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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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왕순례는 고려 현종의 후손으로, 조선 시대에 왕족으로 인정받아 숭의전 부사를 지낸 인물이다. 그는 조선 문종 때 왕씨에 대한 멸족령이 해제된 후 문종, 단종, 세조, 성종으로부터 특별한 예우를 받았다. 세조는 그를 왕실의 손님으로 대우하고 숭의전 제사를 잇게 하였으며, 성종은 그에게 회례연 참여와 양어머니의 근친을 허락했다. 1459년 탄핵을 받기도 했지만 복직되었으며, 1485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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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순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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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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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지 | 조선 공주 |
사망지 | 조선 한성부 |
사망일 | 1485년 6월 10일 |
거주지 | 공주, 한성부 |
국적 | 조선 |
별명 | 왕우지, 제우지 |
직업 | |
직업 | 왕족, 숭의전 부사 |
국가 | 조선 |
직책 | 숭의전부사 |
가족 정보 | |
자녀 | 왕천계 |
부모 | 왕미 |
친척 | 고려 현종 |
2. 생애
왕순례는 본래 공주(公州)에서 제우지(齊牛知)라는 이름으로 성씨를 숨기고 살았다. 그의 할아버지 왕휴(王休)는 고려 현종의 후손이었으나, 조선 건국 후 1394년 왕씨 숙청 과정에서 살해되었고, 아버지 왕거오(王居五) 또는 왕미(王美)의 생애는 불분명하다.
1452년(문종 2년) 3월, 이웃과의 다툼으로 왕씨임이 밝혀졌으나, 이미 왕씨에 대한 탄압이 완화된 시기였기에 문종은 오히려 그에게 의복과 식량 등을 하사하며 보호하였다. 같은 해 문종은 그에게 노비와 전답을 내리려 했으나 승하로 인해 시행되지 못했고, 단종 즉위 후인 1452년 5월에야 지급되었다. 이어 7월에는 숭의전 부사(崇義殿副使)로 임명되면서 왕순례(王循禮)라는 이름을 받았다.
세조는 왕순례를 왕실의 손님으로 대우하며 각종 연회에 초대하고 2품 관료에 준하는 예우를 갖추었다. 세조는 이러한 조치가 선대 왕들의 뜻을 잇는 것이라고 강조하며, 왕순례에게 몸가짐을 삼가하여 가문을 보전할 것을 당부했다. 1467년(세조 13년)에는 행 숭의전사(行崇義殿使)로 임명되었다. 이러한 예우는 성종 대까지 이어져, 성종은 왕순례가 양어머니를 만나러 갈 때 말과 약을 하사하고 여러 연회에 참여시키는 등 배려를 보였다.
그러나 1459년(세조 5년)에는 정처를 소홀히 하고 첩을 가까이하며 방자하게 행동한다는 이유로 탄핵되어 파직되기도 했으나, 1463년(세조 9년)에 복직되었다.
왕순례는 1485년(성종 16년) 6월 10일에 사망하였고, 성종은 그의 죽음에 부의(賻儀)를 내렸다.
2. 1. 출생과 가계
왕순례의 아버지는 왕거오(王居五) 또는 왕미(王美)이며, 어머니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 혹은 할머니가 제씨(齊氏)였다는 설이 있으나 명확하지 않다. 그는 고려 현종의 후손으로, 할아버지 왕휴(王休)는 마부령(麻副令)과 영해군관찰사를 지낸 인물이다. 그러나 조선 건국 후 왕씨에 대한 탄압이 이어지던 1394년(조선 태조 2년), 왕휴는 순금사(巡禁司)에 체포되어 거제도로 유배된 뒤 살해당했다. 아버지 왕거오(또는 왕미)의 생애에 대해서는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이러한 가혹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왕순례는 공주(公州)에서 성씨를 제(齊)씨로 바꾸고 '제우지(齊牛知)'라는 이름으로 신분을 숨긴 채 살아가야 했다. 문종 2년(1452년) 3월 4일, 그는 이웃 사람과 밭 경계를 두고 다투다가 왕씨라는 사실이 관가에 밀고되어 체포되었다. 다행히 이때는 이미 왕씨에 대한 멸족령이 해제된 시기였다. 문종은 제우지의 사정을 듣고 그에게 의복, 갓, 신발, 안장을 얹은 말, 쌀, 콩 등을 하사하며 왕씨 후손에 대한 배려를 보였다.
관계 | 이름 | 비고 |
---|---|---|
할아버지 | 왕휴(王休) | 고려 현종의 후손, 마부령, 영해군관찰사 역임, 1394년 처형 |
조부 본처 | 권씨(權氏) | |
사촌 | 이영상(李永常) | 권씨 소생 자녀의 자녀로 추정 |
할머니 (서조모) | 오씨(吳氏) | |
아버지 | 왕미(王美) | 또는 왕거오(王居五), 오씨 소생 |
본인 | 왕순례(王循禮) | 처음 이름은 제우지(齊牛知) |
서자 | 왕천계(王千繼) | |
서손 | 왕적(王績) |
태종실록 1413년(태종 13년) 11월 15일 기사에는 왕휴(王庥)의 아들 왕거을오미(王巨乙吾未)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이름의 유사성으로 볼 때 왕휴(王庥)가 왕휴(王休)와, 왕거을오미(王巨乙吾未)가 왕미(王美)와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제기된다.
