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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란트 국가판무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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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란트 국가판무관부는 나치 독일이 제2차 세계 대전 중 점령한 발트 3국과 벨라루스 지역에 설치한 행정 구역이다.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 이후 아돌프 히틀러의 법령에 따라 설립되었으며, 힌리히 로제와 에리히 코흐가 국가판무관으로 임명되었다. 알프레트 로젠베르크의 장관 권한은 제한적이었으며, 군사, 안보, 인력, 경제 등 다양한 분야에서 다른 고위 관계자들이 통제권을 행사했다. 오스트란트는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벨라루스 4개의 총독구로 나뉘었으며, 독일화 계획과 강제 노동, 홀로코스트 등 나치의 정책이 시행되었다. 1943년부터 붉은 군대에 의해 점령지가 탈환되기 시작했고, 1944년 11월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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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란트 국가판무관부 - [전쟁]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상태독일국가판무관부
위치동유럽
존속 기간1941년 – 1945년
수도리가
면적1,042,000 km²
상징
독일 국기 (1935–1945)
국기
제국수리
문장
국가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
정치
정치 체제민간 행정
국가판무관힌리히 로제 (1941–1944)
에리히 코흐 (1944–1945)
역사
주요 사건발트 작전 (1941년 6월 22일)
국가판무관부 설립 (1941년 7월 17일)
민간 행정 시행 (1941년 7월 25일 12:00)
에스토니아 추가 (1941년 12월 5일)
벨라루스 분리 (1944년 4월 1일)
소련, 리가 재점령 (1944년 10월 13일)
공식 해체 (1945년 1월 21일)
쿠를란트 포위망 항복 (1945년 5월 10일)
인구 통계
사용 언어독일어 (공식)
러시아어
벨라루스어
리투아니아어
라트비아어
에스토니아어
폴란드어
이디시어
종교동방 정교회
가톨릭
개신교
유대교
추정 인구19,200,000 명
경제
통화Reichskreditkassenscheine (de facto)
현재 국가
이전 및 이후
이전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리투아니아 SSR
라트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라트비아 SSR
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스토니아 SSR
이후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리투아니아 SSR
라트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라트비아 SSR
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스토니아 SSR

2. 역사

1941년 6월 22일, 독일은 소비에트 연방에 대해 바르바로사 작전을 개시하여 적군을 압도하고 광대한 영토를 점령했다. 같은 해 7월 17일, 오스트란트(Ostland) 제국 총독구가 설치되고, 힌리히 로제(Heinrich Röse)가 제국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알프레트 로젠베르크는 1941년 당시 이 지역을 "발트 랜드"(발트 지방)라고 부르는 것을 구상했으나,[18] 측근인 오토 브로이티가움(Otto Bräutigam)과 게오르크 라이프브란트(Georg Leibbrandt)가 반대했기 때문에 독일어로 "동쪽의 땅"이라는 뜻의 "오스트란트"라는 이름으로 구상을 변경했다.

1943년부터 제국 총독구는 점차 적군에게 탈환당했다. 1944년 7월에는 벨라루스 전토를 해방했고, 발트 3국도 대부분 탈환했다.

1944년 9월 8일에는 우크라이나 국가판무관부의 제국 총독을 역임했던 에리히 코흐(Erich Koch)가 오스트란트 제국 총독직을 이어받았다. 1944년 11월 10일, 오스트란트 제국 총독구는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1945년에는 쿠를란트 포켓(Courland Pocket)만 남게 되었고, 쿠를란트 반도에 고립된 채 유럽 전선에서의 종전을 맞이했다.

2. 1. 배경

소비에트 연방 파르티잔들이 벨라루스민스크, 핀스크 등지의 주요 도로와 철로 및 주변 지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1944년 8월 19일부터 12월 31일까지의 소련 작전


