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쿠다이라 이에마사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오쿠다이라 이에마사는 미노 가노 번주 오쿠다이라 노부마사의 장남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외손자이다. 그는 우쓰노미야 번의 초대 번주였으며,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우쓰노미야 10만 석을 받았다. 이에마사는 우쓰노미야 성하 정비에 힘썼으나, 오사카 겨울 전투 출병을 앞두고 3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사후, 장남 오쿠다이라 타다마사가 뒤를 이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오쿠다이라씨 - 나가시노 전투
1575년 오다 노부나가-도쿠가와 이에야스 연합군이 나가시노 성에서 다케다 가쓰요리 군을 상대로 효과적인 철포 운용과 방어 전략을 통해 승리하며 전국 시대의 흐름을 바꾼 전투가 나가시노 전투이며, 3단 사격 전술의 실재 여부 등 전투에 대한 다양한 논쟁과 분석이 현재까지도 이루어지고 있다. - 오쿠다이라씨 - 가노번
가노번은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오쿠다이라 노부마사에게 주어져 성립되었으며, 나가이 가문이 통치했고, 일본 우산 생산이 성행했다. - 우쓰노미야번주 - 혼다 마사즈미
혼다 마사즈미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의 무장, 다이묘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겼으나 도쿠가와 히데타다 시대에 실각하여 유배된 인물이다. - 우쓰노미야번주 - 혼다 다다히라
혼다 다다히라는 에도 시대의 다이묘로, 혼다 타다요시의 장남으로 태어나 우쓰노미야 번과 고리야마 번의 번주를 역임하며 연공 감면, 백성 구휼, 성하 마을 신설, 번찰 발행 등 번정 개혁을 시도했다. - 1577년 출생 - 베아트리체 첸치
베아트리체 첸치는 아버지의 학대를 견디다 가족과 함께 아버지를 살해하고 처형된 16세기 로마의 귀족 여성이다. - 1577년 출생 - 크리스토파노 알로리
크리스토파노 알로리는 베네치아 화풍의 색채와 피렌체 화풍의 드로잉 기법을 융합한 16세기 후기 피렌체 마니에리스모 화가로, 메디치 가문의 궁정 화가로 활동하며 자연에 대한 정확한 묘사와 섬세한 기법으로 유명해졌고, 대표작인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든 유딧"은 현대에도 재해석되며 여성의 강인함을 보여주는 예술가로 평가받는다.
오쿠다이라 이에마사 | |
---|---|
기본 정보 | |
씨명 | 오쿠다이라 씨 |
이름 | 오쿠다이라 이에마사 |
이명 | 이에쓰나, 규하치로 (통칭) |
![]() | |
시대 |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 에도 시대 초기 |
출생 | 덴쇼 5년 (1577년) |
사망 | 게이초 19년 10월 10일 (1614년11월 11일) |
계명 | 롯쓰인덴덴간도코다이젠조몬 |
묘소 | 도치기현우쓰노미야시의 고젠지 |
관위 | 종4위하・대선대부, 시종 |
막부 | 에도 막부 |
주군 | 도쿠가와 이에야스 → 히데타다 |
번 | 시모쓰케우쓰노미야 번 번주 |
씨족 | 오쿠다이라 씨 |
부모 | 아버지: 오쿠다이라 노부마사, 어머니: 가메히메 |
형제자매 | 이에마사, 마쓰다이라 이에하루, 다다마사, 마쓰다이라 다다아키, 오쿠보 다다쓰네실 |
배우자 | 정실: 혼다 다다카쓰의 차녀, 모리히메 |
자녀 | 빈히메, 다다마사 |
정치 경력 | |
우쓰노미야 번 번주 | 대수: 1 임기: 1601년 ~ 1614년 전임자: (오코치 히데쓰나) 후임자: 오쿠다이라 다다마사 |
2. 가계
미노 가노 번 번주 오쿠다이라 노부마사의 장남으로, 어머니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장녀 카메히메이다. 마츠다이라 이에하루, 오쿠다이라 타다마사, 마츠다이라 타다아키의 형이다. 정실은 혼다 타다카츠의 차녀 호메이인이다.
