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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당 (폴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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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국민당(Stronnictwo Narodowe)은 1928년 로만 드모프스키가 창당한 폴란드의 민족주의 정당이다. 당은 폴란드 재건과 민주주의를 강조하며, 국민 진영을 통해 국가 이익을 우선시하는 정치 노선을 추구했다. 1930년 총선에서 12.7%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제2당이 되었으나, 사나치아 정권 수립 이후 정치 전략을 수정해야 했다. 1930년대 초 젊은 세대의 파시즘적 경향과 세대 갈등을 겪었으며, 민족급진주의 진영(ONR)의 분열을 겪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저항 조직을 결성하여 나치 독일에 맞서 싸웠으며, 종전 후 폴란드 인민공화국에 의해 불법화되었다. 1989년 공산주의 붕괴 이후 재창당되었으나, 2001년 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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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당 (폴란드) - [정당]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관련 정보
기타

2. 명칭

로만 드모프스키(Roman Dmowski)는 당의 공식 명칭을 "국민당"으로 정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기존의 "국민민주당"이라는 명칭을 선호했다.[4] 드모프스키가 더 짧은 명칭을 선택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4]


  • 폴란드 재건과 관련하여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강조
  • 폴란드인들의 민주화가 이미 이루어졌고, 이제는 그들을 국가 의식을 가진 정치 공동체로 변모시킬 때가 왔다는 확신
  • 국민 진영이 전체 국민(국가나 계급으로 나뉘지 않고)의 이름으로 정치를 추구한다는 점을 강조
  • 올바른 정치의 결정 요인은 “국가의 이익을 모든 이해관계와 야망보다 진심으로 정직하게 우선시하는 것”이라는 그의 확신

3. 역사

3. 1. 국민당의 기원

1926년 사나치아(Sanacja) 독재 정권 수립으로 국민민주당은 기존 정치 전략을 전면 수정해야 했다.[5] 1928년 로만 드모프스키는 폴란드 대영토 진영(OWP)을 결성하고, 의회와 지방 정부에서의 정치 활동을 주요 임무로 하는 새로운 구조인 국민당을 창당했다.[5] 드모프스키는 폴란드 국민동맹 대신 "수호대(Guard)"라는 비밀 조직을 설립하여 국민 진영을 감시하고, 체포 또는 불법화될 경우 업무의 연속성을 보장했다.[5] "수호대"에는 로만 리바르스키(Roman Rybarski), Władysław Folkierski, Stefan Sacha, 그리고 Mieczysław Trajdos 등 전쟁 중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될 정치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5]

3. 2. OWP의 젊은 세대로의 이양

1931년, 로만 드모프스키는 당시 국민민주당(National Democracy)이라 불리던 전체 국민진영(National Camp)을 1900년에서 1908년 사이에 태어난 활동가들에게 넘겨줄 의도로, 폴란드청년연맹(OWP)을 젊은 세대에게 넘기기로 결정했다.[6] 그는 1923년 4월 전폴란드청년 대회에서 언급했던 "전진을 향한 노력"이라는 원칙을 따랐다.[6]

1933년까지 폴란드청년연맹은 20만 명이 넘는 회원을 보유했고, 다른 10만 명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6] 정권은 폴란드청년연맹의 해산을 발표했고, 예쥐제이 게르티히(Jędrzej Giertych)를 포함한 10명이 넘는 활동가들이 체포되었다.[6] 1926년 이후 또 다른 내전을 우려한 드모프스키는 보복을 삼가하고 해산된 폴란드청년연맹에서 여전히 합법적인 국민당(SN)으로 이동할 것을 권고했다.[6]

대공황의 심각한 영향을 받은 젊은이들은 이탈리아 파시즘에서 영감을 받은 급진적인 해결책을 모색했다.[7] 그들은 사회 정책, 자동차와 항공의 발전, 현대 건축, 현대 미술, 자유주의 패러다임과 사회주의의 붕괴에 매료되었다.[7] 파시즘의 영향으로 제복이 유행했고, 로마식 경례로 서로 인사하고, 도시 거리를 행진했다.[7] 드모프스키는 이런 유행을 우스꽝스럽게 여겼다.[7]

