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시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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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르시니 가는 고대 로마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후손을 자처하며, 로마의 콜론나 가문과 정치적 반목을 이어갔다. 600년경 카요 오르소 오르시니의 후손으로, 교황 스테파노 2세, 교황 바오로 1세, 교황 첼레스티노 3세, 교황 니콜라 3세, 교황 베네딕토 13세 등 5명의 교황을 배출했다. 주요 분파로는 피틸리아노, 몬테로톤도, 브라차노, 그라비나 가문 등이 있으며, 이들은 영토 확장과 권력 다툼을 통해 가문의 세력을 키웠다. 오르시니 가문은 브라차노 성, 몬스터 공원 등 다양한 건축물을 남겼으며, 문학 작품에도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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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시니가 | |
---|---|
가문 정보 | |
성씨 | 오르시니 가문 |
모가문 | 보보네/오르시니 가문 |
문장 | Blason fam it Orsini.svg |
가훈 | Senza rimproveri (비난 없이) |
가훈 번역 | 비난 없이 |
유형 | 흑색 귀족 가문 |
국가 | 교황령 나폴리 왕국 케팔로니아와 자킨토스 백작령 에피로스 공국 [[File:Flag of the Grand Duchy of Tuscany (1840).svg|24px|border]] 토스카나 대공국 양시칠리아 왕국 이탈리아 왕국 |
지역 | 이탈리아 |
작위 | 교황 (세습 작위 아님) 에피로스 공작 케팔로니아와 자킨토스 백작 교황청 보좌 공작 바리 공작 그라비나 공작 아말피 공작 브라차노 공작 피틸리아노 백작 |
창립 | 기원후 600년경 |
창립자 | 카요 오르소 오르시니 |
현 가주 | 도메니코 나폴레오네 오르시니, 그라비나 공작 |
2. 기원 및 초기 역사
오르시니 가문은 고대 로마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후손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로마에서 콜론나 가문과 수 세기 동안 정치적 갈등을 겪었으나, 1511년 교황 칙서로 인해 중단되었다. 1571년에는 두 가문의 수장들이 교황 식스토 5세의 조카와 결혼함으로써 화해했다. 그러나 콜론나 가문 역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후손이라고 주장한다.
오르시니 가문은 서기 600년경에 살았던 카요 오르소 오르시니의 후손이다. 가문의 일부 구성원들은 보보네-오르시니라는 성을 사용하기도 했다. 11세기 초 보보네라는 인물은 피에트로의 아버지였고, 피에트로는 다시 교황 첼레스티노 3세가 되는 자친토 보보네(1110–1198)의 아버지였다.
보보네라는 성은 그의 자녀들 대에 이르러 사라졌고, 그들은 ''de domo filiorum Ursi''라고 불렸다. 그들 중 나폴레오네와 마테오 로소 (1178–1246)은 가문의 위상을 크게 높였다. 나폴레오네는 남부 가문의 창시자가 되었고, 마노펠로 도시를 획득하여 백작령으로 만들었으며, 교황령의 ''곤팔로니에레''였다. 마테오 로소는 1241년 신성 로마 제국 군대를 격파하고 1243년까지 로마의 실질적인 영주였으며, 원로원의 칭호를 받았다. 그의 두 아들과 나폴레오네도 원로원이었다. 마테오는 콜론나 가문을 로마에서 몰아내고 오르시니 영토를 남쪽으로 아벨리노, 북쪽으로 피틸리아노까지 확장했다. 그의 생애 동안 가문은 구엘프 파벌에 확고하게 속해 있었다. 그는 약 10명의 아들을 두었고, 그들은 그의 사후 봉토를 나누어 가졌다.
