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드바브네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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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예드바브네 학살은 1941년 7월 10일, 폴란드 예드바브네에서 폴란드인들이 유대인들을 학살한 사건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의 소련 침공 이후, 지역 폴란드인들은 독일의 지시 또는 묵인 하에 마을 유대인들을 광장으로 모아 폭행하고 헛간에 가두어 불태워 최소 340명을 살해했다. 이 사건은 2000년 얀 T. 그로스의 저서 『이웃들』을 통해 널리 알려졌으며, 폴란드 정부는 조사를 통해 폴란드인의 책임을 인정하고 희생자들에게 사죄했다. 이후에도 학살의 책임과 진실 규명을 둘러싼 논쟁이 지속되었으며, 기념비 건립과 추모 행사가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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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드바브네 학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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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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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독일 점령 폴란드 예드바브네 |
날짜 | 1941년 7월 10일 |
유형 | 포그롬/대량 학살 |
희생자 수 | 최소 340명의 폴란드계 유대인 |
가해자 | 최소 40명의 폴란드인과 독일 야전 헌병대의 협력 |
동기 | 반유대주의, 약탈, 보복, 독일 선동 |
재판 | |
재판 | 1949–1950년 재판 (폴란드 인민 공화국) |
조사 | |
조사 | 1960–1965년 조사 (서독) 2000–2003년 국가기억원(IPN) 조사 (폴란드 공화국) |
2. 역사적 배경
1939년 9월, 그 전 달에 체결된 독소 불가침 조약 및 부속 비밀 의정서에 따라, 소련군이 폴란드를 침공했다. 이로 인해 비아위스토크 지방을 포함한 폴란드 동부 지역이 소련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 시기 피난민 유입으로 예드바브네의 유대인 인구는 약 1,600명으로 늘어난 것으로 추정된다.[55]
1941년 6월 22일, 나치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독일군은 빠르게 진격하여 7월 초까지 비아위스토크 지방을 점령했다.
독일 점령군은 이 지역에서 "유대인이 폴란드에 대한 소련의 범죄 행위를 지원하고 있다"는 선전을 퍼뜨리는 동시에, 지역 유대인을 살해하기 위한 특수부대를 조직했다. 예드바브네 북동쪽 마을인 비즈나에서는 독일군에 의해 수십 명의 유대인이 총살당하는 장면이 목격되기도 했다.
2. 1. 예드바브네의 유대인 공동체

예드바브네의 유대인 공동체는 17세기 또는 18세기에 형성되었다. 1931년 예드바브네의 인구는 2,167명이었고, 제2차 세계 대전 직전에는 약 3,000명으로 증가했으며 이 중 유대인은 1,000명에서 1,500명 사이였다.[62] 1937년 기준으로 예드바브네 인구의 60%는 폴란드인이었고 40%는 유대인이었다.
이 지역에서는 반유대주의 성향의 국민당과 그 국민 민주주의 운동 지지자들이 활동했다. 이들은 가톨릭 신자에 대한 유대인의 경제적 경쟁에 반대하며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와 그 후계자들의 사회주의 정부에도 반대 입장을 보였다. 그럼에도 1939년 이전까지 예드바브네에서 폴란드인과 유대인 사이의 관계는 비교적 양호한 편이었다. 한때 예드바브네에서 유대인 여성이 살해되고 며칠 후 다른 마을에서 폴란드 농부가 살해되자, 예드바브네 유대인들이 복수했다는 소문이 돌아 긴장이 고조되기도 했다. 유대인들은 유대인 학살을 우려했으나, 지역 사제와 랍비가 개입하여 문제를 해결했다.
폴란드 언론인 안나 비콘트에 따르면, 예드바브네 주민들은 인근 라지힐루프에서 1933년에 벌어진 라지힐루프 포그롬에 대해 알고 있었다. 이 포그롬은 국민 민주주의의 극우 파벌인 대폴란드 진영(OWP)이 조직한 것으로, 이들은 자신들의 폭력을 유대인의 보호자로 여겨지는 폴란드 국가에 대한 "혁명"이라고 불렀다. 포그롬 과정에서 유대인 1명이 살해되었고, 포그롬 가담자 4명은 폴란드 경찰에 의해 사살되었다. OWP는 반국가적이고 인종차별적인 활동으로 인해 폴란드 정부에 의해 금지되었다. 당시 폴란드 정부는 유대인에 대한 공격과 국가에 대한 반대 때문에 폴란드 민족주의 운동에 적대적이었으며, 유대인을 보호하려 노력하고 폭력적인 민족주의자들을 체포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정부는 유대인들이 폴란드 국가에 충성하려 한다고 인식했다.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유럽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같은 달 말, 소련의 붉은 군대는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에 따라 폴란드 동부 지역을 침공했다. 독일은 1939년 9월 28일 독일-소련 경계 및 우호 조약에 따라 예드바브네 주변 지역을 소련에 넘겨주었다. 안나 M. 치엔치알라에 따르면,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소련을 "독일보다 덜한 악"으로 여기며 환영했지만, 정통 유대교 신자 다수는 공산주의 이념을 거부했고, 사업가들과 동화된 유대 지식인들은 소련의 의도를 불신했다. 곧 소련 당국은 유대인 분트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사기업을 국유화하는 등 유대 지식인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NKVD(소련 비밀경찰)의 예드바브네 관련 문서에 따르면, 유대인이 요원이나 정보원으로 활동한 경우는 드물었으며, 오히려 폴란드인보다 적었다고 치엔치알라는 지적한다. 일부 젊은 유대인들은 평등과 사회 정의라는 공산주의 구호에 이끌려, 또한 사회적 상승 기회를 얻기 위해 소련 행정부나 민병대의 하위직을 맡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폴란드인들의 기억 속에는 "소련을 환영하는 유대인들의 모습"과 일부 공산주의 성향 유대인들이 NKVD와 협력했다는 인식이 강하게 남았다. 이러한 인식은 전쟁 전 우익 정당들이 퍼뜨린 유대-공산주의라는 고정관념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피난민 유입으로 이 시기 예드바브네의 유대인 인구는 약 1,600명으로 증가한 것으로 추정된다.[55]
안나 비콘트는 소련 점령 하에서 예드바브네의 폴란드인과 유대인들이 지역 민병대에 대해 서로 다른 경험을 했다고 기록했다. 폴란드 측에서는 민병대가 주로 유대인으로 구성되었다고 주장하는 반면, 유대인들은 소련에 봉사한 유대인이 있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예외적인 경우였다고 강조한다. 협력의 정도와 무관하게, 이러한 상황은 "전쟁 전 우익 정당이 조장한 유대-공산주의에 대한 널리 퍼진 고정관념을 강화했다"고 예르지 루코프스키와 후베르트 자바츠키는 분석했다. 크르지슈토프 페르사크는 전쟁 전 국민당이 사용한 반유대주의적 '유대 공산주의' 고정관념이 유대인을 소련 협력자로 보는 시각을 형성했고, 이후 소련군 철수가 복수심을 촉발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독일이 예드바브네 상황을 통제하고 있었지만, 지역 폴란드인들 사이에서 대량 학살에 기꺼이 참여할 수 있는 수십 명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2년간의 잔혹한 점령 이후, 지역 폴란드인들은 베르마흐트를 해방자로 맞이했다. 그들은 또한 소련 협력자들에 대한 강한 복수심을 느꼈으며, 유대인들을 그러한 협력자로 간주했다. 후자에 대한 태도는 이 지역에 만연한 반유대주의에 의해 조건화되었다... 이러한 모든 요인의 조합 결과, 예드바브네에서 독일의 영감과 격려는 호의적인 조건을 만났다"고 분석했다.
