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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두아르츠 칼닌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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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두아르츠 칼닌슈는 라트비아의 군인으로, 러일 전쟁과 라트비아 독립 전쟁에 참전했다. 그는 1919년 라트비아 육군에 입대하여 포병 사령관, 육군 포병 부서 사령관 등을 역임했으며, 라트비아-소비에트 평화 조약의 서명자이기도 하다. 1925년 장군으로 진급했고, 1926년부터 1928년까지 라트비아 국방부 장관을 지냈다. 1935년 퇴역 후, 1944년 소련의 라트비아 점령 전에 스웨덴으로 이주했으며, 1954년 할리우드로 이주하여 1965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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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두아르츠 칼닌슈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에두아르츠 칼닌슈
에두아르츠 칼닌슈
출생일1876년 12월 31일
출생지플라테레 교구, 리가 현, 리보니아 현, 러시아 제국
사망일1964년 6월 28일
사망지할리우드, 미국
군사 정보
소속러시아 제국
라트비아
군 종류육군 (포병)
복무 기간1894년—1918년
1919년—1935년
최종 계급장군 (1925년)
참전 전투/전쟁러일 전쟁
라트비아 독립 전쟁
주요 훈장라치플레시스 군사 훈장 (2급 및 3급)
자유 십자 훈장 (I/2)
기타 정보
이후 활동정치인

2. 생애

에두아르츠 칼닌슈는 러시아 제국 리보니아 현 플라테레 교구(현재 오거 시립 자치구)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2] 플라테레 초등학교와 리가 시의 예카테리나 학교를 졸업했다.[2]

1894년 상트페테르부르크 포병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1900년에 졸업하고, 카우나스 포병 기지로 파견되었다.[2] 미하일 포병 아카데미에서 포드포루치크 계급 시험을 통과한 후 노보게오르기예프스크 요새에서 복무했다.[2] 1904년 관동으로 파견되어 러일 전쟁에 참여, 뤼순 해군 기지에서 복무하던 중 신경 쇠약, 부상, 포로 생활을 경험했다.[2] 1906년 포로 생활에서 돌아와 스베아보르크 요새(헬싱키 근처)에서 1918년까지 복무했다.[2]

1919년 1월 17일 라트비아 육군에 자원 입대하여, 2월에는 북 라트비아 여단의 포병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2] 체시스와 유글라 근처에서 ''발트 방위군'' 부대와의 전투에 참여했다.[2] 1919년 7월 15일, 육군 포병 부서의 사령관과 총사령관 본부 부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대령으로 진급했다.[2] 1919년 7월 18일부터 10월 18일까지 주 육군 포병 부서의 사령관으로 전출되었다.[2]

라트비아-소비에트 평화 조약의 서명자였으며, 1925년 장군으로 진급했다.[2] 1926년부터 1928년까지 라트비아 국방부 장관을 역임했고, 1928년부터 1935년까지 포병 감찰관으로 복무하다 1935년 퇴역했다.[2]

1944년 소련의 라트비아 점령 이전에 스웨덴으로 이주했다.[2] 1954년 할리우드로 이주하여 1965년 6월 28일에 사망했다.[2]

2. 1. 초기 생애 및 군 경력

에두아르츠 칼닌슈는 러시아 제국 리보니아 현 플라테레 교구(현재 오거 시립 자치구)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2] 플라테레 초등학교와 리가 시의 예카테리나 학교를 졸업했다.[2]

1894년 상트페테르부르크 포병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1900년에 졸업하고, 카우나스 포병 기지로 파견되었다.[2] 미하일 포병 아카데미에서 포드포루치크 계급 시험을 통과한 후 노보게오르기예프스크 요새에서 복무했다.[2] 1904년 관동으로 파견되어 러일 전쟁에 참여, 뤼순 해군 기지에서 복무하던 중 신경 쇠약, 부상, 포로 생활을 경험했다.[2] 1906년 포로 생활에서 돌아와 스베아보르크 요새(헬싱키 근처)에서 1918년까지 복무했다.[2]

1919년 1월 17일 라트비아 육군에 자원 입대하여, 2월에는 북 라트비아 여단의 포병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2] 체시스와 유글라 근처에서 ''발트 방위군'' 부대와의 전투에 참여했다.[2] 1919년 7월 15일, 육군 포병 부서의 사령관과 총사령관 본부 부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대령으로 진급했다.[2] 1919년 7월 18일부터 10월 18일까지 주 육군 포병 부서의 사령관으로 전출되었다.[2]

