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에스기 시게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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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에스기 시게사다는 요네자와 번의 9대 번주로, 1720년에 태어나 1798년에 사망했다. 1746년 가독을 상속받고 쇼군 도쿠가와 이에시게로부터 이름을 받아 종4위하, 시종, 오이다이노카미에 서임되었다. 재정난 속에서 양자 우에스기 하루노리(요잔)를 맞이하고, 1767년 은거 후에는 하루노리의 번정 개혁을 지원했다. 그는 정무에는 크게 관여하지 않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겼으며, 노가쿠를 애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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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에스기 시게사다 | |
---|---|
기본 정보 | |
씨명 | 우에스기 씨 |
이름 | 우에스기 시게사다 |
원래 이름 | 나오치요 |
다른 이름 | 가쓰마사 |
![]() | |
시대 | 에도 시대 중기 |
출생 | 교호 5년 7월 6일 (1720년8월 9일) |
사망 | 간세이 10년 3월 26일 (1798년5월 11일) |
계명 | 도가쿠인덴 호인 대승도 간신 |
관위 | 종4위하, 오이노카미, 시종 |
막부 | 에도 막부 |
주군 | 도쿠가와 이에시게 → 이에하루 |
번 | 데와요네자와 번 번주 |
가계 | |
씨족 | 우에스기 씨 |
아버지 | 우에스기 요시노리 |
어머니 | 야마나카 씨 |
양아버지 | 우에스기 무네후사 |
형제 | 무네노리, 무네후사, 하타케야마 요시노리, 시게사다 |
배우자 | 정실: 도쿠가와 무네카쓰 딸·도요히메 측실: 이바라키 씨, 오가와 씨 (오세이の方), 하시모토 씨 |
자녀 | 딸, 사치히메 (우에스기 하루노리 정실, 어머니는 도요히메), 가쓰히로, 하루히로, 가쓰사다, 나이토 노부마사 양자: 하루노리 |
요네자와 번주 | |
대수 | 8대 |
재임 기간 | 1746년 ~ 1767년 |
전임 | 우에스기 무네후사 |
후임 | 우에스기 하루노리 |
기타 정보 |
2. 생애
교호 5년(1720년), 우에스기 요시노리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1746년 가독을 상속받았다. 1748년 도쿠가와 무네카쓰의 딸 도요히메와 결혼했다.
요네자와 번은 1755년 대흉작, 1760년 아오소 소동 등으로 재정난이 심각했다. 번정은 세이노 나이젠 히데스케, 모리 헤이자에몬 도시자네 등이 주도했으나, 1763년 모리 헤이자에몬은 다케마타 도쓰나에게 자살을 강요당했다.
1767년 시게사다는 우에스기 하루노리(요잔)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거, 1798년 79세로 사망했다. 이후 요네자와 번은 하루노리의 개혁으로 재건된다.[1]
2. 1. 가독 상속과 초기 번정
교호 5년(1720년), 5대 번주 우에스기 요시노리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교호 19년(1734년)에 맏형 무네노리가, 엔쿄 3년(1746년)에 둘째 형 무네후사가 후사 없이 사망했고, 셋째 형 사다치요(하타케야마 요시노리)는 이미 고케하타모토하타케야마 가문를 잇고 있었기 때문에, 엔쿄 3년(1746년) 9월 26일에 가독을 상속했다. 같은 해 12월 5일에 원복을 치르고, 에도 막부 9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시게의 편휘를 받아 시게사다(重定)로 이름을 짓고, 종4위하, 시종, 오이다이노카미에 서임되었다. 칸엔 원년(1748년)에 오와리 번 8대 번주 도쿠가와 무네카쓰의 딸 도요히메(豊姫)를 아내로 맞이했다.요네자와 번에서는 감봉이 잇따랐고, 4대 번주 쓰네요시의 말기 양자로서 습봉을 인정받는 대가로 15만 석으로 감봉되었지만, 번사 소환을 하지 않아 번 재정은 극도로 열악했다. 칸엔 3년(1750년) 이후부터 번사로부터의 반지 대여가 상례화되었다.
호레키 3년(1753년)에 무라야마 군의 예탁령을 에치고 국이와후네 군으로 변경하였다. 한편, 도에이산 간에이 사 주당 보수를 막부로부터 명받아 공사비 57400량을 소비했다. 호레키 5년(1755년)에는 번 내에 대흉작이 덮쳐 7만 5820석여의 피해를 입었고, 성 아래에서 하라카타슈에 선동된 백성에 의한 부상 집 털기 사건도 발생했다. 호레키 10년(1760년)에는 아오소 소동이 일어났다.