원래 점령 동부 지역 총독이었던 알프레드 로젠베르크는 1941년 여름 이전에 결국 오스트란트로 알려지게 될 지역에 대해 "발트 지역"(Baltenland)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구상했다.[4] 당시 로젠베르크의 주요 동료였던 오토 브라우티감은 이 아이디어에 반대했다. 그는 나중에 발표에서 로젠베르크(발트 독일인이었음)가 이 계획을 추진하는 데 있어 "발트 친구들"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했는데, 이 계획은 벨라루스를 추가한 "발트 제국 총독부"를 형성하는 것이었고, "이를 통해 백러시아인들도 발트인으로 간주될 것"이라고 했다. 로젠베르크의 또 다른 중요한 동료인 게오르크 라이브란트도 이에 반대했다. 그는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용어를 사용하기를 원하는 발트 해 연안 국가 주민들의 동정심을 완전히 잃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들은 독일의 전쟁 노력을 지지하는 사람들이나 이 지역의 인종적으로 가치 있는 정착민으로서도 확보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1941년 6월 22일, 독일은 소비에트 연방에 대해 바르바로사 작전을 개시했다. 독일군이 적군을 압도하여 광대한 영토를 점령했다.

2. 2. 설치 및 해체

1941년 6월 22일, 독일은 소비에트 연방에 대해 바르바로사 작전을 개시하여 적군을 압도하고 광대한 영토를 점령했다.[5]

1941년 7월 17일, 오스트란트 국가판무관부가 설치되고, 힌리히 로제가 국가판무관으로 임명되었다.[6] 같은 날짜의 총통 법령은 나치 독일의 동부 점령지에 라익스코미사리아트를 설립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각 국가판무관부의 구조는 동일한 법령에 의해 정의되었으며, 이들 지역은 히틀러가 임명하고 그에게만 책임을 지는 국가판무관이 이끌었다.[6]

1942년 독일 제국과 그 보호령(빨강), 동맹국 및 점령지(갈색), 이탈리아(녹색), 국가판무관부(일부 갈색)


1943년부터 국가판무관부는 점차 소련군에게 탈환되었다. 1944년 7월에는 벨라루스 전역이 해방되었고, 발트 3국 대부분 지역도 탈환되었다.

1944년 9월 8일, 우크라이나 국가판무관부의 국가판무관이었던 에리히 코흐가 오스트란트 국가판무관직을 이어받았다.

1944년 11월 10일, 오스트란트 국가판무관부는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1945년에는 쿠를란트 포켓만이 남았고, 쿠를란트 반도에 고립된 채 유럽 전선에서의 종전을 맞이했다.

3. 통치 구조



바르바로사 작전(독일의 소련 침공) 이후, 독일은 동쪽에 광대한 영토를 정복했다. 처음에는 베어마흐트 당국의 군사 점령 하에 있었지만(군집단 후방지역), 군사 상황이 허락하는 대로 이 지역에 독일 통치 하의 보다 영구적인 형태의 행정이 수립되었다.[5]

1941년 7월 17일자 총통 법령에 따라 동부에 행정 구역으로서 나치 독일의 라익스코미사리아트가 설립되었다. 각 라익스코미사리아트는 히틀러가 임명하고 그에게만 책임을 지는 라익스코미사르가 이끌었다.[6]

라이히스코미사리아트 오스트란트의 행정 구역


라이히스코미사리아트 오스트란트는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백러시아의 4개 “총독구”(Generalbezirke)로 세분되었으며, 각 총독구는 총독(Generalkommissar)이 관할하였다. 총독구는 다시 “군”(Kreisgebiete)으로 나뉘었다. 발트 3국에서는 이전의 주(에스토니아: Maakonad, 라트비아: Aprinka, 리투아니아: Apskritys)가 하위 행정구역(Kreise)으로 유지되었다. 동쪽으로 정복한 영토는 전쟁 기간 내내 군사 통제 하에 있었다. 오스트란트의 예상되는 미래 확장에 이들 영토를 포함시키려는 의도였다. 여기에는 인그리아뿐만 아니라 스몰렌스크, 프스코프, 노브고로드 지역도 라이히스코미사리아트에 편입될 예정이었다. 에스토니아의 새로운 동쪽 국경은 레닌그라드-노브고로드 선까지 확장될 계획이었고, 일멘호와 볼호프 강이 발트 국가의 새로운 동쪽 국경을 형성하는 반면, 라트비아는 벨리키예 루키 지역까지 확장될 예정이었다.[11][12] 벨라루스스몰렌스크 지역을 포함하여 동쪽으로 확장될 예정이었다.[13]

라이히스코미사리아트 오스트란트의 지역 행정은 라히스코미사르 힌리히 로제가 이끌었다. 그의 아래에는 행정적 계층 구조가 있었으며, 각 총독구는 총독(Generalkommissar)이 이끌었고, 지역 행정관(Gebietskommissars)은 각각 군(Kreisgebieten)을 관할했다. 전 지역의 독일 행정 중심지이자 라이히스코미사르의 본부는 라트비아 리가에 있었다.

