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르스 당케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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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카르스 당케르스는 라트비아의 군인으로, 제1차 세계 대전과 라트비아 독립 전쟁에 참전했다. 러시아 제국군에서 복무하며 중령으로 진급했고, 제1차 세계 대전 중 포로로 잡히기도 했다. 라트비아 독립 전쟁에서는 라트비아군에 합류하여 여러 부대를 지휘했으며, 대령과 장군으로 진급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독일 점령 하 라트비아 자치 정부에서 활동했으며, 종전 후 미국으로 이주하여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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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르스 당케르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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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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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883년 3월 26일 |
출생지 | Irlava parish, 러시아 제국 |
사망일 | 1965년 4월 11일 |
사망지 | Grand Rapids, 미국 |
군 복무 정보 | |
소속 | 1902년—1916년 (러시아) 1919년—1940년 (라트비아) |
복무 기간 | 1902년—1916년 (러시아), 1919년—1940년 (라트비아) |
최종 계급 | 중령 (러시아) 장군 (라트비아) |
참전 전투 | 제1차 세계 대전 라트비아 독립 전쟁 |
훈장 | Lāčplēsis 훈장 (2급 및 3급) |
기타 정보 | |
이후 활동 | 정치인 |
2. 초기 생애 및 군 경력
오스카르스 당케르스는 러시아 제국 쿠를란트 현 이르라바 교구에서 태어나 옐가바에서 교육을 받았다. 1902년 학교 졸업 후 군에 입대하여 빌뉴스 군사 학교를 졸업하고 헬싱키 근처에서 복무했다.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중령까지 진급했으나, 신경 쇠약과 부상으로 1916년 포로가 되었다가 1918년 석방되었다.[2]
1919년 5월, 탈린에서 라트비아군에 입대하여 요르기스 제미탄스 사령부에서 특별 임무 장교로 복무하며 라트비아 군대 형성에 기여했다. 6월에는 제3 옐가바 보병 연대(이후 제7 시굴다 보병 연대) 지휘관이 되었고, 리예파야에서 최고 라트비아 부대 지휘관으로 임명되어 베르몬트 군으로부터 도시를 방어했다.[2] 11월에 대령으로 진급했으며, 1919년 말부터 제4 젬갈레 보병 사단 지휘관을 맡아 라트갈레 전선에서 여러 전투를 지휘했다. 1926년 6월에는 장군으로 진급했다. 라트비아 독립 전쟁 이후에도 군사 교육을 받았으며, 1933년까지 젬갈레 사단을 지휘하다가 제1 쿠르제메 보병 사단을 지휘했다.
1940년 1월, 쿠르제메 사단 지휘관직에서 물러났고, 6월 소련 점령 직후 독일로 이주했다.[3]
2. 1. 러시아 제국군 복무
러시아 제국 쿠를란트 현 이르라바 교구에서 태어났다. 옐가바의 알렉산더 학교와 레알슐레에서 교육받고 1902년에 졸업했다. 옐가바 주둔 러시아 제국군 제180 보병 연대에 입대했고, 1906년 빌뉴스 군사 학교 졸업 후 헬싱키 근처의 제197 보병 연대에서 복무했다. 1913년 참모 대위 계급을 받았다.제1차 세계 대전에 제197 보병 연대 소속으로 참전하여 중대와 대대를 지휘했다. 1916년 2월 4일 중령으로 진급했으나, 복무 중 신경 쇠약과 부상을 겪었다. 여러 차례 훈장을 받았으며, 1916년 7월 포로가 되었다가 1918년에 석방되어 1919년 5월까지 헬싱키에 머물렀다.[2]
