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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녜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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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라녜 공은 프랑스 남부 오랑주를 다스리던 군주를 가리키는 작위이다. 이 작위는 원래 보 가문, 샬롱-아를레 가문을 거쳐 1544년 나사우 가문으로 넘어갔으며, 이후 오렌지-나소 가문이 이 작위를 계승했다. 오라녜 공국은 신성 로마 제국의 봉토에서 유래했으며, 1163년 공국으로 승격되었다. 1673년 프랑스의 루이 14세에 의해 합병되면서 오라녜 공국은 주권 국가로서의 지위를 잃었다. 이후 오라녜 공 작위는 프랑스 국왕에 의해 명목상 수여되었고, 네덜란드 오라녜-나사우 가문과 프로이센, 메이유-네슬 가문 등이 이 작위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다. 현재는 네덜란드 왕위 계승자에게 오라녜 공(주) 작위가 부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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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녜 공
지도
기본 정보
원어 명칭Prins van Oranje
칭호 유래오렌지 공국
사용 언어네덜란드어
역사
기원오렌지 공국의 통치자
오렌지 가문1544년 나사우가에 의해 상속됨
1702년 이후오렌지 공국은 프랑스에 의해 점령됨
오라녜 공 칭호는 나사우 가문의 여러 분파에 의해 주장됨
1732년프로이센과 오라녜나사우 가문 사이의 조약에서 프로이센 왕이 오라녜 공의 칭호 사용을 인정함
1815년네덜란드 왕국의 왕세자의 칭호로 지정됨
현재 사용
네덜란드 왕위 계승자오라녜나사우 가문
현재 공카타리나아말리아 공주
기타
참고오라녜 공주 (결혼을 통한 칭호)

2. 역사

오랑주를 중심으로 한 오라녜 공국은 신성 로마 제국의 봉토인 오랑주 백작령에서 유래했다. 800년경 샤를마뉴의 사촌인 빌헬름 1세가 무어인과의 전쟁에서 공을 세워 이 지역을 받았다. 그는 오크어로 ''Guilhem''이라 불렸지만, 프랑크족 영주로서

12세기 문장학 유행에 따라 오랑주를 상징하는 뿔은 빌헬름 1세의 이름과 관련된 말장난으로, ''기욤의 노래''에 나오는 "Guillaume au Court-nez"(짧은 코의 빌헬름) 또는 "Guillaume au Cornet"(뿔의 빌헬름)에서 유래한다.[6] 이 ''샤송''은 793년 카르카손 근처 오르비외 강 전투와 오랑주 점령 사건과 관련이 있다.[7]

1163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는 오랑주 영지를 공국으로 승격시켰다.[6] 제국의 영토가 공국에서 후퇴하면서 공작은 황제가 행사하던 주권을 계승했다.[6] 침묵의 빌헬름은 오랑주를 봉토가 아닌 "자신의 자유 재산"으로 여겼다.[8][9]

샤롱의 르네는 공국을 사촌 침묵의 빌헬름에게 남겼으나, 이는 보 가문 출신 오랑주 공주 보-오랑주 백작 부인 마리의 유언에 어긋나는 것이었다.[10]

16세기 오랑주 공국 지도.


1673년 루이 14세는 오랑주의 윌리엄 3세에 대한 전쟁 행위로 공국 영토를 프랑스에 합병, 주권 국가로서의 존재를 멈추게 했다. 루이 14세는 네슬의 루이 샤를 드 메이 백작에게 명목상 공작 작위를 수여했다.[12] 1714년 콩티 공 루이 아르망 드 부르봉에게 공국의 용익권을 수여했고, 1727년 그의 사망 후 공국은 1731년 왕관에 합병된 것으로 간주되었다.[13]

1713년 유트레히트 조약으로 오랑주가 프랑스에 할양되자 여러 가문들이 항의했으나,[14] 조약은 오랑주를 프랑스에 정복, 합병된 것으로 간주하여 이들의 항의는 무시되었다.

108


윌리엄 3세 사후, 프리드리히 1세의 유언에 따라 가장 가까운 방계 친족에게 작위가 상속된 것으로 간주되었다. 프리드리히 1세는 1713년 프랑스에 작위를 양도했으나,[15] 프랑스는 그의 주장을 지지했다. 유트레흐트 조약은 프로이센 국왕이 겔더른 공국의 일부를 새로운 "오라녜 공국"으로 세우도록 허용했다.[16]

2. 1. 오랑주 공국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는 1163년 교황과 프랑스 국왕에 맞서 부르고뉴의 지지자들을 규합하기 위해 오랑주 영지를 공국으로 승격시켰다.[6] 제국의 영토가 공국의 영토에서 후퇴함에 따라, 공작은 황제가 이전에 행사했던 주권을 계승했다.[6] 침묵의 빌헬름은 오랑주를 봉신의 종주의 봉토가 아닌 "나 자신의 자유 재산"으로 여겼다.[8][9]

원래 공작들의 마지막 직계 후손인 샤롱의 르네는 자신의 주권을 행사하여 공국을 그의 사촌인 침묵의 빌헬름에게 남겼다. 그러나 이것은 보 가문 출신의 오랑주 공주였던 보-오랑주 백작 부인 마리의 유언에 의해 제정된 상속 패턴에 위배되는 것이었다.[10]

1673년 루이 14세는 총독 오랑주의 윌리엄 3세(나중에 영국의 윌리엄 3세가 됨)에 대한 전쟁 행위로 공국의 모든 영토를 프랑스와 왕실 영지에 합병했다. 이로써 오랑주는 사실상 주권 국가로서의 존재를 멈추었다. 이후 루이 14세는 네슬의 루이 샤를 드 메이 백작에게 명목상의 공작 작위를 수여했다.[12] 1714년 루이 14세는 콩티 공 루이 아르망 드 부르봉에게 공국의 용익권을 수여했다. 1727년 그가 사망한 후 공국은 1731년 왕관에 합병된 것으로 간주되었다.[13]

1713년 유트레히트 조약으로 오랑주가 프랑스에 할양되자, 여러 가문들이 조약 조건에 대해 공식적으로 항의했다.[14] 그러나 조약은 오랑주를 프랑스에 정복되어 합병된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이들의 항의는 무시되었다.

윌리엄 3세가 적통 후계자 없이 사망함에 따라, 프레드릭-헨리(프리드리히 1세)의 유언에 따라 그의 가장 가까운 방계 친족에게 작위가 상속된 것으로 간주되었다. 프리드리히 1세는 1713년 프랑스에 작위(적어도 영토는, 하지만 공식적인 작위는 아님)를 양도하였다.[15] 프랑스는 그의 주장을 지지했다. 이런 방식으로 오라녜 공국의 영토는 봉건적이고 세속적인 특권을 잃고 프랑스의 일부가 되었다. 유트레흐트 조약은 프로이센 국왕이 겔더른 공국의 일부를 새로운 "오라녜 공국"으로 세우도록 허용했다.[16]