3. 3. 세대 갈등

OWP의 젊은 구성원들은 민족 운동 내 세대 갈등을 심화시켰다.[8] 젊은이들은 드모프스키의 보수적인 정치 방법에 대한 딜레마에 직면했고, 가톨릭 폴란드가 사회주의 소비에트 연방과 국가 사회주의 독일 사이에서 어떻게 생존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답을 찾고자 했다.[8] 또한, 제2공화국에서 폴란드인이 전체 인구의 70% 미만을 차지하고 나머지는 소수 민족(그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우크라이나인과 유대인)이었던 상황에서, 민족 국가가 어떻게 기능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했다.[8]

3. 4. 분열기: 1933-1934

3. 4. 1. 젊은 국민주의자 연맹(ZMN)

1933년에서 1934년 사이에 국민당(SN) 내 분열이 발생했다. 먼저 포즈난과 루블린 출신의 젊은 활동가들이 즈지스와프 슈탈을 중심으로 소규모 집단을 형성하여 탈당, 친정부 성향의 젊은 국민주의자 연맹(ZMN)(주로 포즈난과 루블린에서 활동)을 결성했으며, 지그문트 보이치호프스키 등이 참여했다.[9]

3. 4. 2. 민족급진주의 진영(ONR)

1934년 4월 14일, 예르지 체르빈스키, 블와디스와프 도브보르, 타데우시 글루진스키, 얀 요제비치, 얀 코를레츠, 얀 모스도르프(Jan Mosdorf), 메치스와프 프루신스키, 헨리크 로스만(Henryk Rossman), 타데우시 토들레벤, 보이치에흐 잘레스키(Wojciech Zaleski) 등으로 이루어진 바르샤바 학생 그룹이 바르샤바 공과대학교 식당에서 민족급진주의 진영(ONR) 결성을 선언했다.[10] 주로 모스도르프가 작성한 이념 선언은 다음 날 주간지 "슈타페타(Sztafeta)"에 실렸다.[10] 바르샤바를 제외한 지역에서는 대다수 청년들이 SN에 남았지만, 바르샤바에서는 SN 청년 부문의 약 90%인 약 2,000명이 ONR에 가입했다.[10] 드모프스키의 점진적인 세대 교체 전략은 중재 시도에도 불구하고 실패로 돌아갔다.[10] 그는 이를 쓰라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ONR 창립자들을 영원한 학생의 사고방식과 성격을 가진 자들이라고 비난했는데, 그 이유는 그가 결국 젊은 세대에게 지휘권을 넘기려는 의도를 버리지 않았고, 타데우시 비엘레츠키, 예드제이 게르티흐, 카지미에시 코발스키가 SN에서 권력을 잡기 시작하면서 곧 그렇게 되었기 때문이다.[10]

ONR 지도자들은 공식적으로 드모프스키에게 존경을 표했지만, 비공식적으로는 그를 새로운 시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허약한 정치인이라고 비꼬았다.[10] 드모프스키는 요제프 프론진스키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반대파에게 무기를 쥐어주지 않기 위해 자신이 프롱다(fronda, 반란)를 심각하게 비난한다는 사실을 신문에 발표하지 않기로 했다고 적었다.[10] 동시에 그는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나는 그것이 민족 진영의 단결을 깨뜨릴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어리석고 우리 대의에 해롭기 때문에 비난하는 것이다.”[10]

ONR 지도자들은 단 두 달 만에 베레자 카르투스카 수용소에 수감되었고, 1934년 7월 10일 정권은 ONR을 금지하고 "슈타페타(Sztafeta)"의 폐간을 명령했다.[10] 당국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폴란드 전역에서 약 100명의 SN 회원도 구금했다.[10] 이는 젊은 세대의 급진화를 더욱 심화시켰다.[10]

