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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퐁스 도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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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퐁스 도데는 1840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소설가, 극작가로, 빛과 색채를 활용한 인상주의적 문체와 프로방스를 배경으로 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그는 시집 《연애하는 여인들》로 문학 활동을 시작하여, 단편 소설집 《나의 풍차에서 온 편지들》, 소설 《타르타랭 타라스콩의 놀라운 모험》, 《사포》, 《잭》 등을 발표하며 이름을 알렸다. 도데는 찰스 디킨스와 비교되기도 했으며, 에밀 졸라 등 자연주의 문학가들과 교류했으나,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이 되지는 못했다. 그의 작품은 한국에도 소개되었으며, 반유대주의적 성향을 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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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퐁스 도데 - [인물]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이름알퐁스 도데
원어 이름Alphonse Daudet
로마자 표기Alphonse Daudet
출생일1840년 5월 13일
출생지, 프랑스 프랑스 왕국
사망일1897년 12월 16일
사망지파리, 프랑스 프랑스 공화국
묘소페르 라셰즈 묘지
알퐁스 도데 서명
서명
직업
직업작가
극작가
시인
소설가
시나리오 작가
문학 활동
문학 사조자연주의
영향 받은 인물에밀 졸라
에드몽드 공쿠르
주요 작품타라스콩의 타르타랭
방앗간 편지
소소한 이야기
스갱 아저씨의 염소
알를의 여인
가족 관계
배우자쥘리아 도데
자녀레옹 도데
뤼시앵 도데
에드메 도데
부모아버지: 뱅상 도데, 어머니: 아들린 도데
기타
필명피콜로

2. 생애

알퐁스 도데는 19세기 후반 프랑스를 대표하는 소설가 중 한 명으로, 특히 프로방스 지방의 목가적인 풍경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따뜻하고 생생하게 그려낸 작가로 유명하다. 그의 작품은 유머와 감성이 조화를 이루며 당대는 물론 오늘날까지도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1840년 프랑스 남부 에 있는 부르주아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18][1][12] 리옹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후 잠시 알레스에서 교사로 일했지만, 문학에 대한 열정으로 1857년 파리로 이주하여 본격적인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18][1][12] 초기에는 시집 『연인들』(Les Amoureusesfra)을 발표하고 여러 신문에 글을 기고하며 문단에 이름을 알렸으며, 모르니 공작의 비서로 일하며 생활의 안정을 찾기도 했다.[18][2][12]

도데의 명성을 확고히 한 작품은 1866년 발표된 단편집 『나의 풍차에서 온 편지』(Lettres de mon moulinfra)였다.[2] 이 작품은 프로방스의 아름다운 자연과 소박한 사람들의 삶을 서정적으로 그려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남프랑스인의 허풍스러운 기질을 희화화한 『타르타랭 타라스콩의 놀라운 모험』(Aventures prodigieuses de Tartarin de Tarasconfra, 1872)과 그 연작 소설들, 조르주 비제의 음악으로 더욱 유명해진 희곡 『아를의 여인』(L'Arlésiennefra, 1872) 등을 통해 대중적인 작가로 자리매김했다.[2] 또한 파리의 사회상과 다양한 인간 군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프롱몽과 리슬레』(Fromont jeune et Risler aînéfra, 1874), 『잭』(Jackfra, 1876), 『사포』(Saphofra, 1884) 등의 장편 소설들도 발표하며 작품 세계를 넓혀나갔다.[2] 그는 자연주의 문학 작가들과 교류하면서도 특유의 따뜻하고 인상주의적인 문체로 자신만의 문학 세계를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는다.[2]

1867년 작가 쥘리아 알라르와 결혼하여 안정적인 가정을 이루었으나,[2] 젊은 시절 얻은 매독으로 인해 평생 건강 문제에 시달렸다.[22][4] 특히 말년에는 척수매독(tabes dorsalis)으로 인한 극심한 고통과 운동실조증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4][22] 창작 활동과 문인들과의 교류를 꾸준히 이어갔다. 1897년 12월 16일, 파리의 자택에서 57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사망하여 페르 라셰즈 묘지에 안장되었다.

2. 1. 어린 시절과 교육

1880년경의 알퐁스 도데


알퐁스 도데는 1840년 5월 13일 프랑스 남부 랑그도크 지방 가르주에서 태어났다.[18][12] 그의 가족은 부르주아 계급에 속했으며,[3] 아버지는 정통왕당파 성향의 가톨릭 신자였다.[18] 세벤 출신의 아버지 뱅상 도데는 비단 제조업자였으나 평생 불운과 실패를 겪었고,[1][12][18] 어머니 아들린은 부유한 상인 앙투안 레노의 딸이었다.[19][20][21]

도데는 어린 시절 대부분을 근처 마을 브주스에서 보냈고, 카니베 사립학교에서 공부했다.[18] 그는 다소 우울한 소년 시절을 보냈다.[1][12] 1849년,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족은 리옹으로 이사했고,[18] 도데는 리옹의 앙페르 고등학교에 6학년으로 입학하여 학창 시절을 보냈다.[18][1][12] 그러나 1855년 아버지가 완전히 파산하면서 바칼로레아 시험을 포기해야 했다.[18]

1856년, 그는 리옹을 떠나 가르주알레스에 있는 중학교 교사가 되었다.[18][1][12] 하지만 교사 생활은 그에게 매우 힘들고 견디기 어려운 경험이었으며,[1][12] 이 시기의 경험은 훗날 자전적 소설 『르 프티 쇼즈』(1868)를 쓰는 데 영감을 주었다.[18][1]

결국 1857년 11월 1일, 도데는 교직을 그만두고 문학 활동의 꿈을 안고 파리로 향했다.[18][1][12] 파리에서 그는 세 살 위 형이자 당시 기자로 활동하던 에르네스트 도데와 합류했다.[18][1][12] 비록 무일푼이었지만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며 글쓰기를 시작했고,[18] 1858년 첫 시집 『사랑하는 여인들(Les Amoureuses)』을 출간하여 상당한 호평을 받았다.[18][1][12] 이후 『르 피가로』를 비롯한 여러 신문사에 글을 기고하고 희곡을 쓰면서 문학계에서 점차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18][1][12]

이 시기 나폴레옹 3세의 유력한 장관이었던 드 모르니 공작의 눈에 띄어 그의 비서 중 한 명으로 발탁되었고, 1865년 모르니 공작이 사망할 때까지 그 직책을 유지했다.[2][12] 이는 도데가 안정적인 생활 기반을 마련하고 작가로서 경력을 쌓아나가는 데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12]

