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젠 카리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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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외젠 카리에는 1849년 프랑스에서 태어나 1906년에 사망한 프랑스의 화가이다. 그는 상업 석판화 견습생으로 미술 훈련을 시작하여 국립 미술 학교에서 공부했으며, 보불 전쟁에 참전하여 포로로 잡히기도 했다. 카리에는 1884년 살롱에서 명예상을 받았고, 이후 상징주의 화가로 활동하며 오귀스트 로댕과 가까운 우정을 나누었다. 그의 작품은 오르세 미술관, 테이트 미술관 등에서 소장되어 있으며, 국립미술협회와 살롱 도톤의 창립 멤버로 활동하며 앙리 마티스와 앙드레 드랭과 같은 화가를 배출하는 등 미술 교육에도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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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젠 카리에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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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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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외젠 아나톨 카리에르 |
출생일 | 1849년 1월 16일 |
출생지 | 프랑스 구르네쉬르마른 |
사망일 | 1906년 3월 27일 |
사망지 | 프랑스 파리 |
국적 | 프랑스 |
경력 | |
분야 | 회화, 석판화 |
사조 | 상징주의 |
영향 | 이름 정보 없음 (톨스토이 관련 정보) |
영향 받은 인물 | 이름 정보 없음 (피카소 관련 정보) |
2. 생애
1884년 살롱에서 카리에르의 그림 중 하나가 명예상을 받았고, 미술 평론가 Roger Marx|로제 마르크스프랑스어가 그의 작품을 지지하게 되면서[4] 당대 주요 예술가, 평론가, 작가, 수집가들과 교류하게 되었다. 국립미술협회와 살롱 도톤(명예 회장)의 창립 멤버였으며,[4] 아카데미 드 라 팔레트에서 미술 교사로 활동했다. 1894년, 1896년, 1899년에는 브뤼셀의 리브르 에스테티크, 1896년, 1899년, 1905년, 1906년에는 뮌헨 분리파, 1904년에는 베를린 분리파와 함께 전시했다.[4] 대표작으로는 '수면'(1890년), 폴 베를렌의 초상화 (1891년, 룩셈부르크), '모성'(1892년, 룩셈부르크),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1897년), '마담 메나르-도리앙'(1906년) 등이 있다.[4]
1898년에는 앙리 마티스와 앙드레 드랭 등을 배출한 "아카데미 카리에르"를 설립했다. 파리 만국 박람회 포스터와 빅토르 위고 삽화를 그렸고, 살롱 도톤느 창설에도 기여했다.
1905년 두 번째 후두암 수술 후 목소리를 거의 잃고 쇠약해져 1906년 3월 26일 사망했다.[5][4] 조르주 클레망소부터 프란시스 피카비아 같은 젊은 예술가들까지 파리 문화계 인사들이 장례식에 참석했고, 오귀스트 로댕은 카리에르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긴급하게, 그리고 새로운 명료함으로 표현된, 매혹적인 아이디어"에 대해 언급했다.[5] 카리에르가 자녀들에게 남긴 마지막 말은 "Aimez-vous avec frénésie." ("열정적으로 서로 사랑하라")였다.[5]
1906년 국립미술협회와 살롱 도톤, 1907년 국립미술학교와 리브르 에스테티크에서 카리에르의 주요 회고전이 열렸다.[6]
2. 1. 유년 시절과 초기 경력
