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라녜 공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오라녜 공은 프랑스 남부 오랑주를 다스리던 군주를 가리키는 작위이다. 이 작위는 원래 보 가문, 샬롱-아를레 가문을 거쳐 1544년 나사우 가문으로 넘어갔으며, 이후 오렌지-나소 가문이 이 작위를 계승했다. 오라녜 공국은 신성 로마 제국의 봉토에서 유래했으며, 1163년 공국으로 승격되었다. 1673년 프랑스의 루이 14세에 의해 합병되면서 오라녜 공국은 주권 국가로서의 지위를 잃었다. 이후 오라녜 공 작위는 프랑스 국왕에 의해 명목상 수여되었고, 네덜란드 오라녜-나사우 가문과 프로이센, 메이유-네슬 가문 등이 이 작위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다. 현재는 네덜란드 왕위 계승자에게 오라녜 공(주) 작위가 부여되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프리드리히 1세 (신성 로마 황제) - 레냐노 전투
레냐노 전투는 1176년 신성 로마 제국 프리드리히 1세와 롬바르디아 동맹 간의 전투로, 롬바르디아 동맹이 승리하여 북부 이탈리아 도시들의 자치권을 지켜냈으며, 중세 보병의 전술적 중요성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 오랑주 공 - 빌럼 2세 판 오라녜
빌럼 2세 판 오라녜는 프레데리크 헨드릭의 장남으로, 1647년 오라녜 공위와 6개 주 총독직을 계승하고 찰스 1세의 딸과 결혼하여 친영 정책을 펼쳤으나, 1650년 급사했으며 그의 아들은 훗날 잉글랜드의 윌리엄 3세가 되었다. - 오랑주 공 - 빌럼 1세
빌럼 1세는 네덜란드와 룩셈부르크의 통치자였으며, 나폴레옹 몰락 후 네덜란드 연합 왕국의 초대 국왕으로 즉위하여 경제 발전을 추진했으나 벨기에 독립을 인정하고 퇴위 후 사망했다. - 왕위 계승자 - 로스시 공작
로스시 공작은 스코틀랜드 국왕의 장남에게 계승되는 작위로, 1398년 처음 수여된 후 왕세자의 작위로 공식화되었으며, 영국-스코틀랜드 통합 후 부활하여 현재 윌리엄 왕세자가 보유하고 있다. - 왕위 계승자 - 콘월 공작
콘월 공작은 영국 국왕의 장남이자 직계상속인에게 자동적으로 계승되는 작위로, 1337년 최초 수여 이후 국왕의 장남에게 계승되는 관례가 확립되었으며, 콘월 공국을 통치하며 상당한 권한과 재산을 소유하고 현재는 윌리엄 왕세자가 그 지위를 가지고 있다.
오라녜 공 | |
---|---|
지도 | |
기본 정보 | |
원어 명칭 | Prins van Oranje |
칭호 유래 | 오렌지 공국 |
사용 언어 | 네덜란드어 |
역사 | |
기원 | 오렌지 공국의 통치자 |
오렌지 가문 | 1544년 나사우가에 의해 상속됨 |
1702년 이후 | 오렌지 공국은 프랑스에 의해 점령됨 오라녜 공 칭호는 나사우 가문의 여러 분파에 의해 주장됨 |
1732년 | 프로이센과 오라녜나사우 가문 사이의 조약에서 프로이센 왕이 오라녜 공의 칭호 사용을 인정함 |
1815년 | 네덜란드 왕국의 왕세자의 칭호로 지정됨 |
현재 사용 | |
네덜란드 왕위 계승자 | 오라녜나사우 가문 |
현재 공 | 카타리나아말리아 공주 |
기타 | |
참고 | 오라녜 공주 (결혼을 통한 칭호) |
2. 역사
오랑주를 중심으로 한 오라녜 공국은 신성 로마 제국의 봉토인 오랑주 백작령에서 유래했다. 800년경 샤를마뉴의 사촌인 빌헬름 1세가 무어인과의 전쟁에서 공을 세워 이 지역을 받았다. 그는 오크어로 ''Guilhem''이라 불렸지만, 프랑크족 영주로서
