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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건 (강도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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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건은 전한 시대 강도왕으로, 부왕 생전에 여자를 빼앗고 살인하는 등 패륜적인 행위를 저질렀다. 그는 부왕 사후에도 후궁 및 누이동생과 간통하고, 궁녀들에게 가혹한 행위를 일삼았다. 이러한 행실로 인해 주살을 두려워하여 반란을 모의했으나 발각되어 자결했고, 강도국은 폐지되었다.

2. 생애

유건은 태자 시절, 아버지 강도역왕에게 딸을 바치려던 양분(梁蚡)이라는 사람의 딸이 미녀라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여자로 삼았다. 이에 항의하는 양분을 사람을 시켜 죽였다. 양분의 집에서 정위에 고소했지만 사면받았다.

아버지 강도역왕이 죽자 유건은 왕위를 이었다. 그러나 그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패륜적인 행각을 벌이기 시작했으며, 이웃 제후국을 병탄하기 위해 반란을 모의하다 자결로 생을 마감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패륜과 잔혹 행위", "반란 모의와 발각", "최후와 죽음" 하위 섹션을 참조하면 된다.

2. 1. 패륜과 잔혹 행위

아버지 강도역왕이 죽고 장례가 끝나기도 전에, 아버지의 후궁이었던 요희(淖姬) 등 10여 명과 간음했다.[1] 또한, 누이동생 유징신(劉徵臣)이 왕신 또는 왕충[2]의 며느리로 시집갔다가 아버지의 장례를 위해 돌아오자, 그와도 간음했다.

장대궁(章臺宮)에서 여자 넷과 뱃놀이를 하다 일부러 배를 뒤집어 두 명을 물에 빠져 죽게 했다. 뇌피(雷波)[5]에서 놀 때에는 큰 바람을 틈타 두 낭(娘)이 탄 배를 뒤집어 빠져 죽게 하고는 이를 보며 크게 웃었다.[4]

궁녀들에게는 가혹한 벌을 내렸다. 잘못한 궁녀는 발가벗겨 북을 치게 하거나 나무 위에 30일 동안 묶어두고 옷을 주지 않았다. 곤겸에 처하고 절구를 찧는 노예로 삼거나, 이리에게 물려 죽게 하고 이를 보며 크게 웃었다. 굶겨 죽이기도 했는데, 이렇게 죽은 사람이 35명이나 되었다.[4]

또한, 사람이 짐승과 교접해 자식을 낳게 하려는 목적으로 궁인을 발가벗겨 네 발로 걷게 한 뒤 숫양이나 개와 강제로 성관계를 맺게 했다.[4]

2. 2. 반란 모의와 발각

유건은 왕위에 오른 후 음란하고 포학한 행위를 일삼아 국내에 그 소문이 널리 퍼졌다. 이에 주살될 것을 두려워하여 왕후 성광(成光)과 함께 한나라 조정을 저주하며, 처벌받게 되면 결코 혼자 죽지 않겠다고 말했다. 또한 이웃한 회남왕 유안형산유사가 모반을 꾀하고 있음을 알고, 그들에게 병탄될 것을 우려하여 무기를 만들기 시작했다.[4]

장인 성호응(成胡應)을 장군으로, 힘 있고 활을 잘 쏘는 중대부 질(疾)을 영무군으로 삼았다. 옥새, 장군과 도위의 인수, 사지절을 만들고 군수 물자와 작위까지 준비했으며, 지도와 진법도 갖추었다. 월나라 요왕 및 민후와 선물을 주고받으며 외교 관계를 맺어 위급한 상황에 서로 돕기로 약속했다.[4]

회남왕의 모반 사건이 밝혀지고 그 일당을 처벌하는 과정에서 유건도 연루되었다. 뇌물로 죄를 면하려 했으나, 결국 자신의 반란 모의도 발각되었다. 한나라 조정에서는 승상장사를 보내 강도과 함께 조사하여 유건이 반란에 사용하려고 만든 기구들을 찾아냈다. 유사는 유건을 체포하여 주살할 것을 청했고, 열후이천석 및 박사들도 유건의 죄가 주살을 피할 수 없다고 의견을 모았다.[4]

종정 유수와 정위 장탕이 유건에게 보내졌고, 유건은 자결하였다. 왕후 성광 등은 모두 기시에 처해졌다.[4] 재위 6년 만에 유건이 자살하면서 봉국은 폐지되어 한나라에 편입, 광릉군이 되었다.[4][6]