2. 1. 초기 교황 배출
오르시니 가문은 교황 스테파노 2세, 교황 바오로 1세, 교황 첼레스티노 3세, 교황 니콜라 3세, 교황 베네딕토 13세 등 5명의 교황을 배출했다.[4] 11세기 초 보보네라는 인물은 자친토 보보네 (1110–1198)의 아버지인 피에트로의 아버지였다. 자친토 보보네는 1191년 교황 첼레스티노 3세가 되어 두 조카를 추기경으로 임명하고 사촌 조반니 가에타노(잔가에타노, 1232년 사망)가 비코바로, 리첸차, 로카지오비네, 네투노의 봉토를 구매하도록 허락했다. 그의 아들 중 가장 뛰어난 인물은 조반니 가에타노 (1280년 사망)로, 교황 니콜라 3세로 선출되었다. 그는 조카 베르톨도(1289년 사망)를 로마냐 백작으로 임명했고 두 조카와 형제를 추기경으로 임명했다.2. 2. 교황 니콜라 3세와 족벌주의
조반니 가에타노 오르시니는 1280년 교황 니콜라 3세로 선출되었다. 그는 조카 베르톨도를 로마냐 백작으로 임명하고, 두 명의 조카와 형제를 추기경으로 임명하는 등 족벌주의를 펼쳤다.[4]3. 주요 분파
오르시니 가문은 여러 분파로 나뉘어 발전했는데, 주요 분파는 다음과 같다.
- 피틸리아노 분파: 소아나 백작령을 기반으로 성장했으나, 시에나 공화국 등과의 전쟁으로 쇠퇴했다.
- 몬테로톤도 분파: 로마 귀족 가문 간의 분쟁에 연루되었으며, 교황청에서 주요 인물을 배출했다.
- 브라차노 분파: 라치오 지역에서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으며, 브라차노 공작위를 받았다.
- 그라비나 분파: 오르시니 가문 중 유일하게 현존하는 분파이며, 그라비나 공작위를 계승하고 있다.
- 남부 분파: 나폴리 왕국에서 활동하며 타란토 공국을 통치하기도 했으나, 이후 몰락했다.
각 분파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하위 문서를 참조하면 된다.
3. 1. 피틸리아노 분파
귀도 오르시니는 토스카나 남부와 볼세나 호수 서쪽에 위치한 소아나 백작령을 상속받았다.[5] 그와 그의 후손들은 소아나, 피틸리아노, 놀라의 봉토를 다스렸으나, 15세기 초 시에나 공화국 및 콜로나 가문과의 전쟁으로 여러 영토를 잃었다. 베르톨도(1417년 사망)는 피티글리아노만을 지킬 수 있었으며, 그의 손자 오르소(1479년 7월 5일 사망)는 놀라 백작이었으며 밀라노 공작과 베네치아 공화국에서 콘도티에로로 싸웠다. 이후 그는 나폴리 왕 페르디난도 1세의 휘하로 들어갔으나, 남작들의 음모에 참여하지 않아 아스콜리와 아트리팔다의 봉토를 하사받았다. 그는 토스카나에서 아라곤의 원정에 참여했고 비테르보 포위 공격에서 사망했다.
피티글리아노 가문의 가장 뛰어난 인물은 당시 주요 콘도티에로 중 한 명인 니콜로였다. 그의 아들 루도비코(1534년 1월 27일 사망)와 그의 조카 엔리코(1528년 사망)는 이탈리아 전쟁에 프랑스와 스페인 양측에서 참전했으며, 당시 이탈리아 군 지도자들의 전형적인 행동처럼 종종 편을 바꾸었다. 루도비코의 두 딸은 중요한 인물과 결혼했다. 제로니마는 피에르 루이지 파르네세와 결혼했는데, 그는 교황 바오로 3세의 사생아였으며, 마르치아는 마리냐노의 잔 자코모 메디치와 결혼했는데, 그는 스페인 군의 중요한 장군이었다.
이 가문은 루도비코가 놀라를 잃은 후 쇠퇴하기 시작했으며, 루도비코는 피티글리아노에 대한 시에나의 종주권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의 아들 조반 프란체스코(1567년 5월 8일 사망) 치하에서 백작령은 토스카나 대공국의 영향권에 들어갔다. 이후, 알레산드로(1604년 2월 9일 사망)가 몬테로톤도 공작위를 얻으려 했으나 교황 그레고리오 13세에 의해 좌절되었다. 그의 아들 잔난토니오(1569년 3월 25일 – 1613년)는 피티글리아노를 토스카나에 팔고, 그 대가로 몬테 산 사비노 후작령을 받았다.
