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쿠다 게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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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쿠다 게이와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1927년 이시카와현에서 태어나 와세다 대학교를 졸업했다. 1967년 이시카와현 의회 의원 선거에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했으며, 1969년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유민주당 공천으로 당선된 이후 여러 차례 당선되었다. 자유민주당에서 우정대신, 자치대신, 운수대신을 역임했으며, 다케시타 노보루 파벌, 하타·오자와 파 등을 거쳐 신생당, 신진당, 민주당 등에서 활동했다. 그는 '약자에게 빛을 비추는 정치'를 신념으로 삼았으며, 1998년 위암으로 사망했다. 사후 훈1등 욱일대수장과 정3위를 수여받았으며, 그의 아들 오쿠다 겐은 민주당 소속 중의원 의원으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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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쿠다 게이와 | |
---|---|
기본 정보 | |
![]() | |
출생일 | 1927년 11월 26일 |
출생지 | 이시카와현 이시카와군 미카와정 (현 하쿠산시) |
사망일 | 1998년 7월 16일 (향년 70세) |
사망지 | 도쿄도 지요다구 |
출신 학교 |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부 |
전직 | 홋코쿠신문사 기자 이시카와현 의회의원 |
소속 정당 | (자유민주당 (사토파 → 다나카파 → 다케시타파 → 하타파) →) (신생당 →) (신진당 →) (태양당 →) (민정당 →) 민주당 |
칭호와 훈장 | 정3위 훈1등 욱일대수장 |
세습 여부 | 무 |
친족 (정치가) | 장남 오쿠다 겐 |
정치 경력 | |
직책 | 제65대 운수대신 |
내각 | 미야자와 내각 |
취임일 | 1991년 11월 5일 |
퇴임일 | 1992년 12월 12일 |
직책2 | 제41대 자치대신 제50대 국가공안위원회 위원장 |
내각2 | 제2차 가이후 내각 |
취임일2 | 1990년 2월 28일 |
퇴임일2 | 1990년 12월 29일 |
직책3 | 제44대 우정대신 |
내각3 | 제2차 나카소네 내각 |
취임일3 | 1983년 12월 27일 |
퇴임일3 | 1984년 11월 1일 |
직책4 | 중의원 의원 |
선거구4 | (구 이시카와 1구 →) 이시카와 1구 |
당선 횟수4 | 10회 |
취임일4 | 1969년 |
퇴임일4 | 1998년 |
직책5 | 이시카와현 의회 의원 |
당선 횟수5 | 1회 |
취임일5 | 1967년 |
퇴임일5 | 1969년 |
기타 직책 | [[파일:Liberal Democratic Party (Japan) Emblem.svg|20px]] 제33대 자유민주당 국회대책위원장 |
총재 | 가이후 도시키 |
취임일6 | 1989년 |
퇴임일6 | 1990년 |
2. 생애 및 정치 경력
오쿠다 게이와는 1927년 11월 26일 이시카와현 이시카와군 미카와정(현 하쿠산시)에서 태어났다.[3] 가나자와 제1중학교와 제4고등학교를 거쳐[1], 1952년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하였다.[3] 대학 시절에는 레슬링부에 소속되어 활동했으며[1], 호쿠코쿠 신문사 도쿄 지사에서 정치부 기자로 수상 관저, 통상산업성, 운수성 등을 담당하며 사카타 에이이치의 지원을 받았다.[1]
1958년 호쿠코쿠 신문사를 퇴직하고 가업을 잇다가, 1967년 이시카와현 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하였다.[3] 1969년 제32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자유민주당 공천으로 이시카와현 1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3] 이후 사토 에이사쿠, 다나카 가쿠에이, 다케시타 노보루 파벌에서 활동하며, 제2차 나카소네 내각에서 우정대신을 시작으로 여러 내각에서 대신을 역임했다.
1993년 자유민주당을 탈당하고 신생당을 거쳐 신진당에 합류하였다. 1996년 오자와 이치로와 결별하고 하타 쓰토무와 함께 태양당을 결성, 이후 민정당을 거쳐 민주당에 합류했다.
