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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에스기 요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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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에스기 요잔(1751년~1822년)은 에도 시대의 다이묘로, 요네자와 번의 9대 번주이다. 그는 다카나베 번의 아키즈키 타네미쓰의 차남으로 태어나, 10세에 요네자와 번주 우에스기 시게사다의 양자가 되었다. 요잔은 가독을 상속받은 후,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리는 요네자와 번을 개혁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지출을 줄이고 검소한 생활을 실천하는 한편, 새로운 산업을 장려하고 교육을 강화하는 등 다양한 개혁 정책을 추진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요네자와 번의 재정을 회복시켰으며, 그의 개혁은 후대에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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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에스기 요잔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우에스기 요잔
가쓰오키 → 하루노리
별명가명: 나오마루
출가호: 요잔
계명겐토쿠인덴 쇼오 분신 다이코지
묘소야마가타현요네자와시의 마쓰가사키 신사, 우에스기가 어묘
관위종4위하
단정다이히쓰
시종
에치젠노카미
증 종3위
막부에도 막부
주군도쿠가와 이에하루
데와요네자와 번주
씨족아키즈키 씨 → 우에스기 씨
부모아버지: 아키즈키 다네미쓰
어머니: 구로다 나가사다 딸・하루히메
양아버지: 우에스기 시게사다
형제자매아키즈키 다네시게
하루노리 (요잔)
사가라 아키나가
나카조 노부요시
기타
배우자정실: 고히메 (우에스기 시게사다의 딸)
측실: 오토요노카타 (우에스기 가쓰노부의 딸)
자녀아키타카
히로노스케
양자: 하루히로
직위
요네자와 번주9대: 1767년 ~ 1785년
이전우에스기 시게사다
이후우에스기 하루히로
출생과 사망
출생일1751년 9월 9일
출생지에도, 일본
사망일1822년 4월 2일
가계
아버지아키즈키 다네미쓰
배우자고, 우에스기 시게사다의 딸

2. 인물 소개

다카나베번주 아키즈키 다네미쓰(秋月種美)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외할머니가 4대 요네자와 번주인 우에스기 쓰나노리의 딸이었다. 이 인연으로 10세에 8대 요네자와 번주 우에스기 시게사다의 딸과 결혼하여 사위를 후계자로 하는 서양자가 되었다.

에도 시대 중기에는 지방 재정이 궁핍해져 주민들이 마을에서 도망치거나, 갓 태어난 아기를 죽이는 '마비키(間引き, 솎아내기)'까지 자행하는 등 재정 악화를 겪는 번이 많았다. 우에스기씨의 영지는 우에스기 겐신센고쿠 시대에는 120만 석을 자랑했지만,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가담한 우에스기 가게카쓰 대에 대폭 박탈당해 30만 석으로 줄어들었다. 이후 몇 대에 걸쳐 15만 석으로 줄어들었고, 우에스기 요잔이 양자가 되어 17세 때 가독을 상속받게 되었다.

당시 요네자와 번은 영지가 줄었음에도 가신들의 수에는 변화가 없어 재정이 어려웠다. 거기다 8대 번주 시게사다는 사치스러운 인물이어서 막부에 영지 반납을 고려할 정도였다. 농사 외에 별다른 생산이 없어 흉년에는 대책이 없었고, 주민들 사이에는 갓난아이를 죽이는 풍습도 존재하는 등 여러 문제가 있었다. 이에 요잔은 스스로 검소한 식사를 하며 솔선수범하였고, 다른 번의 기술자를 초빙해 작물 재배를 가르쳐 특산물을 생산하도록 하였다. 가신들의 영지에도 작물을 심도록 하였으며, 신분을 불문하고 학문을 배우게 하는 등 실용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기득권 세력과의 충돌을 고려해 정치적 기반에도 신경을 썼다.

요잔의 개혁 성과는 바로 나타나진 않았지만, 35세에 은거해 번주에서 물러나 후견인이 되어서도 지지를 받아 꾸준히 개혁을 추진했다. 은거 시기에 그 동안의 노력이 결실을 보았고, 요잔 사후에는 번 재정이 막부에서 칭찬할 정도가 되었으며, 주민들의 생활도 나아졌다. 52세에 요잔이란 법명으로 개명하였고, 72세까지 살았다. 그가 쓴 전국의 사(伝国の辞)란 글은 지방영주로서의 마음가짐을 담은 내용으로, 메이지 유신 때까지 우에스기가의 가훈으로 이어진다.

하루노리휴가국 다카나베 번의 아키즈키 타네미쓰의 차남이었다. 어머니는 요네자와 번의 4대 다이묘인 우에스기 쓰나노리의 손녀였다. 어린 시절 이름은 "마쓰사부로"(松三郎)와 "나오마쓰"(直松)였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할머니 손에서 자랐으며, 이는 요네자와와의 유대를 강화했다. 열 살 때 우에스기 시게사다에게 입양되었는데, 시게사다는 아들이 없었다. 1763년 요네자와에 도착한 후, 신유학 학자인 호소이 헤이슈의 제자가 되었고, 그의 가르침은 요잔의 정치 철학과 통치 관점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 1766년 겐푸쿠 의식을 치르고 쇼군 도쿠가와 이에하루로부터 이름에 "하루"(春)의 한자를 받았다. 1767년, 요네자와의 다이묘가 되었다.