12세기 문장학 유행에 따라 오랑주를 상징하는 뿔은 빌헬름 1세의 이름과 관련된 말장난으로, ''기욤의 노래''에 나오는 "Guillaume au Court-nez"(짧은 코의 빌헬름) 또는 "Guillaume au Cornet"(뿔의 빌헬름)에서 유래한다.[6] 이 ''샤송''은 793년 카르카손 근처 오르비외 강 전투와 오랑주 점령 사건과 관련이 있다.[7]
1163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는 오랑주 영지를 공국으로 승격시켰다.[6] 제국의 영토가 공국에서 후퇴하면서 공작은 황제가 행사하던 주권을 계승했다.[6] 침묵의 빌헬름은 오랑주를 봉토가 아닌 "자신의 자유 재산"으로 여겼다.[8][9]
샤롱의 르네는 공국을 사촌 침묵의 빌헬름에게 남겼으나, 이는 보 가문 출신 오랑주 공주 보-오랑주 백작 부인 마리의 유언에 어긋나는 것이었다.[10]
1673년 루이 14세는 오랑주의 윌리엄 3세에 대한 전쟁 행위로 공국 영토를 프랑스에 합병, 주권 국가로서의 존재를 멈추게 했다. 루이 14세는 네슬의 루이 샤를 드 메이 백작에게 명목상 공작 작위를 수여했다.[12] 1714년 콩티 공 루이 아르망 드 부르봉에게 공국의 용익권을 수여했고, 1727년 그의 사망 후 공국은 1731년 왕관에 합병된 것으로 간주되었다.[13]
1713년 유트레히트 조약으로 오랑주가 프랑스에 할양되자 여러 가문들이 항의했으나,[14] 조약은 오랑주를 프랑스에 정복, 합병된 것으로 간주하여 이들의 항의는 무시되었다.
윌리엄 3세 사후, 프리드리히 1세의 유언에 따라 가장 가까운 방계 친족에게 작위가 상속된 것으로 간주되었다. 프리드리히 1세는 1713년 프랑스에 작위를 양도했으나,[15] 프랑스는 그의 주장을 지지했다. 유트레흐트 조약은 프로이센 국왕이 겔더른 공국의 일부를 새로운 "오라녜 공국"으로 세우도록 허용했다.[16]
2. 1. 오랑주 공국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는 1163년 교황과 프랑스 국왕에 맞서 부르고뉴의 지지자들을 규합하기 위해 오랑주 영지를 공국으로 승격시켰다.[6] 제국의 영토가 공국의 영토에서 후퇴함에 따라, 공작은 황제가 이전에 행사했던 주권을 계승했다.[6] 침묵의 빌헬름은 오랑주를 봉신의 종주의 봉토가 아닌 "나 자신의 자유 재산"으로 여겼다.[8][9]원래 공작들의 마지막 직계 후손인 샤롱의 르네는 자신의 주권을 행사하여 공국을 그의 사촌인 침묵의 빌헬름에게 남겼다. 그러나 이것은 보 가문 출신의 오랑주 공주였던 보-오랑주 백작 부인 마리의 유언에 의해 제정된 상속 패턴에 위배되는 것이었다.[10]
1673년 루이 14세는 총독 오랑주의 윌리엄 3세(나중에 영국의 윌리엄 3세가 됨)에 대한 전쟁 행위로 공국의 모든 영토를 프랑스와 왕실 영지에 합병했다. 이로써 오랑주는 사실상 주권 국가로서의 존재를 멈추었다. 이후 루이 14세는 네슬의 루이 샤를 드 메이 백작에게 명목상의 공작 작위를 수여했다.[12] 1714년 루이 14세는 콩티 공 루이 아르망 드 부르봉에게 공국의 용익권을 수여했다. 1727년 그가 사망한 후 공국은 1731년 왕관에 합병된 것으로 간주되었다.[13]
1713년 유트레히트 조약으로 오랑주가 프랑스에 할양되자, 여러 가문들이 조약 조건에 대해 공식적으로 항의했다.[14] 그러나 조약은 오랑주를 프랑스에 정복되어 합병된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이들의 항의는 무시되었다.