2. 2. 문학 활동과 파리 생활



1857년 11월, 알레스에서의 교사 생활을 그만둔 도데는 문학가의 꿈을 안고 파리로 이주하여, 이미 기자로 활동하던 형 에르네스트 도데와 합류했다.[1][2] 그는 무일푼이었지만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며 글쓰기를 시작했고, 『르 피가로』를 비롯한 여러 신문사에 글을 기고했다.[2][23] 1858년 첫 시집 『연인들』(Les Amoureuses프랑스어)을 출간하여 호평을 받았으며,[2][23] 같은 해 모델 마리 리외와의 관계는 훗날 소설 『사포』(Sapho, 1884)에 영감을 주었다.[23] 이 시기 사교계 활동 중 매독에 감염되어 평생 이동성 운동실조증 등으로 고통받았다.[22]

파리에서 문학적 재능을 인정받기 시작하면서, 도데는 나폴레옹 3세의 전권 장관이었던 모르니 공작의 비서관으로 발탁되어 1865년 모르니 공작이 사망할 때까지 그 직책을 유지했다.[2]

도데의 풍차. 『나의 풍차에서 온 편지』의 배경이 된 프로방스 퐁트비엘의 풍차를 연상시킨다.


1866년 파리 근교 클라마르에서 집필한 『나의 풍차에서 온 편지』(Lettres de mon moulin프랑스어)는 프로방스 지방의 정서를 담아내며 큰 주목을 받았다.[2] 이어서 1868년에는 알레스에서의 교사 경험 등 자신의 어린 시절을 자전적으로 그린 첫 장편 소설 『작은 것』(Le Petit Chose프랑스어)을 발표했으나,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2][23] 1872년에는 남프랑스인의 기질을 희화적으로 그린 『타르타랭 타라스콩의 놀라운 모험』(Aventures prodigieuses de Tartarin de Tarascon프랑스어)과 조르주 비제가 음악을 붙여 더욱 유명해진 희곡 『아를의 여인』(L'Arlésienne프랑스어)을 발표했다.[2]

도데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준 작품은 1874년에 발표된 『프롱몽과 리슬레』(Fromont jeune et Risler aîné프랑스어)였다. 이 소설은 현실적이면서도 생생한 인물 묘사로 독자들을 사로잡았으며, 웃음과 눈물, 애수와 도덕적 감수성을 아우르는 그의 작가적 역량을 보여주었다.[2] 이후 그는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며 여러 중요한 작품들을 발표했다. 1876년에는 어머니의 이기심 때문에 고통받는 사생아의 이야기를 다룬 『』(Jack프랑스어)을 출간했고,[2] 이후 『나바브』(Le Nabab프랑스어, 1877), 『망명 왕들』(Les Rois en exil프랑스어, 1879), 『뉘마 루므스탕』(Numa Roumestan프랑스어, 1881), 『사포』(Sapho프랑스어, 1884), 그리고 프랑스 아카데미를 통렬하게 비판한 『불멸자』(L'Immortel프랑스어, 1888) 등을 연이어 발표하며 성공적인 소설가로서의 입지를 굳혔다.[2] 그는 또한 어린이를 위한 동화 『아름다운 니베르네즈호』(La Belle Nivernaise프랑스어)를 쓰기도 했으며,[2] 파리에서의 문단 생활과 작가로서의 경험을 담은 회고록 『파리 30년』(Trente ans de Paris프랑스어, 1887)과 『문필가의 회상』(Souvenirs d'un homme de lettres프랑스어, 1888)을 남겼다.[2]

파리 생활 동안 도데는 여러 문인들과 교류했다. 1859년에는 프로방스 시인 프레데릭 미스트랄과 만나 깊은 우정을 나누었으나, 도데가 남프랑스 기질을 풍자한 『뉘마 루므스탕』 등을 발표하면서 관계가 소원해지기도 했다.[24][25] 그는 에드몽 드 꽁쿠르, 귀스타브 플로베르, 에밀 졸라 등 당대의 주요 자연주의 작가들과도 친분을 쌓았다.[2] 도데의 문체는 빛과 색채가 풍부하며 단어를 섬세하게 사용하여 인상을 포착하는 "인상주의"적인 특징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으며,[2] 에밀 졸라는 그의 작품을 "매혹적"이라고 평했다.[2]

2. 3. 프로방스 작가로서의 명성

퐁비에유에 있는 알퐁스 도데라는 별칭의 방앗간. 알퐁스 도데는 이곳에 한번도 방문한 적이 없다.


알퐁스 도데는 프로방스 작가의 전형으로 불리지만, 실제로는 퐁비에유에서 단 몇 달만 살았고 관광객들이 찾는 유명한 방앗간에는 방문한 적조차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의 풍차에서 온 편지』에서 프로방스에 대한 뛰어난 묘사를 보여주었다. 또한, 도데의 이름으로 인기를 얻은 글 중 일부는 폴 아렌, 레옹 아라르, 블랑쇼 드 브르나, 그리고 아내 쥘리아 도데와 같은 다른 작가들과의 공동 작업 결과물이다.[2]

1866년, 파리 근교 클라마르에서 집필한 『나의 풍차에서 온 편지』(Lettres de mon moulin|fra)는 프로방스 퐁트비엘의 풍차를 배경으로 하여 많은 독자들의 주목을 받으며 성공을 거두었다. 1868년에 발표된 그의 첫 장편 소설 『작은 것』(Le Petit Chose|fra)은 주로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담은 자전적 소설이었으나,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1872년에는 유명한 『타르타랭 타라스콩의 놀라운 모험』(Aventures prodigieuses de Tartarin de Tarascon|fra)과 3막짜리 희곡 『아를의 여인』(L'Arlésienne|fra)을 발표했다. 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준 작품은 1874년에 발표된 『젊은 프롱몽과 형 리슬레르』(Fromont jeune et Risler aîné|fra)였다. 이 작품은 웃음과 눈물, 애수와 슬픔에 대한 풍부한 감수성, 그리고 도덕적 아름다움을 겸비하여 당시 프랑스 문학에 새로운 경향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도데는 현실감 넘치는 인물들을 창조해냈으며, 그의 작품은 생생한 현실 세계를 반영하는 듯했다.[2]

1876년에 발표된 『잭』(Jack|fra)은 어머니의 이기심으로 고통받는 사생아의 이야기를 다루며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후 도데는 성공적인 작가로서 소설 집필에 전념하며 다수의 작품을 발표했다. 그의 주요 작품과 회고록은 다음과 같다.