요잔이 물려받은 번은 약 100년 동안 심각한 부채에 시달리고 있었다. 시게사다는 번을 도쿠가와 막부에 반환하는 것까지 고려했다. 그러나 장인의 설득으로 다이묘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부채 규모는 20만 료를 넘어섰는데, 번의 명목상 고쿠다카가 15만 코쿠에 불과해 극복하기 어려워 보였다. 게다가 번은 역사적인 이유로 다른 번에 비해 봉급을 받는 가신들의 비율이 매우 높았다. 요네자와의 초기 통치자들이 세키가하라 전투 이전 100만 코쿠를 초과했을 때부터 충성스럽게 봉사한 가신들의 수를 줄이기를 꺼렸기 때문이다. 번의 재정적 어려움에 더해, 우에스기 시게모리의 재임 기간 동안 번은 막부로부터 에도에 있는 간에이 사의 사찰을 재건하는 비용을 지불하도록 강요받았고, 1755년에는 심각한 홍수 피해를 입었다. 시게모리는 자존심 때문에 사치를 줄이기를 거부했다.

요잔은 엄격한 재정적 제약을 가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비단 옷 대신 면 옷을 입고 식사는 국 한 그릇과 채소 한 접시로 하는 모범을 보였다. 생활비를 연간 1500 료에서 209료로 줄였고, 하녀의 수를 50명에서 9명으로 줄였다. 그는 모든 가신을 유지하기로 결정했지만 모든 봉급을 이전 수준의 6분의 1로 삭감했다. 몇몇 가로들의 반대에 직면하여 그는 그들의 처형을 명령했다. 이러한 노력들이 효과를 보이기 시작하자마자, 번은 막부로부터 에도 성의 서쪽 보루를 재건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그는 번의 모든 마을에 쌀 창고를 건설했고, 덴메이 시대(1781–1789)에 일본을 휩쓴 기근에서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2] 요잔은 또한 직조, 도자기, 제지 등 새로운 산업을 장려하고, 파라핀, 생사, 아마 등 기존 사업을 장려하는 정책을 수립했다. 그는 각 가구에 옻나무를 일정 수 이상 심어 해당 산업을 확립하도록 요구했고, 번의 많은 사무라이들을 농부로 전환시켰다.[3] 교육은 국가를 부유하게 만드는 데 필요한 인재를 창출하는 데 필수적이었고, 그는 재정적 제약으로 인해 문을 닫았던 한 학교를 다시 열고 에도에서 학자들을 초빙하여 가르치게 했다. 그는 또한 네덜란드에서 최신 의학 지식을 가르치는 의과대학을 설립했다. 또 다른 정책 변화는 가신과 사무라이를 동원하여 관개 도랑을 파고 제방을 수리함으로써 쌀밭에 충분한 물을 공급하는 것을 보장했다. 계급이 아닌 능력에 기반한 행정 개혁과 인사 승진은 낭비를 제거하고 공직을 간소화했다. 이러한 다양한 조치들의 결과로 요네자와는 상당히 번영하게 되었고, 1823년까지 부채의 전액이 상환되었다. 1830년, 요잔의 사망 후 10년도 채 되지 않아, 요네자와는 막부에 의해 모범적인 통치를 하는 번으로 공식적으로 선언되었다.

그는 아들 우에스기 하루히로에게 보낸 편지에서 통치와 봉건제 영주의 역할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으며, 그의 자기 훈련에 대한 견해는 일본 문화에서 널리 알려져 있다.[5]

2. 1. 가계 및 성장 배경

다카나베번주 아키즈키 다네미쓰(秋月種美)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외할머니가 4대 요네자와 번주인 우에스기 쓰나노리의 딸이었던 인연으로 10세에 8대 요네자와 번주 우에스기 시게사다의 딸 유키(幸)와 결혼하여 서양자(婿養子, 사위를 후계자로 하는 것)가 되었다.

휴가국다카나베번 6대 번주 아키즈키 타네미의 차남으로, 어머니는 지쿠젠국아키즈키번 4대 번주 구로다 나가사다의 딸인 하루히메이다. 외할머니인 토요히메가 요네자와번 4대 번주 우에스기 쓰나노리의 딸이다. 이 인연으로 10세에 요네자와번 8대 번주 시게사다(쓰나노리의 장남 요시노리의 넷째 아들로, 하루히메의 사촌)의 양자가 된다.

형제 중 형인 아키즈키 타네시게는 다카나베번주를 이었다. 동생 중 다른 다이묘가 된 자로는 히토요시번주 사가라 테루나가가 있으며, 요잔과 마찬가지로 어릴 때 사가라 가문에 양자로 들어갔지만, 일찍 요절했다.[35]

정실은 시게사다의 딸인 사치히메(재종고모에 해당한다). 측실 오토요노카타(쓰나노리의 여섯째 아들 가쓰노부의 딸로, 시게사다와 하루히메의 사촌)와의 사이에 장남 아키타카(제10대 번주 하루히로의 세자)와 차남 간노스케(만 1세 반(세는나이 2세)으로 요절)의 두 아들이 있다.

우에스기 가문에서 여계 혈통에 따른 상속은 (더 가까운 친족이지만) 선례가 있었으며, 쓰나노리는 3대 번주 쓰나카쓰의 여동생 토미코의 아들(아버지는 고케・키라 요시히사)이었고, 초대 번주 가게카쓰도 번조 겐신의 누이 센토인의 아들이었다.[36]

다만, 시게사다는 요잔을 양자로 맞이한 해부터 10년여 동안(그 사이에 가독을 요잔에게 물려주고 은거했다) 가쓰히(승희), 하루히로 (승의), 가쓰사다, 사다오키의 4명의 남자(요잔의 재종 사촌에 해당한다)를 낳았으며, 차남인 승의(하루히로)가 요잔의 뒤를 이어 10대 번주가 되었다. 또한, 시게사다의 아들이 태어나기 전에도 우에스기 가문에 남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며, 쓰나노리의 넷째 아들 가쓰치카로부터 시작되는 지번(지후) 요네자와 신덴번의 분가(아자부 우에스기 가문)도 있었고, 가쓰치카의 아들(시게사다의 사촌)인 가쓰쓰구(2대 번주)와 가쓰쇼쿠(하타모토 카네다 마사노리)가 있었다. 가쓰쓰구는 시게사다의 양자 후보가 되기도 했다.

