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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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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태종(太宗, 1367년 ~ 1422년)은 조선의 제3대 국왕이다. 본명은 이방원(李芳遠)으로,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이다. 그는 고려 말 혼란기에 정몽주를 제거하여 조선 건국에 기여하고, 제1차, 제2차 왕자의 난을 통해 왕위 계승의 기반을 다졌다. 1400년 정종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아 즉위한 태종은 왕권 강화를 위해 사병을 혁파하고, 6조 직계제를 실시하는 등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를 구축했다. 또한 경제적 안정을 위해 신문고 제도를 시행하고 토지 제도를 정비했으며, 문화 발전을 위해 금속활자를 제작했다. 그는 재위 기간 동안 숭유억불 정책을 펼치고 외교 및 국방을 강화했으며, 세종에게 양위한 후에도 상왕으로서 국정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태종은 왕권 강화 과정에서 많은 공신과 외척을 제거하고, 서얼 차별 정책을 시행하는 등 논란이 있는 인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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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조선)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태종의 릉인 헌릉의 무인상
헌릉의 무인상
이방원 (I Bang-won)
유덕 (Yudeok)
묘호태종 (Taejong)
시호공정성덕신공문무광효대왕 (Gongjeong Seongdeok Singong Munmu Gwanghyo Daewang)
능호헌릉
출생일1367년 5월 16일 (음력) / 1367년 6월 21일 (양력)
출생지고려 동북면 함흥부 귀주 사제
사망일1422년 5월 10일 (음력) / 1422년 6월 8일 (양력)
사망지조선 한성부 연화방 수강궁
아버지태조 이성계
어머니신의왕후 한씨
배우자원경왕후 민씨
왕위
왕세자1400년 2월 4일 ~ 1400년 11월 13일 (음력)
즉위식개경 수창궁
재위 기간1400년 11월 13일 ~ 1418년 8월 10일 (음력)
상왕1418년 8월 11일 ~ 1421년 9월 12일 (음력)
태상왕1421년 9월 12일 ~ 1422년 5월 10일 (음력)
전임정종
후임세종
존호 및 시호
존호건천체극대정계우예철성렬 (Geoncheon Chegeuk Daejeong Gyeu Yecheol Seongnyeol)
명나라 시호공정 (Gongjeong)
가계
자녀12남 17녀 (18남 19녀)
왕자참조
비빈참조
기타
종교한국 불교 → 한국 유교 (성리학)
연호건문 (Geonmun): 1400–1402
홍무 (Hongmu): 1402
영락 (Yeongnak): 1403–1418

2. 생애

이성계신의왕후 한씨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는 방원(芳遠), 본관전주, 는 유덕(遺德)이다. 왕자 시절 작호는 '''정안군'''(靖安君), '''정안공'''(靖安公)이었다. 이후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통해 정적을 제거하고 권력을 잡았으며, 동복형 정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왕위에 올라 공신들을 축출하고, 사병을 혁파하였으며 호패법과 6조 직계제를 실시하였다. 자신의 처가와 사돈 등을 비롯한 왕실의 외척을 숙청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2. 1. 생애 초반

태종 이방원은 1367년 이성계한씨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1382년 관리가 되었고, 원천석유교 학자들에게서 학문을 배웠다.[2][3] 그는 아버지 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에 기여했는데, 백성과 정부 내 유력 인사들의 지지를 얻는 데 힘썼으며, 정몽주와 같이 고려에 충성하는 유력 관료들을 암살하기도 했다.

1392년 4월, 이성계가 사냥 중 부상을 당하자, 정몽주는 이 기회를 틈타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다. 그러나 이방원은 이를 미리 알아채고 정몽주를 암살했다. 같은 해 7월 조선 왕조가 건국되자 이방원은 정안군이 되었고, 다른 형제들에 비해 유력한 후계자로 떠올랐다.

2. 1. 1. 출생과 가계

1367년(공민왕 16년) 6월 13일(음력 5월 16일) 고려 함흥부 귀주(歸州)에서 이성계한씨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성계의 아들들이 대개 무인으로 성장했지만, 이방원은 어릴 때부터 무예나 격구보다는 학문을 더 좋아했다고 한다.[17] 원천석이 태종의 잠저 시절 스승 중 한 명이었다.

1382년(우왕 9년)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383년(우왕 10년) 문과에 병과 7등으로 급제하였는데, 급제하였을 당시 아버지 이성계와 어머니 한씨 부인이 매우 기뻐하였다.[18][19]

2. 1. 2. 과거 급제와 관직 생활

이방원은 1382년(고려 우왕 9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관리가 되었다.[2][3] 그는 원천석과 같은 유교 학자들에게서 학문을 배웠다.[2][3]

2. 2. 역성 혁명 활동

1367년 이성계신의왕후 한씨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난 이방원은 1382년에 관리가 되었다. 그는 원천석유교 학자들에게서 학문을 배웠다.[2][3]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에 기여했는데, 백성과 정부 내 많은 유력 인사들의 지지를 얻었으며, 정몽주와 같이 고려에 충성하는 유력 관료들을 암살하여 조선 건국에 힘을 보탰다.

2. 2. 1. 정몽주 제거

역성혁명과 개혁 방법의 차이로 인해 이방원에게 암살되었다.]]