라트비아-소비에트 평화 조약의 서명자였으며, 1925년 장군으로 진급했다.[2] 1926년부터 1928년까지 라트비아 국방부 장관을 역임했고, 1928년부터 1935년까지 포병 감찰관으로 복무하다 1935년 퇴역했다.[2]

1944년 소련의 라트비아 점령 이전에 스웨덴으로 이주했다.[2] 1954년 할리우드로 이주하여 1965년 6월 28일에 사망했다.[2]

2. 2. 러일 전쟁 참전

1894년 칼닌슈는 상트페테르부르크 포병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1900년에 졸업했다. 졸업 후 카우나스 포병 기지로 파견되었고, 미하일 포병 아카데미에서 포드포루치크 계급 시험을 통과했다. 이후 노보게오르기예프스크 요새에서 복무했다.[2] 1904년 관동으로 파견되어 러일 전쟁에 참여, 뤼순 해군 기지에서 복무했다.[2] 복무 중 칼닌슈는 신경 쇠약, 여러 번 부상을 입고 포로로 잡혔다.[2] 1906년 그는 포로 생활에서 돌아와 스베아보르크 요새(헬싱키 근처)로 파견되어 1918년까지 복무했다.[2]

2. 3. 라트비아 독립 전쟁 참전

에두아르츠 칼닌슈는 1919년 1월 17일 라트비아 육군에 자원 입대했다.[2] 2월에는 북 라트비아 여단의 포병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체시스와 유글라 근처에서 ''발트 방위군'' 부대와의 전투에 참여했다.[2] 1919년 7월 15일, 육군 포병 부서의 사령관과 총사령관 본부 부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2] 대령으로 진급했다.[2] 1919년 7월 18일부터 10월 18일까지는 주 육군 포병 부서의 사령관으로 전출되었다.[2]

2. 4. 라트비아-소비에트 평화 조약

칼닌슈는 라트비아-소비에트 평화 조약의 서명자였다.[2]

2. 5. 국방부 장관 및 군 퇴역

1894년 칼닌슈는 상트페테르부르크 포병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1900년에 졸업했다. 졸업 후 카우나스 포병 기지로 파견되었고, 미하일 포병 아카데미에서 포드포루치크 계급 시험을 통과한 후 노보게오르기예프스크 요새에서 복무했다.[2] 1904년 관동으로 파견되어 러일 전쟁에 참여, 뤼순 해군 기지에서 복무 중 신경 쇠약, 부상, 포로 생활을 겪었다.[2] 1906년 포로 생활에서 돌아와 스베아보르크 요새(헬싱키 근처)로 파견되어 1918년까지 복무했다.[2]

1919년 1월 17일, 자원하여 라트비아 육군에 입대, 2월에는 북 라트비아 여단의 포병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2] 체시스와 유글라 근처에서 ''발트 방위군'' 부대와의 전투에 참여했다.[2] 1919년 7월 15일, 육군 포병 부서의 사령관과 총사령관 본부 부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대령으로 진급했다.[2] 1919년 7월 18일부터 1919년 10월 18일까지 주 육군 포병 부서의 사령관으로 전출되었다.[2]

칼닌슈는 라트비아-소비에트 평화 조약의 서명자였다.[2] 1925년 장군으로 진급했고, 1926년부터 1928년까지 라트비아 국방부 장관을 역임했다.[2] 1928년부터 1935년까지 포병 감찰관으로 복무하다 1935년 군에서 퇴역했다.[2]

1944년, 소련이 라트비아를 점령하기 전 스웨덴으로 갔다.[2] 1954년 할리우드로 이주했으며, 1965년 6월 28일에 사망했다.[2]

2. 6. 망명과 죽음

1944년, 소련이 라트비아를 점령하기 전에 칼닌슈는 스웨덴으로 갔다.[2] 1954년 칼닌슈는 할리우드로 이주했으며, 1965년 6월 28일에 사망했다.[2]

참조

[1] 서적 Latvijas Valsts apbalvojumi un Lāčplēši. Junda
[2] 웹사이트 Biography in Order of Lāčplēsis home page http://www.lk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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