간엔 4년 7월 20일 (1751년 9월 9일), 휴가 다카나베번 주군 아키즈키 타네미쓰의 차남으로 다카나베번 에도 번저에서 태어났다. 유아명은 '''마쓰사부로'''이다. 생모가 일찍 사망했기 때문에 잠시 조모 즈이요인(도요히메)의 손에 맡겨져 양육되었다. 즈이요인은 우에스기 쓰나노리의 딸이며, 아키즈키 가문의 옛 영지인 아키즈키번 주군 구로다 나가사다의 정실이었다. 호레키 9년 (1759년), 이 당시 아직 아들이 없었던 우에스기 시게사다에게, 시게사다의 숙모에 해당하는 즈이요인이 "우리 손자지만 꽤나 현명하다"며 사치히메의 사위 양자로서 결혼을 권했다.

호레키 10년 (1760년), 요네자와번 주군 우에스기 시게사다의 양자가 되어 사쿠라다의 요네자와번 저택으로 이주하여, '''나오마쓰'''로 개명한다. 호레키 13년 (1763년)부터 오와리국 출신의 절충학자 호소이 헤이슈를 학문의 스승으로 삼았고, 메이와 3년 (1766년)에 원복하여 '''가쓰오키''' (통칭: '''나오마루''')라 칭한다. 또한, 세자 부역은 고사카 다테와키와 다데누마 헤이타가 맡았다. 에도 막부 10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하루의 편휘를 받아, '''하루노리'''로 개명한다. 메이와 4년 (1767년)에 가독을 잇는다.

하루노리(요잔)는 휴가국 다카나베 번의 아키즈키 타네미쓰의 차남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요네자와 번의 4대 다이묘인 우에스기 쓰나노리의 손녀였다. 그의 어린 시절 이름은 "마쓰사부로"(松三郎)와 "나오마쓰"(直松)였다. 어머니는 그가 아주 어렸을 때 돌아가셨고, 그는 할머니의 손에서 자랐으며, 이는 요네자와와의 유대를 강화했다. 열 살 때 그는 당시 요네자와의 다이묘였던 우에스기 시게사다에게 입양되었는데, 시게사다에게는 딸은 있었지만 아들이 없었다. 1763년 요네자와에 도착한 후, 그는 신유학 학자인 호소이 헤이슈의 열렬한 제자가 되었고, 그의 가르침은 그의 정치 철학과 통치 관점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 1766년 그는 겐푸쿠 의식을 치르고 쇼군 도쿠가와 이에하루로부터 특별한 총애의 표시로 이름에 "하루"(春)의 한자를 받았다. 1767년, 그는 요네자와의 다이묘가 되었다.

2. 2. 요네자와 번주 취임

호레키 10년 (1760년), 요네자와번 주군 우에스기 시게사다의 양자가 되어 사쿠라다의 요네자와번 저택으로 이주하여, '''나오마츠'''로 개명한다.[2] 호레키 13년 (1763년)부터 오와리국 출신의 절충학자 호소이 헤이슈를 학문의 스승으로 삼았고, 메이와 3년 (1766년)에 원복하여 '''카츠오키''' (통칭: '''나오마루''')라 칭한다. 세자 부역은 코사카 타테와키와 타데누마 헤이타가 맡았다. 에도 막부 10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하루의 편휘를 받아, '''하루노리'''로 개명한다. 메이와 4년 (1767년)에 가독을 잇는다.[2]

18세기 중반 우에스기가는 빚이 20만 (현대 통화로 환산하면 약 150억에서 200억 엔)으로 누적되었고, 15만 곡 (실제 수확량은 약 30만 곡)의 영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즈 120만 석 시대의 가신단 6천 명을 거의 해고하지 않았고, 가신 또한 우에스기 가문에 봉사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겨 떠나지 않았기에, 다른 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인구에서 가신의 비율이 높았다. 따라서 인건비만으로도 번 재정에 심각한 부담을 주었다.

당시 요네자와번에서는 시게사다의 측근 모리 헤이우에몬에 의한 전제 체제가 펼쳐지면서, 에도의 상인으로부터의 다이묘 가시가 중단되는 등 문제를 겪고 있었다. 그 때문에, 가로 다케마타 마사쓰나는 모리를 암살하고, 산업 진흥에 중점을 둔 '''[https://researchmap.jp/yuichiro_koseki/published_papers/8512516 메이와·안에이 개혁]'''을 단행한다. 하루노리는 다케마타 마사쓰나나 재정에 밝은 호리토 요시마사 (중로, 후에 가로)를 중용하며, 선대 임명의 가로들과 심하게 대립했다. 또한, 이전 번주가 1500냥이었던 에도 지출료 (에도에서의 생활비)를 209냥여로 감액하고, 안쪽 여성을 50명에서 9명으로 줄이는 등 검약을 실시했다. 그러나 그 때문에 막신에게의 운동비를 마련할 수 없었고, 메이와 6년 (1769년)에 에도 성 니시마루의 푸싱(건축) 지원을 명령받아, 막대한 지출이 발생하여 재건이 늦어졌다.[10]

3. 요네자와 번정 개혁

우에스기 시게사다에게 입양된 우에스기 요잔(하루노리)은 번의 재정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엄격한 재정 정책을 시행했다. 비단 옷 대신 면 옷을 입고, 식사는 국 한 그릇과 채소 한 접시로 줄이는 등 솔선수범했다. 가신들의 봉급을 6분의 1로 삭감하고 자신의 생활비도 대폭 줄였다. 이러한 노력에 반발하는 가신들을 처형하기도 했지만, 번의 재정은 점차 회복되었다.[2]

요잔은 덴메이 대기근(1781~1789) 시기에 쌀 창고를 건설하여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도록 도왔다. 직조, 도자기, 제지 등 새로운 산업을 장려하고 기존 산업(파라핀, 생사, 아마 등)을 육성했다. 특히 옻나무 재배를 장려하여 사무라이들을 농부로 전환시키기도 했다.[3]

인재 양성을 위해 폐쇄되었던 한 학교를 다시 열고 에도에서 학자들을 초빙했다. 네덜란드 의학을 가르치는 의과대학도 설립했다. 관개 시설 정비와 행정 개혁을 통해 농업 생산성을 높이고 낭비를 줄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요네자와 번은 1823년에 부채를 모두 상환하고 번영을 누렸으며, 1830년에는 막부로부터 모범적인 번으로 인정받았다.