1392년(공양왕 4년) 3월, 아버지 이성계황주에서 사냥을 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당했다. 이성계는 병을 핑계로 은신했는데, 이방원은 어머니 신의왕후 한씨의 상으로 경기도 영평에서 시묘살이 중이었다. 그러던 중 계모 신덕왕후 강씨의 급한 부름으로 개경의 집으로 되돌아왔다.[20]

정몽주는 이성계의 낙마 사건을 계기로 이성계 세력을 제거하고 그간의 개혁 법령을 폐지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정몽주는 이성계의 병문안을 핑계로 이성계의 가택을 방문하는 등 치밀함을 보였다.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에게 정몽주를 제거할 것을 권고하였으나 이성계는 신의를 지키겠다는 마음으로 반대하였다.[20]

이성계는 이방원에게 정몽주를 설득하여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일 것을 당부했다. 이에 이방원은 정몽주를 자택으로 불렀고, 정몽주는 정세를 엿보러 이성계의 병문안을 핑계로 방문했다. 이후 이방원은 마지막으로 정몽주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자택으로 불러들여 마주앉아 시조 한 수를 읊었다. 이때 정몽주와 이방원이 주고 받은 시조가 바로 《단심가》(丹心歌)와 《하여가》(何如歌)이다. 이 시조들은 『청구영언』, 『가곡원류』, 『병와가곡집(甁窩歌曲集)』, 『해동가요』, 『시가』(詩歌) 등에 실려 있다.[20]

《하여가》는 망하기 일보 직전인 고려 왕실을 붙들려 하지 말고, 서로 사이좋게 지내 새로운 왕조를 창업하는 일에 동참하는 것이 어떠하겠느냐는 내용이었다. 정몽주는 이에 《단심가》로 그의 요청을 거부하였다.[20]

결국 정몽주는 결코 회유할 수 없는 인물이라고 결론을 내린 이방원은 무사를 보내 제거할 것을 지시하였고, 결국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타살하였다. 정몽주가 죽은 후에 이 자리에서 대나무가 솟았다고 하여 선죽교라 부르게 되었다.[20] 이어 그는 이색과 그의 두 아들 및 그의 제자인 이숭인, 길재 등을 축출하여 반대파를 제거했다.[20]

그러나 훗날 이방원은 1398년 정도전을 숙청한 뒤에 정몽주를 충절(忠節)의 상징으로 현창시켜 익양부원군에 추증하고 영의정부사를 추서했다.[21] 이는 삼봉 정도전을 깎아내리기 위한 의도적인 행동이었다는 일부 평가도 있다.[21]

2. 2. 2. 조선 개국 공신

1398년 휘하의 사병을 동원하여 정도전 등을 참살하고 정권을 장악한 후, 아버지인 태조를 퇴위시켰다. (제1차 왕자의 난)[13] 조선 왕조를 건국하는 데 크게 기여한 이방원은 왕위 계승자로 지명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정도전은 태조의 여덟 번째 아들이자 이방원의 이복 막내 동생(신덕왕후의 둘째 아들)인 이방석을 선호했다. 정도전은 조선을 왕의 임명에 의해 신하들이 이끄는 왕국으로 보았지만, 이방원은 절대 군주제를 통해 직접 통치를 추구했기 때문에 갈등이 발생했다. 이러한 차이점은 깊은 정치적 긴장을 초래했다.

1398년, 신덕왕후가 갑자기 사망한 후, 이방원은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정도전과 그의 지지자들이 사망했으며, 신덕왕후의 두 아들, 즉 세자도 사망했다. 이 사건은 "제1차 왕자의 난"(제1차 왕자의 난한국어)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아들들이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를 죽이는 것에 경악하고, 두 번째 부인의 죽음에 심리적으로 지쳐버린 태조는 왕위를 물려주었다. 그의 장남인 이방과 (사후 정종)가 즉시 새로운 왕이 되었다.

이방원은 빠르게 왕위의 실세로 떠올랐고, 곧 권력을 갈망하는 불만스러운 형 이방간과 갈등을 겪게 되었다. 1400년, 제1차 왕자의 난에서 세운 공에 대한 보상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박포 장군은 이방간과 동맹을 맺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는 "제2차 왕자의 난"(제2차 왕자의 난한국어)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방원은 형의 군대를 성공적으로 격파한 후 박포를 처형하고 이방간을 유배했다. 정종은 이제 강력한 동생을 두려워하여 이방원을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하고 같은 해에 왕위를 물려주었다.[4] 마침내 이방원(사후 태종)은 조선의 왕위를 계승하여 왕조의 세 번째 국왕이 되었다.[5]

2. 3. 왕자의 난

태조 이성계의 형 이원계의 아들이자 이방원의 사촌 형인 이천우는 이방원을 지지하였다.


신덕왕후 강씨 소생의 의안대군 방석이 세자로 책봉되자, 신의왕후 한씨 소생 왕자들과 조선 개국 공신 이방원은 불만을 품었다. 태조는 군권분장정책으로 종친의 정치 참여와 군권의 국왕 통제라는 원칙에 어긋나는 정책을 펼쳤고, 정도전은 태조 지시로 사병 혁파를 추진했다.[22]

이방원은 왕위 계승을 기대했으나, 정도전은 절대 군주제를 추구하는 이방원 대신 이방석을 지지했다. 1398년, 신덕왕후 사망 후, 이방원은 병중인 태조를 틈타 쿠데타를 일으켜 정도전 등과 세자를 제거했다. (제1차 왕자의 난) 태조는 왕위를 정종에게 물려주었다.