카리에르는 소년 시절 석판화가의 문하생으로 들어갔지만, 이후 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신중한 생활을 하며 마음에 떠오르는 영상을 화면에 담는 방법을 궁리했다. 색채를 다양하게 사용하지 않고 단색 위주로 빛과 그림자의 관계를 깊이 있게 표현했으며, 인물을 음영 속에 녹아들 듯 묘사했다. 강렬함과는 거리가 있지만, 그의 인물화에는 꿈을 꾸는 듯한 호소력이 있으며, 모성애를 주제로 한 작품들은 부드럽고 단아한 느낌을 자아낸다.센생드니의 구르네쉬르마른에서 태어나 스트라스부르에서 성장한 카리에르는 상업 석판화 견습생으로 일하면서 에콜 뮈니시팔 드 데생에서 처음으로 미술 훈련을 받았다.[3] 1868년 잠시 석판화가로 일하며 파리를 방문, 루브르 박물관에서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그림에 깊은 감명을 받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3] 에콜 데 보자르에서 알렉상드르 카바넬에게 받은 교육은 보불 전쟁으로 중단되었고, 프로이센군에 포로로 잡히기도 했다.[3] 1872~3년에는 쥘 셰레의 작업실에서 일했다.[3] 1878년 처음으로 파리 살롱에 참가했지만, 그의 작품은 주목받지 못했다.[3] 이듬해 카바넬에게서의 수업을 마치고 소피 데스몽소와 결혼하여 (그녀와의 사이에서 일곱 명의 자녀를 두었다) 잠시 런던으로 이주하여 J. M. W. 터너의 작품을 보고 감탄했다.[3] 파리로 돌아온 후 수년간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늘어나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인쇄업체 등에서 임시직을 찾아야 했다.[3] 1880년과 1885년 사이, 도예가인 그의 형 에르네스트 (1858–1908)의 주선으로 세브르 도자기 공장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게 되었다.[3] 그곳에서 오귀스트 로댕을 만나 매우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3]
1849년 1월 16일 외젠 카리에르는 프랑스 그루네쉬르마르느에서 보험업을 하는 아버지 레옹 카미유 조제프 카리에르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869년 파리로 가서 국립 미술 학교에 입학했다. 1870년 프랑스와 프로이센 사이에 보불 전쟁이 발발하자, 카리에르는 알자스 수비대에 입대했지만, 스트라스부르 함락과 함께 프로이센의 포로가 되어 드레스덴으로 보내졌다. 강화 조약 체결 후 석방되어 파리로 돌아온 카리에르는 알렉상드르 카바넬에게서 그림 공부를 다시 시작했고, 1876년에 로마 대상을 받았다.
1878년 소피 아델라이드 드무소와 결혼한 후, '''세브르 도자기 제작소'''에서 접시나 컵, 가구 등을 장식하는 일로 생계를 유지했다. 같은 해부터 파리 살롱에 작품을 출품했지만, 1884년에 이르러서야 미술 평론가 Roger Marx|로제 마르크스프랑스어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이듬해 살롱(프랑스 예술가 협회 살롱)에서 《병든 아이》가 국가 매입 작품으로 선정되었다.
이후에도 살롱에 꾸준히 출품하는 한편, 젊은 화가 양성에도 힘을 쏟았다. 1898년에는 화숙 "'''아카데미 카리에르'''"를 설립하여 앙리 마티스나 앙드레 드랭과 같은 훗날 유명 화가들을 배출하기도 했다.
2. 2. 결혼과 초기 작품 활동
1878년 소피 아델라이드 드무소와 결혼한 후, '''세브르 도자기 제작소'''에서 접시나 컵 장식, 가구 장식 등의 일로 생계를 유지했다.[3] 카리에르는 같은 해 파리 살롱에 출품했지만, 1884년에 비로소 미술 평론가 Roger Marx|로제 마르크스프랑스어의 주목을 받았고, 다음 해 살롱(프랑스 예술가 협회 살롱)에서 《병든 아이》가 국가 매입 대상이 되었다.[4]2. 3. 예술적 성숙과 상징주의
카리에르는 많은 거장들을 존경했지만, 초기 작품에서는 동시대 인물인 장자크 에네르의 영향을 주로 받았다. 그는 점차 다른 색채를 약간씩 섞어 거의 단색에 가까운 갈색 팔레트를 사용했고, 에네르와 다소 유사한 회화 기법을 사용했으며, 1880년대 중반에는 이미지들이 짙고 안개 낀 갈색 분위기 속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보였다.[7]''병든 아이''(1885; 파리, 오르세 미술관)는 카리에르가 자주 사용했고, 그의 작품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어머니와 아이를 주제로 한 예시이다.[8]
카리에르는 1880년대 중반부터 시각 예술에서 발전한 세기말 상징주의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의 작품에 스며든 시적이고 몽환적인 몽상의 특징은 샤를 모리스와 장 돌렌과 같은 상징주의 평론가들에게 특히 호소력이 있었다. 후자는 카리에르의 예술을 현실이 꿈의 마법을 지닌 것이라고 묘사했다. 카리에르는 또한 카페 볼테르를 자주 찾았고, 상징주의 연극에 참여하여 상징주의의 주류에 합류했다. ''모성'' (c. 1889; 필라델피아, 펜실베이니아, 미술관)에서처럼 절제된 팔레트를 사용하고, 초점을 부드럽게 하며, 인물들을 짙고 어두운 분위기에 감싸면서 카리에르는 희귀한 공간감, 빛, 색채를 구현했다. 그의 몽환적인 이미지는 만연한 정적의 특징을 지닌다.