다음은 요잔 개혁의 주요 내용을 정리한 표이다.

분야주요 내용
재정 개혁가신 봉급 및 번주 생활비 대폭 삭감, 하녀 수 감축, 검소한 생활
산업 진흥쌀 창고 건설, 신/기존 산업 육성, 옻나무 재배 장려, 사무라이의 농부 전환
교육 개혁한 학교 재건, 학자 초빙, 네덜란드 의학 교육 기관 설립, 관개 시설 정비, 능력 기반 인사 제도
기타공창 제도 폐지 (1795년), 적전의 예 시행 (농업 진흥)



안에이 6년 12월 6일( 1778년 1월 4일), 요네자와 서쪽 교외 토야마 촌(요네자와 시 토야마초)의 히데요라는 할머니가 시집간 딸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벼를 말리는 작업을 돕고 답례로 떡을 주려 하자, 자신을 도와준 무사들이 요네자와성 북문으로 오라고 했다. 그곳에는 무사가 아니라 번주(요잔)가 있었고, 이에 크게 놀랐다는 내용이다. 이를 통해 요잔이 백성들과 격의 없이 소통하고 농업을 중요하게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할머니의 편지와 버선(요네자와시 미야사카 고고학 박물관 소장)

3. 1. 개혁의 배경

우에스기 요잔은 다카나베번주 아키즈키 다네미쓰(秋月種美)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외할머니가 4대 요네자와번주인 우에스기 쓰나노리의 딸이었던 인연으로 10세에 8대 요네자와 번주 우에스기 시게사다의 딸과 결혼하여 사위이자 후계자가 되었다.[2]

에도 시대 중기에는 지방 재정이 궁핍하여 주민들이 마을에서 도망치거나, 끼니 걱정으로 태어난 아기를 죽이는 일까지 벌어지는 등 재정 악화를 겪는 번이 많았다. 우에스기씨의 영지는 우에스기 겐신센고쿠 시대에는 120만 석을 자랑하기도 했지만,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가담한 우에스기 가게카쓰 대에 대폭 박탈당해 30만 석으로 줄어들었다. 이것도 몇 대 후엔 15만 석으로 줄어들게 되었다.[3]

요잔이 양자가 되어 17세 때 가독을 상속받게 되었을 당시, 요네자와 번은 과거에 비해 영지가 줄어들었음에도 가신들의 수에는 변화가 별로 없었기에 재정이 어려웠다. 거기다 8대 번주인 시게사다가 사치스러운 인물이어서 막부에 15만 석 영지의 반납을 고려할 정도였다. 농사 외에 별다른 생산이 없었기에 흉년 같은 경우에는 뾰족한 대책이 없었고, 주민들 사이에는 끼니를 위해 갓난애를 죽여버리는 풍습도 존재하는 등 당시 번 내에는 여러 문제가 산재해 있었다.[3]

이러한 상황에서 요잔은 스스로 검소한 식사를 하며 솔선수범하였고 다른 번의 기술자를 초빙해 작물 재배를 가르쳐 특산물을 생산하도록 하였다. 가신들의 영지에도 작물을 심도록 하였으며 가신과 농민의 신분을 불문하고 학문을 배우게 하는 등 실용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기득권 세력과의 충돌을 고려해 정치적 기반에도 신경을 썼다.[3]

당시 요네자와번에서는 시게사다의 측근 모리 헤이우에몬에 의한 전제 체제가 펼쳐지면서, 에도의 상인으로부터의 다이묘 가시가 중단되는 등 문제를 겪고 있었다. 그 때문에, 가로 다케마타 마사쓰나는 모리를 암살하고, 산업 진흥에 중점을 둔 '''[https://researchmap.jp/yuichiro_koseki/published_papers/8512516 메이와·안에이 개혁]'''을 단행했다.[10] 새로운 번주로 취임한 요잔은 다케마타 마사쓰나나 재정에 밝은 호리토 요시마사를 중용하며, 선대 임명의 가로들과 심하게 대립했다. 또한, 이전 번주가 1500냥이었던 에도 지출료 (에도에서의 생활비)를 209냥여로 감액하고, 안쪽 여성을 50명에서 9명으로 줄이는 등 검약을 실시했다. 그러나 그 때문에 막신에게의 운동비를 마련할 수 없었고, 그 결과 1769년에도성 니시마루의 푸싱(건축) 지원을 명령받아, 막대한 지출이 발생하여 재건이 늦어졌다.[10]

덴메이 연간에는 덴메이 대기근으로 도호쿠 지방을 중심으로 기아 사망자가 다수 발생했지만, 요잔은 비상 식량의 보급이나 번사·농민에게 검약을 장려하는 등 대책에 힘썼고, 스스로도 죽을 먹으며 검약을 실천했다. 또한, 증조부 쓰라노리가 창설하고 후에 폐쇄된 학문을 배우는 곳을 번교·고조칸 (야마가타현립 요네자와 고조칸 고등학교의 뿌리)으로 호소이 헤이슈·진보 쓰나요시에 의해 부흥시켜, 번사·농민 등 신분을 가리지 않고 학문을 배우게 했다.