번정은 번주 시게사다의 신임을 얻었던 봉행 필두 세이노 나이젠 히데스케가, 세이노가 은퇴 후에는 요이타조 출신의 측근으로, 후에 군대소 머리 겸 고쇼 머리가 된 모리 헤이자에몬 도시자네 등에 의해 좌지우지되었지만, 영민들의 반발을 사 호레키 13년(1763년)에 모리 헤이자에몬은 다케마타 도쓰나에게 불려가 자살했다. 그리고 그 일파는 숙청되었다. 그럼에도 번 재정의 어려움은 변함없이, 호레키 10년(1760년)에 다케마타가 내놓은 진언에 따라, 오와리 번[1]을 통해 막부에 번토 반환을 한 후 영주를 그만두겠다는 것을 상담했고, 호레키 14년(1764년) 1월에는 이를 간언받아 철회했다.
이러한 재정 상황 속에서, 호레키 9년(1759년)에 휴가 국다카나베 번 6대 번주 아키즈키 타네요시의 차남 마쓰사부로를 양자로 삼는 내약을 맺고, 호레키 10년(1760년)에 친아들이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양자로 맞이했다. 이가 우에스기 하루노리(요잔)이다. 또한, 번의 와라시나 쇼하쿠의 권유로 호소이 헤이슈를 초빙하여, 메이와 원년(1764년)에는 하루노리와 함께 강의를 들었다.
2. 2. 재정난 심화와 대외 관계
요네자와 번은 계속된 감봉으로 인해 재정 상황이 매우 어려웠다. 4대 번주 쓰네요시가 말기 양자로 번주 자리를 이은 대가로 영지가 15만 석으로 줄었지만, 번사를 해고하지 않아 재정난이 심각했다. 1750년부터는 번사들로부터 급료의 일부를 빌리는 것이 일상화되었다.[1]1753년에는 무라야마 군의 예탁령을 에치고 국이와후네 군으로 변경했다. 한편, 에도 막부로부터 도에이산 간에이 사의 수리를 명받아 5만 7400량의 공사비를 지출했다. 1755년에는 번 내에 큰 흉작이 들어 7만 5820석 이상의 피해를 입었고, 성 아래에서는 하라카타슈에게 선동된 백성들이 부유한 집을 털기도 했다. 1760년에는 아오소 소동이 발생했다.
번의 정치는 번주 시게사다의 신임을 얻은 세이노 나이젠 히데스케가 주도했고, 세이노가 은퇴한 후에는 모리 헤이자에몬 도시자네 등이 권력을 잡았지만, 백성들의 반발을 사 1763년에 모리 헤이자에몬은 다케마타 도쓰나에게 자살을 강요당했다. 그 일파는 숙청되었지만, 재정난은 여전했다. 1760년 다케마타의 건의에 따라 오와리 번[1]을 통해 막부에 영지를 반납하고 번주 자리에서 물러나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1764년 1월에 이를 철회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759년, 휴가 국다카나베 번 6대 번주 아키즈키 타네요시의 차남 마쓰사부로(후의 우에스기 하루노리)를 양자로 들이기로 하고, 1760년 친아들이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양자로 맞이했다. 또한, 번의 와라시나 쇼하쿠의 권유로 호소이 헤이슈를 초빙하여, 1764년에는 하루노리와 함께 강의를 들었다.
2. 3. 양자 하루노리(요잔) 맞이와 번정 개혁 지원
호레키 9년(1759년), 우에스기 시게사다는 휴가 국다카나베 번 6대 번주 아키즈키 타네요시의 차남 마쓰사부로를 양자로 삼기로 내정하고, 호레키 10년(1760년)에 친아들이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마쓰사부로를 양자로 맞이했다. 이가 우에스기 하루노리(요잔)이다.[1] 번의 와라시나 쇼하쿠의 권유로 호소이 헤이슈를 초빙하여, 메이와 원년(1764년)에는 하루노리와 함께 강의를 들었다.메이와 4년(1767년) 4월 24일, 시게사다는 병을 이유로 하루노리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거했다. 이후 모리 헤이자에몬을 참살한 다케마타 도쓰나 등을 중용한 하루노리의 개혁으로 요네자와 번은 재건되게 된다.
