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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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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원호문은 1190년 중국 산시성에서 태어난 금나라 시인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문학적 재능을 보였으며, 금나라가 쇠퇴하고 몽골의 침략으로 사회가 혼란스러운 시기를 겪었다. 관직 생활을 하다가 금나라가 멸망한 후에는 몽골 관료에게 금나라 지식인 보호를 호소하고, 저술 활동에 전념했다. 주요 저작으로는 《중주집》이 있으며, 1257년에 사망했다. 그의 작품은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를 거치며 재평가되었고, 한국에서도 다양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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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호문

2. 생애

원호문의 조상은 성을 원으로 바꾼 비한족 출신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은둔 생활을 했지만, 아들에게 문학적 소양을 길러주었다. 원호문은 어릴 적 숙부의 관직 여행에 동행하며 유명한 장소와 풍경을 접했다. 그는 7세에 시를 지어 신동으로 불렸고, 숙부 덕분에 최고의 스승에게 배울 수 있었다. 원호문은 금나라 전성기에 태어났으나, 왕조가 쇠퇴하면서 사회 불안과 전쟁을 겪었다. 금나라가 수도를 옮기자 어머니와 함께 허난성으로 피신했다. 금나라에서 여러 직책을 맡았지만, 몽골 원나라에 굴복한 후 관직을 버리고 은퇴했다. 1233년 체포되어 산둥성으로 압송되었고,[2] 한동안 가난하게 방랑했다.

2. 1. 유년기

원호문은 1190년에 신주 수용현(현재의 산시성 신저우시 신푸구)에서 원덕명과 왕씨의 삼남으로 태어났다.[6] 생후 7개월 만에 숙부 원격과 장씨 부부의 양자가 되어 그들에게 길러졌다. 양아버지의 전근으로 산둥, 산시 등지에서 살기도 했지만, 후에 허난으로 피난하기 전까지 대부분의 시기를 산시에서 보냈다.[6]

7세 때부터 시를 지어 신동으로 불렸다.[6] 14세 때 릉천에서 학천정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태원에서 실시된 향시에 응시하기 시작했다.[7] 학천정 밑에서는 과거 시험 지도보다 제자백가의 사상[8], 인간의 본질에 대한 강의에 중점을 둔 수업을 받아 은둔 생활에 대한 동경을 키웠다.[9] 20세 전에 장씨를 아내로 맞아 결혼 직후 장녀 원진을 낳았다.

그의 조상은 4세기북위를 건국한 선비 탁발부의 적류인 탁발씨의 황족인 상산왕 탁발준, 당나라 시대 시인 원결을 선조로 한다.[4][5][6] 원호문의 조상은 성을 원으로 바꾼 비한족 출신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인생의 실망을 겪고 은둔 생활을 했지만, 아들에게 문학에 대한 취향을 물려주었다. 정부 관리였던 삼촌은 어린 원호를 관직 여행에 데려가 유명한 장소와 풍경을 접하게 했다.

2. 2. 금나라 관리

원호문은 금나라 전성기에 태어났지만, 왕조가 쇠퇴하면서 사회적 불안과 전쟁을 겪었다. 1211년부터 몽골 군의 금나라 침입이 시작되었고[10], 1214년 3월에는 형인 원호고가 금나라 장교로 몽골군과 대동에서 싸우다 29세의 나이로 전사했다[7]. 1216년 호문은 어머니와 함께 하남의 삼향(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 허난성 뤄양시 이양현)으로 피난했지만, 하남도 전란에 휩싸였다. 하남의 혼란이 일시적으로 수습되자 진사 시험을 위한 학업에 정진하는 동시에, 『금기』, 『논시』를 저술하여 선인들의 문학론을 정리하여 당시 문인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11]. 문단의 권위자인 趙秉文|조병문중국어으로부터 두보에 비견된다는 칭찬을 받았다[12].