}) || 프로방스 배경, 첫 성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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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68 || 작은 것 (Le Petit Chose|fra) || 첫 장편 소설, 자전적 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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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72 || 타르타랭 타라스콩의 놀라운 모험 (Aventures prodigieuses de Tartarin de Tarascon|fra) || 타르타랭 3부작 첫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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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72 || 아를의 여인 (L'Arlésienne|fra) || 3막 희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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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74 || 젊은 프롱몽과 형 리슬레르 (Fromont jeune et Risler aîné|fra) || 세계적 명성 획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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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76 || 잭 (Jack|fra) || 사생아를 다룬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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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77 || 나바브 (Le Nabab|fr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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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79 || 망명 왕들 (Les Rois en exil|fr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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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1 || 누마 루메스탕 (Numa Roumestan|fr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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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4 || 사포 (Sapho|fr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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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7 || 파리 30년 (Trente ans de Paris|fra) || 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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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8 || 어느 문필가의 추억 (Souvenirs d'un homme de lettres|fra) || 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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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8 || 불멸 (L'Immortel|fra) || 프랑스 아카데미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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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도 미상) || 알프스의 타르타랭 (Tartarin sur les Alpes|fra) || 타르타랭 3부작[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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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도 미상) || 포르-타라스콩 (Port-Tarascon|fra) || 타르타랭 3부작[3]

|-

| (연도 미상) || 벨 니베르네즈호 (La Belle Nivernaise|fra) || 아동 문학

|}

이 작품들과 타르타랭 3부작[3], 그리고 주로 명성을 얻기 전에 쓴 단편 소설들이 그의 문학적 업적을 이룬다.[2] 도데는 어린이를 위한 매력적인 이야기 『벨 니베르네즈호』(La Belle Nivernaise|fra)처럼 낡은 배와 선원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도 남겼다.

도데의 문체는 찰스 디킨스와 유사하다는 지적도 있었으나, 그 자신만의 독특한 인상주의적 특징을 지닌다. 빛과 색채가 풍부하며, 단어를 물감처럼 절묘하게 배열하여 계산된 효과를 만들어낸다는 평가를 받는다. 에밀 졸라는 그의 작품을 "매혹적"이라고 평했다. 도데는 자연주의 문학 작가로 분류되며, 에드몽 드 공쿠르, 귀스타브 플로베르, 에밀 졸라 등과 교류했다. 그는 자신의 경험, 주변 환경, 만난 사람들 등 파리 생활의 모든 것을 작품의 소재로 삼아 생생하게 그려냈다. 실력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지 못했으며, 작품 『불멸』(L'Immortel|fra)에서는 아카데미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내기도 했다.[2]

2. 4. 말년과 죽음

젊은 시절 얻은 매독으로 인해 도데는 평생 건강 문제로 고통받았다. 특히 운동실조증 증상이 나타나 걸을 때 목발을 짚어야 했으며,[22] 1879년에는 척수 질환 진단을 받았다. 이는 당시 매독의 흔한 후유증 중 하나인 척수매독(tabes dorsalis)으로 추정된다.[4] 그는 이 병으로 인해 마비 증상을 겪고 여러 차례 고통스러운 치료와 수술을 받아야 했다.[4] 말년에는 건강 악화로 클로랄을 복용했으며, 이로 인한 불면증 등에 시달렸다. 그가 겪었던 극심한 고통에 대한 기록은 사후 『고통의 땅』(La Doulou|라 둘루프랑스어)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4]

건강 문제에도 불구하고 도데는 말년까지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1887년에는 파리 근교 드라베유의 샹프로세에 집을 구입하여 많은 문인들과 교류했으며,[2] 그의 오랜 친구 에드몽 드 공쿠르는 1896년 이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1891년에는 장남 레옹 도데빅토르 위고의 손녀 잔 위고(Jeanne Hugo)와 결혼했으나, 1895년 이혼했다. 같은 해 도데 가족은 마르셀 프루스트와 친분을 맺기도 했다. 그는 『소교구』(1895), ''La Fédor''(1896), ''Le Trésor d'Arlatan''(1897) 등 꾸준히 작품을 발표했다.

1897년 가을 드레퓌스 사건이 터지자 도데는 반드레퓌스파 입장을 분명히 했다. 같은 해 마지막으로 파리 위니베르시테가 41번지로 이사했다.

1897년 12월 16일, 알퐁스 도데는 파리의 자택에서 57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장례식은 생트 클로틸드 성당에서 종교 의식으로 치러졌으며, 페르 라셰즈 묘지에서 에밀 졸라가 조사를 낭독했다. 조르주 클레망소가 국장을 요청했으나 정부는 이를 거부했다. 그는 페르 라셰즈 묘지에 안장되었다.

3. 작품 세계



알퐁스 도데는 1866년 파리 근교 클라마르에서 집필한 『나의 풍차 방앗간에서 온 편지』(Lettres de mon moulin프랑스어)를 통해 문단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프로방스 퐁트비엘의 풍차를 배경으로 한 서정적인 단편 모음집으로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의 첫 장편 소설 『작은 것』(Le Petit Chose프랑스어, 1868)은 자전적 요소가 강한 작품이었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이후 1872년 발표된 『타라스콩의 타르타랭』(Aventures prodigieuses de Tartarin de Tarascon프랑스어)과 희곡 『아를의 여인』(L'Arlésienne프랑스어)으로 점차 명성을 얻었다.

도데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준 작품은 1874년 발표된 『프롱몽과 리슬레』(Fromont jeune et Risler aîné프랑스어)였다. 이 작품은 당시 프랑스 문단에 신선한 반향을 일으켰으며, 현실적이면서도 생생한 인물 묘사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2] 이후 그는 왕성한 창작 활동을 이어가며 『잭』(Jack프랑스어, 1876), 『나바브』(Le Nabab프랑스어, 1877), 『망명 왕들』(Les Rois en exil프랑스어, 1879), 『누마 루메스탕』(Numa Roumestan프랑스어, 1881), 『사포』(Sapho프랑스어, 1884), 『불멸자』(L'Immortel프랑스어, 1888) 등 다수의 소설을 발표했다. 또한 『파리 30년』(Trente ans de Paris프랑스어, 1887)과 『문필가의 회상』(Souvenirs d'un homme de lettres프랑스어, 1888) 등의 회고록을 남기기도 했다. 그의 문학 세계는 타르타랭 시리즈[3]와 단편 소설들을 포함하여 폭넓게 이루어져 있다.[2]