1941년 6월 22일, 독일이 바르바로사 작전을 개시하며 소련을 침공했고, 독일군은 예드바브네를 포함한 소련 점령 하의 폴란드 지역을 다시 점령했다. 미국의 역사학자 크리스토퍼 브라우닝은 이 시기를 "위로부터의 범죄 명령과 아래로부터의 폭력적 충동이 완화되지 않은 폭력의 분위기를 만들었다"고 묘사했다. 나치는 이 지역에서 "유대인이 폴란드에 대한 소련의 범죄 행위를 지원했다"는 선전을 퍼뜨리는 동시에, 지역 유대인을 살해하기 위한 특수부대를 조직했다. 예드바브네 북동쪽 마을인 비즈나에서는 독일군에 의해 수십 명의 유대인이 총살당하는 장면이 목격되기도 했다.
2. 2. 전간기 폴란드 사회와 반유대주의
우크라시아와 서부 비아위스토크 주변 지역은 1939년 이후 소련 점령 하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경험은 1941년 나치 독일군이 도착했을 때 일부 주민들이 그들을 해방자로 여기게 만드는 배경이 되었다. 또한, 이 지역에 존재하던 역사적인 반유대주의 정서는 독일의 선동과 결합하여 유대인에 대한 적대 행위가 발생하기 쉬운 환경을 조성했다.2. 3. 제2차 세계 대전 발발과 소련 점령
폴란드 북부의 비아위스토크 지방에 위치한 예드바브네는 작은 마을이었다. 1931년 인구는 2,167명이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직전에는 약 3,000명으로 증가했고, 이 중 유대인 인구는 1,000명에서 1,500명 사이였다.[62]1939년 9월, 그해 8월에 체결된 독소 불가침 조약과 부속 비밀 의정서에 따라 소련 군대가 폴란드를 침공했다. 이로 인해 비아위스토크 지방을 포함한 폴란드 동부는 소련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되었다. 당시 많은 유대인들은 나치 독일보다 소련을 덜 위협적인 존재로 여겼다. 이 시기 피난민 유입으로 예드바브네의 유대인 인구는 약 1,600명까지 늘어난 것으로 추정된다.[55]
소련 점령 기간 동안, 일부 유대인들이 소련 당국에 협력하는 모습이 나타났다. 이는 일부 폴란드인들 사이에서 유대인이 소련의 점령 통치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있으며, 이것이 폴란드인에 대한 억압으로 이어진다는 인식을 갖게 했다. 또한, 기존의 폴란드 국가 체제에 얽매이지 않고 소련의 지배 구조에 편입되려는 유대인들에 대해 일부 폴란드인들이 반감을 품었다는 분석도 존재한다.[55] 이러한 배경 속에서 "유대-볼셰비즘"과 같은 반유대주의적 고정관념이 폴란드인들 사이에서 강화되기도 했다.
2. 4. 독일의 소련 침공과 포그롬 선동
1941년 7월 10일 또는 그 전날 아침, 독일 비밀 경찰 또는 정보 요원이 예드바브네에 나타나 시의회와 만났다는 점에는 대체로 의견이 일치한다. 1945년 슈무엘 와서슈타인의 증언에 따르면, 7월 10일에 8명의 게슈타포 요원이 도착하여 시 당국과 만났다. 또 다른 증인은 4~5명의 게슈타포 요원이 도착하여 "시청에서 대화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증인들은 이 회의가 마을 유대인 학살을 논의하기 위해 열린 것으로 믿었다고 증언했다. 크시슈토프 퍼삭은 당시 폴란드인들이 검은 제복을 입은 모든 독일인을 '게슈타포 요원'이라고 불렀을 가능성을 지적하며, 이 회의가 독일 보안 경찰(Sicherheitspolizei) 또는 보안국(Sicherheitsdienst) 관료들과 임시 시 당국 사이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회의에서 예드바브네 유대인 살해 결정이 내려졌다는 것은 직접적인 증거는 없지만 여러 증언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내용이다.국립기억연구소(IPN)의 보고서에 따르면, 1941년 7월 10일 인근 마을에서 온 폴란드인들이 "마을 유대인 주민들의 계획된 살인에 참여할 의도"로 예드바브네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얀 T. 그로스는 학살에서 예르지 라우단스키와 카롤 바르돈을 포함한 4명의 남자가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이들은 이전에 소련 NKVD와 협력했고 이제는 독일 측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려 했다고 분석했다. 그는 또한 독일의 동의 없이는 마을에서 어떤 "지속적인 조직적인 활동"도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20] 국립기억연구소 역시 독일 군경의 존재 자체가 수동적이었을지라도 범죄에 대한 동의와 묵인을 의미한다고 밝혔다. 미국 홀로코스트 기념 박물관은 폴란드 주민들이 학살에 참여했으며, 선동 책임은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학살 당시 최소한 독일 경찰이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은 문서화되었다고 설명한다.[21]
학살 당일, 마을의 유대인들은 집에서 쫓겨나 시장 광장으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자갈 틈새의 풀을 뽑으라는 명령을 받았고, 이 과정에서 예드바브네와 인근 지역 주민들에게 구타당하고 모욕적인 행동(춤, 운동 등)을 강요당했다.

가해자들은 피해자들에게 Żydokomuna(유대-공산주의)라는 반유대주의적 딱지를 붙이며 소련 정권 협력을 비난했다. 도리스 베르겐은 이러한 비난이 종종 소련 범죄에 깊이 연루되었던 폴란드인들 자신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이는 자신들의 책임을 돌리고 새로운 독일 점령자에게 잘 보이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지적한다.[22] 40~50명의 유대인 남성들은 근처 광장에 있던 레닌 동상을 파괴하고, 그 잔해를 나무 들것에 실어 시장 광장을 거쳐 인근 헛간으로 옮기도록 강요받았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공산주의 노래를 불러야 했으며, 지역 랍비 아비그도르 비아워스토키와 코셔 도살업자 멘델 노른베르크가 행렬 선두에 섰다. 목격자 슈무엘 와서슈타인에 따르면, 이들은 헛간으로 끌려가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동상 잔해를 던진 후, 같은 구덩이에서 살해되어 매장되었다. 2001년 폴란드 정부 조사관들은 부분 발굴 과정에서 약 40명의 남성 유해, 코셔 도살업자의 칼, 콘크리트 레닌 동상의 머리가 있는 이 무덤을 발견했다.
예드바브네에 남아 있던 나머지 유대인 약 300명(남성, 여성, 어린이, 유아 포함)은 헛간 안에 갇힌 채 불태워졌다. 방화에는 이전 소련 보급품에서 나온 등유가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의 유해는 첫 번째 희생자 집단 근처의 헛간 부지 내 집단 무덤과 부지 인근의 또 다른 집단 무덤에서 2001년 발굴되었다.
몇몇 증인들은 독일 사진가들이 학살 장면을 촬영하는 것을 보았다고 보고했으며, 포그롬 자체가 촬영되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제기되었다.
이 사건이 독일의 교사(敎唆)에 의해 계획되었을 가능성이 지적되지만, 실제 실행은 폴란드인들이 주도했으며 그 동기에 대해서는 여러 분석이 있다. 대표적으로는 독일 침공 이전 소련 점령기에 유대인들이 인구 비율에 비해 과도하게 지도적 지위를 차지하고 폴란드인 억압에 관여했다는 주장, 또는 폴란드 국가에 소속되지 않고 소련 지배층에 편입되려는 유대인에 대한 폴란드인들의 반감이 원인이었다는 분석 등이 있다.[55] 그러나 폴란드인들의 학살 동기는 아직 명확하게 규명되지 않았다.[64]
3. 예드바브네 학살 (1941년 7월 10일)
1941년 7월 10일, 독일 점령 하의 폴란드 예드바브네에서 폴란드인 주민들이 유대인 이웃 수백 명을 학살한 사건이다. 학살 직전 독일 비밀 경찰 또는 정보 요원이 예드바브네에 나타나 시의회와 만났다는 증언이 있으며, 이 회의에서 유대인 학살이 논의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폴란드 국립기억연구소(IPN) 조사에 따르면, 학살은 예드바브네 및 인근 마을 폴란드인들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독일 당국의 암묵적 동의나 방조 하에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20][21] 학살 당일 유대인들은 시장 광장으로 끌려나와 폭행과 모욕을 당한 뒤, 일부는 살해되고 나머지는 헛간에 갇혀 불태워졌다. 가해자들은 유대인들이 소련에 협력했다는 지도코무나라는 반유대주의적 명분을 내세웠다.