2. 1. 1. 기원

이 명칭은 프랑스 남부 론 계곡의 보클뤼즈주에 있는 오랑주(Orange)를 가리키며, 이곳은 오렌지가의 소유였고, 이후 보 가문과 샬롱-알레 가문을 거쳐 1544년 나소 가문 딜렌부르크 분가에게 넘어갔다. 그 이후로 이 가문은 오렌지-나소 가문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공국은 신성 로마 제국의 봉토였던 "오랑주 백작령"에서 유래했다. 이 백작령은 신성 로마 제국에 속한 부르고뉴 왕국에 있었다. 800년경 빌헬름 1세(755년생)에게 주어졌다. 그는 샤를 마르텔의 손자이자 샤를마뉴의 사촌으로, 무어인들과의 전쟁과 프랑스 남부와 히스파니아 변경지의 재정복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았다. 그의 오크어 이름은 ''Guilhem''이지만, 프랑크족 영주였던 그는 ''빌헬름''](Wilhelm)''이라는 옛 게르만식 이름으로 자신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빌헬름은 또한

2. 1. 2. 공국으로 승격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는 1163년 교황과 프랑스 국왕에 맞서 부르고뉴의 지지자들을 규합하기 위해 오랑주 영지를 공국으로 승격시켰다.[6] 제국의 영토가 공국의 영토에서 후퇴함에 따라, 공작은 황제가 이전에 행사했던 주권을 계승했다.[6] 침묵의 빌헬름은 오랑주를 봉신의 종주의 봉토가 아닌 "나 자신의 자유 재산"으로 여겼다.[8][9]

샤롱의 르네는 자신의 주권을 행사하여 공국을 그의 사촌인 침묵의 빌헬름에게 남겼다. 그러나 이것은 보 가문 출신의 오랑주 공주였던 보-오랑주 백작 부인 마리의 유언에 의해 제정된 상속 패턴에 위배되는 것이었다.[10] 마리 드 보-오랑주는 유언에서 그녀의 아들 루이가 오랑주를 상속받지 못하면 그녀의 딸 알릭스와 그녀의 후손들이 상속받도록 명시했다.

알릭스의 남편은 생 조르주 영주 기욤 드 비엔느였다.[10] 그들의 딸 마르게리트는 1449년 뇌샤텔과 로텔랭 영주인 바덴-호흐베르크의 루돌프와 결혼했다. 그들의 아들 필립의 유일한 자녀는 요하나였고, 그녀는 1504년 롱귀유 공작 오를레앙의 루이 1세와 결혼했다. 이 결혼을 통해 발루아 가문의 서자 가문인 오를레앙-롱귀유 가문은 1694년 장남 계열이 끊길 때까지 오랑주의 청구권자였다.[11] 나소의 침묵의 빌헬름이 오랑주 공작으로 계승했을 때, 오를레앙-롱귀유 가문은 항의했고 프랑스에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법원 판결을 얻었다. 그러나 오랑주는 주권 국가였고 프랑스의 일부가 아니었기 때문에 법원의 결정은 집행력이 없었다.

1673년 루이 14세는 총독 오랑주의 윌리엄 3세에 대한 전쟁 행위의 일환으로 공국의 모든 영토를 프랑스와 왕실 영지에 합병했다. 그 후 루이는 원래 오랑주 공작들의 직계 후손이자 장자 상속녀인 부인을 둔 네슬의 루이 샤를 드 메이 백작에게 명목상의 공작 작위를 수여했다.[12] 1714년 루이 14세는 샤롱의 알릭스를 통한 오를레앙-롱귀유 가문의 주장을 통해 공국에 대한 청구권을 가진 그의 친척인 콩티 공 루이 아르망 드 부르봉에게 공국의 용익권을 수여했다. 1727년 그가 사망한 후 공국은 1731년 왕관에 합병된 것으로 간주되었다.[13]

1713년 유트레히트 조약 이후 오랑주가 프랑스에 할양되자, 뤼네 가문/Maison d'Albert de Luynes, 마티뇽 가문, 레디기에르 부인 폴-프랑수아즈-마르게리트 드 곤디 드 레츠와 빌르로이 가문/Maison de Neufville de Villeroy, 알레그르 가문, 뒤프라 가문 등은 조약 조건에 대해 공식적으로 항의했다.[14] 그러나 조약이 오랑주를 이제 프랑스에 정복되어 합병된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그들의 항의는 무시되었다.

윌리엄 3세가 적통 후계자 없이 사망함에 따라, 프레드릭-헨리(프리드리히 1세)의 유언에 따라 그의 가장 가까운 방계 친족에게 작위가 상속된 것으로 간주되었다. 프레드리히 1세는 1713년 프랑스에 작위(적어도 영토는, 하지만 공식적인 작위는 아님)를 양도하였다.[15] 프랑스는 그의 주장을 지지했다. 유트레흐트 조약은 프로이센 국왕이 겔더른 공국의 일부를 새로운 "오라녜 공국"으로 세우도록 허용했다.[16]

윌리엄 3세의 남계 친족인 나사우의 요한 빌헬름 프리조는 침묵의 윌리엄의 방계 후손이기도 했는데, 윌리엄 3세의 유언에 따라 네덜란드 오라녜 공작의 상속자로 지정되었다. 그들은 침묵의 윌리엄이 그의 사촌 샤롱의 르네로부터 오라녜를 상속받았던 것과 유사하게, 남계 상속을 근거로 오라녜 공국의 권리를 주장했다. 그러나 그들은 루이즈 드 콜리니의 혈통을 통해 공국 자체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또한 안네 공주와 오라녜 공 빌헬름 4세의 결혼을 통해 드 보 가문의 이탈리아 분파인 델 발조 가문으로부터의 혈통을 주장할 수 있었다. 안네는 영국왕 조지 2세의 장녀였는데, 그는 잉글랜드 에드워드 4세의 아내인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후손이었다.

그들은 또한 필립 윌리엄, 모리스, 윌리엄 3세의 유언을 근거로 주장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오라녜가 주권자가 자신의 유언에 따라 계승권을 할당할 권리가 있는 독립 국가였다는 점을 근거로 주장했다. 프랑스는 이러한 주장들을 결코 인정하지 않았고, 오라녜-나사우 가문이나 호엔촐레른 가문이 공국 자체로부터 어떤 것을 얻도록 허용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오라녜-나사우 가문은 그 작위를 계승했고, 그들의 영지를 가지고 새로운 오라녜 공국을 세우기도 했다.[18] [19][20]

이 작위에 대한 또 다른[21] 주장자들은 1918년까지 프로이센을 통치했던 호엔촐레른 가문, 메이유-네슬 가문이다.