이 과정에서 SS와 민정 간의 긴장된 관계가 있었는데, 특히 지역 상급 SS 장교 프리드리히 예켈른의 성격으로 인해 상황이 더욱 복잡해졌다. 그는 부패, 잔혹 행위, 무분별한 무모함으로 인해 SS의 반대자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3. 1. 독일 행정부

1941년 7월 17일자 총통의 법령에 따라 동부 점령지에 대한 행정 구역으로서 나치 독일의 "라익스코미사리아트"(Reichskommissariat)가 설립되었다. 각 국가판무관부는 히틀러가 임명하고 그에게만 책임을 지는 라익스코미사르(Reichskommissar)로 알려진 독일 민정 장관이 이끌었다.[6] 오스트란트에 임명된 인물은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오버프레지덴트이자 가울라이터였던 힌리히 로제였다. 국가판무관부의 지역 정부는 에스토니아의 "국가 지휘관"(Reichskomissar), 라트비아의 "총감독", 리투아니아의 "총고문" 하에 조직될 예정이었다.

알프레드 로젠베르크의 장관 권한은 실제로 심각하게 제한되었다. 베어마흐트친위대는 군사 및 안보 문제를 관리했고, 노동 라익스지휘관 프리츠 자우켈은 인력과 작업 지역을 통제했으며, 헤르만 괴링알베르트 슈페어는 영토의 경제적 측면을 완전히 관리했고, 라익스우편청은 동부 지역의 우편 서비스를 관리했다. 이러한 독일 중앙 정부의 개입은 해당 부처를 무시하는 "특별 행정"(Sonderverwaltungen)으로 알려졌다. 1941년 9월부터 이전 7월에 법령으로 제정된 민정이 실제로 설립되었다. 힌리히 로제와 에리히 코흐는 가울라이터의 독립성과 권위를 가지고 자신의 지역을 관리하려고 했기 때문에 이러한 그들의 의무 위반에 대해 반발했다. 1942년 4월 1일, 점령된 소련 영토의 민간 행정 지역에 아르바이츠베라이히(arbeitsbereich, 제국 외부의 당 간부 조직 명칭)가 설립되었고, 그 후 에리히 코흐와 힌리히 로제는 알프레드 로젠베르크와의 의사소통을 점차 중단하고 마르틴 보어만과 당 관방(Party Chancellery)을 통해 아돌프 히틀러와 직접 거래하는 것을 선호했다.

1941년 7월, 현장에서 실현되기 전에 점령된 소련 영토의 대부분에서 민정이 선포되었다. SS가 무제한적인 안보 및 치안 권력을 행사하는 SS 및 경찰 지도 구조(SS and Police Leadership Structure)로 채워진 권력 공백이 발생했고, 이는 민정이 생겨날 가을에 꺼림칙하게 포기했다.

  • '''국가 전권대표'''(Reichskommissar)
  • * 힌리히 로제, 1944년 12월까지
  • * 에리히 코흐, 1944년 12월 이후

  • '''총독'''(Generalkommissar)

지역총독
에스토니아Karl-Siegmund Litzmann|카를-지크문트 리츠만de
라트비아Otto-Heinrich Drechsler|오토-하인리히 드레히슬러de
리투아니아Theodor Adrian von Renteln|테오도어 아드리안 폰 렌텔른de
벨라루스빌헬름 쿠베 (1943년까지)
쿠르트 폰 고트베르크 (1943년 이후)


3. 2. 현지 협력 기구

위에 언급된 독일 정치 지도자들 외에도, 라인하르트 장관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총독 카를-지그문트 리츠만 및 총독 빌헬름 쿠베를 포함하여, ''라이히스콤미사리아트 오스트란트'' 전역의 지역 협력 구조에는 다음과 같은 인물들이 포함되었다.[15]