1998년 7월 16일, 위암으로 한조몬 병원에서 70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3]
2. 1. 자유민주당 시절
1967년 이시카와현 의회 의원 선거에 당선되며 정계에 입문했다. 1969년 제32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유민주당 공천으로 이시카와현 1구에 출마하여 당선된 후, 사토 에이사쿠, 다나카 가쿠에이, 다케시타 노보루 파벌에서 활동했다.제2차 나카소네 내각에서 우정대신으로 처음 입각하였고, 이후 제2차 가이후 내각에서 자치대신 겸 국가공안위원회 위원장, 미야자와 내각에서 운수대신을 역임하였다.
다케시타 파벌(경세회)이 분열되었을 때 오자와 이치로 등과 함께 개혁포럼21(하타·오자와파)을 결성, 1993년 자유민주당을 탈당하고 신생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나리타 국제공항 문제 심포지엄에 참석하여 공항 반대파(구 아쓰타파)와 대화에 나서기도 했다. 심포지엄에서 반대파의 주장에 "마음속으로 전율하는 듯한 감명을 받았습니다."라고 발언하여 반대파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4]。
그러나 국가공안위원장 재임 시절 과격파 대책을 추진했던 경험으로 인해, 운수대신 취임 직후 강제 수용 포기 방침에 대해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는 없겠지요", "국민의 99%가 납득한다면, 관료가 할 수 없는 결단을 정치인이 할 수도 있다"라고 발언하여 반대파와 중재 그룹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5][6]。
가나자와역 정비를 추진했다[10]。
연도 | 사건 |
---|---|
1967년 | 이시카와현 의회 의원 당선 |
1969년 | 제32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이시카와현 1구, 자유민주당 공천) 당선 |
1972년 | 제33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이시카와 1구, 자민당 공천) 2선 |
1975년 | 자치 정무 차관 (미키 다케오 내각) |
1976년 | 제3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이시카와 1구, 자민당 공천) 3선 |
1976년 | 외무 정무 차관 (후쿠다 다케오 내각) |
1979년 | 제3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이시카와 1구, 자민당 공천) 4선 |
1980년 | 제3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이시카와 1구, 자민당 공천) 5선 |
1980년 | 중의원 외무위원장 취임 |
1983년 | 제37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이시카와 1구, 자민당 공천) 6선 |
1983년 | 우정대신 (제2차 나카소네 내각) 취임 |
1986년 | 제38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이시카와 1구, 자민당 공천) 7선 |
1988년 | 중의원 예산위원장 취임 |
1990년 | 제39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이시카와 1구, 자민당 공천) 8선 |
1990년 | 자치대신 겸 국가공안위원장 (제2차 가이후 내각) 취임 |
1991년 | 운수대신 (미야자와 내각) 취임 |
1993년 | 자유민주당 탈당, 신생당 결성 |
2. 2. 신생당, 신진당, 그리고 민주당 시절
신생당에서는 중의원 의원운영위원장을 맡아 국회 운영을 담당했다. 이때 야당이 된 자유민주당뿐만 아니라, 일본 사회당 등 연립 여당을 상대로도 국회 운영을 하였다.[3] 자유민주당, 일본 사회당, 신당 사키가케가 연립한 무라야마 내각의 성립으로 신생당이 여당에서 물러난 후, 구 연립 여당이 합류한 신진당에 참여하였다.[3] 1996년 총선거 패배 후, 오자와 이치로와 결별하고 하타 쓰토무와 함께 태양당을 결성했으며, 그 후 야당 재편으로 민정당을 거쳐 민주당에 합류하여 최고 고문을 역임했다.[3] 1998년 참의원 선거에서 비자민·비공산 후보를 지원하여 당선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3] 같은 해 위암으로 7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3]3. 주요 정책 및 활동
오쿠다 게이와는 미야자와 기이치 내각에서 운수 대신과 국가공안위원장을 역임하며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다. 특히 나리타 국제공항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했으며, 아프리카 국가들과의 외교 관계 강화에도 힘썼다.