2. 1. 3. 샬롱-아를레 가문과 나소 가문의 상속

공녀
(결혼을 통한)10.장 1세align="center"|
–1393년 2월 10일1417년 10월1418년 9월 2일영주 아를레, 퀴조, 비토마리 공녀11.루이 1세align="center"|--1390년1417년 10월1463년 12월 3일영주 아를레, 아르궤, 오르브, 에쉘랭1. 몽벨리아르의 잔느
2. 아르마냐크의 엘레오노르
3. 가마슈의 블랑슈12.빌렘 2세align="center"|--–1463년 12월 3일1475년 9월 27일영주 아를레, 아르궤브르타뉴의 카트린13.장 2세align="center"|--1443년1475년 9월 27일1502년 4월 15일토네르 백작; 영주 아를레, 아르궤, 몽포콩; 기옌제독1. 부르봉의 잔느
2. 룩셈부르크의 필리베르트14.필리베르
1502년 3월 18일1502년 4월 15일1530년 8월 3일나폴리 총독; 멜피 공작; 그라비나 공작; 토네르 백작, 샤르니, 팡티에브르 백작; 베장송 자작; 영주 아를레, 노제루아, 루즈몽, 오르젤레, 몽포콩, 황실군 사령관미혼



르네는 샬롱-오렌지 가문의 이름과 문장을 사용한다는 조건으로 삼촌 필리베르트로부터 오라녜 공국을 상속받았다. 따라서 그는 일반적으로 샬롱-오렌지 가문의 일원으로 여겨지며, 역사에서는 "나소의" 르네가 아닌 샬롱의 르네로 알려져 있다.[6]

번호이름사진문장출생오라녜 공작 즉위오라녜 공작 퇴위사망오라녜 공작 재위 기간 중 기타 작위오라녜
공녀
(결혼을 통한)
15.르네
1519년 2월 5일1530년 8월 3일1544년 7월 15일총독 (네덜란드홀란트, 젤란트, 위트레흐트, 헬더란트); 나소 백작, 비안덴 백작; 앤트워프 자작; 브레다, 디스트, 에르스탈, 와르네통, 바일슈타인, 아를레, 노제루아 남작; 다스부르크, 헤르트루이덴베르크, 호흐 엔 라허 즈발뤼베, 클룬데르트, 몽포르, 날드바이크, 니에르바르트, 폴라넨, 스텐베르헌, 뷔트겐바흐, 생비트, 베장송 영주.로렌의 안나


2. 1. 4. 프랑스에 합병

1673년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총독이자 훗날 영국의 왕이 되는 오라녜의 윌리엄 3세에 대한 전쟁 행위로 공국의 모든 영토를 프랑스와 왕실 영지에 합병했다. 이로써 오랑주는 사실상 주권 국가로서의 존재를 멈추었다.[12] 이후 루이 14세는 오랑주 공작들의 직계 후손이자 장자 상속녀인 부인을 둔 네슬의 루이 샤를 드 메이 백작에게 명목상의 공작 작위를 수여했다.[12]

1714년 루이 14세는 샤롱의 알릭스를 통한 오를레앙-롱귀유 가문의 주장을 근거로, 공국에 대한 청구권을 가진 그의 친척 콩티 공 루이 아르망 드 부르봉에게 공국의 용익권을 수여했다. 1727년 그가 사망한 후 공국은 1731년 왕관에 합병된 것으로 간주되었다.[13]

1713년 유트레히트 조약으로 오랑주가 프랑스에 할양되자, 다음 청구권자들이 조약 조건에 대해 공식적으로 항의했다.[14]

그러나 조약은 오랑주를 프랑스에 정복되어 합병된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이들의 항의는 무시되었다. 윌리엄 3세가 적통 후계자 없이 사망함에 따라, 프레드릭-헨리(프리드리히 1세)의 유언에 따라 그의 가장 가까운 방계 친족에게 작위가 상속된 것으로 간주되었다. 프리드리히 1세는 1713년 프랑스에 작위(적어도 영토는, 하지만 공식적인 작위는 아님)를 양도하였다.[15] 프랑스는 그의 주장을 지지했다. 이런 방식으로 오라녜 공국의 영토는 봉건적이고 세속적인 특권을 잃고 프랑스의 일부가 되었다. 유트레흐트 조약은 프로이센 국왕이 겔더른 공국(겔른, 슈트랄렌, 바흐텐돈크 도시와 그 관할구, 크리켄벡, 피어젠, 케셀 땅, 그리고 아퍼덴, 아르센-펠덴-롬, 발벡-트위스테덴, 라이 및 클라인-케벨라어, 웰, 베르겐, 미델라어 영지)의 일부를 새로운 "오라녜 공국"으로 세우도록 허용했다.[16]

2. 2. 오라녜-나사우 가문

1340년까지 오라녜 공의 모든 아들이 작위를 상속받는 것이 관례였다. 베르트랑 1세는 오랑주 공작으로서 보 가문의 문장인 붉은색 바탕에 16각형의 흰 별을 사용했다. 이후 오랑주 공작들은 전설적인 사냥용 호른을 문장에 추가했다.

보 가문은 베르트랑 드 보가 오랑주의 마지막 토착 백작인 윌리엄 드 오멜라의 딸이자 오랑주 백작 부인 티뷔르그와 결혼하면서 오랑주 공국을 계승하게 되었다.[6] 베르트랑 1세의 처남인 라임보 사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에 의해 오랑주 백작령이 1163년 공국으로 승격되었다.

번호이름문장출생오랑주 공작 즉위오랑주 공작 퇴위사망오랑주 공작 재위 시기 기타 작위오라녜 공녀
2.빌렘 1세
1155년1180년 10월 31일1218년 7월 30일 이전소형(형제들과 공동); 보 영주소형(1. 메부이용의 에르망가르드), (2. 앨릭스)
3.빌렘 2세--1180년 10월 31일1239년 11월 1일 이전소형(동생과 공동); 보 영주소형(프레시외즈)
4.빌렘 3세--1239년 11월 1일 이후1257년소형(삼촌과 공동); 보 영주소형(기부르크)
5.레이몽 1세--1218년 7월 30일 이전1282년소형(형제와 조카와 공동) 보 영주소형(엑스의 말베르조네)
6.베르트랑 4세--1282년1314년 7월 21일 이후소형(보 영주)소형(제네바의 엘레오노르)
7.레이몽 4세--1314년 7월 21일 이후1340년, 9월 9일 이후소형(보 영주) 및 콩도르세소형(비엔느의 안)
8.레이몽 5세--1340년 9월 9일 이후1393년 2월 10일소형(보 영주)소형(1. 트리앙의 콘스탄스), (2. 제네바의 잔느)
9.마리아--1393년 2월 10일1417년 10월소형(아를레), 퀴조, 및 비토의 영지 소유자소형(장 1세)



샤롱과 아를레의 영주는 부르고뉴 백국의 통치 가문인 안스카르 가문 또는 이브레아 가문의 분가였다. 그들은 보-오렌지의 상속녀와 결혼했다.

번호이름문장출생오렌지 공작 즉위오렌지 공작 퇴위사망오렌지 공작 재위 시기의 기타 작위오렌지 공녀
10.장 1세1393년 2월 10일1417년 10월1418년 9월 2일영주 아를레, 퀴조, 비토마리
11.루이 1세--1390년1417년 10월1463년 12월 3일영주 아를레, 아르궤, 오르브, 에쉘랭1. 몽벨리아르의 잔느
2. 아르마냐크의 엘레오노르
3. 가마슈의 블랑슈
12.빌렘 2세--1463년 12월 3일1475년 9월 27일영주 아를레, 아르궤브르타뉴의 카트린
13.장 2세--1443년1475년 9월 27일1502년 4월 15일토네르 백작; 영주 아를레, 아르궤, 몽포콩; 기옌제독1. 부르봉의 잔느
2. 룩셈부르크의 필리베르트
14.필리베르1502년 3월 18일1502년 4월 15일1530년 8월 3일나폴리 총독; 멜피 공작; 그라비나 공작; 토네르 백작, 샤르니, 팡티에브르 백작; 베장송 자작; 영주 아를레, 노제루아, 루즈몽, 오르젤레, 몽포콩, 황실군 사령관미혼



빌헬름 폰 나사우는 그의 사촌인 르네로부터 오라녜 공국을 상속받았다. 르네에게는 자녀나 형제자매가 없었기에 빌헬름은 이전 오라녜 공작의 후손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라녜 가문의 혈통이 없는 그의 아버지쪽 사촌에게 오라녜 공작의 자리를 물려줄 주권 공작으로서의 권리를 행사했다. 이것이 네덜란드 왕가인 오라녜-나사우 왕가의 시작이었다.