이 가문은 1640년 알레산드로의 사망으로 단절되었다.
3. 2. 몬테로톤도 분파
리날도는 마테오 로소 데이 그라치의 셋째 아들이었으며 몬테로톤도 분파를 세웠다. 그의 아들 나폴레오네는 1288년에 추기경이 되었고, 1342년 아비뇽에서 사망할 때까지 교황청의 주요 구성원으로 있었다.[1]이 가문은 중세 후기 로마 귀족 간의 분쟁에 자주 연루되었으며, 적어도 세 명의 가문 구성원이 원로원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다른 구성원들은 용병으로 참전했다. 프란체스코는 1370년 피렌체가 밀라노의 비스콘티 가문에 대항하여 벌인 전쟁에 참여했다. 오르소(1424년 7월 24일 사망)는 자고나라 전투에서 밀라노 군대에 맞서 나폴리 왕을 위해 싸우다 사망했다. 그의 아들 자코모(1482년 사망)와 로렌초(1452년 사망)는 교황령, 나폴리, 피렌체를 위해 싸웠다. 자코모의 딸 중 한 명인 클라리체(1453년~1488년 7월 30일)는 로렌초 데 메디치의 아내가 되었다. 프란치오토 오르시니는 1517년 레오 10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임명되었다.[1]
몬테로톤도 오르시니 가문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조반니 바티스타 오르시니였으며, 그는 식스토 4세 치하에서 추기경이 되었다(1483). 그는 1502년 체사레 보르자에 대한 실패한 음모를 주도한 인물 중 한 명으로 추정되며, 1503년 2월 22일 보복으로 다른 가문 구성원들과 함께 암살되었다. 줄리오는 체사레에게 감금되었지만 살아남았고, 파올로와 프란체스코 4세 그라비나 공작은 1503년 1월 18일에 목 졸려 죽었다.[1]
이 가문은 16세기 후반부터 쇠퇴하기 시작했는데, 여러 구성원이 암살되거나 여러 가지 이유로 토지를 잃었다. 마지막 대표인 엔리코(1643년 9월 12일 사망)와 프란체스코(1592년~1650년 9월 21일)는 1641년에 몬테로톤도를 바르베리니 가문에게 매각했다.[1]
3. 3. 브라차노 분파
나폴레오네 오르시니는 위대한 마테오 로소의 또 다른 아들로, 현재 북부 라치오에 있는 브라차노, 네롤라 및 기타 영지를 물려받았다. 1259년 그는 로마 원로원 의원이었다. 그들의 봉토가 차지하는 전략적 요충지와 1426년에 브라차노에 세워진 유명한 성 덕분에, 그들은 라치오에서 가장 강력한 오르시니 가문이었다. 또 다른 나폴레오네 (1480년 10월 3일 사망)의 아들인 카를로 백작(1485년 이후 사망)은 교황 기수였다. 몬테로톤도 출신 프란체스카 오르시니와의 결혼으로 15세기 후반 이탈리아 정치에서 가장 저명한 인물 중 한 명인 젠틸레 비르지니오 오르시니가 태어났다. 카를로가 죽은 후 그는 아내로부터 물려받은 영지와 살레르노 출신 또 다른 오르시니, 무엇보다 나폴리 왕 페르디난트 1세의 총애를 받아 그로부터 나폴리 대사령관에 임명되어 가문의 세력을 확장했다. 그는 사촌인 조반니 바티스타 추기경과 함께 인노첸시오 8세와 알렉산데르 6세 교황의 가장 강력한 반대자였다. 1492년 젠틸레 비르지니오는 안구일라라 백작령을 프란체스케토 치보에게서 매입했다.프랑스의 샤를 8세가 이탈리아로 내려왔을 때 그는 브라차노를 지킬 수 있었다. 나폴리의 페르디난도 2세는 그의 봉토를 몰수하고 그를 오보 성에 투옥했는데, 그는 1497년에 독살되었다. 이 가문은 16세기 초 보다 우호적인 메디치 교황 시대에 이 역경에서 회복되었다. 그의 아들 잔 조르다노는 교황 궁정 보좌관이었다. 그의 조카 비르지니오는 교황령과 프랑스를 위해 활약한 유명한 제독이었지만, 1539년 반역죄로 기소되어 그의 봉토가 몰수되었다.