인간의 본질적인 형제애에 대한 카리에르의 강한 믿음은 그가 자신의 가족을 인류의 축소판으로 여기게 했다. 그의 그림 대부분은 가족 구성원이나 가족 관계를 다루고 있지만, 구체적인 것보다는 보편적인 것에 대한 그의 관심은 대개 개성이 거의 없는 인물들을 형태가 없는 환경 속에 제시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는 또한 시인 폴 베를렌 (1890; 파리, 오르세 미술관)과 조각가 루이-앙리 드빌레 (1887)를 비롯한 여러 초상화를 제작했다.[9]
19세기 후반, 파리에서 인상주의가 발흥하여 시대의 큰 흐름을 형성하는 한편, 이를 극복하려는 예술 운동으로 상징주의가 등장했다. 외계의 현실보다 관념의 세계에 눈을 돌리는 이 운동에 그는 독자적인 입장에서 참여했다. 카리에는 원래 다재다능한 예술가로, 삽화나 조각도 다루었다. 그의 초기 회화는 색채가 풍부했지만, 최종적으로 모자상이나 저명 인사의 초상화를 안개가 낀 듯한 갈색 화면으로 표현하는 등, 명암을 강조한 신비로운 작품을 제작하게 되었다.
2. 4. 로댕과의 우정
로댕과 카리에르가 언제 어디에서 만났는지는 명확하게 기록되지 않았지만, 둘 다 같은 시기에 세브르 국립 도자기 제작소에서 일했기 때문에 여기서 만났을 가능성이 높다.[3] 두 사람은 모두 프랑스 예술가 협회에서 이탈한 국민 미술 협회 설립에 참여했다.[4] 카리에르는 1900년 로댕 전시회 카탈로그 표지에 그림을 그렸고, 로댕은 카리에르의 데스 마스크를 제작했다. 작품에서도 두 사람 사이에는 유사점이 있다고 여겨진다. 예를 들어 거칠게 깎아낸 로댕의 조각과 배경이 불분명한 카리에르의 인물화는 모두 미완성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마찬가지로 분할, 결합, 반복, 왜곡과 같은 기법에서도 유사점이 인정된다.2. 5. 문학과의 교류
카리에는 문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는 에드몽 드 곤쿠르의 자택에서 매주 일요일마다 열리던 문학 서클 "그르니에(Grenier)"에 참가하여 에밀 졸라, 알퐁스 도데, 귀스타브 제프로이 등과 함께 곤쿠르의 사상에 깊이 경도되었다. 또한 그는 빅토르 위고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위고의 유언 집행인으로부터 의뢰를 받아, 『레 미제라블』의 등장인물인 판틴을 그렸으며, 다른 기회에는 위고의 시 "잠자는 보아즈"를 위한 삽화를 그리기도 했다.2. 6. 말년과 죽음
1905년 두 번째 후두암 수술을 받은 후 거의 목소리도 나오지 않고 쇠약해졌으며, 이듬해 1906년 3월 26일 사망했다.[5][4] 조르주 클레망소에서 프란시스 피카비아와 같은 젊은 예술가에 이르기까지 파리의 문화계는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고, 로댕은 그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긴급하게, 그리고 새로운 명료함으로 표현된, 매혹적인 아이디어"에 대해 이야기했다.[5] 카리에르의 마지막 말은 그의 자녀들이 기록했는데, "Aimez-vous avec frénésie." ("열정적으로 서로 사랑하라")였다.[5]1906년에는 국립미술협회와 살롱 도톤, 1907년에는 국립미술학교와 리브르 에스테티크에서 카리에르의 주요 회고전이 열렸다.[6]
3. 작품 세계
카리에르의 작품은 오르세 미술관, 로댕 미술관, 테이트 미술관, 베오그라드 국립 박물관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3. 1. 주제와 양식
카리에르는 소년 시절 석판화가의 문하생이 되었지만, 후에 회화를 그렸다. 처음에는 신중한 생활을 했지만, 마음에 떠오르는 영상을 화면에 그려보는 것을 궁리했다. 그 때문에 색채를 다 쓰지 않고 단색으로 그려서 빛과 그림자의 관계를 깊게 하여, 인물을 음영에 매몰되듯 녹여서 그리고 있다. 박력과는 먼 표현이지만, 인물화에는 꿈속을 보는 듯한 호소력이 있으며, 모성애를 그린 작품은 부드럽고 단아함을 머금고 있다.카리에르는 많은 거장들을 존경했지만, 초기 작품에서는 동시대 인물인 장자크 에네르의 영향을 주로 받았다. 그는 점차 다른 색채를 약간씩 섞어 거의 단색에 가까운 갈색 팔레트를 사용했고, 에네르와 다소 유사한 회화 기법을 사용했으며, 1880년대 중반에는 이미지들이 짙고 안개 낀 갈색 분위기 속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보였다.[7]
''병든 아이''(1885; 파리, 오르세 미술관)는 카리에르가 자주 사용했고, 그의 작품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어머니와 아이를 주제로 한 예시이다.[8]
카리에르는 1880년대 중반부터 시각 예술에서 발전한 세기말 상징주의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의 작품에 스며든 시적이고 몽환적인 몽상의 특징은 샤를 모리스와 장 돌렌과 같은 상징주의 평론가들에게 특히 호소력이 있었다. 후자는 카리에르의 예술을 현실이 꿈의 마법을 지닌 것이라고 묘사했다. 카리에르는 또한 카페 볼테르를 자주 찾았고, 상징주의 연극에 참여하여 상징주의의 주류에 합류했다. ''모성'' (c. 1889; 필라델피아, 펜실베이니아, 미술관)에서처럼 절제된 팔레트를 사용하고, 초점을 부드럽게 하며, 인물들을 짙고 어두운 분위기에 감싸면서 카리에르는 희귀한 공간감, 빛, 색채를 구현했다. 그의 몽환적인 이미지는 만연한 정적의 특징을 지닌다.
