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귀비 진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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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완귀비 진씨는 강희제 55년(1717년)에 태어나 건륭제의 후궁이 된 인물이다. 건륭제 즉위 후 상재, 귀인, 완빈으로 봉해졌으며, 건륭제가 태상황이 된 후에는 완비로 존봉되었다. 가경제 즉위 후에는 완귀태비로 존봉되었고, 9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옹정제 시대부터 건륭제를 보필했으며, 건륭 연간에는 빈의 지위에 있었지만 귀인 대우를 받았다. 가경제 연간에는 완귀태비로 존봉되었으며, 청나라 궁궐 내에서 궁녀 사건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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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귀비 진씨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완귀비 진씨 |
본관 | 진씨 (陳氏) (출생 시) |
혼인 후 성씨 | 아이신 교로 (愛新覺羅) |
출생 | 강희제(康熙帝) 55년 12월 20일 (1716년 2월 1일) |
사망 | 가경제(嘉慶帝) 12년 2월 2일 (1807년 3월 10일) (향년 91세) |
사망 장소 | 자금성(紫禁城) |
묘지 | 청 동릉(清東陵) 유릉비원침 (裕陵妃園寢) |
배우자 | 건륭제(乾隆帝) (1799년 사망) |
품계 | |
초기 품계 | 격격 (格格) |
최종 품계 | 완귀태비 (婉貴太妃) |
거쳐간 품계 | 진상재 (陳常在) 진귀인 (陳貴人) 완빈 (婉嬪) 완비 (婉妃) 완귀비 (婉貴妃) |
가족 관계 | |
부친 | 진연장 (陳延璋) |
자녀 | 없음 |
2. 생애
강희제 55년 12월 20일(서기 1717년 2월 1일)에 태어나, 보친왕 홍력(훗날의 건륭제)의 측실이 되었다.
건륭제 즉위 후, 상재(신분이 낮은 비빈)가 되었다.[1] 건륭제 12년(1747년) 귀인으로 진봉되었고,[2] 건륭 14년(1749년) "완빈"으로 봉해졌다.[3] 건륭제가 태상황으로 물러나고 아들 영염(가경제)에게 양위하면서 완빈은 완비로 존봉되었다.[4]
가경 6년(1801년), 완귀태비로 존봉되었으며, 태비들 중 연공서열이 가장 높아 수강궁의 주인이 되었다. 92세로 사망했다.
2. 1. 어린 시절 및 가계
강희제 55년 12월 20일(1717년 2월 1일) 청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보친왕 홍력(훗날의 건륭제)의 저택에 들어가 격격(格格, 지위가 낮은 후궁)이 되었다.[1] 친정은 진씨이며, 한인 출신으로, 한군기나 포의 출신이 아닌 민인 출신으로 남방 관료에 가야 할 여자였다.[1]2. 2. 건륭제와의 만남
옹정 연간, 옹정제는 홍력을 잠저에 있을 때부터 격격으로 삼았다.[1] 진씨는 한군기나 포의 출신이 아닌 민인 출신으로, 남방 관료에 보내질 예정이었다.[1]건륭제 즉위 후, 진씨는 해격격과 함께 상재로 봉해져 진상재라 불렸다.[1] 건륭제 2년(1737년) 5월 12일, 진상재는 해상재와 마찬가지로 귀인으로 진봉되어 진귀인이라 불렸다.[1]
건륭제 13년(1748년) 7월, 건륭제는 한귀비 나라씨를 황귀비로 책봉하고 황후로 세우려 했다.[1] 이때 가비와 진귀인 등 네 사람이 함께 한 계급씩 진봉되었다.[1]
건륭제 13년 9월, 내각 전적청이 진씨를 빈으로 봉할 때, ‘완(婉), 손(巽), 영(穎)’ 세 글자 중 건륭제가 완(婉) 자를 택하여, 진귀인은 완빈으로 진봉되었다.[1] 건륭제 14년(1749년) 4월에 완빈 책봉례를 치렀다.[1]
진씨 부인이 언제 옹정제의 넷째 아들 홍력의 첩이 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2]
2. 3. 건륭제 재위 기간
건륭제 즉위 후, 진씨는 상재(신분이 낮은 비빈)가 되었다.[1] 건륭제 12년(1747년), 귀인으로 진봉되었다.[2] 건륭 14년(1749년), "완빈"으로 봉해졌다.[3]진씨는 빈의 자리에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귀인의 대접을 받았고, 생일에도 평소와 같은 대우를 받았다. 건륭 20년 12월 20일은 완빈의 40세 생일이었지만, 이렇다할 상을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건륭 30년 12월 20일, 완빈의 50세 생일이 되어서야 내무부에서는 귀인보다 약간 높은 예로 은 200냥을 주었다. 이후, 건륭제는 이 날이 진씨의 50세 생일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는 점을 고려해 은 300냥과 경수품을 올리도록 명했다. 진씨는 70대가 되어서야 빈의 대접을 받았다.