2000년, 폴란드계 미국인 역사학자 얀 그로스가 저서 Sąsiedzi: Historia zagłady żydowskiego miasteczka|이웃 사람들: 어느 유대인 마을의 학살 이야기pl를 통해 폴란드인들이 학살의 주체였다고 주장하면서 폴란드 사회에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55][62][63] 그로스의 연구 방법론과 피해자 수 추정(1,600명)에 대해서는 비판도 제기되었으나,[55] 그의 저서는 예드바브네 학살에 대한 폴란드 사회의 성찰과 진상 규명 노력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IPN은 조사 결과 최소 340명의 유대인이 학살되었다고 발표했다.
3. 1. 학살의 전개
1941년 7월 10일 또는 그 전날 아침, 독일 비밀 경찰 또는 정보 요원이 예드바브네에 나타나 시의회와 만났다는 점에는 대체로 의견이 일치한다. 슈무엘 와서슈타인의 1945년 증언에 따르면, 7월 10일에 8명의 게슈타포 요원이 도착하여 시 당국과 만났다. 다른 증인은 4~5명의 게슈타포 요원이 도착해 "시청에서 대화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당시 폴란드에서는 검은 제복을 입은 모든 독일인을 '게슈타포 요원'으로 지칭하는 경향이 있었다. 증인들은 이 회의가 마을 유대인 학살을 논의하기 위해 열린 것으로 믿었다고 증언했다. 학살의 직접적인 가해자는 예드바브네와 인근 마을 주민들로 구성된 상당한 규모의 집단이었으며, 이들은 피해자를 직접 살해하거나, 시장 광장에 모인 유대인들을 감시하고 헛간으로 이송하는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다. 일부는 유대인 집을 약탈하거나 단순히 구경꾼 무리에 합류하기도 했다. 증인들은 시장 카롤락을 비롯한 임시 시 당국 구성원들이 학살을 조직했다고 지목했다. 독일 점령 당국의 정확한 역할은 불분명하지만, 살인을 승인하고 어쩌면 영감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국립기억연구소(IPN)의 보고서에 따르면, 1941년 7월 10일 인근 마을에서 온 폴란드인들이 "마을 유대인 주민들의 계획된 살인에 참여할 의도"로 예드바브네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얀 그로스는 학살에서 예르지 라우단스키와 카롤 바르돈 등 4명의 남자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이들은 이전에 소련 NKVD와 협력했지만 이제는 독일 협력자가 되려 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독일의 동의 없이는 마을에서 어떤 "지속적인 조직적인 활동"도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20] 미국 홀로코스트 기념 박물관 역시 학살 당시 마을에 최소한 독일 경찰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며, 독일 당국의 존재가 범죄에 대한 동의와 묵인을 의미한다고 지적했다.[21]
1941년 7월 10일 아침, 예드바브네의 유대인들은 강제로 집에서 쫓겨나 시장 광장에 모였다. 그곳에서 폴란드인 주민들은 유대인들에게 자갈 틈새의 풀을 뽑도록 명령하며 구타하고 모욕했다. 일부는 춤을 추거나 운동을 하도록 강요받기도 했다. 가해자들은 유대인들이 소련 정권과 협력했다는 "Żydokomuna"라는 반유대주의적 고정관념을 내세우며 폭력을 정당화하려 했다. 도리스 베르겐은 이러한 비난이 종종 가해자 자신의 소련 협력 사실을 은폐하고 새로운 독일 점령자에게 호감을 사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 지적한다.[22]
이후 약 40~50명의 유대인 남성들은 광장 근처에 있던 레닌의 동상을 파괴하고, 그 잔해를 나무 들것에 실어 시장 광장을 거쳐 인근 헛간으로 옮기도록 강요받았다. 이들은 공산주의 노래를 부르도록 강요당했으며, 지역 랍비인 아비그도르 비아워스토키와 코셔 도살업자 멘델 노른베르크가 행렬의 선두에 섰다. 목격자 슈무엘 와서슈타인에 따르면, 이들은 헛간으로 끌려가 구덩이를 파고 동상 잔해를 던져 넣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 후 같은 구덩이에서 살해되어 매장되었다. 2001년 국립기억연구소의 부분 발굴 조사 결과, 이 무덤에서 약 40명의 남성 유해와 코셔 도살업자의 칼, 콘크리트 레닌 동상의 머리가 발견되었다.
예드바브네에 남아 있던 나머지 유대인 약 300명(남성, 여성, 어린이, 유아 포함)은 헛간 안에 갇혔다. 가해자들은 아마도 이전 소련군 보급품 창고에서 가져온 등유를 사용하여 헛간에 불을 질렀다. 이 집단 학살의 희생자들은 첫 번째 희생자들이 묻힌 곳 근처에 매장되었다. 2001년 발굴 조사에서 헛간 기초 내부와 그 근처에서 집단 무덤이 발견되었다. 국립기억연구소는 최종적으로 학살 피해자 수를 약 340명으로 추산했다. 이는 과거 기념비에 새겨졌던 1,600명이라는 숫자와는 차이가 있다.[55]
몇몇 증인들은 독일 사진가들이 학살 장면을 촬영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보고했으며, 포그롬 자체가 영화로 촬영되었다는 추측도 있다.

국립기억연구소는 일부 유대인들이 학살 전날 저녁, 비유대인 지인들로부터 "유대인에 대한 집단 행동이 준비되고 있다"는 경고를 들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학살에서 탈출한 100명에서 150명 가량의 유대인들은 예드바브네에 마련된 개방형 게토에서 생활하다가 1942년 11월 워브자 게토로 이송되었다. 일부는 다른 마을로 피신했다. 1942년 11월, 독일군이 게토 수감자들을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로 이송하기 시작하자, 모셰 올셰비츠 부부, 그의 형제 도브, 레아와 야콥 쿠브란, 유제프 그론도프스키, 슈무엘 바세르슈타인 등 7명은 인근 마을 얀체브코로 다시 탈출했다. 이들은 1942년 11월부터 1945년 1월까지 안토니나 비르지코프스카와 알렉산데르 비르지코프스키 부부의 농장에 숨어 지냈다.[24][25] "폴란드 이웃들의 공격적인 태도"와 독일 관리들의 검문에도 불구하고[26] 비르지코프스키 부부는 1945년 1월 붉은 군대가 얀체브코를 해방할 때까지 이들을 성공적으로 보호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비르지코프스키 부부는 유대인을 도왔다는 이유로 폴란드 민족주의자들에게 구타를 당했고, 결국 그 지역을 떠나 바르샤바 근처 밀라노베크로 이주해야 했다.[27][28]
3. 2. 가해자와 피해자
폴란드 국립기억연구소(IPN)의 2002년 조사 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예드바브네 학살의 가해자와 피해자는 다음과 같다.
가해자IPN 조사 결과, 학살 당일 몇 명의 독일군이 현장에 있었던 것은 확인되었으나, 이들이 살해 행위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독일군의 사주 가능성은 제기되었다. 학살 범행의 결정적인 역할은 예드바브네의 폴란드인 주민이 수행했으며, 최소 40명의 폴란드인이 실행범으로 학살에 적극 가담한 것으로 밝혀졌다.
피해자1941년 7월 10일 아침, 예드바브네의 유대인은 강제로 집에서 끌려 나와 마을 광장에 모였다. 이 중 약 40명의 유대인은 광장 주변 정비와 레닌 동상 파괴 및 운반 작업을 강요당했다. 이 그룹의 정확한 살해 경위는 불분명하나, 시신은 헛간 안 구덩이에 묻히고 그 위에 파괴된 레닌 동상이 놓였다.