도데의 작품은 현실에 기반한 섬세한 묘사와 서정성이 특징이며, 때로는 인상주의적인 문체로 평가받기도 한다. 그는 자연주의 작가들과 교류하며 당대 파리의 모습과 다양한 인간 군상을 작품 속에 담아냈다.[2] 한편, 『불멸자』에서는 자신이 끝내 회원이 되지 못한 프랑스 아카데미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는 소설 외에도 어린이를 위한 동화 『아름다운 니베르네즈호』(La Belle Nivernaise프랑스어) 등을 쓰며 다양한 분야에서 문학적 재능을 발휘했다. 그의 삶과 작품에 대한 이야기는 형 에르네스트 도데의 저작이나 공쿠르 형제의 일기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2]

3. 1. 주요 작품



1866년, 파리 근교 클라마르에서 집필한 『나의 풍차 방앗간에서 온 편지』(Lettres de mon moulin프랑스어)는 프로방스 퐁트비엘의 풍차를 배경으로 하여 많은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의 첫 장편 소설인 『작은 것』(Le Petit Chose프랑스어, 1868)은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작가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우아하고 애절하게 그린 자전적 소설이다. 1872년에는 유명한 『타라스콩의 타르타랭』(Aventures prodigieuses de Tartarin de Tarascon프랑스어)과 3막극 『아를의 여인』(L'Arlésienne프랑스어)이 발표되었다.

도데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작품은 1874년에 발표된 『프롱몽과 리슬레』(Fromont jeune et Risler aîné프랑스어)이다. 이 작품은 프랑스 문학에서 비교적 새로운 주제를 다루며 큰 반향을 일으켰고, 현실적이면서도 전형적인 인물들을 생생하게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았다.[2]

1876년에 발표된 『잭』(Jack프랑스어)은 어머니의 이기심 때문에 고통받는 사생아의 이야기를 다루며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후 도데는 성공적인 작가로서 꾸준히 소설을 발표했는데, 주요 작품으로는 『나바브』(Le Nabab프랑스어, 1877), 『망명 왕들』(Les Rois en exil프랑스어, 1879), 『누마 루메스탕』(Numa Roumestan프랑스어, 1881), 『사포』(Sapho프랑스어, 1884), 『불멸자』(L'Immortel프랑스어, 1888) 등이 있다. 또한 희곡 집필과 함께 『파리 30년』(Trente ans de Paris프랑스어, 1887)과 『문필가의 회상』(Souvenirs d'un homme de lettres프랑스어, 1888) 같은 회고록을 남기기도 했다. 이 작품들과 세 편의 타르타랭 시리즈[3](『타라스콩의 타르타랭』, 『알프스의 타르타랭』, 『포르 타라스콩』), 그리고 주로 젊은 시절에 쓴 단편 소설들이 그의 문학적 업적을 이룬다.[2]

『불멸자』(L'Immortel프랑스어)는 도데가 평생 회원으로 선출되지 못했던 프랑스 아카데미(Académie française)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고 있다. 도데는 어린이를 위한 작품도 썼는데, 낡은 배와 선원들의 이야기를 그린 『아름다운 니베르네즈호』(La Belle Nivernaise프랑스어)가 대표적이다.

다음은 알퐁스 도데의 주요 작품 목록이다.

연도작품명 (원제)비고
1866나의 풍차에서 온 편지 ({{lang|fra|Lettres de mon moulin|}
작품명 (원제)출판 연도장르/비고
연애하는 여인들 (Les Amoureuses프랑스어)1858시집 (첫 출판 작품)
작은 것 (Le Petit Chose프랑스어)1868소설 (자전적)
나의 풍차 방앗간에서 온 편지 (Lettres de Mon Moulin프랑스어)1869단편 소설집
타라스콩의 타르타랭 (Tartarin de Tarascon프랑스어)1872소설
아를의 여인 (L'Arlésienne프랑스어)1872희곡 (단편 소설 각색)
월요일 이야기 (Contes du Lundi프랑스어)1873단편 소설집 (『마지막 수업』 포함)
예술가의 아내들 (Les Femmes d'Artistes프랑스어)1874소설
로베르 엘몽 (Robert Helmont프랑스어)1874소설
프롱몽과 리슬레 (Fromont jeune et Risler aîné프랑스어)1874소설
잭 (Jack프랑스어)1876소설
나바브 (Le Nabab프랑스어)1877소설
망명 왕들 (Les Rois en Exil프랑스어)1879소설
누마 루메스탕 (Numa Roumestan프랑스어)1880소설
복음 전파자 (L'Evangéliste프랑스어)1883소설
사포 (Sapho프랑스어)[9]1884소설[10]
알프스의 타르타랭 (Tartarin sur les Alpes프랑스어)1885소설
아름다운 니베르네즈호 (La Belle Nivernaise프랑스어)1886아동 도서
불멸자 (L'Immortel프랑스어)1888소설 (프랑스 아카데미 비판)
포르 타라스콩 (Port-Tarascon프랑스어)1890소설
로즈와 니네트 (Rose and Ninette프랑스어)1892소설[11]
라 둘루 (La Doulou프랑스어)1930일기 (사후 출판, 『고통의 땅에서』로 번역됨)


3. 2. 문학적 특징

도데의 문체는 인상주의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는다. 빛과 색채가 풍부하며, 단어를 물감처럼 섬세하게 배열하여 계산된 효과를 만들어낸다.[2] 에밀 졸라는 그의 작품을 "매혹적"이라고 평가했다.[2] 그의 작품은 웃음과 눈물, 애수와 슬픔에 대한 풍부한 감수성, 그리고 도덕적 아름다움을 담아내는 특징을 보인다.[2]

찰스 디킨스와 주제 및 양식에서 유사하다는 지적이 있었지만, 도데 자신은 이를 부인했으며 그만의 독창적인 문체를 확립했다.[2] 그는 자연주의 작가인 에드몽 드 공쿠르, 귀스타브 플로베르, 에밀 졸라 등과 친분이 있었으며, 자신의 경험, 주변 환경, 만났던 사람들 등 파리 생활의 모든 것을 기억 속 소재에 생명을 불어넣어 작품에 담았다.[2]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현실감이 있으며, 마치 현실 세계의 환영을 비추는 듯한 생동감을 지닌다.[2]

한편, 도데는 실력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이 되지 못했으며, 작품 『불멸자』(L'Immortel프랑스어)에는 아카데미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드러나기도 한다.[2]

3. 3. 프로방스 문학



알퐁스 도데는 흔히 프로방스 작가의 전형으로 불리지만, 실제로는 프로방스퐁비에유에서 단 몇 달밖에 살지 않았으며, 현재 관광객들이 찾는 유명한 방앗간에는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방앗간 편지>(Lettres de mon moulin)는 프로방스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을 보여준다. 이 작품을 포함하여 도데의 이름으로 발표된 글 중 일부는 폴 아렌, 레옹 아라르, 블랑쇼 드 브르나, 그리고 그의 아내 쥘리아 도데와의 공동 작업물이라는 주장도 있다.