인간의 본질적인 형제애에 대한 카리에르의 강한 믿음은 그가 자신의 가족을 인류의 축소판으로 여기게 했다. 그의 그림 대부분은 가족 구성원이나 가족 관계를 다루고 있지만, 구체적인 것보다는 보편적인 것에 대한 그의 관심은 대개 개성이 거의 없는 인물들을 형태가 없는 환경 속에 제시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는 또한 시인 폴 베를렌 (1890; 파리, 오르세 미술관)과 조각가 루이-앙리 드빌레 (1887)를 비롯한 여러 초상화를 제작했다.[9]
3. 2. 주요 작품
카리에르는 장자크 에네르의 영향을 받아 단색에 가까운 갈색 팔레트를 사용하는 특징을 보였다.[7] 1880년대 중반부터는 짙고 안개 낀 갈색 분위기 속에서 이미지가 나타나는 듯한 표현을 사용했다.[7]카리에르는 세기말 상징주의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그의 작품은 시적이고 몽환적인 특징을 지녔다.[9] 그의 그림 대부분은 가족 구성원이나 가족 관계를 다루고 있으며, 인간의 본질적인 형제애에 대한 믿음을 담고 있다.[9]
그는 또한 폴 베를렌(1890; 파리, 오르세 미술관)과 조각가 루이-앙리 드빌레 (1887)를 비롯한 여러 초상화를 제작했다.[9]
카리에르의 주요 작품은 다음과 같다:
제목 | 연도 | 기법 | 소장처 |
---|---|---|---|
c. 1880–85 | 캔버스에 유채 | 클라크 미술관 | |
병든 아이 | 1885 | 파리, 오르세 미술관[8] | |
모성 | c. 1889 | 필라델피아, 펜실베이니아, 미술관 | |
-- | 1890 | 캔버스에 유채 | 파리, 오르세 미술관[9] |
-- | 1876 | 캔버스에 유채 | 포 미술관 |
-- | 1887 | 캔버스에 유채 | 런던 내셔널 갤러리 |
-- | 1890–95년경 | 캔버스에 유채 | 소장처 미상 |
-- | 1895 | 캔버스에 유채 | 파리 로댕 미술관 |
-- | 1897 | 캔버스에 유채 | 스트라스부르 현대 미술관 |
![]() | 1899 | 캔버스에 유채 | 모스크바 푸시킨 미술관 |
![]() | 1900 | 캔버스에 유채 | 파리 프티 팔레 미술관 |
-- | 1901 | 캔버스에 유채 | 클리블랜드 미술관, 오하이오 클리블랜드 |
-- | 1901년경 | 캔버스에 부착된 준비된 종이에 유채 | 로드아일랜드 디자인 학교 미술관, 프로비던스 |
-- | 1886 | 캔버스에 유채 | 시카고 미술관 |
-- | 1890 | 캔버스에 유채 | 루브르 박물관, 파리 |
-- | 1891 | 캔버스에 유채 | 예일 대학교 미술관, 뉴헤이븐 |
-- | 1893 | 캔버스에 유채 |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미술관 |
-- | 날짜 미상 | 캔버스에 유채 | 부에노스아이레스 국립 미술관 |
-- | 1895년경 | 캔버스에 유채 | 미니애폴리스 미술관, 미니애폴리스 |
-- | 1900–05 | 스톡홀름 틸스카 갤러리 | |
-- | 1899-1900 | 캔버스에 유채 | 워싱턴 D.C. 국립 미술관 |
-- | 1890 | 석판화 | 클리블랜드 미술관 |
-- | 1893 | 석판화 | 워싱턴 D.C. 국립 미술관 |
-- | 1896 | 석판화 | 런던 대영 박물관 |
-- | 1896 | 석판화 | 클리블랜드 미술관 |
-- | 1897 | 석판화 | 워싱턴 D.C. 국립 미술관 |
-- | 1897 | 석판화 | 워싱턴 D.C. 국립 미술관 |
-- | 1897 | 석판화 | 워싱턴 D.C. 국립 미술관 |
-- | 1898 | 석판화 | 런던 대영 박물관 |
-- | 1901 | 석판화 | 스톡홀름 틸스카 갤러리 |
-- | 1898 | 프랑스 국립 도서관 | |
![]() | 1893년 | 에르미타주 미술관 | |
-- | 1890년경 | 부다페스트 서양 미술관 | |
![]() | 1890년 | 오르세 미술관 |
4. 유산과 영향
카리에르는 많은 거장들을 존경했지만, 초기 작품에서는 동시대 인물인 장자크 에네르의 영향을 주로 받았다. 그는 점차 다른 색채를 약간씩 섞어 거의 단색에 가까운 갈색 팔레트를 사용했고, 에네르와 다소 유사한 회화 기법을 사용했으며, 1880년대 중반에는 이미지들이 짙고 안개 낀 갈색 분위기 속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보였다.[7] 오르세 미술관에 있는 ''병든 아이''(1885)는 카리에르가 자주 사용했고, 그의 작품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어머니와 아이를 주제로 한 예시이다.[8]