1773년8월 15일, 개혁에 반대하는 번의 중역들이, 개혁 중지와 개혁 추진파 다케마타 마사쓰나의 파면을 강소하여, 시치카 소동이 발발했지만, 이를 물리쳤다.

이러한 시책과 재결로 파탄 직전의 번 재정은 회복되었고, 다음 대 나리사다 시대에 차입금을 완납했다.

3. 2. 개혁의 주요 내용

우에스기 시게사다에게 입양된 우에스기 요잔(하루노리)은 번의 재정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엄격한 재정 정책을 시행했다. 비단 옷 대신 면 옷을 입고, 식사는 국 한 그릇과 채소 한 접시로 줄이는 등 솔선수범했다. 가신들의 봉급을 6분의 1로 삭감하고 자신의 생활비도 대폭 줄였다. 이러한 노력에 반발하는 가신들을 처형하기도 했지만, 번의 재정은 점차 회복되었다.[2]

요잔은 덴메이 대기근(1781~1789) 시기에 쌀 창고를 건설하여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도록 도왔다. 직조, 도자기, 제지 등 새로운 산업을 장려하고 기존 산업(파라핀, 생사, 아마 등)을 육성했다. 특히 옻나무 재배를 장려하여 사무라이들을 농부로 전환시키기도 했다.[3]

인재 양성을 위해 폐쇄되었던 한 학교를 다시 열고 에도에서 학자들을 초빙했다. 네덜란드 의학을 가르치는 의과대학도 설립했다. 관개 시설 정비와 행정 개혁을 통해 농업 생산성을 높이고 낭비를 줄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요네자와 번은 1823년에 부채를 모두 상환하고 번영을 누렸으며, 1830년에는 막부로부터 모범적인 번으로 인정받았다.

다음은 요잔 개혁의 주요 내용을 정리한 표이다.

분야주요 내용
재정 개혁가신 봉급 및 번주 생활비 대폭 삭감, 하녀 수 감축, 검소한 생활
산업 진흥쌀 창고 건설, 신/기존 산업 육성, 옻나무 재배 장려, 사무라이의 농부 전환
교육 개혁한 학교 재건, 학자 초빙, 네덜란드 의학 교육 기관 설립, 관개 시설 정비, 능력 기반 인사 제도
기타공창 제도 폐지 (1795년), 적전의 예 시행 (농업 진흥)



안에이 6년 12월 6일( 1778년 1월 4일), 요네자와 서쪽 교외 토야마 촌(요네자와 시 토야마초)의 히데요라는 할머니가 시집간 딸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벼를 말리는 작업을 돕고 답례로 떡을 주려 하자, 자신을 도와준 무사들이 요네자와성 북문으로 오라고 했다. 그곳에는 무사가 아니라 번주(요잔)가 있었고, 이에 크게 놀랐다는 내용이다. 이를 통해 요잔이 백성들과 격의 없이 소통하고 농업을 중요하게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3. 3. 개혁의 결과

요잔의 개혁은 즉각적인 성과는 없었지만, 꾸준히 추진되었다. 35세에 은거하여 번주 자리에서 물러난 후에도 후견인으로서 개혁을 지속적으로 지원했다. 은거 기간 동안 그동안의 노력이 결실을 맺기 시작했고, 요잔 사후에는 번 재정이 막부로부터 칭찬을 받을 정도로 개선되었으며, 주민들의 생활도 향상되었다.

덴메이 대기근 당시 요네자와 번은 비상 식량 보급, 검약 장려 등 적극적인 대책을 통해 피해를 최소화했다. 요잔은 스스로 죽을 먹으며 검소한 생활을 실천했고, 번교 고조칸을 부흥시켜 신분에 관계없이 학문을 장려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파탄 직전이었던 번 재정은 회복되었고, 다음 대 나리사다 시대에 차입금을 완납했다.

덴메이 5년 (1785년), 요잔은 가독을 하루히로에게 물려주고 은거했다. 이후에도 후계 번주를 후견하며 번정 개혁을 지원했다. 교와 2년 (1802년)에는 삭발하고 '''요잔'''이라는 법명을 사용했다.[11]

분세이 5년 3월 12일 (1822년 5월 3일)[12], 요잔은 피로와 노쇠로 인해 수면 중 사망했다.[13] 향년 72세 (만 70세)였다.

요잔의 개혁은 보력 기근으로 큰 피해를 입었던 요네자와 번을 덴메이 대기근에서 상대적으로 적은 피해로 극복하게 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비록 기근 때 기아 사망자가 전혀 없었다는 평가는 과장이지만, 요잔의 개혁이 실효를 거두었음을 보여준다.

요잔은 나오에 가네쓰구가 시행했던 엄나무 울타리를 부활시켜 현재까지도 이용되고 있다. 또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공창 제도 폐지에도 힘썼다.[5]

4. 전국의 사(伝国の辞)

伝国の辞|덴코쿠노지일본어는 우에스기 요잔이 다음 번 주군인 우에스기 하루히로에게 가독을 물려줄 때 내린, 번주로서의 마음가짐을 담은 세 가지 조항이다.

: 하나, 국가는 선조로부터 자손에게 전해지는 국가이며, 내가 사사로이 할 것은 없다.

: 하나, 인민은 국가에 속한 인민이며, 내가 사사로이 할 것은 없다.

: 하나, 국가는 인민을 위해 서있는 군주이며, 군주를 위해 서있는 국가 인민은 없다.

: 우(右) 세 조항을 잊지 말지어다.

: 덴메이(天明) 5년 기사년 2월 7일 지켄(治憲) 화압

:: 하루히로 전하 책상 앞

위 내용을 의역하면 다음과 같다.

: 하나, 국(藩)은 선조로부터 자손에게 전해지는 것이며, 나의 사물(私物)이 아니다.