1218년등봉으로 이주하여 소지주로 살면서 농민들과 함께 농사일에 종사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쓰여진 『완구탄』, 『을유 육월 십일일 우』 등의 시에는 농민들에 대한 애착과 악덕 관리들에 대한 비판이 표현되어 있다[13]. 1221년에 금나라가 실시한 진사에 합격했지만 임관하지 못했고, 1225년에 임관 시험에 합격하여 국사원 편수에 배속되었다[14]. 국사원에 배속된 지 반 년 정도 후인 1226년에 직을 사임하고 등봉으로 돌아와 37세부터 42세에 걸쳐 하남의 진평 현령, 내향 현령, 남양 현령을 역임했다. 현령에게 부과된 징세의 직무와 곤궁한 농민들 사이의 모순에 갈등하며, 시에 농민들에 대한 동정과 고뇌를 담았다[15][16].

1231년에 칙명에 의해 중앙으로 소환되어, 이듬해인 1232년에 상서성의 좌사 도사에 발탁되었다. 1233년 3월에 황제 애종은 몽골군에 포위된 개봉부에서 도망쳤고, 쿠데타를 일으킨 장군 최립에 의해 변경이 제압된다. 호문은 최립에게 살해될 뻔했지만, 이중화라는 인물의 중재로 위기를 벗어나 좌우사 원외랑에 임명되었다[17]. 이때 최립은 자신의 공적을 칭찬하는 비문을 세울 것을 호문에게 명했고, 협박을 받아 마지못해 비문을 세우고, 스스로도 서문을 썼다[17]. 후년에 최립을 위해 비문을 세운 것으로 비난을 받았지만, 변명은 하지 않았다[18].

2. 3. 금나라 멸망 이후

1234년 채주 전투에서 금나라가 몽골에 멸망하자, 원호문은 '즉사'라는 시로 최립의 죽음을 기뻐하고[21], '갑오제야'에서 애종에 대한 애도와 금나라에 대한 충성을 나타냈다.[22] 이후 석방되어 동평 지방의 관씨 현령 조천석의 배려로 가족과 함께 관씨현으로 이주했다. 조천석과 그의 주군인 엄실의 보호를 받으며, 관씨·수성에서 활동했다.[22]

이후 관씨에 소박한 집을 짓고 저술에 전념하며, 몽골에 벼슬하지 않고 멸망한 조국 금나라의 역사 편찬에 힘썼다.[23] 1240년 조천석의 만류를 뿌리치고 고향인 신주로 돌아갔지만, 사서 편찬을 위해 각지를 돌아다니며, 몽골의 풍속과 궁핍한 민중의 모습을 시로 남겼다.[24] 타인의 방해로 야사 편찬을 결의한다.[8] 1245년 즈음 병으로 사망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25] 회복하여 여행을 계속했다.

1252년 63세 때 개평에서 몽골 황제의 동생 쿠빌라이와 만나, "유교 대종사"라는 칭호를 받았다.[19][26] 1257년 정정로 획록현에서 68세로 사망했다.[27]

원호문 묘 묘도

3. 평가

남송에서는 원호문의 이름이 인지되지 않았다.[28] 원에서는 패전국인 금나라의 문화에 주목하는 사람이 적어, 특별히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29] 원나라 이후에 성립된 에서는 비한족 국가인 금나라의 시인인 원호문에 대한 평가가 낮았지만, 명말 청초의 문인 전겸익은 원호문과 그의 저서 『중주집』을 높이 평가했다.[30] 중국에서는 17세기에 이르기까지 원호문의 작품·사적이 빛을 보지 못했지만,[31] 만주족의 국가인 이 건국된 후에 재평가 및 재연구가 진행되었다.[32]