이방원은 권력 실세가 되었으나, 형 이방간과 갈등했다. 1400년, 박포는 이방간과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제2차 왕자의 난) 이방원은 반란을 진압하고, 정종은 이방원을 후계자로 지명하고 왕위를 물려주었다.[4] 이방원(사후 태종)은 조선 3대 국왕이 되었다.[5]

2. 3. 1. 제1차 왕자의 난

1398년 (태조 7년), 이방원은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 개국공신들과 이복동생인 세자 방석 등을 제거하는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22] 이 사건으로 태조는 왕위를 정종(이방과)에게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당시 세자 자리를 두고 신덕왕후 강씨 소생의 의안대군 방석이 세자로 책봉되자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왕자들은 이에 크게 불만을 나타냈으며, 조선 개국에 공이 컸던 이방원도 마찬가지였다. 태조는 개국 이후 군권분장정책을 통해 영안군 이방과, 정안군 이방원, 무안군 이방번, 세자의 매제 흥안군 등에게 절제사 직임을 수여해 군권을 분할했는데, 이는 종친의 정치 참여를 금지하는 원칙에 위배되고 군권을 국왕의 통제 아래에 놓는 일원적 지배 체제에 위배되었으므로, 개국 초부터 태조의 지시 아래 정도전은 사병 혁파를 추진하고 있었다.[22]

이에 반발한 이방원은 1398년에 부왕 태조가 와병 중임을 틈타 아내 민씨의 후원과 이숙번, 하륜, 조영무 등 사병 혁파 반대 세력, 이화, 사촌 이천우, 처남 민무구, 민무질 등 종친, 외척과 결탁해 난을 일으켰다. 이들은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의 개국공신들과 이복 동생인 무안대군 방번, 세자 방석 등을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22]

이 일이 있은 후 얼마 안 가 태조는 권력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영안군 방과에게 보위를 물려주고 함흥으로 떠났다. 왕위를 물려받은 태조의 둘째 아들 방과가 바로 조선의 제2대 국왕 정종이다.[22]

2. 3. 2. 제2차 왕자의 난

이방원은 왕위 계승을 기대했으나, 아버지 태조정도전은 이복동생 이방석을 지지했다. 정도전은 신하 중심의 왕국을, 이방원은 절대 군주제를 추구하여 갈등이 발생했다. 1398년, 신덕왕후 사망 후 이방원은 쿠데타를 일으켜 정도전 등을 제거했다. (제1차 왕자의 난) 태조는 아들들의 다툼에 실망하여 왕위를 정종에게 물려주었다.

이방원은 곧 권력 실세가 되었고, 형 이방간과 갈등을 빚었다. 1400년, 박포는 이방간과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제2차 왕자의 난)[4] 이방원은 반란을 진압하고 박포를 처형, 이방간을 유배 보냈다.[4] 이 사건으로 이방원은 왕세제에 책봉되었고, 같은 해 1400년 정종에게서 왕위를 물려받았다.[13]

2. 4. 조선 제3대 국왕 즉위

1400년 11월, 정종이 신변의 위협을 느껴 양위하자, 조선의 제3대 국왕으로 즉위했다.[13] 1403년에는 명나라 영락제로부터 조선 국왕으로 책봉받았다.[14]

2. 5. 치세

태종은 1403년 명나라 영락제로부터 조선 국왕으로 책봉받아 정식으로 '''제3대 조선 국왕'''이 되었다.[14] 같은 해 주자소를 설치하여 금속활자를 이용한 서적 인쇄에 성공했다.

1405년에는 정종개경으로 옮겼던 수도를 다시 한양으로 이전하여, 현대까지 서울이 대한민국의 수도로 자리 잡는 기반을 다졌다.

1406년에는 사찰의 특권을 대폭 삭감하여 그 세력을 약화시켰다. 또한, 행정 법전인 『경제육전』에 『속육전』을 추가하여 중앙 집권화를 추진했다.

1407년에는 원경왕후의 동생들인 민무구, 민무질 형제를 사사시켰다. 1415년에는 민무휼, 민무회 형제와 이숙번을 내쫓았는데, 이 일로 원경왕후와의 관계가 악화되어 자주 다투게 되었다.

2. 5. 1. 왕권 강화와 중앙 집권 체제 구축

태종은 조선 초기의 혼란을 종식시키기 위해 왕권 강화와 유교 정치에 힘썼다. 사병을 혁파하여 병권을 중앙 정부에 집중시키고, 6조 직계제를 실시하여 의정부의 권한을 축소하고 6조를 왕에게 직속시켰다.[29] 또한, 호패법을 실시하여 백성들의 신분을 명확히 하고 세금 징수와 군역 부과를 효율적으로 했다.[28]

태종은 왕권 강화를 위해 외척 세력을 숙청했다. 원경왕후의 형제들인 민무구, 민무질, 민무휼, 민무회와 세종의 장인 심온 등을 제거했다.

1402년(태종 2년)에는 백성의 억울한 사정을 듣고 정적을 색출하기 위해 신문고를 설치했다.[2]

태종은 토지 제도를 개정하여 숨겨진 토지를 발견하고 국고를 늘렸다.[6] 주자소를 세워 금속활자를 제작하고, 저화를 발행했다.