: 하나, 백성(領民)은 국(藩)에 속해 있는 것이며, 나의 사물(私物)이 아니다.

: 하나, 국(藩)・백성(領民)을 위해 존재・행동하는 것이 군주(藩主)이며, “군주를 위해 존재・행동하는 국・국민”은 아니다.

: 이 세 조항을 마음에 새겨 잊지 않도록 하라.

전국의 칙은 우에스기 가문의 판적봉환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가독 상속 시 상속자에게 가훈으로 전해졌다.

5. 평가 및 영향

미국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이 당선 후 일본 기자들에게 가장 존경하는 일본 정치가를 질문받았을 때 우에스기 요잔이라고 답했다는 일화가 있다.[29][30][31] 당시 일본인들 중에는 요잔을 모르는 사람이 많았지만, 현재는 관련 연구가 활발하며 한국에도 번역서가 출간되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도몬 후유지의 소설 '불씨(원제: 소설 우에스기 요잔)'를 읽고 감명받아 청와대에 이 책을 보급했고, 시중에도 많이 출판되었다. 2007년 요미우리 신문의 지방자치단체장 대상 설문조사에서 우에스기 요잔은 이상적인 리더 1위로 선정되었다.

한편, 요잔의 친형인 아키즈키 다네시게도 명군으로 꼽힌다.

5. 1. 당대의 평가

우에스기 요잔은 1767년 요네자와 번의 다이묘가 된 후 번의 재정난을 극복하고 개혁을 성공시킨 명군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엄격한 절약 정책을 시행하고, 새로운 산업을 장려했으며, 교육을 통해 인재를 양성했다. 또한,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과 농업 생산성 향상을 위한 정책을 추진하여 번의 재정을 회복시켰다.[2] 이러한 노력으로 요네자와 번은 1823년에 부채를 완전히 상환했고, 1830년에는 막부로부터 모범적인 통치를 하는 번으로 인정받았다.[3]

요잔은 통치 철학으로 "국가와 백성은 영주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영주가 국가와 백성을 위해 존재한다"는 봉건제 영주의 역할을 강조했다.[4] 또한, "하면 된다,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일이든 하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사람의 탓이다"라는 말은 그의 자기 훈련에 대한 견해를 보여주며 널리 알려져 있다.[5]

요잔은 검소한 생활을 실천했는데, 의복은 목면으로 만들었고, 식사는 한 가지 국과 한 가지 채소를 기본으로 했다.[15] 그는 사사노 일도조각의 '오타카 폿포'를 요네자와의 명산으로 만들었으며, 이는 요잔의 상징이 되었다. 그는 담배를 즐겼고, 약용주는 가끔 마셨다고 한다.

요잔은 나오에 가네쓰구를 본받아 번을 재건하려 했으며,[21] 자조, 공조, 부조의 삼조 정신을 강조했다.[23][24][25] 그는 덴메이 대기근(1781–1789) 시기에도 백성을 위한 정책을 펼쳐 큰 피해를 막았다.[2]

요잔의 스고도 현판


이세 쓰 번의 번주 도도 다카노리는 요잔의 덕을 흠모하여 숭광당 현판 휘호를 의뢰하기도 했다.[20]

5. 2. 현대의 평가

미국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은 당선 후 일본 기자들에게 가장 존경하는 일본 정치가로 우에스기 요잔을 꼽았다. 당시 일본인들 중에는 요잔을 모르는 사람이 많았지만, 현재는 관련 연구가 활발하며 한국에도 번역서가 출간되었다.[29][30][31]

김영삼 전 대통령은 도몬 후유지의 소설 '불씨(원제: 소설 우에스기 요잔)'를 읽고 감명받아 청와대에 이 책을 보급했고, 시중에도 많이 출판되었다.

2007년 요미우리 신문의 지방자치단체장 대상 설문조사에서 우에스기 요잔은 이상적인 리더 1위로 선정되었다.

메이지 시대 이후 요잔은 수신 교과서에 자주 등장했으며, 우치무라 간조는 저서 『대표적 일본인』에서 요잔의 생애를 소개했다.[28]

요네자와 번 중흥의 조인 요잔은 현재 요네자와시 시민들에게 존경받고 있으며, 다른 역대 번주들과 달리 "요잔 공"이라는 존칭으로 불린다.

1975년 NHK 프로그램 『일본사 탐방』에서는 쓰나부치 겐조와 나라모토 다쓰야가 케네디가 우치무라 간조의 책을 통해 요잔을 알게 되었다고 설명했다.[27] 그러나 이 일화의 진위는 불분명하다.[32] 오노 사카에는 케네디가 아닌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니토베 이나조의 『무사도』를 통해 요잔을 알게 되었다고 주장한다.[33] 캐롤라인 케네디 전 주일본 미국 대사는 2014년 야마가타현요네자와시의 요청으로 요네자와시를 방문, "아버지는 '혼자서도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자주 말씀하셨고, 요잔 공은 '하면 된다'고 말했다"며 케네디 대통령이 요잔을 칭찬했음을 밝혔다.[34]

2014년 5월, 야마가타현 시라타카 산 정상에 두 기의 석비가 건립되었다. 하나는 요잔의 "전국의 사(伝国の辞)"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가 당신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지 묻지 말고, 당신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물으십시오. 대통령 존 F. 케네디, 우에스기 요잔의 칭찬자"라는 영어 문구가 새겨져 있다.

5. 3. 한국에의 소개

미국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이 당선된 후 일본 기자들이 가장 존경하는 일본 정치가를 물었을 때 우에스기 요잔이라고 답변했는데, 당시 이 얘기를 들은 일본인들 중에는 요잔이 누군지 몰랐던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지금은 많이 연구되어 있고 한국에도 관련 번역서가 나와 있다.

