아우구스트 레이가 국가 원수 대행 역할을 맡았다. 레이는 스웨덴에 있던 티프 정부의 생존자들의 지원을 받았다. 레이는 소련의 합병 전 모스크바에 있던 마지막 에스토니아 외교관이었으며, 1940년 6월 리가를 거쳐 스톡홀름을 통해 모스크바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6]레이는 1953년 1월 12일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공식적인 에스토니아 망명 정부를 선언했다.[7] (오슬로가 선택된 이유는 노르웨이는 그러한 정치 활동에 대한 금지가 없었지만, 스웨덴은 금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에스토니아 정치인들은 대표 기구를 통해 대통령을 선출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 그룹은 1940년 이전 에스토니아 국가 평의회의 부의장이었던 알프레드 마우러가 이끌었다. 마우러는 1953년 3월 3일 독일 아우구스트도르프에서 망명 중인 공화국 대통령 권한대행 (Vabariigi Presidendi Asetäitja)으로 선출되었다. 마우러의 계보는 망명 공동체에서 더 많은 지지를 받았지만, 그는 새로운 정부를 임명하지 않았고 (티프 정부가 여전히 재임 중이며 새로운 정부가 필요하지 않다고 언급) 이 계보는 1954년 9월 20일 마우러의 사망으로 소멸되었다. 이로 인해 레이 정부만이 유일한 정통성 경쟁자가 되었다.
정부 수반 대행의 직위는 1963년 레이 사망 이후 승계에 의해 계속 이어졌다. 1953년부터 1992년까지 5개의 망명 정부가 구성되었다.
4. 3. 외교 활동
1945년 1월 9일 위리 울루오츠가 사망한 후, 정부 내 생존자 중 최고위급이었던 아우구스트 레이가 국가 원수 대행 역할을 맡았다. 레이는 스웨덴에 있던 오토 티프 정부 생존자들의 지원을 받았다. 레이는 소련의 합병 전 모스크바 주재 마지막 에스토니아 외교관이었으며, 1940년 6월 리가를 거쳐 스톡홀름으로 탈출했다.[6]1953년 1월 12일 레이는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공식적인 에스토니아 망명 정부를 선언했다.[7] 다른 정치인들은 대표 기구를 통해 대통령을 선출해야 한다고 믿었으나, 레이 정부만이 유일한 정통성 경쟁자가 되었다. 1963년 레이 사망 이후 정부 수반 대행 직위는 승계되었고, 1953년부터 1992년까지 5개의 망명 정부가 구성되었다.
발트 3국 중 에스토니아만이 공식적인 망명 정부를 수립했다.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의 경우, 주권은 각국 외교 공관에 위임되었다. 에스토니아의 경우에도 외교 공관은 외교를 수행하고 일상적인 국가 업무를 관리하는 주요 수단이었다. 주요 공관은 뉴욕 총영사관이었다.
미국의 Stimson 독트린에 따라, 발트 3국에 대한 소련의 점령 정당성은 결코 인정되지 않았다. 에스토니아의 주요 외교 권한은 뉴욕 주재 에스토니아 영사관에서 행사되었기 때문에, 오슬로에 있던 망명 정부 역할은 상당 부분 상징적인 성격을 띠었다. 아일랜드의 에스토니아 영사관은 소송 절차를 진행했다. 에스토니아 선박들은 소련 항구로 가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세 척의 에스토니아 선박과 라트비아 선박 두 척은 대신 아일랜드의 중립 항구를 선택했다. 소련 주 영국 대사는 선박 소유권을 얻기 위해 더블린 고등법원에 소송을 제기했으나, 에스토니아의 명예 영사 존 맥에보이는 소송에 성공적으로 반대했다.[9]
에스토니아 망명 정부는 에스토니아 국가의 연속성을 유지하는 역할을 했다. 대통령 직무를 수행한 마지막 총리인 하인리히 마르크는 1992년 10월 8일, 새로 취임한 대통령 레나르트 메리에게 자신의 신임장을 넘겨주면서 망명 정부 업무를 종료했다. 메리는 에스토니아 망명 정부가 에스토니아 국가의 법적 연속성을 지켜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5. 망명 정부 총리 목록 (1953-1992)
이름 | 임기 |
---|---|
요하네스 시카르 | 1953년 1월 12일 – 1960년 8월 22일 |
퇴니스 킨트 | 1960년 8월 22일 – 1962년 1월 1일 |
알렉산데르 바르마 | 1962년 1월 1일 – 1963년 3월 30일 |
퇴니스 킨트 | 1963년 3월 30일 – 1970년 12월 23일 |
하인리히 마르크 | 1971년 5월 8일 – 1990년 3월 1일 |
엔노 페노 | 1990년 3월 1일 – 1992년 9월 15일 |
참조
[1]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Estonia
https://books.google[...]
2004
[2]
서적
Identity and Continuity of States in Public International Law
https://books.google[...]
Librairie Droz
[3]
웹사이트
Chronology
http://www.historyco[...]
[4]
간행물
Professor Uluots, the Estonian Government in Exile and the Continuity of the Republic of Estonia in International Law
2000-03
[5]
서적
Otto Tief
https://books.google[...]
Royal Institute of International Affairs. Information Dept.
1945
[6]
서적
Diplomats Without a Country
https://books.google[...]
2001
[7]
뉴스
Plaque unveiled in Oslo to remember Estonia's exiled government
http://news.err.ee/1[...]
[8]
뉴스
Annexed Baltic States: Envoys Hold On to Lonely U.S. Postings
https://www.latimes.[...]
1988-10-31
[9]
학술지
Eire High Court: Zarine v. Owners, etc. S. S. Ramava, McEvoy & Ors. v. Owners, etc. S. S. Otto, McEvoy and Veldi v. Owners, etc. S. S. Piret and S. S. Mall, Eckert & Co. v. Owners, etc. S. S. Everoja
American Society of International Law
1942-07
[10]
웹사이트
President of the Republic at the State Dinner hosted by President T. E. Mary McAleese and Dr. Martin McAleese
https://web.archive.[...]
President.ee
2008-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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