광장에 남아있던 다른 유대인 약 300명(여성과 아이 포함)은 헛간으로 끌려가 문이 잠긴 채 불태워졌다. 이때 소련군이 남긴 등유가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IPN은 이 두 사건을 통해 최소 340명의 유대인이 학살되었다고 결론지었으며, 이는 과거 알려진 1,600명이라는 피해자 수는 사실과 다르다고 판단했다. 피해자 중에는 비즈나나 콜노 등 다른 지역에서 포그롬을 피해 예드바브네로 피난 온 유대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편, 학살 과정에서 약 100명에서 150명 가량의 유대인은 현장에서 탈출하여 생존할 수 있었다. 이들 중 일부는 안토니나 비르지코프스카와 같은 폴란드인 이웃의 도움으로 숨어 지내며 전쟁에서 살아남았다.[24][25]
3. 3. 독일의 역할
2002년 국가기념원 조사 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독일군의 사주가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사건 당일 몇 명의 독일인이 현장에 있었던 것은 확실하지만, 이들이 학살 행위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조사 결과는 폴란드인들이 학살 범행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고 결론지었다.4. 학살 이후의 조사와 논쟁
2000년 5월, 폴란드계 미국인이자 뉴욕 대학교 교수인 얀 그로스가 『Sąsiedzi: Historia zagłady żydowskiego miasteczka|이웃 사람들pol』을 출간하면서 오랫동안 폴란드 사회에서 금기시되었던 예드바브네 학살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55] 이 책은 1941년 7월 10일, 예드바브네의 폴란드인 주민들이 나치 독일 점령군의 강요 없이 자발적으로 유대인 이웃 약 1,600명을 잔혹하게 살해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어 폴란드 사회에 큰 충격과 함께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55][62]
많은 폴란드인들은 자국민이 그러한 학살을 주도했다는 주장을 강하게 부정했으며[63], 언론과 학계에서도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다. 특히 그로스가 생존자 증언과 공산 정권 시절의 재판 기록을 주요 근거로 삼은 연구 방법론[55]과 그가 제시한 희생자 수 1,600명의 정확성[55] 등이 주요 쟁점이 되었다. 이러한 논쟁은 이후 폴란드 정부 차원의 공식적인 조사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4. 1. 초기 형사 조사 (1949-1965)
전쟁 직후인 1949년 5월 16일과 17일, 폴란드 웜자에서는 학살에 가담한 혐의로 기소된 사람들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총 21명이 기소되었고, 이 재판은 1950년까지 이어졌다.[65] 재판에 넘겨진 용의자 22명은 포그롬 동안 독일군과 협력한 혐의를 받았다. 피고인 중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은 없었고 3명은 문맹이었다. 재판 결과, 11명에게 8년에서 15년의 실형이 선고되었다.[65] 다른 기록에 따르면 12명이 폴란드에 대한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고 1명은 사형을 선고받았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 재판 과정에는 문제가 있었다. 일부 피고인은 보안국(UB)의 조사 과정에서 고문을 당해 자백했으나, 법정에서는 이를 강요된 진술이라며 철회하기도 했다.한편, 1960년 서독 검찰은 SS-하우프트슈름퓌러 볼프강 비르크너를 1941년 예드바브네, 라지우프, 봉소슈 등지에서 벌어진 유대인 학살에 연루된 혐의로 조사했다. 이 조사는 폴란드 유대인 중앙 위원회(CŻKH) 비아위스토크 지부장이었던 시몬 다트너의 연구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독일 검찰은 비르크너의 혐의를 입증할 명확한 증거를 찾지 못했지만, 조사 과정에서 새로운 독일인 증인을 확보했다. 이 증인은 학살 당시 준군사조직인 아인자츠그루페 B가 해당 지역에 배치되어 있었으며, 이 부대는 SS-오버슈름퓌러 헤르만 샤퍼가 지휘했다고 증언했다. 샤퍼의 특수 살인 부대가 라지우프 학살에서 사용한 방법은 불과 사흘 뒤 예드바브네에서 사용된 방법과 동일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1964년 루트비히스부르크에서 진행된 독일 조사에서 헤르만 샤퍼는 심문관에게 자신이 1941년에 트럭 운전사였다고 거짓 진술을 했다. 결국 피고인들에 대한 독일의 법적 절차는 1965년 9월 2일에 증거 불충분 등으로 종결되었다.
4. 2. 얀 T. 그로스의 "이웃들" (2000)

얀 토마스 그로스(Jan T. Gross)의 저서 『Sąsiedzi: Historia zagłady żydowskiego miasteczkapl』("이웃들: 유대인 마을의 파괴 이야기")는 2000년 5월 폴란드에서 출판되어 큰 파장을 일으켰다. 역사학자 피오트르 브로벨(Piotr Wróbel)은 이 책의 출간이 폴란드 사회에 "도덕적 지각 변동"을 가져왔다고 평가했다. 이 책은 같은 해 영어, 독일어, 히브리어로 번역되었으며, 영어판은 2001년 4월 프린스턴 대학교 출판부(Princeton University Press)에서 『이웃들: 폴란드 예드바브네 유대인 공동체의 파괴』(Neighbors: The Destruction of the Jewish Community in Jedwabne, Poland영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그로스는 책에서 "어느 날, 1941년 7월, 작은 동유럽 마을 인구의 절반이 다른 절반을 살해했다. 약 1,600명의 남녀와 어린이"라고 서술하며, 예드바브네 학살의 주체가 점령군인 독일군이 아니라 마을에 함께 살던 폴란드인 이웃들이었다고 주장했다. 이는 학살의 책임이 독일군에게 있다는 폴란드의 기존 공식 입장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30] 정치학자 마이클 샤피어(Michael Shafir)는 이 포그롬이 오랫동안 "공산주의 '역사의 암흑' 속에 갇혀 있었다"고 지적했다. 그로스는 독일군의 동의 없이는 학살과 같은 "지속적인 조직 활동"이 불가능했음을 인정하면서도, 학살 자체는 예드바브네와 주변 지역 폴란드인들이 자발적으로 저질렀으며, 독일군의 직접적인 강요는 없었다고 결론지었다.
그로스의 책에 묘사된 예드바브네 학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55]
- 1941년 7월 10일, 예드바브네의 폴란드인 주민들이 유대인 학살을 계획하고 실행했다. 점령군인 독일 측의 교사(敎唆, 부추김)는 있었지만,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 폴란드인들이 자발적으로 학살에 가담했다.
- 유대인들은 마을 광장에 집결된 후 구타당했으며, 일부는 마을 외곽으로 끌려가 살해되거나 헛간에 갇힌 채 불태워졌다. 이 과정에서 여성과 노인, 어린이도 무참히 희생되었다.