지역인물
에스토니아할마르 매, 오스카르 안젤루스, 알프레드 벤트(또는 벤트), 오토 레스먼트, 한스 사르, 오스카르 외픽, 아놀드 라딕, 요하네스 소들라
라트비아오스카르스 댄커스, 루돌프스 뱅게르스키스
리투아니아유오자스 암브라제비추스, 페트라스 쿠빌리우나스
벨라루스벨라루스 중앙 위원회 출신 벨라루스 민족주의 지도자들


4. 행정 구역

라이히스코미사리아트 오스트란트는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그리고 벨라루스(백러시아) 4개의 “총독구”(Generalbezirke)로 세분되었으며, 각 총독구는 총독(Generalkommissar)이 관할하였다. 총독구는 다시 “군”(Kreisgebiete)으로 나뉘었다. 발트 3국에서는 이전의 주(에스토니아: Maakonad, 라트비아: Aprinka, 리투아니아: Apskritys)가 하위 행정구역(Kreise)으로 유지되었다.

라이히스코미사리아트 오스트란트의 지역 행정은 라히스코미사르 힌리히 로제가 이끌었다. 그의 아래에는 행정적 계층 구조가 존재했다. 각 총독구는 총독(Generalkommissar)이 이끌었고, 지역 행정관(Gebietskommissars)은 각각 군(Kreisgebieten)을 관할했다. 전 지역의 독일 행정 중심지이자 라이히스코미사르의 본부는 라트비아 리가에 있었다.

오스트란트 국가판무관부의 행정 구역
총독구중심 도시하위 행정 구역 (Kreisgebiete)총독
에스토니아레발 (탈린)칼-지그문트 리츠만
라트비아리가오토-하인리히 드렉슬러
리투아니아카우엔 (Kaunas)테오도어 아드리안 폰 렌텔른
벨라루스민스크빌헬름 쿠베(1941–1943); 쿠르트 폰 고트베르크(1943–1944)



1944년 4월 1일, 제너럴베치르크 바이스루테니엔은 라이히스코미사리아트 오스트란트에서 분리되어 직접 동부 점령 지역 총독부의 지휘를 받았다.[15][14]

5. 나치 정책

오스트란트 국가판무관부의 단기적인 정치 목표는 우크라이나, 카프카스, 모스크바 지역과는 달랐다. 벨라루스와 통합될 발트 지역은 가까운 미래에 독일과 통합되기 전에 독일화된 보호령으로 편성될 예정이었다. 알프레드 로젠베르크는 이 지역이 스웨덴, 덴마크, 독일의 지배를 받은 700년의 역사를 통해 근본적으로 "유럽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으므로 독일에 "생활권"을 제공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히틀러를 포함한 주요 나치 당원들도 동의하는 견해였다.[7]

반면 벨라루스인들은 점령 동부 지역을 위한 제국 장관부 학자들에 의해 "작고 약한 농민"으로 간주되었지만, "민족적 무관심 속에 살고 있지만, 동방 공간의 모든 민족 중에서 가장 해롭지 않고 따라서 가장 위험하지 않은" 존재이며 이상적인 착취 대상이었다.[7] 로젠베르크는 벨라루스가 미래에 오스트란트의 발트 지역과 독일 점령 폴란드에서 온 여러 가지 바람직하지 않은 인구 요소들을 수용할 적절한 지역이 될 것이라고 제안했으며, 벨라루스를 거대한 자연 보호 구역으로 만드는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다.[8]

나치 정권은 튜턴 기사단과 북방 십자군을 참조하여 이 지역을 전통적으로 독일인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간주하고, 슬라브족에 의해 잠식된 이 지역에 전후 독일인 정착을 장려할 계획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프스코프 지방에서 에스토니아계 독일인과 네덜란드인들이 루마니아에서 이주해 온 사례가 있는데, 이 네덜란드 정착민의 정착은 네덜란드-독일 단체인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Nederlandsche Oost-Compagnie)''에 의해 장려되었다.[9]

탈린(''레발(Reval)''), 카우나스(''카우엔(Kauen)''), 다우가프필스(''뒤나부르크(Dünaburg)'') 등 많은 발트 도시의 역사적인 독일어 및 게르만어와 유사한 지명이 유지되거나 도입되었다. 일부 나치 이데올로그들은 이 지역을 독일에 편입시키려는 계획을 강조하기 위해 에스토니아를 ''페이푸스란트(Peipusland)'', 라트비아를 ''뒤날란트(Dünaland)''로 부르자는 제안을 했다.[10] 한자 동맹의 가장 동쪽에 위치한 무역 거점이었던 노브고로드는 ''홀름가르트(Holmgard)''로 개명될 예정이었다.[11] 점령 기간 동안 독일인들은 "지역" 독일어 신문인 ''도이체 차이퉁 임 오스트란트(Deutsche Zeitung im Ostland)''를 발행했다.