2. 2. 왕족 인정과 숭의전 부사 제수
왕순례는 본래 공주에서 제우지(齊牛知)라는 이름으로 성씨를 바꾸고 살고 있었다.[1] 조선 문종 2년(1452년) 3월 4일, 이웃 사람과 밭의 경계를 두고 다툼이 벌어졌는데, 이때 상대방이 왕순례가 왕씨임을 관가에 밀고하면서 그의 정체가 드러나게 되었다. 다행히 이때는 이미 왕씨에 대한 멸족령이 실효된 상태였다. 이 소식을 들은 문종은 왕우지(王牛知, 왕순례의 본명으로 추정됨)에게 의복, 갓, 신발, 안장을 갖춘 말(안마), 쌀, 콩 등을 하사하며 그를 보호하였다.같은 해 3월 18일, 문종은 왕우지에게 노비와 전답을 내리라는 명을 내렸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문종이 승하하면서 이 명령은 즉시 시행되지 못했다. 이후 조선 단종이 즉위한 해인 1452년 5월 19일에 이르러서야 문종의 명이 이행되어 노비와 전답이 실제로 지급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7월 2일, 왕우지는 고려 왕조의 제사를 모시는 숭의전의 부사(崇義殿副使)로 임명되었고, 이때 '왕순례(王循禮)'라는 이름을 공식적으로 받게 되었다. 이는 조선 왕조가 고려 왕실의 후예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예우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조치였다.
2. 3. 세조와 성종의 예우
세조는 왕순례를 왕실의 손님(賓)으로 대우하며 특별히 예우하였다. 세조 11년(1465) 6월, 문소전 삭제(文昭殿朔祭) 후 열린 음복연(飮福宴)에서 세조는 왕순례를 불러 "너는 비록 직위는 낮더라도 왕실의 손님이니 마땅히 2품의 아래에 앉으라"고 명하고, 직접 사용하던 상(御卓)을 내려주며 이웃의 친척과 같이 여긴다고 말했다.이듬해인 세조 12년(1466) 1월, 세자의 생일 잔치에서도 왕순례는 세조가 내린 어탁을 받았다. 이때 세조는 "내가 사사로이 네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 아니다. 네가 선대(先代)의 후손이라 하여 세종께서 왕씨(王氏)의 뒤를 세우고자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고, 문종께서 비로소 숭의전(崇義殿)을 세워 그 제사를 잇게 하였으니, 지금 내가 선왕(先王)의 뜻을 이어받든 것이다"라고 말하며 왕순례 예우가 선대의 뜻을 잇는 것임을 강조했다.
세조 13년(1467) 1월 세자 생일 잔치에서도 세조는 왕순례를 불러 빈례(賓禮)로 대접하며 2품의 반열에 앉게 했다. 세조는 잔치에 참석한 신료들에게 왕순례를 소개하며 "선대의 후예는 예전에는 다 죽여 없애려 하여 남아 있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아니하고, 높은 벼슬과 후한 녹(祿)을 주어서 선조(先祖)의 제사(祭祀)를 받들게 하여 기쁨을 같이할 것을 기약하니, 너는 마땅히 몸가짐을 삼가고 조심하여 대대로 집안을 보전하라"고 당부하였다. 같은 해 1월 9일에는 왕순례를 행 숭의전사(行崇義殿使)로 삼았으며, 9월 24일에는 세조 자신의 탄신 잔치에도 왕순례를 초대하였다.
성종 역시 왕순례에 대한 예우를 이어갔다. 성종 2년(1471) 7월에는 궁궐 내에서 재상, 위장 등에게 베푼 연회에 왕순례도 참여하였다. 성종 3년(1472) 11월에는 왕순례가 공주(公州)에 있는 양어머니를 찾아뵙기 위해 말미를 요청하자, 성종이 이를 허락하고 말과 약(藥餌)을 내려주며 배려하였다. 또한 성종 7년(1476) 8월과 8년(1477) 1월에는 인정전에서 열린 회례연(會禮宴)에 왕순례가 참여하도록 하였다.
2. 4. 탄핵과 복직
조선 세조 5년(1459) 9월 19일, 정실부인을 멀리하고 첩을 가까이하며 방자하게 행동했다는 이유로 탄핵되어 파직되었다. 그러나 세조 9년(1463) 1월 10일에 다시 복직되었다.2. 5. 사망과 후사
왕순례의 뒤를 이어 아들 왕천계(王千繼)와 손자 왕적(王績)이 숭의전감을 역임했지만 후사가 단절되면서, 다른 일족이 숭의전감을 맡게 되었다.그의 묘소는 오랫동안 실전되었다가, 1988년 주변 도로 확장 공사 도중 숭의전 입구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3. 왕미와의 혼동 문제
왕순례의 일생을 교서감(校書監) 왕미(王亹)라는 인물로 혼동하여 기록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왕미는 조선 태조 때의 인물[1]이며, 고려 태조 왕건의 왕자인 효은태자 동양군 왕원의 후손이다. 따라서 왕순례와는 활동 시기가 다르며, 왕순례의 행적 또한 명확하게 남아 있어 서로 다른 인물임을 알 수 있다.
4. 가계
- 할아버지: 왕휴(王休)
- 할아버지의 본처: 권씨(權氏)
- 사촌: 이영상(李永常)
- 할머니: 오씨(吳氏)
- 아버지: 왕미(王美)
- 서자: 왕천계(王千繼)
- 서손: 왕적(王績)
태종실록 26권, 태종 13년(1413년) 11월 15일(신묘) 2번째 기사에 왕휴(王庥)의 아들 왕거을오미(王巨乙吾未)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이름의 음이 비슷한 점을 근거로 왕휴(王休)와 왕휴(王庥), 왕거을오미(王巨乙吾未)와 왕미(王美)가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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