그로스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유대인 역사 연구소(Jewish Historical Institute)가 보관 중인 1945년 생존자 증언, 1949년부터 1950년까지 진행된 학살 관련 재판 기록, 미국으로 이주한 예드바브네 생존자들이 1980년에 펴낸 『Yedwabne: History and Memorial Book』, 그리고 1990년대에 그로스 자신과 영화 제작자들이 진행한 인터뷰 등을 주요 자료로 활용했다. 그는 생존 유대인의 증언을 반증이 없는 한 그대로 채택하는 "원사료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취했으며, 1949년 공산 정권 하에서 진행된 재판의 증언 내용도 중요하게 다루었다.[55]
『이웃들』의 출간은 폴란드 사회에 큰 충격과 함께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일부 폴란드 역사학자들은 그로스가 예드바브네 학살 문제에 주목한 점을 높이 평가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그의 연구 방법론에 대해 강한 비판을 제기했다. 주요 비판 내용은 그가 신뢰성이 떨어질 수 있는 생존자 증언에 지나치게 의존했으며, 여러 증언이 상충할 경우 폴란드인에게 불리한 내용을 선택하는 경향을 보였다는 점이다.[55] 또한, 홀로코스트(the Holocaust) 초기 단계에서 독일군의 역할과 학살의 연관성을 충분히 검토하지 않았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역사학자 댄 스톤(Dan Stone)은 일부 비판자들이 "사소한 세부 사항에 과도하게 집중하여 그로스 연구의 핵심적인 발견을 반박하려 했고, 부정확하다고 주장되는 내용들로 더 큰 그림을 덮어버리려 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로스가 제시한 희생자 수 1,600명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되었다. 사건 당일 유대인들이 불태워진 헛간의 규모를 고려할 때 그 정도 인원을 수용하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지적이었다. 다만 이 숫자는 그로스가 임의로 제시한 것이 아니라, 1960년대 초에 세워진 기존 추모비의 기록을 따른 것이었다.[55]
『이웃들』의 출판은 폴란드 사회, 특히 젊은 세대에게 과거사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에바 볼렌타르스카-오흐만(Ewa Wolentarska-Ochman)에 따르면, 이 책은 "젊은 세대가 지난 50년간 그러한 범죄가 어떻게 공공연히 알려지지 않고 언급되지 않았는지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었다."[35] 책 출간 이후 폴란드 내 언론, 방송 등에서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으며[62], "폴란드인이 그런 짓을 했을 리 없다"는 식의 민족주의적 반발도 나타났다.[63]
4. 3. 폴란드 정부 조사 (2000-2003)
2000년 5월, 폴란드계 미국인이자 뉴욕 대학교 교수인 얀 그로스가 『이웃 사람들(Sąsiedzi: Historia zagłady żydowskiego miasteczkapol)』을 출간했다. 이 책은 예드바브네 학살 당시 폴란드인이 주체가 되어 유대인을 살해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어 폴란드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55] 언론 매체를 통해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으며[62], 많은 폴란드인들은 자국민이 그러한 잔학 행위를 저질렀다는 주장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63]그로스는 책에서 학살이 1941년 7월 10일, 예드바브네의 폴란드인들에 의해 계획되고 실행되었으며, 점령자인 독일 측의 교사는 있었지만 강요는 없었고 오히려 폴란드인들이 학살에 자발적으로 참여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유대인들이 마을 밖으로 끌려가 구덩이를 파게 한 뒤 구타당하거나 헛간에 갇혀 불태워져 살해되었으며, 여성과 노인, 어린이도 예외는 아니었다고 묘사했다.[55]
그러나 그로스의 연구는 일부 비판에 직면했다. 특히 살아남은 유대인의 증언을 반증이 없는 한 그대로 채택하고, 1949년 공산 정권 하에서 진행된 재판 기록을 비판 없이 사용한 점은 사료 비판을 소홀히 했다는 지적을 받았다.[55] 또한 그가 제시한 희생자 수 1,600명은 학살 장소였던 헛간의 규모를 고려할 때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의문이 제기되었으나, 이는 그로스가 새로 주장한 숫자가 아니라 기존 기념비에 적힌 숫자를 따른 것이었다.[55] 이러한 논쟁은 결국 폴란드 정부 차원의 공식적인 조사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4. 3. 1. 유해 발굴
2000년 7월, 얀 T. 그로스의 책 『이웃들: 예드바브네의 유대인 공동체 파괴』가 출간된 후, 폴란드 의회는 국립 기억 연구소(IPN)에 새로운 조사를 명령했다.2001년 5월부터 6월까지 IPN은 학살이 일어난 헛간 부지에서 유해 발굴 조사를 실시했다. 이 조사 과정에서 두 개의 집단 매장지가 발견되었고, 불에 탄 시신들과 함께 레닌 흉상의 파편도 나왔다. 다리우스 스톨라에 따르면, 전문가들은 발견된 시신의 수가 400구에서 450구 이하일 것으로 추정했으며, 이는 학살 장소였던 헛간의 크기(19m × 7m)와 비교했을 때 일치하는 규모였다.
그러나 발굴 조사는 시작된 지 불과 5일 만에 중단되었다. 이는 정교회 유대인들이 유대교 율법(할라카)에 따라 유해 발굴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인권 의사 소속의 요셉 폴락 랍비는 부적절하게 매장된 시신을 다시 제대로 매장하는 것은 유대교 율법상 "적절할 뿐만 아니라 의무"라는 신학적 견해를 제시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대가 계속되자 폴란드 정부는 타협안을 받아들여, 유해의 최상층과 작은 파편만을 검사하고 큰 뼈 조각은 옮기지 않기로 합의했다.
국제 참관인 자격으로 발굴에 참여했던 인권 의사 소속 법의학 전문가 윌리엄 하글런드는 이 과정이 제대로 진행되었다면 몇 달은 걸렸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짧은 발굴 기간 때문에 정확한 희생자 수를 추정하는 것이 불가능했다고 평가했다. 하글런드는 발굴이 종료될 당시의 상황에 대해, 일부 폴란드인 조사관들이 한 랍비가 불에 탄 이빨과 뼈 조각을 다시 무덤에 넣는 것을 지켜보며 좌절감에 눈물을 흘렸다고 기록했다. 아담 로젠블라트는 그의 저서 『실종자를 찾아서』(2015)에서 이러한 발굴 중단으로 인해 예드바브네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영원히 불분명하게 남을 것 같다"고 평가했다.
4. 3. 2. 증언 청취
2년에 걸쳐 국가기억원(IPN) 조사관들은 주로 폴란드에서, 그리고 이스라엘과 미국에서 온 약 111명의 증인들을 인터뷰했다. IPN 증인 중 3분의 1은 학살의 일부를 목격한 사람이었으며, 대부분 당시 어린이였다. IPN은 또한 바르샤바, 비아위스토크, 웜자의 폴란드 문서 보관소, 독일 문서 보관소, 그리고 이스라엘 야드 바셈에서 문서를 수색했다.한편, 폴란드계 미국인이며 뉴욕 대학교 교수인 얀 그로스는 2000년 출간한 저서 『이웃 사람들』(Sąsiedzi: Historia zagłady żydowskiego miasteczkapol)에서 증언을 중요하게 다루었다.[55] 그는 살아남은 유대인의 증언을 반증이 없는 한 그대로 채택한다는 입장을 보였으며, 1949년 소련 점령 하 공산 정권 시기에 이루어진 예드바브네 사건 재판의 증언 내용도 인용했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 방식은 사료 비판을 충분히 거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일부 역사학자들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55]
4. 3. 3. 조사 결과
2000년 5월, 폴란드계 미국인 뉴욕 대학교 교수 얀 그로스가 『이웃 사람들(Sąsiedzi: Historia zagłady żydowskiego miasteczkapol)』을 출간하면서 폴란드인이 학살의 주체였다고 주장하자 폴란드 내에서 큰 논쟁이 벌어졌다.[55][62] 많은 폴란드인들은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63] 이 책에서 그로스는 약 1,600명의 유대인이 폴란드인 주도로 살해되었다고 기술했으나, 사료 비판 부족과 희생자 수 추정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었다.[55]이 논쟁을 계기로 폴란드 국가기억원(IPN)은 2년간의 조사를 진행했다. 조사관들은 폴란드, 이스라엘, 미국 등지에서 약 111명의 증인을 인터뷰했으며, 이들 중 다수는 학살 당시 어린이였던 목격자들이었다. 또한 바르샤바, 비아위스토크, 웸자 등의 폴란드 문서 보관소, 독일 문서 보관소, 이스라엘 야드 바셈에서 관련 문서를 수집하여 분석했다. 2001년에는 희생자 유해 발굴 조사를 시도했으나, 유대교 율법상의 이유로 반대에 부딪혀 5일 만에 중단되었다.[66]
2001년 1월, IPN 회장 레온 키에레스는 폴란드인 집단이 범행에 가담했음을 뒷받침하는 충분한 증거를 확보했다고 밝혔다. 같은 해 6월, 현장에서 발견된 독일제 탄피로 인해 독일군의 직접 개입 가능성이 제기되었으나, 이후 해당 탄피는 사건 당시의 것이 아닌 다른 시대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2002년 7월 9일, IPN은 최종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학살로 인해 최소 340명의 유대인이 사망했다. 이들은 두 그룹으로 나뉘었는데, 40~50명의 남성은 헛간에 불을 지르기 전에 살해되었고, 약 300명의 남녀노소는 산 채로 헛간에 갇혀 불태워졌다. IPN은 기존에 알려졌던 1,600명이라는 희생자 수는 "매우 가능성이 낮다"고 결론지었다.