1941년 11월 15일, 힌리히 로제는 공식 법령("오스트란트 발표문(Verkündungsblatt für das Ostland)")을 통해 발트 국가들과 벨라루스 지역의 모든 소련 국가 및 당 소유 재산을 몰수하고 독일 행정부에 이관했다.[6] 오스트란트에서는 소련이 국유화했던 토지를 이전 소작농 소유주에게 반환했고, 도시에서는 소규모 공방, 산업 시설, 사업체를 이전 소유주에게 반환했지만, 당국에 세금과 할당량을 납부해야 했다. 유대인의 재산은 몰수되었다. 벨라루스에서는 이전 소련 정부 소유의 모든 재산을 관리하기 위한 국영 기업이 설립되었다. 빌헬름 쿠베는 독일 행정관 중 한 명이었다.

헤르만 괴링 공장, 만네스만, IG 파르벤, 지멘스 등 오스트게젤샤프텐(국가 독점 기업)과 파텐피르멘(독일 정부를 대표하는 민간 산업 회사)이 몰수된 기업을 관리하기 위해 신속하게 임명되었다. 다임러-벤츠와 보마그는 리가와 키예프에 있는 중장비 정비 공장을 인수하여 독일의 정비 공장과 연계하여 포획된 러시아 T-34 전차와 KV-1 전차의 정비를 담당했다.

벨라루스에서 독일 당국은 사람들에게 재산, 소유권 또는 개인적 주도성의 기본 개념에 대한 지식을 부정했다고 주장하는 "유대인 볼셰비키" 정책을 개탄했다. 발트 지역과 달리 당국은 "전쟁과 점령 초기 단계 동안 인구가 진심으로 협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이는 자치 행정에 어느 정도 자유를 줄 수 있는 방법이었다"고 인식했다.

독일은 동방 생존권 확보를 위해 다수의 슬라브인이 거주하던 소련에 침공하여, 점령지의 슬라브인들을 추방하고 독일인을 식민시켜 점령지의 게르만화를 계획했다. 특히 에스토니아인, 라트비아인, 리투아니아인은 "가장 쉽게 게르만화할 수 있다"고 여겼다. 독일 점령 이전, 이 지역에는 48만 명의 유대인이 거주하고 있었지만, 독일 점령 후 극심한 유대인 학살로 대부분의 유대인이 살해되거나 해외로 추방되었다.

5. 1. 독일화 계획

알프레드 로젠베르크는 1941년 여름 이전에 오스트란트를 "발트 지역"(Baltenland)이라고 칭하는 것을 구상했다.[4] 그러나 로젠베르크의 주요 동료였던 오토 브라우티감은 이 아이디어에 반대했다. 게오르크 라이브란트도 발트 해 연안 국가 주민들의 동정심을 잃을 수 있다고 주장하며 반대했다.[4]

오스트란트의 단기 정치 목표는 우크라이나, 카프카스, 모스크바 지역과 달랐다. 벨라루스와 합쳐질 발트 지역은 가까운 미래에 독일과의 통합에 앞서 독일화된 보호령으로 조직될 예정이었다. 로젠베르크는 이 지역이 스웨덴, 덴마크, 독일 지배하에 700년의 역사를 통해 근본적으로 "유럽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으므로 독일에 "생활권"을 제공해야 한다고 말했다.[7] 반면 벨라루스인들은 점령 동부 지역을 위한 제국 장관부 학자들에 의해 "작고 약한 농민들"이지만, "민족적 무관심 속에 살고 있지만, 동방 공간의 모든 민족 중에서 가장 해롭지 않고 따라서 가장 위험하지 않은" 존재이며, 이상적인 착취 대상이었다.[7] 로젠베르크는 벨라루스가 미래에 오스트란트의 발트 지역과 독일 점령 폴란드에서 온 바람직하지 않은 인구 요소들을 수용할 지역이 될 것이라고 제안했다.[8] 그는 또한 벨라루스를 거대한 자연 보호 구역으로 만드는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다.[8]