3. 5. 세대 교체: 1937-1939

1937년 10월, 로만 드모프스키의 지지를 받은 36세의 카지미에시 코왈스키가 국민당(SN) 중앙위원회 의장이 되면서 세대교체가 이루어졌다.[11] 이는 70세의 요아힘 바르토셰비치가 이끌던 중앙위원회를 대체한 것이었다.[11] 코왈스키는 우치 지구위원회 의장을 역임했으며, 정치 재판에서 변호사로 활동했다.[11] 그는 우치 시 부시장이 되려 했으나 관리(Sanation) 정권에 의해 좌절되었고, 7개월 동안 투옥되기도 했다.[11]

카지미에시 코왈스키(Kazimierz Kowalski) - 1937년-1939년 국민당(SN) 의장


코왈스키는 우치 시의 폴란드화를 추진하려 했다.[11] 당시 우치 인구의 58%만이 폴란드인이었고, 나머지는 유대인(35%) 등이었다. 코왈스키는 유대인의 역할 축소, 세금 감면, 소유지 장려 등의 정책을 추진하려 했다.[11]

코왈스키 외에도 타데우시 비엘레츠키, 미에치스와프 트라이도스, 블라디스와프 야보르스키 등 "젊은" 세대가 당을 주도했다.[11] 그러나 이들 사이에서도 코왈스키 지지 세력과 비엘레츠키 지지 세력 간의 분열이 나타났다.[11] 비엘레츠키는 바르샤바 지식인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이는 코왈스키의 열등감을 유발했다.[11]

타데우시 비엘레츠키(Tadeusz Bielecki) - 국민당(SN) 지도자


1939년 6월, 코왈스키를 비롯한 중앙위원회 전체가 사임하고, 타데우시 비엘레츠키가 새로운 중앙위원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11] 비엘레츠키가 이끄는 국민당(SN)은 다가오는 전쟁에 직면하여 폴란드인들의 단결을 위해 노력했다.[11]

3. 6. 전쟁과 점령 시기: 1939-1945

1939년 8월 20일, 타데우시 비엘레츠키는 긴급 군 소집 명령을 받고 치하누프의 부대로 파병되었다. 그는 브와디스와프 야보르스키를 통해 미에치스와프 트라이도스에게 권한 대행직을 넘겨주었다.

미에치스와프 트라이도스 - 전시 SN의 초대 지도자


전쟁 3일째, SN 중앙위원회는 결의안을 채택하여 “우리 민족의 영원한 적”이 “우리의 자유와 땅을 빼앗기 위해” 전쟁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당시 전쟁의 목표는 "우리의 자유와 명예를 위해 싸우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신앙을 위해, 그 적들에 맞서 싸우고 있으며, 독일의 야만성에 의해 위협받는 유럽 문명을 위해 싸우고 있다"는 것이었다. 폴란드는 홀로 싸우는 것이 아니며, “우리와 함께 프랑스와 영국이라는 동맹국이 있으며, 그들은 우리처럼 유럽의 도덕 질서, 평화, 자유를 위해 싸우기 위해 일어섰다”고 강조했다. 독일의 패배는 조만간 예상되었으며, "이 투쟁이 우리에게 가져다줄 승리는 독일의 세력이 무너진 후 지속적인 평화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영원한 폴란드 땅을 조국과 재통합하는 위대한 사업의 완성을 의미하며, 단지 폴란드에 대한 단치히의 편입과 동프로이센 문제의 해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중앙 유럽을 독일의 지배에서 해방시키고 우리 국가의 초강대국 성장을 의미한다"고 밝혔다.

국민당은 국가군사조직(NOW)과 국가무장군(NSZ) 등 무장 저항 조직을 결성하여 나치 독일에 맞서 싸웠다.

4. 이념

국민당은 내셔널리즘가톨릭의 원리를 결합하여 폴란드를 가톨릭 폴란드국으로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국가 내에서 폴란드의 민족 엘리트 역할을 증대시킴으로써 사회의 계층적 조직과 정치 체제의 변혁을 주장하였다. 반(反)사나치아를 이념으로 삼고 사나치아 정권에 반대하는 시위와 행진을 주도했다. 비엘코폴스카, 바르샤바, 리비우, 윌노가 국민당의 정치적 텃밭이었다.