보고서는 학살의 직접적인 실행자(''sensu stricto'')가 최소 40명의 "예드바브네와 그 주변의 폴란드 거주자"였다고 명시했다. 동시에, 사건 당시 예드바브네에 주둔하고 있던 독일 군경의 존재가 "수동적이었지만, 마을의 유대인 주민에 대한 범죄 행위를 용인하고 묵인한 것과 같았다"며, 학살에 대한 더 넓은 의미의 책임(''sensu largo'')은 독일 당국에도 있다고 지적했다.[36] 일부 증인들은 독일군이 유대인들을 시장으로 몰아넣었다고 증언했지만, IPN은 독일군이 유대인들을 헛간으로 직접 데려갔는지, 또는 현장에 있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증언이 엇갈려 명확히 확인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IPN은 "폴란드인들이 범죄 계획 실행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강조했다. 다만, 학살 당시 다수 주민들의 수동적인 태도가 범죄에 대한 암묵적 동의였는지, 아니면 가해자들의 잔혹 행위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는지는 판단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IPN의 조사 결과는 폴란드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특히 우익 민족주의 성향의 폴란드 가족 연맹(LPR)과 같은 일부 정치 세력은 보고서 내용을 강하게 비판했다. LPR은 키에레스 IPN 회장을 "유대인의 종"이라 비난하고, 그와 당시 대통령 알렉산데르 크바스니에프스키가 "폴란드 국민에게 돌을 던졌다"고 주장했다. LPR 소속 의원이었던 안토니 마치에레비치는 독일인이 아닌 폴란드인이 학살을 저질렀다는 IPN의 결론에 대해 공식적으로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다.
IPN은 2003년 6월 30일, 203페이지 분량의 상세 보고서를 발간했으며, 여기에는 인터뷰한 증인들의 증언 요약본(60~160페이지)이 포함되었다. 또한, 두 권으로 구성된 방대한 연구 및 문서 자료집인 ''Wokół Jedwabnego|보코우 예드바브네고pol''(제1권: ''연구'', 525페이지, 제2권: ''문서'', 1,034페이지)를 함께 출간했다. 같은 날, IPN은 "1941년 7월 10일 예드바브네에서 최소 340명의 유대인 국적 폴란드 시민을 집단 살해한 사건"과 관련하여, 이미 재판을 받았거나 생존해 있지 않은 용의자 외에는 기소할 대상이 없다고 판단하여 공식적으로 조사를 종결했다.[37][54]
한편, 예드바브네 학살과 관련하여 1949년 5월 웜자에서 재판이 열린 바 있다. 당시 21명이 학살 가담 혐의로 기소되었고, 이 중 11명에게 8년에서 15년의 징역형이 선고되었다.[65]
4. 4. 논란과 비판
얀 토마스 그로스(Jan T. Gross)가 2000년 5월 폴란드에서 출판한 저서 Sąsiedzi: Historia zagłady żydowskiego miasteczka|이웃들: 유대인 마을의 파괴 이야기pol는 피오트르 브로벨(Piotr Wróbel)에 따르면 폴란드 사회에 "도덕적 지각 변동"을 일으켰다. 이 책은 2001년 4월 프린스턴 대학교 출판부(Princeton University Press)에서 Neighbors: The Destruction of the Jewish Community in Jedwabne, Poland|이웃들: 폴란드 예드바브네 유대인 공동체의 파괴eng라는 제목으로 영어판이 출간되었다.
그로스는 "어느 날, 1941년 7월, 작은 동유럽 마을 인구의 절반이 다른 절반을 살해했다. 약 1,600명의 남녀와 어린이"라고 서술하며, 예드바브네 유대인들이 독일군이 아닌 폴란드인 이웃들에 의해 몰리고 살해되었다고 결론지었다. 이는 학살이 독일군에 의해 자행되었다는 기존 폴란드의 공식 발표와 정면으로 배치되었다.[30] 정치학자 마이클 샤피어(Michael Shafir)는 이 학살이 오랫동안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로스는 독일군의 동의 없이는 학살과 같은 "지속적인 조직 활동"이 불가능했음을 인정하면서도, 학살 자체는 예드바브네와 주변 지역 폴란드인들이 자발적으로 저질렀으며 독일군의 강요는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로스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유대인 역사 연구소(Jewish Historical Institute)의 1945년 증언, 1949년과 1950년에 있었던 관련 재판 기록, 미국으로 이주한 예드바브네 생존자들이 쓴 Yedwabne: History and Memorial Bookeng(1980), 그리고 1990년대에 그로스와 영화 제작자들이 직접 진행한 인터뷰 등을 자료로 활용했다.
그로스의 연구는 폴란드 내에서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일부 폴란드 역사학자들은 그가 외면받던 학살 문제에 주목한 점을 높이 평가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격렬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비판론자들은 그로스가 신뢰성이 부족할 수 있는 생존자 증언에 지나치게 의존했으며, 상반되는 증언이 있을 경우 폴란드인에게 불리한 증언을 선택적으로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홀로코스트(the Holocaust) 초기 단계에서 독일군의 역할과 학살의 연관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는 비판도 있었다. 역사학자 댄 스톤(Dan Stone)은 이러한 비판 중 일부는 "사소한 세부 사항에 과도하게 집중하여 그로스 연구의 핵심적인 발견을 반박하려 했고, 부정확하다고 주장하는 내용들로 더 큰 그림을 덮어버리려는 시도"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에바 볼렌타르스카-오흐만(Ewa Wolentarska-Ochman)에 따르면, 『이웃들』의 출판은 폴란드의 젊은 세대에게 "지난 50년 동안 어떻게 그러한 범죄가 공론화되지 않고 묻혀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게 만들었다.[35]
4. 5. 재조사 논의 (2019)
2019년 2월, 폴란드 국립기억연구소(IPN) 소장 야로스와프 슈아렉은 IPN이 재수사를 시작하고 남은 유해를 발굴할 준비가 되었다고 밝혔으며,[38] 같은 달 IPN 차원에서도 재발굴 가능성을 시사했다.[67] 그러나 3월에 국가 검찰청은 재수사나 발굴을 진행할 근거가 없다고 결정했다.[38] 마테우슈 모라비에츠키 총리 역시 같은 달 재발굴 진행 여부는 "다양한 상황"을 고려하여 신중히 결정할 것이라고 언급했다.[56] 이후 폴란드 당국은 재발굴이 필요하다는 구체적인 근거는 없다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표명했다.[67]5. 기억과 화해를 위한 노력
예드바브네 학살의 어두운 역사 속에서도, 일부 폴란드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유대인 이웃을 돕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안토니나 비르지코프스카와 알렉산데르 비르지코프스키 부부는 여러 유대인을 숨겨주었으며,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76년 1월 이스라엘의 야드 바셈으로부터 열방의 의인 칭호를 받았다.[39] 이는 전쟁 중 폴란드 사회 내 다양한 반응과 인간성의 복잡한 측면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5. 1. 추모와 사과