2. 2.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당케르스는 제197 보병 연대와 함께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그는 처음에는 중대를 지휘했고, 나중에는 대대를 지휘했다. 1916년 2월 4일, 중령으로 진급했다.[2] 복무 중 신경 쇠약을 겪었으며 여러 번 부상을 입었다. 여러 차례 훈장을 받았다. 1916년 7월에 적에게 포로로 잡혔고 1918년에 석방되었다.[2]3. 라트비아 독립 전쟁 참전
오스카르스 당케르스는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인 1918년 독일군 포로 수용소에서 풀려나 헬싱키로 돌아와 1919년 5월까지 머물렀다. 이후 라트비아군에 합류하여 라트비아 독립 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3. 1. 라트비아군 합류 및 초기 활동
오스카르스 당케르스는 1919년 5월 31일 에스토니아 탈린에서 라트비아군에 입대했다.[2] 그는 요르기스 제미탄스 사령부에서 특별 임무 장교로 복무하며 신생 라트비아 군대 형성에 기여했다. 6월에는 제3 옐가바 보병 연대(이후 제7 시굴다 보병 연대로 개칭)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당케르스와 그의 부대는 발트해를 거쳐 라트비아 리예파야로 이동했고, 8월에는 리예파야 주둔 라트비아 최고 부대 지휘관이 되었다.[2]1919년 11월, 당케르스는 베르몬트 군으로부터 리예파야를 방어하는 전투를 지휘했다. 같은 달 말, 그는 대령으로 진급했다. 1919년 말에는 제4 젬갈레 보병 사단 지휘관으로 임명되어 라트갈레 전선에서 여러 전투에 참전했다. 1926년 6월 22일, 당케르스는 장군으로 진급했다.[2] 라트비아 독립 전쟁 이후에도 그는 군사 교육을 계속 받았다. 1933년까지 젬갈레 사단 지휘관을 역임한 후, 제1 쿠르제메 보병 사단을 지휘했다.
3. 2. 리예파야 방어 및 젬갈레 사단 지휘
1919년 5월 31일, 에스토니아 탈린에서 라트비아군에 입대한 당케르스는 요르기스 제미탄스 사령부의 특별 임무 장교로 시작하여 새로운 라트비아 군대 형성에 참여했다.[2] 그는 6월에 제3 옐가바 보병 연대(곧 제7 시굴다 보병 연대로 개칭) 지휘관이 되었다. 그와 그의 부대는 발트해를 통해 라트비아 리예파야로 수송되었고, 8월에는 리예파야에서 최고 라트비아 부대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2] 1919년 11월의 전투에서 그는 베르몬트 군으로부터 리예파야를 방어했으며, 같은 달 말 대령으로 진급했다. 1919년 말 당케르스는 제4 젬갈레 보병 사단의 지휘관이 되었다. 그는 젬갈레 사단 지휘관으로 복무하면서 라트갈레 전선에서 여러 전투에 참여했으며, 1926년 6월 22일 장군으로 진급했다. 라트비아 독립 전쟁 이후, 그는 군사 교육을 계속 받았다. 그는 1933년까지 젬갈레 사단의 지휘관이었다.[2]4. 양차 세계 대전 사이의 활동
1919년 5월 31일, 에스토니아 탈린에서 라트비아군에 입대하여 요르기스 제미탄스 사령부의 특별 임무 장교로 새로운 라트비아 군대 형성에 참여했다. 1919년 6월, 제3 옐가바 보병 연대(후에 제7 시굴다 보병 연대로 개칭) 지휘관이 되었고, 발트해를 통해 라트비아 리예파야로 이동하여 8월에는 리예파야 최고 라트비아 부대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2] 1919년 11월, 베르몬트 군으로부터 리예파야를 방어하고 그 달 말 대령으로 진급했다. 1919년 말, 제4 젬갈레 보병 사단 지휘관이 되어 라트갈레 전선에서 여러 전투에 참여했다. 1926년 6월 22일, 장군으로 진급했으며, 라트비아 독립 전쟁 이후에도 군사 교육을 받았다. 1933년까지 젬갈레 사단 지휘관을 역임한 후 제1 쿠르제메 보병 사단을 지휘했고, 1940년 1월에 쿠르제메 사단 지휘관직에서 물러났다.
4. 1. 군사 교육 및 지휘관 경력
러시아 제국 쿠를란트 현 이르라바 교구에서 태어난 당케르스는 옐가바의 알렉산더 학교와 레알슐레를 졸업하고 1902년 러시아 제국군에 입대했다. 1906년 빌뉴스 군사 학교를 졸업한 후 헬싱키 근처의 제197 보병 연대에서 복무했으며, 1913년 참모 대위 계급을 받았다.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당케르스는 중대와 대대를 지휘했으며, 1916년 2월 4일 중령으로 진급했다. 복무 중 신경 쇠약과 여러 차례 부상을 입었지만, 여러 훈장을 받았다. 1916년 7월 적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1918년에 석방되어 1919년 5월까지 헬싱키에 머물렀다.