1866년, 파리 근교 클라마르에서 집필한 『나의 풍차에서 온 편지』는 프로방스 퐁트비엘의 풍차를 배경으로 하여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의 첫 장편 소설인 『작은 것』(Le Petit Chose, 1868)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애틋하게 그린 자전적 소설이지만,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1872년에는 남부 프랑스인의 기질을 익살스럽게 그린 『타르타랭 타라스콩의 놀라운 모험』(Aventures prodigieuses de Tartarin de Tarascon)과 3막극 『아를의 여인』(L'Arlésienne)을 발표하며 작가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도데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준 작품은 1874년에 발표된 『프롱몽과 리슬레』(Fromont jeune et Risler aîné)이다. 이 소설은 당시 프랑스 문학에서는 비교적 새로운 주제를 다루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도데는 웃음과 눈물, 애수와 슬픔을 자아내는 감수성과 함께 도덕적 아름다움을 그려내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현실적이면서도 생생하게 묘사되어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2]

1876년에 발표된 『잭』(잭)은 어머니의 이기심으로 고통받는 사생아의 이야기를 다루며 사회적인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이후 도데는 성공적인 작가로서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주요 소설로는 『나바브』(Le Nabab, 1877), 『망명 왕들』(Les Rois en exil, 1879), 『누마 루메스탕』(Numa Roumestan, 1881), 『사포』(Sapho, 1884), 『불멸자』(L'Immortel, 1888) 등이 있다. 또한 회고록 『파리 30년』(Trente ans de Paris, 1887)과 『문필가의 회상』(Souvenirs d'un homme de lettres, 1888)을 남겼다. 타르타랭 시리즈 3부작[3](『타르타랭 타라스콩』, 『알프스의 타르타랭』, 『포르-타라스콩』)과 그의 초기 단편 소설들 역시 그의 중요한 문학적 업적으로 평가받는다.[2]

『불멸자』는 도데가 평생 회원으로 선출되지 못했던 프랑스 아카데미의 권위주의와 허영을 신랄하게 비판한 작품이다. 그는 또한 어린이를 위한 동화 『아름다운 니베르네즈호』(La Belle Nivernaise)와 같은 작품을 쓰기도 했다.

도데의 문체는 찰스 디킨스와 비교되기도 했으나, 그는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문체는 빛과 색채가 풍부하여 인상주의적이라는 평을 듣기도 하며, 단어를 섬세하게 사용하여 계산된 효과를 만들어낸다. 에밀 졸라는 그의 작품을 "매혹적"이라고 평가했다. 도데는 자연주의 문학 작가로 분류되며, 에드몽 드 꽁쿠르, 귀스타브 플로베르, 졸라 등 당대의 주요 작가들과 교류했다. 그는 자신의 경험, 주변 환경, 만난 사람들 등 파리 생활의 다양한 측면을 작품의 소재로 삼아 생생하게 그려냈다.[2]

4. 논란과 사회적 관점

알퐁스 도데는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패전 후 프로이센(독일 제국) 영토가 된 알자스 지방 학교를 배경으로 프랑스어에 대한 애착과 애국심을 그린 단편 소설 「마지막 수업」으로 특히 유명하다.

하지만 그의 문학적 명성과 별개로 여러 논란 또한 존재한다. 도데는 정치적으로 왕당파였으며 프랑스 제3공화국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또한, 그의 반유대주의 성향과 관련 활동은 지속적인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6][7][14] 그의 작품 속 인물 묘사나[6] 동시대 반유대주의 작가들과의 교류[7][14] 등이 그 근거로 제시된다.

이 외에도 문학적, 사회적 성공을 위해 프로방스와의 연관성을 의도적으로 부풀렸다는 주장도 제기된 바 있다.[8]

이러한 복합적인 평가 속에서도 현대 프랑스에는 그의 이름을 딴 여러 학교가 있으며, 그의 작품들은 여전히 널리 읽히고 있다.

4. 1. 반유대주의 논란

알퐁스 도데의 반유대주의는 1873년 그의 소설 속 인물인 고리대금업자 아우구스투스 칸의 묘사에서 나타난다.[6]

1860년경 알퐁스 도데 (J. 폴 게티 미술관)


도데는 왕당파였으며 프랑스 제3공화국에 대한 강한 반대 입장을 가졌다. 그는 아들 레옹 도데만큼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반유대주의자였다. 소설 ''르 나밥''의 주인공은 에서 국회의원으로 선출된 유대인 정치인에게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6] 도데는 이 정치인에 맞서 선거 운동을 벌였으나 패배했다.

도데는 프랑스 반유대주의 연맹을 설립하고 반유대주의 신문 ''라 리브르 파롤''을 창간 및 편집한 에두아르 드루몽을 비롯한 여러 반유대주의 문학계 인사들과 교류했다.[7]

에두아르 드뤼몽의 『유대인의 프랑스 (La France juive)』(1886년) 표지


도데는 살롱을 운영했는데, 이곳에는 쥘 발베-돌르뷔이, 피가로 편집장 프랑시스 마냐르, 에두아르 드루몽 등이 모였다.[14] 드루몽은 푸리에파의 알퐁스 투세넬이나 프루동 등 사회주의적 반유대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며,[15] 「금으로 치장하고 탐욕스러우며, 음모와 책략을 좋아하는 교활한 셈족」인 유대인이 프랑스를 착취하고 있다는 주장을 담은 대작 『유대인의 프랑스』를 집필 중이었다.[14] 당시 무명이었던 드루몽은 출판사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었으나, 유대인 혐오로 알려진 도데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도데의 지원으로 책이 출판될 수 있었다.[14] 1886년에 출간된 드루몽의 『유대인의 프랑스』[16]는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프랑스 내 반유대주의 확산에 큰 영향을 미쳤다.[17][14] 도데는 드루몽을 「인종의 계시자」라고 칭찬하기도 했다.[17]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1894년에는 드레퓌스 사건이 발생했다.