1405년에는 권근의 건의를 받아들여 정몽주에게 영의정을 추증하여 자신의 포용력을 과시했다.[30]

태종은 대외적으로 강경 노선을 취하여 북쪽의 여진족과 남쪽의 왜구를 공격했다. 1419년에는 쓰시마섬을 공격하는 응永의 외寇를 일으켰다.

1403년, 태종은 10만 개의 금속 활자와 두 개의 완전한 활자체를 주문했는데, 이는 요하네스 구텐베르크보다 수십 년 앞선 것이었다.[8][9][10][11]

2. 5. 2. 경제 안정과 민생 안정

태종은 1402년(태종 2년) 백성의 억울한 사정을 듣고 정적을 색출하기 위해 신문고를 설치하고,[29] 수도를 한양으로 다시 옮기는 등 국가 전반에 걸쳐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주자소를 세워 동활자를 제작했고, 호포(戶布)를 폐지하고 저화(楮貨)를 발행했다.

1401년에는 궁궐 앞에 큰 북을 설치하여 억울한 일이 있는 백성이 있으면 그 북을 쳐서 왕에게 알리고 왕의 도움을 간청하는 신문고 제도를 만들었다. 태종이 이 제도를 만든 것은 백성의 사정을 자신이 직접 관여하여 나라를 운영하려는 목적이었다.

이씨조선 최초의 법화로서, 1401년에 저화 발행을 실시했고, 일시적으로 사용을 금지했던 포화도 포백세 징수를 조건으로 허용했다. 고려에서부터 지속된 소금의 전매제에 있어, 기존의 베로 한정되었던 소금과의 교환 가능 품목에 쌀이나 잡곡을 추가하는 과염법을 실시했다.

2. 5. 3. 문화 발전과 유교 정치 강화

1403년 태종은 주자소를 설치하고 계미자(癸未字) 활판을 제작하도록 지시했으며 직접 이를 감독했다.[31]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와 로렌스 얀슨 코스터보다 수십 년 앞서 금속활자 제작을 완료했다.[8][9][10][11]

1413년에는 즉위 이후 추진한 일을 총괄하여 '경제육전'으로 재편찬하였고, 원집상절(元集詳節)과 속집상절 (續集詳節) 2권을 간행하였다. 1414년에는 정도전이 편찬하다 중단한 《고려사》 편찬 작업을 조준, 권근, 하륜 등에게 명하여 계속하게 하였으며, 권근하륜에게는 삼국사도 새로 편찬하도록 명하였다.

태종은 유교를 국시로 장려하여 불교를 쇠퇴시켰으며, 많은 불교 사찰을 폐쇄하고 그 재산을 몰수하여 국고에 귀속시켰다.

2. 5. 4. 외교 및 국방 강화

태종은 대외 정책에서 강경 노선을 취했는데, 북쪽 국경에서는 여진족을 공격했고, 남해안에서는 왜구를 공격했다.[7] 1419년 쓰시마 섬에 대한 응영의 외구를 일으킨 인물로도 알려져있다.[7]

1419년 6월, 조선 조정에서는 대마도의 도주 소 사다시게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왜구에 대한 우려를 하게 되었다. 이에 태종의 명령으로 조선군이 대마도를 공격하였다. (응영의 외구) 약 10일간의 공격으로 조선군은 크고 작은 배 129척을 강탈하고, 1939호의 가옥을 불태웠으며, 104명을 살해하고 많은 일본인을 포로로 잡았다. 같은 해 11월, 무로마치 막부는 몽골·고려 연합군이 대마도에 쳐들어왔다는 정보의 진위 확인을 위한 사절을 보냈지만, 관계는 개선되지 않았다. 조선과의 통교 관계 회복은 태종이 죽고 세종이 정치의 실권을 장악한 1423년에 이루어졌다.

2. 6. 퇴위와 죽음

1418년(태종 18년), 태종은 셋째 아들 충녕대군(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상왕으로 물러난 후에도 병권과 인사권을 장악하며 세종의 왕권 안정을 위해 노력했고,[33] 원경왕후의 네 형제와 세종의 장인 심온과 그의 동생 심정을 처형하여 외척과 권세가들의 영향력을 제한했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태종 말년에 큰 가뭄이 닥쳐 백성들의 생활이 어려웠다. 태종은 가뭄 속 땡볕 아래에서 비를 내려달라고 빌었고, 죽기 직전 "내가 죽어 영혼이 있다면 반드시 이 날만이라도 비를 내리게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후 태종의 기일인 음력 5월 10일에는 어김없이 비가 내렸는데, 사람들은 이 비를 태종우(太宗雨)라고 불렀다.[33]

태종은 양위한 지 4년 후인 1422년(세종 4년) 5월 10일 창경궁의 수강궁에서 56세의 나이로 승하했다.[33]

2. 6. 1. 능묘

헌릉


헌릉태종원경왕후의 능으로,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에 위치한 쌍릉이다. 인근에는 순조와 순원왕후의 능인 인릉이 있다. 헌릉과 인릉은 대한민국 사적 제194호로 지정되었다.[26]