교통 및 통신 정책과 관련하여, 오쿠다는 나리타 국제공항 문제 심포지엄에 참석하여 공항 건설 반대파인 산리즈카 시바야마 연합 공항 반대 동맹(구 아쓰타파)과 대화에 나섰다.[4] 심포지엄에서 반대파의 발표를 듣고 "마음속으로 전율하는 듯한 감명을 받았습니다."라고 발언하여 반대파를 놀라게 했다.[4] 그러나 운수 대신 취임 직후 기자 회견에서는 강제 수용 가능성을 시사하는 발언을 하여 반대파와 중재 그룹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5][6] 또한 가나자와역 정비를 추진했다.[10]
외교 정책 측면에서는 일본과 아프리카 국가 간의 관계 강화에 힘썼으며, '일본-코트디부아르 친선 의원 연맹'과 '일본-에티오피아 친선 의원 연맹'의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7]
3. 1. 교통 및 통신 정책
미야자와 기이치 내각에서 운수 대신으로 임명된 후, 나리타 국제공항 문제 심포지엄에 참석하여 공항 건설 반대파인 산리즈카 시바야마 연합 공항 반대 동맹(구 아쓰타파)과 대화에 나섰다.[4] 심포지엄 첫날, 반대파가 발표한 "덕정으로 일신을 발하다"라는 제목의 문서를 한 시간 동안 듣고, 오쿠다는 "대신이라는 입장이 아니라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지금 발표를 듣고 마음속으로 전율하는 듯한 감명을 받았습니다. 심혈을 기울여 농지를 지키고, 흙과 함께 살아온 농민의 원점에 닿은 듯한 마음이 가득합니다."라고 즉흥적으로 발언하여 반대파를 놀라게 했다.[4]한편, 국가공안위원장으로서 과격파 대책을 담당했던 경험 때문에, 운수 대신 취임 직후 기자 회견에서 전임 무라오카 겐조가 제시한 강제 수용 포기 방침에 대한 질문에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는 없겠지요", "국민의 99%가 납득한다면, 관료가 할 수 없는 결단을 정치인이 할 수도 있다"라고 발언했다. 이 발언은 반대파뿐만 아니라 공항 건설에는 찬성하지만 반대파와 행정 사이의 중재 역할을 하던 그룹까지 분노하게 만들어, 심포지엄 개최 자체가 불투명해지기도 했다.[5][6]
가나자와역 정비를 추진했다.[10]
3. 2. 외교 정책
일본과 아프리카 국가 간의 관계 강화에 힘썼으며, '일본-코트디부아르 친선 의원 연맹'과 '일본-에티오피아 친선 의원 연맹'의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7]3. 3. 기타
미야자와 기이치 내각에서 운수 대신으로 있을 때 나리타 국제공항 문제 심포지엄에 참석하여 공항 건설 반대파인 산리즈카 시바야마 연합 공항 반대 동맹(구 아쓰타파)과 대화했다. 심포지엄 첫날, 반대파가 발표한 문서를 듣고 "마음속으로 전율하는 듯한 감명을 받았습니다."라고 즉흥적으로 발언하여 반대파를 놀라게 했다.[4]국가공안위원장으로서 과격파 대책을 했던 경험 때문에, 운수 대신 취임 직후 기자 회견에서 강제 수용에 대한 질문에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는 없겠지요"라고 발언하여 반대파와 중재 그룹의 반발을 샀다.[5][6]
가나자와역 정비를 추진했다.[10]
4. 정치적 유산 및 평가
"약자에게 빛을 비추는 정치"를 신념으로 삼아,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책을 추진하는 데 힘썼다.[8] 그는 자유민주당의 보수적인 정책 기조와 상반되는 경우에도 자신의 신념에 따라 소신 있는 정치를 펼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나리타 공항 문제와 같은 복잡한 사회적 갈등 해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대화와 타협을 중시하는 정치인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의 장남 오쿠다 겐은 이러한 정치적 유산을 이어받아 민주당 소속 중의원 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5. 역대 선거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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