카리에르는 1880년대 중반부터 시각 예술에서 발전한 세기말 상징주의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의 작품에 스며든 시적이고 몽환적인 몽상의 특징은 샤를 모리스와 장 돌렌과 같은 상징주의 평론가들에게 특히 호소력이 있었다. 후자는 카리에르의 예술을 현실이 꿈의 마법을 지닌 것이라고 묘사했다. 카리에르는 카페 볼테르를 자주 찾았고, 상징주의 연극에 참여하여 상징주의의 주류에 합류했다. 필라델피아 미술관에 있는 ''모성'' (c. 1889)에서처럼 절제된 팔레트를 사용하고, 초점을 부드럽게 하며, 인물들을 짙고 어두운 분위기에 감싸면서 카리에르는 희귀한 공간감, 빛, 색채를 구현했다. 그의 몽환적인 이미지는 만연한 정적의 특징을 지닌다.
인간의 본질적인 형제애에 대한 카리에르의 강한 믿음은 그가 자신의 가족을 인류의 축소판으로 여기게 했다. 그의 그림 대부분은 가족 구성원이나 가족 관계를 다루고 있지만, 구체적인 것보다는 보편적인 것에 대한 그의 관심은 대개 개성이 거의 없는 인물들을 형태가 없는 환경 속에 제시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는 또한 시인 폴 베를렌 (1890, 오르세 미술관)과 조각가 루이-앙리 드빌레 (1887)를 비롯한 여러 초상화를 제작했다.[9]
그의 작품 중 일부는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과 로댕 미술관, 런던의 테이트 미술관, 베오그라드의 세르비아 국립 박물관에서 찾아볼 수 있다.
2006년 봄, 도쿄 국립서양미술관에서 "로댕과 카리에르" 특별전이 개최되었다. 이 전시는 오르세 미술관으로 순회 전시되었다. 일본에서 기획된 전시회가 오르세 미술관에서도 개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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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Picasso and Tolstoy: On Life, Love and Death
http://www.jstor.org[...]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1993
[2]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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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clevelan[...]
2018-10-30
[3]
간행물
Carrière, Eugène
http://dx.doi.org/10[...]
Oxford University Press
2003
[4]
서적
Eugene Carriere: The Symbol of Creation
Kent Fine Art
1989
[5]
웹사이트
Richard Hollis on painter Eugène Carrière
http://www.theguardi[...]
2006-08-26
[6]
간행물
Carrière, Eugène
http://dx.doi.org/10[...]
Oxford University Press
2003
[7]
웹사이트
Little d'Artagnan
https://www.clarkart[...]
2023-06-15
[8]
간행물
Carrière, Eugène
http://dx.doi.org/10[...]
Oxford University Press
2003
[9]
Tumblr
Louis-Henri Devillez in his Studio, by Eugène Carrière, 1887
http://oldpaintin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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