3. 가족 관계

colspan="2" |본관생몰년부모비고
태조대왕
太祖大王
태조 고황제
太祖 高皇帝
전주1335년 - 1408년환조대왕
桓祖大王
의혜왕후 최씨
懿惠王后 崔氏
조선의 초대 국왕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
신의왕후 한씨
神懿王后 韓氏
신의고황후
神懿高皇后
안변1337년 - 1391년안천부원군 한경
安川府院君 韓卿
삼한국대부인 신씨
三韓國大夫人 申氏
절비
節妃
신의왕태후
神懿王太后
조선의 추존 왕후
대한제국의 추존 황후



시호본관생몰년부모비고
왕비원경왕후 민씨
후덕왕대비
厚德王大妃
여흥1365년 - 1420년여흥부원군 민제
驪興府院君 閔霽
삼한국대부인 송씨
三韓國大夫人 宋氏
정비
靜妃
원경왕태후
元敬王太后[35]



작호시호본관생몰년부모별칭비고
명빈 김씨
明嬪 金氏
안동미상 - 1479년김구덕
金九德
영월 신씨
寧越 辛氏
문종의 폐세자빈 김씨의 고모
의빈 권씨
懿嬪 權氏
안동1384년 - 미상권홍
權弘
경주 이씨
慶州 李氏
정의궁주
貞懿宮主
효빈 김씨
孝嬪 金氏
미상미상 - 1454년미상효순궁주
孝順宮主
고종 9년(1872년) 빈으로 추증[36]
신빈 신씨
信嬪 辛氏
영월1377년 - 1435년신영귀
辛永貴
미상
신녕옹주
信寧翁主
신녕궁주
信寧宮主
고종 9년(1872년) 빈으로 추증[37]
선빈 안씨
善嬪 安氏
순흥미상 - 1468년안의
安義
미상
숙선옹주
淑善翁主
고종 9년(1872년) 빈으로 추증[38]
소빈 노씨
昭嬪 盧氏
장연미상 - 1479년노구산
盧龜山
최씨
崔氏
소혜옹주
昭惠翁主
소혜궁주
昭惠宮主
고종 9년(1872년) 빈으로 추증[39]
정빈 고씨
貞嬪 高氏
미상미상 - 1426년미상궁인 고씨
宮人 高氏
숙의숙의 최씨
淑儀 崔氏
미상미상미상
숙의숙의 이씨
淑儀 李氏
미상미상미상
궁주숙공궁주 김씨
淑恭宮主 金氏
청도미상김점
金漸
권씨
權氏
세종 3년(1421년) 폐출[40]
궁주의정궁주 조씨
義貞宮主 趙氏
한양미상 - 1454년조뇌
趙賚
미상
궁주혜순궁주 이씨
惠順宮主 李氏
고성미상 - 1438년이운로
李云老
미상
궁주신순궁주 이씨
愼順宮主 李氏
성주1390년 - 미상이직
李稷
미상
정민
正敏
[41]
옹주덕숙옹주 이씨
德淑翁主 李氏
미상미상미상
옹주혜선옹주 홍씨
惠善翁主 洪氏
미상미상미상가이옹주
加伊翁主
가희아
可喜兒
옹주순혜옹주 장씨
順惠翁主 張氏
안동미상 - 1423년장사길
張思吉
복덕
福德
옹주서경옹주 김씨
西京翁主 金氏
미상미상미상김영(金英)
궁인후궁 김씨
後宮 金氏
미상미상미상
궁인궁인 이씨
宮人 李氏
미상미상미상



군호이름생몰년생모배우자비고
1▨▨대군
▨▨大君[44]
미상[42]원경왕후 민씨
2▨▨대군
▨▨大君[44]
미상[43]원경왕후 민씨
3▨▨대군
▨▨大君[44]
미상[45]원경왕후 민씨
4양녕대군
讓寧大君
폐세자
廢世子

1394년 - 1462년원경왕후 민씨수성부부인 김씨
隨城府夫人 金氏
숙빈 김씨
淑嬪 金氏
태종 18년(1418년) 폐세자[46]
5효령대군
孝寧大君

𥙷
1396년 - 1486년원경왕후 민씨예성부부인 정씨
蘂城府夫人 鄭氏
6세종대왕
世宗大王
충녕대군
忠寧大君

1397년 - 1450년원경왕후 민씨소헌왕후 심씨
昭憲王后 沈氏
제4대 국왕
7▨▨군
▨▨君[47]
1400년 - 1401년미상
8▨▨군
▨▨君[48][49]
1403년 - 1404년미상
9경녕군
敬寧君