2. 1. 출신
미노 국 가노 번 번주 오쿠다이라 노부마사의 장남으로, 어머니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장녀 카메히메(가노 고젠)이다. 마츠다이라 이에하루, 오쿠다이라 타다마사, 마츠다이라 타다아키의 형이다. 정실은 혼다 타다카츠의 차녀 호메이인이며, 자식으로는 오쿠다이라 타다마사(장남),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양녀이자 호리오 타다하루의 정실인 빈히메 남매가 있다. 이들은 모두 정실 소생이다.2. 2.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오쿠다이라 노부마사 | 1555년 ~ 1615년 |
어머니 | 카메히메 | 1560년 ~ 1625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장녀, 카노고젠, 카노노카타, 죠토쿠인덴 코린지운다이시 |
정실 | 모리히메 | 호메이인, 혼다 타다카츠의 차녀 |
장남 | 오쿠다이라 타다마사 | 1608년 ~ 1668년 |
딸 | 빈히메 | 1607년 ~ 1652년, 운쇼인 쵸텐쇼큐다이시,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양녀, 호리오 타다하루의 정실 |
2. 3. 이에마사의 출생에 대한 이설
구로다 모토키는 이에마사가 노부마사의 서장자이며 어머니는 가메히메가 아닐 가능성을 다음과 같은 이유로 지적한다.[3]- 『간에이 제씨계도전』에는 동생 이에하루, 다다아키는 외조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양자가 되어 마쓰다이라 성을 칭했다고 되어 있지만, 동시대 사료에서 두 사람을 이에야스의 양자로 하는 사료가 보이지 않는다. 또 다른 동생인 다다마사 또한 『간에이 제씨계도전』에는 이에야스와의 양자 관계에 대해 기록되어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마쓰다이라 성을 칭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 이에야스의 친딸로 다른 가문과 혼인한 여성은 가메히메를 포함하여 3명이 있는데, 그녀들이 낳은 다른 외손을 보면, 도쿠히메가 낳은 이케다 데루마사의 아들 5명 및 후리히메가 낳은 가모 히데유키의 아들 2명은 마쓰다이라 성을 칭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반대로 이에야스의 외손으로 여겨지는 남자 중 이에마사만이 마쓰다이라 성을 받았다는 기록도 칭한 사실도 확인되지 않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 세키가하라 전투 후에 아버지 노부마사가 미노 가노 100000석을 받음과 동시에 이에마사에게도 시모쓰케 우쓰노미야 100000석이 주어졌다. 언뜻 보면 발탁으로도 보이지만, 뒤집어 보면 장래에는 아버지의 후계자로서 소령을 상속하지 않고 별가의 창설이 이루어진 것이 된다.
다만, 오쿠다이라 노부마사가 가메히메와의 혼인 후에 측실을 맞이했다고 생각하기도 어려우므로, 구로다도 이것이 옳다면, 노부마사와 가메히메의 혼인이 기록에 기록되어 있는 덴쇼 4년(1576년)보다 늦었는지, 다른 사정이 있었는지는 향후의 검토 과제로 하고 있다.[3]
3. 생애
1577년에 태어나 1614년에 사망한 오쿠다이라 이에마사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의 다이묘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외손자이자, 도쿠가와 가문의 중신인 오쿠다이라 노부마사의 장남이다.
1595년 도요토미 성을 하사받았다.[1]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따라 사나다 마사유키의 우에다성을 공격했다.
1601년 아버지 오쿠다이라 노부마사가 미노 가노 10만 석을 받자, 고즈케 미야자키령에 남았다. 1602년 시모쓰케 우쓰노미야 10만 석을 받아 우쓰노미야성에 입성했는데, 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텐카이 승정의 조언을 받아들인 결과였다.[2]
우쓰노미야 번주로서 새로운 가신단을 편성하고, 나가시노 전투에서 아버지를 도운 12 가문을 '대신중'으로 개칭하여 5, 6 가문이 매달 교대로 국정을 담당하게 하는 등 중신 제도를 개정했다.[2] 또한 우쓰노미야의 성하를 정비하고, 매달 5일과 10일에 시장을 열었으며(다이젠 시), 우쓰노미야 다이묘진 사전 조영 봉행을 맡았다.[2]
1611년 정실 혼다 씨가 사망했고,[2] 1614년 호리 도시시게의 신병을 맡았다.[2] 같은 해 오사카 겨울 전투 출병 명령을 받았으나 병 때문에 참전하지 못하고 에도성 혼마루 루스이역을 맡았다.[1] 그해 10월 10일 38세로 사망했다.[2]
사후 아들 충창이 가독을 이었으나,[1] 1619년 시모사 고가번으로 이봉되었다.[3] 이후 혼다 마사즈미가 우쓰노미야 번주가 되었지만, 1622년 우쓰노미야성 츠리텐조 사건으로 개역되면서 충창이 다시 우쓰노미야로 돌아왔다.