1963년,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자유와 민주주의 투쟁가 협회''는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 예드바브네에 기념비를 세웠다. 그러나 이 기념비의 비문에는 "유대인 학살 장소. 1941년 7월 10일 이곳에서 게슈타포와 나치 헌병이 1600명을 산 채로 불태웠다."라고 적혀 독일 측에 책임을 돌렸다. 학살 사건은 폴란드의 공식 역사 기록에서는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지만,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 구전되었고, 특히 이 지역 유대인 생존자들 사이에서는 생생하게 기억되었다.한편, 예드바브네에서 유대인을 숨겨주었던 안토니나 비르지코프스카(Antonina Wyrzykowska)와 알렉산데르 비르지코프스키(Aleksander Wyrzykowski) 부부는 공로를 인정받아 1976년 1월, 이스라엘의 야드 바셈으로부터 열방의 의인 메달을 받았다.[39] 하지만 이들은 유대인을 도왔다는 이유로 동료 폴란드인들에게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2001년 7월 10일, 학살 60주년을 맞아 폴란드 대통령 알렉산데르 크바스니에프스키는 예드바브네에서 열린 추모식에 참석하여 폴란드를 대표하여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그는 "우리는 예드바브네에서 폴란드 시민들이 동료 시민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저는 제 이름으로, 그리고 그 범죄로 양심이 무너진 폴란드인들을 대신하여 사과드립니다."라고 말했다.[40][68][69] 이 추모식에는 가톨릭 및 유대교 지도자들과 생존자들이 참석했으나, 예드바브네 주민 대다수와 마을 사제는 사과에 항의하며 불참했다.[40] 당시 이스라엘 주재 폴란드 대사 셰바흐 바이스는 추모 연설에서 "폴란드 이웃들의 용감한 행동으로 목숨을 구한 홀로코스트 생존자들도 있다"고 언급하며 폴란드의 진상 조사 노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41]
그러나 폴란드 내부에서는 여전히 논란이 있었다. 전 대통령 레흐 바웬사는 당시 "예드바브네 범죄는 유대인 공동체가 소련 점령군과 협력한 것에 대한 보복이었다"고 주장하며, "폴란드인들은 유대인들에게 여러 번 사과했으며, 우리는 다른 쪽(유대인 측)의 사과를 기다린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같은 해, 학살이 일어난 헛간 자리에 새로운 기념비가 세워졌으나, 가해자가 누구인지는 명시되지 않았다.[70] 또한 8월에는 이 기념비로 이어지는 도로 정비 제안이 지역 의회에서 부결되자, 이에 항의하며 Krzysztof Godlewski|크시슈토프 고들레프스키pol 시장이 사임하는 일도 있었다.[71]
2011년 7월 11일, 학살 70주년 기념식에서는 폴란드 대통령 브로니스와프 코모로프스키가 참석하여 용서를 구했다.[43][44] 하지만 그해 9월, 예드바브네 기념비가 하켄크로이츠와 낙서로 훼손되는 사건이 발생했다.[45] 폴란드 정부는 이를 혐오 범죄로 규정하고 수사에 착수했다.[46] 이후에도 기념비에 대한 훼손 시도는 간헐적으로 발생하고 있다.[70]
2017년, 폴란드 가톨릭 교회는 예드바브네 희생자들을 위한 특별 미사를 열고, 폴란드인이 가담한 잔학 행위에 대해 신에게 용서를 구했다.[72]
현재 매년 7월 10일에는 폴란드 정부 주관으로 예드바브네에서 추도식이 거행되고 있다.
5. 2. 기념비 건립
1963년, 폴란드 공산주의 정권 시기 자유와 민주주의 투쟁가 협회는 예드바브네에 학살 희생자들을 기리는 기념비를 세웠다. 기념비의 비문에는 "유대인 학살 장소. 1941년 7월 10일 이곳에서 게슈타포와 나치 헌병이 1600명을 산 채로 불태웠다."라고 적혀 있어, 학살의 책임을 독일 측에 돌리는 내용이었다.역사학자 에바 볼렌타르스카-오흐만에 따르면, 이 학살은 폴란드의 공식 역사 기록에서는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지만, 지역 주민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나 유대인 생존자들의 증언을 통해 기억되고 있었다.
2001년 7월, 사건 60주년을 맞아 기존 기념비는 새로운 기념비로 교체되었다. 새 기념비는 다수가 살해된 헛간이 있던 자리에 세워졌으며, 약 1.83m 높이의 돌로 만들어졌다. 히브리어, 폴란드어, 이디시어로 "1941년 7월 10일, 이 자리에서 살해되어 산 채로 불태워진 예드바브네 및 주변 지역의 유대인, 남녀노소, 이 땅의 공동 거주자들을 기억하며."라는 글귀가 새겨졌다. 이 비문에는 이전과 달리 학살의 가해자가 누구인지는 명시되지 않았다.[70] 기념비 주변에는 학살이 일어난 헛간 부지를 나타내는 돌 블록들이 놓여 있다.
같은 해 7월 10일에 열린 추도식에서는 당시 폴란드 대통령 알렉산데르 크바스니에프스키가 폴란드를 대표하여 유대인들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했다.[68][69] 폴란드 정부는 매년 7월 10일 예드바브네에서 추도식을 열고 있다.
2001년 8월, 예드바브네 시장 Krzysztof Godlewski|크시슈토프 고들레프스키pol는 지역 의회가 기념비로 가는 도로 건설 및 정비 예산 지원을 거부하자 이에 항의하며 시장직에서 물러났다.[42][71] 그는 학살 추모 활동에 앞장섰던 인물로 평가받으며, 2002년에는 『예드바브네: 역사 및 기념 책』(1980)의 저자인 랍비 야곱 베이커와 함께 얀 카르스키 상을 받았다.
하지만 2011년부터는 기념비가 훼손되는 사건이 종종 발생하고 있다.[70] 2017년에는 폴란드 가톨릭 교회가 예드바브네 학살 희생자들을 위한 특별 미사를 열어, 폴란드인들이 저지른 잔혹 행위에 대해 신에게 용서를 구하기도 했다.[72]
5. 3. 교육과 연구
폴란드 국립기억연구소(IPN)는 예드바브네 학살에 대한 공식 연구 결과물인 ''《예드바브네 주변》''(Wokół Jedwabnego|보코우 예드바브네고pol)을 2권으로 출판했다. 이 책은 파베우 마흐체비츠와 크시슈토프 페르사크가 편집했으며,[30] 제1권 '연구'편(525쪽)에는 IPN 소속 역사학자들의 역사적, 법적 연구 결과가 담겨 있고, 제2권 '문서'편(1,034쪽)에는 IPN 조사 과정에서 수집된 원본 문서들이 실려 있다.2003년에는 예드바브네 학살을 둘러싼 폴란드 국내외의 다양한 논쟁과 기사를 모아 영어로 번역한 책이 출판되었다. 브랜다이스 대학교의 요안나 미클릭과 안토니 폴론스키가 엮은 『이웃들의 반응: 폴란드의 예드바브네 학살 논란』(The Neighbors Respond: The Controversy over the Jedwabne Massacre in Polandeng)에는 폴란드를 비롯한 여러 국가 역사가들의 글, IPN의 조사 결과, 그리고 ''제체포스폴리타''와 ''가제타 비보르차'' 같은 폴란드 주요 신문에 실린 에세이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 책은 특히 1939년부터 1941년까지의 시기를 다루는 기록 보관 문서와 관련 연구들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안나 비콘트, 데이비드 엥겔, 이스라엘 구트만, 아담 미흐니크, 보그단 무시알, 다리우스 스톨라, 토마스 스트젭보시 등 여러 학자들이 기고했다.
안나 비콘트가 2004년에 출판한 저서 ''《My z Jedwabnego》''(My z Jedwabnego|미 스 예드바브네고pol, "우리는 예드바브네 출신이다")는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국제적으로 알려졌다. 프랑스어 번역본 ''《Le crime et le silence》''(Le crime et le silence|르 크림 에 르 실랑스fra, "범죄와 침묵")은 2011년 유럽 도서상을 수상했으며, 영어 번역본 ''《The Crime and the Silence: Confronting the Massacre of Jews in Wartime Jedwabne》''(The Crime and the Silence: Confronting the Massacre of Jews in Wartime Jedwabne|더 크라임 앤드 더 사일런스: 컨프런팅 더 매서커 오브 주스 인 워타임 예드바브네eng)는 2015년에 출판되었다. 이 외에도 스웨덴어(2015), 히브리어(2016), 네덜란드어(2016), 중국어(2018), 이탈리아어(2019), 독일어(2020) 등으로 번역되어 예드바브네 학살에 대한 국제적인 이해를 넓히는 데 기여했다.