1403년 - 1458년효빈 김씨청원군부인 김씨
淸原郡夫人 金氏
10함녕군
諴寧君

1403년 - 1467년신빈 신씨군부인 최씨
郡夫人 崔氏
11성녕대군
誠寧大君

1405년 - 1418년원경왕후 민씨삼한국대부인 성씨
三韓國大夫人 成氏
12온녕군
溫寧君

1407년 - 1454년신빈 신씨익산군부인 박씨
益山郡夫人 朴氏
13혜령군
惠寧君

1407년 - 1440년선빈 안씨낙안군부인 윤씨
樂安郡夫人 尹氏
14근녕군
謹寧君

1411년 - 1461년정빈 고씨태안군부인 허씨
泰安郡夫人 許氏
15▨▨대군
▨▨大君[50]
미상원경왕후 민씨
16희령군
熙寧君

𥙇
1412년 - 1465년숙의 최씨군부인 신씨
郡夫人 申氏
군부인 신씨
郡夫人 申氏
17후령군
厚寧君

𥘏
1419년 - 1450년숙의 이씨군부인 신씨
郡夫人 申氏
18익녕군
益寧君

1422년 - 1464년선빈 안씨군부인 박씨
郡夫人 朴氏



작호생몰년생모배우자비고
1정순공주
貞順公主
1385년 - 1460년원경왕후 민씨청평부원군 이백강
淸平府院君 李伯剛
2경정공주
慶貞公主
1387년 - 1455년원경왕후 민씨평양부원군 조대림
平壤府院君 趙大臨
3경안공주
慶安公主
1393년 - 1415년원경왕후 민씨길창군 권규
吉昌君 權跬
4옹주
▨▨翁主[51]
1400년 - 1401년미상
5정선공주
貞善公主
1404년 - 1424년원경왕후 민씨의산군 남휘
宜山君 南暉
남이의 할머니이자 신사임당의 외고조모
6정혜옹주
貞惠翁主
미상 - 1424년의빈 권씨운성군 박종우
雲城君 朴從愚
7정신옹주
貞信翁主
미상 - 1452년신빈 신씨영평위 윤계동
鈴平尉 尹季童
8정정옹주
貞靜翁主
1410년 - 1456년신빈 신씨한원군 조선
漢原君 趙璿
9▨▨옹주
▨▨翁主[52]
1412년 - 1414년미상
10숙정옹주
淑貞翁主
신빈 신씨미상일성군 정효전
日城君 鄭孝全
성종 20년(1489년) 이후 사망
11숙혜옹주
淑惠翁主
1413년 - 1464년소빈 노씨성원위 이정녕
星原尉 李正寧
12숙녕옹주
淑寧翁主
미상신빈 신씨파성군 윤우
坡城君 尹愚
13소신옹주
昭信翁主
미상 - 1437년신빈 신씨유천군 변효순
柔川君 邊孝順
14경신옹주
敬愼翁主
미상선빈 안씨전의군 이완
全義君 李梡
성종 11년(1480년) 이후 사망
15소숙옹주
昭淑翁主
미상 - 1456년신빈 신씨해평위 윤연명
海平尉 尹延命
16숙안옹주
淑安翁主
미상 - 1464년선빈 안씨회천군 황유
懷川君 黃裕
17숙근옹주
淑謹翁主
미상 - 1450년후궁 김씨화천군 권공
花川君 權恭
18숙경옹주
淑慶翁主
1420년 - 1494년신빈 신씨파평위 윤암
坡平尉 尹巖
19숙순옹주
淑順翁主
미상 - 1481년궁인 이씨파원위 윤평
坡原尉 尹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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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평가

태종은 강력한 왕권과 뛰어난 리더십으로 조선 초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국가 기틀을 확립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이성계의 아들 중 가장 영민하고 대범하며 냉철했다는 평가를 받으며[56], 빛나는 다음 시대를 열기 위한 일이라면 어떠한 악업(惡業)도 마다하지 않는 모습으로 이어졌고 이를 통해 조선을 탄탄한 기반 위에 올려놓을 수 있었다.[56] 손자인 세조와 놀랍도록 유사한 점이 많으며, 군왕의 권력이 신하의 권력보다 우위에 있어야 한다고 평생을 믿었던 인물이다.[57]

반면, 왕권 강화를 위해 정적과 외척을 숙청하는 등 냉혹하고 잔인한 면모를 보였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호패법과 6조 직계제를 실시하고, 자신의 처가와 사돈 등을 비롯한 왕실의 외척을 숙청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특히, 정도전, 정몽주 등 조선 건국에 공을 세운 인물들을 제거한 것은 훗날까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12]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은 이 덕분에 강력한 왕권을 지닌 왕이 되었다.[57]

5. 기타

태종은 성리학을 공부한 인물이었지만, 새 왕조 체제에는 새로운 이념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불교 억압 정책을 강화하였다. 1406년 사원 혁파를 단행하고 사찰 소속 노비와 토지(전답)를 압수하고, 승려를 천인으로 취급하였다. 노비와 토지는 국고에 환속시켰다.[1] 1417년부터는 도교 관련 서운관 소장 비기도참서, 예언서, 무속 서적들을 불태웠다.[1]

태종은 왕자의 난 이후 신덕왕후 강씨에게 원한을 갚고자 태조신덕왕후를 위해 한성부 중심에 조성한 정릉을 훼손하고 이전하였다. 1409년 정릉경기도 양주(현 서울 성북구)로 이전하며 봉분을 깎아 무덤 흔적을 없애고, 석물들을 광통교 보수에 사용했다.[58] 청계천 복원 과정에서 병풍석이 발견되며 이러한 사실이 밝혀졌다.[60]

태종은 서얼 금고령과 적서 제도를 정비하였는데, 이는 조선 이전부터 존재하던 것을 유지한 것이었다.[1]

1411년 일본 국왕 원의지(源義持, 무로마치 막부 쇼군 아시카가 요시모치)가 바친 코끼리가 한반도에 처음 들어왔다. 1412년 전 공조전서 이우가 코끼리에게 침을 뱉자, 코끼리가 이우를 밟아 죽였다.[63] 세종 때인 1421년 충청도 공주에서 코끼리가 기르는 사람을 죽인 이후 기록이 없다.[67]

