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쿠다이라 다다마사 (16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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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쿠다이라 다다마사(1608년)는 우쓰노미야번주 오쿠다이라 이에마사의 장남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증손이다. 7세의 나이로 우쓰노미야번의 번주가 되었으며, 이후 고가로 전봉되었다가 다시 우쓰노미야로 돌아왔다. 1668년 에도 시오도메의 번저에서 61세로 사망했으며, 장남 오쿠다이라 마사요시가 가독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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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쓰노미야번주 - 혼다 마사즈미
혼다 마사즈미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의 무장, 다이묘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겼으나 도쿠가와 히데타다 시대에 실각하여 유배된 인물이다. - 우쓰노미야번주 - 혼다 다다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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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쓰번은 에도 시대 부젠국 나카쓰 지역을 다스린 번으로, 구로다 씨가 처음 다스렸으나 이후 호소카와 씨, 오가사와라 씨를 거쳐 오쿠다이라 씨가 155년간 통치하며 후쿠자와 유키치와 같은 인재를 배출하여 일본 근대화에 기여했다. - 나카쓰 오쿠다이라가 - 야마가타번
에도 시대 데와국 야마가타성에 위치했던 야마가타번은 모가미 씨의 몰락 후 여러 다이묘 가문이 교체되는 부침을 겪었으며, 보신 전쟁 후 폐번치현되어 야마가타현의 핵심이 되었다.
오쿠다이라 다다마사 (1608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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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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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에도 시대 전기 |
출생 | 게이초 13년 (1608년) |
사망 | 간분 8년 2월 19일 (1668년3월 31일) |
어릴 적 이름 | 센푸쿠마루 |
통칭 | 규하치로 |
계명 | 겐코인덴카이인도칸다이고지 |
묘소 | 도치기현우쓰노미야시 이마이즈미의 고젠지 |
관위 | 종4위 하, 미마사카 수 |
막부 | 에도 막부 |
번 | 시모쓰케우쓰노미야 번 번주 → 시모사고가 번 번주 |
씨족 | 오쿠다이라 씨 |
부모 | 아버지: 오쿠다이라 이에마사, 어머니: 호묘인 (혼다 다다카쓰의 차녀) |
형제자매 | 다다마사, 빈히메 |
배우자 | 정실: 게이가쿠인 (도리이 다다마사의 딸) |
자녀 | 마사요시, 딸 (나이토 노부요시 정실), 딸 (모가미 요시아키라 계실), 딸 (유라 요리시게 실), 아키 (고토 모리카쓰 정실), 기쓰인 (다치바나 다네아키라 계실) |
관직 계승 | |
우쓰노미야 번 번주 (오쿠다이라 가문, 재봉) | 전임: 오쿠다이라 이에마사 / 혼다 마사즈미, 후임: 혼다 마사즈미 / 오쿠다이라 마사요시 |
임기 | 1614년 ~ 1619년, 1622년 ~ 1668년 |
고가 번 번주 (오쿠다이라 가문) | 전임: 오가사와라 마사노부, 후임: 나가이 나오카쓰 |
임기 | 1619년 ~ 1622년 |
2. 생애
게이초 13년(1608년), 우쓰노미야번주 오쿠다이라 이에마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증손에 해당한다.
1614년 아버지 이에마사가 사망하고 가독을 상속하여 우쓰노미야 번주가 되었으며, 1616년 증조부 이에야스를 문병하고 1619년 쇼군 히데타다를 배알했다. 이후 영지가 변경되었다가 1622년 우쓰노미야성 낚시 천장 사건의 영향으로 우쓰노미야번으로 다시 봉해졌다. 1649년에는 쇼군의 닛코 사참 때 휴식처를 재건했다.[2]
1657년 메이레키 대화재의 여파로 히비야의 상옥저, 고비키초의 중옥저가 불에 타는 피해를 입기도 했다.
1668년 시오도메의 번저에서 61세로 사망했으며, 장남인 마사요시가 가독을 이었다.
2. 1. 유년기 및 가독 상속
게이초 13년(1608년), 우쓰노미야번주 오쿠다이라 이에마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증손에 해당한다.게이초 19년 10월 10일(1614년11월 11일), 아버지 이에마사가 병으로 급사했다. 같은 달 23일, 오사카 전투로 인해 사망한 부친이 명받았던 에도 성의 혼마루 루스이역은 어린 나이로는 수행할 수 없었기에 면제 명령이 내려졌다. 다음 달 11월 18일(12월 18일), 겨우 가독 상속이 인정되어 시모쓰케 우쓰노미야 번 10만 석의 번주에 불과 7세의 나이로 취임한다. 원복을 할 때, 작은 할아버지 도쿠가와 히데타다로부터 편휘를 받아 '''다다마사'''라고 이름을 지었다. 겐와 2년(1616년) 3월, 보좌역 쿠와나 카츠나리를 따라 슨푸까지 가서 병석에 누워 있던 증조부 이에야스를 문병하자 침소로 초대받아 백조 鞘의 창을 하사받았다.
겐와 5년 10월 13일(1619년11월 18일), 닛코 토쇼구 참배를 위해 쇼군 히데타다가 우츠노미야에 들렀을 때, 생애 세 번째 배알을 받았다.
2. 2. 전봉과 우쓰노미야 복귀
1614년 11월 11일(게이초 19년 10월 10일), 아버지 이에마사가 병으로 급사했다. 같은 달 23일, 오사카 전투로 인해 사망한 부친이 명받았던 에도성의 혼마루 루스이역은 어린 나이로는 수행할 수 없었기에 면제되었다. 12월 18일(11월 18일), 가독 상속이 인정되어 7세의 나이로 시모쓰케 우쓰노미야번 10만 석의 번주가 되었다. 1619년 11월 18일(겐와 5년 10월 13일), 닛코 토쇼구 참배를 위해 쇼군 히데타다가 우쓰노미야에 들렀을 때 배알을 받았다. 이때 1만 석이 추가되었으나, 시모후사 코가 11만 석(코가 6만 석, 시모쓰마 2만 5천 석, 오야마 2만 5천 석)으로 전봉되었다. 1622년 8월, 우쓰노미야성 낚시 천장 사건의 영향으로 우쓰노미야번 11만 석으로 다시 봉해졌다.2. 3. 닛코 동조궁과 막부 행사 참여
겐와 5년 10월 13일(1619년11월 18일), 히데타다가 닛코 토쇼구 참배를 위해 우츠노미야에 들렀을 때, 다다마사는 생애 세 번째 배알을 받았다. 이때 1만 석의 가증을 받았으나, 시모후사 코가로 11만 석(코가가 6만 석, 시모츠마가 2만 5천 석, 오야마 2만 5천 석의 총 11만 석)으로 전봉되었다.[1] 게이안 2년(1649년) 쇼군의 닛코 사참 때 휴식처였던 이시바시주쿠의 카이운지 경내에 어전을 재건했다.[2]2. 4. 사망
寛文일본어 8년(1668년) 2월 19일 (3월 31일)에 에도 시오도메의 번저에서 61세로 사망했다. 장남인 마사요시가 가독을 이었다.[1]참조
[1]
웹사이트
開雲寺について
http://www.kaiunji.j[...]
開雲寺
2022-05-23
[2]
서적
栃木県の歴史散歩
山川出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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