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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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태서는 경주 김씨 출신으로 신라 왕실의 후손이다. 고려 명종, 신종, 희종, 강종, 고종 등 다섯 왕을 섬겼으며, 1232년 한림학사로서 문과의 동지공거를 맡아 문진 등 31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수태보 문하시랑평장사까지 올랐으나 나이로 인해 벼슬에서 물러났고, 오승적의 사건에 연루되어 재산을 몰수당한 후 1257년에 사망했다. 그는 유학을 업으로 삼았지만 탐욕스러운 성품으로 남의 토지를 빼앗아 비난을 받기도 했다. 장남은 최우의 사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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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57년 사망 - 원호문
원호문은 금나라 말기에서 원나라 초기의 시인이자 문학가로, 금나라 멸망 후 은둔하며 금나라 역사 편찬에 힘썼고, 그의 작품은 금나라에 대한 충절과 민중의 고통을 반영하며 동아시아 문학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 1257년 사망 - 최항 (12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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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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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이름 | 김태서 |
한자 표기 | 金台瑞 |
로마자 표기 | Gim Taeseo |
호 | 문장 (文莊) |
생애 | |
활동 시기 | 13세기 |
주요 경력 | 한림학사 문하시랑평장사 동지공거 |
관련 인물 | 김기손, 김경손 |
가계 | |
본관 | 전주 김씨 |
2. 생애
'''김태서'''(金台瑞)는 경주[6]사람으로 세계는 신라 왕실에서 나왔다.[7]
아버지 김봉모(金鳳毛)는 용모와 태도가 아름다웠고, 여진어와 한어에 통달하여 매번 금(金)의 사신이 오면 반드시 그에게 접대하게 하여, 항상 동각에 거처하였다. 신종때 추밀원부사에 임명되고 여러 번 벼슬이 올라 문하시랑평장사에 이르러 죽으니, 사흘 간 조회를 멈추었다. 시호를 정평(靖平)이라 하였다.[8]
과거에 급제한 후 명종, 신종, 희종, 강종, 고종의 다섯 왕을 섬겼으며[8], 1232년 한림학사(翰林學士)로서 문과의 동지공거(同知貢擧)를 맡아, 문진(文振) 등 31명에게 급제를 주었다.[9] 이후, 관직이 수태보 문하시랑평장사(守太保 門下侍郞平章事)에까지 올랐다가, 나이를 이유로 치사(致仕) 하였다.[8]
그 뒤에 '오승적(吳承績)의 사건에 연좌'되어 집이 적몰(籍沒)되었으며, 1257년 졸하였다.
2. 1. 가계와 초기 생애
김태서(金台瑞)는 경주[6]사람으로 세계는 신라 왕실에서 나왔다.[7]아버지 김봉모(金鳳毛)는 용모와 태도가 아름다웠고, 여진어와 한어에 통달하여 매번 금(金)의 사신이 오면 반드시 그에게 접대하게 하여, 항상 동각에 거처하였다. 신종때 추밀원부사에 임명되고 여러 번 벼슬이 올라 문하시랑평장사에 이르러 죽으니, 사흘 간 조회를 멈추었다. 시호를 정평(靖平)이라 하였다.[8]
2. 2. 관직 생활
김태서(金台瑞)는 경주[6]사람으로 세계는 신라 왕실에서 나왔다.[7]아버지 김봉모(金鳳毛)는 용모와 태도가 아름다웠고, 여진어와 한어에 통달하여 매번 금(金)의 사신이 오면 반드시 그에게 접대하게 하여, 항상 동각에 거처하였다. 신종때 추밀원부사에 임명되고 여러 번 벼슬이 올라 문하시랑평장사에 이르러 죽으니, 사흘 간 조회를 멈추었다. 시호를 정평(靖平)이라 하였다.[8]
과거에 급제한 후 명종, 신종, 희종, 강종, 고종의 다섯 왕을 섬겼으며[8], 1232년 한림학사(翰林學士)로서 문과의 동지공거(同知貢擧)를 맡아, 문진(文振) 등 31명에게 급제를 주었다.[9] 이후, 관직이 수태보 문하시랑평장사(守太保 門下侍郞平章事)에까지 올랐다가, 나이를 이유로 치사(致仕) 하였다.[8]
그 뒤에 '오승적(吳承績)의 사건에 연좌'되어 집이 적몰(籍沒)되었으며, 1257년 졸하였다.
2. 3. 말년
김태서는 경주[6]사람으로 세계는 신라 왕실에서 나왔다.[7] 과거에 급제한 후 명종, 신종, 희종, 강종, 고종의 다섯 왕을 섬겼으며[8], 1232년 한림학사로서 문과의 동지공거를 맡아, 문진 등 31명에게 급제를 주었다.[9] 이후, 관직이 수태보 문하시랑평장사에까지 올랐다가, 나이를 이유로 치사하였다.[8] 그 뒤에 '오승적의 사건에 연좌'되어 집이 적몰되었으며, 1257년 졸하였다.3. 인품 및 일화
김태서는 유학을 업으로 삼았지만 글을 좋아하지 않았다. 성품이 탐욕스럽고 비루하여 남의 토전(土田)을 무리하게 빼앗았다.[8] 매번 출입할 때마다 사람들이 길을 막고 "공께서는 어찌하여 우리들의 생계를 빼앗습니까?"라고 호소할 정도였다.[8] 그러나 장남 김약선이 최우의 사위였기 때문에 유사가 감히 탄핵하지 못했다.[8]
4. 가족 관계
참조
[1]
웹사이트
(125)전주 김씨(全州金氏)-57,979명
http://www.seoulecon[...]
2015-02-19
[2]
웹사이트
김태서(金台瑞)
https://encykorea.ak[...]
2023-10-27
[3]
위키소스
高麗史
[4]
서적
Studies on Korea in Transition
Center for Korean Studies
1979
[5]
웹사이트
Will Kim visit ancestor's grave?
https://koreajoongan[...]
2018-09-26
[6]
문서
후대에 후손들이 전주 김씨 시조로 모시고 있다.
[7]
문서
《고려사》에는 김알지의 후예라 한다.《증보문헌비고》에는 경순왕의 후예라 한다.
[8]
서적
고려사 김태서전
[9]
서적
고려사 선거지
[10]
서적
김봉모 묘지명
[11]
서적
김경보 묘지명에 기록된, 아들 이름이다.
[12]
서적
씨족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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