1919년 5월 31일, 에스토니아 탈린에서 라트비아군에 입대한 당케르스는 요르기스 제미탄스 사령부의 특별 임무 장교로 새로운 라트비아 군대 형성에 참여했다. 6월에는 제3 옐가바 보병 연대(곧 제7 시굴다 보병 연대로 개칭) 지휘관이 되었고, 발트해를 통해 라트비아 리예파야로 이동하여 8월에는 리예파야 최고 라트비아 부대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1919년 11월 전투에서 베르몬트 군으로부터 리예파야를 방어하고 그 달 말 대령으로 진급했다. 1919년 말에는 제4 젬갈레 보병 사단 지휘관이 되어 라트갈레 전선에서 여러 전투에 참여했다. 1926년 6월 22일 장군으로 진급했으며, 라트비아 독립 전쟁 이후에도 군사 교육을 받았다. 1933년까지 젬갈레 사단 지휘관을 역임한 후 제1 쿠르제메 보병 사단을 지휘했다.
4. 2. 소련 점령과 독일 이주
1940년 1월, 당케르스는 쿠르제메 사단 지휘관직에서 물러났고, 같은 해 6월 (소련 점령 이틀 후) 가족과 함께 독일로 갔다. 1941년 독일이 소련과의 전쟁을 시작하자 그는 Reichskommissariat Ostland의 라트비아로 돌아와 독일이 만든 Латвийское самоуправление|라트비아 자치 정부ru에서 여러 고위직을 맡았다.[3]1944년 9월, 그는 가족과 함께 라트비아를 떠나 독일로 갔고, 1945년 미국 군대에 의해 억류되었다.[2] 그는 독일 점령 기관에서의 직위 때문에 의심을 받았지만, 전쟁 범죄에 대한 증거는 없었다.[2][4]
5. 제2차 세계 대전과 이후
1940년 1월, 당케르스는 쿠르제메 사단 지휘관직에서 물러났다. 같은 해 6월, 소련의 라트비아 점령 이틀 후 가족과 함께 독일로 이주했다.
5. 1. 독일 점령 하 라트비아 자치 정부 참여
소련 점령 이틀 후인 1940년 6월, 당케르스는 가족과 함께 독일로 갔다. 1941년 독일이 소련과의 전쟁을 시작하자 그는 Reichskommissariat Ostland의 라트비아로 돌아와 독일이 만든 Латвийское самоуправление|라트비아 자치 정부ru에서 여러 고위직을 맡았다.[3]5. 2. 종전 후 행적
1944년 9월, 당케르스는 가족과 함께 라트비아를 떠나 독일로 갔고, 1945년 미국 군대에 의해 억류되었다.[2] 그는 독일 점령 기관에서의 직위 때문에 의심을 받았지만, 전쟁 범죄에 대한 증거는 없었다.[2][4] 1947년 석방 후, 그는 독일의 UNRRA 피난민 수용소에서 살았다. 1950년대에 당케르스는 시력을 잃었다. 1957년, 그는 미국으로 이주하여 자신의 삶에 대한 두 권의 책을 출판했다. 그는 1965년 4월 11일 미시간주 그랜드래피즈에서 사망했다.참조
[1]
서적
Latvijas Valsts apbalvojumi un Lāčplēši.
Junda
[2]
웹사이트
Biography in Order of Lāčplēsis home page
http://www.lkok.com/[...]
[3]
웹사이트
Biography of Dankers
http://dinaburgascie[...]
2011-07-20
[4]
간행물
OFFICE OF CHIEF COUNSEL FOR WAR CRIMES APO 696 A, memo dated July 26, 1948, from Arthur I. Peterson, War Crimes Attorney, reproduced in Dankers, O. ''Lai Vēsture Spriež''. Apgāds Latvis, 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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