윌리엄 3세가 적통 후계자 없이 사망함에 따라, 프레드릭-헨리(프리드리히 1세)의 유언에 따라 그의 가장 가까운 방계 친족에게 작위가 상속된 것으로 간주되었다. 프리드리히 1세는 1713년 프랑스에 작위(적어도 영토는, 하지만 공식적인 작위는 아님)를 양도하였다.[15] 프랑스는 그의 주장을 지지했다. 이런 방식으로 오라녜 공국의 영토는 봉건적이고 세속적인 특권을 잃고 프랑스의 일부가 되었다. 유트레흐트 조약은 프로이센 국왕이 겔더른 공국의 일부를 새로운 "오라녜 공국"으로 세우도록 허용했다.[16]
2. 1. 1. 기원
이 명칭은 프랑스 남부 론 계곡의 보클뤼즈주에 있는 오랑주(Orange)를 가리키며, 이곳은 오렌지가의 소유였고, 이후 보 가문과 샬롱-알레 가문을 거쳐 1544년 나소 가문 딜렌부르크 분가에게 넘어갔다. 그 이후로 이 가문은 오렌지-나소 가문으로 알려지게 되었다.이 공국은 신성 로마 제국의 봉토였던 "오랑주 백작령"에서 유래했다. 이 백작령은 신성 로마 제국에 속한 부르고뉴 왕국에 있었다. 800년경 빌헬름 1세(755년생)에게 주어졌다. 그는 샤를 마르텔의 손자이자 샤를마뉴의 사촌으로, 무어인들과의 전쟁과 프랑스 남부와 히스파니아 변경지의 재정복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았다. 그의 오크어 이름은 ''Guilhem''이지만, 프랑크족 영주였던 그는 ''빌헬름''](Wilhelm)''이라는 옛 게르만식 이름으로 자신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빌헬름은 또한
2. 1. 2. 공국으로 승격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는 1163년 교황과 프랑스 국왕에 맞서 부르고뉴의 지지자들을 규합하기 위해 오랑주 영지를 공국으로 승격시켰다.[6] 제국의 영토가 공국의 영토에서 후퇴함에 따라, 공작은 황제가 이전에 행사했던 주권을 계승했다.[6] 침묵의 빌헬름은 오랑주를 봉신의 종주의 봉토가 아닌 "나 자신의 자유 재산"으로 여겼다.[8][9]샤롱의 르네는 자신의 주권을 행사하여 공국을 그의 사촌인 침묵의 빌헬름에게 남겼다. 그러나 이것은 보 가문 출신의 오랑주 공주였던 보-오랑주 백작 부인 마리의 유언에 의해 제정된 상속 패턴에 위배되는 것이었다.[10] 마리 드 보-오랑주는 유언에서 그녀의 아들 루이가 오랑주를 상속받지 못하면 그녀의 딸 알릭스와 그녀의 후손들이 상속받도록 명시했다.
알릭스의 남편은 생 조르주 영주 기욤 드 비엔느였다.[10] 그들의 딸 마르게리트는 1449년 뇌샤텔과 로텔랭 영주인 바덴-호흐베르크의 루돌프와 결혼했다. 그들의 아들 필립의 유일한 자녀는 요하나였고, 그녀는 1504년 롱귀유 공작 오를레앙의 루이 1세와 결혼했다. 이 결혼을 통해 발루아 가문의 서자 가문인 오를레앙-롱귀유 가문은 1694년 장남 계열이 끊길 때까지 오랑주의 청구권자였다.[11] 나소의 침묵의 빌헬름이 오랑주 공작으로 계승했을 때, 오를레앙-롱귀유 가문은 항의했고 프랑스에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법원 판결을 얻었다. 그러나 오랑주는 주권 국가였고 프랑스의 일부가 아니었기 때문에 법원의 결정은 집행력이 없었다.