금나라의 시를 엮은 『중주집』은 원호문의 걸작으로 유명하다. 제목에 있는 중주는 금나라야말로 중국의 전통 문화를 계승하는 자라는 의미가 담겨 있으며, 시집으로서의 성격 외에도 시인의 전기도 함께 수록하고 있어 금나라의 역사로서의 역할도 한다.[33] 『중주집』은 『임진잡편』과 함께 원말에 편찬된 금사 편찬에 활용되었다.[8][24]

일본에서는 남북조 시대에 오산의 승려들 사이에서 『중주집』이 구독되었다. 에도 시대에 『중주집』, 호문의 작품이 수록된 『금시선』이 출판되었고, 메이지 시대에 들어 호문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5]

4. 주요 저작

제목
중주집
중주악부
임진잡편
두시학
동파시아
시문자경
금기
금원군신언행록


5. 가족 관계

원호문의 가족 관계
관계이름출생년도사망년도비고
부인장씨1231년
부인모씨1232년[34] 혹은 1234년경[35] 재혼
아들(장남)원부(숙의)1229년원나라 여주지주 출사
아들원아신요절"아신"은 어린 시절 이름이며, (본명)와 자는 불명. 어머니는 장씨[36]
아들(차남)원진(숙개)1246년원나라 태원로참좌
아들(삼남)원총(숙강)1249년원나라 상서도성감인
딸(장녀)원진(숙용)1209년
딸(차녀)원엄(숙장)도사로 출가[27]
원순1219년1232년
딸(삼녀)원진『서이제3녀진』에서는 요절한 원순을 자녀 수에서 제외하고, 후에 태어난 원진을 셋째 딸로 침[37]
이름 불명


6. 한국의 관련 연구


  • 양은선은 고려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元好問 詩歌의 탈경계적 상상력 연구: 서사적 구성과 장르적 변용을 중심으로〉(2019)에서 원호문의 시가에 나타난 상상력을 연구했다.[1]
  • 지세화는 논문 〈元好問 《中州集》 ‘小傳’의 서술 방식 연구 - ‘小傳’ 중 해당 인물의 詩歌 創作에 대한 評價 부분을 중심으로 -〉(《중국연구》 85, 2020)에서 《중주집》 소전의 서술 방식을 연구했다.[2]
  • 양은선은 논문 〈금(金)·원(元) 시기 사대부들의 도교 문화 연구—원호문(元好問)의 《속이견지(續夷堅志)》를 중심으로〉(《중국어문논총》 114, 2023)에서 원호문의 《속이견지》를 중심으로 금·원 시기 사대부들의 도교 문화를 연구했다.[3]
  • 지세화는 논문 〈元好問의 《詩文自警》 ‘15則’ 考察〉(《중국학연구》 105, 2023)에서 원호문의 《시문자경》 15칙을 고찰했다.[4]

참조

[1] 문서 Davis, xxviii
[2] 문서 Crump, 20
[3] 문서 元徳明の「徳明」は字であり、諱は不明(小栗『元好問』、6頁)。
[4] 서적 元好問
[5] 서적 元好問
[6] 서적 元好問
[7] 서적 元好問
[8] 간행물 元好問
[9] 서적 元好問
[10] 서적 몽골제국사 平凡社 1968-03-01
[11] 서적 元好問
[12] 서적 元好問
[13] 서적 元好問
[14] 서적 元好問
[15] 서적 元好問
[16] 서적 元好問
[17] 서적 元好問
[18] 서적 元好問
[19] 서적 元好問
[20] 서적 元好問
[21] 서적 元好問
[22] 서적 元好問
[23] 서적 元好問
[24] 서적 元好問
[25] 서적 元好問
[26] 서적 元好問
[27] 서적 元好問
[28] 서적 宋詩選 朝日新聞社 1979-02-01
[29] 서적 元好問
[30] 서적 元好問
[31] 서적 元好問
[32] 서적 元好問
[33] 서적 元好問
[34] 서적 元好問
[35] 서적 元好問
[36] 서적 元好問
[37] 서적 元好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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