건륭 연간, 완빈의 대궁녀는 소궁녀와 갈등을 겪었다. 청나라 궁궐에서는 후궁 안의 정자는 수령태감이 자물쇠를 채우고, 저녁 7시에 잠그고, 아침 5시에 여는 규칙이 있었다. 어린 궁녀는 정자의 자물쇠를 열었고, 완빈이 일어나기도 전에 우물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있었다. 다른 궁녀와 태감들은 바삐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 궁녀가 사라진 것을 알지 못하였다.
45년 후, 건륭제는 아들 영염(가경제)에게 양위하여 태상황이 되었으므로, 완빈도 완비로 존봉되었다.[4]
2. 4. 가경제 재위 기간
가경제는 건륭제의 잠저에 있을 때부터 건륭제를 모셨던 완빈 진씨를 완귀태비로 봉하였다. 가경제는 진씨를 완태비 모비(母妃)라 칭했다.[4] 가경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전에 완귀태비가 건륭제의 잠저에 있을 때부터 건륭제를 모셨기 때문에 진씨를 받들어 귀비로 봉하고, 지금은 수강궁이 그 다음 자리에 있으며, 나이 86이며, 강건이화(康健颐和)하니 의숭(宜崇)의 위호를 받는 신경례를 하면서 완귀태비로 추앙해야 한다. 모든 일을 적절하게 처리해야 하며, 각 관아에서 관례대로 예비하여 4월 15일에 거행해야 한다."가경 6년 (1801년) 정월, 완빈에서 완귀태비로 봉해졌다. 그러나 같은 해 2월, 정월의 문서에서 공부 사원이 대두 제도에 따르지 않고 '귀태비'로 두 계급 올린 것이 문제가 되어 상서 임녕과 좌시랑 영화, 낭중 영조 등은 모두 급여를 삭감받는 처분을 받았다.
가경 12년 (1807년) 2월 2일, 완귀비 진씨는 9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건륭제의 후궁들 중에서는 가장 오래 살았다. 같은 해 11월 3일, 금관은 청동릉의 유릉비원침에 묻혔다. 《餵馬檔》의 기록에 따르면 악귀인 서림각라씨가 완귀비 진씨 사후, 청동릉으로 옮겨질 진씨를 정안장에 직접 찾아가 배웅했다는 기록이 있다.
2. 5. 궁중 일화
진씨는 빈의 자리에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귀인의 대접을 받았고, 진씨의 생일은 평소대로 맞추어졌다. 건륭 20년 12월 20일은 완빈의 40세 생일이었지만, 이렇다 할 상을 받았다는 기록이 없다.[1]건륭 30년 12월 20일, 완빈의 50세 생일이 되어서야 내무부에서는 귀인보다 약간 높은 예로 은 200냥을 주었다. 이후, 건륭제는 이 날이 진씨의 50세 생일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는 점을 고려해 은 300냥과 경수품을 올리도록 명했다. 진씨는 70대가 되어서야 빈의 대접을 받았다.[1]
건륭 연간, 완빈의 대궁녀는 소궁녀와 갈등을 겪었다. 청나라 궁궐에서는 후궁 안의 정자는 수령태감이 자물쇠를 채우고, 저녁 7시에 잠그고, 아침 5시에 여는 규칙이 있었다. 어린 궁녀는 정자의 자물쇠를 열었고, 완빈이 일어나기도 전에 우물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있었다. 다른 궁녀와 태감들은 바삐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 궁녀가 사라진 것을 알지 못하였다.[1]
3. 완귀비가 등장하는 작품
3. 1. 드라마
참조
[1]
날짜
雍正十三年 九月 二十四日
[2]
날짜
乾隆十四年 四月
[3]
날짜
乾隆五十九年 十二月
[4]
날짜
嘉慶六年 四月 十五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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