2. 4. 은거 생활과 죽음
메이와 4년(1767년) 4월 24일, 다병을 이유로 양자인 우에스기 하루노리(요잔)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거했다. 이후 다케마타 도쓰나 등을 중용한 하루노리의 개혁으로 요네자와 번은 재건되게 된다. 시게사다는 은거 후 요네자와에서 오오도노사마(大殿様)라고 불리며 은거소 난잔칸(南山館)에서 살았다. 텐메이 3년(1783년) 난잔칸이 소실되자, 텐메이 5년(1785년) 카이라쿠칸(偕楽館)을 신축하여 그곳으로 옮겼다. 이 은거소의 화재와 신축은 텐메이의 기근 및 하루노리의 은거소 건설과 겹쳐 번 재정에 타격을 주었다.[1]간세이 10년(1798년), 7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3. 인물 및 평가
우에스기 시게사다는 정무에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고, 기본적으로 정치를 가신들에게 일임했다. 화려한 것을 좋아하여 재정이 더욱 압박을 받아 파탄 직전이 되었다. 은거 후에도 막대한 은거료를 받고 화려한 생활을 계속했다. 요잔(하루노리)의 검약 개혁도 시게사다에게는 미치지 못했고, 검약에 힘쓰는 번 내에서 시게사다만 돈을 물 쓰듯 하는 상태였다. 한편 요잔(하루노리)의 생활비는 기존 요네자와 번주의 7분의 1이었고, 시게사다의 3분의 1이었지만, 반발하지 않고 시게사다에게 효도를 다했다고 한다.[2]
곤고류노가쿠를 애호했다.
3. 1. 정무에 대한 태도
시게사다는 정무에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고, 기본적으로 정치를 가신들에게 일임했다. 은거 후에도 정치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지만, 요잔(하루노리)가 엄격한 검약령을 내리고 가신단으로부터 엄청난 반발을 받았을 때 (반대파 가신 이모카와 노부치카가 요잔(하루노리)의 바지 자락을 잡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시게사다는 "양자라고는 하지만 내 자식에게 무례하다"라며 격노했다. 개혁의 저항 세력이었던 이로베 테루나가나 센자카 타카아츠를 치거폐문하고, 스다 미츠모토, 이모카와 노부치카에게 할복을 명하는 등 엄중한 처벌을 내렸다. 그리고 개혁의 브레인 호소이 헤이슈를 질투하여 저항 세력의 브레인이었던 와라시나 릿타쿠를 참수(7가 소동[2])하는 등 요잔(하루노리)의 조치를 지지하며 개혁에 은밀히 협력했다. 또한, 차남인 하루히로가 번주가 되었을 때에도 은거한 요잔(하루노리)에게 번정 후견을 요청했다고 한다.화려한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재정은 더욱 압박을 받아 파탄 직전이 되었다. 은거 후에도 막대한 은거료를 받고 화려한 생활을 계속했다. 요잔(하루노리)의 검약 개혁도 대전인 시게사다에게는 미치지 못했고, 검약에 힘쓰는 번 내에서 시게사다만 돈을 물 쓰듯 하는 상태였다. 한편 요잔(하루노리)의 생활비는 기존 요네자와 번주의 7분의 1이었고, 시게사다의 3분의 1이었지만, 반발하지 않고 시게사다에게 효도를 다했다고 한다. 덴메이|덴메이일본어 7년(1787년)에 시게사다가 위중해지자, 요잔(하루노리)은 친아버지의 상중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에도에서 요네자와로 내려와 간병했다고 한다.
곤고류노가쿠를 애호했다. 이 때문에, 요잔(하루노리)은 안에이|안에이일본어 7년(1778년)에 에도의 곤고류 종가인 곤고 사부로를 요네자와로 초빙했다. 또한 번 재정 재건을 위해, 번주 가문 가재 매각 이야기가 나왔지만, 이때 보물 창고와 노악 창고 중 어느 쪽을 먼저 매각 가재 대상으로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벌어졌고, 요잔(하루노리)은 "노악 창고는 시게사다의 완물이니 보물 창고 쪽이 먼저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3. 2. 사치스러운 생활과 재정 악화
우에스기 시게사다는 정무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가신들에게 정치를 맡겼다. 화려한 것을 좋아하여 재정이 악화되어 파탄 직전이었다. 은거 후에도 막대한 은거료를 받으며 화려한 생활을 계속했다. 아들인 요잔(하루노리)가 검약 개혁을 추진했지만, 시게사다에게는 미치지 못했다. 요잔(하루노리)은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도 시게사다에게 효도를 다했다고 한다.[2]덴메이 7년(1787년)에 시게사다가 위독해지자, 요잔(하루노리)은 에도에서 요네자와로 내려와 간병했다.