번호이름사진문장출생오라녜 공작 즉위오라녜 공작 퇴위사망오라녜 공작 재위 시기 기타 작위오라녜 공녀
16.빌헬름 1세(침묵의)
[1][23][24]
1533년 4월 24일1544년 7월 15일1584년 7월 10일총독 (네덜란드홀란트, 젤란트, 위트레흐트, 프리슬란트); 후작 (베레 및 플리싱겐); 나사우-딜렌부르크 백작, 카첸엘렌보겐 백작, 비안덴 백작; 자작 (앤트워프); 남작 (브레다, 쿠이크, 그라프, 디스트, 에르스탈, 바르네통, 바일슈타인, 알레, 노제로이); 영주 (다스부르크, 게르트루이덴베르크, 호헤 엔 라허 스발루웨, 클룬데르트, 몽포르, 날드베이크, 니에르바르트, 폴라넨, 스텐베르헌, 빌렘스타트, 뷔트겐바흐, 생비트, 베장송)1. 안나 판 에그몬트
2. 작센의 안나
3. 샤를로트 드 부르봉
4. 루이즈 드 콜리니
17.필립 빌헬름
[25]
1554년 12월 19일1584년 7월 10일1618년 2월 20일나사우-딜렌부르크 백작, 부렌, 레르담, 카첸엘렌보겐 백작, 비안덴 백작; 자작 (앤트워프); 남작 (브레다, 크라넨돈크, 쿠이크, 아인트호펜, 그라프, 아이셀스타인, 디스트, 에르스탈, 바르네통, 바일슈타인, 알레, 노제로이); 영주 (다스부르크, 게르트루이덴베르크, 호헤 엔 라허 스발루웨, 클룬데르트, 몽포르, 날드베이크, 니에르바르트, 폴라넨, 스텐베르헌, 생트마르텐스디크, 빌렘스타트, 뷔트겐바흐, 생비트, 베장송)엘레오노르 드 부르봉
18.모리스
[26][27][28]
1567년 11월 14일1618년 2월 20일1625년 4월 23일총독 (네덜란드홀란트, 젤란트, 위트레흐트, 헤르더, 오퍼라이셀, 흐로닝언); 후작 (베레 및 플리싱겐); 나사우-딜렌부르크 백작, 부렌, 레르담, 카첸엘렌보겐 백작, 비안덴 백작; 자작 (앤트워프); 남작 (아게리스, 브레다, 크라넨돈크, 쿠이크, 다에스부르크, 아인트호펜, 그라프, 렉, 아이셀스타인, 디스트, 그림베르헌, 에르스탈, 바르네통, 바일슈타인, 벤트하임-링겐, 모어스, 알레, 노제로이); 영주 (다스부르크, 게르트루이덴베르크, 호헤 엔 라허 스발루웨, 클룬데르트, 몽포르, 날드베이크, 니에르바르트, 폴라넨, 스텐베르헌, 생트마르텐스디크, 빌렘스타트, 뷔트겐바흐, 생비트, 베장송)미혼
19.프레데릭 헨드릭
--[1]1584년 1월 29일1625년 4월 23일1647년 3월 14일총독 (네덜란드홀란트, 젤란트, 위트레흐트, 헤르더, 오퍼라이셀); 후작 (베레 및 플리싱겐); 나사우-딜렌부르크 백작, 부렌, 레르담, 카첸엘렌보겐 백작, 비안덴 백작; 자작 (앤트워프); 남작 (아게리스, 브레다, 크라넨돈크, 쿠이크, 다에스부르크, 아인트호펜, 그라프, 렉, 아이셀스타인, 디스트, 그림베르헌, 에르스탈, 바르네통, 바일슈타인, 벤트하임-링겐, 모어스, 알레, 노제로이); 영주 (다스부르크, 게르트루이덴베르크, 호헤 엔 라허 스발루웨, 클룬데르트, 몽포르, 날드베이크, 니에르바르트, 폴라넨, 스텐베르헌, 생트마르텐스디크, 빌렘스타트, 뷔트겐바흐, 생비트, 베장송)암알리아 폰 졸름스-브라운펠스
20.빌헬름 2세
--[1]1626년 5월 27일1647년 3월 14일1650년 11월 6일총독 (네덜란드홀란트, 젤란트, 위트레흐트, 헤르더, 오퍼라이셀); 후작 (베레 및 플리싱겐); 나사우-딜렌부르크 백작, 부렌, 레르담, 카첸엘렌보겐 백작, 비안덴 백작; 자작 (앤트워프); 남작 (아게리스, 브레다, 크라넨돈크, 쿠이크, 다에스부르크, 아인트호펜, 그라프, 렉, 아이셀스타인, 디스트, 그림베르헌, 에르스탈, 바르네통, 바일슈타인, 벤트하임-링겐, 모어스, 알레, 노제로이); 영주 (다스부르크, 게르트루이덴베르크, 호헤 엔 라허 스발루웨, 클룬데르트, 몽포르, 날드베이크, 니에르바르트, 폴라넨, 스텐베르헌, 생트마르텐스디크, 턴하우트, 빌렘스타트, 제벤베르헌, 뷔트겐바흐, 생비트, 베장송)메리
21.윌리엄 3세
--[1]1650년 11월 14일1650년 11월 14일1702년 3월 8일잉글랜드 국왕, 스코틀랜드 국왕, 아일랜드 국왕, 총독 (네덜란드홀란트, 젤란트, 위트레흐트, 헤르더, 오퍼라이셀); 후작 (베레 및 플리싱겐); 나사우-딜렌부르크 백작, 부렌, 레르담, 카첸엘렌보겐 백작, 비안덴 백작; 자작 (앤트워프); 남작 (아게리스, 브레다, 크라넨돈크, 쿠이크, 다에스부르크, 아인트호펜, 그라프, 렉, 아이셀스타인, 디스트, 그림베르헌, 에르스탈, 바르네통, 바일슈타인, 벤트하임-링겐, 모어스, 알레, 노제로이); 영주 (바른, 브레데보르트, 다스부르크, 게르트루이덴베르크, 호헤 엔 라허 스발루웨, 클룬데르트, 헤트 로, 몽포르, 날드베이크, 니에르바르트, 폴라넨, 스텐베르헌, 생트마르텐스디크, 소스트, 테르 에엠, 턴하우트, 빌렘스타트, 제벤베르헌, 뷔트겐바흐, 생비트, 베장송)메리 2세



오라녜-나사우 가문(두 번째)은 첫 번째 오라녜-나사우 가문의 사촌들이었다.

2. 2. 1. 네덜란드 독립과 오라녜 공

빌헬름 1세(Willem I)는 네덜란드 공화국의 초대 총독이자 네덜란드 오라녜-나사우 가문의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는 독일 영토인 나사우 일부 지역의 백작이었으며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홀란드의 봉토 상속인이었다. 빌헬름은 11세 때 사촌인 오라녜 공작 르네 폰 샤롱으로부터 네덜란드의 광대한 영토(브레다 영지 및 기타 여러 속령)를 상속받았다. 1584년 빌헬름의 암살 이후, 작위는 그의 아들 필립 빌헬름(1596년까지 스페인에 인질로 잡혀 있었다)에게, 그리고 1618년 그의 사망 후에는 그의 차남 모리스에게, 마지막으로 그의 막내아들 프레데릭 헨드릭에게 이어졌다.