3. 1. 젊은 시절
원복 때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편휘를 받아 이에마사(家昌)라고 이름을 지었다. 이에야스는 가장 나이가 많은 손자(숙부인 히데타다보다 연상)였기 때문에 칼이나 매를 받는 등 중용하였다. 분로쿠 4년(1595년) 도요토미 성을 하사받았다.[1]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키소지를 진군하는 히데타다를 따라 사나다 마사유키의 시나노 우에다성을 공격했다.
3. 2. 우쓰노미야 번주
慶長일본어 6년(1601년 2월 6일) 세키가하라 전투의 승리 후 아버지 오쿠다이라 노부마사가 미노 가노 10만 석을 받았다. 때문에, 그 전까지의 고즈케 미야자키령에 이에마사를 남겨두고 부모는 동생 오쿠다이라 타다마사를 데리고 배지(配地)로 부임했다. 같은 해 12월 28일(1602년 2월 19일) 이에마사도 아버지보다 늦게 기타칸토의 요지인 시모츠케 우쓰노미야 10만 석을 받자, 다음 달 1월 25일(1602년 3월 18일) 입국을 달성했다. 이는 이에야스가 기타칸토의 요충지인 우쓰노미야 번에 누구를 배치해야 할지 텐카이 승정에게 자문했을 때, 텐카이는 누구를 논할 필요 없이 오쿠다이라 다이젠에게 줘야 한다고 대답했고, 이에야스도 뜻을 얻었다며 이에마사에게 10만 석을 준 것이다[2]. 우쓰노미야로의 가증 전봉에 따라, 문무 일예에 뛰어난 낭인을 많이 등용하여 새로운 가신단을 편성[2]했지만, 미카와 시대부터의 가신단 제도가 기능하지 않는다는 것을 통감한 이에마사는, 중신 제도 개정에 착수했다.오쿠다이라 가문에서는 나가시노 전투에서 아버지를 도운 중신 12 가문을 '7족 5로'라고 불렀다. 원래는 후계자가 되지 못하고 지족으로서 종가를 지지하며 군무를 담당했던 7가문에, 중신으로 발탁하여 정무를 담당하게 한 소령주(小領主) 5가문을 더한 12가문의 총칭이다. 나가시노 전투의 승리 후에는, 배신이면서도 이에야스로부터 직접 노고를 치하받은 데다, 그들의 자손 대대로 후한 대우를 약속받은 어묵서(御墨付き)를 받은 중신들이었다. 전란에 시달리던 시대라면 아직 그렇다 쳐도, 평온한 치세로 바뀌어 가면서 7족 5로는 군무의 부담이 줄어드는 반면 정무의 부담이 격증했다. 그래서 족신 7가문과 노신 5가문을 합쳐 '대신중'이라고 호칭 변경한 다음, 그 12가문 중에서 5, 6가문이 매달 교대로 국정을 담당하고, 유사시에는 12가문이 협력하여 대응하도록 개정했다. 그 12가문은 평등하지 않았고, 지도적 입장에 있는 2가문이 2000석 이상을 먹고, 서열에 따라 봉록이 정해졌다(말석이라도 1000석이었다). 또한, 전시의 선봉을 담당하는 야마자키 가문과 쇼다 가문에게만 오테몬 안에 저택을 짓게 했다[2].
이에마사는 이후 우쓰노미야의 성하정비에 진력하여 매달 5일과 10일에 시장을 개최하고(다이젠 시), 막부가 우쓰노미야 다이묘진의 사전 조영을 시작하자 이나 타다쓰구와 함께 봉행을 맡았다[2]. 1611년(게이초 16년) 10월 13일) 정실 혼다 씨(모리히메라고 불렀던 듯)가 사망했다. 1614년(게이초 19년)에는 호리 도시시게의 신병을 맡았다[2].
3. 3. 최후
이에마사는 고쓰즈미를 즐겼다고 한다. 1614년 11월 7일(음력 10월 6일) 오사카 겨울 전투 출병 명령을 받았으나, 병 때문에 참전하지 못했다.[1] 그 대신 토리이 타다마사 등과 에도성 혼마루 루스이역을 맡았다. 그러나 1614년 10월 10일 우쓰노미야에서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향년 38세였다.[2]1614년 11월 18일, 7세의 아들 충창(千福)이 가독을 이었지만,[1] 1619년 시모사 고가번으로 이봉되었다.[3] 혼다 마사즈미가 우쓰노미야 번주가 되었으나, 1622년 우쓰노미야성 츠리텐조 사건으로 개역되면서 충창이 다시 우쓰노미야로 돌아왔다.
참조
[1]
서적
日本近世武家政権論
近代文芸社
2000
[2]
문서
[3]
서적
家康の正妻 築山殿 悲劇の生涯をたどる
平凡社新書
2022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