이 정권은 전통적으로 독일인이 거주하는 지역(튜턴 기사단과 북방 십자군 참조)으로서 슬라브족에 의해 잠식된 지역으로 간주하여 전후 독일인 정착을 장려할 계획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프스코프 지방에서 에스토니아계 독일인과 네덜란드인들이 루마니아에서 이주해 온 사례가 있다. 이 네덜란드 정착민의 정착은 네덜란드-독일 단체인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Nederlandsche Oost-Compagnie)''에 의해 장려되었다.[9]

많은 발트 도시의 역사적인 독일어 및 게르만어와 유사한 지명이 유지되거나 도입되었다. 예를 들어, ''레발(Reval)''(탈린), ''카우엔(Kauen)''(카우나스), ''뒤나부르크(Dünaburg)''(다우가프필스) 등이 있다. 일부 나치 이데올로그들은 이 지역의 독일 편입 계획을 강조하기 위해 에스토니아를 ''페이푸스란트(Peipusland)'', 라트비아를 ''뒤날란트(Dünaland)''로 부르자는 제안을 했다.[10] 한자 동맹의 가장 동쪽에 위치한 무역 거점이었던 고대 러시아 도시 노브고로드는 ''홀름가르트(Holmgard)''로 개명될 예정이었다.[11] 점령 기간 동안 독일인들은 "지역" 독일어 신문인 ''도이체 차이퉁 임 오스트란트(Deutsche Zeitung im Ostland)''를 발행했다.

독일은 동방 생존권 확보를 위해 다수의 슬라브인이 거주하던 소련에 침공하여, 점령지의 슬라브인들을 추방하고 독일인을 식민시켜 점령지의 게르만화를 계획했다. 특히 에스토니아인, 라트비아인, 리투아니아인은 "가장 쉽게 게르만화할 수 있다"고 여겼다.

독일 점령 이전, 이 지역에는 48만 명의 유대인이 거주하고 있었지만, 독일 점령 후 유대인 학살로 대부분의 유대인이 살해되거나 해외로 추방되었다.

5. 2. 강제 노동 및 경제 수탈

1941년 11월 15일, 힌리히 로제는 공식 법령("오스트란트 발표문(Verkündungsblatt für das Ostland)")을 통해 발트 국가들과 벨라루스 지역의 모든 소련 국가 및 당 소유 재산을 몰수하고 독일 행정부에 이관했다.[6]

독일 당국은 오스트란트에서 소련이 국유화했던 토지를 이전 소작농 소유주에게 반환했다. 도시에서는 소규모 공방, 산업 시설, 사업체를 이전 소유주에게 돌려주었지만, 이들은 당국에 세금과 할당량을 납부해야 했다. 유대인의 재산은 몰수되었다. 벨라루스에서는 이전 소련 정부 소유의 모든 재산을 관리하기 위한 국영 기업이 설립되었다. 빌헬름 쿠베는 독일 행정관 중 한 명이었다.

오스트게젤샤프텐(국가 독점 기업)과 파텐피르멘(독일 정부를 대표하는 민간 산업 회사)이 몰수된 기업을 관리하기 위해 빠르게 임명되었다. 헤르만 괴링 공장, 만네스만, IG 파르벤, 지멘스는 오스트란트와 우크라이나에 있는 모든 이전 소련 국영 기업의 통제권을 장악했다. 예를 들어, 다임러-벤츠와 보마그는 리가와 키예프에 있는 중장비 정비 공장을 인수하여 독일의 정비 공장과 연계하여 포획된 러시아 T-34 전차와 KV-1 전차의 정비를 담당했다.

벨라루스에서 독일 당국은 "유대인 볼셰비키" 정책을 비판하며, 이 정책이 사람들에게 재산, 소유권, 개인적 주도성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을 가르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발트 지역과는 달리, 당국은 "전쟁과 점령 초기 단계 동안 인구가 진심으로 협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이는 자치 행정에 어느 정도 자유를 줄 수 있는 방법이었다"고 인식했다.