오라녜 공작 작위는 네덜란드 총독과 연관되게 되었다.

빌헬름 3세(Willem III)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국왕이기도 했으며, 그의 유산은 매년 프로테스탄트 오렌지 기사단에 의해 기념된다. 빌헬름의 어머니인 메리 공주는 찰스 1세의 딸이었으며, 따라서 결혼을 통해 영국 공주이자 오라녜 공주였다.

빌헬름 3세와 메리 2세에게는 적법한 자녀가 없었다. 1702년 빌헬름의 사망 후, 네덜란드에서 그의 상속인은 나사우-디츠의 요한 빌헬름 프리소였으며, 그는 빌헬름 국왕이 유언으로 작위를 그에게 물려주었기에 작위를 계승했다. 다른 경쟁자는 프로이센 국왕이었는데, 그는 프레데릭 헨드릭(빌헬름 3세의 조부)의 유언을 근거로 작위에 대한 주장을 했다. 결국 양쪽 가문이 오라녜 공작 작위를 사용할 권리를 갖는다는 타협이 이루어졌다. 그 당시에는 공국이 프랑스 루이 14세에 의해 합병되었기 때문에 작위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프리소의 계보는 18세기 동안 이 작위를 주요 작위로 유지했다. 프랑스 군대는 1795년 그들을 네덜란드에서 축출했지만, 그들이 돌아온 후 오라녜 공작은 1813년 네덜란드의 첫 번째 군주가 되었다.

1815년 현재 네덜란드 왕국의 수립 이후, 이 작위는 법률에 의해 부분적으로 재제정되어 네덜란드 빌헬름 1세의 장남인 빌헬름 공작에게 수여되었고, 그는 나중에 빌헬름 2세가 되었다. 1983년 이후로 남성이든 여성이든 네덜란드 왕위 계승자는 오라녜 공작 또는 공주 작위를 받는다.[34] 네덜란드 왕위 계승자의 첫째 아이는 오라녜 세습 공(주) 작위를 받는다.[35] 아버지 빌럼-알렉산더가 베아트릭스 여왕의 퇴위 이후 네덜란드 국왕이 되었을 때, 카타리나-아말리아 공주가 오라녜 공주가 되었다.

2. 2. 2.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왕, 빌헬름 3세

빌헬름 3세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국왕이었으며, 그의 어머니 메리 공주는 찰스 1세의 딸이었다. 빌헬름 3세의 유산은 매년 프로테스탄트 오렌지 기사단에 의해 기념되고 있다.

빌헬름 3세와 메리 2세에게는 적법한 자녀가 없었다. 1702년 빌헬름 3세가 사망한 후, 네덜란드에서 그의 상속인은 나사우-디츠의 요한 빌헬름 프리소였으며, 그는 빌헬름 국왕이 유언으로 작위를 그에게 물려주었기에 작위를 계승했다. 다른 경쟁자는 프로이센 국왕이었는데, 그는 프레데릭 헨드릭(빌헬름 3세의 조부)의 유언을 근거로 작위에 대한 주장을 하였다. 결국 양쪽 가문이 오라녜 공작 작위를 사용할 권리를 갖는다는 타협이 이루어졌다. 그 당시에는 공국이 프랑스 루이 14세에 의해 합병되었기 때문에 작위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34]

2. 2. 3. 오라녜 공 작위의 계승 분쟁

윌리엄 3세가 적통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프레드릭-헨리(프리드리히 1세)의 유언에 따라 그의 가장 가까운 방계 친족에게 작위가 상속된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1713년 프레드리히 1세는 프랑스에 작위(적어도 영토는, 하지만 공식적인 작위는 아님)를 양도하였고,[15] 프랑스는 그의 주장을 지지했다. 이로 인해 오라녜 공국의 영토는 봉건적, 세속적 특권을 잃고 프랑스의 일부가 되었다. 유트레흐트 조약은 프로이센 국왕이 겔더른 공국의 일부를 새로운 "오라녜 공국"으로 세우도록 허용했다.[16] 프로이센 국왕과 독일 황제는 1918년까지 오라녜 공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윌리엄 3세의 남계 친족이자 침묵의 윌리엄의 방계 후손인 나사우의 요한 빌헬름 프리조는 윌리엄 3세의 유언에 따라 네덜란드 오라녜 공작의 상속자로 지정되었다. 그의 여러 후손들은 총독이 되었다. 그들은 침묵의 윌리엄이 그의 사촌 샤롱의 르네로부터 오라녜를 상속받았던 것과 유사하게, 남계 상속을 근거로 오라녜 공국의 권리를 주장했다. 그러나 그들은 오라녜 공국의 원래 공작들의 후손인 루이즈 드 콜리니의 혈통을 통해 공국 자체에 대한 권리도 가지고 있었다. (루이즈의 증조할머니인 생폴 백작 부인 안 포트는 오라녜의 티뷔르그의 후손으로, 드 보 백작가와 결혼했다.)

또한, 안네 공주와 오라녜 공 빌헬름 4세의 결혼을 통해 드 보 가문의 이탈리아 분파인 델 발조 가문으로부터의 혈통을 주장할 수 있었다. 안네는 영국왕 조지 2세의 장녀였는데, 그는 잉글랜드 에드워드 4세의 아내인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후손이었다.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할머니는 오라녜의 티뷔르그의 또 다른 후손인 마르게리타 델 발조였다.

그들은 필립 윌리엄, 모리스, 윌리엄 3세의 유언 및 오라녜가 주권자가 자신의 유언에 따라 계승권을 할당할 권리가 있는 독립 국가였다는 점을 근거로 작위를 주장했다. 프랑스는 이러한 주장들을 결코 인정하지 않았고, 오라녜-나사우 가문이나 호엔촐레른 가문이 공국 자체로부터 어떤 것을 얻도록 허용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오라녜-나사우 가문은 그 작위를 계승했고, 그들의 영지를 가지고 새로운 오라녜 공국을 세우기도 했다.[18][19][20] 오라녜-나사우 가문(원래 나사우-디츠 가문), 후대의 네덜란드 총독, 그리고 현재 네덜란드 왕실이 그 작위를 가지게 된 전통은 작위 계승으로부터 나왔다. 그들은 침묵의 윌리엄과 오라녜-나사우 가문의 전통을 유지한다.

이 작위에 대한 또 다른[21] 주장자들은 다음과 같다.

보 가문(House of Baux)은 베르트랑 드 보가 오랑주의 마지막 토착 백작인 윌리엄 드 오멜라의 딸이자 오랑주 백작 부인 티뷔르그와 결혼하면서 오랑주 공국을 계승하게 되었다. 그들의 아들은 윌리엄 1세 드 보-오랑주였다. 베르트랑은 보의 레이몽과 제보단의 스테파니의 아들이었다. 스테파니는 프로방스 백작의 상속녀인 프로방스 백작 부인 제르베르가의 딸이었다.[6]

번호이름사진문장출생오랑주 공작 칭호 획득오랑주 공작 칭호 상실사망오랑주 공작 재위 시기 기타 작위오랑주 공녀
1.베르트랑 1세 공작
1110/11151173년
처남인 라임보, 오랑주 백작 사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에 의해 오랑주 백작령이 1163년 공국으로 승격되었다.
1180년 4월/10월보의 영주Tibors de Sarenom



베르트랑 1세는 오랑주 공작으로서 보 가문의 문장, 즉 붉은색 바탕에 16각형의 흰 별을 사용했다. 나중에 오랑주 공작들은 전설적인 사냥용 호른을 문장에 추가했다.