한편, 도데가 문학적 경력과 사회적 성공을 위해 자신의 프로방스 출신 배경을 의도적으로 과장했으며, 심지어 미래의 아내에게 프레데리크 미스트랄의 성공을 모방하여 자신의 「프로방스」 뿌리에 대해 거짓말을 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8]

알퐁스 도데의 장남 레옹 도데기자가 되어 극우 왕당파 단체인 액시옹 프랑세즈의 주요 활동가가 되었다.

4. 2. 정치적 성향

도데는 왕당파였으며 프랑스 공화국에 대한 열렬한 반대자였다. 그는 아들 레옹 도데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반유대주의자였다. 소설 ''르 나밥''의 주인공은 님에서 국회의원으로 선출된 유대인 정치인에게서 영감을 받았다.[6] 도데는 그와 맞서 선거 운동을 벌였지만 패배했다. 도데는 프랑스 반유대주의 연맹을 설립하고 반유대주의 신문 ''라 리브르 파롤''을 창간 및 편집한 에두아르 드루몽을 포함하여 많은 반유대주의 문학 인물들을 친구로 두었다.[7] 도데가 문학적 경력과 사회적 성공을 위해 프로방스와의 관계를 의도적으로 과장하고, 심지어 미래의 아내에게 그의 "프로방스" 뿌리에 대해 거짓말을 했다는 주장도 있다 (프레데리크 미스트랄의 성공을 본받아).[8]

5. 한국과의 관계

알퐁스 도데의 작품들은 한국에도 번역되어 소개되었으며, 일부 작품은 한국 독자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5. 1. 한국에 소개된 도데 작품

알퐁스 도데의 작품 중 한국 독자들에게도 잘 알려진 주요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 풍차방앗간에서 온 편지 (Lettres de Mon Moulin프랑스어) (1869년)
  • 프티 쇼즈 (Le Petit Chose프랑스어) (1868년)
  • 타르타랭 드 타라스콩 (Tartarin de Tarascon프랑스어) (1872년)
  • 알르의 여인 (L'Arlésienne프랑스어) (희곡, 1872년)
  • 월요일 이야기 (Contes du Lundi프랑스어) (1873년) - 대표작 마지막 수업 포함
  • 젊은 프로몽과 형 리슬레르 (Fromont jeune et Risler aîné프랑스어) (1874년)
  • 잭 (Jack프랑스어) (1876년)
  • 나바브 (Le Nabab프랑스어) (1877년)
  • 망명의 제왕들 (Les Rois en Exil프랑스어) (1879년)
  • 사포 (Sapho프랑스어) (1884년)
  • 알프스의 타르타랭 (Tartarin sur les Alpes프랑스어) (1885년)
  • 타라스콩 항 (Port-Tarascon프랑스어) (1890년)

6. 가족 관계

알퐁스 도데의 아버지는 정통왕당파이자 가톨릭 신자인 뱅상 도데(1806-1875)로, 비단 상인이었다.[18] 어머니는 아르데슈 출신의 부유한 상인 앙투안 레노의 딸인 아들린 레노(1805-1882)였다.[19][20][21] 알퐁스에게는 두 명의 형, 앙리 도데(1832-1856)와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에르네스트 도데(1837-1921)가 있었고, 여동생으로 아나 도데(1848-1936)가 있었다.

1867년 쥘리아 알라르(Julia Allard, 1844-1940)와 결혼했으며, 결혼 생활은 매우 행복했던 것으로 보인다. 쥘리아 역시 문학적 재능을 지녔으며, Impressions de nature et d'art|자연과 예술의 인상fra(1879), L'Enfance d'une Parisienne|파리 여인의 어린 시절fra(1883) 등의 저서와 칼 슈테인(Karl Steen)이라는 필명으로 쓴 문학 논문으로 알려져 있다. 도데 부부는 지적으로도 좋은 동반자 관계였다. 1888년, 도데는 신문 L'Événementfra의 편집장 에드몽 마니에(Edmond Magnier)가 자신의 아내 쥘리아를 악의적으로 묘사하자 그에게 결투를 신청하기도 했다.

알퐁스와 쥘리아 사이에는 세 자녀가 있었다. 장남 레옹 도데(1867-1942)는 작가, 저널리스트이자 우익 정치 단체 Action françaisefra의 주요 인물로 활동했다. 그는 1891년 빅토르 위고의 손녀인 잔 위고(Jeanne Hugo)와 결혼했으나 1895년 이혼했고, 1903년 '팡필'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한 저널리스트 마르트 알라르(Marthe Allard, 1878-1960)와 재혼했다. 레옹은 첫 결혼에서 아들 샤를 도데(1892-1960)를, 두 번째 결혼에서 의사이자 저널리스트인 프랑수아 도데(1915-1970), 필리프 도데(1909-1923), 클레르 도데(1918-1969)를 두었다. 차남 뤼시앵 도데(1878-1946) 역시 작가로 활동했다. 딸 에드메 도데(Edmée Daudet, 1886-1937)는 에드몽 드 공쿠르가 대부였으며, 1906년 은행가 앙리 제르맹의 아들 앙드레 제르맹(André Germain)과 결혼했으나 1908년 이혼했다.

여동생 아나 도데는 1874년 아내 쥘리아의 오빠인 레옹 알라르(Léon Allard, 1847-1925)와 결혼했다.

7. 도데와 관련된 장소

알퐁스 도데는 프랑스 남부 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고, 이후 가족과 함께 리옹으로 이주하여 학창 시절을 보냈다. 청년기에는 알레스에서 잠시 교사로 일하기도 했으나, 문학가의 꿈을 안고 파리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주로 활동하며 생을 마감했다. 파리에서는 여러 지역에 거주하며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그의 작품 세계와 밀접하게 연관된 곳으로는 프로방스 지역이 있다. 특히 파리 근교 클라마르에서 집필한 『방앗간 편지』는 퐁비에유의 풍경을 담아낸 것으로 유명하지만, 정작 도데 자신은 퐁비에유의 유명한 방앗간(물랭 생피에르)에 실제로 방문한 적은 없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파리 근교 드라베유의 샹프로제에 머물며 많은 문인들과 교류하였고, 이곳은 그의 삶에서 중요한 장소가 되었다.