나치슬라브인들을 독일 제국의 노예 노동력으로 여겼으며, 필요하다면 죽을 때까지 일하게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5. 3. 홀로코스트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오스트란트에는 약 48만 명의 유대인이 살고 있었다. 오스트리아, 독일 등 다른 지역에서 강제 이주된 사람들도 있었다.[16]

1941년 6월, 독일의 소련 침공으로 이 지역 유대인들은 리가와 카우나스의 나치 게토에 갇혔다. 게토는 과밀하고 불결했으며, 유대인들은 이곳에서 처형장으로 끌려갔다.

소련 적군(Red Army)빌뉴스카우나스의 절멸 수용소를 나치의 "최종 해결(Final Solution)"의 일부로 보았다. 주민 유대인에 대한 절멸은 침공 직후 거의 즉시 시작되었고, 나중에는 강제 이주된 사람들에게까지 확대되었다.

1943년 가을, 게토는 "청산"되었고, 남은 주민들은 카이저발트와 단치히(Danzig) 근처 슈투트호프(Stutthof)로 이송되거나, 노동 능력이 없는 경우 살해되었다.[16]

독일 점령 이전 이 지역에는 48만 명의 유대인이 거주하고 있었지만, 독일 점령 후 극심한 유대인 학살로 대부분이 살해되거나 해외로 추방되었다.

6. 저항 운동

소비에트 연방 파르티잔들이 벨라루스민스크, 핀스크 등지의 주요 도로와 철로 및 주변 지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5] 독일과 현지 보안 당국은 벨라루스에서의 소비에트 파르티잔 활동으로 끊임없이 바빴다. 그들은 파르티잔 활동 "감염 지역"인 면적 500~600km²가 민스크, 핀스크, 호멜, 브랸스크, 스몰렌스크, 비테프스크 주변과 이 지역의 주요 도로와 철도를 포함한다는 점을 알아챘다.[15]

7. 전후 처리

(이전 출력이 비어 있으므로, 수정할 내용이 없습니다. 원본 소스를 제공해주시면 '오스트란트 국가판무관부' 문서의 '전후 처리' 섹션을 작성해 드리겠습니다.)

참조

[1] 서적 Guidelines for Special Fields (13 March 1941) https://books.google[...] Berghahn Books 2006
[2] 웹사이트 Reichskommissariat Ostland: Schleswig-Holsteins Kolonie http://www.gegenwind[...] Gegenwind, Enough is Enough, and anderes lernen/Heinrich-Böll-Stiftung Schleswig-Holstein 1998-11-01
[3] 서적 Vom Generalplan Ost zum Generalsiedlungsplan https://books.google[...] Saur 1994
[4] 서적 Guidelines for Special Fields (13 March 1941) https://books.google[...] Berghahn Books 2006
[5] 서적 Hitler's War Aims: the Nazi State and the Course of Expansion W. W. Norton & Company Inc. 1973
[6] 웹사이트 Nazi Conspriracy and Aggression Volume 4 http://avalon.law.ya[...]
[7] 서적 The Kings and the Pawns: Collaboration in Byelorussia During World War II 2010
[8] 서적 2010
[9] 서적 Dat kan ons niet gebeuren...: het dagelijkse leven in de Tweede Wereldoorlog De Bezige Bij 1980
[10] 서적 Latvia in World War II https://books.google[...] Fordham University Press 2006
[11] 서적 German rule in Russia, 1941-1945: a study of occupation policies Westview 1981
[12] 서적 Estonia and the Estonians https://archive.org/[...] Hoover Press 2001
[13] 서적 Deutsche Herrschaft in Russland, 1941-1945: Eine Studie über Besatzungspolitik Droste Verlag GmbH 1958
[14] 웹사이트 Territoriale Veränderungen in Deutschland und deutsch verwalteten Gebieten 1874 – 1945: Generalbezirk Weißruthenien http://www.territori[...] 2010-02-15
[15] 서적 1958
[16] 서적 The Destruction of the European Jews https://books.google[...] Yale University Press 2003
[17] 웹사이트 Nazi conspiracy and aggression. https://avalon.law.y[...]
[18] 서적 Exploitation, Resettlement, Mass Murder: Political and Economic Planning for German Occupation Policy in the Soviet Union, 1940-1941 https://books.google[...] Berghahn Books 2006
[19] 서적 Latvia in World War II https://books.google[...] Fordham Univ Press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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