파올로 조르다노는 1560년 브라차노의 초대 공작이 되었다. 지롤라모 오르시니와 프란체스카 스포르차의 아들인 그는 아버지 쪽으로는 펠리체 델라 로베레[6]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사생아)와 잔 조르다노 오르시니의 손자였고, 어머니 쪽으로는 보시오 스포르차 백작과 교황 바오로 3세의 사생아인 코스탄차 파르네세의 손자였다. 그는 뛰어난 콘도티에로였지만, 아내 이사벨라 데 메디치를 살해한 잔인한 인물이기도 했다. 이 살인과 다른 살인 사건으로 인해 그는 북부 이탈리아로 도망가야 했다. 그의 뒤를 이어 비르지니오가 계승했고, 그의 상속자 파올로 조르다노 2세는 피옴비노의 공주와 결혼하여 신성 로마 제국의 공작이 되었다. 그의 형제 알레산드로는 추기경이자 교황 사절이었고, 또 다른 형제인 페르디난도 (1660년 3월 4일 사망)는 산 제미니의 다른 가문의 자산을 획득했다. 17세기에 브라차노 공작들은 거주지를 로마로 옮겼다. 이것은 일반적인 경제적 쇠퇴와 함께 공작령에 피해를 입혔고, 마지막 공작인 플라비오 (1620년 3월 4일 ~ 1698년 4월 5일)는 엄청난 부채로 인해 리비오 오데스칼키에게 공작령을 매각해야 했다.
3. 4. 그라비나 분파
그라비나 가문은 풀리아의 동명의 도시 이름을 따서 지어졌으며, 오르시니 가문에서 현존하는 유일한 가문이다. 이 가문은 브라차노 백작 카를로의 아들인 프란체스코(1456년 사망)에서 시작되었다. 그의 영지 대부분은 라치오 북부에 있었지만, 1418년 세르지안니 카라치올로에 의해 앙주 군대에 대항하기 위해 불려나가 격파하면서 나폴리 방계로 들어갔다. 그는 결혼을 통해 그라비나 백작 칭호를 얻었고, 알폰소 왕에 의해 그라비나 공작으로 임명되었다. 이 칭호는 그의 아들 자코모(1472년 사망)에게 확정적으로 부여되었고, 콘베르사노, 캄파냐, 코페르티노의 백작령이 추가되었다. 프란체스코의 두 아들, 마리노(1471년 사망)와 조반니 바티스타(1476년 6월 8일 사망)는 각각 타란토 대주교와 로도스 기사단의 그랜드 마스터였다.
네 번째 공작 프란체스코는 형제 줄리오 및 파올로와 함께 체사레 보르자에 대항하는 음모에 가담했지만 발각되었고, 프란체스코는 형제 파올로와 함께 1503년 1월 18일에 목 졸려 죽었다. 프란체스코의 조카 중 한 명인 플라비오 오르시니는 1565년에 추기경으로 임명되었다. 다섯 번째 공작 페르디난도(1549년 12월 6일 사망)는 스페인인에 의해 모든 영지를 몰수당했지만, 40000USD를 지불한 후 되찾았다.
미켈레 안토니오 공작(1627년 1월 26일)이 상속자 없이 사망한 후, 그의 영지는 그의 사촌 피에트로 오르시니, 무로 루카노 백작(1641년 사망)에게 넘어갔다. 피에트로의 조카 피에르 프란체스코는 도미니코회가 되기 위해 형제 도메니코에게 상속을 포기했으며, 나중에 베네딕토 13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베네딕토 13세의 조카인 베로알도 오르시니 공은 카를 6세에 의해 이미 1724년에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로 임명되었으며, 교황청의 보좌관 공 지위에 올랐다(1958년까지 유지). 가문의 마지막 추기경은 도메니코였다.