시게사다는 곤고류(金剛流) 노가쿠(能楽)를 매우 좋아했다. 안에이 7년(1778년), 요잔(하루노리)은 에도의 곤고류 종가인 곤고 사부로(金剛三郎)를 요네자와로 초빙했다. 번 재정 재건을 위해 번주 가문 가재 매각 논의가 있었는데, 요잔(하루노리)은 "노악 창고는 시게사다가 아끼는 물건이니 보물 창고를 먼저 매각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3. 3. 요잔과의 관계
시게사다는 정무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고 가신들에게 정치를 맡겼다. 은거 후에도 정치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으나, 양자인 요잔(하루노리)이 엄격한 검약령을 내리고 가신들의 큰 반발을 받았을 때, "양자이지만 내 자식에게 무례하다"라며 크게 화를 냈다. 시게사다는 개혁에 반대하는 이로베 테루나가, 센자카 타카아츠를 치거폐문 처벌하고, 스다 미츠모토, 이모카와 노부치카에게는 할복을 명하는 등 엄중한 처벌을 내렸다. 또한 개혁의 핵심 인물인 호소이 헤이슈를 질투하여 반대파의 중심이었던 와라시나 릿타쿠를 참수(7가 소동[2])하는 등 요잔의 개혁을 은밀하게 지원했다.시게사다는 화려한 생활을 좋아하여 번 재정을 더욱 악화시켰다. 은거 후에도 많은 은거료를 받으며 사치스러운 생활을 계속했고, 요잔의 검약 개혁도 시게사다에게는 영향을 주지 못했다. 요잔은 자신의 생활비가 이전 번주의 7분의 1, 시게사다의 3분의 1 수준이었음에도 불만을 제기하지 않고 시게사다에게 효도를 다했다. 1787년 시게사다가 위독해지자 요잔은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에도에서 요네자와로 내려와 간병했다.
시게사다는 곤고류노가쿠를 매우 좋아했다. 1778년 요잔은 에도의 곤고류 종가인 곤고 사부로를 요네자와로 초빙했다. 번 재정 재건을 위해 번주 가문의 가재를 매각해야 했을 때, 요잔은 "노악 창고는 시게사다가 아끼는 물건이니 보물 창고를 먼저 매각해야 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4. 가계도
관계 | 이름 |
---|---|
아버지 | 우에스기 요시노리 |
어머니 | 야마나카 씨 |
양아버지 | 우에스기 무네후사 |
정실 | 토요히메 - 도쿠가와 무네카츠의 딸 |
측실 | 이바라키 씨 |
측실 | 오세노카타 - 오가와 씨 |
장남 | 우에스기 카츠히로 |
차남 | 우에스기 하루히로 - 요네자와 번 10대 번주 |
삼남 | 우에스기 카츠사다 - 요네자와 신덴 번 3대 번주 |
측실 | 하시모토 씨 |
사남 | 나이토 노부마사 - 나이토 노부요시의 양자 |
양자 | 우에스기 하루노리 - 아키즈키 타네미의 차남 |
차녀 | 사치히메 - 우에스기 하루노리의 정실 |
5. 주요 가신
다음은 호레키 13년(1763년)의 에도 무감인 『대무감』에 기록된 우에스기 시게사다의 주요 가신 명단이다. 【역직】은 무감에 기재된 역직이며, (역직)은 『우에스기 요잔의 모든 것』(신진물왕래사)에서 보충된 내용이다.
이름 | 역직 |
---|---|
혼조 야마토 | |
나가오 곤시로 | |
나카조 스오 | |
센자카 쓰시마 | 봉행 |
스다 이즈 | |
이로베 덴젠 | 에도 가로 |
야스다 나이쇼 | |
다케마타 미사쿠 | 에도 가로 |
이치카와 분고 | |
세이노 나이젠 | |
이모카와 누이도노 | 봉행 |
시마즈 겐바 | |
히라바야시 구라토 | |
다케마타 간게유 | |
히로이 사쿄 | 에도 가로 격, 후에 에도 가로 |
【요닌】 | |
모리 고멘 | 코쇼가시라 |
모리 헤이에몬 | 군대 소두 및 코쇼가시라 겸무 |
사이토 헤이마 | |
시모 오사이에몬 | |
구로카와 고헤이타 | |
【성사】 | |
사사오 히코고로 | |
후나하시 겐타자에몬 | |
【우에스기 나오마루 부역】 | |
고사카 다이토 | 덴야쿠 |
다데누마 헤이타 | 소쿠야쿠 및 헤야즈미 요닌 |
참조
[1]
문서
徳川宗勝
[2]
문서
別名は七家訴状事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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