샤롱과 아를레의 영주는 부르고뉴 백국의 통치 가문인 안스카르 가문 또는 이브레아 가문의 분가였다. 그들은 보-오렌지의 상속녀와 결혼했다.

번호이름사진문장출생오렌지 공작 즉위오렌지 공작 퇴위사망오렌지 공작 재위 시기의 기타 작위오렌지 공녀
10.장 1세 공작align="center"|1393년 2월 10일1417년 10월1418년 9월 2일영주 아를레, 퀴조, 비토마리 공녀
11.루이 1세 공작align="center"|--1390년1417년 10월1463년 12월 3일영주 아를레, 아르궤, 오르브, 에쉘랭1. 몽벨리아르의 잔느
2. 아르마냐크의 엘레오노르
3. 가마슈의 블랑슈
12.빌렘 2세 공작align="center"|--1463년 12월 3일1475년 9월 27일영주 아를레, 아르궤브르타뉴의 카트린
13.장 2세 공작align="center"|--1443년1475년 9월 27일1502년 4월 15일토네르 백작; 영주 아를레, 아르궤, 몽포콩; 기옌제독1. 부르봉의 잔느
2. 룩셈부르크의 필리베르트
14.필리베르 공작1502년 3월 18일1502년 4월 15일1530년 8월 3일나폴리 총독; 멜피 공작; 그라비나 공작; 토네르 백작, 샤르니, 팡티에브르 백작; 베장송 자작; 영주 아를레, 노제루아, 루즈몽, 오르젤레, 몽포콩, 황실군 사령관미혼


2. 2. 4. 네덜란드 왕국 수립 이후

빌헬름 3세가 적통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프레드릭 헨드릭의 유언에 따라 그의 가장 가까운 방계 친족에게 작위가 상속된 것으로 간주되었다.[15] 1713년 프랑스에 작위(적어도 영토는, 하지만 공식적인 작위는 아님)를 양도하였고,[15] 프랑스는 그의 주장을 지지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오라녜 공국의 영토는 봉건적이고 세속적인 특권을 잃고 프랑스의 일부가 되었다. 유트레흐트 조약은 프로이센 국왕이 겔더른 공국의 일부를 새로운 "오라녜 공국"으로 세우도록 허용했다.[16] 프로이센 국왕과 독일 황제는 1918년까지 오라녜 공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빌헬름 3세의 남계 친족인 나사우의 요한 빌헬름 프리조는 침묵의 윌리엄의 방계 후손이기도 했는데, 윌리엄 3세의 유언에 따라 네덜란드 오라녜 공작의 상속자로 지정되었다. 그의 여러 후손들이 총독이 되었다. 그들은 침묵의 윌리엄이 그의 사촌 샤롱의 르네로부터 오라녜를 상속받았던 것과 유사하게, 남계 상속을 근거로 오라녜 공국의 권리를 주장했다. 그러나 그들은 오라녜 공국의 원래 공작들의 후손인 루이즈 드 콜리니의 혈통을 통해 공국 자체에 대한, 비록 먼 것이지만,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또한 안네 공주와 오라녜 공 빌헬름 4세의 결혼을 통해 드 보 가문의 이탈리아 분파인 델 발조 가문으로부터의 혈통을 주장할 수 있었다. 안네는 영국왕 조지 2세의 장녀였는데, 그는 잉글랜드 에드워드 4세의 아내인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후손이었다.

그들은 또한 필립 윌리엄, 모리스, 윌리엄 3세의 유언을 근거로 주장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오라녜가 주권자가 자신의 유언에 따라 계승권을 할당할 권리가 있는 독립 국가였다는 점을 근거로 주장했다. 프랑스는 이러한 주장들을 결코 인정하지 않았고, 오라녜-나사우 가문이나 호엔촐레른 가문이 공국 자체로부터 어떤 것을 얻도록 허용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오라녜-나사우 가문은 그 작위를 계승했고, 그들의 영지를 가지고 새로운 오라녜 공국을 세우기도 했다.[18] [19] [20]

그 작위의 계승으로부터 오라녜-나사우 가문(원래 나사우-디츠 가문), 후대의 네덜란드 총독, 그리고 현재 네덜란드 왕실이 그 작위를 가지게 된 전통이 나왔다. 그들은 침묵의 윌리엄과 오라녜-나사우 가문의 전통을 유지한다.

1815년 현재 네덜란드 왕국의 수립 이후, 이 작위는 법률에 의해 부분적으로 재제정되어 네덜란드 빌헬름 1세의 장남인 빌헬름 공작에게 수여되었고, 그는 나중에 빌헬름 2세가 되었다. 1983년 이후로 남성이든 여성이든 네덜란드 왕위 계승자는 오라녜 공작 또는 공주 작위를 받는다.[34] 네덜란드 왕위 계승자의 첫째 아이는 오라녜 세습 공(주) 작위를 받는다.[35] 아버지 빌럼-알렉산더가 베아트릭스 여왕의 퇴위 이후 네덜란드 국왕이 되었을 때, 카타리나-아말리아 공주가 오라녜 공주가 되었다.

