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평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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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왕평은 1908년 경상북도 영천군 출생으로, 배우, 극작가, 작사가로 활동했다.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조선배우학교에서 연기를 공부했으며, 1930년대 초 조선연극사 전속 작가로 활동했다. 이애리수의 〈황성의 적〉, 선우일선의 〈조선팔경가〉 등 트로트와 신민요 작사가로 활동했으며, 극반 《항구의 일야》를 쓰고 출연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말 성봉영화원에 참여하여 영화 《나그네》와 《군용열차》에 출연하며 영화계에 데뷔했으나, 1940년 연극 공연 중 뇌출혈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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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평 (작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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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왕평 |
본명 | 이응호 |
출생 | 1908년 |
출생지 | 경상북도 영천군 |
사망 | 1940년 |
사망지 | 평안북도 강계군 |
국적 | (정보 없음) |
분야 | 연극 영화 대중가요 |
교육 | 배재고등보통학교 졸업 |
사조 | (정보 없음) |
대표작 | (정보 없음) |
수상 | (정보 없음) |
2. 생애
왕평은 1908년 경상북도 영천군에서 태어나 5~7세 때 청송군에서 잠시 살았고, 묘소는 청송군 파천면에 있다. 배재고등보통학교(현 배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조선배우학교 1기생으로 연기를 공부했다. 배우, 극작가, 작사가로 활동했으며, 일제 강점기 말 영화계에도 진출했으나 1940년 평안북도 강계군에서 연극 공연 중 뇌출혈로 사망했다.[1]
2. 1. 성장 과정 및 연기 공부
경상북도 영천군 출신으로, 5~7세에 청송군에서 잠시 살았고, 묘소도 청송군 파천면에 있다고 한다. 이후 성장 과정은 불분명하다. 배재고등보통학교(현 배재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현철이 운영하던 조선배우학교 제1기 입학생으로 들어가 연기를 공부했다.2. 2. 배우, 극작가, 작사가 활동
왕평은 배우뿐만 아니라 극작가와 대중가요 작사가로도 활발히 활동했다. 1930년대 초, 조선연극사의 전속 작가로 작품을 발표했다. 1932년 포리돌레코드의 조선 지점 설립에 관여한 뒤 문예부장을 맡았다.이애리수의 〈황성의 적〉과 선우일선의 신민요 〈조선팔경가〉는 한국인이 만든 최초의 본격적인 트로트이며, 왕평의 대표적인 작사가로서의 작품이다. 1933년부터 8장이 발매된 인기 극반 《항구의 일야》도 유명하다. 《항구의 일야》는 왕평이 작품을 쓰고 전옥과 함께 주연을 맡기도 했다. 이때는 작가로서는 본명 이응호를, 배우로서는 예명 왕평을 사용했다.
2. 3. 대표작
작사가로서 대표작은 한국인이 만든 최초의 본격적인 트로트인 이애리수의 〈황성의 적〉과 선우일선의 신민요 〈조선팔경가〉이다.[1] 1933년부터 8장이 발매된 인기 극반 《항구의 일야》도 유명하다. 《항구의 일야》는 왕평이 작품을 쓰고 전옥과 함께 주연을 맡기도 했다.[1] 이때는 작가로서는 본명 이응호를, 배우로서는 예명 왕평을 사용했다.[1]2. 4. 영화계 데뷔 및 사망
일제 강점기 말기, 성봉영화원에 참여하여 《나그네》(1937)와 《군용열차》(1938)에 출연하면서 영화계에 데뷔했다. 풍채가 좋은 왕평은 영화에서 듬직한 오빠(형) 이미지로 출연했다. 1940년 평안북도 강계군에서 연극 《남매》를 공연하다가 무대에서 뇌출혈로 쓰러져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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