1673년 루이 14세는 총독 오랑주의 윌리엄 3세에 대한 전쟁 행위의 일환으로 공국의 모든 영토를 프랑스와 왕실 영지에 합병했다. 그 후 루이는 원래 오랑주 공작들의 직계 후손이자 장자 상속녀인 부인을 둔 네슬의 루이 샤를 드 메이 백작에게 명목상의 공작 작위를 수여했다.[12] 1714년 루이 14세는 샤롱의 알릭스를 통한 오를레앙-롱귀유 가문의 주장을 통해 공국에 대한 청구권을 가진 그의 친척인 콩티 공 루이 아르망 드 부르봉에게 공국의 용익권을 수여했다. 1727년 그가 사망한 후 공국은 1731년 왕관에 합병된 것으로 간주되었다.[13]
1713년 유트레히트 조약 이후 오랑주가 프랑스에 할양되자, 뤼네 가문/Maison d'Albert de Luynes, 마티뇽 가문, 레디기에르 부인 폴-프랑수아즈-마르게리트 드 곤디 드 레츠와 빌르로이 가문/Maison de Neufville de Villeroy, 알레그르 가문, 뒤프라 가문 등은 조약 조건에 대해 공식적으로 항의했다.[14] 그러나 조약이 오랑주를 이제 프랑스에 정복되어 합병된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그들의 항의는 무시되었다.
윌리엄 3세가 적통 후계자 없이 사망함에 따라, 프레드릭-헨리(프리드리히 1세)의 유언에 따라 그의 가장 가까운 방계 친족에게 작위가 상속된 것으로 간주되었다. 프레드리히 1세는 1713년 프랑스에 작위(적어도 영토는, 하지만 공식적인 작위는 아님)를 양도하였다.[15] 프랑스는 그의 주장을 지지했다. 유트레흐트 조약은 프로이센 국왕이 겔더른 공국의 일부를 새로운 "오라녜 공국"으로 세우도록 허용했다.[16]
윌리엄 3세의 남계 친족인 나사우의 요한 빌헬름 프리조는 침묵의 윌리엄의 방계 후손이기도 했는데, 윌리엄 3세의 유언에 따라 네덜란드 오라녜 공작의 상속자로 지정되었다. 그들은 침묵의 윌리엄이 그의 사촌 샤롱의 르네로부터 오라녜를 상속받았던 것과 유사하게, 남계 상속을 근거로 오라녜 공국의 권리를 주장했다. 그러나 그들은 루이즈 드 콜리니의 혈통을 통해 공국 자체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또한 안네 공주와 오라녜 공 빌헬름 4세의 결혼을 통해 드 보 가문의 이탈리아 분파인 델 발조 가문으로부터의 혈통을 주장할 수 있었다. 안네는 영국왕 조지 2세의 장녀였는데, 그는 잉글랜드 에드워드 4세의 아내인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후손이었다.
그들은 또한 필립 윌리엄, 모리스, 윌리엄 3세의 유언을 근거로 주장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오라녜가 주권자가 자신의 유언에 따라 계승권을 할당할 권리가 있는 독립 국가였다는 점을 근거로 주장했다. 프랑스는 이러한 주장들을 결코 인정하지 않았고, 오라녜-나사우 가문이나 호엔촐레른 가문이 공국 자체로부터 어떤 것을 얻도록 허용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오라녜-나사우 가문은 그 작위를 계승했고, 그들의 영지를 가지고 새로운 오라녜 공국을 세우기도 했다.[18] [19][20]
이 작위에 대한 또 다른[21] 주장자들은 1918년까지 프로이센을 통치했던 호엔촐레른 가문, 메이유-네슬 가문이다.
2. 1. 3. 샬롱-아를레 가문과 나소 가문의 상속
공녀(결혼을 통한)
2. 아르마냐크의 엘레오노르
3. 가마슈의 블랑슈
2. 룩셈부르크의 필리베르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