3. 오라녜 공 목록

처남인 라임보 사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에 의해 오랑주 백작령이 공국으로 승격1180년 4월/10월보의 영주Tibors de Sarenom16빌헬름 1세(침묵의)[1][23][24]1533년 4월 24일1544년 7월 15일1584년 7월 10일총독 (홀란트, 젤란트, 위트레흐트, 프리슬란트); 후작 (베레 및 플리싱겐); 나사우-딜렌부르크 백작, 카첸엘렌보겐 백작, 비안덴 백작; 자작 (앤트워프); 남작 (브레다, 쿠이크, 그라프, 디스트, 에르스탈, 바르네통, 바일슈타인, 알레, 노제로이); 영주 (다스부르크, 게르트루이덴베르크, 호헤 엔 라허 스발루웨, 클룬데르트, 몽포르, 날드베이크, 니에르바르트, 폴라넨, 스텐베르헌, 빌렘스타트, 뷔트겐바흐, 생비트, 베장송)17필립 빌헬름[25]1554년 12월 19일1584년 7월 10일1618년 2월 20일나사우-딜렌부르크 백작, 부렌, 레르담, 카첸엘렌보겐 백작, 비안덴 백작; 자작 (앤트워프); 남작 (브레다, 크라넨돈크, 쿠이크, 아인트호펜, 그라프, 아이셀스타인, 디스트, 에르스탈, 바르네통, 바일슈타인, 알레, 노제로이); 영주 (다스부르크, 게르트루이덴베르크, 호헤 엔 라허 스발루웨, 클룬데르트, 몽포르, 날드베이크, 니에르바르트, 폴라넨, 스텐베르헌, 생트마르텐스디크, 빌렘스타트, 뷔트겐바흐, 생비트, 베장송)엘레오노르 드 부르봉18모리스[26][27][28]1567년 11월 14일1618년 2월 20일1625년 4월 23일총독 (홀란트, 젤란트, 위트레흐트, 헤르더, 오퍼라이셀, 흐로닝언); 후작 (베레 및 플리싱겐); 나사우-딜렌부르크 백작, 부렌, 레르담, 카첸엘렌보겐 백작, 비안덴 백작; 자작 (앤트워프); 남작 (아게리스, 브레다, 크라넨돈크, 쿠이크, 다에스부르크, 아인트호펜, 그라프, 렉, 아이셀스타인, 디스트, 그림베르헌, 에르스탈, 바르네통, 바일슈타인, 벤트하임-링겐, 모어스, 알레, 노제로이); 영주 (다스부르크, 게르트루이덴베르크, 호헤 엔 라허 스발루웨, 클룬데르트, 몽포르, 날드베이크, 니에르바르트, 폴라넨, 스텐베르헌, 생트마르텐스디크, 빌렘스타트, 뷔트겐바흐, 생비트, 베장송)미혼19프레데릭 헨드릭--[1]1584년 1월 29일1625년 4월 23일1647년 3월 14일총독 (홀란트, 젤란트, 위트레흐트, 헤르더, 오퍼라이셀); 후작 (베레 및 플리싱겐); 나사우-딜렌부르크 백작, 부렌, 레르담, 카첸엘렌보겐 백작, 비안덴 백작; 자작 (앤트워프); 남작 (아게리스, 브레다, 크라넨돈크, 쿠이크, 다에스부르크, 아인트호펜, 그라프, 렉, 아이셀스타인, 디스트, 그림베르헌, 에르스탈, 바르네통, 바일슈타인, 벤트하임-링겐, 모어스, 알레, 노제로이); 영주 (다스부르크, 게르트루이덴베르크, 호헤 엔 라허 스발루웨, 클룬데르트, 몽포르, 날드베이크, 니에르바르트, 폴라넨, 스텐베르헌, 생트마르텐스디크, 빌렘스타트, 뷔트겐바흐, 생비트, 베장송)암알리아 폰 졸름스-브라운펠스20빌헬름 2세--[1]1626년 5월 27일1647년 3월 14일1650년 11월 6일총독 (홀란트, 젤란트, 위트레흐트, 헤르더, 오퍼라이셀); 후작 (베레 및 플리싱겐); 나사우-딜렌부르크 백작, 부렌, 레르담, 카첸엘렌보겐 백작, 비안덴 백작; 자작 (앤트워프); 남작 (아게리스, 브레다, 크라넨돈크, 쿠이크, 다에스부르크, 아인트호펜, 그라프, 렉, 아이셀스타인, 디스트, 그림베르헌, 에르스탈, 바르네통, 바일슈타인, 벤트하임-링겐, 모어스, 알레, 노제로이); 영주 (다스부르크, 게르트루이덴베르크, 호헤 엔 라허 스발루웨, 클룬데르트, 몽포르, 날드베이크, 니에르바르트, 폴라넨, 스텐베르헌, 생트마르텐스디크, 턴하우트, 빌렘스타트, 제벤베르헌, 뷔트겐바흐, 생비트, 베장송)메리 공주21윌리엄 3세--[1]1650년 11월 14일1650년 11월 14일1702년 3월 8일잉글랜드 국왕, 스코틀랜드 국왕, 아일랜드 국왕, 총독 (홀란트, 젤란트, 위트레흐트, 헤르더, 오퍼라이셀); 후작 (베레 및 플리싱겐); 나사우-딜렌부르크 백작, 부렌, 레르담, 카첸엘렌보겐 백작, 비안덴 백작; 자작 (앤트워프); 남작 (아게리스, 브레다, 크라넨돈크, 쿠이크, 다에스부르크, 아인트호펜, 그라프, 렉, 아이셀스타인, 디스트, 그림베르헌, 에르스탈, 바르네통, 바일슈타인, 벤트하임-링겐, 모어스, 알레, 노제로이); 영주 (바른, 브레데보르트, 다스부르크, 게르트루이덴베르크, 호헤 엔 라허 스발루웨, 클룬데르트, 헤트 로, 몽포르, 날드베이크, 니에르바르트, 폴라넨, 스텐베르헌, 생트마르텐스디크, 소스트, 테르 에엠, 턴하우트, 빌렘스타트, 제벤베르헌, 뷔트겐바흐, 생비트, 베장송)메리 2세



베르트랑 1세는 오랑주 공작으로서 보 가문(House of Baux)의 문장, 즉 붉은색 바탕에 16각형의 흰 별을 사용했다. 나중에 오랑주 공작들은 전설적인 사냥용 호른을 문장에 추가했다.[6][22]

빌헬름 폰 나사우는 그의 사촌인 르네로부터 오라녜 공국을 상속받았다. 르네에게는 자녀나 형제자매가 없었기에 빌헬름은 이전 오랑주 공작의 후손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랑주 가문의 혈통이 없는 그의 아버지쪽 사촌에게 오랑주 공작의 자리를 물려줄 주권 공작으로서의 권리를 행사했다. 이것이 네덜란드 왕가인 오라녜-나사우 왕가의 시작이었다.[6][22]

빌헬름 1세(Willem I)는 네덜란드 공화국의 초대 총독이자 네덜란드 오라녜-나사우 가문의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는 독일 영토인 나사우의 일부 지역의 백작이었으며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홀란드의 봉토의 상속인이었다. 빌헬름은 11세 때 사촌인 오라녜 공작 르네 폰 샤롱으로부터 네덜란드의 광대한 영토(브레다 영지 및 기타 여러 속령)를 상속받았다. 1584년 빌헬름의 암살 이후, 작위는 그의 아들 필립 빌헬름(1596년까지 스페인에 인질로 잡혀 있었다)에게, 그리고 1618년 그의 사망 후에는 그의 차남 모리스에게, 마지막으로 그의 막내아들 프레데릭 헨드릭에게 이어졌다.[6][22]

오라녜 공작 작위는 네덜란드 총독과 연관되게 되었다.

빌헬름 3세(Willem III)는 또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국왕이었으며, 그의 유산은 매년 프로테스탄트 오렌지 기사단에 의해 기념된다. 빌헬름의 어머니인 메리 공주는 찰스 1세의 딸이었으며, 따라서 결혼을 통해 영국 공주이자 오라녜 공주이기도 했다.[6][22]

빌헬름 3세와 메리 2세에게는 적법한 자녀가 없었다. 1702년 빌헬름의 사망 후, 네덜란드에서 그의 상속인은 나사우-디츠의 요한 빌헬름 프리소였으며, 그는 빌헬름 국왕이 유언으로 작위를 그에게 물려주었기에 작위를 계승했다. 다른 경쟁자는 프로이센 국왕이었는데, 그는 프레데릭 헨드릭(빌헬름 3세의 조부)의 유언을 근거로 작위에 대한 주장을 했다. 결국 양쪽 가문이 오라녜 공작 작위를 사용할 권리를 갖는다는 타협이 이루어졌다. 그 당시에는 공국이 프랑스 루이 14세에 의해 합병되었기 때문에 작위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6][22]

프리소의 계보는 18세기 동안 이 작위를 주요 작위로 유지했다. 프랑스 군대는 1795년 그들을 네덜란드에서 축출했지만, 그들이 돌아온 후 오라녜 공작은 1813년 네덜란드의 첫 번째 군주가 되었다.