특히, 김영삼 전 대통령이 이 인물에 관한 도몬 후유지의 소설 '불씨(원제: 소설 우에스기 요잔)'를 읽고 감명해서, 청와대 쪽에 이 책이 꽤 보급되었고 시중에도 많이 출판되었다.

2007년 일본 요미우리 신문에서 각 지방자치단체장에게 앙케이트 한 결과, 이상적인 리더로서 1위의 인물로 뽑히기도 했다.

6. 연보

연도사건
호레키 원년(1751년)다카나베 번 에도 번 저택에서 아키즈키 타네미와 하루히메(구로다 나가사다의 딸)의 차남으로 탄생. 어릴 적 이름은 나오마츠.
호레키 9년(1759년)요네자와 번주 우에스기 시게사다와의 양자 내약.
호레키 10년(1760년)시게사다의 세자가 되어 나오마루로 개명. 8월, 우에스기 가 사쿠라다 번 저택으로 이주.
메이와 원년(1764년)호소이 헤이슈가 스승이 됨. 쇼군 도쿠가와 이에하루에게 우에스기 가의 세자로서 알현. 시게사다가 막부에 영토 반환을 장인인 오와리 번주 도쿠가와 무네카츠[37]에게 상담하여 강하게 간언받음.
메이와 2년(1765년)타케마타 토우츠나, 봉행이 됨.
메이와 3년(1766년)원복, 카츠오키로 칭함. 종4위하 탄정대필에 서임됨. 쇼군으로부터 편휘를 받아 하루노리로 개명.
메이와 4년(1767년)시게사다 은거. 하루노리가 요네자와 번주가 됨.
메이와 6년(1769년)호리토 젠세이, 요네자와 마을 봉행이 되어 번정에 관여함. 사치히메와 혼례를 올림. 10월, 처음으로 요네자와에 들어감.
메이와 7년(1770년)우에스기 카츠노부의 막내딸 오토요를 측실로 맞이함.
안에이 원년(1772년)번 재정 개혁으로 회계 일원 장부 작성 시작. 요네자와의 토야마 촌에서 적전의 예를 시작함.
안네이 2년(1773년)7가 소동.
안네이 5년(1776년)학관을 재흥하고, 방문한 호소이 헤이슈에 의해 "흥양관"으로 명명됨.
안네이 6년(1777년)의창을 설립.
안네이 7년(1778년)시게사다를 위해 능 배우자 곤고 사부로를 요네자와로 초청. 이후 곤고류가 요네자와에 퍼짐.
텐메이 2년(1782년)사치히메 병사. 의동생(시게사다의 친아들)이자 세자인 카츠노리가 원복, 나카츠카사 대보에 서임되어 쇼군으로부터 편휘를 받아 하루히로로 개명. 하루노리의 친아들 나오마루를 하루히로 세자로 삼아 켄코로 개명. 타케마타 토우츠나 실각. 텐메이 대기근( - 1786년), 이전까지의 개혁이 좌절됨.
텐메이 3년(1783년)개혁 좌절로 호리토 젠세이 사임, 은거. 흉작으로 11만 석의 피해.
텐메이 4년(1784년)장마가 계속됨. 하루노리가 켄신공 어당에 들어가 단식하며 기원함. 20년 계획으로 벼 5000섬, 보리 2500섬의 비축 계획 시작.
텐메이 5년(1785년)하루노리 은거. 하루히로가 가독을 잇고, 여기서 "전국의 사"를 증정. 켄코에게 후견역에 세자 심득을 부여("하면 된다").
칸세이 3년(1791년)호리토 젠세이, 재근을 명받아 개혁이 다시 시작됨(관삼의 개혁).
칸세이 6년(1794년)친아들 켄코가 천연두로 병사. 대신 미야마츠(나리사다)가 하루히로의 세자가 됨. 하루노리는 미야마츠와 함께 잠자고 일어나 스스로 교육에 힘씀.
칸세이 7년(1795년)호조고 신제(구로이 제방) 완성. 공창 폐지 법령을 냄.
칸세이 8년(1796년)호소이 헤이슈, 세 번째로 요네자와 방문. 하루노리는 세키네 후몬원에 스승을 맞이함.
쿄와 2년(1802년)총발이 되어 요잔으로 칭함. 『카테모노』 간행.
분카 5년(1808년)하루히로 세자인 사다요시가 원복, 시키부 대보에 임명되어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로부터 편휘를 받아 나리사다로 개명.
분카 9년(1812년)하루히로가 중풍으로 은거. 나리사다가 가독을 잇고, 종4위하 탄정대필에 서임됨.
분세이 4년(1821년)오토요 사망.
분세이 5년(1822년)사망.
분세이 6년(1823년)요네자와 번의 차입금, 완제됨. 나리사다는 번사 일동과 함께 켄신공 어당에 이를 보고함.


7. 관련 작품


  • 와타나베 요고로, 《근세 일본 경제사 우에스기 요잔과 요네자와 번정사》(분카쇼보하쿠분샤, 1973년)
  • 와타나베 즈난후, 《우에스기 요잔 공》(광맥사, 1978년)
  • 内村鑑三|우치무라 간조일본어 저, 스즈키 노리히사 역, 《대표적 일본인》(이와나미 문고, 1995년) (원저는 《Representative Men of Japan》 1894년, 개정 1908년)
  • 시모무라 치아키, 《우에스기 요잔》(신초샤, 1942년)
  • 이고노 세이이치, 《우에스기 요잔의 인간 사랑》(다이호샤, 1943년)
  • 도몬 후유지, 《소설 우에스기 요잔》(가쿠요쇼보, 1983년, 훗날 슈에이샤 문고, 인물 문고)
  • 도몬 후유지, 《우에스기 요잔의 경영학》(PHP 문고, 1990년) ISBN 4569562736
  • 스즈무라 스스무, 《「인간통」의 명지도자 우에스기 요잔에게 배우다》(미카사 쇼보, 1992년)
  • 후지사와 슈헤이, 《옻 열매가 익는 나라》(분게이슌주, 1997년, 훗날 문고)
  • 시마즈 요시타다, 《우에스기 요잔 - 재정 위기를 타개한 명군의 생애》(PHP 문고, 2002년)
  • 하세가와 신, 《우에스기 태평기》(신쇼세츠샤, 1941년), 훗날 도쿠마 문고, 「전집 제6권」(아사히 신문사, 1972년)
  • 와다 덴, 《우에스기 요잔 근검 절약의 아버지》(카이세이샤, 1952년)
  • 카자마키 겐이치, 《봄의 매 소설·우에스기 요잔》(슌요 문고, 1993년)
  • 야하타 카즈로, 《소설 전기 우에스기 요잔》(PHP 편집자 그룹, 2008년)