5. 4. 폴란드-이스라엘 관계
매년 7월 10일, 폴란드 정부는 예드바브네에서 추도식을 거행하고 있다.2001년 7월 10일, 사건 발생 60주년을 맞아 열린 추도식에서 폴란드 대통령 알렉산데르 크바스니에프스키는 폴란드를 대표하여 유대인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했다.[68][69] 당시 학살이 벌어졌던 헛간 자리에는 새로운 기념비가 세워졌으나, 가해자가 누구인지는 명시되지 않았다.[70]
같은 해 8월, 지역 의회가 기념비로 이어지는 도로 정비 제안을 지지하지 않자, 이에 반발하여 크시슈토프 고들레프스키 시장이 사임하는 일도 있었다.[71]
2011년 이후로는 기념비가 훼손되는 사건이 종종 발생하고 있다.[70]
한편, 2017년 폴란드의 가톨릭 교회는 예드바브네 학살 희생자들을 위한 특별 미사를 열고, 폴란드인이 가담한 잔학 행위에 대해 신에게 용서를 구했다.[72]
5. 5. 정치적 논쟁
2001년 7월, 학살 60주년을 맞아 폴란드 대통령 알렉산데르 크바스니에프스키는 예드바브네 추모식에 참석하여 폴란드 시민이 동료 시민을 살해한 사실을 인정하며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그는 "제 이름으로, 그리고 그 범죄로 양심이 무너진 폴란드인들을 대신하여 사과드립니다"라고 말했다. 이 추모식에는 가톨릭 및 유대교 지도자들과 생존자들이 참석했지만, 예드바브네 지역 주민 대다수와 마을 사제는 사과에 반대하며 불참했다.[40]
당시 이스라엘 주 폴란드 대사였던 셰바흐 바이스는 연설에서 폴란드 이웃 덕분에 목숨을 구한 홀로코스트 생존자들도 있음을 언급하며 폴란드의 진상 조사 노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41] 반면, 전 대통령 레흐 바웬사는 예드바브네 학살이 유대인들의 소련 점령군 협력에 대한 보복이었다고 주장하며, 유대인 측의 사과를 요구하기도 했다.
이후 예드바브네 학살은 폴란드 내에서 지속적인 정치적 논쟁거리가 되었다. 2015년 대통령 선거 토론에서는 당시 후보였던 안제이 두다가 현직 대통령 브로니스와프 코모로프스키가 학살에 대해 사과한 것을 두고 "폴란드의 명성을 지키지 못했다"고 비판했다.[9][10]
집권 여당인 법과 정의당(PiS)과 관련된 정치인, 학자들은 예드바브네와 같이 폴란드 민족 정체성에 부정적인 사건들을 재해석하여 국내외에 알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예드바브네 문제를 폴란드 민족에 대한 '거짓 비방'의 핵심이자 폴란드 고유의 가치와 정체성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역사가 요르그 하크만은 예드바브네 학살에 대한 설명을 세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는 폴란드 사회 내부에서 책임을 찾는 입장, 둘째는 학살과 폴란드 반유대주의의 연관성을 부인하며 폴란드인을 외세의 '무고한 희생자'로 보는 입장, 셋째는 IPN의 야로스와프 샤레크 소장 등이 주장하듯 책임을 전적으로 독일에게 돌리는 입장이다. 하크만은 요안나 미칠릭을 인용하며 예드바브네가 제2차 세계 대전에 대한 폴란드 내 논쟁에서 중요한 상징이 되었다고 지적한다. 한편으로는 기존 홀로코스트 서술에 도전하는 '반기억의 상징'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비판자들에 의해 폴란드 민족과 정체성에 대한 '공격'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예드바브네는 종종 '수치의 교육'(pedagogika wstydu)이라는 비판적 용어와 함께 언급된다.
6. 문화적 재현
예드바브네 학살은 폴란드 현대사에서 매우 민감하고 논쟁적인 사건으로 남아 있으며, 사건 이후 영화와 연극 등 다양한 문화 매체를 통해 재현되고 논의되어 왔다. 이러한 문화적 재현은 학살의 진실 규명과 책임 소재에 대한 사회적 논쟁을 촉발하고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사건의 목격자 증언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들이 제작되었고, 학살을 모티브로 한 희곡이 상연되어 국제적인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작품들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기억의 문제를 제기하며 폴란드 사회 내부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6. 1. 영화
폴란드 영화 제작자 아그니에슈카 아르놀드는 예드바브네 학살의 증인들을 인터뷰하여 두 편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었다. 첫 번째 영화인 ''Gdzie mój starszy syn Kain'' ("내 큰 아들 카인은 어디에", 1999)에는 생존자 슈물 바세르스타인과 학살이 일어난 헛간 주인의 딸과의 인터뷰가 담겨 있다. 두 번째 작품인 ''Sąsiedzi'' ("이웃", 2001)는 이 주제를 더 깊이 파고들었다. 얀 토마시 그로스는 자신의 책 제목 '이웃들'을 아르놀드의 허락을 받아 사용했다.[47] 그로스는 하임 헤흐트 감독의 다큐멘터리 ''Two Barns'' (2014)에도 출연했는데, 이 영화에는 예후다 바우어, 얀 그라보프스키, 하비 드레이푸스와 같은 저명한 홀로코스트 역사학자들과 비스와바 심보르스카, 셰바 와이스 등도 함께 등장한다.[48]
한편, 마레크 얀 호다키에비츠는 저서 『예드바브네 학살, 1941년 7월 10일: 전, 중, 후』를 통해 그로스가 제시한 사건 해석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SS 무장 병력 여러 트럭 분량이 웸자에서 와서 지역 주민들을 위협한 후 유대인과 폴란드인을 범죄 현장으로 끌고 갔다고 주장하며, 학살의 주된 책임이 독일에 있다고 보았다. 호다키에비츠는 1949년 재판을 위한 용의자 심문 기록, 바세르스타인의 증언, 시신 부분 발굴 조사 등 주요 1차 자료들이 잘못되었거나 가치가 없다고 평가절하했다.
이에 대해 피오트르 브루벨은 『사르마티아 리뷰』 서평에서 "호다키에비츠는 범죄를 재구성했지만, 이는 독일인에 의해 잘 계획되고 시작되었으며 포그롬과 같은 즉흥성은 전혀 없었다는 결론에 이른다"고 요약하면서도, 호다키에비츠의 주장이 "수많은 결점에 의해 가려져 있고", 균형 감각이 부족하며, 자신의 관점을 뒷받침하는 출처만을 선택적으로 사용한다고 비판했다. 브루벨은 이 책이 "뚜렷한 정치적 의제"를 가지고 있으며 "읽기 어렵고, 독창적이지 않으며, 짜증나고, 설득력이 없다"고 평가했다.
반면, 피터 D. 스타추라는 학술지 역사에 기고한 서평에서 학살이 독일 경찰에 의해 자행되었고, "소수의 폴란드인", 특히 "''Volksdeutsche'' (독일계 폴란드 시민)와 사소한 범죄자들"만이 "제한적으로 관여"했다는 호다키에비츠의 주장에 동의했다.
그러나 요안나 미칠릭과 앤토니 폴론스키는 『역사』 편집자에게 보낸 글에서 스타추라의 서평에 대해 강하게 반발했다. 그들은 호다키에비츠와 스타추라의 결론이 IPN을 포함한 "대부분의 역사가들이 도달한 결론과는 매우 거리가 멀다"고 지적했다. 또한 이들이 "현대 폴란드를 오로지 피해자와 영웅으로만 보는 견고하지 않은 비전으로 돌아가려는 폴란드 과거에 대한 견해를 옹호한다"고 비판하며, "귀하(편집자)가 이 신국가주의적 의제를 추진하기 위해 저널을 사용하도록 허용한 점은 매우 유감이다"라고 밝혔다.
6. 2. 연극
2009년에 폴란드 극작가 타데우시 슬로보지아넥의 희곡 ''우리 반''은 홀로코스트 기간 중 작은 마을에서 폴란드인에 의한 유대인 학살을 다루며 런던에서 공연되었다.[49] 이 연극은 1925년부터 같은 학교 같은 반의 열 명의 가톨릭 및 유대인 폴란드 학생들의 삶을 따라간다.[50][51]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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