7. 1. 프랑스 내



알퐁스 도데는 1840년 5월 13일 에서 정통왕당파 성향의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다.[18] 그의 아버지 뱅상 도데는 세벤 출신의 방직공이자 비단 상인이었고, 어머니 아들린 레노는 아르데슈 출신의 부유한 상인 앙투안 레노의 딸이었다.[19][20][21] 도데는 어린 시절 대부분을 님 근처의 브주스에서 보냈고, 카니베 사립학교에서 공부했다. 1849년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족이 리옹으로 이주하면서, 그는 앙페르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1855년 아버지가 완전히 파산하자 바칼로레아 시험을 포기하고, 프랑스 남부 가르주의 알레스 중학교의 복습 교사(maître d'études)가 되었다. 이 시기의 힘든 경험은 훗날 사실과 허구가 섞인 그의 자전적 소설 『소소한 이야기』(Le Petit Chose프랑스어, 1868)에 영감을 주었다. 도데는 당시 경험에 대해 "밤에 잠에서 깨어 자신이 여전히 말썽꾸러기 학생들 사이에 있다고 생각하며 공포에 떨었다"고 회상했다.

1857년 11월 1일, 교직을 그만두고 문학가의 꿈을 안고 파리로 상경하여, 이미 그곳에서 기자로 활동하던 세 살 위 형 에르네스트 도데와 합류했다. 비록 가난했지만 자유분방한 생활을 즐겼다. 그는 글쓰기를 시작하여 1858년 시집 『연인들』(Les Amoureuses프랑스어)을 출간해 호평을 받았다. 또한 카르티에 드 빌메상이 편집하던 『르 피가로』 등 여러 신문사에서 일하며 두세 편의 희곡을 썼고, 문학계에서 점차 인정받기 시작했다. 이 시기 외제니 황후 주변 여성들과의 관계로 인해 평생 그를 괴롭힌 매독에 감염되었고, 이는 심각한 이동성 운동실조증으로 발전하여 훗날 목발에 의지해야 했다.[22] 같은 해 모델 마리 리외와 관계를 맺었는데, 그녀는 도데의 소설 『사포』(Sapho프랑스어, 1884)의 모델이 되었다.[23] 1859년에는 프로방스 작가 프레데릭 미스트랄을 만나 깊은 우정을 쌓았다. 이 우정은 도데가 『아를의 여인』(1869)과 남프랑스 기질을 풍자한 소설 『뉘마 루므스탕』(Numa Roumestan프랑스어, 1881)을 발표하면서 다소 소원해지기도 했다.[24][25]

나폴레옹 3세의 측근이자 전권 장관이었던 모르니 공작은 도데의 재능을 알아보고 1860년 그를 비서관 중 한 명으로 임명했다. 도데는 모르니 공작이 1865년 사망할 때까지 이 직책을 유지했다.[2] 1861년에는 마리 리외와 함께 암스테르담 가(rue d'Amsterdam)에서 살았으나, 심각한 병을 앓고 남부 프랑스로 요양을 떠났다. 1862년에는 코르시카를 여행했다.

1865년, 파리 근교 클라마르에서 친구 폴 아렌과 함께 지내며 『방앗간 편지』(Lettres de mon moulin프랑스어)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1866년 신문 ''레베느망''에 12편이 연재되며 큰 주목을 받았다. 『방앗간 편지』는 프로방스 퐁비에유의 풍차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로 널리 알려졌지만, 정작 도데 자신은 그곳의 유명한 방앗간(물랭 생피에르)에 가본 적이 없으며 퐁비외유에 머문 기간도 몇 달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프로방스에 대한 그의 뛰어난 통찰을 보여준다. 이 작품의 일부는 폴 아렌, 레옹 아라르, 블랑쇼 드 브르나, 그리고 그의 아내 쥘리아 도데 등 다른 작가들과의 공동 작업 결과물이라는 주장도 있다. 『방앗간 편지』는 1869년에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1867년, 도데는 작가 쥘리아 알라르와 결혼했다.[2] 쥘리아는 『자연과 예술의 인상』(Impressions de nature et d'art프랑스어, 1879), 『파리 여인의 어린 시절』(L'Enfance d'une Parisienne프랑스어, 1883) 등을 저술했으며, "카를 슈테인"(Karl Steen)이라는 필명으로 문학 연구를 발표하기도 했다. 1868년에는 자전적 소설 『소소한 이야기』(Le Petit Chose프랑스어)를 출간했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같은 해 드라베유(Draveil)의 작은 마을 샹프로제(Champrosay)에 처음 머물렀고, 이곳은 이후 그가 자주 찾고 많은 문인들과 교류하는 장소가 되었다. 1871년 파리 코뮌이 선포되자 4월 25일 파리를 떠나 샹프로제로 피신했다.

1872년에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타라스콩의 타르타랭의 놀라운 모험』(Aventures prodigieuses de Tartarin de Tarascon프랑스어)과 3막 희곡 『아를의 여인』(L'Arlésienne프랑스어)을 발표했다. 1873년에는 단편집 『월요일 이야기』(Contes du lundi프랑스어)를, 1874년에는 『예술가의 아내들』(Les femmes d'artistes프랑스어)을 출간했다. 같은 해 발표한 『프롱몽과 리슬레』(Fromont jeune et Risler aîné프랑스어)는 프랑스 문학에서 새로운 주제를 다루며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2] 1876년에는 어머니의 이기심으로 고통받는 사생아의 이야기를 그린 『잭』(Jack프랑스어)을 발표하여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연민을 보여주었다.

이후 도데는 성공적인 작가로서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주요 소설로는 『나바브』(Le Nabab프랑스어, 1877), 『망명 왕들』(Les Rois en exil프랑스어, 1879), 『뉘마 루므스탕』(1881), 『사포』(1884), 『불멸자』(L'Immortel프랑스어, 1888) 등이 있다. 『불멸자』는 그가 평생 회원으로 선출되지 못했던 프랑스 아카데미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고 있다.[2] 그는 또한 『파리 30년』(Trente ans de Paris프랑스어, 1887)과 『문필가의 회상』(Souvenirs d'un homme de lettres프랑스어, 1888) 같은 회고록과 아동 문학 『아름다운 니베르네즈호』(La Belle Nivernaise프랑스어)도 남겼다. 이 작품들과 세 편의 타르타랭 시리즈[3](『타르타랭 타라스콩』, 『알프스의 타르타랭』, 『포르-타라스콩』) 그리고 단편 소설들이 그의 주요 문학적 업적을 이룬다.[2]

