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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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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웅번은 에도 시대와 막말에 걸쳐 경제력, 군사력, 정치적 영향력이 컸던 번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에도 시대 초기에는 미곡 수확량, 광산 소유, 신규 전답 개발 등으로 경제력을 갖춘 도자마 다이묘들이 웅번으로 불렸으며, 가가번, 사쓰마번, 센다이번 등이 대표적이었다. 막말에는 서일본의 여러 번이 재정 개혁을 통해 군비 확충과 인재 등용을 이루면서 국정에 발언권을 얻었고, 삿초도히, 산요 회의, 온쿄 회의 등의 집단이 웅번으로 구성되었다. 또한, 미토번은 정치적 발언력을 배경으로 ‘세력’으로 불리기도 했다. 막말·유신기에 활약한 웅번으로는 후쿠이번, 미토번, 사쓰마번, 히젠번, 오와리번, 인슈번, 우와지마번, 도사번, 조슈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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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번
개요
명칭웅번 (雄藩)
설명에도 시대 후기에 큰 힘을 가졌던 번들을 가리킴.
배경
시대적 배경에도 시대 후기
주요 특징넓은 영토
높은 석고
강력한 군사력
막부 정치에 대한 영향력
등장 요인번정 개혁의 성공
상업 발달
농업 생산력 증대
주요 웅번
고산케 (御三家)오와리
기슈
미토
고산쿄 (御三卿)다야스
히토쓰바시
시미즈
그 외사쓰마
조슈
히젠
도사
에치젠
센다이
구마모토
역할 및 영향
막부 정치막부 말기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영향력 행사
메이지 유신일부 웅번은 메이지 유신을 주도
중앙 정치유신 이후 중앙 정치의 주도 세력으로 성장
같이 보기
관련 항목
메이지 유신
도자마
후다이

2. 에도 시대 초기의 웅번

에도 시대 초기에는 미곡 수확량이 큰 번이나 , 등의 광산을 소유한 번, 새로운 전답 개발로 위상이 높아진 번 등 특히 경제력이 컸던 도자마 번을 ‘웅번’이라고 했다.[1] 가가번(100만 석), 사쓰마번(77만 석), 센다이번(62만 석) 등이 대표적인 웅번이었다.[1]

3. 막부 말기의 웅번

막말에는 주로 서일본의 여러 번이 재정 개혁에 성공하여 경제력을 키웠고, 이를 바탕으로 군비 확충과 인재 등용을 통해 국정에서 발언권을 얻어 ‘웅번’이라고 불렸다. 따라서 당시에는 미곡 수확량과의 상관관계는 크지 않았다.[1]

3. 1. 주요 웅번

에도 시대 초기에는 미곡 수확량이 큰 번이나 , 등의 광산을 소유한 번, 새로운 전답 개발로 위상이 높아진 번 등 특히 경제력이 컸던 도자마 번을 ‘웅번’이라고 했다. 가가번(100만 석), 사쓰마번(77만 석), 센다이번(62만 석) 등이 대표적인 웅번이었다.

막말에는 주로 서일본의 여러 번이 재정 개혁에 성공했고, 경제력을 키워 군비 확충과 인재 등용에서 국정의 발언권을 얻어 ‘웅번’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따라서 당시에는 수확량과의 상관관계는 그리 크지 않았다. 막말·유신기에 활약한 웅번으로는 후쿠이번, 미토번, 사쓰마번, 히젠번, 오와리번, 인슈번, 우와지마번, 도사번, 조슈번이 있으며, 이들 번은 공통적으로 덴포, 안세이의 번정 개혁에 성공을 거두었고, 격렬한 번 내부 정쟁 속에서 인재가 등용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1]

막말의 웅번으로 구성된 집단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었다.



또한, 미토번도 정치적 발언력을 바탕으로 "웅번"으로 불렸다. 미토 도쿠가와 가 출신의 히토쓰바시 요시노부는 위의 산요 회의에도 참여했다.

3. 2. 그 외의 웅번

에도 시대 초기에는 미곡 수확량이 많거나, , 등의 광산을 소유하거나, 새로운 농지 개발로 위상이 높아진 경제력이 큰 도자마 번을 '웅번'이라고 했다. 가가번(100만석), 사쓰마번(77만석), 센다이번(62만석) 등이 대표적인 예시이다.

막말에는 주로 서일본의 여러 번이 재정 개혁에 성공하여 경제력을 키우고, 이를 바탕으로 군비를 확충하고 인재를 등용하여 국정에서의 발언권을 얻게 되면서 '웅번'으로 불렸다. 따라서 당시에는 수확량과의 상관관계는 크지 않았다. 막말의 웅번으로 구성된 집단은 다음과 같다.

미토번은 정치적 발언력을 바탕으로 '세력'으로 불렸다. 미토 가 출신의 히토쓰바시 요시노부는 산요 회의에도 참가했다.

막부 말기와 유신기에 활약한 웅번으로는 후쿠이번, 미토번, 사쓰마번, 히젠번, 오와리번, 인슈번, 우와지마번, 도사번, 조슈번이 있으며, 이들 번은 공통적으로 덴포, 안세이의 번정 개혁에서 성공을 거두었고, 격렬한 번 내부 정쟁 속에서 인재가 등용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1]

4. 웅번의 특징

에도 시대 초기에는 미곡 수확량이 큰 번이나 , 등의 광산을 소유한 번, 새로운 전답 개발로 위상이 높아진 도자마 번 중 특히 경제력이 컸던 번을 '웅번'이라고 불렀다. 가가번(100만 석), 사쓰마번(77만 석), 센다이번(62만 석) 등이 대표적인 웅번이었다.[1]

막말에는 주로 서일본의 여러 번이 재정 개혁에 성공하여 경제력을 키우고, 군비 확충과 인재 등용으로 국정 발언권을 얻어 '웅번'이라고 불렸다. 당시에는 수확량과의 상관관계는 크지 않았다. 막말·유신기에 활약한 웅번으로는 후쿠이번, 미토번, 사쓰마번, 히젠번, 오와리번, 인슈번, 우와지마번, 도사번, 조슈번이 있으며, 이들은 덴포, 안세이의 번정 개혁에서 성공을 거두었고, 격렬한 번 내부 정쟁 속에서 인재가 등용되었다는 공통점을 가진다.[1]

막말의 웅번으로 구성된 집단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



미토번은 정치적 발언력을 바탕으로 '세력'으로 불렸다. 미토 도쿠가와 가 출신의 히토쓰바시 요시노부는 상기의 산요 회의에도 참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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