1815년 현재 네덜란드 왕국의 수립 이후, 이 작위는 법률에 의해 부분적으로 재제정되어 네덜란드 빌헬름 1세의 장남인 빌헬름 공작에게 수여되었고, 그는 나중에 빌헬름 2세가 되었다. 1983년 이후로 남성이든 여성이든 네덜란드 왕위 계승자는 오라녜 공작 또는 공주 작위를 받는다.[34] 네덜란드 왕위 계승자의 첫째 아이는 오라녜 세습 공(주) 작위를 받는다.[35] 아버지 빌럼-알렉산더가 베아트릭스 여왕의 퇴위 이후 네덜란드 국왕이 되었을 때, 카타리나-아말리아 공주가 오라녜 공주가 되었다.

4. 문장

16세기와 17세기 오라녜 공들은 다양한 문장을 사용했다. 빌렘은 오라녜 공작이 되면서 아버지 문장의 중앙에 샤롱-아를레 문장을 배치했다. 그는 1582년 베어와 플리싱언의 백작령을 매입할 때까지 이 문장을 사용했다. 이후 그는 상단 중앙에는 베어 백작령 문장을, 하단 중앙에는 부렌 백작령 문장을 배치한 문장을 사용했는데, 이는 오라녜-나사우 가문의 성장하는 정치적 지위와 왕실 열망을 반영한다.[23]



오라녜의 빌렘 6세가 1813년 네덜란드로 돌아와 네덜란드의 군주로 선포되었을 때, 그는 이전의 네덜란드 공화국의 문장(1분기와 4분기)을 오라녜를 상징하게 된 "샤롱-오라녜" 문장(2분기와 3분기)과 함께 4분기로 나누었다. 중앙에는 자신의 나사우 가문 문장을 배치했다. 1815년 왕이 되었을 때, 그는 네덜란드 공화국의 사자와 나사우 문장의 빌렛(billets)을 결합하고 왕관을 추가하여 네덜란드의 국장을 만들었다.

19세기에는 "오라녜 공작(Prins van Oranje)"이라는 칭호를 가진 네덜란드 왕세자와 "오라녜 세습 공작(Erfprins van Oranje)"이라는 칭호를 가진 그의 아들은 각자 미리 정의된 문장을 가지고 있었다. 현재 네덜란드 왕가인 오라녜 가문과 그 후손인 오라녜-나사우 가문은 이 칭호를 가족에게 유지했다. 빌헬미나는 또한 자신의 후손들이 영구적으로 "오라녜-나사우 공주와 공작"으로 불리며, 가문의 이름은 "오라녜-나사우"가 될 것이라고 선포했다. 그 이후로 오라녜-나사우 가문의 개별 구성원들은 영국과 유사하게 재위 중인 군주에 의해 자신의 문장을 부여받았다. 이것은 보통 왕실 문장이며, 오라녜 공국의 문장과 함께 4분기로 나뉘고, 부계 문장의 내부 문장(inescutcheon)이 있다.[38]

신성 로마 제국의 이전 영토였던 오라녜 공작들은 독립 공작의 왕관을 사용했다. 때로는 관모 부분만 사용했다. 네덜란드 왕국의 수립 이후, 그들은 네덜란드 왕실 왕관을 사용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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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웹사이트 Histoire de la ville d'Orange http://www.ville-ora[...] 2011-05-05
[3] 학술지 The Opposition to the 8th and 9th Articles of the Commercial Treaty of Utrecht 1924-04-01
[4] 웹사이트 Treaty between Prussia and Orange-Nassau, Berlin, 1732 http://www.heraldica[...] 2015-06-16
[5] 서적 Een uitzonderlijke erfgenaam: De verdeling van de nalatenschap van Koning-Stadhouder Willem II en een consequentie daarvan: Pruisisch heerlijk gezag in Hooge en Lage Zwaluwe, 1702–1754 Uitgeverij Verloren B.V. 2013-01-01 # 날짜 정보가 연도만 있으므로 1월 1일로 설정
[6] 서적 The House of Orange Methuen & Co. Ltd
[7] 서적 Dictionnaire des lettres françaises: Le Moyen Âge Fayard
[8] 서적 The princes of Orange: the stadholders in the Dutch Republic Cambridge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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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웹사이트 Famille d'Orléans-Longueville https://fr.wikipedia[...] 2022-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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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서적 Histoire de la principauté d'Orange ; suivie de lettres inédites des princes d'Orange, des rois de France, du Cte de Grignan, etc., etc http://gallica.bnf.f[...] 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 2011-05-19
[14] 서적 Le droit public de l'Europe, fondé sur les traités 1761
[15] 웹사이트 Traité de paix d'Utrecht entre Louis XIV et Frédéric-Guillaume, roi de Prusse http://visualiseur.b[...] IDC (Leiden) 2011-05-16
[16] 웹사이트 Traité de paix d'Utrecht entre Louis XIV et Frédéric-Guillaume, roi de Prusse http://visualiseur.b[...] IDC (Leiden) 2011-05-16
[17] 백과사전 D. Appleton and Company 1873
[18] 웹사이트 Treaty between Prussia and Orange-Nassau, Berlin, 1732 http://www.heraldica[...] 33 CTS 487 2011-05-16
[19] 웹사이트 Treaty between Prussia and Orange-Nassau, Berlin, 1732 http://www.heraldica[...] 2011-05-16
[20] 서적 The History of the People of the Netherlands AMS Press
[21] 서적 Histoire de la principauté d'Orange ; suivie de lettres inédites des princes d'Orange, des rois de France, du Cte de Grignan, etc., etc http://gallica.bnf.f[...] 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 2011-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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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서적 The princes of Orange: the stadholders in the Dutch Republic https://archive.org/[...] Cambridge University Press
[24] 웹사이트 The Official Website of the Dutch Royal House in English, see tour of Noordeinde Palace, Royal Archives, Front Entrance Hall http://www.koninklij[...] 2011-06-01
[25] 서적 Armorial général, contenant la description des armoiries des familles nobles et patriciennes de l'Europe: précédé d'un dictionnaire des termes du blason G.B. van Goor
[26] 서적 Armorial général, contenant la description des armoiries des familles nobles et patriciennes de l'Europe: précédé d'un dictionnaire des termes du blason G.B. van Goor
[27] 서적 The Dutch in the Seventeenth Century Thames and Hud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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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서적 Handboek der Wapenkunde Theod. B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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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웹사이트 Website Dutch Royal House on Willem-Alexander http://www.koninklij[...] 2010-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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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서적 Armorial general Genealogical Publishing 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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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서적 Armorial general https://books.google[...] Genealogical Publishing Co.
[40] 서적 Handboek der Wapenkunde Theod. Bom
[41] 서적 Heraldiek Frederik Muller
[42] 서적 Handboek der Wapenkunde Theod. Bom
[43] 서적 Heraldiek Frederik Muller
[44] 웹사이트 Maurits van Vollenhoven http://klaas.punt.nl[...] klaas.punt.nl 2013-04-04
[45] 저널 The Opposition to the 8th and 9th Articles of the Commercial Treaty of Utrecht https://www.jstor.or[...] 1924-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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