5. 1. 숭유억불 정책

태종은 집권 직후 종교 문제에도 개입하였다. 그는 성리학을 공부한 인물이었지만, 새 왕조 체제에는 새로운 이념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불교 억압 정책을 한층 강화하였다. 1406년 사원 혁파를 단행하고, 사찰에 소속된 노비와 전답(토지)을 압수하였으며, 승려들 역시 천인으로 취급하였다. 이로써 얻어진 노비와 토지는 국고에 강제 환속시켰다.[1]

도교에도 부정적이었던 그는 1417년부터 서운관(書雲觀)에 소장된 각종 비기도참서와 예언서, 무속 관련 서적들을 불태우도록 하였다.[1]

5. 2. 정릉 수난과 신덕왕후 강등

태종은 왕자의 난을 통해 권력을 잡은 후, 계모인 신덕왕후 강씨에게 개인적인 원한을 갚았다. 태조가 신덕왕후를 위해 한성부 중심에 조성한 정릉을 훼손하고 이전한 것이 대표적인 예시이다.

태종은 태조가 죽은 뒤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강등시키고, 정릉을 도성 밖 경기도 양주군 성북면 사한리(현재의 서울 성북구 정릉동)로 옮기도록 명했다.[59] "옛 제왕의 능묘가 모두 도성 밖에 있는데 지금 정릉이 성안에 있는 것은 적당하지 못하고 또 사신이 묵는 관사와 가까우니 도성 밖으로 옮기도록 하소서."라는 의정부의 주청을 받아들이는 형식을 취했지만, 실제로는 태종의 의지였다.[59]

1409년(태종 9년)에는 정릉경기도 양주 지역(현 서울 성북구)으로 이전하면서, 봉분을 완전히 깎아 무덤의 흔적을 없애고, 능의 석물들을 광통교 보수에 사용하는 등 철저하게 훼손했다.[58] 정릉의 병풍석과 난간석은 홍수로 무너진 광통교 복구에 쓰였으며,[59] 목재는 태평관 건축에 사용되었다.[60] 신덕왕후의 능 앞에 세워진 원찰 역시 붕괴되어 재목으로 쓰였다. 제례에서도 신덕왕후는 왕비가 아닌 후궁의 예로 대우받았다.

이러한 사실은 청계천 복원 과정에서 병풍석이 발견되면서 밝혀졌다.[60] 신덕왕후의 복위 문제는 여러 왕대를 거쳐 논의된 끝에 1669년(현종 10년) 송시열의 주도로 왕비로 복위되고 정릉은 왕릉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61]

태종의 이러한 행위는 유교적 가치관에 어긋나는 행동으로, 훗날까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5. 3. 서얼 차별 정책

태종은 서얼 금고령과 적서 제도를 정비하였는데, 이는 조선 이전 시대부터 존재하던 것을 그대로 유지한 것이었다.[1] 오히려 태종은 서얼 금고령과 적서 제도를 규정하기 전에 한품서용제를 실시하여 서얼들에게 관직 등용의 기회를 어느 정도 제공함으로써 서얼 차별 완화를 시작한 군주였다.[1]

5. 4. 코끼리 일화

1411년 2월 22일, 일본 국왕 원의지(源義持, 실제로는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 아시카가 요시모치)가 코끼리를 바쳤다. 이는 기록 상으로 한반도에 처음으로 들어온 코끼리였다. 태종은 이를 사복시(司僕寺)에서 기르게 했다.[62] 이듬해 12월 10일, 전 공조전서 이우(李瑀)가 코끼리를 보고 침을 뱉었는데, 코끼리가 노하여 이우를 밟아 죽이는 사건이 벌어졌다.[63] 1413년 병조판서 유정현(柳廷顯)이 진언을 올려 일본에서 바친 코끼리를 전라도 해도(海島)에 두길 청하니, 태종이 이를 받아들였다.[64] 귀양 간 코끼리가 풀을 먹지 않고 날로 수척해진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1414년 5월 3일 태종은 코끼리를 다시 육지로 불러오게 했다.[65]

세종 때까지 살았던 이 코끼리는, 1420년 12월 28일 전라도 관찰사가 코끼리를 기르는 것이 어렵다는 계를 올리자, 상왕이었던 태종이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에서 이를 돌아가며 키우도록 했다.[66] 이듬해인 1421년에는 충청도 공주에 가 있던 코끼리가 기르는 사람을 죽이는 일이 또 발생했는데, 이후에는 이 코끼리에 대한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67]

