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베노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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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베노 촌은 1907년 4월 1일 고후 촌, 호비 촌, 미사사 촌이 합병하여 발족한 일본 돗토리현의 촌이다. 1957년 다이세이 촌과 합병하여 고후 정이 되면서 폐지되었다. 촌사무소는 미야시타에 설치되었고, 1912년 마치야로 이전되었다. 1947년 쇼와 천황이 국립 돗토리 병원을 방문했고, 1914년에는 행정 구역 명칭이 변경되었다. 주요 시설로는 우베 신사, 인바 국분사, 미타니 수원지 등이 있었으며, 촌립 미야노시타 초등학교와 타니 초등학교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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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베노촌 - [옛 지명]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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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폐지일 | 1957년 1월 1일 |
폐지 이유 | 신설 합병 |
폐지 상세 | 우베노촌, 다이세이촌 → 고쿠후정 |
현재 자치체 | 돗토리시 |
요미가나 | 우베노손 |
자치체 이름 | 우베노촌 |
구분 | 촌 |
도도부현 | 돗토리현 |
군 | 이와미군 |
면적 | 32.19 |
인구 | 6304 |
인구 시점 | 1956년 |
인구 출처 | 현 통계서 |
인접 자치체 | 돗토리시, 다이세이촌, 쓰노이촌, 후쿠베촌, 이와미정 야즈군고오게정, 나카시도촌 |
소재지 | 이와미군 우베노촌 오아자 마치야 309번지 |
2. 지리
현재 돗토리시의 구 고후정 서부에 해당한다. 후쿠로가와 중류역에 위치했다.
우베노촌은 현재 돗토리시의 옛 고후정 서부 지역에 해당하며, 후쿠로가와 중류역에 위치했던 촌이다. 1907년 (메이지 40년) 4월 1일, 후쿠로가와 유역의 곡창 지대였던 고후촌, 호미촌, 미사사기촌 세 촌이 합병하여 탄생했다. 합병 당시 인구 5,745명으로 돗토리현 내에서 가장 큰 규모의 촌이었다.[8]
합병 전 고후촌·호미촌·미사사기촌 지역은 후쿠로가와를 중심으로 개척된 현내 최대의 곡창 지대였으며, 돗토리시에 인접하여 생산과 소비가 잘 조화되는 지리적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8]
3. 역사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행정 효율화와 재정 기반 강화를 위한 일본 정부와 돗토리현의 정촌 합병 정책에 따라, 1957년 (쇼와 32년) 1월 1일 다이세이촌과 합병하여 고후정의 일부가 되면서 폐지되었다.[8][1][6]
주요 특산품으로는 20세기 배가 유명하다. 1914년 (다이쇼 3년) 촌내에 도입된 이후 재배가 확산되어, 쇼와 시대 초에는 돗토리현의 주요 배 산지 중 하나로 꼽혔다.[8]
3. 1. 연혁
현재 돗토리시의 옛 고후정 서부 지역에 해당하며, 후쿠로가와 중류역에 위치했다.
우베노촌은 1907년(메이지 40년) 4월 1일, 후쿠로가와 유역의 곡창 지대였던 고후촌, 호미촌, 미사사기촌이 합병하여 탄생했다. 합병 당시 세대수 806호, 인구 5,745명으로 돗토리현 내에서 가장 큰 규모의 촌이었다.[8] 촌사무소는 처음에는 미야시타에 두었으나[2], 1912년(다이쇼 원년) 7월 30일에 마치야 309번지로 이전했다[3]。 1914년(다이쇼 3년) 10월 1일에는 행정 구역 명칭에서 '촌' 글자를 빼고 '우베노촌 대자 ○○' 형식으로 변경했다[4]。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돗토리현은 행정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소규모 자치단체의 합병을 추진했다. 1951년(쇼와 26년) 9월 '정촌 규모의 합리화에 관한 요강'이 마련되었고, 1952년(쇼와 27년) 6월 이와미군 정촌 합병 촉진 심의회는 우베노촌, 세이키촌, 오카야촌의 3개 촌 합병이 타당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같은 해 7월 21일, 현은 돗토리시와 주변 20개 촌(이와미군 7개 촌, 게타카군 13개 촌)의 대규모 합병안을 권고했고, 이 안에 우베노촌 등 3개 촌도 포함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세이키촌과 오카야촌은 빠르게 합병 논의를 진행하여 같은 해 11월 다이세이촌으로 합병했다. 하지만 이는 국가가 목표로 한 규모에는 미치지 못했기에, 이후 우베노촌과의 합병 논의가 이어졌다. 결국 1956년(쇼와 31년) 12월 7일 현의 합병 권고에 따라 우베노촌과 다이세이촌은 합병하여 1957년(쇼와 32년) 1월 1일 고후정이 발족했고, 우베노촌은 폐지되었다[8][1][6]。
1947년(쇼와 22년) 11월 27일에는 쇼와 천황의 전후 순행의 일환으로 쇼와 천황이 국립 돗토리 병원을 방문하여 입원 환자들을 위문했다[5]。
특산품으로는 20세기 배가 유명하다. 1914년(다이쇼 3년), 마쓰보촌에서 처음 재배된 20세기 배를 타카오카의 가와카미 마사하루가 촌내에 도입했다. 이후 평야 주변 언덕 경사면을 개간하여 배 재배가 확산되었고, 쇼와 시대 초에는 시장 관계자들 사이에서 "동쪽의 우베노, 가운데 도고, 서쪽의 야바세"라고 불릴 정도로 주요 산지로 성장했다[8]。3. 2. 합병 과정
합병 이전 고후촌, 호미촌, 미사사기촌은 후쿠로가와를 중심으로 개척된 돗토리현 내 최대의 곡창 지대였으며, 돗토리시에 인접하여 생산과 소비가 잘 조화된 지역이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세 촌의 합병 논의가 가장 먼저 진행되었고, 1907년 (메이지 40년) '우베노'라는 이름으로 합병하여 우베노촌이 발족했다. 합병 당시 세대수는 806호, 인구는 5745명으로 현내 최대 규모의 촌이었다.[8]
제2차 세계 대전 후, 돗토리현은 재정 기반을 강화하고 행정 수준을 높이기 위해 소규모 자치단체의 합병을 추진해야 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이에 따라 1951년 (쇼와 26년) 9월, "정촌 규모의 합리화에 관한 요강"을 제정했다. 1952년 (쇼와 27년) 6월, 이와미군 정촌 합병 촉진 심의회는 우베노촌, 세이키촌, 오카야촌 3개 촌이 합병하는 것이 교통 및 경제적으로 타당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나 같은 해 7월 21일, 현은 돗토리시와 주변 20개 촌(이와미군 7개 촌, 게타카군 13개 촌)을 합병하는 권고안을 발표했는데, 여기에는 우베노촌, 세이키촌, 오카야촌이 모두 포함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전부터 합병 논의가 있었던 세이키촌과 오카야촌은 약 한 달간의 협의를 거쳐 같은 해 11월에 합병하여 다이세이촌을 발족시켰다. 하지만 이는 국가가 목표로 했던 합리화 안과는 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이후 우베노촌과의 합병 논의로 이어졌다. 결국 현은 1956년 (쇼와 31년) 12월 7일에 우베노촌과 다이세이촌의 합병을 권고했고, 이에 따라 두 촌은 합병하여 고후정이 되었다.[8][1]
4. 행정
(내용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