이 가문의 분파는 18세기에 로마로 이주했으며, 도메니코 공작(1790년 11월 23일 – 1874년 4월 28일)은 1823년에 마리아 루이사 토를로니아와 결혼했다. 1850년 그는 교황군 전쟁부 장관이자 중장이었으며, 로마 상원 의원이었다.
남아있는 군주 가문은 그라비나 공작인 도메니코 나폴레오네 오르시니 공(1948년 출생)이 대표하고 있다. 아들이나 남성 직계 후손이 없으므로, 그라비나 공작위의 상속자는 그의 미혼 형제 돈 베네데토 오르시니(1956년 출생)이며, 그 다음은 그의 사촌인 렐리오 오르시니 다르아고나 공(1981년 출생)이다. 렐리오 오르시니 다르아고나 공의 어머니는 무흐라니의 케테반 바그라티온 공주이다.
3. 5. 남부 분파 (두 번째)
카탄차로 백작의 딸 클라리스 루포와 결혼하여 칼라브리아의 강력한 가문과 동맹을 맺은 젠틸레 2세(1250–1318)의 손자 로베르토(1295–1345)는 나폴리 왕국의 대 원수의 딸인 시빌라 델 발초와 결혼했다.[1] 그의 아들 중 자코모(1379년 8월 13일 사망; 솔즈베리 대성당 주임 사제, 레스터 부제, 더럼 부제)는 1371년 그레고리오 11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임명되었고, 니콜라(1331년 8월 27일 ~ 1399년 2월 14일)는 아리아노와 첼라노 백작령을 얻었다.[1] 니콜라는 로마 원로원 의원이었으며 라치오와 토스카나에서 가문의 영토를 확장했다.[1]
니콜라의 둘째 아들인 라몬델로 오르시니 델 발초는 카를로 3세가 나폴리에서 여왕 조안 1세에 대항하여 일으킨 쿠데타를 지지했다.[1] 라디슬라오 왕 아래에서 그는 왕실의 전쟁 이후에도 영토적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나폴리 봉건 영주 중 한 명이었다.[1] 그러나 1406년 라몬델로가 사망하면서 남부 오르시니 가문의 영지는 몰수되었다.[1] 조안 2세 통치 기간 동안 왕실과의 관계는 냉랭하게 유지되었지만, 라몬델로의 아들 잔안토니오(1386–1453)가 군대를 보내 부르봉의 제임스의 찬탈 시도에 맞서 조안 2세를 돕자, 그 대가로 타란토 공국을 받았다.[1]
조안 2세의 연인이자 대원수인 세르지안니 카라치올로 아래에서 궁정과의 유대는 더욱 증가했다.[1] 잔안토니오의 남동생은 세르지안니의 딸 중 한 명과 결혼했다.[1] 그러나 오르시니 가문은 아라곤의 알폰소 5세가 나폴리 왕국 정복을 시작했을 때 편을 바꾸었다.[1] 잔안토니오는 바리 공작 작위, 대 총사령관의 지위, 그리고 100000두카토의 분봉을 받았다.[1] 잔안토니오는 알폰소의 후계자 페르디난드 1세에게 충실했지만, 귀족들의 반란 중에 살해되었다.[1] 적법한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소유물 대부분은 왕실 금고에 흡수되었다.[1]
4. 주요 인물
이름 | 비고 |
---|---|
교황 첼레스티노 3세 | 1144년 추기경 서임 |
교황 니콜라 3세 | 1244년 추기경 서임 |
교황 베네딕토 13세 | 1672년 추기경 서임 |
피에트로 오르시니 | 1181년 |
마테오 루베오 오르시니 | 1262년 |
라티노 말라브란카 오르시니 O.P. | 1278년 |
조르다노 오르시니 | 1278년 |
나폴레오네 오르시니 | 1288년 |
프란체스코 나폴레오네 오르시니 | 1295년 |
마테오 오르시니 O.P. | 1327년 |
리날도 오르시니 | 1350년 |
자코모 오르시니 | 1371년 |
폰첼로 오르시니 | 1378년 |
토마소 오르시니 | 1382/1385년 |