2. 3. 최후와 죽음

유건은 자신의 반란 모의가 발각되자 뇌물로 죄를 면하려 했다. 그러나 한나라 조정에서 승상장사를 보내 강도과 함께 조사해 유건이 반란에 사용하려고 만든 기구들을 찾아냈다. 유사는 유건을 체포해 처형할 것을 청했고, 열후이천석과 박사들도 유건의 죄는 처형을 피할 수 없다고 의견을 모았다.[4]

이에 종정 유수와 정위 장탕이 유건에게 보내졌고, 유건은 결국 자결했다. 왕후 성광(成光) 등은 모두 기시에 처해졌다.[4] 재위 6년 만에 유건이 자살하면서 봉국은 폐지되어 한나라에 편입되었고, 광릉군이 되었다.[4][6]

이로써 전한에서 강도왕의 작위는 없어졌고, 강도국을 폐지하고 이름을 고쳐 세운 군인 광릉군은 후에 광릉국으로 바뀌어 광릉왕이 임명되었다. 121년 후 유건의 조카 유궁이 광세왕에 봉해질 때까지 강도왕의 제사는 끊겼다. 딸 유세군원봉 연간에 오손으로 시집갔다.

3. 평가

유건은 권력을 남용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아버지나 누이와 간음하는 등 패륜적인 행위를 하고, 궁녀들을 학대하고 죽이는 잔혹함을 보였다.[4] 이러한 악행으로 백성들의 원성을 샀으며, 반란을 모의하다 발각되어 자결했다.[4] 강도국은 폐지되고 한나라에 편입되었다.[4]

3. 1. 부정적 평가

유건은 아버지 강도역왕이 죽기 전, 장례가 끝나기도 전에 아버지의 여자들과 간음했고, 자신의 누이와도 간음했다.[1][2] 여자 넷과 배를 타고 놀다가 일부러 배를 뒤집어 두 명을 빠뜨려 죽게 했고, 큰 바람을 만났을 때도 두 낭이 탄 배를 뒤집어 빠뜨려 죽게 하고는 이를 보며 크게 웃었다.[4]

궁녀들에게는 벌거벗고 북을 치게 하거나 나무 위에 묶어두고, 30일이 지나서야 옷을 주는 등의 가혹행위를 했다. 굶겨 죽이거나 이리에게 물려 죽게 하고 이를 보며 크게 웃는 등 무고하게 죽은 사람이 35명이었다. 심지어 궁인을 벌거벗겨 짐승과 교접하게 하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4]

이러한 패륜과 잔혹성 때문에 국내에 악명이 퍼지자, 유건은 주살당할 것을 두려워해 황제를 저주하고 반란을 모의했다. 이웃 회남왕 등이 모반하려 하자 이들에게 병탄당할 것을 우려해 병기를 만들고 군수 물자를 준비하는 한편, 옥새와 장군 인수 등을 만들고 월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기도 했다.[4]

결국 반란 모의가 발각되어 조사를 받았고, 유건은 자결했다. 왕후 등은 기시에 처해졌으며, 강도국은 폐지되어 한나라에 편입되었다.[4]

4. 가족 관계

관계이름 및 설명
아버지유알
어머니이름 불명, 유정국의 어머니와 동일인.[1]
이복 형제유정국
누이유징신(劉徵臣) - 왕신 또는 왕충[2]의 며느리였다가 부친상을 위해 귀향, 유건과 간음.[1]
성광(成光) - 유건과 함께 황제를 저주, 발각 후 기시.[4]
양분(梁蚡)의 딸 - 아버지 강도역왕에게 바쳐질 예정이었으나 유건이 가로챔.[1]
요희(淖姬) 등 10여 명 - 강도역왕의 생전 총애받던 미인들, 장례 전 유건과 간음.[1]
유세군 - 원봉 연간에 오손으로 출가.
조카유궁 - 광세왕(廣世王)에 봉해짐.


참조

[1] 문서 여관
[2] 문서 왕신 (전한)
[3] 문서 유여 (사람)
[4] 한서 한서 권53 경십삼왕전제23 https://zh.wikisourc[...] 반고
[5] 문서 波
[6] 한서 한서 권14 제후왕표제2 https://zh.wikisourc[...]
[7] 문서 유명 (제천왕)
[8] 문서 작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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