포즈난에서 열린 당 회의


1937년 5월 3일 포즈난에서 열린 퍼레이드에서 로마식 경례를 하는 당원들


빌뉴를 유대인으로부터 해방시켜라! - 1939년 빌뉴 시의회 선거를 계기로 게시된 가톨릭 민족 선거위원회의 반유대주의 선거 포스터

5.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폴란드 인민공화국이 수립된 1947년, 폴란드 당국은 국민당을 불법화했고, 당원들은 대부분 망명하여 런던에서 활동하였다. 공산주의의 붕괴 직후 재창당되었으나, 대부분 폴란드 가족연합당에 소속되었고, 2001년 해체하였다.

6. 상징



국민당은 독수리, 검, 십자가 등을 조합한 상징을 사용했다. 청년부는 별도의 상징을 사용했다.

7. 선거 결과

7. 1. 폴란드 하원(Sejm)

wikitext

1930년 폴란드 총선에서 국민당은 1,443,165표를 득표하여 12.7%의 득표율로 제2당이 되었으나, 정부 협력을 위한 무당파 연합(BBWR)이 집권 여당이 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Stronnictwo Narodowe, Encyklopedia PWN: źródło wiarygodnej i rzetelnej wiedzy https://encyklopedia[...]
[2] 서적 Ethnic Politics in Eastern Europe: A Guide to Nationality Policies, Organizations, and Parties https://books.google[...] M.E. Sharpe
[3] 서적 Religia, kościół, etyka w ideach i koncepcjach prawicy polskiej: Narodowa Demokracja Nomos
[4] 서적 "Ekonomia krwi": konspiracja narodowa w walczącej Warszawie: 1939-1944-1990 = "Blood economy": the history of the national underground in fighting Warsaw: 1939-1944-1990 https://www.worldcat[...] Instytut Historii PAN 2020
[5] 서적 "Ekonomia krwi": konspiracja narodowa w walczącej Warszawie: 1939-1944-1990 = "Blood economy": the history of the national underground in fighting Warsaw: 1939-1944-1990 https://www.worldcat[...] Instytut Historii PAN 2020
[6] 서적 "Ekonomia krwi": konspiracja narodowa w walczącej Warszawie: 1939-1944-1990 = "Blood economy": the history of the national underground in fighting Warsaw: 1939-1944-1990 https://www.worldcat[...] Instytut Historii PAN 2020
[7] 서적 "Ekonomia krwi": konspiracja narodowa w walczącej Warszawie: 1939-1944-1990 = "Blood economy": the history of the national underground in fighting Warsaw: 1939-1944-1990 https://www.worldcat[...] Instytut Historii PAN 2020
[8] 서적 "Ekonomia krwi": konspiracja narodowa w walczącej Warszawie: 1939-1944-1990 = "Blood economy": the history of the national underground in fighting Warsaw: 1939-1944-1990 https://www.worldcat[...] Instytut Historii PAN 2020
[9] 서적 "Ekonomia krwi": konspiracja narodowa w walczącej Warszawie: 1939-1944-1990 = "Blood economy": the history of the national underground in fighting Warsaw: 1939-1944-1990 https://www.worldcat[...] Instytut Historii PAN 2020
[10] 서적 "Ekonomia krwi": konspiracja narodowa w walczącej Warszawie: 1939-1944-1990 = "Blood economy": the history of the national underground in fighting Warsaw: 1939-1944-1990 https://www.worldcat[...] Instytut Historii PAN 2020
[11] 서적 "Ekonomia krwi": konspiracja narodowa w walczącej Warszawie: 1939-1944-1990 = "Blood economy": the history of the national underground in fighting Warsaw: 1939-1944-1990 https://www.worldcat[...] Instytut Historii PAN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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