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우베르티노 다 카잘레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우베르티노 다 카잘레는 13세기 후반에서 14세기 초반에 활동한 프란치스코회 수도자이다. 그는 카살레 몬페라토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유학했으며, 이탈리아로 돌아와 영적 수도자들의 지도자가 되었다. 성 프란치스코 규칙에 대한 엄격한 해석을 옹호하며 교황청과 갈등을 겪었고, 저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의 나무》를 통해 교황 보니파시오 8세와 베네딕토 11세를 비판했다. 프란치스코회를 떠나 베네딕토회로 옮겼으나 파문당했으며, 이후 행적은 불분명하다. 단테 알리기에리는 《신곡》에서 그를 언급했으며,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도 등장한다.

2. 생애

우베르티노 다 카잘레는 카살레 몬페라토 출신의 프란치스코회 수사였다. 젊은 시절 제노바에서 수도 생활을 시작하여 파리에서 수학했으며, 이후 이탈리아로 돌아와 영적 수도자(Spirituals) 운동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특히 피에르-장 올리비의 영향을 받아 프란치스코회 내 청빈 논쟁에서 엄격한 해석을 주장하는 영성파의 주요 지도자로 부상했다.[1]

그는 성 프란치스코 규칙의 철저한 준수를 강조하며 당시 교황들과 수도회 지도부의 온건 노선을 비판했고, 이로 인해 교황 베네딕토 11세에 의해 설교 금지 및 추방을 당하기도 했다. 추방 기간 동안 그는 자신의 사상을 담은 주요 저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의 나무》(Arbor Vitae Crucifixae Jesu Christila)를 집필했다.[2][3] 이 책은 후대에 영향을 미쳤다.[4] 이후 아비뇽으로 소환되어 교황 앞에서 영성파의 입장을 변호했으며, 청빈 논쟁에 지속적으로 참여했다.[5][1]

말년에는 교황 요한 22세의 허가를 받아 베네딕토회로 이적했으나[1], 여전히 프란치스코회 문제에 관여하다 파문당하고 이단 혐의까지 받게 되었다. 루트비히 4세의 보호 아래 독일로 피신한 것으로 추정되며, 1328년 이후의 행적은 명확하지 않다. 후대에 프라티첼리에 의해 순교자로 추앙받았고,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에도 언급되었다.[6]

2. 1. 초기 생애와 프란치스코회 입회

우베르티노 다 카잘레는 카살레 몬페라토에서 태어났다.[1] 그는 1273년 제노바 지방의 한 수도원에서 프란치스코회 수도복을 입고 수도 생활을 시작했다.[1] 이후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파리로 보내져 9년 동안 머물렀고, 학업을 마친 후 이탈리아로 돌아왔다.[1] 1285년에는 로마의 성지를 순례했으며, 그 후 리에티 근처의 그레초로 가서 당시 영적 수도자들의 지도자로 여겨졌던 파르마의 요한을 만났다.[1] 이 만남 이후 그는 토스카나 지방에 정착했고, 1287년에는 피렌체에 자리를 잡았다. 피렌체에서 그는 피에르-장 올리비의 사상적 영향을 받았다.[1] 그는 피렌체의 산타 크로체에서 강사직을 맡기도 했지만, 몇 년 후 설교에 전념하기 위해 그만두고 주로 피렌체에서 활동했다.[1] 그는 뛰어난 재능을 지녔으나 다소 괴짜였고 불안정한 면모를 보이기도 했으며, 곧 토스카나 지역 영적 수도자들의 지도적인 인물로 부상했다.[1]

2. 2. 영성파 지도자와 교황과의 갈등

우베르티노는 피에르-장 올리비의 영향을 받아 토스카나 지역 프란치스코회 영성파(la)의 지도자가 되었다.[1] 영성파는 성 프란치스코 규칙의 엄격한 해석과 철저한 청빈을 강조했으며, 수도회 운영과 규칙 해석에서 온건한 입장을 취했던 교황 그레고리 9세, 교황 니콜라 3세 등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또한 요아킴 피오레의 가르침을 이단으로 규정한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우베르티노는 교황 베네딕토 11세에게 소환되어 페루자에서의 설교를 금지당하고 몬테 알베르나의 수도원으로 추방되었다. 추방 기간 동안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의 나무》(Arbor Vitae Crucifixae Jesu Christila)를 저술했는데, 이 책에서 성 프란치스코 규칙과 그리스도의 청빈에 대한 문자 그대로의 해석을 옹호했다. 그는 또한 영성파의 또 다른 반대자였던 교황 보니파시오 8세와 베네딕토 11세를 묵시록에 등장하는 첫 번째와 두 번째 짐승으로 묘사하기도 했다.[3] 이 책은 빈데스하임 수도회 등에서 널리 읽혔으며, 스호벤의 요한의 저작에도 영향을 미쳤다.[4]

1307년, 우베르티노는 나폴레오네 오르시니 프랑지파니 추기경에 의해 안코나 지역 영성파의 보호자로 지명되었으나, 보니파시오 8세의 교황 선출 이후 실질적인 보호는 오래가지 못했다. 1308년 오르시니 추기경이 독일로 떠나자 우베르티노는 프랑스로 이주했다.[1]