6. 태종이 등장하는 작품



참조

[1] 웹사이트 http://www.jejugo.co[...] 2016-11-08
[2] 웹사이트 https://encykorea.ak[...] 2023-09-01
[3] 웹사이트 https://terms.naver.[...] 2023-09-01
[4] 뉴스 KBS can't resist another telling of King Taejong's tale https://koreajoongan[...] 2024-01-19
[5] 웹사이트 http://sillok.histor[...] 2023-09-01
[6] 뉴스 http://www.hankyung.[...] 2010-05-10
[7] 서적 Korea – A Religious History Routledge 2002-08-22
[8] 서적 1000 Inventions and Discoveries https://books.google[...] Penguin 2021-12-18
[9] 웹사이트 Invention Is the Mother Of Necessity https://archive.nyti[...] 2021-12-11
[10] 웹사이트 ENCYCLOpedia.com – Htai Tjong https://www.encyclop[...] 2021-12-11
[11] 서적 100 Greatest Science Inventions of All Time https://books.google[...] Libraries Unlimited 2021-12-18
[12] 뉴스 http://www.cha.go.kr[...] 2012-02-10
[13] 서적 韓国時代劇歴史大全2015年度版
[14] 서적 韓国文化への誘い: 全羅北道の歴史と文化秋季特別展 石川県立歴史博物館
[15] 문서 1392년(太祖元年)靖安君となり、1398年(太祖7年)公侯伯制度導入で靖安公に改称。厳密には“靖安大君”にはなっていない(“大君”の称号ができたのは公侯伯制度が廃止された1401年(太宗元年))。
[16] 웹사이트 応永の外寇とは https://kotobank.jp/[...] 2022-11-06
[17] 백과사전 《백과사전》 태종 참조 http://enc.daum.net/[...]
[18] 서적 《태종실록》 권 1, 총서
[19] 서적 《지퇴당집》 권6, 〈동각잡기〉건, [태조]
[20] 문서 선죽교에는 1945년 이후 백범 김구가 방문할 무렵까지도 포은 정몽주의 혈흔 흔적이 남아 있었다고 전한다.
[21] 문서 둘째 형인 방과의 서자들 중 한명이 정몽주의 손녀와 결혼하여 인척관계가 되기도 하는 등 복권이 이루어졌다.
[22] 웹사이트 태종 (太宗) http://people.aks.ac[...]
[23] 웹사이트 인물과 역사: 태종 이방원 http://navercast.nav[...]
[24] 서적 조선이 그린 세계지도
[25] 웹사이트 http://sillok.histor[...]
[26] 웹사이트 태종 太宗 http://www.encyber.c[...]
[27] 웹사이트 태종실록 (1431) 1권, 태종 1년 6월 12일 기사 1번째기사 http://sillok.histor[...]
[28] 뉴스인용 한비자의 냉정한 정치로 승부수 띄운 '태종' http://www.hankyung.[...] 한국경제 2010-05-10
[29] 문서 1405년에 관제개정을 하면서 인사이동이 있었는데 영의정에 조준, 좌의정에 하륜, 우의정에 조영무를 임명했고 이직을 이조판서로, 이지를 호조판서로, 이문화를 예조판서로, 남재를 병조판서로, 유양을 형조판서로, 최이를 공조판서로 임명하면서 조각을 단행했다.
[30] 서적 사화로 보는 조선역사 석필 1998
[31] 뉴스인용 [열려라 공부] 사냥 중 낙마한 태종 “이 일을 사관이 모르게 하라” … 실록엔 감추라는 어명까지 적었다 https://news.joins.c[...] 중앙일보 2017-04-17
[32] 문서 태종 자신이 억불정책을 편 것에 반대되는 것이다.
[33] 서적 조선왕조 오백년 야사 꿈과희망 2009
[34] 뉴스인용 창경궁(昌慶宮), 문화재정보 http://www.cha.go.kr[...] 위키트리IT/과학 2012-02-10
[35] 서적 《세종실록》 9권, 세종 2년(1420년 명 영락(永樂) 18년) 8월 24일 (경신)
[36] 간행물 승정원일기 1872-12-01
[37] 간행물 승정원일기 1872-12-01
[38] 간행물 승정원일기 1872-12-01
[39] 간행물 승정원일기 1872-12-01
[40] 간행물 세종실록 1421-10-19
[41] 간행물 상교정본자비도량참법 권9~10
[42] 주석 양녕대군 출생 시기
[43] 주석 양녕대군 출생 시기
[44] 간행물 세종실록 1419-02-03
[45] 주석 양녕대군 출생 시기
[46] 간행물 태종실록 1418-06-03
[47] 간행물 태종실록 1401-07-01
[48] 간행물 태종실록 1403-02-01
[49] 간행물 태종실록 1404-04-30
[50] 간행물 태종실록 1412-06-23
[51] 간행물 태종실록 1402-08-08
[52] 간행물 태종실록 1414-06-08
[53] 웹인용 세종대왕 http://db.kocca.kr/d[...] 2020-03-07
[54] 웹사이트 http://newslibrary.n[...] 1978-11-21
[55] 뉴스 [단독]주상욱, 5년만 부활 KBS 대하 사극 '태종 이방원' 주인공 https://news.jtbc.jo[...] 2021-08-09
[56] 웹사이트 선원세계 태종대왕(太宗大王) 생애(2) http://www.rfo.co.kr 2006-04-03
[57] 문서 세종과 6조직계제
[58] 웹사이트 [신병주의 역사에서 길을찾다] 조선 태조의 무덤이 동쪽으로 간 까닭은? - 세상을 보는 눈, 글로벌 미디어 - 세계일보 http://www.segye.com[...]
[59] 서적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책으로 보는 세상 2010
[60] 서적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책으로 보는 세상 2010
[61] 서적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책으로 보는 세상 2010
[62] 웹사이트 태종실록 http://sillok.histor[...]
[63] 웹사이트 태종실록 http://sillok.histor[...]
[64] 웹사이트 태종실록 http://sillok.histor[...]
[65] 웹사이트 태종실록 http://sillok.histor[...]
[66] 웹사이트 태종실록 http://sillok.histor[...]
[67] 웹사이트 태종실록 http://sillok.his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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