참조

[1] 서적 Nobiliare du japon http://www.unterstei[...] 2003
[2] 서적 Le Japon à l'exposition universelle de 1878. Géographie et histoire du Japon 1878
[3] 서적 Tokugawa Religion Simon & Schuster 1985
[4] 논문 State-Building and Political Economy in Early-Modern Japan 1995
[5] 서적 The Buddha's Wish for the World American Buddhist Study Center Press
[6] 간행물 故上杉輝虎外四名贈位ノ件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7] 문서 没年月日については諸説あり。詳細は生涯の「死去」の項目参照。
[8] 서적 上杉鷹山 吉川弘文館
[9] 문서 새로운 철제의 냄비・솥・주전자 등으로 물을 끓일 때 배어 나오는 쇠 냄새 나는 떫은 맛()
[10] 서적 武将列伝 江戸篇 文藝春秋 2008-07-10
[11] 문서 なお、[[武鑑]]の『諸大名御隠居方並御家督』で治憲の表記が「米沢侍従越前守藤原治憲」から「米沢侍従鷹山藤原治憲」に変更されたのは[[文化 (元号)|文化]]9年([[1812年]])からである。
[12] 문서 그레고리오暦
[13] 웹사이트 上杉鷹山 https://yonezawa-kan[...] 2024-04-06
[14] 웹사이트 なせば成る。なさねば成らぬ何事も…米沢藩中興の祖・上杉鷹山 https://rekishikaido[...] PHP研究所 2024-04-06
[15] 서적 歴史をつくった人びとの健康法―生涯現役をつらぬく― 중앙노동재해방지협회
[16] 서적 高鍋藩史話 鉱脈社
[17] 웹사이트 伝国社 特別展「上杉鷹山~改革への道~ http://www.denkoku-n[...] 米沢市上杉博物館 2009-07-20
[18] 웹사이트 あの人の忘れ得ぬ言葉 なせば成る なさねば成らぬ何事も 成らぬは人の なさぬなりけり 上杉鷹山 https://www.jiji.com[...] 時事通信 2024-04-06
[19] 문서 気吹舎歌集 https://dl.ndl.go.jp[...]
[20] 문서 崇廣堂扁額 http://www.bunka.pre[...] 三重県立博物館
[21] 웹사이트 上杉鷹山の師は直江兼続 https://n-story.jp/t[...] 新潟県 2024-04-06
[22] 웹사이트 上杉鷹山 http://okibun.jp/you[...]
[23] 웹사이트 上杉鷹山 三助 http://www.machinobo[...] 2021-11-19
[24] 웹사이트 5 防災まちづくりの推進 {{!}} 防災情報 https://www.bousai.g[...] 2021-11-19
[25] 웹사이트 小社会 自助、共助、公助 {{!}} 高知新聞 https://www.kochinew[...] 2021-11-19
[26] 문서 米沢城は東門が正門で藩主専用、北門が藩士、出入りの者の通用門である。
[27] 서적 日本史探訪13 幕藩体制の軌跡 角川書店
[28] 서적 修身教科書 https://hdl.handle.n[...] サンライズ出版 2006-10-23
[29] 웹사이트 外国人が称賛した山形 https://www.pref.yam[...] 山形県 2021-03-08
[30] 웹사이트 J・F・ケネディが尊敬した政治家・上杉鷹山 https://bizgate.nikk[...] 日経BizGate 2021-03-08
[31] 웹사이트 【歴史編】「上杉鷹山」 元NHKアナウンサー 松平定知 歴史を知り経営を知る https://www.nec-nexs[...] NECネクサソリューションズ 2021-03-08
[32] 웹사이트 J.F.ケネディ大統領が就任間もなく、日本人記者とのインタビューで尊敬する人物として、上杉鷹山の名前をあげた。この時の記事を探している。 https://crd.ndl.go.j[...] レファレンス協同データベース 2018-01-25
[33] 서적 シリーズ藩物語 米沢藩 現代書館
[34] 웹사이트 鷹山ゆかりの地…ケネディ大使が米沢市訪問 https://news.ntv.co.[...] 日テレNews24 2018-01-25
[35] 문서 [[末期養子]]の禁に抵触して無嗣断絶となるのを回避するため、公家の子弟から[[相良頼完|替え玉の藩主]]が擁立された。なお、当初は治憲が相良家の養子に所望されていたが、既に上杉家との養子話が進行中だったため弟が選ばれた経緯があった。
[36] 문서 いずれも先代による後継指名ではなく、前者は先代死後に末期養子を認められたもので(代償で所領は半減した)、後者は後継者争いの内乱([[御館の乱]])を経ていた。
[37] 문서 このように言われているが、この時、宗勝は既に死亡している。実際には[[徳川宗睦]]と思われる。
[38] 웹사이트 番組エピソード 描き方も題材もさまざま!【時代劇特集】-NHKアーカイブス https://www2.nhk.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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