1312년부터 1313년까지 그는 다른 영성파 지도자들과 함께 아비뇽으로 소환되어 수도회 내 두 파벌(영성파와 온건파) 간의 문제를 교황 앞에서 논의했다.[5] 이 과정에서 우베르티노는 수도회의 온건파 다수를 비판하며 영성파를 위한 별도의 수도원과 관구를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다만 청빈 문제에 대해서는 우베르티노의 주장이 일부 반영되어 교황 칙서 《낙원에서 나왔다》(Exivi de paradisola, 1312년 5월 6일)가 발표되는 계기가 되었다.[1]

우베르티노는 자코모 콜론나 추기경과 함께 지내다가 1317년 교황 요한 22세의 허가를 받아 프란치스코회를 떠나 베네딕토회의 젬블루 수도원으로 옮겼다. 그러나 프란치스코회 내부 갈등에 계속 관여했다는 이유로 1318년에 파문당했다. 1322년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청빈에 관한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 간의 논쟁에 대해 의견을 제시하기 위해 다시 아비뇽으로 소환되었다. 그는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개인 재산은 거부했지만, 종교적 사명을 위해 필요한 재화와 돈은 사용했다고 주장했으며, 이러한 입장은 교황 요한 22세에게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우베르티노는 1325년까지 오르시니 추기경의 시종으로 아비뇽에 머물렀으나, 그 해 자신의 스승인 피에르-장 올리비의 사상을 옹호했다는 이유로 이단 혐의를 받았다. 교황은 프란치스코회 총장에게 우베르티노를 이단자로 체포하라고 명령했지만, 그는 이를 피해 독일로 가서 루트비히 4세 황제의 보호를 요청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328년에는 황제의 로마행에 동행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후 우베르티노의 행적은 역사 기록에서 명확히 나타나지 않는다. 일각에서는 우베르티노가 1332년 베네딕토회를 떠나 카르투시오회에 입회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15세기 프라티첼리(Fraticelli)는 우베르티노를 성인이자 순교자로 추앙했으며, 단테 알리기에리는 그의 작품 《신곡》에서 프란치스코회의 더 엄격한 규칙을 지지하는 인물로 우베르티노를 언급했다.[6]

2. 3. 베네딕토회 이적과 말년

자코모 콜론나 추기경과 함께 머물던 우베르티노는 1317년 교황 요한 22세로부터 프란치스코회를 떠나 베네딕토회 소속의 젬블루 수도원으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받았다.[1] 그러나 이후에도 프란치스코회 내부의 갈등에 계속해서 관여하였고, 이로 인해 1318년에는 파문을 당하기도 했다.

1322년, 우베르티노는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빈곤 문제를 둘러싼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 사이의 논쟁에 대해 의견을 제시하기 위해 교황에 의해 다시 아비뇽으로 소환되었다. 그는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개인적인 모든 재산을 거부했지만, 종교적 사역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재화와 돈은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교황 요한 22세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우베르티노는 1325년까지 나폴레오네 오르시니 추기경의 시종으로 아비뇽에 머물렀다. 그러나 같은 해, 자신의 스승이었던 피에르-장 올리비의 유죄 판결을 변호했다는 이유로 이단 혐의로 고발되었다. 교황은 프란치스코회 총장에게 우베르티노를 이단자로 체포하라고 명령했지만, 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이 4세의 보호를 받기 위해 독일로 피신한 것으로 추정된다. 1328년에는 루이 4세가 로마로 가는 길에 우베르티노가 동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우베르티노의 행적은 역사 기록에서 명확히 나타나지 않는다. 일각에서는 그가 1332년에 베네딕토회를 떠나 카르투시오회에 합류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15세기의 프라티첼리들은 그를 성인이자 순교자로 추앙했다. 단테 알리기에리는 그의 작품 《신곡》에서 프란치스코회의 엄격한 규칙을 지지했던 인물로 우베르티노를 언급하기도 했다.[6]

3. 사상과 영향

(내용 없음)

4. 대중문화 속의 우베르티노

우베르티노는 움베르토 에코의 역사 소설 《장미의 이름》(1980)과 그 영화 각색에서 중요하지는 않지만 중요한 등장인물로 등장한다. 영화에서는 윌리엄 히키가 우베르티노 역을 맡았다.

5. 저서


  •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생명나무 (1485; 재판, 토리노: 보테가 데라스모, 1961)

참조

[1] 웹사이트 Golubovich, Girolamo. "Ubertino of Casale." The Catholic Encyclopedia http://www.newadvent[...] Robert Appleton Company 2019-12-31
[2] 서적 Poverty in The Tree of the Crucified Life of Jesus by Ubertino da Casale Routledge 2016
[3] 서적 Antichrist: Two Thousand Years of the Human Fascination with Evil Columbia University Press 2000
[4] 간행물 Ubertino da Casale and the Devotio Moderna https://poj.peeters-[...] 2009-09
[5] 학술지 Ubertino da Casale and a Variant Reading https://www.jstor.or[...] 1922
[6] 문서 Paradiso, Canto XII, verses 121-126
[7] 웹사이트 Golubovich, Girolamo. "Ubertino of Casale." The Catholic Encyclopedia http://www.newadvent[...] Robert Appleton Company 2019-12-31
[8] 서적 Poverty in The Tree of the Crucified Life of Jesus by Ubertino da Casale Routledge 2016
[9] 서적 Antichrist: Two Thousand Years of the Human Fascination with Evil Columbia University Press 2000
[10] 간행물 Ubertino da Casale and the Devotio Moderna https://poj.peeters-[...] 2009-09
[11] 학술지 Ubertino da Casale and a Variant Reading https://www.jstor.or[...] 1922
[12] 문서 Paradiso, Canto XII, verses 121-126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