1879년부터 도데는 매독으로 인한 불치병인 척수 질환(척수매독, tabes dorsalis)으로 고통받기 시작했다.[4] 이 병은 점차 악화되어 말년에는 심각한 운동실조증을 겪으며 여러 차례 고통스러운 치료와 수술을 받아야 했다. 그가 겪은 고통에 관한 일기는 사후 『고통의 땅』(La Doulou프랑스어)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1882년에는 어머니 아들린이 사망했다. 1887년에는 샹프로제의 집을 구입하여 많은 문인들을 맞이했으며, 그의 친구 에드몽 드 공쿠르는 1896년 이곳에서 사망했다. 1891년에는 장남 레옹 도데빅토르 위고의 손녀 잔 위고(Jeanne Hugo)와 결혼했으나, 1895년 이혼했다. 같은 해 도데 가족은 마르셀 프루스트와 친분을 맺었다. 1896년에는 친구 폴 아렌이 53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도데는 『라 페도르』(La Fédor프랑스어)를 출간했다. 1897년에는 『아를라탕의 보물』(Le Trésor d'Arlatan프랑스어)을 출간하고 파리의 위니베르시테 가(rue de l'Université)로 이사했다.

1897년 가을 드레퓌스 사건이 터지자, 도데는 반드레퓌스 입장을 공개적으로 표명했다. 같은 해 12월 16일, 도데는 파리의 자택(41, rue de l'Université)에서 57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장례는 생트 클로틸드 성당에서 종교 의식으로 치러졌고, 페르 라셰즈 묘지에 안장되었다. 장례식에서는 에밀 졸라가 추도사를 낭독했다. 조르주 클레망소는 국장을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알퐁스 도데 주요 연표'''
연도사건
18405월 13일: 에서 비단 상인 뱅상 도데와 아들린 레노의 아들로 태어남. 형으로 앙리(1832년생)와 에르네스트(1837년생)가 있었음.
1845–1847그리스도 형제단 학교 학생.
1849도데 가족, 리옹으로 이사.
1850앙페르 고등학교 진학.
1855알레스 중학교의 복습 교사(maître d'études).
1857파리 상경.
1858시집 『Les Amoureuses프랑스어』 출간.
1859프레데릭 미스트랄 만남.
1860모르니 공작의 비서관.
1861마리 리외와 암스테르담 가에서 동거. 중병으로 남프랑스로 요양.
1862코르시카 여행.
1865클라마르에서 폴 아렌과 함께 『방앗간 편지』 집필 시작.
1866『방앗간 편지』 12편, 레베느망에 연재.
1867쥘리아 알라르와 결혼.
1868소소한 이야기』 출간. 샹프로제(드라베유) 첫 방문.
1869『방앗간 편지』 단행본 출간.
18714월 25일: 파리 코뮌 선포 후, 파리를 떠나 샹프로제로 피신.
1872『아를의 여인』, 『타라스콩의 타르타랭』 출간.
1873『Contes du lundi프랑스어』 출간.
1874『Les femmes d'artistes프랑스어』, 『Fromont jeune et Risler aîné프랑스어』 출간.
1876『Jack』 출간.
1879불치병인 척수 질환 발병.
1882모친 사망.
1887샹프로제 집 구입. 『Trente ans de Paris프랑스어』 출간.
1888『LImmortel프랑스어』, 『Souvenirs dun homme de lettres프랑스어』 출간.
1891장남 레옹 도데, 잔 위고와 결혼.
1895장남 부부 이혼. 마르셀 프루스트와 교류 시작. 『La Petite Paroisse프랑스어』 출간.
1896친구 폴 아렌 사망. 『La Fédor프랑스어』 출간. 친구 에드몽 드 공쿠르가 샹프로제 자택에서 사망.
1897『Le Trésor dArlatan프랑스어』 출간. 파리 위니베르시테 가로 이사. 가을, 드레퓌스 사건 발발 후 반드레퓌스 입장 표명. 12월 16일: 파리 자택에서 57세로 사망.



'''알퐁스 도데의 주요 거주지'''
시기지역주소
1840–1844/45사브랑 저택, 24 Grand-cours (출생지)
1844/45–1847Rue Graverol
1847–1848Route d'Avignon
1848–1849Rue Séguier
1849–1857리옹2 rue de Castries
1857 이후파리2, rue de Tournon
파리보나파르트로
파리rue de l'Ouest
1861년경파리rue dAmsterdam
파리passage des Douze Maisons (옛 allée des Veuves, 현 avenue Montaigne)
1867–1876파리24, rue Pavée (파리 4구, Hôtel d'Angoulême Lamoignon, 현 파리 시 역사 도서관)
파리18, place des Vosges
파리31, rue de Bellechasse
1880–1885파리3, avenue de lObservatoire (75006 Paris)
1897파리41, rue de lUniversité (사망지)



참조

[1] 간행물 Sketch of Alphonse Daudet https://archive.org/[...] 1898
[2] 백과사전 Daudet, Alphonse
[3] 논문 Alphonse Daudet's Tartarin Trilogy 1966
[4] 뉴스 Alphonse Daudet's Illness 1932
[5] 서적 La grande peur des bien-pensants Le livre de poche 1998
[6] 논문 Alphonse Daudet, Ecrivain Provencal? 2009
[7] 서적 Lettres de mon moulin Pocket 1998
[8] 논문 (참조: idx 6) 2009
[9] 이미지 Daudet - Sapho, 1884.djvu [[File:Daudet - Saph[...]
[10] 서적 Sappho: Between the Flies and Footlights. Arlatan's Treasure https://books.google[...] Little, Brown 2023-06-04
[11] 논문 Paternal Perspectives on Divorce in Alphonse Daudet's "Rose et Ninette" (1892) 2001-2002
[12] 서적 Mon frère et moi, パリ30年, ある文学者の思い出
[13] 인물 Albert Delpit 1849-1893
[14] 서적 (참조: idx 12) 2014
[15] 서적 (참조: idx 12) 2002
[16] 서적 La France juive Flammarion 1886
[17] 서적 (참조: idx 12)
[18] 웹사이트 Alphonse Daudet http://www.larousse.[...]
[19] 서적 Familles d'écrivains Archives & culture 1999
[20] 웹사이트 http://musee.daudet.[...]
[21] 기타 Tartarin de Tarascon 모델이 된 인물
[22] 서적 Les années d'apprentissage d'Alphonse Daudet Nizet 1951
[23] 서적 La Jeunesse d'Alphonse Daudet Nouvelles Éditions latines 1955
[24] 서적 Alphonse Daudet. Biographie Equinoxe 1994
[25] 서적 De lettres en lettres... Éditions Publibook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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