조르다노 오르시니 | 1405년 |
라티노 디 카를로 오르시니 | 1448년 |
코스마 오르시니 O.S.B. | 1480년 |
지암바티스타 오르시니 | 1483년 |
프란치오토 오르시니 | 1517년 |
플라비오 오르시니 | 1565년 |
알레산드로 오르시니 | 1615년 |
비르지니오 오르시니 | 1641년 |
도메니코 오르시니 다라곤 | 1743년 |
클라리체 오르시니 | 로렌초 일 마니피코의 배우자 (1453년 - 1488년) |
파비오 오르시니 | 콘도티에로 (1476년 - 1504년) |
제로라마 오르시니 | 귀족 (1503년 - 1570년) |
조반니 2세 오르시니 | 케팔로니아 백작이자 자킨토스, 에피로스의 데스포테스 (1323년 ~ 1335년) |
조반니 안토니오 델 발초 오르시니 | 나폴리 왕국의 귀족, 타란토 공작, 레체 백작이자 바리 공작 (1386년 또는 1393년 - 1463년) |
조반니 바티스타 오르시니 | 몰타 기사단의 단장 (1467년 - 1476년) |
피에트로 지안파올로 오르시니 | 콘도티에로 (1443년 사망) |
라티노 디 카밀로 오르시니 | 콘도티에로 |
몬딜리오 오르시니 | 카푸아 대주교 (1728년 - 1743년), 교황 베네딕토 13세의 증손자 (1690년 - 1751년) |
나폴레오네 오르시니 | 콘도티에로 (1420년 - 1480년) |
니체포로 2세 오르시니 | 콘도티에로이자 에피로스의 데스포테스 (1329년 - 1359년) |
파올로 조르다노 1세 오르시니 | 브라차노 공작 (1560년 - 1585년) |
피에르프란체스코 2세 비치노 오르시니 | 보마르초 공작 (1523년 - 1585년) |
라이몬도 델 발초 오르시니 | 나폴리 왕국의 귀족 (1361년 - 1406년) |
리날도 오르시니 | 피렌체 대주교 (1474년 - 1508년) |
리날도 오르시니 | 콘도티에로이자 피옴비노 영주 (1402년 - 1450년) |
비르지니오 오르시니 | 브라차노 공작 (1572년 - 1615년) |
5. 오르시니 가문 관련 건축물
브라차노 성 외에도 오르시니 가문과 관련된 주목할 만한 건물과 구조물은 다음과 같다.
6. 문학 작품 속 오르시니 가문
보카치오의 저서 《데카메론》 5일째 3번째 이야기에 오르시니 가문이 짧게 언급된다. 소설 속 등장인물 피에트로는 로마에서 약 12.87km 떨어진 숲에서 길을 잃는데, 적대 가문의 군인들이 그를 공격한다. 보카치오는 이 군인들이 오르시니 가문을 얕잡아 보는 것으로 묘사한다. 캄포 데 피오리라는 성도 본문에 등장한다. R. 메를의 《우상》은 비토리아 아코람보니의 삶을 다루고 있는데, 파올로와 로도비코 오르시니를 주인공으로 한다.
참조
[1]
서적
Papal Genealogy
London
2004
[2]
서적
Der Kardinal Johann Gaëtan Orsini (Papst Nikolaus III.)
Berlin
1905
[3]
웹사이트
ORSINI
https://www.treccani[...]
Enciclopedia Italiana
2021-04-01
[4]
서적
Papal Genealogy
London
2004
[5]
서적
Monografia storica della Contea di Pitigliano
Firenze
1906
[6]
서적
The Pope's Daughter: The Extraordinary Life of Felice della Rovere
Oxford University Press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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